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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성령님과 교회개혁] 2003-12-02묻고답하기히브리서

[성령님과 교회개혁] 2003-12-02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성령님과 교회개혁
김재국 2003-12-02 23:25:32, 조회 : 104, 추천 : 12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러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계2:16)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계2:21)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9)

이근호 목사님은 성령님이 교회개혁의 발상을 저지한다고 주장하지만
요한 계시록 2장 3장에서는
성령님이 직접 타락한 교회들을 향하여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는 곧 교회개혁이 아니겠습니까?
니골라당,발람의 교훈, 이세벨을 용납한 당시의 교회상은
작금의 한국교회와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성령님은 교회들의 타락을 지적 책망하시고 회개하라고 직접 명령하십니다.
잘못된 믿음 행위를 고치라는 것이고 개혁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완전하면 개혁이 필요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재림후 천국의 상태이지, 현재 지구상에서는 성령님의 교회개혁 지시에 순종해야합니다.

그래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의 견해에 의하면 루터는 성령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의 주도자이니까요.
이상규님의 견해에 의하면 루터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에 의한 교회개혁은 없다는 지론이니까요.
여기에 일은 성령님이 하시고 루터는 도구일 뿐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인긴은 예수영접해도 죄는 계속짓습니다. 대속체험 즉시 완전한 신의 형상으로 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완전한 교회는 천국에 있습니다.
그 때까지는 환란을 인내하고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따라서
계속 우리의 행동과 교회와 세상을 수정 보완하는 것이 성도의 할 일인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시느라 이근호 목사님 힘드시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버팀목으로서 진리 수호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같은 사단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도 마다 않으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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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물건을 소유할 때는 완전한 제품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근호 2003-12-03 06:18:54, 조회 : 118, 추천 : 11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완전치를 못합니다.
차도 오래 타면 고장이 납니다.
그래서 새로 바꾸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8:18-19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여기에면 성도가 말하고 보여주어야 될 소망이라는 것이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해서 증거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어떤 가족에게 자동차가 있다고 칩시다.

제가 그 가족에게 다가가서 말합니다.

"당신의 차는 온전치 못합니다. 앞으로 수리해야 되고 계속해서 정비해야 될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그 가족의 가장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제가 만약에 그 가족에서 다가가서 말하기를,

"당신의 가족 구성을 온전치 못합니다. 당신의 마누라도 갈아치워야 하고, 당신의 자녀들도 갈아치워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가장은 대단히 화를 낼 것입니다.

결코 제가 그 아내가 완전한 인간이라든지, 자녀들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관계성 자체가 완전치 못하다고 이야기 했을 뿐인데 그 가장이 화를 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장애자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자식이 장애자라도 '내 자식'이라는 관계성은 온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갈아치울 하등의 필요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있어 7 교회 이야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특정 교회을 거론하고 그 완전성을 말하지 않음으로서 도리어 예수님의 교회의 완전함을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의 두 가지 요소 때문입니다.

1. 7 교회는 예수님의 손에 잡혀 있는 완전한 별, 곧 완전한 교회를 말합니다. (계 1:16,20) 이것은 교회의 완전함은 만유의 주께서 친히 보장한다는 말입니다.

2. 위의 이 사실로 인해 끊임없이 '촛대 옮기는 작업'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만약에 오늘날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주장하기를,

"당신의 몸이 되는 교회는 결코 완전치를 못해요!"라고 나선다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몸은 완벽하고 완전하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촛대가 옮겨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인간들은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현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결코 성공적인 교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혹은 내가 그 교회 당회장이기 때문에)"라는 식입니다.

더 범위를 확대하면,

"한국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라는 식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의 어설픔입니다.

차라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온전치 못한 유사 교회는 가차없이 초대를 옮겨시옵소서. 그래서 완전한 교회가 따로 존재함을 이 세상이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재림할 때는 모든 사실이 다 드러나리라"

그러니까

예수님 재림 때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져 있는 교회가 있음이 그 때, 모두 계시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머리되시는 분이 따로 계시고 그 분이 모든 작업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3장의 원칙대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된 교회는 오직 그 분의 손에 붙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사도 요한이 새삼스럽게 교회 하나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일은, 주님의 손에 붙잡힌 완전한 교회를 그저 밧모섬에서 그저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도, 다른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를 완전한 교회으로 변모시킵시다!"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라는 의식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주님이 친히 관리하시는 교회만을 염두에 둡시다!"라고 증거할 뿐입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입니다. 머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에베소서 4:4)

우리는 계속해서 차를 바꿀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분의 완전한 관계 속에 놓인 가족입니다.

차가 더럽다고 우리가 가족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단 자기를 위한 차를 따로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 자에게만 해당 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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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김재국 2003-12-03 10:25:16, 조회 : 109, 추천 : 6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완전치를 못합니다.
>차도 오래 타면 고장이 납니다.
>그래서 새로 바꾸어야 합니다.
>
>히브리서 8:18-19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그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
>여기에면 성도가 말하고 보여주어야 될 소망이라는 것이 온전치 못한 것에 대해서 증거되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
>만약에 어떤 가족에게 자동차가 있다고 칩시다.
>
>제가 그 가족에게 다가가서 말합니다.
>
>"당신의 차는 온전치 못합니다. 앞으로 수리해야 되고 계속해서 정비해야 될 것입니다."
>
>이점에 대해서 그 가족의 가장도 인정합니다.
>
>그런데 제가 만약에 그 가족에서 다가가서 말하기를,
>
>"당신의 가족 구성을 온전치 못합니다. 당신의 마누라도 갈아치워야 하고, 당신의 자녀들도 갈아치워야 합니다"라고 한다면 그 가장은 대단히 화를 낼 것입니다.
>
>결코 제가 그 아내가 완전한 인간이라든지, 자녀들이 완전한 인간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그 관계성 자체가 완전치 못하다고 이야기 했을 뿐인데 그 가장이 화를 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는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의견) 자동차=교회건물 가족=성도
라는 등식으로 비유를 보면 교회가 낡은 것은 성도를 교체할 이유가 아닙니다.
성도의 가치관이 니골라,발람,이세벨을 따를 때 그가치관의 개혁이 필요합니다.
자동차가 고장나면 자옹차를 고쳐야하고
마누라가 세상풍속을 좇으면 마음의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하드웨어가 고장난 것은 하드웨어 수리를
소프트웨어가 고장난 것은 소프트웨어 갱신을!
>장애자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자식이 장애자라도 '내 자식'이라는 관계성은 온전하기 짝이 없습니다. 갈아치울 하등의 필요가 없습니다.
>(의견)장애자 자식이 진리에 거하지 않으면 관계가 깨어집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막3;35)
예수님은 가족개념의 혁명을 선포하십니다.
혈연,지연,학연,에의한 관계보다 진리에 의한 관계가 진정한 관계임을 선포합니다.
피보다 진한 것은 진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있어 7 교회 이야기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특정 교회을 거론하고 그 완전성을 말하지 않음으로서 도리어 예수님의 교회의 완전함을 증거하는 방식입니다.
>(의견) 7교회는 당시 특정 교회이고
현재의 모든 교회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다음의 두 가지 요소 때문입니다.
>
>1. 7 교회는 예수님의 손에 잡혀 있는 완전한 별, 곧 완전한 교회를 말합니다. (계 1:16,20) 이것은 교회의 완전함은 만유의 주께서 친히 보장한다는 말입니다.
>
>2. 위의 이 사실로 인해 끊임없이 '촛대 옮기는 작업'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의견) 예
>만약에 오늘날 어떤 이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주장하기를,
>
>"당신의 몸이 되는 교회는 결코 완전치를 못해요!"라고 나선다면,
>(의견) 그런 사람이 있을까요?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
>"내 몸은 완벽하고 완전하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촛대가 옮겨지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
>그런데 이 지상의 인간들은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
>"현 내가 출석하는 교회는 결코 성공적인 교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그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혹은 내가 그 교회 당회장이기 때문에)"라는 식입니다.
>(의견) 성공 이란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가 마귀를 물리친 상태입니다.
>더 범위를 확대하면,
>
>"한국 교회는 완전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라는 식이 됩니다.
>(의견) 완전할 수없고 목적성과 추구성을 예수님의 사랑과 진리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 속에 갇혀 있는 인간의 어설픔입니다.
>
>차라리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
>"주여, 온전치 못한 유사 교회는 가차없이 초대를 옮겨시옵소서. 그래서 완전한 교회가 따로 존재함을 이 세상이 알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의견) 공의와 정의와 진리를 조절하는 것도 성령님의 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실 것입니다.
>
>"조금만 기다려. 내가 재림할 때는 모든 사실이 다 드러나리라"
>
>그러니까
>
>예수님 재림 때 비로소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져 있는 교회가 있음이 그 때, 모두 계시된다는 말입니다.
>
>교회는 머리되시는 분이 따로 계시고 그 분이 모든 작업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3장의 원칙대로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의견) 예 그렇습니다.
>참된 교회는 오직 그 분의 손에 붙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
>사도 요한이 새삼스럽게 교회 하나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
>그가 하는 일은, 주님의 손에 붙잡힌 완전한 교회를 그저 밧모섬에서 그저 증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의견) 증거하는 이유는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함입니다.
>저도, 다른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 교회를 완전한 교회으로 변모시킵시다!"라는 것이 아니라
>
>"우리 교회라는 의식을 포기하고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주님이 친히 관리하시는 교회만을 염두에 둡시다!"라고 증거할 뿐입니다.
>(의견)지금 우리는 천국에 있지 않고 지구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지구의 불완전한 교회에서 '이기는 자'로 버티고 있어야 합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입니다. 머리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에베소서 4:4)
>
>우리는 계속해서 차를 바꿀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분의 완전한 관계 속에 놓인 가족입니다.
>
>차가 더럽다고 우리가 가족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
>단 자기를 위한 차를 따로 소유하기를 원치 않는 자에게만 해당 되는 이야기입니다.

예. 완전한 교회를 염두에 두고 , 차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지는 관계를 항상 정상화 시키려는 의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많이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신앙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위한 증거물로서의 역할을 성령님께 간구하는 자세를
갖추도록 하겠습니다.
주안에서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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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어느 인간이 나서서 고치겠습니까?
이근호 2003-12-03 13:58:50, 조회 : 108, 추천 : 10

얼마나 고쳐야 완전히 고쳐지겠습니까? 10번? 100번?

혹시 고쳤다고 장담했는데 도로 탈나면 또다시 100번?

그리고 최종적으로 "수리 끝났습니다"라고 외치는 그 기준과 모델과 샘플로서 이 시대, 이 땅에 어느 교회, 어느 누구로 잡을 수 있단 말입니까?

따라서 변화될 수 밖에 없을 것 속에서 변화되지 않는 것을 증거하고 의지하며 기쁨으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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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이 예수보다 일찍 희생했던 이유? 그리고 계시록의 관점(조언부탁)
김인찬 2003-12-03 19:46:55, 조회 : 96, 추천 : 7

[게시 내용]세례요한 예수보다 왜 일찍 죽어야 했는가?=이런 해석은.....조언 부탁드립니다.

예수와 함께한 대 선지자인 세례요한보다 신약시대 교회 중에서 가장 작은 자라도 구약 시대 가장 큰 선지자인 세례요한 보다 큰 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세례요한이 예수의 부활로 오는 신약시대에 살지 못하고 미리 죽을 것을 염두해 두고서 말한 예언적인 성격이다. 이와 같이 세례요한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 이전에 죽을 것을 예수는 알고 있었고 그가 신약의 교회시대에 포함되지 않고 죽을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

예수로 오는 육체의 부활로 육체가 있는 우리처럼 실재로 죄가 예수로 사해지는 삶을 세례요한이 경험하지 못하고 예수보다도 먼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모든 사람들의 육체적인 삶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성령이 그들 안에 내주하여서 실재적인 구원의 죄 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세례요한의 삶이 예비자의 삶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모든 과정은 예수로 이루는 것을 두고서 그 나라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닌 이방인의 구원이었고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때가 차매 그가 이러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 사역을 감당한 것이다.

세례요한의 생이 예수를 위한 철저한 희생적인 삶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가 처음부터 독자적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일하였다면 당시의 상황이 헤롯의 정치아래서 정치적인 것으로 일찍 죽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 삼년의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세례요한의 예비 된 길과 그의 죽음이 예수의 사역에 도움을 준 삶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두 사람의 길은 색깔이 다르게 나타난다. 요한은 정치적으로 대항했고 예수는 종교적으로 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헤롯이 단순한 종교적인 예수의 활동으로 바라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무모하게 헤롯에 대해서 공격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세례요한이 예수를 위해서 미리 죽기로 이미 정한 예비자의 삶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헤롯에 대해서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굳히지 않고 비판하면서 일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종교적인 예수의 활동은 유대교가 있는 헤롯이 볼 때에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예수는 세례요한의 삶과 다른 삶이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군중들에게 인정받는 헤롯이 예수를 두려워했던 이유가 된 것이다.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인정받으려는 헤롯은 예수의 군중들의 인기를 무시하고 그를 가둘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치적인 운동인 독립운동이 있었고 헤롯은 군중에게까지 인심을 잃어서 폭동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이유이다. 그러한 이유로 정치적인 대항을 한 세례요한을 쉽게 죽일 수 없었던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은 세례요한을 죽인 것도 헤롯이 원해서 죽인 것이 아닌 헤로디아가 세례요한의 목을 요구한 것에 대해서 고민한 가운데 들어준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희생은 먼저 세례요한이 된 것이다. 그러한 배경에 의해서 예수는 어느 정도는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먼저 군중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종교지도자들에게는 비판의 칼을 들었던 것이며 종교지도자들도 예수가 군중들의 인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그를 쉽게 해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이 구약의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준비된 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종말에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기위해서 군중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다.

그는 결국 군중들과 종교지도자들의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이 준비 된 것이다. 그 예수가 유대의 왕이 될 것에 대한 군중들의 요구와 그 요구에 대한 그의 거절은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빌라도에게 넘겨지는 원인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최후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세례요한과 같이 헤롯에 대한 저항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그가 왕이라는 말에서 들어난 것이다. 그가 단순한 종교적인 활동으로 백성들에게 계속 인기를 얻고 헤롯을 자극하는 왕이라는 표현을 삼가고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온순한 태도를 보였다면 그는 희생하는 것을 어느 정도 피할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

그러나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안위보다는 자신을 희생하는 정 반대의 길로 걸어간다. 군중들에게 인정되는 것을 포기하였고 이미 종교 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고 그를 종교지도자들은 언제든지 기회만 있으면 잡아서 죽이려는 것이 그들의 자세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유대의 왕인 헤롯에게까지 대항하는 유대의 왕이라는 심각한 정치적인 발언이 문제가 되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가 군중들에게 이미 인심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던 헤롯은 그를 죽이는 일에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군중들의 실망에 대한 헤롯의 결정은 군중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갈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만약에 아직도 그가 군중에게 인정되는 선지자의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유대의 왕인 헤롯은 예수를 쉽게 죽음으로 넘기 우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군중지지도가 떨어지고 그가 헤롯에 대한 반항적인 말인 하나님의 아들과 유대의 왕과 과거 헤롯이 지은 성전을 헐어야 된다는 것으로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예수를 헤롯은 더 이상 살려둘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에 대해서 실망한 군중들에게 인정되려고 헤롯은 예수를 쉽게 빌라도에게 넘긴 것이다. 빌라도도 군중들이 예수를 죽이라는 목소리를 듣고서 그가 군중들로 인정되는 것을 이 한사람 예수를 살려 둠으로써 잃어버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간 것이다.
먼저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대항하고 그 다음에 군중들에게 인심을 잃어버리고 그 다음에 헤롯에게 저항한 것은 그가 충분히 죽음으로 걸어가는 길을 스스로 열어놓은 것이다.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는 세례요한의 역할이 방패막이가 된 것이다. 그의 희생이 예수 사역의 길을 순탄하게 한 것이 된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철저히 준비 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가 정치적으로 희생한 것도 결국은 그의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의 구원을 위해서 왔다면 그는 비유로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을 유대인에게 숨긴 것은 자신의 온전한 신분이 유대인에게 알려지면 그가 이루고자 하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비유나 비사로 가르친 것이 신약시대의 교회에서는 마치 밝히 드러나 세상에 선포되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온 세상에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신약시대의 구원을 위해서 철저히 자신을 유대인에게 숨기고 제자들에게는 은밀하게 알려 준 것이다. 제자들에게 유대인들과 같이 비사로 하지 않고 풀어서 알려준 것은 그들을 자기의 제자 된 증인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실재로 제자들은 예수의 증인이 되어서 예수처럼 희생하는 삶을 살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사역에서 이적들은 사실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그 의를 이루고자 했던 것을 이루기 위해서 행한 것이다. 그의 기적으로 군중들에게 인정된 사실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가 죽음에 앞서서 기적으로 군중에게 다시 인정될 수 있었으나 그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공생애는 세상에 분명히 그가 걸어간 발자취를 남기고 간 것이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 그의 기적이 사용된 것이다.

그는 십자가로 자기백성들에게 죽는 것을 위해서 걸어간 공생애의 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들의 삶을 살았고 사람들과 같이 죽음을 고통으로 맛본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를 영접할만한 하나님의 독생자인 구원의 길이었다.
세례요한이 살았을 때 그가 옛 언약에 속한 자인가? 새 언약에 속한 자인가?
사실 세례요한만이 아니라 예수 공생애 당시의 모든 사람이 옛 언약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예수 당시에는 모든 사람이 옛 언약에 속한 것은 새 언약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새 언약은 예수의 죽음으로 되는 것이다.(언약의 성취)

사실 예수의 죽음으로 새 언약이 새워진 것이 신약의 모든 교회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새 언약에 이제 비로써 들어오게 된 것이다.
주기도문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당시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그때부터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성도들로 여김을 받는 것이 시작된 것이다. 누구도 예수의 죽음이전에는 죄가 온전히 사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으로 비로써 온전히 죄가 사하여 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사람들이 죄가 사해지지 않았다는 그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처소인 낙원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죄가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낙원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며 예수의 죽음으로 구약의 성도들의 영이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비로써 하늘에 올라간 것이다.(구약에서 죽은 자들은 영혼이 음부에 있다는 것이 아닌 영이 음부에 있다고 표현하고 신약에서는 영이 낙원에 있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영혼이 낙원에 있다고 표현한다. 그 차이는 혼이 있어야 낙원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의 죽음이 오기 전에는 그들의 죄가 온전히 사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례요한보다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들이 더 큰 자라는 것은 예수의 사역 중에는 누구도 세례요한과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에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이 비로써 믿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며 그 일이 오순절의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성도들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 이전에는 죄 사하는 일이 실재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죄 사하는 일과(십자가) 그들의 영혼이 안식하는 일과(낙원의 준비) 그들을 위해서 부활한 것이다.(재림에 대한 부활의 소망) 신약시대에는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가 실재로 사해지며 그리고 그들이 죽으면 실재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예수가 세상에 오셔서 죄에 대해 의를 이루는 그 일이 자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즉 의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이며 이는 그가 죽음으로 이루는 그 죽음이의를 이루는 것이다.(요나의 표적 밖에는 다른 것을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것도 예수가 이루려는 십자가의 의라는 것)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음이 임박한 상태에서 그는 하늘을 보고 다 이루었다는 큰 소리로 그의 영혼이 떠난 것이다.(요나의 표적) 의를 이루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전에는 누구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온전히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세례요한과 같은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인 그도 신약에 오순절로 오게 된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과 구분된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세례요한과 비교해서 하나님 나라에 있는 자들은 가장 작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큰 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세례요한이 장차 예수의 죽음으로 오는 신약시대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두고서 이야기 한 것이다.(세례요한이 예수보다 먼저 죽었음) 즉 그 예수의 사역 당시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왔으나 아직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누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으로 그 나라에 비로써 성도들이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죽음으로 비로써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아버지의 참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죄를 사함 받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버지가 되어 그에게 영광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전에는 사실 예수께서 말씀한 아버지는 사람들의 참 아버지가 아닌 예수의 아버지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죽음으로 사람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비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이 신약의 성도들로부터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죽음 이전에는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죄가 있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겠는가?

교회시대에서는 참으로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며 그 일이 예수의 죽음으로 된 것이며 이것은 비로써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예수가 죽기 전에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예수의 죽음으로 예수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예수가 죽어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비로써 양자 삼게 된 것을 의미한다.(신약의 중생은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성도가 믿음으로 출발한다)

추가: 예수의 만찬은 제자들에게 새 언약에 대한 약속이라는 것이다. 그 만찬 자체가 새 언약이 된 것이 아닌 새 언약에 대한 예언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죽음에 앞서서 유언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 유언한 자가 죽어야 새 언약이 성취되는 원리이다.
(다른 내용들은 기독교 신문들 안에 자유 게시판에 게재 되어 있습니다)

=제가 반론한 글입니다=
[예수로 시작된 낙원과 첫째 부활]
사망은 모든 육체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이 정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육체는 첫째 사망으로 나아간다. 예수도 육체를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사망으로 나아갔고 그리고 그가 사망에서 부활한 것이다.

우리의 육체는 근본 죄가 거하는 육체로써 사망이 온 것이다. 엘리야나 모세도 우리와 같은 썩어지는 육체를 가진 것이다. 그들이 썩지 않는 육체를 가진 것이 아니다. 그들의 육체도 사망으로 달려가는 육체를 가진 것이다.

그들도 사망이 있는 육체라는 것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죄가 있는 모든 육체이기에 죽음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사람의 육체가 죄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만이 모든 육체 가운데서 먼저 부활한 것이다. 그가 사망에서 먼저 부활한 육체가 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이전에 사망에서 건져내어서 부활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망의 육체를 가지고 엘리야가 하늘에 간 것이라면 죄인의 육체가 하나님께 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그의 죄가 사해졌다고 이미 구약에서 사해졌다고 주장해야 된다. 과연 죄인이 예수가 오기 전 죄 사함을 받아서 죄인의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여기에서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한 것과 예수의 승천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엘리야는 보이는 하늘로 가는 모습이 전부라면 예수는 보이는 하늘에서 내세라는 삼층 천과 같은 곳으로 간 것이다. 엘리야의 육체는 썩는 죄인의 육체라면 예수의 부활의 육체는 영원이 변하지 않는 육체로 세상에 단 유일한 부활의 육체라는 사실이다)

구약에서 음부는 부정적인 것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음부에 들어가는 것이 악인만이 아닌 구약의 성도들도 들어간 것이라는 것이 증거 되는 구절이 있다. 이는 음부라는 것이 사실 부정적인 것으로 대부분 심판과 연결시켜서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구약의 성도들이 천국에 갔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다는 것이다. 이는 신약에 와서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음부에 들어가는 것의 출발이 사망으로 시작한다. 이는 모든 육체가 죄인의 육체라는 것이며 그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사망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사망이라는 것이다. 죄가 있는 모든 육체는 사망으로 가게 된 것이 정한 법이다. 죄인이 사망으로 들어가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는 죄인이 아니면서도 사망으로 먼저 들어간 것이다. 이는 그가 사망에서 부활하기 위해서 스스로 들어간 것이다. 결국 사망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는 일반적인 것이다. 예수가 없이 이들의 종착은 하늘나라가 아닌 것이다. 모든 육체는 사망한다. 그리고 구약에서 모든 사람들은 사망으로 들어간 것이며 죄 사함 받고 낙원에 이른 것이 아닌 음부에 거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음부는 지옥이 아니다.

지옥은 이미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며 지옥이 현재 있다 해도 그 최후의 심판은 재림으로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사망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며 그가 다시 살지 못한다면 그는 음부에 버림을 받았다는 것이 된다. 이를 증거 하는 성경은 행2:31절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가 사망에서 음부에 계속 있지 아니하고 부활한 것은 음부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 낙원으로 들어간 것이며 그리고 부활한 것이다. 죄가 없는 그의 영이 음부에 있을 수 없다. 음부는 하나님께 가지 못하는 죄인들의 처소이다. 그는 죄가 없으므로 사망으로 죽어서 음부에 계속 머무르지 않고 낙원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부활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다시 올라가셨다.(예수가 음부에 들어갔다는 증거는 사망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그의 영혼이 낙원으로 바로 올라갔다는 것이나 또는 음부에 내려갔다가 낙원에 갔다는 분명한 증거는 없지만 음부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의 부활이 알려지고 그들이 낙원에 이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도 에 참여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사망한다. 그 사망의 의미는 일단은 최종적이다. 죄인은 죽어서 망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죽어서 망하는 그들의 결과는 사망에서 음부로 들어가야 정상이지 사망으로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신약의 복음에 의해서 비 성경적인 것이다.
사망은 우리 신약의 성도들이나 구약의 모든 사람이 해당된다. 구약의 성도들이 사망으로 하늘에 올라갔다는 것은 은혜의 구속이 아직 오지도 아니한 약속의 시대에 하늘에 갔다는 것이며 이는 예수가 오기 전에 은혜가 적용된다는 이상한 논리가 나타난다.

예수가 오기 전에는 누구도 사망이 그의 최종적인 성격이며 그리고 그 자신의 육체적인 사망으로 그가 거하는 것이 예수로 오는 낙원이 아닌 음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음부에 있는 그들이 낙원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로 가능한 것이다. 예수의 은혜가 구약의 성도들에게 적용되어야 하며 그 때가 예수가 사망으로 들어가 그가 사망에서 음부에 들어갔으나 죄가 없는 그가 그곳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 안에서 그가 낙원에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낙원에 올라갈 때에 사망으로 음부에 있는 자들 중 믿음으로 죽었던 자들을 이끌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오기 전 예수보다 앞서서 낙원에 들어갔다는 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낙원에 들어간 예수는 하나님께 죄가 없음이 인정되어서 들어간 것이다. 사람들 중에 죄가 없는 자들이 없다. 죄가 모두 있기에 예수 오기 전에는 그 누구도 낙원이라는 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결국 예수는 이러한 낙원의 준비를 위해서 죽으시고 하늘에 가신 것이며 다시 세상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승리를 보이시고 우리에게 낙원으로 들어오도록 요구한다. 예수 이전에 누가 자신의 죄를 가지고 하늘에 올라가겠는가? 사람들 중 예수가 죽음으로 의를 이루기전에 하늘에 올라간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 하다는 것인가?

예수의 죽음은 그가 모든 사망에 대한 죽음이며 그리고 그가 과거 사망으로 들어간 자들을 대리고 하늘에 올라간 것이 낙원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보다 누가 먼저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구약에서 우리의 구원이 밝히 드러난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도 밝히 드러나지 않았고 구원도 약속인 그림자로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도 분명하게 드러내어서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가 구약에서 증거 된 것을 우리는 밝히 알게 된 것이다. 마치 구약에서 구원을 분명하게 발견하려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구원으로 세상에 구원이 선포되길 원하신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 구약에서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무리한 주장이 될 수 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오히려 구약의 약속과 그림자를 바라보면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계시록에서 우리는 그 정답을 찾을 수 있다. 계시록 20장 5절과 6절에서 죽은 자들의 상태에 대해서 그 명쾌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예수가 부활한 것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부활한 것이 있다. 물론 이 부활이 육체의 부활이 아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간 것을 첫째부활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과거 구약시대에 죽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비로써 첫째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늘나라의 낙원에 들어가는 것이 첫째부활의 사건이다.

이러한 의 사건이 예수의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죽은 자들이 예수와 함께 첫째부활에 참여한 것이다. 살아있는 우리도 죽으면 예수가 죽음으로 이룬 낙원이라는 곳에 들어간다. 이것이 이다. 이러한 은 우리도 죽으면 해당된다. 그 시작이 예수의 죽음으로 이룬 낙원이 있기에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로 이러한 첫째부활에 참여한다면 구약에서 죽은 자들도 예수의 죽음으로 에 참여해야 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예수의 죽음으로 산자들에게도 그 때에 첫째부활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고 우리가 실재로 죽으면 사망에서 낙원으로 가는 첫째부활이 있기에 참여한다. 그 첫째부활의 시작이 언제인가? 그것은 예수로 시작된 것이다. 즉 예수의 죽음으로 그가 사망에서 음부에 있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서 신약의 성도들은 사망의 결과인 음부가 아닌 육체의 사망 후에 그가 첫째부활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명백히 예수로 시작된 첫째부활로 말미암아 신약의 성도들이 실재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실재적인 세상에서의 죄 사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리고 실재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있다. 이것이 첫째부활이다. 이러한 첫째부활은 예수의 죽음으로 그가 낙원에 올라간 것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가 죽어서 낙원에 오르기 전에 그는 구약에서 죽은 자들(사망으로 음부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자신이 죽은 사실이 알려졌고 그들 중에서 믿고 죽은 영들을 이끌고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밷전3:19;4:6)
구약에서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죽은 자들을 예수의 영은 하나님께 이끌고 하늘낙원으로 간 것이 사실이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으로 구약의 성도들이 일제히 낙원에 이른 것이 사실인 것이다. 구약의 성도들이 죄인으로 죽은 것이며 그 죄인으로 죽은 영들이 예수가 오기 전에 세상에서 육체로 지은 죄가 사함이 되었다는 것은 구약의 짐승의 피가 죄를 사하는 것이 되었다는 이상한 주장을 해야 한다. 오지도 아니한 하나님의 의인 예수의 죽음을 구약에서 적용시킨다는 것은 무리이다.

오히려 그들이 예수의 죽음으로 그들도 이제야 예수의 의가 그들에게 적용되어서 하늘에 올라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더 성경적인 것이다. 예수가 오기 전 모든 사람들은 예수의 첫째부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첫째 사망 안에 있었고 이러한 자들이 예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첫째 부활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로 시작된 의의 사건은 구약에서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의 사건은 예수로 시작되었기에 구약의 성도들이 이 첫째 사망의 장소인 음부와 같은 곳에서 의로 이루어진 장소인 낙원에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첫째 사망에서 놓인 자들은 이재 둘째 사망이 아닌 둘째 부활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둘째 사망의 시작과 둘째 부활의 시작은 예수의 재림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으로 첫째 사망과 첫째 부활이 동시에 있는 것이며 예수의 부활로 둘째 부활과 둘째 사망이 장차 재림으로 있게 될 것이다. 예수의 죽음이 없었다면 도 없으며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둘째 부활도 없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계시록 20장 5절의 말씀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은 계속 그들이 구약의 상태대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약의 상태가 잠자는 것으로 표현한다.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로 음부에 들어간 것이 아닌 구약시대에서부터 이미 음부에 있었고 예수로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 하지만 그들은 살지 못하고 그대로 음부에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성도들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그 이전 예수가 첫째 부활을 이루기전에는(낙원) 구약의 백성들도 구약의 다른 불신자들과 같이 함께 음부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의 죽음으로 낙원에 이르는 것을 통해서 첫째 부활로 일제히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성도들만이 첫째 부활에 참여한 것이라면 그 나머지는 계속 그러한 구약의 상태로 있다가 둘째 사망으로 나오게 된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죽은 자들은 첫째 사망에서 둘째 사망으로 나아가지만 우리는 첫째 부활에서 둘째 부활로 나아간다. 이러한 것은 신약에서 밝히 증거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구절이 신약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 구절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의 죽음으로 구약의 백성들이 예수로 적용되어서 낙원에 이른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하늘의 성도들이 낙원에 있다.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을 믿고 죽었던 모든 자들이 하늘의 낙원에 이른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사람들이 예수를 보지도 않고 죽었어도 그 영들에게도 영으로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어 낙원으로 이르게 한 것이다.

예수로 구약의 성도들이 구원을 받은 시기는 구약시대가 아닌 것이며 신약을 이루는 죽음으로 구약시대 안에 있는 거룩한 자들이 신약의 의를 얻고서 낙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신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잠자고 있다는 표현이 일반이라면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활할 것을 두고서 말한 것이다.

특히 육체의 부활은 이렇게 사망에서 모든 자들이 육체를 입는 것이다. 낙원에 있는 자들은 하늘에서 와서 육체를 입을 것이며 음부에 있는 자들은 땅에서 살아나 육체를 입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이렇게 살아난 이후에 선악 간에 심판되어서 영원한 형벌의 처소인 지옥과 영원한 영생의 신천지로 나뉘어 질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지옥에 들어가는 것은 음부에서 지옥으로 들어간다는 최후의 심판을 의미하며 우리 성도들은 낙원에서 신천지로 오게 될 것이다.

지옥은 죽은 자들이 현재 죽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닌 그들은 음부에 들어가며 지금은 형벌의 기간보다는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자들이다. 그리고 죽은 성도들은 영원히 살 곳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 낙원으로 영원한 세계가 올 것을 두고 들어가는 임시적인 성격이다.
그러므로 낙원은 안식의 처소로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서 참 안식은 하늘에 있는 낙원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안식이 없다. 오직 그 곳에 들어가야 만이 안식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안식의 처소가 예수로 이루어졌고 우리가 믿음으로 지금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참고 구절]
히브리서 9장9절;10장4절--구약의 성도들이 죄 사함을 얻지 못했다는 증거
히브리서 9장27절--사망은 모든 육체의 것
사도행전 2장27절;31절;34절--본래 음부는 사망으로 가는 자의 것
고린도 전서 15장20절-22절;47절-50절--부활의 첫 열매
요한 계시록 20장5절-6절--예수로 시작된 첫째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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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세례요한이 예수보다 일찍 희생했던 이유? 그리고 계시록의 관점(조언부탁)
이근호 2003-12-04 04:25:16, 조회 : 115, 추천 : 11

언약에 있어 묵시적 요소가 작용합니다.

묵시적 요소는, 역사적 요소의 시간적 한계성을 뛰어넘어 그 관계성을 전 영역에 두루 미치게 됩니다.

창세기 15:6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믿음으로 의인'이 됩니다.

비록 그가 아직 예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입장에는 있지만(요한복음 8:56) 그렇다고해서 아브라함이 덜 의인되거나 낙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6장, 거지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아브라함은 이미 천국 사람이 되어 있으며,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이미 천국의 사람이 되어 있는 엘리야와 모세와 대화하고 있습니다.

시간 안에서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으로서만 죄 씻음받을 근거가 장만되지만

묵시적 세계 안에서는 원인이라고해서 꼭 결과보다 먼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 보다 앞선 것은"(요 1:15)

왜냐하면 예수님의 오심은 묵시적 사건의역사속의 침입으로서 역사의 중심과 성격을 결정하는 핵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역사 자체적으로 보면, 앞선 사건이 뒤의 사건을 결정한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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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은 신약의 기도문인가? 고백문인가? 에 대한 개인적 소견\\\
김인찬 2003-12-04 09:37:13, 조회 : 82, 추천 : 12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조언 항상 잊지 않고 있겠습니다.

[주기도문의 이중성은 원 기도문에 가까운(눅) 것과 그리고 적용된 기도문(마)으로 이해해야 한다]

원 기도문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기도를 직접 가르친 것이며 이 내용은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로 끝난다. 그러므로 예수의 기도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끝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약의 교회에 새롭게 적용한 것이 마태의 주기도문인 것이다. 이러한 중심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원 기도문이 성취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 이루어진 기도의 성취로 새롭게 적용된 것이 마태의 기도문이다. 이는 마태가 원 기도문을 거의 그대로 읽어 가면서 성취로써 이해한 것보다는 새롭게 적용한 것이다. 즉 예수의 기도의 성취에 대한 적용으로써 라면 성도들의 고백이 후에 나타난 것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의 내용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원 기도문을(눅) 그대로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것이 이 글의 내용이다.
즉 이미 예수의 죽음으로 아버지께서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되었으며 그리고 지금도 이 땽에서 여김을 받고 있으며 또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며 그리고 나라가 활동하고 있으며(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리고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지금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 기도문대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대로 지금은 일용할 양식으로 살고 있으며 이는 과거 이스라엘의 광야에서의 삶이 순례자의 삶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이는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이 지나간다는 나그네의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들은 더 이상 세상에 적을 두지 않고 일용할 양식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취는 원 기도문이 예수로 이루어져야 되는 기도문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리고 신약의 적용된 마태의 기도문을 사용하는 것이다.
(신구약 전체연구의 책에서 주기도문에 대한 설명=김인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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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주기도문은 신약의 기도문인가? 고백문인가? 에 대한 개인적 소견\\\
이근호 2003-12-04 14:04:00, 조회 : 110, 추천 : 8

그 어느 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친 글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원래의 것을 찾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성령님의 성경 기록의 취지를 훼손하는 처사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성령님의 신약 성경 기록은, 따로 원래를 것에서 부터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려는 그 의식 자체를 공박하는 취지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권위란 원래의 것에 두지만

성령님이 제시하는 권위란 현재 나타난 성경 자체에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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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의 소망, 희망이었으면 합니다....
박정혜 2003-12-04 17:56:53, 조회 : 104, 추천 : 11

주차장과 주유소는 그 기능과 목적이 명백하게 구별된다.
주차장은 자동차를 세워 두는 장소요, 주유소는 연료를 채우는 곳이다. 그러므로 급유받으려는 자가 주차장을 찾을 리 없고,
주차하려는 자가 주유소를 향할 리도 만무하다.
주유소에서 급유받는 이유는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얻기 위함이다. 갈 곳이 없거나 어디로든 가야 할 이유도 없는 자라면 주유소를 찾을 까닭도 없다. 그 경우엔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라면 굳이 자동차를 구입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처럼 주유소의 목적이 분명할진대,
만약 어느 주유소가 들어오는 차를 모두 주차케 한 뒤 거기에서 계속 함께 노닐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 누구도 그 주유소를 이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객이 원하는 주유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혹은 신앙생활은 주차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곳에 마냥 머물며 거기에서 즐기기 위함이 아니다. 교회 혹은 신앙생활은 주유소와 같다. 이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한 은혜와 영적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이 교회요,신앙생활이다.
교회 혹은 신앙생활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라면 주차장처럼, 크리스천들은 신앙공동체 안에서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교회 혹은 신앙생활의 목적은 죄악과 어둠에 물든 이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발하며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함이다. 그 삶의 무대는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이다.
교회 안이 중요하다면, 크리스천들이 교회 밖에서 크리스천 답게 살아가기에 필요한 주유소의 역할을 교회가 담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변화산에서 신비로운 은혜를 체험한 베드로는 그곳에 초막을 짓고 거기에서 천년만년 살기를 바랐다. 주차장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시고 산 아래, 여전히 죄와 악이 찬을 치는 세상으로 내려가셨다.
이렇게 하여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까닭이 주유소 역할을 하시기 위함임을 일깨워 주셨다. 어느 시대든 크리스천들이 살아야 할 곳은 변화산정이 아니라, 주님께서 향해 가신 변화산 아래 세상이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고, 신앙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내게 있는 것]- 이재철 목사-

교회 부흥을 놓고 기도할때...더 큰 성전을 위해 지경을 넓혀달라는 기도를 할 때..행사를 기획하고 그것이 잘 마무리 되기를 위해 기도할 때.....

정말 이런 기도를 해야하나.....싶을 때가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기도해도 될까....싶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사,혹은 모임에 참석하지 않으면
신앙의 열심이 없는 사람이 되고, 방황하는 사람이 되고,
기도 않는 사람이 되고......

부흥이라고 외쳐대는 수많은 교회의 부르짖음 들이 어쩜 우리
인간들의 욕심....우리 안에 쌓아버린..쌓아가는 또 다른 바벨탑의 모습은 아닌지...

가끔은 정말이지.....교회에서, 사역자들로 부터,친구들이나 가족들로 부터 부탁 받는 기도 앞에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참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기도는 대화라고......잘도 말하지만...기도는 요청이며 부탁이 되어버린 우리 내 기도아닌 기도....

하나님 이 시대의 교회 가운데...이 시대의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떤 마음이실지........책읽다가......함께 나누고 싶어서
발췌해 끄적여 봅니다.....

우리가.....그래도 아직은 젊은 우리가.....그분의 소망.
그분의 희망의 이름이었으면.....좋겠습니다...

*** 저의 생각에 조언이나 도움의 말을 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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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재철 씨의 비유는 적절치 않습니다. .
이근호 2003-12-05 12:59:49, 조회 : 92, 추천 : 16

성도는 이미 성전이며 성령께서 몰고 다니시는 차동차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재철씨의 비유는 적절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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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무
박종희 2003-12-05 12:06:24, 조회 : 116, 추천 : 14
[re]심판은 예수님만을 증거하지 않는 자에 대한 집행입니다.
이근호 2003-12-05 12:56:25, 조회 : 112, 추천 : 11

은혜를 말하는 것을 문제가 된다, 도대체 귀하는 누구 덕으로 사는 겁니까?

예수님을 증거한다고해서, 그것을 인간 모독으로 이해했다면 도대체 귀하께서는 무엇을 위해 사시는 분입니까?

심판은 예수님만을 증거하지 않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집행입니다.

따라서 성령받은 자만이 예수님을 증거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8 "너희가 성령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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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심판의 집행
김재국 2003-12-05 13:29:07, 조회 : 103, 추천 : 12

그래서 하나님의 집행을 직접 하시는지요.
성령받은 사람,또는 예수님만을 증거하는 사람은
성령받음의 유무.지옥갈 사람의 선택과 집행,
다른사람을 마귀라고하는 위탁을 하나님에게서 받았나요?

피조물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역인 심판과 성령줄 사람의 선택까지도
침범하려 하십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일겁니다.
그 자유의지를 타인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데 사용하지 마시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죄인을 구하러 오신겁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스스로 의인되려 하시고 심판의 집행까지 하시렵니까?
인간의 피조성만 있다면 인간론의 오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하는 자신이 결국 하나님이 됩니다.
자기 행위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성령님)의 일이라는 것이죠.
피조물은 하나님이 시키는대로 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는 하나님의 행위다.
이런 끔찍한 오류에 빠지는 것입니다.그래서 정죄와 심판도 자유롭게 나오는 것이죠.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합니다.
선악과를 먹지말라는 충고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없으면 없었을 충고이자 명령이고
아담과 하와는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한 것입니다.
아담과 같은 잘못된 선택에서 탈출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성령님의 동행하심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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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무
박종희 2003-12-05 14:44:20, 조회 : 88, 추천 : 15
[re]십자가는 인간 공격용입니다.
이근호 2003-12-05 16:59:24, 조회 : 116, 추천 : 13

구약의 언약은, '거룩한 여호와 전쟁'의 기준으로 작용됩니다.

'거룩한 여호와 전쟁'은 모든 비거룩을 공격하여 저주해 버리십니다.

심지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할지라도 언약 안에 놓이지 아니하면 멸망시켜 버리는 것이 '거룩한 여호와 전쟁'의 취지입니다.

신명기 8:20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과 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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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