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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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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중동문제 해결 방향] 2003-11-20묻고답하기[신학]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중동문제 해결 방향] 2003-11-20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중동문제 해결 방향
김병구 2003-11-20 13:37:09, 조회 : 117, 추천 : 15

이락 문제에 관련하여, 보수계는 파병을 찬성하고, 진보계는 파병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이 됩니다. 저는 사회정의의 문제 있어서는 진보계와 생각을 같이 하는 편이나, 복음의 문제 있어서는 보수계와 생각을 같이합니다.

진보계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나 선교 보다는 인도주의의 탈을 쓴 인본주의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그 분들의 신앙의 내용이 자유주의신학이거나 그 것에 가까운 것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저는 복음주의 신앙을 가진 자로서 예수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 님이 없는 곳에는 길도 진리도 생명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자유주신학 신봉자들이 어서 속히 복음으로 돌아 오길 바랍니다. 그 들에게 생명이 없음을 애통하는 심정이 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기적인 안목으로 눈 앞의 현상에 정신을 팔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현상의 원인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중동이 지난 수 백년 동안 인류역사의 발전을 따라오지 못하고 오늘 날도 빈곤과 독재와 테러의 온상지가 되어오고 있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의 뿌리에 철저한 율법주의인 이슬람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호멧과 같은 한낱 선지자로 봅니다. 그리고 마호멧이라는 사람이 펴낸 코란을 경전으로 그 것에 수록된 모든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세인들과 같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정신은 버려두고 껍데기인 외식과 의식과 형식만 좇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정신이 없기에 그러한 율법은 사탄의 종 노릇 하는 지배자들이 인민들을 수탈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뿐입니다.

정말 중동의 인민들을 불쌍히 생각하고 도와주고 싶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이 세상에서의 경제적 삶을 개선해야 한다는 점에서 보다도 예수를 모르고 지옥 불에 떨어질 저들의 영혼을 구해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동은 1000년이 되어가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혹시나 기독교로 전향하는 사람은 살 수 없을 정도로 핍박하거나 살해합니다. 저들에게 길과 진리와 생명을 줄 복음이 선교될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민주주의를 중동에 심어야 합니다.

이번 이락 전쟁이 반드시 잘 된 전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잘못을 이용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역사를 우리는 구약 성서에 많이 봅니다. 만일 중동을 복음화할 기회를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셨다면, 이번의 기회야 말로 수 백 년 만에 주신 기회입니다.

십자군은 실패했습니다.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번의 이락 전쟁에 임하는 미국국민들의 과반은 십자군 시대 유럽인들 보다 훨씬 훌륭한 크리스천들입니다.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미국은 이락의 국민들에게 전기, 수도, 학교, 식량과 의복을 제공하고 산업 시설을 복구하는 데 수 백억 달러를 투입하고 있습니다. 극악 무도한 후세인의 잔당들이 아직도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이락인의 과반은 미국을 해방자로 맞이하고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할 때, 2차 세계 대전이나 6.25 전쟁에서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이 패배했었다면 우리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나 있었겠습니까?

미국도 많이 타락했지만 그래도 인류의 희망을 볼 수 있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아직은 국민의 과반이 크리스천이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유럽의 교회들은 텅텅 비어있으나 미국의 교회들은 꽉꽉 찹니다.

테러와의 전쟁은 전세계인이 참여해야 할 전쟁입니다. 특히 크리스천은 그러합니다. 테러는 사탄 자기 종들을 테러리스트로 만들어 인류를 모두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동원하는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나치 히틀러나 훗세인, 빈 라덴 같은 친구들은 모두 사탄의 큰 종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훗세인 잔당들의 마지막 발악에 손을 들고 연합군이 철수해버린다면, 중동의 인민들과 중동의 정세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자비한 보복 살인이 자행될 것이고, 이락은 전 세계의 모슬렘 테러리스트들의 요세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량 살상용 생 화학무기나 핵무기를 입수한 저들의 테러와 폭력 앞에 전인류가 전전 긍긍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한반도인들 그들의 테러로부터 안전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훗세인의 잔당들을 몰아내고 자유 이락인들이 민주주의 헌법을 제정하고 풍부한 석유자원을 선하게 이용하여 과반의 국민이 자유롭게 잘 사는 민주주의가 꽃피게 된다면 전 중동의 민주화가 가능해질 것이며 민주화와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중동 천지에 자유롭게 전파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의 둘 중에 어느 것을 기뻐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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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에 명목상 비기독교도들만이 사탄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까?
이근호 2003-11-20 14:52:19, 조회 : 150, 추천 : 11

제가 보기에는 한국교회도 사탄으로 보입니다.

사탄이냐 아니냐는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면 교회를 믿느냐로 결판될 것 같군요.

그렇게 되면 전도의 대상은 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교회 다니고 심기는 그런 사람들도 전도의 대상입니다.

교회 선교와 예수님의 전도가 확연히 다릅니다.

교회 선교는 장사속이라서 늘 교회 존립을 긍정하게 만들고 또한 사수하게 만들지만.

예수님의 전도는, 성도가 아무 것도 한 게 없음을 절실하고 한없이 느끼게 만들기 위한 전도입니다.

따라서 교회 다니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는 다 잊고서,

자기 잘 나고 우수하고 멋있는 교회에 다니는 재미를 인생을 보내는 그들도 전도의 대상입니다.

전도는 어떻게 하는가?

사도행전에 보니,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이 인위적인 요소가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들이 교세 넓히고자 하는 선교전략적 차원에서 만난 것이 아니라

둘 다 지금도 예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만나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자기 사람을 이용해먹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충성된 일꾼으로 써먹기 위한 생각으로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복음만 쳐다보며 살기 위해서 만나는 겁니다.

마치 하늘 쳐다보다가 맨홀에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이미 성도된 자와 앞으로 성도될 사람의 만남은,

그 머리 속에 그 어떤 선교 비젼도 없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된 교회는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옮겨지라고 만든 것이 요한계시록의 7촛대입니다.

오직 주님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교회는 날마다 거기서 생기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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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중동문제 해결 방향 김병구 2003/11/20 15 118
[re] 인류의 희망이 미국?
김재국 2003-11-21 12:14:47, 조회 : 119, 추천 : 24

하나님의 뜻이 폭력적 해결은 아니겠지요.
로마를 폭력으로 박살내지 않았듯이
하나님의 방법은 사랑과 대속이 아닐까요?

미국의 침략전쟁이 독재자의 폭압에 신음하는 이라크 국민의 해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미국의, 특히 무기판매업자와 경제권력가의 탐욕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한 패권주의의 표출
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도 미국의 경제 군사적 볼모의 상태아닙니까?
미국은 현대의 애굽의 표상이지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은 현대 애굽 (미국) 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합니다.
우리의 의지는 애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진리에 의지하지 못하고 강대국에 의지하는 연약한 한국을 애통해해야 합니다.

애통해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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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인류의 희망이 미국?
이근호 2003-11-21 12:48:47, 조회 : 116, 추천 : 10

한국이 미국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습니다.

서로 사이좋게 살아야만 합니다.

마지막 불심판이 터져 버리는 그 날까지는 말입니다.

이미 온 세계는 한 가족입니다.

따라서 가족 사이를 종교적 문제로 이간질 하는 자들은 다 같이 힘을 합해 왕따 시키는 것이 이 세상의 생리입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생존이 유리한 대로 패를 만들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괜히 이념 따지고, 종교 따지고, 사상 따지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디모데전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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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인류의 희망이 미국?
김재국 2003-11-21 13:12:59, 조회 : 86, 추천 : 15

이목사님의 이번 답글은 종교다원주의 또는
상대주의(절대 진리와 가치관이 없다는)에 입각한 논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국이 추구하는 세속적,물질적 가치관과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종류가 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추구하는 바알리즘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은
성도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념, 사상, 종교 는 분명히 절대 진리에 근거한 예수님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외의 이념,사상, 종교는 바로잡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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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
김재국 2003-11-21 13:48:30, 조회 : 94, 추천 : 15

디모데 전서 2장 2절을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대한 합리화에 적용하는 것은
마치
로마서 13장 1절 권세에 굴복하라는 말씀을
전두환의 조찬기도회에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권세의 근거와 사용범위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야함이 전제되어야지
독재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데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뜻에 배치되는
폭력과 압제 핍박에 대한 것입니다.
극복해야할 독재나 폭력을 합리화하는데
성경을 확대적용하는 것은 범주의 착오라고 여겨집니다.

임금과 높은 지위가 하나님의 뜻에 반하면
성도는 비폭력적 저항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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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신학원 교수회에서 쓴 안식일과 주일성수, 십일조 문제 !!
구득영 2003-11-20 22:55:30, 조회 : 213, 추천 : 13

조그마한 논문형식인데, 강의듣기 사이트에 올려놓겠습니다. 특히 안식일과 주일성수에 관한 글은, 지금까지 있었던 역사적인 논쟁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놓았습니다. 물론 결론은 너무 기대하지 마시고 말입니다. 왜 우리한국가 주일성수의 신앙고백을 하고있는지, 그 이유가 있더군요. 물론 역사적인 배경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요즘 EBS에서 목요일 저녁 10시에 유익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소돔과 고모라, 이번 주에는, 에구 저도 못보고 놓쳤네요. 라암세스가 어쩌고 하는데... 성경고고학에 관한 것인데, 시간이 그렇게 아깝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방송하면 녹화를 해서 여기에 올리려고 했는데, 저같은 사람때문에 이런 다큐는 인터넷 방송은 않고 공중파로만 하는군요. 그래도 비디오로 녹화해서 다시 동영상으로 만들면 되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는 안되겠지요. 사실 이런 식으로 만든 다큐물들이 인테넷상에 제법 있기도 합니다. 대단한 열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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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려신학원 교수회에서 쓴 안식일과 주일성수, 십일조 문제 !!
이근호 2003-11-21 08:15:36, 조회 : 274, 추천 : 15

>고신 교단에게 천국 심판권이 없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이상 고신 교단을 가짜 천국을 유포하고 있는 악마의 전당입니다.

역사성을 들고 나오는 것은, 오직 복음으로만 심판한다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정을 정면으로 대들어 폭파시키겠다는 짓 밖에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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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해석에 대한 몇 가지 생각
구득영 2003-11-22 00:55:24, 조회 : 187, 추천 : 14

제가 졸업했던 고려신학대학원 게시판에 올렸던 글입니다.
저는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서 적었는데, 강도(?)가 약했다면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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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해석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목회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해야 하는지, 새삼스럽게 여기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어떨지 몰라도, 그러나 그런 고민이 없으면 목회자의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로서, 목회자 자신의 꿈과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말씀이 왜곡되어 전해지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몇 자 적어봅니다.

먼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신약(새언약)과 구약(옛언약)을 바라보는 태도가 좀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왜 신약과 구약으로 구별되어 있는지, 여기에 대해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전후로 그렇게 되었다고 넘어가지 말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가나안이라는 땅이 신약에서는 땅이 아니라 천국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신약과 구약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율법인데, 이 율법이라는 것도 분명 그것이 구약에서는 복음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들의 모습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신구약을 통틀어 일관되게 그 흐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약속' 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약'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구약의 틀 안에서는 제대로 그 모습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그 실체가 밝혀지는 것입니다.

구약은 아무리 구약 안에서 해석해보아야 율법 이상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 혹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둘을 똑같은 의미로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약의 틀 안에서 보면, 도대체 이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기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폐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어떤 경우에는 또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에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할 율법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율법으로 나누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해석을 살펴봄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요즘 인터넷 공간에서 종종 바울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 당시에도 유대주의자들이 그러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와 다른 것은,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로 받아들이지만 바울의 주장은 예수님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사에서도 이런 자들이 있었던 줄 압니다.

왜 이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바로 행함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행함을 강조했는데, 왜 바울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행함을 저는 율법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의 특징이 바로 행함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로마서에서 행함과 믿음이 치열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십일조나 안식일과 주일성수 문제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틀이 좀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십일조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은 비록 구약의 율법이지만 이것을 부인하지를 않았고,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런 율법을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그것은 율법자체가 아니라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해 총회에 낸 교수회의 글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연 갈라디아서나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율법을 반대한 것이 과연 그런 이유만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서에서도 그러하고 말입니다. 아니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 그런 율법주의자들이 누가 있습니까? 한국에 사는 유대인들이 아니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율법을 공격하는 것은,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만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옛언약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의 율법주의 모습에 대한 이 세상을 향한 공격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러한 태도는 로마서에 의하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속성인 죄로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자신들의 행함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이고 말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드러난 인간의 죄, 즉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종교적 행태들,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에서 믿음이 이야기면서, 그 믿음은 오직 '아들'로 말미암는 것임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로마서의 주제가 '아들'이지 소위 말하는 '이신득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그 누구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가 자기가 아니라 주체가 그분에게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과 율법주의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인류의 대표자로서 잘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당시에 그런 짓을 했으면, 역시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있는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십일조, 안식일, 그리고 예배당이 아닌 성전으로 불리우는 한국교회 등,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물론 성경말씀이 이런 시대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기에 대한 상황인식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옛언약을 대하는 모습과 옛언약을 대하는 태도는 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에 의해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서의 내용들은 바울서신서들에 의해서 보다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산상설교집'은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명령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과연 예수님의 명령들을 오늘날 우리가 문자적으로 그대로 지켜야할 것들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저는 이 책이 복음서와 바울서신서들을 잘 연결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창수 목사에 의해 두 권으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이 두권의 책들을 보약으로 생각하고서 푹 달여서 먹어보라던 정근두 목사님의 수련회 말씀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물론 요즘도 그러한지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위험한 생각일지 몰라도, 저는 각 복음서들의 위치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그런 과도기적(?)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들을 사도바울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예수님의 말씀도 새롭게(?) 해석하는 그런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새로운 바울복음이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새롭게 조명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그분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가장 확실히 드러나고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은 구약대로 해석해서 율법을 지키자고 하고, 복음서는 복음서대로 해석을 해서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자고 하고, 그렇게 되니까 실질적으로 율법이나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스스로 지킬 만한 것을 취사선택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이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서신서에 도착하게 되면 당연히 엄청난 혼란에 당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강조해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도저히 서게 될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왜 성경이 굳이 66권이나 필요하느냐는 점입니다. 창세기 다음에 바로 복음서로 들어오면 안 되고, 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거치고 역사서를 거치고 선지서를 거쳐서,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지나서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오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옛언약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수백 수천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원해서 수천년에 걸쳐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옛언약이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일들이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들의 그 죄악을 제거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고, 어설픈 그런 낭만주의를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직접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렇게 신약과 구약이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 대해 사도바울이 목숨을 다해서 증거하고 글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떠합니까? 이러한 십자가가 증거되고 있습니까? 구약에 안식일과 십일조에 관한 계명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절기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차지 않는 그 유명한 유월절이 있는데 왜 엉뚱하게도 맥추절이 지켜지고 있습니까? 유월절은 성찬식으로 대체가 되었던가요? 과연 그래서 지키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은 바로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의 이 어리석은 두 눈에 보이는 교회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이 눈에 보이는 교회유지를 위해서 구약의 율법들이 총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율법을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안식일과 십일조 등이 긍정적으로 논의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왜 예배당 건물이 없었습니까? 그들이 가난해서 교회를 지을 돈이 없었습니까? 평소에는 교회라고 하다가도 교회당만 지으면 '성전건축' 이라고 하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정말이지 마음에 울분이 돋아서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제대로 정리되지도 못한 어설픈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적다가 보니 또 설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에 봉사한다는 핑계로 학업에 게으름을 피웠던 어리석은 선배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몇 자 적어보았다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엉뚱한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자와 여러분의 상급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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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불신이 불신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필히 공격하게 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근호 2003-11-22 07:38:32, 조회 : 196, 추천 : 12

십자가란 단지 "너희들이 잘못된 죄인"이라는 영화포스터처럼 그저 공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힘 싸움에 돌입할 수 밖에 없는 힘이 자체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겁니다.

상대방이 다른 상대를 가만 놔두지 않는 '움직이는 전투장'에 이미 놓여 있습니다.

고요한 물결들이 그저 평화롭게 섞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얽키고 설키면서 소용돌이 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런 와중에서

십자가 순교의 사건은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터져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말은 이런 식으로 장식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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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성식 목사님의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평-더이상 토를 단다는 것이 도리어 흠집이 될 정도입니다.
이근호 2003-11-22 20:58:00, 조회 : 242, 추천 : 22

『하나님의 선택』을 읽고
저자: 이 근호
출판사: 대장간(서울:1996)

본 서는 기존 신학에 대항하여 복음의 뿌리에 대한 깊은 인식론적 단절의 경험 속에서 배태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존 신학이란 무엇일까 라고 질문해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기존신학이란 하나로 싸잡아서 몰아 세울 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천년 교회사에서 배태된 그 많은 사상들을 하나로 그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함을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다양한 신학사상의 맥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단호하게 기존신학에 흐르는 중심적인 내용은 동일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저자가 시비 거는 기존신학의 경향성과 방향성은 무엇일까요? 저자는 기존 신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인간 존재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구원욕망을 위해서 짓밟히고 있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며 기존 신학의 움직임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중 속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봅니다. 자, 그러면 저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선택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아마 다음의 명제는 저자의 중심사상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문구이지 싶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존재기반을 끊고 그 가운데서 새롭게 창조해 나가시는 주의 이름의 활동성]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몇 가지 중요한 저자의 논점이 도출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위상을 새롭게 조명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하나님-인간'관계로부터 가졌던 신학적 지평을 '죄-의'의 관계로 탈지평화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셋째. 버림과 그리고 약속 안에서 되찾는 과정으로서 기능론적 선택을 부각시킨 점입니다.

자, 그럼 이제 저자의 주장을 한 번 따져봅시다. 먼저 왜 "이름"이라는 좀 낯설은 신학적 주제어를 성경의 중심사상에 놓고 있는 걸까요? 이유는 위의 명제에서 제기된 것처럼 인간의 존재기반이 항상 이름의 형태 속에서 구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의 존재기반인 인간의 이름을 단절시킴 속에서 자신의 이름에 순종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계시의 역사는 언약으로 말미암아 배태되는데, 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언약의 이름과 비언약적 사고방식에서 솟아 난 이름과의 다툼과 투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세상의 모든 이름은 개개인을 지칭하는 명칭이지만 더욱 깊이 들어가면 첫 아담 안에서 반복되는 아담의 명칭들인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솟아난 익명의 아담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아담 안에 있는 동일한 내용의 죄를 걸고 넘어 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의 활동성은 아담의 버림과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이름 안으로 되찾는 과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구실을 합니다. 즉, 이제는 아담 안에서 내 이름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 안에서 주님만을 자랑하게된 정체성입니다.

아담 아래서는 하나님과 인간이 그냥 의사 소통하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아담의 범죄이후에는 하나님과 인간은 단절된 상태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처참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제 죄와 의의 관계로 간섭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즉, 죄를 문제삼으시면서 회개의 장을 여시는 것으로 말입니다. 회개의 장은 다르게 말한다면 은혜와 긍휼의 장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저자가 죄와 의의 관계로 보겠다는 것은 십자가에 의해서 생겨난 관계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인간의 이름으로 점철된 죄의 세상을 공박하시고 승리하심으로 생겨난 "의"로 현실을 이야기하겠다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죄와 의를 얘기하는 중심에 하나님의 선택이 자리잡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이끌어 가는 핵심사상으로 자리잡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은 단지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기 위한 기능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저자는 기능론적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선택, 이스라엘의 선택, 모세의 선택, 다윗의 선택 등은 그들의 구원작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인간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의"가 생성되는지 보여주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즉, 육의 세계는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찾는 작업이죠.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해석하는 발판을 하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버림과 되찾음, 진노와 긍휼, 심판과 새 창조라는 약속의 양면성을 담아내는 그릇인 것이죠. 그냥 구원을 말하는 것과는 상당한 차이를 느끼시겠죠.

본 서는 기존의 신학과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하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는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버림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되찾는다는 저자의 안목을 표현하는 것이죠. 여기에서 여러분의 질문은 뭐지요? 저자의 생각이 무조건 옳으냐 하는 것이겠지요.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진 특히 종교개혁 이후의 칼빈, 루터로부터 전해진 개혁신학의 장점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저는 저자가 인간의 구원욕망의 뿌리깊은 곳까지 파헤쳐서 이름과 이름의 배후세력에 대한 싸움으로 성경의 내용을 이끌어낸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고 봅니다. 묵시세계가 역사세계에 출현할 때는 "이름"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통해서 언약의 역사를 진행해 나가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대하시지 않고 이름을 통해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 이유는 인간이 놓여있는 죄 문제를 공박하시면서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 문제를 걸고넘어지지 않는 신학은 다시 검토 받아야 할 내용이지요.

개혁파 신학의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표어가 성경 해석의 범주를 기존의 로마 카톨릭 전통이 아니라 성경만으로 제한하는 싸움을 했다면 오늘날의 싸움은 성경내용에 대한 해석의 싸움임이 분명하지요. 본 서는 "선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체적인 싸움이 이름의 싸움임을 도출해내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보고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이 되는 과정은 '교회를 넘어서' 라는 책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성전에 담겨서, 신약의 '몸'이라는 개념으로 언약 안에서 구체
화 되는 과정을 통해서 '인물'로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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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6:19-31에 관한 질문
장동관 2003-11-25 09:07:28, 조회 : 164, 추천 : 12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에 관한 질문입니다.

눅 16:27-31에 의하면 부자는 '자기 형제 다섯이나 있는데 나사로를 보내서 그들만은 고통 받는 이 곳(지옥, 하데스)에 오지 않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이 사건으로 보아 고전 15:12-58에 기록된 그리스도 재림 이후에 일어날 신령한 육체 부활 이전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질문을 드립니다.

1. 부자는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능력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비유라면 왜 '하나님'대신에 '아브라함'이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2. 이 사건은 부활 사건 이전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죽은 부자가 육체를 입고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눅 16:23 부자가 8)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다가 눈을 들어서 보니, 멀리 아브라함이 보이고, 그의 품에 나사로가 있었다.
- 6) 그, '하데스'
눅 16: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아브라함 조상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보내서,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서 내 혀를 시원하게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3. 지옥에 있는 부자와 천국에 있는 아브라함이 대화를 합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에 대한 비유라고 보면 가능한 이야기겠지요?)

4. 부활 사건 이전인데도 이러한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이 옳다고 볼 수 있을까요?

5. 고전 15:12-28에 기록된 신령한 육체로 부활하는 사건과 연관시켜서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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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눅 16:19-31에 관한 질문
이근호 2003-11-25 13:18:19, 조회 : 185, 추천 : 13

1. 이 비유는 그 당시, 소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저처하는 유대인 지도자를 겨냥하신 비유입니다. 그들은 돈을 좋아했고 예수님의 지적에 대해서 비웃었으며. 하나님 나라, 즉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천국을 차지할 수 있는 자긍심으로 무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잘못된 신학을 한꺼번에 처 버리십니다.
일단 언약의 대변자로서 예수님은 그들의 신학의 배경에 의식해서 아브라함으로 잡습니다. 하지만 그 아브라함이 인정하는 자들은 돈을 좋아하고, 자신들이 멸망의 대상인 것인 모르는 유대 지도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눈에 철저하게 배제당한 거지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지 나사로의 특징은 전혀 돈이 없다는 점과 돈 가진 자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에 있는 자의 대표자입니다.

2. 지옥의 고통이란 언약 진전도에 따라 해당되는 고통이 주어지게 됩니다.
물론 영원한 고통이란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주 되심으로 확정됩니다.

3. 천국이란 언약 완성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이 그 언약의 대변자로 등장해도 무방합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주의 자리에 등극하시지 전이기 때문에 최후 심판은 감행되지 않는 유예기간입니다.) 그 천국의 대변자는 지옥까지 관할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지옥이란 역시 언약에 의해서 합당한 처벌을 받는 곳이기에 언약 대변자와의 의사 소통이 가능합니다.

4.5. 마지막 부활 때면 모든 것이 공개되는 순간입니다. 새언약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고전 15장의 말씀)
바로 이 사태를 사전에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거지와 부자'의 예를 들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거리로 침입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복음으로 오신 예수님은 모든 율법의 완성자오셨기에 (눅 16:17) 최종 심판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느냐로 결정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 지도자들은, 이미 이런 심판주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종말과 파멸에 대해서 감잡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장래를 미리 대비한 '불의한 청지기' 보다도 더 못한 자들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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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있습니다.
이봉상 2003-11-28 08:02:34, 조회 : 109, 추천 : 13

강단권이란 말을 듣습니다.
성격적인 배경에 입각한 교회법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한이 목회자에게 과연 정당한것인지 궁금합니다.

(질문동기)
개신교의 자유로운 예배형태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부목회자의 예배진행 형태는 예전을 너무도 무시한듯 부적절하고 독선에 가까운 모습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위험수위에 이르고 있다고 판단되지만 목회자의 절대고유영역처럼 되어있는 강단의 문제를 간섭할수 없는것이 교회의 법이나 관례처럼 되어있기에 이를 정녕 신성불가침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질문을 드립니다.

기존의 고루하고 딱딱한 분위기를 개선하는것은 필요할수도 있다고 봅니다. 열린예배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경건과 엄숙의 기본틀이 깨어지고 예배인지 야외행사인지, 때로는 장난인지 구분이 되지않을만큼 산만하고 은혜가 안되는 예배를 그냥 지켜보기에는 성도는 곤혹스러움이 큽니다.

예배가 회의가 아니기에 일어서서 이의를 제기할수도 없으며 제재를 가할수는 더욱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볼수 밖에 없으나 참으로 고역입니다. 이를 개선하거나 시정을 요구할수 있는 권리가 성도에게는 없는지요?

이글을 목사님이 보신다면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일수도 있겠으나 예배를 회복해야하는 중대성과 연결된 문제라고 생각되어 질문하오니 부디 명확한 해답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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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강단권', '신성불가침'이라는 용어가 아직도 쓰이는군요.
이근호 2003-11-28 10:34:05, 조회 : 114, 추천 : 6

>인간이란 내버려두면, 그 공간을 자기 욕망을 발산하는 장이 되고 맙니다.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이웃 사랑의 느낌입니다.
"(사랑이란) 무레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5)

강단권과 신성불가침을 주장하는 목사가 만약 자기 식구라면 야구 방망이가 약입니다. 두들겨 패서라도
인간 만들어야 겠지만

타인 같으면, 개인적인 장사 수완에 해당되기에

몇 번 충고하다가 말 안들으면 그 업소에 출입하지 안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의 이러한 저항성 파업(?)을 방지하기 위해서

목사들은 목사끼리 자주모여서 행동지침을 같이 하기로 모의합니다.

즉 교회 옮겨봤자, 똑같은 질서를 교인들에게 주입시켜 교인들이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조직의 분위기를 묶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지나는 정치적 야합이지요. 그런 식으로 길들여 나가자는 겁니다.

이것을 '동업자 의식'이라고 합니다.

같이 죽고 같이 살자는 주의입니다.

조폭 세계가 따로 없습니다.

단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를 조신있게, 경건하게, 품위있게 드린다고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쪽에 신경을 유별나게 많이 쓰는 목사가 더 수상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의 심리에는

예배 잘 드리게 되면 그 노동에 대한 대가나 보상을 한주간에 걸쳐서 하나님으로부터 타낼 수 있다는 의식이 보편적으로 깔려 있음을 노리고, 그 고객을 잡으려고 하기 때문이죠.

진정한 교회와 예배는, 십자가 앞에서 되풀이해서 회개하는 장이라야 합니다.

'예배 잘 드림'이 결코 자신만의 갖는 경건한 노력이나 의로움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배란, 자신의 죄인됨을 다시 되새기면서, 자신이 존재하고 구원됨이 모두 하나님의 은총임을 절감하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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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은 안식일이 절대 아니다.(조언을 부탁합니다)
김인찬 2003-11-29 12:34:04, 조회 : 117, 추천 : 2

주일과 안식일은 다르다. 안식일은 이미 성취되었다.
주일성수라고 주장하는 사상에는 구약의 사상에 의해서 매주 일요일 날 자체가 거룩한 날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많다. 이와 같이 일요일을 성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에서 가져온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주일을(일요일) 성수 한다는 이상한 사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주일날 모든 율법적인 요소를 주장한다. 그 예로 장사를 못하게 한다든지 타지에 가지 못하게 한다든지 하는 이러한 것들이 구약의 안식일 사상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주일보다는 일요일이며 그리고 특별한 날이 될 수 없다. 단지 예배드리는 날이기에 특별한 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성수가 아닌 주일 예배 성수가 정확한 것이다. 또한 신약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같이 생각하고 주장하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일이 안식일이 된다는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이다. 단지 주님이 일요일에 부활하신 날이다. 구약의 안식일을 신약의 주일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나타난 것이다. 신약의 일요일은 주님이 그 날에 부활하신 날이라는 것 외에는 그 어떤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날을 영적 안식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구약의 십일조를 신약의 헌금으로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성경에 대한 이해로 일선 교회에는 더더욱 율법적인 것이 나타난 것이다.
한국교회가 성경에 대한 영적인 상태가 이 정도면 교회가 얼마나 심각하게 세속화 된 증거인가? 또 이를 개혁하려는 자를 얼마 전 희생시키는 현실은 과거 종교개혁 시대에서 암흑시대를 연상시키고 있다. 주일을 안식일로 가르친 것은 이미 우리가 익히 아는 사실이다.
주일은 안식일이 결코 될 수 없다. 어떤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안식일로 가르친 결과는 주일날 장사도 못하게 하는 구약의 율법적인 신앙으로 가르친 것이다. 일요일이 그렇게 신약의 안식일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국가시험도 교인에게 치르지 말라는 엉뚱한 주장을 한 경우도 있다. 또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일요일이 특별한 주님의 날이라는 배타적인 사고에서 기인된다. 주님의 날은 일요일만이 아닌 모든 날이다. 주일이 특별한 날이 될 수 없다.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그 날이 중요한 날이라는 것이다. 즉 예배드리는 날이라는 의미이지 그 날이 특별한 주일이라는 거룩한 날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이 이러한 공적 예배와 같은 모임에 의해서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일은 결코 특별한 날이 아닌 것을 구약의 안식일과 연결시켜서 율법적으로 만든 것이 사실이다.
주일을 안식일이라고 가르친 것도 율법적인 요소이다.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일을 안식일로 가르친 결과 주일에 금욕적인 것이 강조되게 만든 것이다. 장사도 못하게 한 것은 이미 주일이 단순한 날이 아닌 거룩한 주일이라는 말대로 구약의 안식일과 같은 의미로 생각한 것이 사실이다.
주일날 친교운동도 절제시키게 하고 장사하지 않는 것이 성경적 이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주일날 장사하지 말라는 성경적인 근거와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가르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약성서에서는 날이나 모든 것이 신앙에 의해서 다스려지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해석한 것은 구약의 율법적인 사상에 기인한 것이다.
일요일 날 예배에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있기에 일요일이 중요한 날이 된 다는 것이다. 예배 때문에 다른 날보다도 일요일이 중요한 날이 된다. 이는 일요일이 거룩한 주일이 아니라 일요일 날 성도가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예배드리는 날이기에 거룩한 날이라고 부르는 된 것이다. 성도의 예배와 성찬이 없으면 그 날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주일이라는 말도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모든 날이 성도에게 있어서는 같은 날이다. 그리고 그 중에 더 중요한 날로 우리가 사용하는 날이 있다면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요일이 중요한 날이 된 것은 성도들이 예수의 부활로 모인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날에 주님이 부활하였고 성도가 모여서 예배드린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대한 이해는 역시 십일조와 같이 예수의 죽음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서 안식 후 첫날에 예수께서 살아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날은 통상적으로 토요일로 알고 있다.
이날에 예수가 안식하신 것이 우연이 아닌 구약의 안식일에 대한 문자적인 성취로써 예수가 안식하신 것이며 그날이 문자적으로 토요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는 금요일 날이 유월절 어린양 예수를 문자적으로 상징된 것이 가능하다면 토요일이 예수가 안식한 날이라는 이러한 해석이 무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구약에서 유월절이 금요일로 지켜진 것이 장차 예수로 성취될 그의 십자가 죽음이라면 백성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은 예수의 안식인 토요일과 연관된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것은 그 안식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안식이 예수의 안식인 토요일에 들어간 무덤에서의 안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의 부활로 일요일 날에 신약의 새로운 모임의 날이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금, 토, 일의 의미는 유월절의 어린양과 그의 안식과 그리고 그의 부활의 날이라는 연속성이 있다. 그렇다고 주일을 성스러운 날로 지키는 것보다는 예수의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여서 예배드린 것이다. 상식적으로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모이지 않고 부활한 일요일에 모인 이유가 주님의 부활과 깊이 연관 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교회의 전통이 된 것이라면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신앙으로 모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일요일은 금요일과 토요일과 연관되어진다. 그렇다고 유월절을 지키거나 토요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은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이라는 날짜를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과 연관 된다는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날짜를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며 예수의 부활의 의미로써 모인다는 것이다. 만약에 금요일 날에 예수의 죽음을 생각하고 모인다면 이는 날짜를 지키는 것이 아닌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서 금요일에 모인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예수에 대한 내용에 의해서 형식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형식이 날짜라면 내용은 금요일 날에 죽은 예수가 될 수도 있고 토요일 날에 안식한 예수가 될 수도 있지만 부활의 의미가 예수의 지상사역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라는 의미이기에 더 중요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성경은 부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같이 이 예수의 부활이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수의 부활이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가 일요일 날 부활한 날에 모인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된 것이다. 예수가 부활하였는데 굿이 토요일에 공적인 예배를 드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형식인 날짜가 아니라 내용인 예수의 부활사건에 의해서 예배드리는 공식적인 날이 일요일로 정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요일의 의미는 주님이 과거 부활한 날이며 이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모인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들도 마치 초대교회의 제자들과 같이 주님의 부활이 일요일에 되었기에 일요일에 모인다는 의미일 뿐이다. 주님의 부활로 일요일에 모이기 때문에 성도들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라는 과거의 일요일과 같이 일요일에 모여서 주님을 기억하고 예배드린 것이다. 그 기억한다는 것이 부활만이 아닌 금요일의 사건과 토요일의 사건과 그리고 일요일이 부활을 연결해서 일요일에 모여서 성찬을 한 것이다.(성찬이라는 형식을 천주교는 우상화 한 것 같이 개신교는 일요일을 우상화한 것이다. 일요일이 예수가 부활한 날이라면 금요일은 죽음의 날이며 토요일은 안식의 날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을 연결해서 부활한 일요일에 모인 것이다. 일요일에 모여서 그들은 부활만 기억한 것이 아닌 일요일 이전에 금요일의 사건과 토요일의 안식과 그리고 일요일의 부활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 일요일 날 모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 성찬이다.(성찬은 형식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 것으로 주님을 기억한다) 성찬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일요일 날 모여서 기억한 것은 일요일의 부활과 함께 성찬으로 금요일의 죽음을 함께 기억하고 기념한 것이다. 이 죽음을 기념하기 위해서는 지나갔다는 것으로 가능하다. 이미 예수의 죽음은 지나간 것이다. 그리고 일요일에 성찬은 마치 그 이전 금요일의 유월절 어린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일요일은 이미 금요일 토요일을 거쳐서 일요일이 되기에 공적인 성찬이 일요일 날 된 것은 이러한 의미가 더더욱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일요일에 모인 것이 부활의 의미와 죽음의 의미를 동시에 기억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일요일에 모여서 금요일의 예수에 대한 희생의 성찬이 사라진 것은 일요일의 의미를 과대 포장하고 있으면서도(구약의 안식일과 같이) 일요일과 금요일과 토요일을 연속적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예수의 삼일 동안의 신앙에 대한 것이 현저히 약화된 것이다. 성찬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닌 할 수만 있으면 해야 되는 것은 일요일에 모이는 것이 일요일만이 아닌 금요일의 죽음과 토요일의 안식을 거쳐서 일요일에 부활한 예수로 모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드러낸 의식이 만찬이라는 것이다.

그 날이 평범한 일요일 날인데 과거 일요일에 예수 부활의 사건이 있었고 그리고 성도들이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드리게 됨으로 주님의 부활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의미는 일요일이 거룩한 주일이 되어버리는 날로 바꾸어진 것이 아니라 날은 똑같은 날인데 주님의 부활의 사건이 과거 일요일에 주님이 부활하신 것으로 일요일에 모여서 예배드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일이라고 부른 것도 현재 성도들이 모이는 일요일 날이 주일이라는 의미보다는 과거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 한 것이며 이는 현재의 일요일을 보고 우리가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과거의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보고 주님이 부활한 일요일 날이라고 부르는 것을 줄여서 주일이라고 불러야 한다.(단지 일요일에 주님이 부활하신 날) 그런데 주님의 부활이 중심이 절대적으로 되어야 그날에 모이는 것이 의미 있고 또 주일이라고 부르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일의(부활의) 내용이 상실되면서 내용보다는 가톨릭은 보이는 성찬을 개신교는 보이지 않는 날을 우상화 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이상적인 것은 보이는 성찬과 보이지 않는 예수의 내용(죽음과 부활)이 합리적으로 이해 될 때에 개신교의 일요일 우상에서 벗어나고 가톨릭의 성찬 우상에서 벗어난다.
만약 현재의 일요일 날이 특별한 날인 주일이 된다면 이는 잘못이다. 과거의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한 것으로 일요일 날 부활했다는 것에 의해서 오늘날의 일요일에 모이면서 과거에 이날에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일요일이 주일이 된다고 주장하면 이는 안식일과 같이 된다. 만약 이러한 주장대로라면 정말로 주일은 예수가 부활한 한 날 만이(안식 후 첫날) 주일이라고 주장해야 된다. 그러나 그 날은 이미 약 이 천년 전에 지나갔다.
날이 중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일요일이 주일이 된다는 사상은 구약의 안식일 사상과 연관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가 일요일에 부활했으니 모든 일요일에 부활을 기억하기 위해서 또는 예수의 죽음인 금요일과 토요일과 연관해서 매 주 일요일 날 모인다는 것이 더 의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신약에서 주일의 의미가 전적으로 과거 일요일 날에 주님이 부활한 것으로 주일이라고 부르기에 현재의 날이 중요한 날이 아닌 예수가 과거에 부활했다는 것이 즉 부활이 중요한 것이 된다. 그 의미는 주님이 일요일에 부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외에는 다른 무게 있는 날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일요일이 특별한 주일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과거 예수가 죽어서 일요일에 부활한 것을 가지고 주님이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라는 의미로 일요일에 모인다는 것뿐이다. 지금의 일요일은 일요일이다. 그 날 자체가 주님의 날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과거 오늘과 같은 일요일에 부활한 것으로 일요일에 모이고 그리고 과거 일요일에 부활한 주님을 기억하고 일요일에 예배드리는 것 뿐 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날에 무게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과거 일요일 날에 예수가 부활한 것이며 그 부활이 일요일에 되었기에 지금도 일요일에 모이게 된 것이다. 날이 귀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시간과 공간은 월요일이나 일요일이나 똑 같다) 성도가 또 일요일에 모이는 이유도 주님이 그 날에 부활한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모인다. 과거 주님의 부활의 사건과 그 사건이 일요일에 되었기에 그 사건 때문에 모이는 것이지 날 때문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부활이 귀한 것이며 그 부활이 일요일에 되었기에 일요일 날에 모인 다는 것이다. 비유로 말한다면 그릇은 같은 그릇인데 일요일이 모든 성도들의 예배의 그릇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 성도들이 귀한 것이지 그릇이 귀한 것이 아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이해하면 예수가 죽음으로 안식한 그 토요일 날이 구약에서 기다린 안식일 이라는 것이다. 구약에서 안식일을 지킨 것은 이 예수의 안식을 두고 지킨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후에 토요일에 안식한 것이며 이것은 구약에서 지켜온 안식에 대한 성취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미 안식은 성취된 것이다. 그 성취로 신약의 백성은 더 이상 구약의 안식을 지킬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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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