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문에 대한 평가] 2003-10-17
이 고백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복음의 답변을 자세히 듣고싶습니다. 서윤정 2003-10-17 01:16:43, 조회 : 153, 추천 : 5
예수를 믿는다는것은 자기의 마음을 온통 예수께 빼아껴서 복음과 어울려서 산다는 말이고 다른말로 말하면 세상을 등지고 애통한 심령으로 산다는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것이기 때문에 흉내내기가 어렵습니다, 가령 누가 흉내를 내도 결국에는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욕심을 다 들어내게 되여 있습니다. 복음을 안다면서도 세상에 눈을 떼지못하고 적당히 어울려사는 자기 위선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주위사람은 속일수 있어도 그 속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속일수 없습니다, 성도는 옛날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동일선상에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존재하고 그말씀(복음) 때문에 세상에서 의로운 고난을 받고 있는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복음을 안다면서 무었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세상에서 무었을 거둘려고 애쓰고 땀 흘리고 있습니까? 주저하지말고 세상을 악하다고 저주하십시요 세상에서의 괴로움은 육체를 입고 있을때까지 잠시잠깐 입니다 앞으로 입을 영광을 소망하면서 용기 내시기 바람니다.
==========================================================================[re] 참 훌륭한 고백입니다. 단... 이근호 2003-10-17 08:53:29, 조회 : 155, 추천 : 8
>1. 세상 악함에 너무 신경 쓰서는 아니됩니다. 이미 그저 얻어진 그 하늘나라에 대해서 기쁨과 감사로 지내야 합니다.
2. 아무리 좋은 고백과 신앙을 갖고 있어도 그것은 함부로 전하거나 남발할 권리가 성도에게는 없습니다. 항상 성령 안에서 주님과 사귀면서 주님께서 "전하라" "가라" 하는 경우에만 전해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너무 '오버'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마귀를 정죄하는 교만의 죄에 빠질 위험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 엄기욱 (Homepage) 2003-10-17 20:50:00, 조회 : 110, 추천 : 5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
저는 분명 구원의 조건에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라는 내용을 넣고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말조차 읽는 분들에 따라서는 그것이 마치 유대의 율법처럼 곡해되어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지닌 바 그의 신앙이 어떠한가 라는 것은 주님에 대한 그 마음이 얼마나 진실한가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마다 나름대로는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지만 주님에 대한 그의 믿음과 사랑이 참이냐, 아니면 그 대부분이 위선과 외식의 거짓인데도 불구하고 저 스스로는 그것을 참이라 여기고 있느냐 라는 판별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겠지요. 이 문제를 밝혀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논제인 구원관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참으로 우리의 하나님으로 믿고 사랑한다면 이에 대한 증거는 필연 그분의 계명을 준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를 두고 요일 2:3-6 에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구원의 조건에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라는 내용을 넣은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라는 제 말 속에 담긴 의미는 그것이 율법주의 식 계명 지키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이 속에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행위로 나타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해하던 그런 식과는 다른, 자유하는 생명에서 나온 계명 준수를 뜻하는 말입니다. 주님과 사도들이 성경 이곳저곳에서 강조하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 가르침 역시 이런 의미이고 저 역시 그러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믿음과 사랑이 참이라면 어찌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겠는지요. 이를 역으로 말하면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지닌 믿음과 사랑은 겉으로만 참인 것처럼 보일 뿐 사실은 저 유대의 외식과 위선 등의 율법주의 곧 그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것은 외적 꾸밈과 겉치레에 지나지 않고 속으로는 오직 자기 사랑을 위한 방편으로 거룩한 말씀을 역용하는 악을 쌓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율법(주의)과 신약의 복음의 차이는 여기서 발견됩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자기 사랑'과 '자기 의' 이룸을 최종 목적과 동기로 삼기에 그것을 행하는 수단으로는 '자기 힘'을 의지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계명을 지키는 것은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 이룸을 최종 목적과 동기로 삼기에 그것을 행하는 수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와 사랑'을 의지합니다. 같은 율법(계명)을 지키되 그것을 행하는 목적, 동기, 수단에 따라 하나는 구약의 율법(주의)이 되어버리고 하나는 신약의 복음이 되는 것이지요. 그 율법(계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하냐에 따라 하나는 악이 되고 하나는 선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사이에 율법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닙니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율법은 여전히 우리를 구원하는 조건처럼(?) 서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구원의 조건은 율법(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닌 믿음이겠지요. 그럼에도 위에서처럼 계명 준수를 구원의 조건에 넣는 이유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계명)을 지키는 것은 믿음과 분리시킬 수 없는 한 몸이라는 의미 안에서 그것도 조건에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믿음 그 자체만으로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시기에 그분의 형상인 우리 역시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생명에 의해서 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럼에도 믿음을 구원의 조건이라 말하는 이유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사랑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믿음이 있다 하면서 사랑이 없는 것은 참 믿음이 아니고 사랑 역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계명)을 지키는 것은 구약과 신약 양 시대에 걸쳐 변함 없이 구원의 조건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폐하지 않고 더욱 완전케 하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를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형식과 율법주의로 지켰으나 이후로는 주님의 가르치심과 사랑을 본받아 그 율법을 참 마음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옛 율법과 새로운 계명 사이의 차이점은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이해가 개혁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믿음으로!' 라는 바울 외침의 참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주의에서 이제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율법(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지요. 바울이 믿음이란 것을 옛 율법과 복음의 계명 준수 사이에 도입시키고 있는 이유는 율법주의에 젖어있는 자들에게 본래의 거룩한 율법에 담긴 하나님 사랑을 사람들로 하여금 깨우쳐 이제 그 사랑으로 계명을 준수하도록 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곧 믿음은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 때문이며 사랑은 믿음을 수단 삼아서만 그 본래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지요.
구약의 율법주의로 계명을 지키느냐 아니면 신약의 믿음과 사랑으로 계명을 지키느냐 라는 양자간의 분명한 경계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성경에 쓰인 율법이라는 말의 각기 다른 의미를 혼동하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님과 바울이 사용한 율법(율법의 행위)이라는 말은 '율법주의 식의 계명 지키기'와 '믿음과 사랑으로라는 복음적 계명 지키기'를 혼용하여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이쪽에서는 행함이 아닌 믿음의 구원을 말하면서도 저쪽에서는 그 반대로 다시 행함의 구원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상과 같은 것이 그동안 율법과 믿음에 대해 밝힌 제 견해였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들은 제가 구원의 조건에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라는 내용을 넣은 것을 두고 옛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받으실 듯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 라는 요14:15-23에 있는 주님의 말씀은 성도들의 마음에서 결코 조금이라도 약화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이미 그 믿음과 사랑이 참이 아닌데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또 피를 믿음으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고 구원되었다함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런즉 제 생각은 이러합니다. 그분의 피로 인한 대속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이미 의롭게 되었지만 여전히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보다, 비록 그 피의 대속을 믿지 않음으로 그런 식의 죄 사함은 받지 못했을지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로 인해 그분의 계명을 지키려는 사람이 보다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re]그렇다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이근호 2003-10-17 23:33:08, 조회 : 129, 추천 : 12
제가 귀하의 글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대단히 '자기 집착'이 강하다는 겁니다.
구원을 확고히 '자기 소유화'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소유욕이 곧 '자기 지킴의 속성'을 강화하는 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성령의 역할이 계십니다.
그 성령의 역할은, 새언약(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사랑)을 자기 백성 속에 적용하시는 일을 합니다.
이로 인해 성도는 날마다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지고 자신은 그 죽음에 넘겨져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귀하께서 언급하는 모든 주장은, 이 성령의 역할을 하나님에게 미루지 말고 인간의 자유의지(이 말 자체서 논리상 성립이 안되니 그냥 '자율성'이라고 하겠습니다.)의 힘으로, 인간 몫으로 달성하자는 겁니다.
귀하께서 왜 그렇게 주장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벌리시는 죄에 대한 책임 추궁이 이 공정한 심판으로 인정받으려면, 하나님과 단절된채 인간 고유의 뭔가 '행한' 것이 있어야 합당하다는 인식 때문에 그러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관여된 행위라면, 그 행위를 심판하는 것이 곧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는 셈이 되어 의로운 분이 자신을 심판하는 모순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고방식은, 성령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이라면 얼마든지 사색해서 논리의 고리로서 결국 얻어질 결론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거듭남이란, 십자가 속에서 나오는 그 은혜의 틀을 가지고 자신의 구원의 근거와 성취를 인정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귀하처럼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라면을 끓어주니까 옆에 있는 자식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 잘 보고서 나도 어머니처럼 라면을 잘 끓어야지. 그러면 어머니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이놈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잘 사용하여 너도 나처럼 라면을 맛있게 끓일 줄 아니구나 참 기특한 녀석. 나는 너로 인하여 영광을 받는구나' 라고 하실 것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뒤 어머니께서
"애야 라면 먹으라"하시니까
그 자식이 그 라면을 확 버리고서 하는 말이,
"어머니 기뻐하세요. 저도 이제는 라면을 잘 끓일 수 있어요. 다 어머니께서 저에게 은혜주시고 사랑주시고, 율법주시고 성령주신 덕분이에요. 어머니. 이제 가만 계세요. 그리고 제가 끓인 라면을 맛보시고 저로 인해 영광을 많이 받으세요"라고 합니다.
이 자식(욕 아님), 개패듯이 맞아야 할 자입니다. 왜냐하면 제대로 라면도 못끓이는 못난 자식을 위하여 수고하신 어머니의 수고와 공로와 고생과 아품으로 엉글어진 작품을 일순간에 묵사발 만들고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은 끝까지 자기 의를 포기하지 못하고 자신만이 갖는 선함으로 자기만의 구원을 사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머니는 개패듯이 패지는 않고, 그 대신 영원한 지옥불에 보냈는데 그들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하나님 흉내 내기로 평생을 거룩과 선행으로 일관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바로 성령이 오시면, 십자가의 영으로 오셔서, 날마다 이런 인간을 예수님의 죽으심에 참여 시키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능력인데, 바로 이 능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사랑이요, 새계명이요, 거룩이요,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자기 의는 날마다 자기 죽음과 더불어 소실된다)
이로서 성령받지 못한 자는 천번이나 죽었다고 깨나고 자기 집착에서 못벗어나고 결국 자신의 구원받았음을 증거하고 증명하려 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증인이 아니라 자기 증인자 입니다.
==========================================================================[re]그렇다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엄기욱 (Homepage) 2003-10-19 19:12:15, 조회 : 107, 추천 : 16
Who has seen the wind?Neither I nor youBut when the leave's tremblingWind's passing by
바람을 우리는 볼 수가 없지만 잎새가 떨릴 때그 바람이 지나는 것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지만세상 어느 구석에 진리를 알고 그 아는 진리대로 애써 사랑의 삶을 사는 자를 볼 때그곳에 성령께서 일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원죄와 전적 타락, 자유 의지
...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자칫 극단으로 치달을 우려가 있기에 이들 사이에는 적절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인간은 그 스스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의 본래 의미는 우리 속에서 선을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모든 선과 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등의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의 한계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상은 이것을 잘못 적용하여 원죄와 전적 부패,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선을 향하여 어떠한 몸짓거리도 할 수 없는, 그리하여 아예 인간의 자유 의지까지 부정하며 오직 믿음으로! 라는 구호 아래 사실상 율법을 폐해버린 채 그야말로 주님의 계명을 지킴에 대해 인간은 전혀 무기력한 위치로 끌어내리고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은 피조물의 특성상 인간은 그 본질로 볼 때 생명 자체는 아니고 다만 생명을 수용하는 용기에 불과하다는 것과 이로 인해 인간은 홀로 생명이신 하나님과 달리 그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저 혼자의 힘으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 본질 그 자체는 생명을 담는 그릇에 불과할 뿐 생명 그 자체는 아니고 따라서 인간 그 자신으로부터는 사랑이나 믿음의 어느 작은 조각도 전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고유의 본질이 이러할진대 그 스스로에게서 나온 생각과 행위가 어찌 선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알아야 하는 분명한 사실은 원죄와 전적 부패, 타락 등으로 인하여 인간은 현재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 상태에 놓여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저 스스로로는 할 수 없으나 <오직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인해서는 저 스스로 하듯 선을 행할 수 있는> 섭리 하에 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피조물의 한계 때문이거나 아니면 원죄와 타락 때문이거나 간에 인간 스스로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이 두 쟁점 사이에는 인간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 점도 있는데 그것은 전자는 인간 속에서 선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정작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두어져 있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지 않고 있으나 후자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한 채 그 모든 선을 하나님께만 돌리려는 과장된 충성심으로 인하여 처음부터 인간을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없는 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자와 후자는 별개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저 사상은 이들을 같은 맥락으로 연결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양쪽 모두 인간을 저 밑으로 낮추어 그의 공로를 박탈하고 반대로 하나님은 까마득히 높여 영광을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돌리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은 자신을 낮추고 불쌍히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의 자비와 거저 얻는 은혜는 더욱 영광스럽게 빛나고 동시에 거기 내재한 인간의 겸손한 자세는 너무나 아름다운 신앙으로 비쳐지기 마련일 것이다.
신앙관을 이런 식으로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을 아주 잘 섬기는 표본인양 좋게 생각되겠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형태를 아예 강제로 한 줌의 흙으로 만들고 또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높이 받들려는 거짓 예배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왜냐하면 진실로 인간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려는 예배는 인간이 그의 의지와 이해성이 지닌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전적 타락과 예정, 그리고 자유 의지에 대한 부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시종일관 인간의 역할은 빼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드높아진 지성으로만 섬김과 찬양, 감사와 영광을 받을 수 있을 뿐 그가 적극적으로 행하는 사랑의 삶을 통하여서는 저들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원죄와 전적 타락의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분명 악을 보유한 상태로 출생을 하기에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악에 끌려가기 쉬운 경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선악간의 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힘을 여전히 부여받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은 사람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되 겉으로는 누가 보아도 그 스스로 하는 듯 보이게 하신다> 라는 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한 섭리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 안에서 그를 위해 홀로 악과 싸우심으로 악으로부터 끊임없이 인간을 이끌어 내어 선으로 인도하시는데 이 깊은 내용을 인간이 자각할 수는 없지만 이 결과로 인간은 마치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악과 싸우는 것처럼 악에서 반동할 의지의 자유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비가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현상은 사람의 외성에서는 나타나지만 내성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주께서 어떻게 사람을 그의 내성 안에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아무도 인간에게 있는 어떠한 내적 요소가 그의 눈으로 하여금 보게 하고 귀로 듣게 하며, 혀와 입으로 말하게 하고 심장으로 피를 움직이게 하며, 폐로 호흡하게 하고 위로 소화하게 하며.. 등등 그 밖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하게 하시는가를 모르는 것과 같다. 이것들은 사람의 지각과 감각에 잡히지 아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무한히 더 많은 마음에 속한 내적 실체와 형체 안에 주께서 무엇을 하시는 가도 이와 같아서 이것들 안에서의 주님의 역사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가 보아도 사람이 그 스스로 하는 듯 생각하고 뜻하고 말하며 행하는 줄 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사람이 스스로 하는 듯 느껴지지 아니하면 어떠한 의지나 이해성도 가지려 하지 않을 것이요 또 주께로부터 나온 어떠한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과 사상도 가지려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상이 없으면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지식이나 인애, 신앙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개혁이나 중생, 그리고 구원도 있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 가상은 주께서 사람에게 모든 씀씀이(선용)를 위하여 주셨고 또 무엇보다도 사람은 받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그것으로 사람은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은 사람과 결합할 수 있으며 이 결합을 거쳐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지는 섭리의 과정은 사람이 자각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어떠한 역사도 지각하고 느끼도록 되어있지 아니하나 그러면서도 그러한 것을 알고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이다. 신의 섭리를 인간으로 분명히 보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러하다. 만일 사람이 신의 섭리의 하시는 일을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도록 되면 그는 이성 따라 자유로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에게 속한 어떠한 것도 자기 것 같이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또 그가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도 그와 같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주체성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 라는 생각도 갖지 아니하며 어떠한 것도 그에게 돌릴 수 없을 것이고 그리하면 그가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되고 하나님을 믿든지 지옥에 처하게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섭리하시는 신의 역사를 사람이 분명히 지각하고 보게되면 그는 이성 따라 행동하는 자유성을 가지지 않을 것이요 또 어떠한 것도 그에게는 그 스스로 하는 듯 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만일 그러한 것이 분명히 지각되면 사람은 스스로의 자유가 없는 듯 그것에만 의존한 채 두 손을 놓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에게는 이성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자유로부터 그리고 자유 안에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의 삶은 자신이 아닌 남으로부터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에서 물러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만일 이런 섭리를 사람이 분명하게 지각하고 느낀다면 악 안에 있는 그의 의지는 늘 주님의 섭리에 항거하고 하나님과 겨루며 스스로 그 섭리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부정할 것이고 또는 자신을 신의 섭리 안에 밀어 넣기 꺼려하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이유는 사람에게 있는 악 때문인데 악은 늘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에 항거하여 주님의 섭리에 내재한 선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배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만일 위가 어떻게 음식물을 소화시키며 그 주변에 있는 내장들이 각기 그 몫을 흡수하고 피를 공들여 만들며 그것을 분배하여 생명의 활동을 하는가 등을 안다면 또 먹고 마시는 등의 외적인 일을 대하듯 그 내적인 것들에 명령을 자유로이 내릴 수 있다면 그는 이 모든 것을 방해하고 깨뜨리려 할 것이다. 사람이 인체의 덮개에 지나지 않는 근육의 움직임을 제외하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그의 의지에 좌우되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미래사에 대한 지식 역시 이성 따라 자유로 행하는 능력을 사람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허락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소유하려 하며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이성 또한 그리로 나아가려 하는데 만일 그가 하나님의 미리 알려주심으로 사건을 미리 알게 되면 그의 이성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의지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것에 열심을 내야할 그의 의지는 이성과 더불어 미리 알게된 결과에 의해 쇠약해지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누구나 이성으로 미래사에 대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허락되어 있다. 즉 사람은 사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가 천국에 들어갈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갈지를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말씀에 비추어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신에 의해 미리 알지는 못한다. 만일 그가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미리 알면 그의 내적 자아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그치고 다만 외적 자아로부터 그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을 생각할 것이다." (스베덴보리의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사실 우리 속에서 선을 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는 자신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선을 행하며 자신을 이끌어나가는 듯 여기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비밀한 섭리이다. 위에서 간단히 밝힌 것처럼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지 그 과정을 모르도록 하시는 것조차 인간을 위하는 주님의 선하심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범하는 악은 그 자신 본래의 것이고, 선은 비록 그 자신이 행할지라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고백함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상들처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데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교리는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빛나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이 이러저러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어렵고 힘들기에 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을 뿐이다. 즉 인간에게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는 힘이 있으나(이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인데 주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인 양 느끼도록 섭리하신다) 인간에게 부여된 그 힘은 사람에 따라 출생 시에 지니고 있던 악에 점차 기울어질수록 약화되어 이제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힘에 겨운 일이 되어버렸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악이 좋아 악을 사랑하다보니 악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 마음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문제이다. 우리 스스로 힘을 내어 악을 조금씩이나마 버릴 때 우리의 애정은 주님의 은혜로 선 안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힘이 인간에게 어디 있느냐라는 의심이 든다면 우리를 끊임없이 악으로부터 구원해내고 계신 주님의 선하신 역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를 묵상해보아야 한다. 홀로 악과 싸우시고 저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신비롭게도 인간이 스스로의 힘인 양 느끼며 악과 싸우는 그의 의지에 실려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교리는 얼마나 우리 의지의 도약을 꺾고 있는가. 전적 무능력의 교리는 자칫 죄의 책임을 주님께 돌리게 되고 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려는 열망을 주저앉혀 버리기 쉽다.
==========================================================================[re]그것 참 영어까지 동원하시고... 뭐 자유의지이니까 이근호 2003-10-20 00:43:59, 조회 : 105, 추천 : 14
>뭐 순수하지 못해서 한이 맺혀 있습니까?
아니면 순수하지 못한 세상 속에 사는 것에 대해서 환장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심판의 기준과 심판하심을 예수님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귀하는 아십니까?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요 5:22)
따라서 예수님이 내놓으신 심판의 기준을 가지고 논하셔야지
자꾸만 하나님이 제시한 율법 가지고 미련두면 안됩니다. 그렇게되면 엉뚱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한심스러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남까지도 지옥에 동행시키는 사람이 되십니다.
모세의 든 놋뱀을 쳐다 본 사람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자들이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뭐든지 심판의 기준이란 사람이 양심껏 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정해서 내려옵니다.
노아 홍수 때, 비온다고 우산 들고 쓴다고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노아 때는 방주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무엇입니까?
새언약입니다.
새언약이 무엇입니까?
바로 인자의 살과 피입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않고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영생이 없습니다.
어떻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까?
십자가 피의 능력 안에 들어가 있으면 됩니다.
"너희는 육체로 자랑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3-14)
도대체 귀하께서는 십자가 외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지켜진 율법 완성도를 가지고 자랑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 아닙니까?
아에 심판을 스스로 자청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義이며 이 의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의입니다.
그리고 이 의는 인간의 모든 의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그 의는 도저히 나올 수 없고, 완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최종적으로 제시하는 가치는 항상 '믿음'이라는 형태로 제시하게 마련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행함을 최종 믿음의 내용으로 제시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의 행함을 최종 믿음으로 제시하게 됩니다.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은. 믿음과 행함을 균형있고 조화롭게 둘 다을 동일하게 보고 제시한다고 하지만, 사람의 마음 구조는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둘 중 반드시 어느 하나 위주로 서열이 매겨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귀하의 글이 지워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이트 주인이 혹 딴 생각을 가진다면 할 수 없지만...)
왜냐하면 자칭 믿음이 있다는 자들도 귀하의 글을 보면서 자기 자신이 출신 성분을 뚜렷이 하는 도움을 주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re]행위에 대한 입장 차이 김재국 2003-10-20 12:54:02, 조회 : 81, 추천 : 11
> 도대체 귀하께서는 십자가 외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지켜진 율법 완성도를 가지고 자랑하고 싶어 환장한 사람 아닙니까? (의견) 엄기욱님이 자랑에 환장한 사람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고 이 의는 인간의 모든 의를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에 의하면 그 의는 도저히 나올 수 없고, 완전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의견) 이목사님의 이러한 사상, 믿음으로만 구원과 인간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증거물로서 예수님의 의만 증거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는 사상을 엄기욱님이나 다른 성화론자도 익히 그들의 사상의 근거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두 그렇게 파악하는 것이죠. 문제는 (예수님 영접) 전후의 인간의 상태입니다.1. 예수를 믿음으로 영접하면 구원입니다.(행위로는 구원없음)2. 구원받음으로 신분이 변화됩니다. 천국시민으로의 신분변화이고, 이후의 타락이 있어도 구원은 변하지 않는다.3. 천국시민권을 가진 상태에서도 세상에서는 계속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이 죄를 인식하고 성경에 맞추어 자신의 행동을 하나님의 뜻과 비추어 콘트롤합니다(불완전 하나마) 이것이 성화입니다.<-- 결코 자기의를 자랑하거나 , 완전한 거룩을 인간이 성취한다는 입장이 아닙니다.
성화론자의 행위는, 믿음으로 구원 후의 성도가 하나님 뜻을 분별하는 행위를 말합니다.이근호 목사님은 그것을 1 번의 예수 영접 전에 적용시켜성화론자는 자기공로를 자랑하고 예수의 의를 부정하면서 자기 행위로 구원을 완성할 수있다고 주장한다고 오해합니다.즉 성화론자의 행위= 예수 영접 후의 하나님 뜻에 맞추는 삶을 구원받으려는 인간들의 욕망으로 간주합니다.
우리의 삶은 1 번에 집중되어서는 부족합니다.1 번을 기반으로 3 번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라 생각합니다.구약 ----> 1 번 이전복음서----> 1 번,2번서신서----> 3 번 그리고 창세기 1장 1절 천지창조에 상응하는 요한계시록의 섀 예루살렘이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입니다. 천국은 1 번으로 자격이 주어지지만 3 번으로 충분조건이 됩니다.
==========================================================================[re]그렇다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엄기욱 2003/10/19 16 108 [re] [re] 은혜아래서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관계 조부상 (Homepage) 2003-10-20 11:28:07, 조회 : 78, 추천 : 11
스웨덴보리에 대해서는 전 아직 잘 모릅니다.다만 신비적 주관주의자라는 경고성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엄기욱님의 글은 대단한 정성도 정성이지만 충분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적부패와 완전한 타락이라는 극단적 칼비니즘과자유의지와 선택능력이라는 알미니안 주의가 절묘하게 결합되지 않고어느 하나만 강조된다면 이는 필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것입니다.
은혜만을 강조하고 엎드림만을 강조하는 사상의 맹점이이런 자유의지와 선택능력이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되지 않을까요?제가 이근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항상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을솔직하게 고백합니다.저는 믿음을 통한 구원과 오직 은혜만을 부인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에서 날마다 자라 가라."고 하는 당위 앞에 내 던져진 우리입니다.뿐 아니라 우리 삶의 적극적인 선택이.. 아직 ..매일 매일...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완성되었다. 이루었다, 잡았다. 섯다,,"고 자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이것은 결코 쉽게 무시되어지거나 매도되어져서는 안되는 부분이고, 누구의 입을 통해서든균형이 유지되어야 할 사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여달라는 엎드림과 오직 믿음과 전적 무능력만을 되뇌일때 그분의 형상으로 빚으진 인간과 그 형상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려는모든 노력(기도와 성령충만을 통해 자아의 욕심과 생명을 날마다 십자가에 넘기려는 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매도함으로, 영적 생명의 성장에서 스스로를제한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학과 신앙이 그리스도처럼 완전하거나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그러기에 내가 가진 것만을 최고라고 성경을 통해 계속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성경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전적으로 정당화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나의 맹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또 다른 지체의 주장을 들음으로교회가 더욱 서로 유기적으로 협조하며,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성령으로 교제할 뿐만 아니라 지체가 각기 영적으로 성장하며, 하나님과 나, 지체와 지체사이의 상호관계성의 증진을 가지고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엄기욱님이 이근호목사님의 성가심이 될 수 있겠지만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랑가운데 허락하신 보완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