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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삶의 두 갈래] 2003-10-23묻고답하기-

삶의 두 갈래 조부상 (Homepage) 2003-10-23 00:14:09, 조회 : 113, 추천 : 11
(예람교회 홈피 박영선 목사의 글입니다)
'하나님의 뜻' 살피기
이제 '자기 삶'이라는 것을 이렇듯 허망한 데서 끌어내야 합니다. 당장 내일이 어떠할지도 모르는 인간의 의지와 의도에 우리 삶을 맡기고 거기에 동여 매놓을 수는 없습니다.인간이 뽐내며 살아가고 있는 그 삶이란 안개 같고 곧 지나갈 풀의 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내 뜻대로 모든 것을 계획하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그 방식대로 살겠다고 하지말고, '그것과는 달리'--우리 말 번역으로 "도리어" 이렇게 하라고 성경은 일러줍니다. 곧,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아서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겠다고 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생각과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기 중심'의 삶의 습속을 바꿔 '하나님 중심'의 삶의 습속을 익혀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에 앞서 자기 삶이 '주의 뜻'인지 아닌지 비춰봐야 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가르침은 아주 익숙합니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이 말은너무도 자주 들어 무슨 수학 공식이나 문법처럼 들리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암송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통례의 기독교인들은 걸핏하면 말버릇처럼 하나님의 뜻을 들먹입니다.
그러나 '주의 뜻'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수다떨며 주어 섬기는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살아가는 삶 그것이 '주의 뜻'에 비춰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 것인가를 되새길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충족에 겨워 살아가고 있는 삶, 자기의 계획과 의도에 따라 지극히 영리하고 합리롭게 산다고 여기는 삶, 그러한 삶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함부로 '주의 뜻'이라는 말을 건넬 수 없습니다.'주의 뜻'은 인간의 계획과 의도를 포장하는 말이어서도 안 되며,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쓰는 말이어서도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의 의도와 계산과 묘책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의 뜻'을 그 변두리로 밀어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뜻' 위에 두는 격입니다. 조무래기 인간의 오만과 거만함이며 하나님에 대한 불손함입니다.
우리가 가진 잔꾀가 며칠 동안 버텨낼 수 있습니까? 인간의 숨은 모략과 계략과 묘수라는 것이 과연 몇 주를 배겨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이 쟁취했다고 하는 권력이라는 것은 얼마 동안 부지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뽐내는 지식과 재주라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인간의 지혜가 귀하다면, 인간의 지식과 재주와 힘이 값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모름지기 더욱 크고 넓은 하나님의 뜻 밑에 자리잡을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모든 것은 껍데기며 쭉정이입니다.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읽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 55: 9)하신 여호와의 말씀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헤아려 알 수 있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성경에서 그 뜻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이런저런 말로 사람을 많이 끌어 모은다고 해서 그 교회의 목사가 자동으로'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풀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종교 지도자가 달콤한 말을 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은혜가 넘친다'고 말해서는 안 되듯이, 우리 귀에 잘 들어온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잘 들려준다고 속단해서도 안 됩니다.'하나님의 뜻'은 결국 성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서 드러내고 있는 '주님의 뜻'에 우리의 삶을 비춰봐야 합니다. 그 빛에 비춰 우리의 삶이 지닌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의 행동과 활동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주의 뜻' 아래 배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인간의 계획과 판단 아래 삶을 맡겨둘 수는 없습니다.
4. 악과 죄 벗어나기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며 통례의 아집과 자기 집착을 일삼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되뇌면서도 자기 중심의 삶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자기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옮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계기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이며 어디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야고보서에서 저는 겸허함을 해답으로 읽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겸허함에서부터 오고 겸허함에서 출발합니다. 겸허함이 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필연 자기를 과대하게 늘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위에 어떤 초월의 힘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권위의 출처이고 자기가 최종의 판단자로 행세하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오만입니다.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악은 이렇듯 겸허함을 잃어버린 데서부터 나옵니다. 겸허함을 잃은 자기 과대증의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모두 악입니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이 있으면 이들을 휘어잡고, 자기보다 꾀가 모자라는 사람이 있으면 이들을 부려 자기 이익을 획책하고 도모합니다. 정치인들만이 아닙니다. 교육자도 그러합니다. 아니 목사도 그러하고 신부도 그러합니다. 자기의 명성이 커질수록 그렇게 될 가능성은 더욱 높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사회복지 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어느 기독교 지도자가 형사 사건에 휘말려들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종교 의식을 행하는 가운데 무슨 환상을 보았다던가 하면서 교중들에게 일러주는 대로해야 한다고 하면서 강요성(?) 모금을 꾀하기도 하고 수많은 기부자들이 낸 기금을 불투명하게 처리했다고도 합니다. 거대한 한국 최대 복지 기관을 관장할 수 있게 된 자리에 오르면서 그는 겸허함을 잃어버린 듯 합니다. 바로 그 겸허함의 상실이 자기 중심의 수렁으로 빠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겸손을 빼둔 성공은 그렇게 쉽게 시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허망한 자기 과대증입니다.
성경에서는 바로 이것이 '악'이라고 가르칩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자기 오만을 꺾지 않고 오히려 그 오만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말로는 '주님의 뜻'을 거듭거듭 되풀이하면서 자기를 그 아래에 두어 그 뜻을 따르고자 하는 겸허함을 행사치 않는 것, 그것이 오만이요 그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의 뜻을 내세우는 삶, 그것은 어쩔 수없이 '허탄한 자랑'을 낳게 됩니다. 겸허함을 잃은 인간의 오만, 그것이 '악'입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 것인지, 무엇이 선하고 악한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이 '주님의 뜻'이며 무엇이 '인간의 뜻'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또 분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옳고 바르고 선한 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행하지 않습니다.성경은 바로 이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옳고 선한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행동으로 나아가지 않고 있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는데도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맺으며
야고보서는 흔히 믿음과 행함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날처럼 그 때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믿음의 뜻을 아무렇게나 이해해서 행함이 없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게 되어, 곁길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합니다. 이 점을 바로잡아주고자 야고보서를 썼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믿음의 중요성을 결코 저버리지 않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연결해 놓았다는 뜻입니다.믿는 자들이 행해야 할 이치를 밝혀 깨우치고자 하는 서한문입니다. 믿는다 하면서 '자기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러한 삶을 겸손히 되새겨, '주님의 뜻'에 따라 삶을 일궈가도록 가르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부산을 떨며 살고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바쁘기만 합니다.무엇 때문에 그렇게 바삐 살아야 하는지 적어도 가끔은 물어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중심'으로 움직이는지, 아니면 자기의 좁은 생각에 매여 살고 있는지 따져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에 아무런 잘못이나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 자기 과대함이나 오만에서 나온 것은 아닌지 깊이 살펴볼 일입니다. 아니, 바쁘고 분주하게 사는 것이 혹시 자기 중심의 축으로 모아지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도 물어봐야 합니다.'주님의 뜻'이라는 더욱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자기 중심'의 삶의 방식에 매달려 더욱 바빠지고 더욱 분주해 진 것은 아닌지 물어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선택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자기 중심'의 삶인가, 아니면 '하나님 중심'의 삶인가 하는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고 사는 오만한 삶과 그러한 삶을 문제시하여 더 큰 뜻 아래로 들어서려는 겸허한 삶,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할 뿐입니다. 이것은 분명한 만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re] 도대체 예수님의 존재 의의는 어디로 날라가 버렸습니까? 이근호 2003-10-23 10:01:25, 조회 : 124, 추천 : 13
예수님을 내세워고 증거해야 할 자리에 자꾸만 자신의 선택의 정당성을 갖다 놓으시면 안됩니다.
이단이 귀하같은 분을 노리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태도 표명이 없는 사람을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0:3-6에 보면,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하나님에게 복종케 하니가 결코 아닙니다! 주의하세요) 너희의 복종이 온전히 될 때에 모든 복종치 않는 것을 벌하려고 예비하는 중에 있노라"
라는 되어 있는 말씀을 혹시 기억하고 계신지요?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선민 의식 엄기욱 (Homepage) 2003-10-23 06:40:45, 조회 : 216, 추천 : 13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선민 의식>
칼빈의 선택과 예정 교리의 밑바탕이 되는 대표적인 성경 구절인 엡 1:4-9 에는 선택과 예정이 함께 쓰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성경에서 이러한 구절만을 따로 분리하여 읽으면 마치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미리 선택되고 예정된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또 그들만이 성령의 견인으로 계명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자신의 선하신 형상을 따라 지으셨기에 그들 전체의 구원을 바라신다는 점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은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를 불쌍히 여겨 골고루 햇빛과 비를 주시지 않던가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면 그분께서 어느 특정인만을 구원의 대상으로 미리 선택하거나 예정하셨다고는 도대체가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분의 예지(미리 아심), 다시 말해 미래에 그가 선을 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먼저 아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미리 선택하고 예정하실 수 있으셨다 라는 생각도 성경이 밝히는 하나님 본래의 의중에 벗어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 누구를 선택하고 예정하심은 그분의 미리 아심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필요와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기 때문이지요.
성경에 쓰인 선택과 예정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문자상으로는 거기 해당되는 특정 부류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지라도 우리가 그를 그 위치로 불러 세우신 하나님의 의중을 좀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본다면 그것이 선택되고 예정된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져야할 하나님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증거를 봅니다. 창 18: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행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로 보건대 선택과 예정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의 역할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주시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선택되고 예정된 자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그 선택과 예정은 무효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신 14:2 에서 (표준)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주께서 땅 위에 있는 많은 백성 가운데서 너희를 선택하여, 당신의 귀중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라고 함으로 이스라엘을 선택된 민족으로 구별하지만 그들은 악을 범함으로 하나님께 벌을 받고 (표준새번역) "나는 이 땅의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오직 너희만을 선택하였으나, 너희가 이 모든 악을 저질렀으니 내가 너희를 처벌하겠다." 궁극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쳐지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하 23:27 (표준새번역) "그래서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을 내가 외면하였듯이 유다도 내가 외면할 것이요, 내가 선택한 도성 예루살렘과 나의 이름을 두겠다고 말한 그 성전조차도 내가 버리겠다."
사실 선택과 예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별이라는 엄청난 의미가 있을지라도 그 속을 살펴보면 누구에게나 열려져 있는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뜻 곧 그분의 선한 역사가 그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그릇으로 채택이 되었다> 라는 보편적인 성격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글 처음에 예로든 엡 1:4-9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는 구절에서의 선택과 예정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예지에 의해) 어떤 특정 부류의 사람이 구원될 것을 미리 정하신 듯 보일지라도 이것이 특정 사람만을 한정하는 말이 아님은 자명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악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선민 의식만은 강하여 자신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만일 선민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다면 아마 오늘 날 칼빈의 선택과 예정 안에 들어있는 분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을 터이지만 이스라엘이 그렇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칼빈의 교리는 허구임이 판명되지 않겠는지요.
다시 막 13:22 을 보겠습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칼빈의 교리에 입각하여 이 구절을 해석한다면 여기 택하신 백성이란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성도 곧 우리가 알고 있듯이 구원받기로 미리 정해진 자들을 뜻한다고 생각되겠지요. 거짓 그리스도들과 선지자들이 일어나 예수님을 믿는 성도를 미혹할 때 성령께서 보호해주시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얻어진 구원을 끝까지 지켜주시리라 감사를 드리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택하신 백성이라는 의미는 구원의 처음부터 끝까지 하늘에서 거저 부어지는 은혜나 사모하며 감격하여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내면에 선하신 역사를 일으키실 때 이것이 방해받지 않도록 자신의 악을 버리고 매일의 삶에서 계명을 지킴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자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선택된 자들을 시기하여 그들로 하여금 거짓된 것을 진리인양 좇게 하며 궁극에 계명을 범하는 악에 빠지도록 미혹케 할 터이니 이를 경계하라는 의미가 바로 저 말씀인 것이지요. 결국 선택과 예정은 사람 자신 뿐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 질서까지를 뜻하는 말이기에 선택되고 예정된 자는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기 위해 반드시 악을 버리고 계명을 지키는 노력을 스스로 해야 하고 이런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선택과 예정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택함을 받은 자들이 선택된 자들일진대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들의 선택은 무효처리가 되는 것이니 특정한 인간만 미리 구원을 얻도록 정해지고 택해졌다는 칼빈의 예정론은 허구인 것입니다.
여기서 독약이라는 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신 통치 질서를 살펴보겠습니다.
독약
모세는홍해 앞에 서서 외치지요.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 구원의 역사를 보기만 하라고.
그래요. 시간과 공간 속에홍해는 그렇게 갈라졌지만정작 그들과 우리 마음속에서는 갈라지지 아니했어요.
하나님이 북 치고 장구 치시며모든 것 다 이루신 후너희는 그저 믿기만 하라 하시니정말 쉽고도 쉽네요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이...
하지만
오직 믿음만으로 라는 말씀이좋기는 좋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이좋기는 좋아도
내다 두려워 말라 하시는 말씀이 좋기는 좋아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에게 평안을 주신다는 말씀이 좋기는 좋아도
우리 죄를 속량키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이좋기는 좋아도
죄인에게 거저 내리는 은혜와 사랑이 좋기는 좋아도
지혜로운 자는 그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고손벌리며 뛰어나가지 않아요.
왜냐하면선하신 하나님은 죄인을 위해 은혜와 사랑을 한량없이 뿌리실지라도
언제나 죄인이 잊지 말아야 하는 한 가지곧 악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면그 은혜와 사랑은 어느 새독약으로 변질되어 있지요.
이것을하나님께 항변할 수 없는 이유는
죄악을 사랑하여 품에 안기 원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고불변의 진리인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칙이던가요?
선, 진리, 생명, 사랑, 자비, 은혜 등등.. 이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무상으로 부어집니다. 그러나 저들이 인간에게 와서 실제적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인간은 그분의 역사가 방해를 받지 않도록 자신 속에 있는 악을 버려야 하겠지요.(개역 한글 렘 5:25 너희 허물이 이러한 일들을 물리쳤고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 이러한 이치는 하나님께서 만물 위에 높이 세우신 태양을 통해서도 교훈 하시는데 예를 들어 태양은 세상이 평온하든 소란스럽든 이에 구애받지 않고 항시 그 밝은 빛을 세상 구석구석까지 비추지만 빛을 받는 대상이 다른 물체에 의해 가려진 곳에 있다면 그곳에는 태양으로부터 온 빛 대신 어둠이 생길 것입니다. 인간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편에서 본다면 그것들은 인간 개개인의 순종과 불순종 여하를 막론하고 모든 이들 위에 차별 없이 내려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삶 안에 있는 인간에게는 저들이 내적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차별이 생기고 맙니다. 모든 인간은 이러한 보편적인 섭리 아래에 놓여져 있기에 어느 누구라도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악을 버려 계명을 준수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등의 바울 서신에 나타난 믿음과 율법(의행위) 혹은 거저 얻는 은혜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말들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되어야 합니다.(본 칼럼의 토론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기 위해 내면의 고질적인 악과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애씀과 노력 없이 인간은 단정코 성경 말씀에 있는 그 어떠한 구절로도 자신을 위해 구원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악을 버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성경 속 '믿음으로 구원' 이라는 구절을 아무리 머리에 기억시켜도, 또 더할 나위 없이 더러운 죄인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 고백하고 그런 죄인이 지금껏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며 그와 같은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께 아무리 감사와 찬송을 드려도, 또 자신은 선택된 자요 예정된 자라 아무리 외쳐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만 읽으면 선택이라는 틀 안에 인간 의지의 자유가 허용되어 있는 듯 여겨지지만 사실은 인간 의지의 자유로 말미암아 선택이 확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혜와 사랑은 반드시 인간이 악을 버리려는 노력을 통해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통치의 한 예요 선택과 예정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는 한 마디로 콩 심은 데 콩 나도록 질서를 부여하셨다는 뜻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사랑의 성격은 바로 이 한 마디 콩 심은 데 콩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초월하는 말이 아님에도 우리들은 죄인에게 거저 내려지는 은혜에만 붙들려 신앙에서 인간의 역할을 빼고 손쉽게 은혜와 사랑, 한량없는 자비 등으로 구원을 선사 받으며 이를 신본주의의 거룩한 사상이라 스스로 감탄해 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절대 예정을 주장하는 분들은 남은 자의 구원관에 있어서도 이를 창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가 미리 정해졌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이른 바 칼빈의 전적 부패에 이어지는 예정과 선택의 교리가 그것이지요. 만일 성경에서 읽혀지는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이 문자 그대로의 뜻이라면 선택된 민족인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어찌하여 구원을 얻을 수 없었을까요? 또 어떤 자들에게는 버린 돌이 되고 다른 자들에게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과연 선택과 예정의 교리에 어찌 어울릴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자에게는 거치는 돌(걸리는 반석 또는 버린 돌)이 되시고 믿고 순종하여 따르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머릿돌이 되실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 여하에 달린 결과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이 어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은 분명히 인간 의지의 자유로운 선택인데 절대 예정은 이 자유를 부정하면서 말하기를 '그는 예정에 의해 미리 선택된 자이기에 하나님께서 믿게 하셨다. 누구든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자는 믿지 않을 수 없다' 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상은 절대 예정의 잘못된 점을 좀 보완하여 자유 의지를 예정이나 예지 안에서 허용하기도 합니다. 즉 인간은 자유로운 의사 선택으로 구원을 위한 선을 행할 수 있으나 이는 예정되고 선택된 자에 한하며 이러한 예정과 선택은 그가 선을 행할 것을 미리 아시는 하나님의 절대 능력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이는 인간 개개인의 운명을 미리 내어다 보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아시기에 그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으셨다는 뜻인데 차분히 생각해보면 그 동기야 어떻든 하나님께서 인간의 운명을 미리 정하신다는 것은 그 선한 성품에 있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칼빈의 선택과 예정의 교리를 믿으면 구원의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 한 분께만 달려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인간의 노력과 의지를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 안에 꽁꽁 묶어버립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죄인에게 거저 부어지는 은혜나 고대하며 사는 외에 그 스스로의 판단과 의사 결정도 못한 채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리지요.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이 어찌 진정한 우러남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으리요. 미리 천국 갈 자와 지옥 갈 자가 정해졌다면 신앙 생활은 하나의 꼭두각시놀음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사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진리에 달라붙어 있는 거짓의 화려함에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정인즉 삶 속에서 계명을 지킴으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닌 어떻게 하든 진리의 지식과 그 지식에서 나온 고백으로만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에 자기 신앙의 부요를 느끼고 있는 것이지요. 실제로 성경 말씀에 웬만치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지식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생활에서 계명을 좇는 일보다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시인할 것입니다.
거짓을 진리인양 사수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머리 속에서 정립되는 교리들은 서로가 그물처럼 묶여 있기에 어느 한 구절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읽으면 그와 연관된 다른 구절들도 왜곡하게 되어 결국에는 전체로 번지는 도미노 현상을 일으켜버립니다. 물론 그 과정에 있어서 여기 저기 진리들끼리 서로 충돌하는 모순에 갈등하기도 하지만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의 성경 말씀인지라 사색과 추론을 동원한다면 자신의 이성을 거짓에 빠지도록 스스로 설득하기에 충분할만한 논리를 강구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논하는 주제가 바로 그러한 예 중의 하나입니다. 전적 부패로 인한 인간의 무능력 곧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느 조그마한 선도 스스로 행할 수 없다는 생각은 인간을 더욱 처참한 죄인으로 몰아붙이기에 충분하고 구원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모든 진행을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만 맡김으로 자유 의지는 말살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절대적 예정과 선택의 교리를 반기고 또 이로부터 오직 거저 얻는 은혜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됨으로 종국에는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의한 구원을 환호하는 반면 계명을 따라 선하게 사는 삶은 상급 정도로만 여기게 되었는데 이러한 오류들이 우리 눈에 참 진리처럼 인식되는 까닭은 바울 서신의 영향이 큰 바 신학자들은 거기서 바울을 왜곡하여 이 모든 잘못된 생각들을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서신을 이해하는 눈으로 주님의 가르침을 풀지 말고 반대로 주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눈으로 바울 서신을 풀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에 치중하며 성경을 읽는다면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생각들이 크게 달라져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예정과 선택의 의미 역시 달리 보일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그 교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전연 어울릴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만 선택되었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선민 사상은 그들에게 우월감을 안겨주어 갖은 악을 다 행하면서도 자신은 구원의 반열에 들 수 있다는 거짓된 확신으로 스스로의 영혼을 황폐케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진실한 마음으로 순종하기보다는 외식과 위선 곧 마음에도 없는 거짓 순종과 자기 의에 의한 율법주의, 그리고 이에 필연 따를 수밖에 없는 보상 심리가 그들 믿음의 전부였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때의 선민 사상과 지금의 예정과 선택의 교리는 너무도 닮아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의 선택의 교리는 얼마나 이기적이던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믿는 것조차 또 구원을 위하여 선을 행하는 것조차 선택된 자만 믿고 행할 수 있다는 의미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하지만 누구는 태어나기 전 모태에 있을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시인할 수 없는 자로, 그리하여 지옥에 들어갈 자로 정해져있고 또 누구는 그가 아직 무슨 일을 행하기도 전에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시인할 자로, 그리하여 천국에 들어갈 자로 미리 정해졌다는 칼빈의 이런 생각이 어찌 합당할 수 있으리요. 인류 전체에 대한 주님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적어도 성경이 말하는 선택과 예정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인류로 천국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신비가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천국에 가도록 예정되어 있고 누구도 지옥에 가도록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건전한 이성은 말한다. 이는 사람으로 태어난 자 누구든 그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진리를 이해하고 선을 행하는 능력이다.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있고 선을 행하는 능력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있다. 이 능력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모든 분별 있는 사람 안에 남아있고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인간은 누구나 천국에 들어가도록 지음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창조의 목적이기는 하나 모든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하는데 그 원인은 그들 스스로 지옥의 기쁨 곧 천국의 정반대의 것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일 천국에 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잘못이 아니요 인간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은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이다. 주님은 모든 태아 안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위하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지혜를 위한 두 가지 그릇을 꾸미셨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릇은 미래의 인간 의지를 위하고 하나님의 지혜의 그릇은 미래의 이해성을 위한 것이다. 이로써 주님은 선을 행하는 기능과 진리를 이해하는 기능을 인간에게 부여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을 시인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섭리에 속한다. 주님은 어떠한 사람도 지옥에 가도록 던져버리지 않고 영혼 스스로 자기를 그곳에 던져 넣는다. 악하고 경건치 못한 사람은 사후 이렇게 자기를 지옥에 던지는 것이다.
구원의 수단으로는 악은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기 때문에 끊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시인해야 한다는 이것이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늘 그가 악을 끊을 수 있도록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그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시며 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그의 이해성 안으로 들어가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 편에서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 안으로 이와 같은 유입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그 스스로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할 때만 힘을 얻고 깨우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기 전에는 저 두 가지 중 이는 저 위에 포개져 있는 듯 보이고 인이 쳐져 봉해진 듯 보인다. 하지만 사람 편에서 할 일을 다하면 그 둘은 풀리고 열린다.
이상은 어떠한 사람도 주님께서 구원 얻을 수단으로 공급하시는 지식과 능력이 주님으로부터는 모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기 위함이다.(마 6:31-32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이로써 모든 인간은 천국에 가도록 예정되어 있고 지옥에 가도록 되어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천국으로 가는 것 이외의 어떠한 예정론도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결코 악인을 지옥에 가도록 예정하지 않으셨다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그 어떠한 악인에게서도 끝까지 물러서지 않고 다만 악인 스스로 하나님을 등지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예정론의 신념은 무척이나 해로운 것이다."
==========================================================================[re] 그렇다면 다음의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해 보세요. 이근호 2003-10-23 08:39:32, 조회 : 116, 추천 : 6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이 어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제가 보기에는 '은혜'와 '긍휼'을 안 줄 자도 따로 있어 보이는데 귀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re] 그렇다면 다음의 하나님의 말씀을 해명해 보세요. 엄기욱 (Homepage) 2003-10-23 15:56:51, 조회 : 113, 추천 : 8
그렇다면 로마서의 토기장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네요.거기 등장하는 에서와 야곱 이야기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서로간 이해를 돕기 위하여 질문을 먼저 드리겠습니다.
아래 갈라디아서에서 사라와 하갈이라는 두 인격적 존재를 두 언약에 대한 비유라고 한 바울의 의도를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갈 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요3:6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호12:10, 고전10:11 (갈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갈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re] 질의 대화에도 '순서'라는 예의가 있습니다. 이근호 2003-10-23 16:05:01, 조회 : 130, 추천 : 10
내용은 과격하고 강조하다 보면 상대를 모독하는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각자의 사명을 확실히 하다보면 말이지요.
그러나 질의에는 질의부터 먼저 답변해 주시고 그 다음에 상대에게 다시 질의해도 늦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대화 도중에,
A가 시비쪼로 먼저 묻습니다.
"저보다 나이가 어려보이는군요. "
B가 대답합니다.
"실례지만 몇 살이신데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까?"
앞에 A는 질의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B는 실제적 질의였습니다.
그렇다면 A가 예의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올해 27입니다. 귀하는 26이지요? 라든지 그것보다 더 많으십니까? 저보다 좀 어려보이는 것 같아서요"라고 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건방지기 짝이 없는 A라면,
"B씨께서 먼저 저에게 나이를 말하면 그제사 제가 나이를 먼저 말씀드리지요"라고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왜 건방지느냐 하면,
만약 B가 저는 28인데요, 하면 A가 먼저 큰소리 친게 있기에 거짓말로 "그렇습니까 제 나이는 29입니다.(실제로는 27이면서도). 하하하(웃는소리) 제 보는 눈이 틀리지 않았군요"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에게 안 질려고.
다시 묻습니다.
출애굽기 33:19에서, 하나님깨서 은혜와 긍휼을 주지 않는 자도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귀하의 견해는 어떠합니까?
답변이 있으시면 귀하께서 들으시기에 후회없는 정도로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 두 비유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보는 눈들이 있기에 저는 이 약속을 지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귀하도 알지 않습니까?
귀하에 누가 누군지 모르기에 그냥 기분 나쁘면, "잘먹고 잘살아라"라고 내빼면 그만이지만.
==========================================================================[re] 긍휼과 강퍅 엄기욱 (Homepage) 2003-10-24 12:22:02, 조회 : 133, 추천 : 22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그저 진리만 논하기를 바랍니다.겸손도 준비하고요.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롬 9:15-23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는 생명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은 자로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창조 질서 안에서 이미 보호받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열쇠는 롬 9: 30-33에 있습니다. "기록된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그리스도는 한 분이신데 사람에 따라 그분은 누구에게는 부딪히는 돌이 되시고 다른 이에게는 생명의 머릿돌이 되십니다.
부딪히는 자, 거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또한 반석을 머릿돌로 삼아 생명을 세우는 자도 있는 것이지요. 같은 돌인데도 쓰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맞아들이는 것, 이것이 생명의 질서요 하나님의 역사 방법입니다. 저 말씀을 잘못 풀면 하나님 능력의 증거를 보이고 그분의 이름을 만천하에 공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로를 강퍅케 하셨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나 본질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 양자 모두에게 생명의 머릿돌만 되실 뿐 어느 한쪽이라도 거치는 돌이 되시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그분의 말씀 역시 사랑을 우선하여 읽는다면 이러한 말씀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풀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고의나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노하신 듯 차별하며 강퍅케 하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으시기 때문이지요.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는 진노나 저주, 형벌 등은 실제로는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이 모든 느낌은 다만 인간의 감각에서 느껴지는 외적 현상일 뿐이기에 그러합니다.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사랑 받기를 사모하여 애를 쓰는 자에게는 그 필연의 결과로서 사랑이 주어지고 반면 인색하고 강퍅하여 형제도 이웃도 아랑곳없이 자기 혼자만 행복하기를 바라는 자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도 그 곁에서 떠나가 버리기 마련입니다. 인간은 긍휼의 그릇이건 강퍅의 그릇이건 선악간 자기 행위가 자기를 심판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질서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선악에 대한 심판의 기준으로 있는 것이고 인간의 생사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기에 생명과 사망의 판가름은 생명의 질서라는 기준에서 결과될 뿐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인간이 이 세상에 있을 때 자신의 삶 속에서 형성한 영혼의 상태 그대로를 영원히 계승하는 세계인 것이지요.
인간 위에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은 질서와 공의를 배제한 채 원칙 없이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겠느뇨" 라는 말은 바로 앞에 나온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라는 표현과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토기장이가 귀히 쓸 그릇과 천히 쓸 그릇을 만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차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영적 상태에 따라 스스로 차별을 당하는 것을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즉 바울의 저 말은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또 긍휼의 그릇이나 진노의 그릇이나 간에 모두 그들의 영적 형편에 맞추어 최선의 결과가 나오도록 공의와 질서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 긍휼의 역사는 그들 모두를 선으로 인도하는데 충분하게 베풀어지지만 그럼에도 그 역사를 받고 아니 받고는 오직 그들의 자유에 속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태양은 동일한 빛을 이 세상에 비추지만 한편으로는 곡식을 영글게 하는 반면 다른 편으로는 고기를 부패시켜 버립니다. 원래는 차별 없는 빛이지만 그 빛이 당사자의 사정에 따라 각기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 이것이 바로 생명의 질서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스스로 차별을 당하는 까닭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라고 반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부어지는 은혜와 사랑도 이와 같습니다. 주님으로부터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모두를 사랑하심으로 동질의 은혜와 사랑이 그들 영혼에 부어지지만 정작 그들은 각기 다르게 받아들임으로 서로 차등이 생기게 되는데 이는 사실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은혜와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들의 역량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밝고 따스한 사랑의 빛을 모든 영혼에 공급하시지만 그 빛을 받는 사람들의 상태가 선하지 못할 때에는 그 빛은 오히려 썩이는 것이 되어 자기 사랑이라는 악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위의 표현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선하신 하나님은 모두를 귀히 쓸 그릇으로 택하시고 또 모두를 긍휼의 그릇으로 예정하시며 모두를 야곱과 같이 사랑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히 쓸 그릇이나 강퍅의 그릇이 생기고, 또 에서와 같이 미움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 자신에게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 어찌 진노를 보이고 멸하기로 준비된 그릇이 실제 있을 수 있으리요!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은 물론 진노의 그릇조차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re]귀하의 답변은, 이미 인간의 태어나서 자기 선택성을 고유의 행동으로 나타난 시점에서 풀이한 것입니다. 이근호 2003-10-24 12:45:33, 조회 : 128, 추천 : 10
>그러나,
로마서 9:11-12에서는, 바로 귀하가 같은 자들이 있음을 전제로 해서
"그게 아니야, 그게 바로 근원적으로 잘못된 사고에서 나온 생각이야"라고 공략하시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우선 이곳까지 끊어서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 뒤엣 말은 ( ) 처럼 빈칸으로 남겨 두고 모든 인간들에게 각자 자기 의견을 임의로 써넣으라고 지시했다고 합시다.
아마 귀하같으면 그 ( ) 칸에 이렇게 써넣을 것입니다.
(-는 누가 선택된 자인지 누구 선택되지 않는 자인지 아직 유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공평한 질서 위해 진행되기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진행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에게 책임성을 묻고자 함이다. 그런데 그 책임 소재는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어떻게 활용했느냐 여부로 판가름 나기 마련이다. 그럴 경우에만 참으로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정의로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의지로 선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 제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기로 선택한 사람입니다"라고 판정받게 되고, 에서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저는 저주받도록 작정된 자이군요"하고 드러나는 법이다. 따라서 이로서 하나님이 예정은 인간이 행함으로 굳게 정립되게 마련이다" 라고 작성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빈 ( ) 칸을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떻게 채우신가를 정답의 뚜껑을 열어제쳐 봅시다.
(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서게 하려 하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르시는 이, 곧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차버리고 계시는 겁니다.
원하는 자가 구원이 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시고(롬 9:16) 오직 은혜 줄 자에게만 은혜를 제공하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귀하께서 왜 이런 말씀이 거부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 인간의 모든 구원행위를 발길질해서 구원밖으로 차버리는 행위인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받고자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거부하겠다는 뜻에 십자가 사건을 제시했고, 구원될 자는 오직 그 십자가 자신 분의 순전히 고유 권한에 의해서 자신이 원하는 자만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 5:21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이것이 바로 은혜줄 자에게 은혜주시고, 긍휼할 자에게만 긍휼을 주시는 그 여호와의 약속이 주 예수님의 행위로 성취되는 상황입니다.
갈라디아서 4:22-27에 나오는 두 언약에 담긴 의미는,
십자가 사건(갈3:1)이 단순히 앞의 예언의 범주를 성취하는 입장이 아니라 도리어 십자가 사건이라는 내용을 확립하기 위한 '범주 설정'이 과거로 내려가면서 배치되었음을 보여주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에 의하면, 율법으로 족쇄를 채워 결코 죄에서 못 빠져 나올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육신이라는 범주 안에서 태어날 자라는 겁니다. 이 육신의 범주에서 태어날 자들은 아무리 선을 행해도 그 모든 행위도 완전한 저주의 법인 율법의 지배를 받기에 자기 행함으로 그 저주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는 겁니다. 왜 그들은 저주받는가?
그것은 오직 십자가 시건이 제대로 은혜로운 사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은혜에서 배척되어야 역할을 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 족쇄를 '언약'이라고 합니다. 율법의 종, 즉 저주이 종은 저주를 제공할 율법 언약의 저주에서 탈피하지 못합니다. 그 안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쪽쪽 다 저주받아 죽습니다. 아무리 많이 태어나도 결국 남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른 족쇄(언약)이 있습니다. 이 언약은 적용될 법칙은 저주의 언약과 동일합니다. 그 안에 놓인 자는 그 어떤 행위에도 상관없이 그 언약 안의 원칙에서 못 빠져 나옵니다. 이들은 '약속'이라는 법칙에 갇혀 있습니다. 그 약속은 바로 '죄용서의 은혜'라는 십자가 약속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 안에 놓인 자는 본인이 아무리 악한 일을 많이 해도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빠져 나갈 재간이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천국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축복만 영원히 받아야 될 팔자라는 말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천국(하늘)에 있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그러한 운명자로 태어났는가?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분이 약속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 약속의 주인공이 주시는 사랑을 영원토록 증거해야 될 역할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은 이 두 언약 안에서 갇혀 있습니다.
방금 언급한 이야기 가운데, 모든 것이 인간들이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신관념은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마가 심어준 하나님의 허상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십자가 약속 안에 있는 예수님의 행위로만 비치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안에서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허구적 하나님에 매여있는 자가 됩니다.
==========================================================================[re]야곱과 에서 엄기욱 (Homepage) 2003-10-24 21:14:42, 조회 : 93, 추천 : 15
바울은 갈 4:21-26에서 <사라와 하갈>이라는 두 인격적 존재를 <두 언약에 대한 비유>라고 밝히는 것을 봅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기록된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 비유를 이해한다면 아래의 <야곱과 에서>도 인격적 존재를 떠나 그들이 어떤 의미를 상징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로 쓰이고 있다는 것도 이해하리라 믿습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 말의 원문은 말 1:2-3 에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의 이 말씀 안에 영적 본질을 표상적으로 표현하시고 계십니다. 사랑과 미움의 갈림길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는 그분의 질서나 공의 측면에서 볼 때 이미 창조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과연 긍휼히 여길 자와 불쌍히 여길 자는 창조 전부터 또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도 아니한 때부터 창조 질서에 의해 예정되어 있는 것이지요. 결국 이 문제는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질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절대적 주권자만으로서의 편파적 하나님이신가 라는 관점으로 모아집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라는 구절 중 '야곱'과 '에서' 라는 이름에는 표상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는 야곱과 에서 라는 개개인의 인격을 뜻하지 않고 그 이름이 갖는 생명과 사망의 법을 뜻하는데 그중 '야곱'은 인간의 이해성에 싹트는 믿음의 측면을 그려주고 '에서'는 인간 의지에 실린 악한 본성에서 나온 인간적 선 곧 자기의의 측면을 그려주는 이름입니다.
에서는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생명으로 살기에 자기 행위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서려는 자의 상태'이고 야곱은 '자신은 생명을 받는 그릇에 불과한 존재, 더구나 의지에 악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에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힘으로는 살 수 없고 반드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간다고 여기는 자'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서 스스로 의에 서려는 자에 속하는 '에서'와 달리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믿음에 설 수 있다고 여기는 '야곱'은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을 육체가 없다라고 호응하는 것이지요.
거듭나기 전 인간 그대로는 요 8:44 에 있는 것처럼 거짓말쟁이요 살인자며 마귀 자식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한 '인간의 의'로서 행한 선!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 앞에 아무런 빛도 내비칠 수 없습니다. <인간성 그 자체만으로 볼 때> 과연 자기 행복, 자기 축복, 자기 체면과 이해득실이라는 이중적 마음을 버리고 선이나 진리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인간이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으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라는 말씀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비록 인간에게는 의지와 이해성이라는 두 가지 자율적 기능이 주어졌을지라도 그의 의지는 출생 시부터 악에 물들어 있으므로 의지의 이런 상태로부터 영혼을 건져내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해성만큼은 하늘 높이 저 천국의 빛까지 오를 수 있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이렇게 의지보다 앞서가는 이해성 덕분으로 인간은 자기 내면의 어둠을 인식하고 돌아서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영혼 구원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영혼 구원의 방편이며 이러한 질서에 순응하는 자를 사랑하심이 곧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의 본래 의미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하신다는 말씀을 보면 자기 힘에서 비롯된 그 어떠한 선도 본질에 있어서는 자기 살기 위한 인간적 선이요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와 질서 앞에 종교적 악이라는 미움이 될 수밖에 없는데 이처럼 자신에게서 비롯된 능력에 의존하는 상태의 삶을 성경은 신비롭게도 '에서'라는 한 역사적 인물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요. 윗 구절에서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아 서는 것'은 에서의 상태를 가리키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는 것'은 야곱의 상태를 가리키기에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에서)가 어린 자(야곱)를 섬기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에서와 야곱'은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그의 내면에 두어진 하나님의 창조적 질서를 뜻하는 말일뿐입니다.
말씀 속에 내재하여 있는 이러한 참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그것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으로 읽는다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옹호한다는 명목 하에 절대 예정과 선택의 우월감을 마치 참 진리인양 받아들이게 되어 영혼에 엄청난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유대교회가 율법을 문자적 의미만으로 읽고 행했기 때문에 구원에 들지 못하고 오늘까지 죽어감을 보면서도 또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의 문자에 담긴 그 영적 의미를 새롭게 풀이해주심을 보면서도 지금의 기독교회 역시 성경의 가르침을 여전히 문자적 의미에서만 찾고 있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re]야곱과 에서가 인간의 양면성? 이근호 2003-10-25 17:09:04, 조회 : 81, 추천 : 14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도 양면성이 성립됩니까?
야곱과 에서는 한 사람이 아니고 각기 다른 두 사람입니다.
쌍둥이로 붙어났다고 한 사람으로 보면 안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사랑받기로 작정되었고 한 사람은 미움받기로 작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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