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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어느 부목사 사모의 호소] 2003-12-20묻고답하기-

어느 부목사 사모의 호소=(퍼온 글) 김인찬 2003-12-20 12:35:38, 조회 : 193, 추천 : 9
[어느 부목사 사모의 호소]=퍼온 글 [어찌해야 되나요?]
이리 저리 고민하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하소연할때가 없어 글을 올립니다.혹,필요없다 싶으면 본부에서 지우셔도 됩니다. 위로 받고 싶습니다.지금껏 저희 남편은 10년 넘게 이곳 저곳을 다니며 부교역자 생활을 해 왔습니다. 인간적인 꾀나 인맥을 쓰지 않고 열심히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하지만, 늘 상처받는 것은 부교역자는 담임 목자의 사랑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데 성도는 사랑해도 밑에서 목사님을 바라 보며 돕는 사역을 하는 사람에게는 냉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교역자 생활하면서 힘든 면 중에 하나인 것 같습니다. 성도들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해 줬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말 한 마디라도 힘들지, 수고했어. 등등 그리 힘든 것도 아닌데 꼭 인색하게 하시는 것인지.....부교육자 생활도 하나님의 사역이며,필요한 사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너무 힘들어서 ........... 담임 목사님은 자신 사례비나 모든 것은 다 챙기시면서, 밑에 있는 부교육자는 당연히 고생하려니............요즘에 젊은 목사님들은 똑같이 반으로 사례비를 나누던지 아니면 식구수대로 나누던지 한다고 하시던데 그 얘기가 참으로 부러워요....제가 굳이 그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예요. 개척 교회나 작은 교회에서는 힘들다는 것은 알아요. 그러면 말 한마디라도 힘들지라든가 따뜻하게 대해 줬으면 하는데, 당연히 고생해야지,라는 생각,사모가 직장 생활이라도 하려고 하면 그것도 못하게 막으시고,천국 법에 부교육자는 고생을 해야 된다고 나와 있나요... 네.가르쳐 주세요.
현재,100명이 넘는 교회에 년 개월차입니다. 말이 부목사이지,새벽 차량 운행 교회 사찰, 기사,사무 간사등등 여러 일들을 부부가 감당하고 있습니다.올 해동안 너무 피곤해 입병이 나서 한달에 한번이상은 병원에 다닐 정도였습니다 2002년10월에 와서 열심히 일했고, 2003년은 온지 얼마 안되서 사례비가 그러러니 했는데, 2004년 예산에도 별 진전이 없습니다. 사례비가 오르지 않았으면 사택(제주 특성상 제주 모든 교회는 사택을 줍니다)의 생활비(기름값)이라도 감당해 주기를 바랬는데, 실은 부흥회 때 부흥 강사 목사님한테는 해 준다고 얘기를 했거든요,그래서 은근히 기대했는데, ................. 제가 믿음 없는 사모인가요. 못난이 사모인가요. 당장 그만 두고 제주 밖으로 나가자고 하고 싶습니다. 경제적인 능력이 못되어 개척은 힘이 듭니다. 그러면 사역을 그만 둬야 합니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예산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다면 혹 모릅니다.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생활비는 담임 목사님의 1/3의 수준이며 다른 곳에 들어가지 곳은 아끼지 않고 왜 꼭 부교육자 생활비를 아낍니까? 담임 목사님이 나서서 부교육자를 챙겨 줘야 하는데, 남 몰라라이고,전도사님은 파트니까,다른 일로 수입이 있습니다.우리가 너무 맹꽁이입니까? 어찌 해야 합니까? 답답합니다. 참으로 힘이 듭니다.오늘이 빨리 지나가고 잠도 자고 내 마음이 안정이 됐으면 합니다.이 글을 쓴 이유 중에 하나는 제발 부교육자에서 사랑을.....(담임 목사님에게 부탁합니다. ) 담임 목사님에게 말하라고요, 얘기하고 싶지만 얘기한 입장이 못 됩니다. 저희 담임 목사님은 부교육자들은 불만이 있으면 당장 교회를 나가라고 단에서 지난 번에 몇 번이나 말씀하신 분이라....성도들에게는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제발 이 글을 읽으시는 목사님들 밑에서 일하는 부교육자들에게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아니 성도들에게 사랑을 표현한 것처럼만 해도 좋겠습니다. 추운 겨울 부교육자들이 힘들게 지내지는 않는지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생활비만 챙기지 말고, 부탁드립니다.
위로의 글=[목사 사례 통일은 성경적이다]
교회가 주님의 것이며 교회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교회의 종도 모두가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종들이 스스로 차별하여 각각 대우받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사례가 천차만별인 것은 성경적인 원리에서 멀리 떨어진 경제관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는 천만 원 가까이 되는 자도 있고 어떤 이는 이십만 원으로 사례가 이렇게 차별이 크게 된다는 것은 주님의 같은 종들로써 할 수 없는 일이다.같은 안수와 성령에 의해서 같은 세움을 받은 자들이 목사이다.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은 차별이 있을 수 없고 같은 공동체의 실천을 먼저 보여주어야 된다는 것이다. 주님의 종들은 스스로 자신 보다 남을 더 섬겨야 된다는 것이 성경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본적인 상식이라면 이러한 상식에서 벗어난 것은 어쩌면 지금의 교회가 빛을 잃고 있다는 것과 연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조건 사례를 통일시키자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종들이 주님 안에서 합리적으로 공정하게 배분되어야 마땅하다. 세상의 논리는 많이 가진 자가 나올 수 있어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서는 그렇지 않다. 가족 수 그리고 활동에 의한 비용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책정하는 사례의 통일이다. 가끔 교역자들 중에 비관 자살하거나 특히 교인을 두고 싸우는 목사들이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이는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비극이며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옆 교회에서 교인을 뺏어갔다고 불을 지르는 목사가 있는가 하면 교인을 두고 양쪽이 나누어져서 싸우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얼마나 깊숙하게 세속화 된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세속화에 대한 자기 개혁과 그리고 의지이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얼마든지 개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을 탓하기 전에 현실을 개혁해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도 배를 움켜쥐고 고통 받는 형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이 땅에는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는 수없이 많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한다.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용기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을 포기하는 삶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목사로써 가장 큰 개혁은 자기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례가 천차만별인 지금의 상황이 성경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들은 같은 안수와 성령에 의해서 세워진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감독하는 자들이다. 목사의 직분은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생계가 유지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것인 헌금이다. 목사가 스스로 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것을 과다하게 독식하는 것은 성경적인 원리가 아닌 것이다. 어떤 이는 천만 원이 된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실재 어떤 이는 십만 원도 안 되는 것으로 사례가 주어진다는 소리에 우리가 얼마나 세속화된 교회가 된 것을 확인해야 된다. 세상의 논리는 가능하나 교회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회사는 사장이 있고 그리고 큰 회사가 가장 많은 수입이 되며 작은 회사는 적은 수입의 사장이 있는 것같이 교회가 마치 세상에서 주식회사와 같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돈과 권력과 명예로 사람이 차별된다는 것이다. 목사들은 이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이는 세속화의 극치인 것이다. 높은 자리에 가려면 많은 돈을 들인 것이 얼마 전이고 큰 교회가 아니면 교계에서 얼굴도 내밀지 못하는 기형적인 교회가 된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세상에 의해서 교회가 세속화 된 것이다.교회 이제는 사례 통일이라는 것을 주님의 명령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믿음으로 개혁해야 한다. 같은 주님의 종이면서 육적인 가족보다도 더 진한 영적인 가족이 된 목사들은 스스로 세상의 논리에 더 이상 합리화 시킬 필요가 없다.
우리의 당당한 것은 주님의 종이라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의 논리대로 세상에서 큰 회사의 사장이 많은 대우를 받고 작은 회사의 사장은 그렇지 않다는 이 논리가 적어도 교회에서는 통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이것이 통하게 되자 성경에 있지도 않는 제도를 만든 것이다. 목사 부목사 파트목사 전도사 등으로 나누고 사례가 그러한 계급에 의해서 책정된 논리는 마치 회사의 사장 부사장 과장 대리 등으로 나타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교회의 세속화에 의해서 교회가 오늘날 목사들의 타락과 교회의 타락으로 이어진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교회는 큰 교회의 목사에 의해서 좌지우지 된 것이 사실이다. 목사들의 사례의 통일은 교회의 개혁에 대한 본질적인 것과 연관된다는 것이다.
목사들 중에는 생계가 힘들어서 노동에 나가는 자가 있으며 사모는 부업으로 신문 배달하거나 과외학습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자들이 대단히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모는 아이의 분유가 없어서 혼자 울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사모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현실이 결코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이다. 목사의 최소한의 자존심과 양심은 썩어져 가는 양식을 나눌 수 있는 용기이다.
어떻게 사례가 천차만별인 것이 정당한 주장인가? 성경적인가? 신학적인가? 성직자로 말하면 도덕적인가? 세상에서도 남보다 먼저 희생할 줄 아는 것이 부모라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사도들은 마치 자녀를 양육하듯이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교인에 대해서 희생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도 하나님의 같은 종들이 서로 사랑의 실천인 나눔을 베풀지 않고 서로 경쟁하고 높고 낮음이 된다면 이미 세상에 물든 하나님의 종들이 된 것을 시인해야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만약 핍박이 오면 먼저 고난의 불속에 들어가서 순교함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참 믿음을 보일 주의 종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주의 종들이 세상의 논리가 마치 신앙의 논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세속화된 주의 종들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려는 것이 우리의 길이다. 세상의 물질과 명예와 권세에 연연하지 말자. 성경은 사례의 통일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미 통일된 경제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목사 사례의 통일은 교회개혁의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 질문이다.교회의 개혁은 평신도들은 결코 할 수 없다. 성경에 의해서 교회가 개혁된다는 것은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인 목사들로 교회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 타당하다. 교회의 타락과 그 관계는 목사들과 먼저 깊이 관여된다. 목사가 살면 교회가 살고 목사가 죽으면 교회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 되므로 교회는 그 안에서 차별이 없다고 목사들은 가르친다. 그러한 목사들이 스스로 차별해서 사례를 천차만별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스스로 참된 지도자상을 포기하려는 세속화의 영향이다. 목사들은 같은 안수와 같은 하나님의 종이다. 그들은 자신의 직분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고 부른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러므로 그 종들이 그리스도로 한 몸이 되어야 그들의 가르침이 정당하게 교인들에게 전달된다는 것이다.
==========================================================================[re] 부교역자의 임무는 교인들을 일부 데리고 나오는 일입니다. 이근호 2003-12-20 16:00:37, 조회 : 199, 추천 : 11
임시적으로 간주해야 될 직책을 너무 오랫동안 버티고 있으니 문제됩니다.
담임 목회자나 부교역자는 다같이 복음을 제대로 전하면 평화롭게 교회를 둘로 나누면 되고,(교인들 끼리의 협의하에 지리적인 특성을 감안해서)
담임 목회자가 복음을 모르는데 부교역자가 복음을 알면,
더욱 더 교인들로 하여금 그 교회 더 붙어있지말라고 독촉해야될 중차대한 전도 사명을 갖고 있고, (왜냐하면 주님은 복음으로 심판과 구원을 행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담임목회자가 복음을 아는데, 부교역자가 복음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면,
월급이 문제가 아니라 아예 학비내고 신학교 다닌 양으로 여겨야 하고,
담임 목회자도 복음에 관심도 없고, 부교역자도 관심이 없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점치는 법을 공부해서 점집으로 개업하면 수입이 지금 더나을 것입니다.
##############################################################################################Merry Christmas~ ^^ 이희진 (Homepage) 2003-12-22 08:42:41, 조회 : 168, 추천 : 12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네요. 이 즐거운 크리스마스에는 좀 기쁜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뭐래도 크리스마스는 즐거운 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가지고 시시비비 따지며 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는데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절기 주신 의미에 대해서 한 번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절기를 주셨다면 우리는 그 절기들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바라 봐야 할 것입니다. 구약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절기를 주신 것은 정체성을 확인하라는 의미에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절기 그 자체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절기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도하심을 깨닫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킬 때 실패한 자들은 유월절 그 자체에만 의미를 두고 지킨 자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유월절을 통해서 오실 메시아를 바라본 자들은 하나님께서 유월절 주신 의미를 바로 깨달은 자였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외의 많은 절기들도 마찬가지죠.
신약을 지나오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사실 절기는 더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절이니 성탄절이니 추수감사절이니 하는 절기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절기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시는 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 성탄절, 추수 감사절... 이 절기들은 지키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이 절기들은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성경을 근거해서 만들어진 절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시대는 지키라고 주신 절기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기념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안증회라는 자들은 그 말씀의 의미는 곧 유월절을 계속 지키라는 것이라며 유월절을 회복하는 것이 마지막 종교 개혁이니 하면서 죽어라하고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면서 사기 치며 다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념하라고 하신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기념하라고 하신 것은 지키는 것과 관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죽으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탄절? 12월 25일에 예수님 태어나신 날이 아니라는 것은 요즘 주일학교 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성탄절을 없애는 것이 답이 될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날은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을 되새기는 날로써 지낸다면 우리에게 12월 25일은 아주 소중한 날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 예수님의 오심은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날은 기쁨으로 보내는 가운데 우리를 위해 주님의 살과 피를 흘리신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점검 받는 그런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느 한 날이 더 소중하고 어느 한 날이 덜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성탄절을 없애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을뿐더러 오히려 날의 의미를 더럽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365일 어느 한 날에도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과 그 의미를 놓치지 않고 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전해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 하루하루는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에게 있어 12월 25일은 점검 받는 날로써 존재하면 족합니다. 물론 혹시 잊어 버리고 성탄절을 지나쳐 버렸다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그 날이 더 특별한 날은 아니니까요. 혹시 부활절 계산을 잘 못해서 지나쳐 버렸다고 해서 저주받거나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날들에 강단에서 이상한 말들만 쏟아내 버리는 자들이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크리스마스라는 날을 통해 예배를 한 번 더 드릴 수 있음을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날을 통해 예수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그 오신 목적을 잘 깨달아 우리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점검 받는 그런 날이 되었으면 더욱 좋겠습니다. 12월 25일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니 아니니 없애야 하느니 이방신의 축제일이었다느니 하면서 허무한 시간을 보내지 말고 오직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감사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을 더욱 소망하게 되는 그런 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거듭거듭 강조하고 싶은 것이지만 제도를 바꾸거나 방법을 바꾸는 것은 절대로 개혁이 될 수 없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2:14) ==========================================================================[re] 그렇다면, Happy New year입니다. 이근호 2003-12-22 09:19:34, 조회 : 163, 추천 : 10
문제는 돈입니다.
마지막 때에 어떤 구실을 달아서라도 자주 복음 안에서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빙자하여
목사나 장로들이 자꾸 돈타령을 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단계가 다음 세 단계입니다.
1. 내년도 비젼을 이야기하고
2. 협조하는 자는 '주의 일'을 하는 자라고 부축이고, 협조하지 않는 자는 악마의 시험에 빠진 자라고 구박하고
3. 협조하는 표시는, 돈 있는 자는 돈으로 떼우고, 돈 없는 자는 몸으로 떼우고,
이렇게 목사가 나가면,
배후에 있는 장로들은 속으로 " 그 놈 목회 잘하네. 내 년에 봉급 좀 올려줘?"하고
음흉한 살인미소를 띠우고.
제가 보기에는
예수님 마음에는 도저히 들어 있지 않는 교회상입니다.
주님에게는 절기도 중요하지 않고 주일도 중요하지 않고
'지금', 오직 '지금'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마지막날로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re] 돈 챙기려고 하는 자들은 어차피 교회가 아니죠. 이희진 (Homepage) 2003-12-22 10:50:36, 조회 : 158, 추천 : 11
그런 곳은 어차피 교회가 아니니까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아낙 자손들처럼 척결 대상이죠. 그들은 마귀와 동업해서 사기치는 집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늘 날 그런 곳이 너무 많다는 것에 있지만 말이죠.
중요한 것은 그런 자들이 크리스마스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목사님의 말씀처럼 그 날에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겠죠.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 하루하루는 너무 소중합니다. 세상의 종말도 오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세상 종말 계산하다가 자신의 종말은 준비하지 못한 채 어리석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으로 살아갈 자들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소중하고도 귀하게 살아가면서 내게 주신 사명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깨달아 그 역할을 잘 감당해야할 자들입니다.
더 이상 날은 우리를 얽매이게 하거나 또는 자유분방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늘을 실패하면 다 실패하는 것이기에 내게 주어진 오늘 이 하루가 우리 인생의 실패를 좌우하는 날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하며 홍해를 건너 왔으면서도 마라에서 실패하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회들의 목소리가 더 큰 이 시대에 우리의 할 일은 오직 복음만 전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아닌 자들을 보면서 억울해 하다가 실족할 필요도 없고, 개혁의 대상이 아닌 자들에게 개혁의 내용이 아닌 것을 가지고 개혁의 방법이라고 제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도 없으며, 비판의 가치도 없는 자들을 향해 비판하는데 시간 낭비할 필요는 더욱 더 없습니다.
다만 선과 악의 분명한 기준이 되는 복음만 전하면 들을 자는 듣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돌아 올 자들만 돌아오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터가 무너진 곳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아닌 곳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 곳에 아직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그 한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한 사람을 찾아내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이며, 그들이 돌아오는 것이 부흥입니다.
오늘도 그리고 크리스마스에도 그 한 사람을 찾는데 주력하시는 목사님이 되셨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합니다. 그리고 이 곳을 방문하는 많은 분들도 그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리겠습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하솜이에게 자동차를 사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하솜이 아빠가... ^^
##############################################################################################이근호 목사님에게 묻습니다 김병구 2003-12-22 23:56:12, 조회 : 190, 추천 : 7
이근호 목사님에게 질문합니다.
님께서는 한국의 거의 모든 교단을 이단이라고 주장하시며, 십자가의 은혜와 공로 만을 강조하고 마치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시는데, 그렇다면 주님께서 주여 주여 부르는 자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는 산상보훈 중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그리고 다음의 말씀들은 모두 내주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인간의 행위가 있어야 함을 가르치고 계시는 것으로 생각되는 데, 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갈 5: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누가 9: 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베전 1: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그리고 바울 사도의 다음의 말씀은 어떻게 묵상하십니까?
고전 9: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re]왜 이곳에 있는 숱한 글들을 읽지 않으려고 합니까? 이근호 2003-12-23 07:43:49, 조회 : 195, 추천 : 11
이미 그 점에 대해서 믾고 많은 글과 길고 긴 글들을 남겼습니다.
마음만 있다면 읽어보시면, 그런 의문점은 싹 가십니다.
1. 하나님의 명령과 말씀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통용되는 지시와 명령의 관계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명령하고 지시에 따르면 되는 관계가 아니라 애초에 인간을 피조물로 만든 이유와 목적에 관해서 인간이 잘못된 형편에 처해 있음을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것은 인간의 종교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 내면은 자신의 구원과 영생 확보를 위한 집념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을 만한 자격이나 입장에 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인간 면전에서 생명나무 과일은 철수된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 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창세기 3:22)
2. 성령님이 임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자신이 피조물로서의 이유와 목적을 모르게 됩니다.
성령님이 임하게 되면, 비로소 그 인간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증거하기 위해서 채택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일이 인간에게 임할 때는, 구약에 의해 오직 '언약적'으로만 임합니다.
즉 인간이 행할 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 만이 행할 수 밖에 없는 작업장으로 참여 받게 되는데,
언약의 구조는 다음의 두 가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죄'요 다른 하나는 '은혜성'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기가 택한 백성 속에서 이 언약성, 즉 '죄성과 은혜성'을 폭발시키는 작업을 진행시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노리는 것은, '예수님의 자기 이름'만이 온 우주의 주가 되기 위함이죠.(빌립보서. 2:5-11)
그러면 성령님이 오게 되면 어떤 식으로 그것이 가능합니까?
성령님은 오로지 십자가의 의미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은 '언약' 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오직 언약만으로 일하시는 분입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 안에서는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에 의해서 늘 십자가의 의의만 터지게 됩니다.
그것은, 완벽하고 완전한 최종적이고 최고 수준의 거룩을 성도에게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사도 베드로의 명령이든지 사도 바울의 명령에 나오는 모든 명령들이 쏟아지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자기 딴에 타인보다 훨등한 생활을 영위한다고 까불다가 성령님에 의해서 최고 수준의 명령에 도달되게 되면 입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한 마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고백 뿐입니다.
그런데 성도는 이것을 압니다. 이미 은헤로 구원되었기에 이토록 자기 죄성을 절감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자기 일에 성공하셨습니다.
즉 언약대로 자기 성도 안에서 '죄'와 '은혜'를 같이 드러내신 것입니다.
3.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은 언약에 의해 두 부류를 지정했습니다.
하나는 옛언약에 의한 아브라함 자손의 부르심이요, 신약 때는 새언약에 의한 이방인의 부르심입니다.
따라서 4 복음서를 해석할 때와 바울 서신을 해석할 때는 예수님께서 일단 먼저 누구보고 어떤 취지에서 말씀하셨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흔히 이방인들은 '죄'라는 것이 결코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종교적에 관한 결함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 오로지 예수님과의 무(無)관계성이 죄임을 알게 됩니다.
즉 산상설교를 이해할 때는 반드시 사도 바울이 어떤 차원에서 '義'를 논하고 있는가와 연결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의에 대한 개념이 형성됩니다.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이 될 것 같아서 올립니다. 서경수 2003-12-24 15:07:29, 조회 : 132, 추천 : 10
(이근호 목사의 2차 중국방문 때 행해진 조직신학 강의 중 일부입니다. 이 부분은 부산에 계시는 박병규전도사님이 녹취하신 부분입니다.)
제가 인간의 행함과 관계없이 된다고 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이 목사는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더라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이 목사는 뭐도 하지 말라, 뭐도 하지 말라, 안 해도 된다, 안 해도 된다. 자꾸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한다고 저를 오해 합니다. 저는 행함과 상관없이 구원 받는다고 했는데 그 쪽에서는 그렇게 이해하더란 말입니다. 그럴 때 제가 가장 답답합니다. 정말 답답합니다. 경건치 않은 자를 의롭다 하신다는 것이 로마서 4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해도 그 행위와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4장 4절에서 8절의 말씀을 보시면 여기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어떤 행위를 해도 관계없이 그 죄와 불법이 가리움을 받고 용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에 관계없이 말입니다.
##############################################################################################산상수훈 8복의 이해 이석규 2003-12-23 04:58:00, 조회 : 249, 추천 : 17
열심히 살아가며 집 한 채를 장만하고 현찰을 1억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동네에서 삶의 모범이자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10억을 가진 사람이 그 동네에 나타났습니다. 그가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사람들은 곧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이 어떻게 돈을 10억이나 모았는지 열심히 광고하고 다녔기 때문 입니다. 그 후 그가 지닌 10억은 부러움과 경탄의 대상이 되었고 그 동네에서 슈퍼스타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가 돈 번 방법을 따라하는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의 영광이 한 평생 갈줄 알았는데 100억을 가진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100억을 지니고 있다는 것도 다른 사람이 말해주어서 알게 되었고 그가 100억을 모으기까지 단 한 번도 남을 거꾸러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마을사람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은 일시에 초하이울트라슈퍼캡장이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보기에는 그에게는 없는 것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웬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도 자신이 보기에도 모두가 부러워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슴을 자타가 공인하지만 막상 그 부자는 홀로 있을 때면 뭔지 모르지만 부족함을 느끼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진짜 부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진짜 부자를 만나고나자 자신은 정말 가진 것이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극심한 거지임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동했습니다. 그 분에 비하면 자신의 가진 것은 가진 것이 아니라 다 허상임을 깨달았기에 자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할 수 없는 극심한 거지임을 자연스레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했으나 사실은 마음 속은 교만으로 차있었습니다. 어떤 사람하고 비교해도 자신은 풍부했기에 말은 안했지만 "네까짓 것들이 감히 어디 내게?" 라는 마음이 숨어 있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그가 남과 비교를 했을 때는 더할 수 없는 부자였으나 그 분을 만나고 난 후 그 분이 어떠한 부자인지를 깨달은 순간 그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그 분이 도와주지 않고는 살아가기는커녕 일어날 수 조차 없는 극심한 거지임을 깨달은 것 입니다. 그가 사람들에게 그 분을 만나고 난 후 자신이 완벽하기 그지없는, 그 분이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바로 설 수 없는 거지였다는 고백했을 때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오, 슈퍼울트라캡장하이초초슈퍼스터여" 부르짖으며 그가 만난 진정한 부자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자마자 자신이 극심한 거지임을 깨달았습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별거 아니구나하고 비웃음을 품고 돌아섰습니다. 자신이 극심한 거지임을 깨달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상대적 비교에서의 우월감을 즉시 버리고 그분과의 절대적 비교에서 자신들이 극단적 거지임을 즉시 깨달은 것 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풍요와 부요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계속 부자임을 유지하려 들었습니다. 그 분과의 절대적 비교에서 자신이 극단적 거지임을 비교할 눈도 없고 마음도 없었고, 비교하려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자신의 풍요와 부요함을 유지하려 들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백 억을 가졌던 이사야가 생각납니다. 그는 웃시아 왕의 사촌형제로서 자신의 깨끗한 성품과 깨끗한 권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개혁하려 들었으나 죄지은 자들을 자신이 가진 것으로 보았을 때 부패의 극심함을 보았고 자신의 힘으로 개혁하러 들었지만 이미 온 우주에 가득차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본 순간 극단적 가난함을 느꼈고 입술이 죄지은 것을 알고 두려움을 가졌습니다. 자신의 영성을 부패한 자들이 아닌 하나님의 영성에 비견했을 때 그는 자신이 극단적 거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입술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숯불로 지져주어서 그의 죄를 씻겨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선물로 주신 은혜로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백억의 부자 바울큰성님은 십자가의 보혈에 자신의 영성을 비견했을 때 처절한 거지임을 알았습니다.
심령의 가난함은 가난한 마음이 아니라 영이 가난한 것입니다. 여기에 쓰인 푸토코스란 단어는 상대적 거지가 아니라 극단적 거지, 즉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지, 즉 영(靈)이 극단적 거지임을 말해 줍니다. 하나남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비교한다면 어느 누가 극단적 거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정말 곤비한 자다"라는 바울의 탄식은 자신이 극단적 거지임을 알았기에 나온 탄식이었겠지요.
영의 포만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8복은 아람어로 쓰여져 있다고 배웠으며 아람어는 문법적으로 동사가 없기에 팔복은 감탄문이라 배웠습니다.
====아 너는 정말 영이 가난하구나.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 너희 것이구나.=====
자신이 영이 부요하다고 느낀다면 천국이 내 것이 아니구나라는 깨달음은 그대로 두려움으로 다가 옵니다.
영어의 축복 bless는 피 blood에서 왔다는군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를 생각하면 참으로 의미가 깊어집니다.
=====애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아 너는 정말 애통해하는구나. 네게 위로를 주마=====
진짜 복 있는 사람은 영의 극단적 가난함에 저절로, 당연히 죄에 대한 애통과 영성에 대한 애톰함, 신앙에 대한 애통 함, 말씀을 아는 것에 대해 부족함 등 모든 것에 대해 애통해 합니다. 그 애통함은 하나님께서 친히 위로해주시지 않으면 결코 씻어질 수 없는 애통함 입니다. 예수님이 받을 것은 우리의 상한 심령 밖에 없습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기에서의 온유함은 단순한 온순, 대개 겸손으로 표현되는 온순함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온유함은 "말 타고 다닐 수 있는 힘"을 의미 합니다. 바보같이 보이는 온순함이나 겸손함이 아니라 내재된 내적인 힘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있으면서도 있는 척하지 않는 사람, 가장 크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어도 내세우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극단적 거지로서 애통함으로 깨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풍부한 은혜를 받아도 지식을 얻어도 드러내지 않고 자랑하지 않는 사람 입니다. 이런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현실적인 삶에서 받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배우고 풍요한 사람이 겸손할 수는 있으나 이런 풍요한 상태에서 그래도 극단적 거지임을 인정하고 계속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남아 있기가 쉬울까요? 끝날까지 변함없이 내 의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의에 주리고는 소유격이 아니라 목적격으로 쓰였습니다. 끝날까지 하나님께 구해야할 우리의 목적 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배부를 수 있습니다. 내 의를 가지고 있는 이상 절대 우리는 배부를 수 없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같지만 조금은 다른 뜻이 담긴 긍휼을 은혜에 비교해서 말을 해보면 긍휼은 죄를 지은 우리가 재판관 앞에 섰을 때 재판관이 "죄 없음" 판결을 내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도 판사가 "무죄"라고 선언해 주는 것을 긍휼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우리를 죄인이라 고발할 때 예수님께서는 "아냐. 나의 십자가의 보혈로 너는 무죄야." 이 위대한 선언으로 우리는 죄인이면서 죄인이 아닌 의인이 된 것입니다. 은혜는 죄인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은 것만도 황송한데 거기다 상급을 더해 주는겁니다. 은사를 주시고 나타내어 올바로 사용해 교회에 덕을 세우고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이 땅에서 해야될 상급 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여기서의 마음은 mind 말 그대로 마음 입니다. 헌데 이 구절에서 말하는 청결은 카타로스로 쓰여졌습니다. 카타르시스, 최고조의 희열이라는 말이 카타로스에서 나왔습니다. 최고조의 희열을 느낄 때는 희열 그 자체만 있지 다른 감정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청결은 대체로 마음이 깨끗함으로 이해를 하는데 여기의 청결은 그런 깨끗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카타로스는 혼합이 안된다는 말 입니다. 즉 비혼합입니다. 즉 마음이 두 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도 있고 저 마음도 있는 그런 상태, 마음에 진리도 있고 비진리도 있는 그런 혼합이 아니라 오직 절대적으로 복음만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카타로스는 아에 혼합이 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카타로스이어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석을 할 때 하나님의 의를 주리고 목마른 상태에서 배부를 것임이요의 경지에까지 왔는데 그만 교만해져 마음이 더러워져 하나님을 볼 수 없다라는 해석이 아닌 것입니다. 우린 늘 적당히 타협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 영적 상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영적으로 살아났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가만히 보면 늘 뭔가 혼합되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으십니까?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그렇게 쓰여져 있지 않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있나니, 다음에는 때문에" 라는 접속사가 들어 있습니다. 원어는 있나니하고 끊어져 있는데 때문에라는 접속사가 있기 때문에 너는 가난하기 때문에 천국이 네 것이다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너희가 화평케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죠. 불편케하는 자, 분란을 일으키는 자는 하나님의 일컬음으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전제가 하나 있는데 예수쟁이들은 이 8개 중에서 하나라도 되어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쟁이는 이 8가지를 다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복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되지를 않고 합니다. 그래서 어렵다는 겁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중 하나라도 안되는 것이 있거나 받아 들일 수 있는거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구분해버린다면 분명 "너는 예수쟁이가 아니야" 라고 산상수훈 강해해석을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믿을만하고 존경하는 학자의 해석이니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되느냐도 아니라는 사실 입니다. 8복의 문장 구조는 감탄문으로서 이런 사람이라는, 아예 이런 존재이어야만된다는 사실 입니다. 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런 존재야하고 감탄하고 선언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너는 참 복이 있구나라는 주님의 감탄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너는 이런 존재이구나하는 위대한 선언 입니다. 결코 이런 존재가 되기 위해 무엇인가의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너는 이미 존재이구나라는 위대한 선언이라는 것이지요. 이 점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기의 화평은 예수님 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어느 누가 하나님과 사람을 화평케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화평케하는 사람은 정말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의 특징 중의 하나가 있습니다. "나는 너희와 틀려"라는 그들의 주장이지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도 하나님 일을 하다가 무슨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라고 말들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의인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 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핍박 받으면 천국이 내 것이라는 자가당착적 자위성이 아닌 것이지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네가 죄인임을 잊지 말고 내 은헤 안에 계속 거하라는 말씀이지 무슨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해야될 의무로서 진 그런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실 의인이 아니면 요즘 세상에서나 지난 세상에서나 누가 그를 핍박하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의인인 존재이기 때문에, 8가지를 다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주는 것 없이 미워서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 로마에 의해 핍박을 받을 때 왜 받았습니까? "이상한 놈들" "이해할 수 없는 놈들" "밀교같은 놈들" "살이나 떼고 피나 마시는 흡혈귀같은 놈들" 이런 오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10절까지는 너희의 존재는 복수로 쓰여졌기 때문에 "너희들은 모두가 주님이 감탄을 선언하는 존재"이어야한다는 모두가 되어진 존재이지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11절의 너희는 단수로 쓰여져 있습니다. 동사가 있고 단수로 쓰여졌기 때문에 제한적 입니다. 재수 좋으면 전혀 핍박 받지 않고 예수님 앞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기에 이렇게 개인적의 상황을 구분해서 단수로 쓰여진 것 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8가지 주님의 선언되는 존재가 우리들 모두이어야 합니다. 8복으로도 9복으로도 갈라지는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만 우리 모두가 가져야만 되는 8가지 존재를 묶어서 선포하시고 그럼으로 인해서 핍박 받는 자는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함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는 약속을 주셨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13절 이하 7가지 문단으로 나누어져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해석이 나옵니다.
13-16 17-20 21-26 27-32 33-38 38-42 43-48 이렇게 7문단으로 나우어 적용해 주십니다. 성경에서의 7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많은 성경학자들의 해석 입니다.
13절에 그 유명한 "소금 되라, 빛 되라"가 아니고 이미 소금이니까 맛을 잃지 말아라 빛이니까 빛을 잃지 말아라하는 적용이 충격적으로 나옵니다.
예수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8가지 존재임을 감탄으로 선언해주시는데 그넘의 한계 투성이인 육체에 갇쳐 있는터라 그 한계를 너무나 잘 아는 바울큰성님은 날마다 쳐서(이는 방망이로 친다는 의미를 지녔다 함) 자신 몸을 복종 시켰습니다. 빨리 하늘 나라로 가고 싶은 소망이 너무나 컸지만 육체에 갇쳐 있는 동안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해야되기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육체를 따라가는 욕망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토로를 합니다. 그러므로서 은혜를 벗어나면 즉시 골로간다는 증거들을 그의 서신 전부를 채우고 있습니다. 제 깨달음에는 육체의 성화는 없더군요. 그러니 육체의 영화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성경에서 하지말라고 규정된 명령들을 당연히 지켜야먄되는 명령들이고 당연히 하기 싫은 죄들인데 죄 안 짓는 명령들을 지킨다고 무슨 성화이겠습니까? 영성이 점점 더 깊어지면 죄악들은 점점 더 치떨리게 자연히 싫어 집니다. 하나님의 영과 벨리알의 영이 함께 섞일 수가 없는데 죄가 싫어지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해지는거지요. 명령은 절대적으로 당연히 지켜야되는 것이지 그것을 지켰다고해서 무슨 상급을 받는 것에 대한 조건은 결코 될 수 없습니다. 바울큰성님처럼 육체로는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은혜속에만 거해야 된다라는 고백을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와 성령 안에서의 싸움일 뿐이고 은혜로 이겨내야할 죄의 대상이지 거룩해져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입니다.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러야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없습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성화를 거쳐 영화에 이르지 못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의 전체를 관통하지 않고 구절구절을 떼어 놓고 보면 필연적으로 성화 영화가 조건으로 등장 됩니다. 그걸 계속 주장하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서 구원해 주시고 확증 보증해주신 우리 대장 예수님을 요즘 말로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한 번 받은 구원은 취소됨이 없다고 배웠는데요.
==========================================================================[re] 편견을 없애 주는 좋은 글이십니다. 이근호 2003-12-23 07:51:21, 조회 : 146, 추천 : 11
우리 모두 예수님을 두 번 죽이는 짓을 하지 맙시다.
(실은 지금도 교회주의자들이 성도를 몹시 싫어하여 두 번 죽이는 짓들을 하고 있습니다.)
##############################################################################################글세요? 이 글에 대해서 조언을 부탁드립니다(수정한 글) 김인찬 2003-12-23 16:23:56, 조회 : 114, 추천 : 12
이 글은 개인의 소견이며 성경신학적인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사람의 구조 이분설인가? 삼분설인가?]=보수주의 이분설 채택
사람의 구조를 우리는 이분설 혹은 삼분설 등으로 나눈다. 이러한 신학에 의해서 어느 한쪽이 강조되기도 한다.흔히 보수주의에서는 이분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주장은 성경적인 것이다.
이분설은 영혼과 육으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영혼, 육 통일체를 주장하고 있다.(후크마)결국은 영혼은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혼과 육으로 나누는 이분설은 사람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나누는 특징이 있다. 살아있는 사람을 두고서 나누는 것은 영과 혼과 육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영혼과 육으로 분리되어 보통 설명한다는 것이다.(육체로 살아있는 자들은 영과 혼이 구분되어서 설명하지 않는 특징이 있음) 이러한 구분은 성경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것이다.결국 이러한 이분설의 성경적인 근거가 살아있는 사람을 표현하는 것으로 나눈다는 것이다.
또 한편 이분설의 근거는 신약에서 죽은 성도들을 영혼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계시록) 이는 죽은 자들이 영으로만 있는 것이 아닌 영혼으로 존재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죽은 자들은 영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영으로써 음부에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이 아닌 영혼으로 있었던 자들 이었다. 그러므로 그들 중에 성도들의 영혼이 깨어서 낙원에 간 것으로 성경은 표현한다.(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첫째부활) 이러한 사람들의 영혼이 예수의 죽음으로 하늘 낙원에 올라간 것이다.
변화산에서 엘리야나 또는 모세가 환상으로 나타난 것인가? 혹은 영으로써 나타난 것인가? 는 분명하게 알 수 없지만 만약에 영으로써 나타난 것이라면 영혼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엘리야나 모세가 나타난 때에도 여전히 새 언약이 오지 않았음)
예수가 하늘로 가실 때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외치시고 영혼이 하늘로 곧 바로 올라간 것이다.(여기에서 주장하는 과정은 영과 혼이 분리되어 다시 결합했을 수 있다는 음부 강하설이 아닌 예수의 영혼이 처음부터 분리되지 않고 하늘에 곧 바로 올라갔다는 것)
그러므로 계시록에서 증거 되듯이 첫째부활은 영혼의 부활이라는 것이다.(영혼이 음부에서 낙원에 이르는 것을 첫째부활) 예수가 오기 전 구약의 성도들은 영혼으로 음부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구약에서 죽은 성도들의 영혼들이 첫째부활(예수의 죽음으로=계시록의 증언)을 할 때에 음부에서 하늘 낙원에 이른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중심에는 예수의 죽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구약에서 죽은 성도들의 영혼을 낙원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구약에서 음부에 있는 불신자의 영혼들은 재림 때까지 음부에 계속 있게 된다. 그러나 구약에서 죽은 성도의 영혼들은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제히 깨어나 첫째 부활로 낙원에 참여한 것이다.(계시록 20장에서 설명하는 첫째부활)
사람이 범죄 하자 영혼과 육으로 완전히 분리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차례대로 회복된다. 먼저는 영혼이 낙원에 이르고(첫째 부활) 그 다음에 재림으로 영혼이 육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는 인위적인 것이 아닌 사람의 구조인 이분설과 연관되어 설명되어지고 있다. 예수는 세상에서 육체의 죄를 해결하고 신자들의 영혼을 음부에 잃지 않도록 하셨고(낙원에 이르게 함) 그 다음에는 재림으로 육체까지 우리에게 입혀줄 것이다.(신천지)
이러한 이해는 예수가 십자가 죽음으로 먼저 사람들의 영혼들을 낙원으로 이끈 것을 첫째부활이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예수가 다시 세상에 올 때에는 예수와 같은 육체를 우리도 입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 둘째부활이다.(성경은 둘째부활이라는 말미 없지만 첫째부활은 둘째부활을 기정사실화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둘째심판이 장차 있다는 것은 이미 첫째 심판이 이루어진 것을 전재로 표현)
예수가 세상에 다시 오시는 재림은 세상에서 살수 있는 육체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시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 올 때에 모든 사람들이 육체를 입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갈라서게 될 것이다.(첫째부활=계시록 20장 5-6절; 불신자들이 음부에 있는 증거=계시록 20장 13-14절)
계시록에서 우리는 그 죽은 자들의 상태를 찾을 수 있다. 계시록 20장 5절과 6절에서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그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운명할 때에 자던 성도들이 깨어난 사건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사건은 구약에서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낙원으로 들어간 것을 의미한다.
계시록은 이들이 하나님의 낙원에 간 것을 첫째부활로 이야기하고 있다.(계20장:5절) 이는 과거 구약시대에 죽은 사람들이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일제히 첫째부활에 참여하였고 신약의 성도들도 이 첫째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죽어서 하늘나라의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신약의 첫째부활이다.(우리도 참여)
이렇게 성도들의 첫째 부활 사건이 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죽은 자들이 예수와 함께 첫째부활로 낙원에 참여한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도 죽으면 예수가 죽음으로 이룬 낙원이라는 곳에 들어간다. 이것이 첫째 부활이다. 이러한 첫째 부활은 우리도 죽으면 해당된다. 그 첫째 부활의 시작은 예수의 죽음으로 이룬 낙원이 준비되었기에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로 이러한 첫째부활에 참여한다면 구약에서 죽은 자들도 예수의 죽음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해야 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예수의 죽음으로 그 때에 첫째부활에 들어가는 것이 살아있는 자들에게도 가능해진 것이고 우리가 실재로 죽으면 사망에서 낙원으로 가는 첫째부활이 있기에 참여한다.
그 첫째부활의 시작이 언제인가? 그것은 예수로 시작된 것이다. 즉 예수의 죽음으로 그가 사망에서 음부에 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서 신약의 성도들은 사망의 결과인 음부가 아닌 육체의 사망 후에 그가 예수가 죽음으로 오르신 것처럼 첫째 부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백히 예수로 시작된 첫째부활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이 실재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실재적인 세상에서의 죄 사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실재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이 첫째부활이다.
이러한 첫째부활은 예수의 죽음으로 그가 낙원을 준비한 후에 시작된 것이다.(요한복음에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는 그 처소) 예수가 죽어서 낙원에 오르실 때에 이러한 사실이 구약에서 죽은 자들에게도 이 사실이 알려졌고 그들 중에서 믿고 죽은 영혼들을 이끌고 하늘 낙원으로 올라간 것이다.(밷전3:19;4:6)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계시록 20장 5절의 말씀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계속 그들이 구약의 음부에 있는 상태대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상태가 잠자는 것으로 표현한다.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로 음부에 들어간 것이 아닌 구약시대에서부터 이미 음부에 있었고 예수로 구약의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 하였지만 그들은 살지 못하고 그대로 음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 계시록에서 어린양의 옷을 입고 찬양하는 모습은 어린양이신 예수가 오기 전 구약시대에는 해당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복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가 안식의 처소인 하늘에서 기다린다는 것은 그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어린양의 예복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라면 예수가 죽기 전 구약의 성도들에게는 어린양의 옷이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의 죽음으로 어린양의 예복을 입은 것이다.(계14장)
==========================================================================[re]'분설(分說)'이란 사람을 나누어 쪼갤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근호 2003-12-23 16:41:35, 조회 : 115, 추천 : 10
인간은 그 전체로 존재할 때만 인간인데 왜 쪼개서 이야기하고자 합니까?
마치 물은 수소 2분자에 산소 1분자가 결합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수소와 산소로 나누면 더이상 '물'이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옳은 이치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과
사람이 무슨 구조로 되어 있느냐 하고는 전혀 다른 문제이지요.
이 빵의 주인 어디 쓰려고 샀느냐 하는 것과 빵의 구조가 어떻게 되었느냐 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듯이,
사람이 죽으면 쪼개지고 분해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인간들의 관찰의 결과를 논리를 꺼집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철학입니다.
철학이란 눈으로 보이는 것을 토대로 합리적인 순서를 잡아보는 사고(思考) 논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죽으면 죽은대로 관리하고,
살아있으면 산대로 관리합니다.
진실된 사항은, 사나 죽으나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때로는 영으로, 혼으로 ,육의 관계로서 관리된다는 사실입니다.
##############################################################################################. 양병구 2003-12-25 18:25:28, 조회 : 127, 추천 : 5 .
[re]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는 것 이근호 2003-12-25 20:05:15, 조회 : 160, 추천 : 11
문화는 문화로서 가치가 있습니다.
축구하면서 공을 차는 자들보고, "쓸데없이 공기가 든 주머니를 왜 차느냐?"고 따질 수 없습니다.
문화를 치워버린다고 그 빈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땅 따먹기 놀이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실제로 소유권 이전 등기를 마쳤느냐고 다구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아이들의 의식 변화는 다른 변화와 차분히 정리되고 성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산타크로스 없다"라는 교리 주입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없는 존재일 수 있다"는 새로운 교리의 탄생을 유발시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단순히 '산타크로스'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산타류'에 해당되는 개념들도 같이 의심해야만 한다는 명령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즉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부정되어야지만 하루 빨리 어른 대우 받는다는 인식을 낳게 합니다.
사람은 게임을 통해서 자신의 속셈을 고백하게 됩니다.
신타크로스 놀이도 일종의 세상 살아가는 게임입니다. 마치 축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생일이 정확히 12월 25일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생일은 인간이 정하기 나름입니다.
마치 11명이 되어서 축구 게임이 성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장 나쁜 경우는, 예수님의 생일이 6월 25일이었다고 밝혀졌다고, 그 날을 새삼스럽게 지켜야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다고 여기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것은 축구 할 줄 모르면,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단입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아아들 식으로 놀도록 내버려두시고,
젊은이들이 크리스마스 라는 놀이를 하도록 내버려두시고,
40이 넘은 장년들은 그날에 집에서 주무시면서 편히 쉬시면 되는 겁니다.
사는 것도 어차피 시간 떼우기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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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