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대한 규칙은 규칙에 그쳤습니다] 2003-10-24
[십일조에 대한 규칙은 규칙에 그쳤습니다] 2003-10-24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이근호 목사님께
장동관 2003-10-24 23:23:49, 조회 : 156, 추천 : 12
3 종류의 십일조가 하나로 축약되는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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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 목사님께
이근호 2003-10-25 03:14:35, 조회 : 135, 추천 : 10
>십일조에 대한 규칙은 규칙에 그쳤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그 십일조 원칙대로 시행한 바가 별로 없습니다.
숱한 이방민족과의 교류로 인해 하나님 율법에 대한 관심사가 십일조로 인하여 혜택을 입는 레위지파에만 있었고 세금을 내어야 될 다른 지파들에게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 수금이 잘 되지 않아서 총괄적으로 관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레위지파는 각지 살 길을 찾아 뿔뿔히 흩어져야 했습니다.
잠시 포로 귀환 이후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에 강조가 되었습니다만,
돈이란 목숨보다 귀한 것인데, 그렇게 쉽게 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라기에 와서는 정기적인 제사가 원활하지 않을 정도로 참여도가 낮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국가 기반 자체가 불안정한데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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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새번역개정판으로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장동관 2003-10-24 23:48:09, 조회 : 128, 추천 : 9
제 개인적으로는 한국교회의 대부분이 예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을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변경하기를 원합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는 표준새번역개정판으로 변경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글개역성경은 번역 오류도 간혹 있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한자어로 번역된 부분이 간혹 있어서 이런 구절을 읽으면 성경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겪게 됩니다.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시편을 표준새번역개정판으로 읽어보시면 뜻을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글개역성경에서 번역이 잘 못된 부분을 예를 들면
[한글개역성경]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표준새번역개정판]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여기에서
선지자는 선지서(예언서)로 번역되어야 올바른 번역입니다.
율법이 폐지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은 마 5:18 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
마 5:1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은 일점일획(또는 한 이오타)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마 5:18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완성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즉, 율법의 모든 것이 다 완성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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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근호 2003-10-25 02:59:22, 조회 : 123, 추천 : 11
그러나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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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이 좀 안타깝습니다 !!
구득영 2003-10-25 13:07:18, 조회 : 153, 추천 : 11
두 분의 논쟁이 곁길로 가는 것 같습니다. 조정재 목사님이 아마 이근호 목사님의 리플에 대해서 신경이 거슬리는 것 같은데, 그냥 무시하고(?) 진도를 나가시기 바랍니다. 어차피 마가복음이 전하는 복음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던 것이 말입니다. 사실 마가복음이 좀 소외를 받아온 것도 사실이니 말입니다. 그러면에서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당신이 뭔데 가르치려고 드는가?' 라고 하지 마시고, '한수 배웁시다' 라는 마음만 먹으면 되는데 말입니다. 사실 이 사이트가 그런 성격이 강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닌 줄 압니다. 그리고 이번 인천 수련회에서 이 목사님이 고전 2장 절인가를 언급하시면서 그렇게 조 목사님을 칭찬하셨는데, 그런 마음이 전달되지 못하니 좀 그렇습니다. 수련회 음성파일 곧 올리겠습니다.
[고전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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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결국에는 스스로 이단성을 드러내었습니다.
이근호 2003-10-25 16:59:38, 조회 : 157, 추천 : 7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십자가나 예정론을 제대로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성경에 접근조차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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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시는 잔, 나의 받는 세례(막 10:35-45)
조정재 2003-10-25 13:35:06, 조회 : 163, 추천 : 12
...
[re] 주님의 나라에 좌편 우편 정해진 자가 없다?
이근호 2003-10-25 16:54:23, 조회 : 145, 추천 : 7
>누가 얻을지 모른다? 이런 길을 함께 걷는 자는 누구든지 얻을 수가 있다?
차라리 엄기욱씨하고 같이 스웨덴보리 종교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기본적으로 예정론도 모르는 자는 성경을 볼 필요도 없고, 이 사이트에 글을 올릴 자격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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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재님의 부활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함을 반대하며
손무성 2003-10-25 18:07:16, 조회 : 111, 추천 : 10
조정재님께서는 이 말씀을 다시 상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왜 부활을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는지를 말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 곳을 찾아와 두가지 경우를 보이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1.십자가는 필수다. 예수님께서 처절하게 피 흘리신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승리한 부활의 자리에서 성도가 살아야 한다. 바로 님과 같이...(조정재님의 글: "저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빛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귀하처럼 십자가의 처절한 모습으로 성경을 보지 않지요. 설교의 결론을 보면 어떤 입장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
2.그리고 예수 믿고 그 다음은 행위에 대해 내가 책임져야 한다.
님은 1번에 해당하는 유네요. 저는 그나마 제 설교를 보고 문맥과 본문을 충실하게 해석해야 함을 말하고, '하나님의 이름' 신학을 내세우며 뭔가 배울 점이 있을까 생각하여 기대를 했는데 결국은 님의 정체를 그대로 드러내셨네요.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바울의 입장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바로 부활에 강조점을 둔 해석을 해 버리면 자기 정체도 모르고 있는 자가 어찌 은혜를 알겠으며, 자기 부인이 없는 자가 어찌 부활의 빛 안에서 살아갈까요.
'하나님 이름' 신학은 분명 '자기 이름'을 십자가 상에서 그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어찌 십자가 를 그냥 넘어가겠다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바울이 자랑한 것은 자기 정체를 보았고 그러한 그를 대신한 대속을 보았고 은혜와 긍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본 자만이 부활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처절한 모습을 하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날마다 나를 부인하고 나 자신을 자랑할 그 어떠한 것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늘의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신 것을 그제서야 부활에서 확증되었음을 노래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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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재님의 글에서 보여준 이단성
손무성 2003-10-25 19:46:30, 조회 : 154, 추천 : 14
.조정재님!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를 하시네요.
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십자가의 원수임이 드러났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조정재님의 글 인용)
그러니까 당신이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유대인들도 믿었어요. 마리아와 마르다도 믿었어요.(나사로가 죽었을 때 고백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을 믿는다고 심판에서 벗어나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과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언약의 최종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어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살과 피를 먹고 이것을 기념하라고 했지 부활을 기념하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만이 언약이 성취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정결한 짐승의 피 흘림부터, 노아...아브라함의 언약, 이삭과 야곱....을 통해 보여준 모든 피 언약과, 출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야 말로 언약의 자손들을 구원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고 ,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야 말로 구원을 이루는 근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언약을 십자가의 피로 이루었다는 확증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룬 언약의 성취를 통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것 같이 우리 역시 그렇게 하실 것을 부활이 선언했다는 것입니다. 곧 '언약을 이루는 피'로서 확증 되었다는 것을 부활로 알게 된 것이지 부활이 언약을 이루는 근거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 자랑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정재님께서 얼마나 십자가를 소홀히 하고 있는지 이글을 보시는 분들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빌립보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에 초점이 아니라, 십자가에 초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3:18-19)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에서도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26-29)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에서 강조점을 잘 살피십시오. 언약의 피의 가치를 새삼스레 강조하고 있는 이유를 아십시오.
하나님의 심판의 근거는 부활을 믿느냐 안 믿느냐가 근거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루신 십자가의 피를 믿느냐 안 믿느냐의 근거로 시작합니다.
조정재님의 말과 같이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라는 그 말로서 이미 이단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과정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야 말로 새언약의 완성의 근거라는 것이 성경의 핵심입니다. 이것에서 출발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이단입니다.
지금까지의 글만으로도 무엇을 강조하는 것이 이단적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님의 글을 더 이상 볼 가치가 없는 줄 압니다. 더 이상 글을 올리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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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음이 아파옵니다!!
구득영 2003-10-25 20:07:30, 조회 : 162, 추천 : 10
어느 종교인들 부활을 말하지 않는 종교가 있던가요? 기독교를 부활의 종교라고 함부로 말함으로 다원주의 신학의 길을 열어놓고 말았는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독특성은 십자가 사건에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종교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를 진 경우가 있습니까? 왜들 쉽게 그렇게 십자가를 스쳐가려고 하는지,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하려는 것을 문맥을 보아야 한다니, 그 문맥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망치고 말았네요. 사도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이 아니라 왜 십자가만을 증거했을까요?
이번 토론이 기존의 토론처럼 신학적 토론이 아니라 어쩌구 하면서 시작더니만, 이것처럼 메마른 신학적 토론이 어디 있을까요? 정말이지 서로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배우는 자세가 아쉽습니다. 성경을 돋보기를 가지고 본다고 해석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성경이 마가복음만 있는 것이 아닌데, 좀 안타깝네요. 여기가 왜 십자가 마을인지 우리 서로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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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보여준 악마의 전략
이근호 2003-10-25 20:49:37, 조회 : 167, 추천 : 13
악마는 현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와 공로만 희석시킬 수 있다면 대 만족입니다.
악마는 이 전략을 위하여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동원시킵니다.
자비롭고, 공의롭고, 질서를 원한다는 하나님을 동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한쪽에 치워버릴려고 합니다.
가짜 하나님의 등장은 곧
인간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을 바라볼 때,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아, 나도 하면 되겠구나"라는 희망을 주고자 합니다.
바르게 살고, 순결을 유지하고, 거룩하게 살면 그것이 곧 신이 원하는 바이다" 라는 생각을 갖게 만듭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제 가치를 잃지 않으려고 합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의미에 집요하게 집착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타난 복음은,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리심 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이 시도하는 모든 것은 다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해도 소용없는 짓들을 했고, 아무리 노력으로 달성될 수 없는 행위들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 가운에 찬양도 있고, 신학도 있고, 경건 생활도 있고, 교회 생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도 못하고 의롭다 함을 얻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오직 예수님의 화목제물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오늘도 악마의 하수인이 되어서
"가능성! 가능성! 가능성"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오직
"자신의 철저한 죄인됨과 주님 덕분에 의인됨"만 고백할 뿐입니다.
예수 믿고 오래살았다고 더 착해진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살면 살수록, 세월이 가면 갈수록 예전이 미처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죄에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설사 그 죄에 접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덜 죄인 인것도 아닙니다.
대인 관계 아에 끊고 지낸다고해서 덜 죄인이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건져주는 것은, 자신이 죄인되었다는 조건에 있는 것도 아니요,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모될 가능성 보고 구원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저, 그저 주시는 예수님의 이유없는 사랑 뿐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그냥 이유없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에서 확정되어졌습니다.(로마서 5:8)
그 십자가 피가 사랑의 전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을 이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자신의 예쁜 사랑의 피조물로서 인간을 새로 만드시는데 그 안에 오직 독생자 예수님의 피(의)를 담아서 그것으로 자신이 기뻐하시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도 의로우시고, 예수님 믿는 성도도 그 화목제물 안에서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고후 5:21)
세월이 가서 죽을 때가 가까이 올수록
오직 자랑할 거라고는,
죄인 중에 괴수에 불과한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의 공로와 사랑만 자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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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
김재국 2003-10-26 00:05:21, 조회 : 107, 추천 : 3
사도신경에는 부활이 십자가 뒤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복음의 전함이 헛것이라고 하여 부활이 기독교의 핵심임을 가르칩니다.
창조주하나님, 그 외아들 예수, 성육신,십자가 ,부활,승천 ,심판
등을 부정하면 이단이지만 부활을 믿음이 이단이라니 난해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에서는 예수님이 부활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안에 사도신경의 모든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으며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안에는 십자가와 부활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며
십자가의 죽음은 이미 부활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요한 계시록의 천국으로 연결됩니다.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만
십자가 자랑이 부활을 소홀히 하는 근거가 되지 못함을 바울은 고린도 전서 15 장에서
그리고 사도신경과 요한복음의 부활의 주인이 예수님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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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부활은 십자가의 뜻을 본격화하기 위한 새세계의 열림입니다.
이근호 2003-10-26 07:43:31, 조회 : 138, 추천 : 18
영화관은 영화관 내부나 관람하라고 스크린을 장착한 것이 아닙니다.
영화를 상영해야 할 곳입니다.
부활이 바로 영화관이라면 십자가 복음은 꼭 상영해야 될 영화입니다. 다른 영화는 다 필요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식을 찾으라 우리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상영하니)" 고린도전서 1:17-23
사람이란 본디
각가지 정보를 보다 많이 획득해서 자신의 구원에 헛점이 없이 보완하기를 원합니다.
혹시 십자가를 강조하다가 부활을 강조안 한 것으로 인해 자기 구원에 균형을 잃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물론 하이마트에 가서 TV를 구입하면서 안테나를 구입 안하며 TV사나 마나겠지요.
구비할 것은 확실히 구비하고, 챙길 것은 확실히 챙겨야 합니다.
성경을 볼 때에 '자기 구원용'으로 보면 귀하의 말씀이 옳을 뿐더러, 사실 그것만 챙겨서는 아니됩니다.
사도 바울이 편지 쓸때,
" 십자가 다음에 부활, 십자가가 다음에 부활,.이 둘은 놓치지 말 것....". 이런 식으로 적어간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를 말했고, 교회 안에서의 지체들 간의 사랑도 언급했고, 마지막 때의 악마의 시험도 말했고, 특히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의 아름다움도 빠지지 않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를 증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모든 은총이 (예를 들면 악마를 이기는 은총이) 오직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증거케 하고자 함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인간 구원용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창세 전부터 계획해 놓으신 하나님의 계획이 언약을 통해서 전개되는데, 바로 성도는 마지막 때에 '새언약의 증인'으로서 이 땅에 세워진 자입니다.
그 새언약은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이것은 부활의 능력이 없이는 증거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그 모든 것이 하등의 거짓말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라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즉 소망이 소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지금 현존하는 세계가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부활의 의의 나라가 전개의 근거는 부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피는 새언약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때나 승천하실 때, "다 이루었다!"고 소리치신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놓치면 안됩니다)
고린도교회에서 성만찬을 했는데 그 핵심은, 바로 '주께서 죽으시던 날 밤에 주께 받은 그 떡을 떼시는 연출을 되풀이 하면 나를 기념하라'에 있습니다.
부활하셨기에 이런 명령을 하시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서울 대학교 화장실의 사용 권한은 사실 공납금을 낸 서울대학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서울 대학교 학생이 맨날 화장실만 들락달락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를 하기 위해 그 학교에 입학했지 화장실 사용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다는 말입니다.
왜 십자가 만일까?
그것은 세상 지혜로 구원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오직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그냥 부활의 능력이 아니라)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고전 1:17-18)
즉 우리 성도도 부활될 수 있다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어떤 분(예수님)의 희생의 위력이 천국에 가서도 영원히 이어져야 될 이유가 하나님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단순히 십자가와 부활 때문에 내가 살았다가 아니라)
그리고 논리상 이 점을 아셔야 합니다.
두 개의 개념이 체계를 이룰 때에는 어떤 식으로도 종속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는 의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시간적으로 봐서 부활이 나중이니 일단 부활이 있고 난 뒤에는 십자가를 부활에서 흡수 통합 시키면 아무런 하자가 없이 보이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활을 십자가에 종속되어 위계화됩니다.
그 이유는, '주의 이름'으로 행하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다 이루심"은 지상에서 오직 그 분만이 하셨다는 분명히 확정 짓는 최종성이 부활에 있는 아니라 십자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있어 부활이란 십자가 완성의 그 결과로 주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자기 구원용으로 생각해서 구원 정보제공용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또는 목회용으로 사람들에게 희망과 미래에 획득할 것을 제공할 목적으로 이것 저것 챙길 줄 좋은 상품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염두에 두지 마시고,(그럴려면 반드시 재림을 빠트리면 안되겠지요.)
예수님의 무슨 희생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됨을 극명하게 드러났으며 ,그런 죄인이 어떻게 구원되었느냐를 증거하는 임무로 성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이사야 53:5)
부활이 이 귀한 복음을 희석하는 것치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 복음을 확실히 하겠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부활이 아니라)가 눈 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드냐?"
우리도 이렇게 증거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사람만이 부활의 영을 받아 부활의 세계에 속한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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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부활은 십자가의 뜻을 본격화하기 위한 새세계의 열림입니다.
김재국 2003-10-26 19:35:18, 조회 : 111, 추천 : 15
친절하게 설명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성경을 자기구원용으로 이용하지 말라,자력구원은 없다는 점을 명심하겠습니다.
이사야 53 장은 항상 찔리는 마음을 줍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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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개정판 비교
장동관 2003-10-26 21:58:17, 조회 : 95, 추천 : 14
한글개역성경에 모사로 번역된 단어는 요즘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모사'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표준새번역개정판을 보시면 뜻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으로 예배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한글개역성경]
시 119:24 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모사니이다
[표준새번역개정판]
시 119:24 주님의 증거가 나에게 기쁨을 주며, 주님의 교훈이 나의 스승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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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한글개역성경과 표준새번역개정판 비교
이근호 2003-10-27 07:18:00, 조회 : 97, 추천 : 11
모사라는 말은 많이 사용합니다.
특히 정치꾼들에게 사용하지요.
"그 사람 참 모사꾼"이다 라고 합니다.
고어(옛말)을 현대어로 고치는 것에는 이런 애로가 있습니다.
1. 늘 바뀌어야 한다는 점
2. 자교파나 자교단의 신학이 다치지 않는 범위에서, 혹은 잘 드러내는 범위 내에서만 고쳐야 한다는 점
3. 언어란 아무리 고쳐도 만족함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
4. 현 신학의 질서를 위해서 될 수 있는대로 고치지 말아야 한다는 점(마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함부로 고치면 신용 경제 체제에 치명적입니다. 그래서 성인들의 이름은 법원에서 거의 허가를 하지 않습니다.)
5. 고어에 담긴 깊은 의미는 현대 사조에 물든 자들에게 오히려 본받아야 될 점이라는 겁니다.
6. 언어에는 한 가지 뜻만이 담겨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풍부한 진리성을 천박스럽게 하나로 고정시켜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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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님, 십일조의 참 형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장동관 2003-10-26 22:00:53, 조회 : 119, 추천 : 11
십일조의 참 형상(실체)에 대해 자세해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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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 목사님, 십일조의 참 형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이근호 2003-10-27 08:28:21, 조회 : 195, 추천 : 11
십일조는 '여호와 전쟁'의 일환으로 등장된 것입니다.
여호아 전쟁이란, 여호와께서 악에 대해서 친히 벌리시는 영적 전쟁을 뜻합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아브라함 언약에 속하는 가족 중의 한 사람인 롯이 지상의 종족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구출하게 되는데, 그는 여기에서 하늘의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이 지상에서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을 통해서 뭔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일을 실시하신다는 겁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인가요?
아브라함은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승리하고 돌아오는데, 길에서 난데없이 어떤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살렘이라는 지역의 왕이요(이 살렘은 나중에 하늘에 있는 성소를 뜻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분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는 겁니다.
즉 복과 저주의 기준을 위해 하나님께서 지상에 아브라함과 그 가족을 사용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들은, 곧 하나님이 지금 친히 전쟁에 나서시고 있다는 증거물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한 쪽이 구원이 되는 쪽인 것을 안 아브라함은, 자신이 획득한 전리품 중의 10%를 그 제사장에게 바칩니다. 그리고 인간 쪽에서 주는(소돔왕) 상납물은 거절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능력으로 승리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있어 십일조란, 아브라함의 자신이 언약이 이 지상에서 축복과 저주의 기준점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고백한 표시입니다.
이것이 율법화되는 나중에 국가 이스라엘 속에 담기게 됩니다. 이로서 국가 이스라엘은, 이 지상에서 유일한 축복과 저주의 기준 국가가 되는 '왕 같은 제사장 나라'로서 입지를 갖추게 됩니다.
이들은 약속의 땅 위에서 사는데, 거기서 생산되는 생산물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모세언약)을 잘 지키면,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아서 작황이 되는 겁니다. 만약에 언약(모세언약)을 무시하면, 들어와도 저주받고 나가도 저주받습니다. 약속의 땅이 그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톨이 곡식도 모두 하나님의 영적 전쟁의 전리물로 제공된 것입니다. 여기에 '맏물' 개념이 십일조에 담기게 됩니다. '맏물'이란, 처음 태어난 생산물인데 이것은 창조의 속성이 맨처음 담기고 표준으로 담기는 것을 뜻합니다.
레위지파는, 제사 기능을 담당하므로, 백성들의 지은 죄를 씻어내는 기능을 매일 같이 담당합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신의 맏이된 지파인 레위지파에서 소득의 십일조를 바쳐야 하고, 레위 지파는 또한 제사장에게 바치고, 제사장은 또한 하나님에게 드리게 됩니다.
말라기에서는, 이 제사장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야가 오신다는 겁니다.
물론 그 당시에 백성들은 이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상태에 있습니다. 전혀 백성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있지도 않았고, 또한 하나님의 마음도 백성들에게 있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선지자는 십일조를 통한 제사장 언약의 회복을 호소한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십일조에 대해서 네 개의 계층화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제일 위에는 멜기세덱이 있습니다.
2.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3. 그 다음에는 레위지파가 있습니다.
4. 그 다음에는 일반 백성들이 있습니다.
위에서 내린 복이 제일 밑바닥에 있는 백성들에게 도달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이게 되느냐 하면 십일조의 전달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겁니다.
마치 과학실험에서, 분자나 원자의 움직임과 활동을 지시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십일조는 "이미 받은 복이 다 위에서 주어진 것입니다."라는 것을 말해주는 지시약 역할을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7:7에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빎을 받느니라"
이미 위에서 내려준 복이 하자없이 무사히 아래까지 도달했음을 아래쪽부터 신호를 위쪽으로 전달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이로서 악마와의 영적 전쟁에서, 구원이란 순전히 여호와 하나님의 솜씨로만 가능함을 확실히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바로 멜기세덱의 자리에 있습니다.
그분은 '맏이'기 때문입니다.(롬 8:29)
이것이 오늘날의 영적 전쟁의 핵심입니다. 즉 축복과 저주의 기준이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독점했다는 이 진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이 여호와 전쟁입니다.
그분의 복빎으로 인해 성도는 구원받습니다. 달리 다른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친히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입니다.(히 7:24-25/롬 8:34/눅 22:30-34를 참조해 보세요)
따라서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 자신이 영원한 제사장이시오 또한 영원한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제물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 받으시고 그 복을 참된 복으로 확인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율법은 오직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요 5:39)
마치 아파트가 다 분양이 되고 입주가 다 끝나면 모델하수는 반드시 철거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모형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실체가 준공이 되어 버린 시점에서는 모형을 실체로 간주하면 안됩니다.
만약 오늘날에도 십일조를 강변하고 강요하는 교회가 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십일조되심을 묵살하고 짓밟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무용지물로 간주하겠끔 교인들에게 반(反)복음을 머릿속에 인식시키는 무리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적그리스도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헌금이란 바로 이런 복음을 전파는 곳에 전달되어야 합니다.
만약 어느 교회가 오직 복음을 위하여 10년째 일하다가, 그 다음 주간부터 교회 자체를 정당화하고, 당교회 존재을 위하여 일한다면 헌금은 그 교회로 흘려들어가서는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교회 세력이 크지면서 필히 복음만을 외치는 자를 핍박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헌금이란 성도가 복음을 위해서 소득의 몇 %를 사용할 것인지 하는 것은 성도 본인이 본인 안에 계시는 성령님과 의논할 문제입니다.
여기서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성도가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결국 복음을 위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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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근호 목사님, 십일조의 참 형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장동관 2003-10-27 09:52:38, 조회 : 141, 추천 : 11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몽학선생(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는, 우리는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장차 올 믿음이 나타날 때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갈 3:24 그래서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에게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갈 3:25 그런데 그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가 이제는 개인교사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구약의 십일조 제도는 모형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실체가 준공이 되어 버린 시점에서는 모형을 실체로 간주하면 안됩니다."
유월절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실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그림자)이듯이
구약의 십일조 제도 역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실체(참 형상)가 오면 그림자의 역할은 끝납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이미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지금 예배처소에서 제단을 쌓고 어린 양을 잡아 피를 뿌리면서 제사를 지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조롱하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히 8:5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과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땅에 있는 성전에서 섬깁니다. 모세가 장막을 세우려고 할 때에, "너는 명심하여 내가 산에서 네게 보여준 그 모형을 따라 모든 것을 만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것입니다.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물은 이런 여러 의식으로 깨끗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보다 나은 희생제물로 깨끗해져야 합니다.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성소의 모형에 지나지 않는,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 성소 그 자체에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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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대 문헌학을 전공하신 어느 목사님의 의견입니다.
장동관 2003-10-27 17:27:48, 조회 : 117, 추천 : 13
평안하신지요?
십일조폐지론에 대한 결론은 맞습니다만,
그 결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정의 설명 (여호와 전쟁?)은 인위적입니다.
아브라함/관습(문화) ---> 모세/법제정(율법) ---> 예수/은혜의시대 (율법폐지)
아브라함시대의 관습은 그들만의 문화였고 율법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이 관습이 나중에 모세에 의해서 율법이 되면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법도가 된 것입니다.
율법은 북왕국 전승의 근거가 되어, '십일조를 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남왕국의 전승(다윗)은 '십일조를 하든 안하든 무조건 축복'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들이 기다리던 축복사상, 즉 이스라엘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
메시야가 나타나 자기들과 함께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지 않고 실패로 돌아갑니다.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의하여 망하고 남왕국은 바벨론으로 유배되자,
묵시사상이 싹트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계시록이 기록된 것이지요.
묵시문학은 예언의 실패에서 생겨난 문학입니다.
메시야가 출현하여 우리(이스라엘)를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지만,
그가 나타나지 않자, 그 희망이 내세로 확대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축복받는다는 사상은 신정정치/왕정정치하에서의
세금을 내게 하기위한 정치적/종교적 제도였습니다.
말이 십일조이지 오늘날 세금의 용도로 쓰인 것이니까요.
솔로몬왕이 중앙대성전을 세우고 지방에 있는 모든 성전을 없애버린 것도
지방에 바쳐지는 십일조(세금)를 혼자서 독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솔로몬왕이 개인의 영화를 위하여 전 이스라엘이 그의 노예로 살아야했습니다.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이 바로왕의 노예였듯이,
이스라엘에서 이스라엘백성은 솔로몬의 노예였습니다. 이것을 견디지 못한
여로보암이 반란을 일으켜 결국 이스라엘이 분열이 됩니다.
십일조를 바치면 축복받는다고 외치는 자들은, 구약에서 정치/종교적이든,
오늘날 율법적/신앙적이든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대부분이 잘못 배워서 잘못 알고 있거나,
십일조제도가 불법인줄 알면서도 개인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이겠지요.
윗글을 쓰신 분은 신앙적으로는 많은 기도를 하고 연구를 하신 것 같습니다만,
이스라엘의 문화와 역사, 신학은 꿰뜰어 보지는 못한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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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은 두 권이 아니라 단권입니다.
이근호 2003-10-27 17:32:27, 조회 : 134, 추천 : 12
구약의 성경 해석에 대해서 사도들을 추월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들은 구약 해석에 있어, 예수님의 고난과 영광의 측면으로 봐야 한다고 하십니다. (벧전 1:10-11)
따라서 우리도 그 선입견을 가지고 구약을 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기껏 유대교 신학에서 맴돌고 못 빠져 나옵니다.
성령 없이 성경을 보는 해석은 아직도 유대교 신학을 따라갈 재간이 없습니다.
"너희 중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의가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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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소식(복음)이 어째서 분노하는 소식으로 들려질까요?
이근호 2003-10-27 16:55:51, 조회 : 164, 추천 : 12
사람은 자기 의로 구원받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의로 구원받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사람들을 분노케 하는 소식인가요?
왜 그럴까요?
그것은 뭔가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쥐고 있어서 그러합니까?
교회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들이 교회인데
이들은 교인 위에 교회가 또 있다고 사람들에게 속이고 오고 있는 자들입니다.
성도 위에는 머리 되시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 예수님과 성도가 바로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누구라도
교회를 쥐고 있고, 소유화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는
예수님의 적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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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23편-경상도사투리로...
박장수 (Homepage) 2003-10-31 13:02:28, 조회 : 134, 추천 : 11
팍스넷-유머방에서 퍼왔습니다....
여호와는 내 목자 이께네
내사 마 답답할 기이 없대이
시프른 풀 구디 내 디비 자고
쪼매 쉿다 갈 도랑까로 델꼬 가신다
내 정신 챙기시사 올케 살아라 카심은
다 지 양반 체면 때문이라 카네
내 죽을 뻔한 골짜구디 껌껌한 데서도
간띠가 부가 잘 댕기는 것은
그 빽이 여사가 아인기라
주의 몽다와 짝대기가 내를 지키시고
내 직일놈 문디 앞에서
내 기 세아 주신다 아이가
사는기 아무리 복잡다 캐 싸도
저 양반이 맨날 지키 주신다 카이끼네
내사 우짜든지 그 옆에 딱 붙이가
죽어도 안 떠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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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경상도 방언으로 통역하는 과정에서 잘못된 신학 개념이 삽입됩니다.
이근호 2003-10-31 14:00:49, 조회 : 165, 추천 : 11
통역의 위험성이 역시 나타나는 군요.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바뀌는 과정 안에서 이미 기존의 문화체계가 와해되면서 하나의 개념만 갈라끼우며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기존 틀이 요동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 나오는 '자기 이름을 위하여'라는 것을 '자기 체면'이라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
자기 언약을 위해서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던져놓고 그것을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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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연 복 받을 만한 크리스천인가?
김병구 2003-11-04 12:07:27, 조회 : 177, 추천 : 15
- 팔 복의 성품에 비추어 본다면 -
크리스천의 경우에는 존재성(being)이 독립 변수이고 행위(doing)은 종속 변수입니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크리스천의 행위를 하는 것이지, 크리스천다운 행위를 하기 때문에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유일하신 구주로 영접할 때에 성령님에 의하여 거듭나는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영적 생명인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지 자신의 노력으로 크리스천다운 행위를 함으로써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의 존재성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창조되는 것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진리를 가장 잘 깨우쳐주는 것이 주님의 산상수훈 중의 팔 복의 성품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난 크리스천의 성품 8가지를 우선적으로 선포하신 이후에 그러한 성품의 크리스천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행위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위가 크리스천의 행위가 아닐 때, 우리는 우리가 크리스천인가를 자문해야 합니다. 크리스천이 왜 육신을 좇아 사느냐? 는 바른 질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거리낌 없이 육신을 좇아 사는 사람은 애당초에 크리스천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으로 여김을 받는 사람이 거룩한, 죄 짖지 않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크리스천의 성품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며 크리스천의 성품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참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을 좇아 불경건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구원을 확실하게 받은 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위로 받기 보다는 내 자신 이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크리스천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분명히 그분께서 크리스천으로 판단하시는 기준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는 거의 매일 같은 고백과 거듭남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해주신 크리스천의 성품을 갖추어 가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크리스천의 존재성을 온전에 가깝게 갖출 때에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여 영을 좇아 거룩하고 죄짓지 않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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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귀하는 맨날 거꾸로 이야기합니까
이근호 2003-11-04 13:05:43, 조회 : 237, 추천 : 13
>귀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데,
"크리스천의 존재성을 온전에 가깝게 갖출 때에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여 영을 좇아 거룩하고 죄짓지 않는 성화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자기 부인을 통해 거룩한 분(예수님)의 공로와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성령 안의 의 삶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예수님만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목도, '복 받을 만한가?"라고 하면 안됩니다.
복 받을 만해서 복 받은 사람도 아니도 없습니다.
제목을 달려면 "과연 복 받은 자인가?"라고 달아야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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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 소리! (주일성수? 그 마귀적인 발상에 대해서...)
이희진 (Homepage) 2003-11-18 04:57:00, 조회 : 184, 추천 : 10
우선 아래의 글(예장합동 교회모범)을 잘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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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구약시대는 안식일을 지켰지만 안식일은 선민인 이스라엘에게 주신 제도였다.
선민 통치가 끝남으로 모든 제사법과 각종 절기가 폐지된 것같이 안식일 제도도 폐지된 것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께서 주일날 부활하셨으며, 성령임도 주일날 강림하셨고, 초대교회 성도들도 주일날 모여 예배드렸다.
주일은 그 이름과 같이 주님의 날이다.
주님의 날을 지키되 구약의 안식일을 지킴같이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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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주일 성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주일 성수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주일 성수론 자들이 제시하는 성경구절은 주일 성수와 전혀 관계없는 구절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일성수는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안식일의 완성이 주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일 성수라고 하는 것은 新 율법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다시 아래의 글을 잘 읽어보세요.(예장합동 교회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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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에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
육신에 관한 모든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직장의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사업장과 가게는 문을 닫아야 한다.
특히 금전거래는 하지 말아야 한다.
주일에 손님 접대는 피해야 하며, 혹 피할 수 없을 때는 미리 준비하여 주일에 금전을 지출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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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新 율법적인 주일 성수개념을 성경을 근거로 해서 확인하려고 하신다면 포기하십시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에는 없습니다. "제 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는 안식일을 지켜서 이단이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그들을 토요일(안식일)에 예배드리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즉, 그들에게는 예수님'만' 복음이 아니라 안식일'도' 복음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은 분명 일요일이 맞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도 그날을 거룩히 지키라고 하신 적이 없을 뿐 더러 다른 날 보다 그날이 더 거룩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날을 안식일처럼 지킨 사도들 역시 하나도 없었습니다. 날의 의미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특정한 날에만 아니라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던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2장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신명기에서는 죄가 있으면 안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안식은 죄가 없을 때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핍박할 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렇듯 안식일을 만드시고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의미를 다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은 주님이 일하시니 그의 자녀 역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안식은 이 땅에서의 안식이 아니라 저 땅에서의 안식입니다. 구원은 시간과 공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죄로 인해 흑암의 권세에 매였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인해 화목케 하신 바 보혈의 공로로 거저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골1장13,21절) 주일을 거룩히 지킨다고, 교회에 나간다고 구원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 날은 어느 날이 더 거룩하고 덜 거룩한 날이 없습니다. 즉, 일요일만 구별된 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요일이 쉬는 날이 된 것은 사람이 한 것이지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 모두가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하나님이 구별해 놓지 않은 날을 일요일만 구별해서 그날만 거룩하게 보내라는 것은 마귀적의 발상입니다.
주일은 우리가 점검 받는 날 이어야 합니다. 한 주간을 빛의 자녀로써의 삶을 살았는지를 점검 받고 회복하는 날입니다. 점검 받고 회복해서 거룩한 자녀로써의 삶을 또 살아가기 위해 충전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그날은 주일 뿐 아니라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매일매일 점검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한시라도 잊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날을 주신 의미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날은 인간에게 주어진 날이지만 인간에게 속한 날은 단, 하루도 없습니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가 있으랴만 주일 낮 예배에 못 나올 사정이 있으면(예를 들어 직장에서 나오라고 한다든지...)저녁예배가 있지 않습니까? 타협하는 모습입니까? 그럼 다른 예배시간에도 타협하지 마세요. 우리들 스스로 예배시간을 많이 만들어 놓고 어느 예배는 중요하고 어느 예배는 덜 중요하다는 식의 마음이 든다면 그 마음 버리십시오. 주일 저녁예배가 낮 예배 보다 덜 거룩한 예배입니까? 수요일은 조금 덜 중요한 예배입니까? 금요 예배는 드리는 게 신기해 보이나요? 수요예배에 안 나오는 것은 별 거리낌이 없으면서 주일 낮 예배에 안 나오는 것은 마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느껴지신다면 그 마음이 벌써 마귀적인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어느 특정한 날을 지정해서 그날을 거룩하다고 하는 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 이상의 어느 특정한 날을 구별하여 그 날에 특별한 의미를 두게 하여 지키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간 이유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러? 아닙니다! 바로 그날에 사람들이 많이 모였기에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다음날(주일)에도 모였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날 그리고 또 그 다음날에도 모였다는 것입니다. 즉, 모이기를 폐하는 어떠한 무리 같지 아니하고 모이기에 힘썼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행2장46절)
모이기에 힘쓰라는 것이 종말에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느 특정한 날에 특별히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십니다. .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비의 은혜를 적극 구현하는 날 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안식일의 완성이 주일이 아닙니다. 안식일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유월절의 완성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살리는 특정한 날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날로 족합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면 그 날은 생명을 살리는 것과 관계된 날어야 합니다. 특정한 날은 세상이 만드는 것입니다. 길일(吉日)이 따로 없습니다. 주일만 특별한 날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하루하루가 특별한 날입니다. 어느 한 날만 특정한 날로 만들지 마시고 매일 매일 특별한 날로 만드십시요.
생명을 살리는 아주아주 특별한 날로...
자그마한 개척교회의 초보집사가...
평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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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총신 교수보다 낫습니다.
이근호 2003-11-18 07:41:13, 조회 : 204, 추천 : 10
총신 교수들도
조그마한 개척교회 집사라면
서슴없이 이런 발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월급을 총신 신학교에서 준다면 이런 발언을 조심하고 삼가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예수 안 믿는다는 뜻입니다.
처음 개척교회 하는 목사도 집사님처럼 이런 발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몫돈으로 헌금을 많이 하는 어떤 장로님이 오셔서
"주일성수"를 주장한다면
그 때부터 그 개척교회 목사 입에서는
집사님 같은 발언은 튀어나오지 않게 됩니다.
집에서 사모님께서 그 목사에게 입주의를 당부하겠지요.
결국 예수 안 믿는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예수 안믿는자들은 안믿는 자들끼리
돈을 중심으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 실상입니다!
"예수냐 아니면 죽음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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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총신 교수보다 낫습니다.
이희진 (Homepage) 2003-11-18 10:32:03, 조회 : 212, 추천 : 11
그 선지자가 발람이냐 하박국이냐에 따라 다르겠죠? ^^
탐욕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치 못하고 악한 자를 더욱 악하게 만들어 버리게 하려 하는 발람 같은 거짓 선지자가 있는가 하면, 악이 심판되어지고 하나님의 뜻만 남게 되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만을 늘 기도하는 하박국 같은 선지가가 있겠죠.
거대한 요새를 지어 놓고 "다윗에게도 허락하지 않은 성전을 허락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고 있는 이 시대의 지도자에 자리에 서 있는 우매한 자들의 머리 속에는 온통 무지와 탐욕밖에 들어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거짓 선지자들이 진리의 자리에 서서 왕 노릇하고 있는 무너진 터만 좌로 우로 온통 가득 차서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의인들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명은 오직 그 남은 자 한 사람을 찾는 역할인가 봅니다. 복음으로 시대에 비젼을 제시해 주므로 돌아 올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그 역할을 감당하므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자녀에게 향하신 그 뜻을 다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의 자리에 서서 왕 노릇하게 되므로 악이 심판되어지고 하나님의 뜻만 이 땅위에 남게 되는 부흥의 역사가 수년 내에 이뤄지기만을 간절히 기도 드릴뿐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믿으며, 그 역할에 쓰임 받게 되기를 늘 기도하는 초보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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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
김병구 2003-11-19 13:01:35, 조회 : 102, 추천 : 2
심령이 가난한 자가 받는 복
세상은 가난한 심령과는 정반대의 심령을 인정하고 상찬하지만
김병구 기자
가난한 심령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