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가 교회를 개혁한다?] 2003-11-29
[온유한 자가 교회를 개혁한다?] 2003-11-29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온유한 자가 교회를 개혁할 수 있습니다
김병구 2003-11-29 13:26:21, 조회 : 131, 추천 : 25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유순하며, 부드럽고, 겸손한 성품이 온유입니다.
다윗의 사울 왕에 대한 마음 가짐, 불친절과 모멸적인 대접을 하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자세에서 온유를 봅니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자신을 때리고, 조롱하며, 모욕하면서 십자가에 매다는 원수들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태도가 온유를 가르쳐 줍니다.
온유는 거듭난 크리스천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대한 태도와 행위로 표현하는 성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크리스천이 자신의 진면목을 바라볼 때, 어느 누구도 자신을 자신의 진면목 보다 더 나쁘게 말하거나 나쁘게 대접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이 죄성과 죄악으로 얼룩진 형편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한 자기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할 때, 그리고 예수님의 공로로 구속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항상 거듭난 크리스천에게서는 넘쳐납니다. 그 감사의 마음이 넘치도록 충만할 때 크리스천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게 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기를 철저하게 관찰하는 거듭난 사람은 남의 눈에 티눈 보다 자기 눈에 대들보를 보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며, 말하며, 대접하더라도 그 것이 지나친 것일 수 없음을 그는 인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는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은 자기를 경멸하는 자들에게도 항상 온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온유는 “네 자신을 주장하라””너의 개성을 보여라”하는 세상의 가르침과는 상반되는 품성입니다. 온유한 자는 그러한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위하여 어떤 것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위, 특권, 소유 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화를 터트리지 않습니다. 온유는 쏟아 네고 싶은 나쁜 말을 참게 합니다.
그는 모든 형태의 자신으로부터 해방된 자입니다. 즉 자신에 대한 염려, 자긍심, 자신감, 자기 보존 등으로부터 해방된 자입니다. 참으로 온유한 자는 항상 만족하는 자입니다. 그는 이미 충족된 자입니다.“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는 성경 말씀은 온유한 자가 받는 복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땅을 이미 기업으로 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온유해 질 수 없습니다. 성령님께서만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할 수 있으며, 성령님께서만 우리가 죄악과 죄성을 애통하게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님께서만 우리를 온유하게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들에게는 성령님께서는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 속에 내주하시어 그가 온유하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그의 온유한 성품은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자신의 육신을 처서 영에 복종시키는 피나는 수고가 결합하여 맺는 성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 날의 크리스천들에게도 마찬 가지일 것입니다. 2,000년 전국 면역의 날 바울 사도 속에서 역사하시던 성령하나님과 오늘 날의 크리스천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께서는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자는 비겁해 보일 정도로 겸손하지만, 불의, 특히 하나님에 대하여 행해지는 불의는 참지 못합니다. 지극히 온유하신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사꾼들을 채찍으로 내 쫓았던 것은 좋은 예입니다. 온유한 자는 오늘 날 한국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각종 불의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가진 자들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채찍으로 불의한 자를 쫓아 내는 일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의분을 가슴 속으로 불태우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온유한 성품으로 동지들을 모아 교회개혁을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개혁 캠페인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유한 성품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특히 교회의 제직회 및 공동회의에서는 발언자의 주장이 말씀과 교리에 부합하며 정의로운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게 되면, 발언자의 인격이 비 크리스천적이라는 이유로, 아무리 훌륭한 주장도 동의를 얻어낼 수 없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좀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온유하고 겸손한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이 기록한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항상 기억합시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이전의 형편 없던 우리 자신, 성화의 과정을 걷고 있는 현 시점에서도 항상 부족한 자신을 생각하여 그 누구도 나를 마땅한 수준 이하로 더 낮게 볼 수 없음을 항상 기억합시다. 그러한 기억을 항상 지닐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움으로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충만하시도록 간구합시다. 그러한 날이 지속되어감에 따라 부족하나마 우리의 온유의 성품은 성령님의 능력을 영양분으로, 그리고 우리의 수고를 수분으로 하여, 자라고 꽃피고 열매 맺어 갈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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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는 개혁될 대상이 아닙니다.
이근호 2003-11-29 13:56:33, 조회 : 142, 추천 : 12
왜냐하면 그럴 필요가 없이 그 자체와 온전이요 완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수정이나 보완이나 개선시키기 위해 손 본 필요가 없습니다.
머리 되시는 분만 온전하다면 다 온전한 것입니다.
만약에 새삼스럽게 손을 봐야겠다면,
그것은 스스로 온전치 못한 유사 교회임을 고백하는 순간에 해당됩니다.
그리스도의 온유하심, 그것으로 이미 교회는 온전한 겁니다.
교회는 그 그리스도의 온유하심을 유감없이 이 최후의 세계에 향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단지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 자들에게는
그 향기가 무시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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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는 개혁될 대상이 아닙니다.
김재국 2003-11-29 14:41:13, 조회 : 157, 추천 : 22
예수는 완전하지만 인간과 세상은 불완전합니다.
새 예루살렘이 오기까지는 말입니다. 교회도 세상속에 있으므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과 세상과 교회는 불완전함을 계속 수정, 보완,개선 시켜야합니다.
개선인지 개악인지 모르지만 성령님의 교회를 통한 일이라면 개선이겠지요.
인간이 손놓고 완전하신 예수가 하는 일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이 보입니까?
예수님의 일은 인간과 교회를 통해 가시화됩니다. 불완전한 인간과 교회를 통하여서요.
잘못된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교회개혁을 반대하면서 왜 십일조와 주일성수가 잘못이라고 부르짖으십니까?
바로잡아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리고 그 자체가 완전이라면 왜 한국교회가 이단이라고 부르짖으십니까?
온전한 믿음을 전파하려는 의도가 아닌가요?
십자가외의 것을 주장하는 한국교회는 십자가만 증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혼신의
투쟁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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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세 가지 질문의 답변은 모두 '아닙니다'입니다.
이근호 2003-11-29 15:35:30, 조회 : 147, 추천 : 12
>인간은 그냥 손놓고 있을 위인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신앙가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말입니다.
사람이란 불안해서도 그렇게 손 놓고 있지 못할 위인들입니다.
뭘 하고 있어야 자기 딴에 안심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손 놓아라. 내가 일 다한다"고 하시면서 날마다 자기 백성에게 징계하십니다.
죽을 때까지요.
우리 인간에 대해서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해 하시는지, 오직했으면, "언제까지 내가 참으리요!"라고 탄식을 했겠습니까!
주님께서 다 놓으신 일을 가지고 우리 인간들은 이리 손대고 저리 손대면서 자기 마음에 맞도록 뜯어고치려 합니다.
그래서 아직도 인간은 회개가 중지되면 안될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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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세 가지 질문의 답변은 모두 '아닙니다'입니다.
김재국 2003-11-29 16:17:43, 조회 : 129, 추천 : 18
세심하고 맑은 답변에 감사드리며
저의 답변을 적으니
착오를 지적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
>>인간은 그냥 손놓고 있을 위인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신앙가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처럼 말입니다.
>
>사람이란 불안해서도 그렇게 손 놓고 있지 못할 위인들입니다.
>
> 뭘 하고 있어야 자기 딴에 안심을 합니다.
>(답변):스데반 집사도 설교하다가 돌맞고 순교한 걸로 아는데요.
이목사님도 설교하시고 수련회도 하시고 공부도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셔서 "손 놓아라. 내가 일 다한다"고 하시면서 날마다 자기 백성에게 징계하십니다.
>
>죽을 때까지요.
>(답변): 스데반의 순교는 스데반의 적극적 행위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구원받은 자의 순종의 행위가 아닌지요.
약속과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도 계약이라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맺어져야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순종의 서명(예수 영접)이 필요합니다.
사랑도 일방적 주입에 의한 강제적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성도개인과 세상대중, 3자의 교통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 인간에 대해서 주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해 하시는지, 오직했으면, "언제까지 내가 참으리요!"라고 탄식을 했겠습니까!
>(답변): 그것은 자기의를 내세우며 마음에도 없는 주여!를 외치며 제사와 예물을 중시하는 것에 반해
하나님은 성도의 마음과 사랑을 원하는 의미입니다.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거죠.
(넌 가만히 있어) 가 아니고( 네 마음을 열고 네 사랑의 마음을 달라)입니다.
창조주의 피조물에 대한 구애라고나 할까요?
>주님께서 다 놓으신 일을 가지고 우리 인간들은 이리 손대고 저리 손대면서 자기 마음에 맞도록 뜯어고치려 합니다.
(답변): 자기마음에 맞도록 하는 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자기,인간을 주님에 맞추는 것이 개혁입니다.
주님은 계속 일을 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이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집나간 탕자를 애타게 기다리는 아버지입니다.
>
>그래서 아직도 인간은 회개가 중지되면 안될 존재들입니다.
(답변): 예,회개는 시급합니다.때가 가까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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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세 가지 질문의 답변은 모두 '아닙니다'입니다.
이근호 2003-11-29 17:03:51, 조회 : 149, 추천 : 16
>사도행전 7:55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에 충만하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스데반의 행위는 성령님이 주도 하에 하신 겁니다.
성령님은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 주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4:11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영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통해 성도는 '자기 부인'을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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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감사합니다.
김재국 2003-12-01 13:49:34, 조회 : 106, 추천 : 11
감사합니다.
제 생각에는 김병구님의 교회개혁 주장도 "인간주도적" 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하나님도 세상의 성도를 통해 일하시지요.스데반의 성령충만이 증명하듯이요.
하나님 홀로 세상에 계시지 않고 수많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숨어계시고요.
한국성도들의 봉사행위도 자기의나 공로주의에서 탈피한
"성령님주도"의 역사는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믿습니다.좀 세상 것이 섞여있기는 하겠지요.
완벽한 분은 예수님 홀로 이시니까요.
바울의 순교나, 루터의 종교개혁, 이목사님의 목회도
부족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오류를 시정해보고자 하는 "자기부인"의 행위로 간주할 수 있겠지요.
바울이나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면죄부 값이 지금 얼마나 치솟아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3장의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책망과 칭찬
그리고 이기는 자에 대한 확신의 독려는
언제나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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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성령님께서 일하십니다
이상규 2003-12-01 16:14:22, 조회 : 104, 추천 : 12
바울이나 루터, 칼빈, 이목사님(영남노회)의 교회공격(개혁?)은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신자를 오직 은혜(십자가 공로, 사람행위 없음)로
구원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또, 은혜안에 들어온자는(은혜의 세계) 미처 몰랐던 자기의 죄성들을
보면서 (우리교회,11,30 오전설교 참조) 끝까지 사랑안에 있게해주심과(롬8장),
믿는자의 모든삶이 은혜뿐임에 감사 기뻐하며 서로 봉사하고 섬기며 ,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 예수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
자들입니다.
또, 먼저 믿는자는 ,이사실을 증거하는 일을,,먼저 믿게해 해주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일하시면서,
또 ,생명책에 기록된자를 만나게 해주십니다.(빌립의 이디오피아내시전도.)
그리고, 먼저 믿는자와 똑같이 선물(믿음)을 주셔서 믿게해주시고 ,
풍성한 삶을 살게해주시고, 또 증거케하는(고난포함) 삶을 살게 하십니다.(성령님께서)
그러므로 ,인간의 교회개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완성을위해서 일 하시는 성령님의(예수의 영)
증인(도구)일 뿐입니다.
이교회가 바로 성령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진짜 온전한 교회(그리스도 몸)입니다.
따라서, 김병구님의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언약신학을 잘읽어보시고 죄, 구원, 은혜, 성령, 교회...
이런 단어들에 대해서 다시 잘,정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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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김재국 2003-12-01 23:00:02, 조회 : 99, 추천 : 11
>바울이나 루터, 칼빈, 이목사님(영남노회)의 교회공격(개혁?)은
>
>오직 하나님이 선택하신자를 오직 은혜(십자가 공로, 사람행위 없음)로
>
>구원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의견) 선택과 은혜와 구원의 대상과 목적이 무엇입니까?
타락한 만물의 회복이고 계시록 21-22장이 최종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리고 노파심이지만 선택이 유대인보다 심한 선민사상이 됨을 우려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
>또, 은혜안에 들어온자는(은혜의 세계) 미처 몰랐던 자기의 죄성들을
>
>보면서 (우리교회,11,30 오전설교 참조) 끝까지 사랑안에 있게해주심과(롬8장),
>
>믿는자의 모든삶이 은혜뿐임에 감사 기뻐하며 서로 봉사하고 섬기며 ,
>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 예수님 다시 오심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
>자들입니다.
>
>또, 먼저 믿는자는 ,이사실을 증거하는 일을,,먼저 믿게해 해주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사용해서 일하시면서,
>
>또 ,생명책에 기록된자를 만나게 해주십니다.(빌립의 이디오피아내시전도.)
>
>그리고, 먼저 믿는자와 똑같이 선물(믿음)을 주셔서 믿게해주시고 ,
>
>풍성한 삶을 살게해주시고, 또 증거케하는(고난포함) 삶을 살게 하십니다.(성령님께서)
>(의견)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한편 조심해야 할 사항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함이라"(히4:1)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6:5-6)
>그러므로 ,인간의 교회개혁은 없습니다.
>(의견) 루터의 종교개혁을 굳이 성령님의 종교개혁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로마서의 저자를 바울이라 하지 성령님이라 하지 않고
스데반의 순교를 성령님의 순교라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경우가 다 성령님이 하신 일이지만 인간의 이름을 차용했다고 해서
자기의나 공로주의라함은 또하나의 율법주의의 함정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완성을위해서 일 하시는 성령님의(예수의 영)
>
>증인(도구)일 뿐입니다.
>(의견) 도구이고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아들을 내어줄 정도로
>이교회가 바로 성령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진짜 온전한 교회(그리스도 몸)입니다.
>(의견)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계 2:5) 성령님이 일하지만 순종의 주체는 성도입니다.
>따라서, 김병구님의 교회개혁은 하나님의 나라와는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의견) 그러므로 김병구님의 교회개혁은 계시록 2장 5절을 따른 것으로서
공로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언약신학을 잘읽어보시고 죄, 구원, 은혜, 성령, 교회...
>
>이런 단어들에 대해서 다시 잘,정리하시길 바랍니다.)
(의견) 권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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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희 2003-12-02 06:03:50, 조회 : 97, 추천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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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진정 성령님의 도구가 되면 '교회 개혁'이라는 발상이 안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근호 2003-12-02 07:36:34, 조회 : 109, 추천 : 14
성령님의 하시는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을 전파하는데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의이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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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무 박종희 2003-12-02 09:44:02, 조회 : 103, 추천 : 15
[re]정녕 교주가 되고 싶습니까?
이근호 2003-12-02 10:41:38, 조회 : 107, 추천 : 15
지킬 수 있는 능력은 성령께서 제공하십니다.
왜냐하면 성령님만이 말씀 자체의 능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인간의 힘으로 지킨다면, 자기 행위가 곧 남을 비판하는 절대 기준으로 등장됩니다.
또 한 사람의 교주가 등장되게 됩니다. 한국 교회 목사들처럼 말입니다.
정녕 교주 되고 싶습니까? 그들의 뒤를 따르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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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무
박종희 2003-12-02 11:33:08, 조회 : 80, 추천 : 12
[re]이제 반의 반 밖에 안남았습니다. 그렇다면 반의 반 마저......
이근호 2003-12-02 12:13:08, 조회 : 94, 추천 : 16
1. 성경책은 성령님이 쓰셨습니다.
2. 성경책에 대해서 제대로 반응을 나타내려면
먼저 성령을 받은 자에 국한 됩니다.
3. 성령을 받은 자에 특징은 '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알고 감사케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호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전서 2:12)
4. 그런데 '은혜'가 과연 무엇일까요?
자기 능력으로 해 낼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은혜일까요?
만약에 그렇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만 성도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다음에서
성령님도 철수하고,
예수님도 철수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도 철수하고,
남은 그 사람은 그 당사자의 윤리적, 종교적 테크닉과 기술과 지혜밖에 없게 됩니다.
5. 이제 이 사람은 예수님과 경쟁 관계에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라"라는 말씀을 놓고서
성령님의 '기도하심'과
그 당사자의 '기도하기'과 경쟁 관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만약에 그 당사자의 '기도 하기'가 정말 흠잡을데 없이 완벽하고 대단하다면,
성령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 내가 너에게는 손 떼기 잘했어. 이렇게 완벽하게 '기도하라'는 주의 망령을 너무나도 잘 지키니 어떻게 내가(성령님) 더이상 관여하리요"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사자는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당신들도 이제 저처럼 기도하세요. 저의 기도는 하늘 나라에서도 알아주는 기도라도 제가 모든 기도의 표준이래요"라고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할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잘난척하며 기도했던 바리새인처럼 말입니다.(누가복음 18장)
그런데 만약에
기도 가운데서 자신의 기도가 결코 완벽할 수는 없고, 역시 자신이 구원되는 것이 베드로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나(누가복음 22:31-32)나 성도를 위해서 지금도 간구하시는 기도나(히브리서 7:25/로마서 8:34),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이 기도(로마서 8:26) 덕분에 은혜를 아무런 공로없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칩시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그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항상 기도하라는 사도 바울의 명령에 따라 그대로 지키기로 작심하고 기도하시는데, 그렇다면 당신의 구원은 당신의 그 '기도 지시'에 따랐던 그 공로입니까?"
그 때 이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는 말씀에 따라서 하는 가운데 자신의 기도가 결코 예수님의 기도나 성령님의 기도처럼 완벽하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제가 구원받는 것은 저의 기도 준수 실력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공로와 성령님의 은혜입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당신이 '기도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안따랐으면 당신은 하나님의 은총을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터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그 시발점에서는 당신의 공로가 삽입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 때 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전에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기도케 하시는 것조차 성령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다른 사람이 말하기를, 그러면 당신은 목회자로서 교인들에게 기도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칠 것입니까?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도케 하실 것이라고 가르칠 것입니까 아니면 성경에 나와있는대로 무조건 기도하라는 기도하라고 강변하고 기도하는가 아니하는가 감시할 것입니까?"
그 때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 안해도 된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기도하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못본척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줄 것이요, 기도해서 구원에 이른다는 사람은 '당신의 기도 수고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오직 주님께서 관여하셔서 일하시는 것이요, 저렇게해도 오직 주님께서 일하심을 증거합니다. 남는 것은 우리 인간은 이래도 못났고 저래도 못났고 오직 구원은 주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만을 증거하는 자가 곧 성도."라고 말입니다.
귀하는 위의 1단계에서 5 단계 중에 어느 단계에서 어디서 삐꺽거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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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무
박종희 2003-12-02 12:33:42, 조회 : 81, 추천 : 11
[re]단순한 '수고'가 아니라 뒤에 따라 붙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2003-12-02 13:09:22, 조회 : 89, 추천 : 14
예를 들면,
'기도하라'라고 성경에 나와있다고, 어느 설교자가
"기도하라, 기도하라, 기도하라"만 연속으로 남발하는 설교자가 있겠습니까?
대부분 이렇게 합니다.
"기도하시면, 이런 효과, 이런 보상, 이런 대가가 반드시 주어집니다. 믿으십시요"라고 기도를 설명하면서 '기도하라'를 해석할 것입니다.
그러면
교인들 입장에서 '기도하라'는 수고 그 자체를 위하지 않고 그 뒤에 따라붙는 보상과 효과와 대가와 연계시켜서 기도 전체를 이해하고 따라서 깊은 기도 세계로 진압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됩니다.
문제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항상 그 효과나 보상이나 자신의 종교 노동에 따른 기대성이 예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에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다같이 복음과 의를 위해서 죽습시다"라는 식으로 기도를 독려하면
차라리 기도하지 말라는 말로 들리는 것이 인간들입니다.
사람의 행위에 반드시 뒤에 따라붙는 꼬리가 있고 그 꼬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와 자기 과시와 자기의 존재 긍정 같은 것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부터 갖고 나온 속성이 그러한 악마적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목회자에게는 '목회성공'이겠고, 장로들 같으면, 자기 교회 운영이 원활해지는 것을 원할 것입니다.
이렇게되니,
반드시 복음을 아는 자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 뒤에 따라붙는 그 실제 내용까지 겸해서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살고 자기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진짜로 복음 그 자체만을 사랑하는 자는, 이 복음의 말씀을 결코 한달란트를 그저 땅에 버려두는 그런 설교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살았다!"하고 감격스러워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만 믿게 되어 있습니다.(사도행전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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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님 인사드립니다.(두 번째 글입니다.조언감사)
김인찬 2003-12-01 23:30:58, 조회 : 119, 추천 : 3
인사도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조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개혁 신학 연구원을 졸업하고 군산노회(개혁)에서 안수 받은 목사입니다. 부족한 면이 많은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조언과 가르침을 주십시요. 두 번째 글을 올린다고 생각한 것이 잊어버리고 올리지 못했읍니다.
그럼 주안에서 평안하세요..................................김인찬 목사
정정: 먼저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 다는 글에서 모든 날이 주일이라는 것을 정정하려고 한다. 모든 날 중에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을 주님이 부활한 날이라는 의미(상징적)로 일요일이 주일이 된다는 것이다.
(내용: 예수의 죽음은 기념이며 예수의 부활은 소망이다)
주일이 주님의 부활로 모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주일이라는 용어가 가능하다. 이는 주님의 죽음과 동시에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일요일에 된다는 것에서 주일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날에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부활을 바라보는 것이다.
결국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은 주일이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고 모인 동시에 자신도 장차 주님으로 부활 할 것을 소망하고 모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은 부활을 기념하는 것보다는 주님에 대한 부활에 의해서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는 날이기도 하다. 사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보다는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된다. 기념은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기념이 아닌 소망한다는 것이다. 즉 주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우리가 기념해야 되는 것이 성립된다면 주님의 부활은 소망한다는 것이 성립된다. 왜 죽음이 기념이 된 것인가? 이는 이미 모든 육체로 있는 사는 자들이 예수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는 모든 육체가 부활한다는 것이다.
모든 육체가 죄가 있든 죄가 없든지 부활한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세상의 모든 육체의 죽음에 대한 죽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에 와서 예수의 죽음에 모두가 적용된다. 문제는 죄를 해결 받았는가? 가 중요한 것이다. 믿고 죽었는가? 믿지 않고 죽었는가? 이다. 예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죽음이라면 예수의 부활은 모든 사람에 대한 부활이다.
그러나 이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얻는 죄 사함과 부활로 얻는 북은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시간적으로 사람이 살면서 예수의 죽음에 적용되지만 육체의 부활은 동시에 부활한다. 모든 육체가 재림 때에 동시에 부활한다는 것이다.(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산자들에게 해당--순서대로)
그리고 성도는 주일에 이러한 부활을 소망한다는 것이다. 또한 성도만이 이러한 주님의 부활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들도 부활 할 것이지만 그들은 죄 사함을 얻지 못한 자이며 부활한 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있다가 부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활에 대해서 기다린다는 것이 주일의 의미가 된다. 과거 주님이 부활한 그날에 우리가 모여서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부활을 바라보는 이중성이 나타난다. 주님의 부활은 기념이 될 수 없다. 그 이유가 주님이 현재 부활의 주로 계신다. 기념이 아닌 지금도 계속 계시는 현재의 상태라는 것은 부활한 일요일에 우리가 모이는 것은 과거에 주님의 부활에 대한 것과 부활한 주님이 현재 살아계신다는 것으로 주일에 모이는 것에는 두 가지의 측면이 나타난다. 먼저는 과거 이날에 주님이 부활했다는 것이며 또 한 가지는 그 부활한 주님이 하늘에 계시지만 이 땅에 재림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성찬은 금요일에 죽은 예수에 대한 죽음을 기리는 것이며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에 그러한 기념을 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부활의 날인 일요일에 매주 모인다는 의미는 장차 부활에 대한 소망 가운데 우리가 모인다는 것이다. 장차 부활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다. 현재 주님이 부활한 몸으로 하늘에 계신다. 이는 이미 과거 예수가 육체로 죽은 사건은 기념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기념이 아닌 현재 우리가 부활한 주님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과거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는 것보다는(기념 보다는) 과거 부활한 주님이 현재 부활하신 상태로 하늘에 계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 주님이 세상에서 부활한 일요일 날에 모인다는 것이다. 이는 하늘에 계신 주님이 오실 때에 자신도 장차 부활 할 것을 믿고 현재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념이 아닌 현재의 소망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이미 영원히 지나갔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은 시작되었고 그리고 현재에도 살아계신다는 것으로 우리도 그 부활하신 것처럼 소망한다는 것이 합당한 이해이다.
그리고 이러한 죽으시고 부활한 주님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인도로 말미암아 먼저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이 먼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자들이 성도들이다.
믿지 않는 자들은 주님의 죽음과 상관없이 산다. 그렇다 해도 그들도 장차 성경에서 말한 것 같이 부활한다. 결국 그들은 주님의 죽음에 동참하지 않고 죽은 것이며 살아서 주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죽음에 동참한다.(죄 사함) 이는 주님의 부활을 동시에 소망할 수 있는 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아닌 이미 부활한 주님으로 자신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이 또 한 가지의 주일의 의미이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한다면 이는 지나간 것으로 현재에는 지나간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활은 영원한 부활이 되었고 그 부활의 주가 항상 있으며 그리고 그 부활의 주가 오시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의 신앙이 된 것이다. 만약에 부활을 기념한다는 것이 된다면 하늘에서도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 되어서 매주 일요일에 죽은 영혼들이 기념으로 모이게 된다는 이상한 주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장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부활을 기념하는 매주일의 모임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 나타난다. 부활은 영원한 성취이다.
그리고 현재 예수가 부활의 상태로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이 땅에서 기념이 될 수 없고 그 부활한 주님이 오심을 기다리며 소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의 기념인 주님의 죽음에 대한 것은(성찬-만찬)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부활하면 더 이상 기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또 이 세상을 떠나면 낙원에 있는 영혼들은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을 기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는 죄악 세상에서 구원하심을 찬양하고 있으며 오직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부활의 육체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과 우리 살아있는 자들의 공통점은 부활에 대한 기다림이라면 다른 것은 육체로 살아있는 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 있지만(육체의 죄 사함의 기간) 육체를 떠난 성도들의 영혼들은 사실상 기념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미 예수로 함께 죽어버린 자들이 된 것이다. 즉 예수와 함께 육체로 죽어서 예수와 함께 자신의 육체가 지나간 과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살아있는 자들은 아직 예수와 함께 죽어야 되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들은 자신들이 사는 육체의 세상에서 과거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기념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부활이 있기 전까지 육체로 있는 자들이 기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를 떠난 자는 오직 예수의 부활만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일이 장래 재림으로 오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문자적으로 성경에 의해서 가능한가? 성경은 이 날에 대해서 어떤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그러나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구약에서 창조가 육일 동안에 되었고 그리고 안식하시고 그리고 새로운 날이 출발한 것이다. 즉 제 7 일은 안식의 날이라면 이는 모든 육체의 쉼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 8 일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이 제 8 일이 의미하는 날은 창조 때에 하나님이 쉬시고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이날이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새로운 시작에 의해서 새로운 출발이 된다. 왜 제 7 일에 새로운 출발이 아닌 제 7 일을 거쳐서 제 8 일을 새로운 출발로 이해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제 7 일에 안식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 8 일이 공식적인 새로운 첫날이 된다. 제 8 일이라는 주일이 첫날이 된다. 그러므로 제 8 일이 의미는 문자적으로도 이해할 때 주님의 부활이 그날에 이루어진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의 육체의 안식인 토요일을 거쳐서 주일날 부활한 것이 된다. 이는 모든 육체의 안식인 죽음에 대한 새로운 출발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세상에 대한 첫 출발이 창조 때에 하나님의 안식으로 그 다음날이(8일)로 되었다. 이것이 첫 세상 우리가 창조 된 세상에서 된 것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의 창조는 새 창조로 주님이 오시는 재림으로 시작된다. 주님이 왜 제 7 일을 거쳐서 제 8 일에 부활하셨는가? 이는 재림으로 오는 새로운 날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가 대단히 크다는 것이다.
예수가 토요일에 안식한 것은 모든 사람이 세상에서 육체의 죽음으로 안식에 들어가지만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한 것은 모든 사람이 그러한 제 8 일의 시작과 같이 부활로 나온다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과 함께 죽고서 그의 안식에 들어가는가이다. 이렇게 일요일에 부활한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상징적인 부활의 날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간단히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주님의 육체적 죽음--------주님의 영혼의 안식-----주님의 육체적 부활이 적용되는 것은
성도의 육체적 죽음---------성도의 낙원의 안식----성도의 육체적 부활로써 재림에 의해서 나타난다.
이는 주님의 금요일과 같이 모두가 먼저 죽어야 된다는 것이 세상에서 실재적인 죽음으로 나타나며 그리고 주님의 안식과 같이 세상을 떠나서 안식의 처소에 영혼이 안식하며 그리고 주님이 부활한 것 같이 그 낙원의 성도들의 영혼이 육체를 입고 부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예수에게는 죽음이 과거가 되기에 우리가 그의 죽음을 기념하고 예수에게는 지금 부활로 있기에 우리가 부활의 주님이 오시는 것을 소망한다. 결국은 부활에 대한 소망은 과거 부활을 기념하는 것보다는 하늘에 있는 예수의 오심을 기다다리면서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다.
앞서 글에서는 예수의 죽음과 안식과 그리고 부활의 관점에서 금, 토, 일의 사건으로 연결해서 살펴보았지만 여기에서는 그 적용으로 접근 한 것이다.
특히 우주적인 관점에서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우주적인 관점에서 모든 사람들의 안식과 우주적인 관점에서 모든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서 나누었다.
믿는 자들은 이러한 우주적인 관점에서 안식이 낙원의 안식이 주어지고 믿지 않는 자들은 음주에 그대로 있다는 것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 했다는 것이다.
결국 안식인 제 7 일의 의미는(창세기의) 세상의 기간에서의 임시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원한 안식이 아닌 재림 때까지 있는 안식이라는 것이다.
7이라는 숫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수가 된다는 것이며 그리고 이러한 완전한 수는 육체로 사는 사람들의 제 6 일이라는 기간과 제 7 일이라는 하나님의 안식이 세상에서 있을 것을 두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제 7 일의 안식이 끝나는 그 때가 재림으로 오는 8일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출발이다. 제 7 일에 하나님이 안식하신 그 안식이 끝나는 때가 새로운 출발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제 6 일안에 머문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스도가 와서 이재 마지막 제 7 일의 안식을 성취하시고 그리고 이제 제 8 일이라는 영원한 출발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다. 그들이 우리이며 그리고 제 7 일의 안식에 들어간 성도들이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영원한 안식이라는 의미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안식을 의미하지만 그 기간은 정해진 때까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이 재림으로 육체를 입는 그 때이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의 부활을 기다리는 재림의 소망을 두고 제 8 일이라는 일요일 즉 주님이 부활한 날에 모여서 그 때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의미는 이러한 의미이며 그가 하나님이 이루려는 안식을 이루는 주인으로써 온 것이다. 그가 안식을 이루기 위해서 무덤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다.
그 날이 토요일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구약의 유월절이 금요일이 된 것과 구약의 안식일이 토요일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구약의 오순절이 신약의 영적인 교회의 출발일이 된 것이 우연이 아닌 약속의 성취라는 사실이다.
마지막에 재림으로 오는 그 새 하늘과 새 땅은 제 8 일과 같은 새로운 시작으로 영원한 시작이며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소망으로 모인다는 것이다. 그날에 주님이 오시는 것과 그리고 우리의 부활의 몸으로 그의 영원한 혼인 잔치에 참여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현재 이 세상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제 6 일이라는 것에 있고 믿고 죽은 자들은 제 7 일이라는 참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 있으며 그리고 제 8 일이라는 영원한 시작인 그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창조의 제 8 일의 출발이 죄로 말미암아 불완전한 출발이라는 것이며 장차오는 재림의 날인 제 8 일의 날은 완전한 출발로 영원한 출발이 된다는 것이다.
한 번은 6일에 창조된 아담과 화와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이 된 것이며 이는 아담으로 오는 모든 자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영원한 8일이라는 영원한 출발은 더더욱 소망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는 제 6 일이라는 죄악 세상에 오셔서 그리고 제 6 일이라는 곳에서 죽으시고 그가 하나님의 참 안식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우리에게 제 7 일의 안식을 성취하신 것이다. 제 8 일의 영원한 출발은 예수로 될 것이며 그 순서는 먼저 제 6 일안에 있는 자들이 예수가 6일이라는 세상에서 죽은 것처럼 그와 함께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죽어야 되며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예수가 이룬 하늘의 안식 처소인 제 7 일이라는 영원한 안식에 믿음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예수가 제 8 일에 부활한 것처럼 참으로 오는 영원한 제 8 일인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구약의 제 7 일이 마치 성도의 안식에 대한 그림자였다면 신약에서는 안식에 실재로 들어가는 것과 그리고 제 8 일에 부활한 그것이 장차 예수로 오는 영원한 출발인 재림의 날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룬 제 6 일에서의 죄 사함과 이루었으나 죽음으로 들어가야 할 제 7 일의 안식과 장차 이루어질 제 8 일의 재림 사이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두 가지 소망이 있다면 믿음으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과 주님이 오시는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김 인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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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성도는 특정한 날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고 구원받습니다.
이근호 2003-12-02 07:32:14, 조회 : 104, 추천 : 11
특정한 날에 의미를 두지 마세요.
성경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하지, 결코 '자신의 구원 문제'나 '교회 문제'에 집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8일이라는 개념'도 성경에서 용납하지 않을 뿐더러, '부활의 날'이라는 개념도 성경적으로 맞지 않는 개념입니다.
이 차에 다 잊어버리고 (인간들의 역사적 인식이나 시간 의식은 스스로 또 다른 굴레를 자신에게 뒤집어 쒸우는 식입니다.)
그저 예수님의 공로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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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성도는 특정한 날을 믿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믿고 구원받습니다.
김인찬 2003-12-02 15:05:18, 조회 : 101, 추천 : 17
목사님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주일과 안식일에 대한 문제는 사실 신약시대에서는 더욱더 분리되어야 한다는 새악에서 연구한 것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나아가는 시대에 날짜나 기타의 의식들이 우리 신앙의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 인간의 의식에 종속이 되지 않는 한국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럼 평안하세요..................김인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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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 신약의 헌금이 될 수 있는가? 양심선언!\\\\\
김인찬 2003-12-02 14:57:52, 조회 : 144, 추천 : 2
십일조 문제는 민감한 문제이지만 저의 개인적인 소견입니다. 목사님들의 조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김인찬 목사
(율법 안에 있는 십일조와 은혜 안에 있는 헌금)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적인 요소였다. 이를 부정할 수 있는 학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에 근거하여 신약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내 놓고 시행해야한다.
십일조가 헌금이라는 주장은 어떤 변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약시대에서 영적으로 승화시켜서 십일조를 드린다는 주장을 하려면 구약의 절기도 영적으로 승화시켜서 믿음으로 지키고 헌금을 드려야 된다는 주장을 해야 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시대에 짐승으로 제사를 드린 것도 승화시켜서 신약시대에서도 짐승으로 제사 드리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제사 드리면 문제없다는 무지한 주장과 같다.
구약시대에는 십일조가 의무였다. 이것은 율법적 헌금이라는 것이며 신약에서 주장되는 헌금은 의무가 아닌 믿음의 표현이며 자원과 기쁨으로 드리는 원리가 정당하게 주장되고 있다. 성경에 명백히 나타난 증거가 있으며 이는 십일조가 초대교회에서 주장되지 않고 그 어디에도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히브리서에는 구약의 각종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과 기타의 것 등이 지나간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도가 헌금을 드리는 것은 누구의 강요나 제도가 아닌 감사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이다. 의무는 더 이상 헌금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며 누구도 헌금의 액수가 정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에서 율법적 의식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십일조가 신약의 헌금이 되려면 율법을 지켜야 되는 정당성을 신약의 초대교회와 그 말씀에서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십일조가 드려졌다는 주장을 합리화시키려 한다면 율법이 있기 전에도 제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율법이 있기 전에는 율법과 같은 기능을 양심이 한 시대이다. 양심이 율법과 같은 기능을 한 것이다. 십일조는 더 이상 헌금이 아닌 것이다. 이미 초대교회에도 없었던 십일조가 헌금이 되어지는 것은 한국교회의 율법적인 적용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고 믿음으로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헌금은 자원으로 드리는 것에서 어떤 규제나 그리고 강제성이 없이 드려져야 하나님이 원하는 헌금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헌금을 드리면서 자유롭게 드릴 자유가 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누구도 헌금에 대해서 강요할 수 없다. 그가 결정하는 순수한 헌금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헌금의 강조는 개인의 믿음보다도 교회의 목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교회의 건축이나 기타 물건을 사는 것 등이다.
이러한 잘못된 헌금관은 한국교회가 부를 축적했으나 참 신앙으로 헌신하는 삶이 사라진 원인이 된 것이다. 헌금의 목적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일에 작정을 시키고 걷어내는 일은 안 되는 것이다. 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 십일조가 된 것이며 이러한 일을 평생 해야 된다는 것이다. 평생 작정된 헌금이 십일조라는 것인가?
회비씩으로 내어야 된다는 것은 교인이라면 드려야 된다는 의무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잘 실천해야 된다는 것이 신약의 헌금과 전혀 다른 사상이라는 것이다. 신약의 헌금은 자원해서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며 드릴 때마다 언제든지 마음의 원대로 드려야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헌금은 자원해서 드리기에 각자의 헌금이 다르게 나타나게 된 다는 것이다. 믿음이 다르듯이 믿음의 표현도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구약의 십일조의 용도가 신약에서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신약시대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는 분명한 증거는 헌금과 구제금과 연보 등이 나오지만 절기나 기타의 구약적인 율법적 제사나 그 방법이 사용되지 않고 있다.
십일조가 헌금이라고 주장한다면 헌금은 자원과 기쁨이 전재된다. 그런데 십일조는 자원의 성격에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원은 규범이나 경계가 없는 스스로가 드리는 것이다. 신약의 구원이 각각 다르고 그 믿음도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같을 수 없다. 개인의 수입의 얼마를 정한 자체가 이미 자원에서 규제라는 것이다.
십일조가 헌금이라는 주장이 되려면 오순절 이후 성경에서 분명하게 십일조가 주장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다행 이도 그런 구절이 없다는 것과 오히려 구약의 것들을 과거의 율법적인 것으로 치부한다는 것은 십일조가 헌금이 될 수 없는 명백한 이유이다.
한국교회의 십일조는 대단히 큰 교회의 제정에 몫을 차지한다. 이러한 이유로 십일조가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이뿐 아니라 일천 번제나 신약의 절기헌금 등은 바울이 가르친 사상에 의해서 비판을 받을 만한 내용이다. 바울은 절기나 안식일이나 날이나 기타의 것들이 신앙의 규범으로 남지 말아야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헌금은 자원이 아닌 정해놓은 틀에 의해서 헌금을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으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원치 않는 헌금은 단 돈 백원도 싫어하신다. 교회에 중직이 되어서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그가 교회에서 직분 자로써 부도덕한 자로 여길 것이다. 이러한 규제가 신앙의 기준으로 여기게 된 것 자체가 문제 된 다는 것이다. 십일조가 구약 성경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또 이를 거역하면 도적이 된다면 교회에 나오는 모든 평신도들에게도 강제로 걷어야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신약시대에 불편하다면 이는 없어진 구약의 제도가 분명한 것이다. 우리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구약의 십일조냐? 신약의 헌금이냐? 우리가 율법에 의해서 신앙이 되지 않는 것은 이미 우리는 율법을 뛰어넘는 은혜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한 은혜가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에게 만약 요구한다면 우리가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감사에 규제가 없으며 자원에 경계가 있을 수 없다. 십일조는 드려야 된다는 것이 강조된다. 그러나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이는 반강제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헌금이 아까워서 드리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를 징계하지 않으신다. 다만 안타까워하실 것이다. 그의 믿음이 이것 밖에 되지 않는 것을 섭섭해 할 것이다.
그러나 원치 않는 규제로 드리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으로 범죄 하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그 죄가 더 크다는 것이다.
이미 만들어 놓은 십일조를 교회의 중직이 감히 피할 수 있을까? 한국교회의 가장 안타까운 것은 내 것을 드린다는 신앙이다. 그것이 각종 규범과 같은 의무적인 십일조 신앙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이었다. 이것이 신약에서 지켜야 된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십일조를 드려야 된다면 구약의 제사도 드려야 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구약의 짐승을 드리면서 그리스도를 생각한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십일조 말 자체가 헌금이 아닌 십일조이다. 그리고 헌금은 이미 신약 초대교회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십일조는 헌금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이는 순수한 헌금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헌금이 사용되어질 것이다. 운영이 무서워서 바른 길을 피한다면 그 결과는 영적 파탄으로 나타날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가톨릭이 세상과 타협하자 오늘날 가장 부패한 교회의 이단이 된 것을 기억해야 된다.
십일조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개혁에 대한 중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평신도들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지도자의 개혁에 호소한 것이 사실이다.
헌금이 자원해서 드리는 순수한 헌금이라면 이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이상적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최고의 것이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가 헌금을 드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 교회는 믿음과 상관없이 헌금을 걷고 있다. 회비씩으로 걷는 헌금이 무슨 교회의 유익이 되겠는가? 실제로 교회의 선교비을 보면 현저히 약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교회는 돈으로 일한 것이 아닌 믿음에 의해서 일한다는 것이다. 선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헌금을 걷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중직 자도 교회에서 의무적으로 할 수 있는 헌금이 지금의 십일조와 같은 제도이다. 헌금 그것은 신성한 것이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그 말 자체가 율법적인 것이다.
십일조에 대한 합리화는 예수가 언급한 것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면 예수가 죽기 전에 있었던 대제사장과 제사 등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예수당시의 구약의 모든 절기가 유효한 것이다.
십일조만이 아닌 구약의 모든 것이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죽기 전에 예수가 십일조를 언급한 것으로 십일조가 드려지다면 다른 것도 지켜야 된다. 예수도 유대의 절기 등을 인정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이 구분되게 된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재는 유대의 모든 것이 과거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재 새로운 영적인 질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유대인이 예수 죽기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었으나 이재는 영적인 공동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새 공동체가 과거의 것에서 이미 벗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제사 제사장 그리고 법등이 이제 무효화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된 것이 영적제사 만인 제사장 그리고 영적인 질서라는 사실이다. 이미 백성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은 유대인의 모든 의식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인 예수로 말미암는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역으로 말하면 육적인 이스라엘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과 같은 위치가 된 것이다. 그러면 십일조가 육적 이스라엘에서 사용된 것이라면 그 범위가 이스라엘의 범위이며 이스라엘의 십일조라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