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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천국에 들어가는 길] 2003-10-16묻고답하기-

천국에 들어가는 길 엄기욱 (Homepage) 2003-10-16 15:34:41, 조회 : 122, 추천 : 14
천국에 들어가는 길
천국과 천국 가는 길, 그리고 사람 속에 있는 천국의 생명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자는 천국을 다음과 같이 오해한다. 즉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다만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되는 것이고 이 긍휼과 자비는 믿는 자가 받는 것이다. 주님은 이를 위해 중보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삶이야 어떠하든 다만 주님의 특별하신 은총으로 되는 것이므로 그 중에는 악한 삶을 사는 자까지도 만일 그가 주님의 긍휼과 은총에 기대어 믿음을 고백한다면 그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의 사람됨은 그 생명의 질이 어떠한가에 있고 이는 그의 지배적인 사랑(지대한 관심으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것, 가장 좋아하는 것, 애정이 가장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의해 나타난다. 이것을 속 사람으로 말하면 의지와 지성이요 겉 사람으로 말하면 신체의 움직임인데 이 신체의 움직임은 속 사람을 원인으로 하여 외부에 나타나는 형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전인격의 본질은 사실은 그 영혼에 형성된 사랑(애정)의 성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의 영이란 그의 기본적 애정(사랑)에 불과한 것으로 사후에 이 애정의 상태가 형체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의 영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사실은 이 세상에서 형성된 사랑(애정)은 저 세상까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같은 모든 일을 알지 못하면 영혼의 구원이 이 세상 삶을 통하여 형성되고 굳어진 그 사람의 사랑(애정)의 색채가 어떠한가와는 별도로 오직 하나님의 특별하고 무한하신 자비와 은총이라고 부르는 선하심으로만 이루어지는 줄로 믿게 된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전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순수한 하나님의 인자이심에는 틀림없다. 이 긍휼은 각 사람에게 대하여 끊임없이 떠나지 않고 역사하시기에 구원을 받을 여건이 되는 자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방법을 떠나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이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 구원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되는 가를 가르치는 말씀 속 진리로 나타내어 졌는데 그 진리로 인해 주님은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고 또 그 진리로 인간의 마음속에 천국의 생명을 심어놓는다.
주님은 만민에 대하여 이를 행하시지만 천국의 생명은 누구나 악에서 떠난 자가 아니면 그 속에 심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악은 천국의 생명에 거슬려 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악에서 떠남과 더불어 주께서 주신 순수한 긍휼을 받는 신적 방법에 의하여 인도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인도는 어려서부터 임종까지 또 죽은 후 영원까지 계속되는데 이것이 신의 긍휼의 뜻이다. 이로서 주님의 긍휼은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순수한 긍휼이지만 그 속사정은 절대로 신의 질서를 떠난 예외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가 어떤 생활을 보냈는지는 불문에 부치고 다만 선하심과 자비하심만으로 구원하신다는 뜻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주님은 그 스스로가 질서이므로 질서에 반하여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다.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질서를 만든다. 주께서 사람을 인도하시는 것도 이 법칙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방법을 떠나서 단순히 긍휼로 사람을 구원한다는 것은 신적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다. 신적 질서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천국의 계율과 같다. 사람은 신적 진리인 질서의 법칙을 위반하는 생활로 자신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주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질서의 법칙에 다시 복귀되는 길이 열리었다. 그래서 이 질서에 복귀한 자는 자기 안에 천국을 받고 천국을 받은 자는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결과적으로 주님의 긍휼은 무제한의 순수한 긍휼일지라도 방법에서 떠난 긍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사람이 만약 법칙이 없이 긍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지옥에 있는 자까지도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주는 긍휼과 사랑, 선 자체이시기 때문에 지옥이란 있을 수 없게 되고 만다. 기독교 세계에서 사는 자 대부분의 생각은 대개 신의 질서를 떠나서 긍휼에 의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신앙을 가지고 그 자비를 기원한다. 그러나 이런 신앙을 자세히 보면 그것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허락을 얻으려는 것뿐이고 또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천국의 문만이 큰 관심거리가 되는 그러한 신앙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천국의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주님은 누구에 대해서도 천국을 막지 않으신다. 들어가고 싶으면 들어가서 거기 머물러도 된다. 그러나 천국에 합당치 않은 자가 그곳에 들어가면 겨우 첫 발겅ㄹ음을 떼자마자 거기서 나오는 열과 빛 곧 사랑과 진리의 유입에 의하여 비상한 고통이 마음에 일어나서 천국의 기쁨은 고사하고 지옥의 괴로움을 견딜 수 없어 머리를 거꾸로 하고 떨어져 내려간다. 이는 그의 생명이 천국의 빛과 볕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오직 주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해서만이라고 여기는 생각은 특히 믿음만을 구원의 유일한 방편으로 아는 그릇된 지식에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생각들은 이미 자신에게 고착된 종교 원리 때문에 자기 영혼의 형상을 결정짓는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하등의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고 또 주께서 사람의 마음에 천국을 열어주시고 하늘의 기쁨을 받게 하실 때에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함을 조금도 돌아보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필연적으로 사람은 긍휼에 의해서만 천국에 들어가고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의 중보적 기도에 의하여 긍휼의 마음을 일으키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고 만다.
이와 같은 교리는 믿음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억설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필연의 결과이다. 이 교리가 모든 교리의 중심으로 되어 있는 교회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므로 천국의 빛을 조금도 받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선과 진리의 결합(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혼인이고 이는 주님과의 결합을 뜻한다) 즉 선행과 믿음이 조화된 삶을 사는 자가 천국의 생명을 가진 자라 일컬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사람으로 불리우는 것은 그 사람의 사고나 의지 때문일지라도 사고는 사람의 생명을 구성할 수 없고 의지에서 나오는 행위가 그 사람의 생명을 구성하며, 사고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에 있어서만 생명을 얻으며 따라서 신앙에서는 신앙이 사랑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만 생명을 얻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라 칭하는 신앙은 그 근원이 되는 사랑을 떠나서는 단순한 하나의 지식에 불과하고 그 믿음은 어떤 경우에는 일종의 신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념은 사람의 참 생명 속에 있지 못하며 비본질적인 외변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의 사랑에 고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인격에서 분리되어 있으므로 그의 생명이 될 수 없다. 이신득의만 주장하는 자는 반드시 신의 법칙을 떠난 긍휼을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을 가지면 악한 생활을 보낸 사람도 그와는 달리 선한 생활을 보낸 사람들처럼 사람이 임종시에 주님을 믿고 그의 피를 의지하기만 하면 주님의 중보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악한 생활을 보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신뢰와 확신(극도의 믿음)을 평상시에 표명하여 온 자라도 긍휼로 천국에 들어간 자는 하나도 없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사도들은 법칙 없이 긍휼이나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사실은 저들 중의 어느 한 사람도 이같이 들어간 사람은 없다. 저들 모두 세상에 있을 때의 생활에 따라 들어간 것이다. 또한 저들이 천국에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다. 저들이 성경 중에서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은 성서의 내적 의미로 저들이 주님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은 머릿속 관념으로 예수를 믿는 자가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선한 삶을 산 자가 들어가는 곳이다. 구원은 사람이 악을 버리고 선을 생활화하는 삶을 통하여 영혼이 점차 정화되는 가운데 얻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어느 구절들을 논리하고 연구하여 그 말씀으로부터 구원을 즉각적으로 이끌어내려는 시도는 신앙을 한낱 알맹이 없는 이론 속에서만 해결 짓는 공상에 불과하며 이는 또 신앙을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한 욕심으로만 바라보기에 생기는 얕은꾀에 불과하다. 진정한 회개가 없어 악에서 돌이키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려는 것이 어찌 합당하랴.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는 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구원이란 어느 한 순간의 일이 아닌 일생 전체의 삶이 시시각각으로 구원을 증거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천국의 생활에 상반되는 악한 생활을 해온 자에게는 천국의 생명을 심을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실제 생활은 선하지 못하면서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의해 저 세상에서는 선한 자로 바뀔 것이라고 사람들은 단순히 고대한다. 그는 생각하기를 만약 그가 이 세상에서 예수를 믿었기에 그 보상으로 사후에 천국의 사람들로부터 신적 진리를 듣고 곧 그것을 받아들여 회개한 후 완전히 딴 사람처럼 생활하게 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사후에는 자기의 잘못을 눈앞에 보면서도 회개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진 자기 소유의 사랑을 바꾸는 어떠한 것도 저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는 진리가 그의 악한 사랑의 성질이 변화되도록 인도할 수 있으나 저 세상에서는 진리라도 그의 사랑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만일 그가 이 세상에서 얻은 자기의 지배적인 악한 사랑을 버리고 천국 사람들의 사랑 즉 천국의 생명을 대신 받는 것이 허락된다고 할지라도 원래 자기 소유의 사랑에 기초한 생명이 제거되면 새 생명을 받기도 전에 그는 죽은 자같이 되어 완전히 사고나 감각을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누구의 생명도 사후 절대 변화하지 않는 것과 악한 생활이 선한 생활로 변할 수 없고 지옥적 생명이 천국적 생명으로 변화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각 영은 머리로부터 발바닥까지 전부 사랑 여하 즉 생명 여하에 따라 존재하는 것이고 그 생명을 반대 생명으로 바꾼다는 것은 그 영을 완전히 파괴하여 버리는 까닭이다. 이는 그가 형성한 사랑 다시 말해 그가 뜻하고 애지중지 하는 그 사랑이 그의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지옥의 영을 천국의 영으로 변화시키는 것보다 차라리 밤의 올빼미를 비둘기로, 부엉이를 낙원의 새로 변화시키는 것이 쉬울 것이다.
==========================================================================[re] 천국에 들어가는 길 손무성 2003-10-16 17:26:50, 조회 : 128, 추천 : 14
엄기욱씨는 이것을 모르고 있다. 은혜와 긍휼은 구원받을 때만 적용되는 줄만 알고 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와 긍휼로 받고 그 다음 착한일은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거짓복음이다.
구원받은 자는 은혜와 긍휼로 시작하여 은혜와 긍휼로 끝을 맺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포도나무요 성도는 가지이기 때문이다.(너희가 내 뜻대로 구하는 자는 다 이루리라) 이에 대해 가짜들은 그 가지에 안붙어 있기 때문에 책임을 자기가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자기 스스로 선을 행햐야 하는 중압감 속에 빠져든다.
천국가는 자는 은혜로 그 포도나무에서 공급하는 선을 은혜로 베출하게 되어 있다. 악을 기뻐하지 않는 자에게 붙어 있기에 주의 은혜와 긍휼하심으로 악을 기뻐하지 않을 뿐이다. 악한 일을 하지 않기나 선을 행해야 하는 중압감 속에서 이제 내가 책임지는 자가 아니라, 이미 책임지신 분의 은혜와 긍휼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까지 자유한 자가 된 것이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이다. 자기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은혜와 긍휼은 창세전 부터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서 악과 선을 행하기 전부터 적용되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천국은 어떻게 가는 것인가가 풀린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9:11-18)
==========================================================================천국에 들어가는 길 엄기욱 2003/10/16 14 123 [re] 가장 착한 자와 가장 악한 자 이근호 2003-10-16 18:38:52, 조회 : 135, 추천 : 11
자기를 부인해가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착한 일이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자기 의를 붙잡고 사는 자보다 더 악한 자가 있을까요?
저는 없다고 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 엄기욱 2003/10/16 14 123 [re] 푸른 나무 목사님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조부상 (Homepage) 2003-10-17 09:05:01, 조회 : 114, 추천 : 19
주님은 말씀을 우리에게 도전적 말씀으로 주십니다. 이 도전적인 말씀은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그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동기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자녀들을 향하여(이미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들에게) 주신 말씀들이 있습니다. [2003/10/16]
또한 이런 경우가 있다고 보는데 거짓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향하여 믿노라하지만 참된 믿음 즉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없는 자들을 향해 그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말이 아닌 전인적 삶임을 말하려고 하시는데 의도가 있는 글도 있다고 봅니다. [2003/10/16]
그러므로 말씀은 그 말씀을 하시는 주님이 혹은 저자가 어떤 상황에서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은 주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고 위의 도전적 말씀은 그 은혜를 받은자가 살아가야 삶의 도리와 원리를 강조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2003/10/16]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위의 말씀들은 우리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그 은혜에 대하여 반응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만약 그 명령에 반응하지 못하고 순종함이 없다면 주님은 그럼 너가 구원 받은 자인지를 인식시키시려고 하신 도전적인 말씀들이라 생각합니다. [2003/10/16]
그것은 우리의 행위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구원의 백성으로써 구원의 백성답게 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 못하다면 너가 정말 구원 받은 백성이라 할수 있느냐는 강한 도전이기도 하고요.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값진 것임으로 말씀에 순종합니다. [2003/10/16]
약술하자면 전 믿음은 행위가 동반된다는 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그러나 오직믿음이란 행위를 동반된 믿음이라는 입장에서 행위를 강조하기보다는 오직 믿음 그 자체가 전인적 반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님이 말하는 행위의 강조가 잘못 이해되면 오직믿음의 은혜를 강조하지 못할 수 있다 생각합니다. [2003/10/16]
전 주님의 말씀이 오직 은혜로 받은 성도의 됨됨이에 대한 이야기며 이 됨됨이는 전인적으로 하나님께 반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 행위는 은혜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 두서 없이 글을 남깁니다.
==========================================================================[re] 율법에서 믿음으로! 엄기욱 (Homepage) 2003-10-17 12:42:49, 조회 : 96, 추천 : 18
올리신 글을 읽고 댓글을 달아봅니다.
율법과 믿음 사이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울 서신에 쓰인 율법이 과연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는가 하는 점이라 생각됩니다. 율법에서 믿음으로! 를 외치는 바울의 의도를 바르게 알자면 그의 서신 곳곳에 쓰인 율법이 제사법(의식법) 등의 주님이 오심으로 이제 폐기된 의문의 법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주님이 오심으로 더욱 강화된 (십)계명 등의 도덕적 법을 가리키는지를 순간순간 잘 분별해야 하리라 봅니다.
실제로 바울은 이 두 가지 의미를 혼용해서 사용하였기에 이를 잘못 해석하면 자칫 믿음 때문에 계명으로서의 율법까지 본의 아니게 폐해지거나 약화되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비록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외칠지라도 그는 이 외침으로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조금도 깎아 내리려는 의도가 없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구원에 있어서 계명에 순종하는 일은 믿음과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이미 그 자체로 믿음이라 불릴 수 없기에 양자는 결합으로 한 몸을 이루어야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계명에 순종하는 일은 구원에 있어서 믿음과 함께 필수 요건이 아닐 수 없고 계명에 순종하는 일을 배제한 채 믿음만으로 구원을 말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일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행함은 아랑곳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외치는 사상은 구원에 있어서 계명에 순종하는 일을 믿음과 동일한 위치에 놓을 때 이를 마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처럼 왜곡시켜 율법주의자로 낙인찍어 버립니다. 바울 서신을 그같이 읽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사실인즉 바울은 '계명으로서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무시하려는 의도로 믿음을 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히려 더욱 굳게 하려는 것이 율법에서 믿음으로! 라는 그의 외침의 참 의중입니다. 다시 말해 예전에는 율법을 하나하나 마다 다 지켜 구원을 얻으려다가 이제는 그 방법을 확 바꿔 계명을 지키는 것과는 전연 상관이 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이 아니라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율법(계명)을 지켜야 하는 것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일이고 다만 여기에 믿음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계명을 지키는 그들의 자세를 변화시키려는 것이지요.
이전에는 외식, 위선, 자기 의로, 자기 힘 등의 마음에도 없는 율법주의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에서 돌이켜 이제는 주님에 대한 믿음으로, 주님을 사랑함에서 나오는 진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억지 순종이 아닌 즐거운 마음으로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겉과 속이 모두 진실한 신앙 다시 말해 신앙 고백과 삶이 일치하는 그런 영적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주님에 대한 믿음이라는 뜻이지요. 한 마디로 위선적 신앙에서 진실한 신앙으로 탈바꿈 할 수 있도록 강구되어진 원리가 바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는 그의 외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찌 계명에 순종함을 믿음보다 아래에 둘 수 있으리요?
==========================================================================[re] '개념 착오'와 '이념 착오' 이근호 2003-10-17 14:07:01, 조회 : 111, 추천 : 9
>귀하께서는 개념 구성과 이념 구성 사이에서 큰 착오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장기와 바둑는 서로 차이가 납니다.
장기 알은 그 한 일 한 알이 고유의 자기 활동성을 보장 받습니다. 馬는 똑바로 한 칸 가서 한 칸을 가로지을 수 있는 권한을 보장 받고 자기 위치에 존재합니다. 그러니 존재 그 자체로서 자기 기능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고 있는 겁니다. 자기 선택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둑은 그냥 알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하나의 점으로 변하고 맙니다. 아무리 바둑알이 크도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놓인 자리의 가치와 의미는 그 바둑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둑판 전면을 훑어보고 있는 인격자의 권한에 달려 있습니다.
때로는 大馬 죽을 때 주인을 위하여 몰살 할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살핀다는 점에서 장기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장기는 각자의 활동을 기준으로해서 가치가 차이가 납니다.
장기 두면서 車하고 卒하고 맞바꾸어치면 아무리 주인이라지만 車는 기분나쁘게 마련입니다. 즉 장기알은 그 고유의 자기 가치성 다른 장기알과의 변별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귀하의 주장을 들어보면, 장기알을 가지고 바둑판에 두는 식입니다.
구성된 개념을 확장시켜 이념 구성으로 나아가다 보니, 개념에도 착오가 일어나고 이념에도 착오가 일어난 것입니다.
인간은 점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죽은 점에 불과합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예수님의 고유 몫이 됩니다.
의라는 것도 예수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성도는 어디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성도의 자율성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바둑판'에 놓여 있다는 그 이념성입니다.
그러니까 개념적으로 무슨 재주를 가졌던 (흔히 말하는 엉터리 달란트 비유같이) 그런 것은 천국에 전혀 반영이 안됩니다. 이념 구성은 예수님의 행함으로 이미 끝난 문제입니다.
예수님 행함 앞에서 우리는 그저 못난 죄인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따라서 천국이라는 바둑판은 죄인들을 구원하셔서 그 공로에 대한 영광을 한 몸에 받으시는 예수님(어린 양) 중심의 '아들의 나라'라는 이념으로 구성된 세계입니다. (골 1:13-14)
더이상 '개념 착오'와 '이념 착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re] 푸른 나무 목사님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조부상 2003/10/17 19 115 [re] [re]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이근호 2003-10-17 13:50:17, 조회 : 147, 추천 : 12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면서 구원하시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교회'로 만들어놓고 그 교회에서 소위 지도자라고 내워놓은 작자들이 자신이 교인들을 성경을 가르쳐서 그래서 구원시켜 주므로서, 교회의 존재함 그 자체에 정당성을 확보하려는데 있습니다.
우리 사이트 그런 관점에서 문의하고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말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데 아무 짝도 소용없는 교회에다 관심을 두니 사니 하나님이 모든 뜻을 왜곡시킬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즉 교회 없이 말씀과 복음으로 구원될 때 바로 그 현장이 교회이요 그리스도 몸인데 이 사실을 그 분은 모르는 겁니다.
교회 활동의 정당성을 고수하다보니, 자꾸만 교회들은 올바른 교회되기 위한 전략에 나서게 됩니다.
일단 죄인은 오직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초단게, 초보 단계로 규정짓고
두번째 전략이, 야고보서에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으니 그 다음에 그 믿음에다 선한 행함들을 추기시켜 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기특하고 이 땅에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나 야고보서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행함을 추가해서 온전한 믿음은 아에 처음부터 믿음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교회에서 그냥 가르쳐 버리면, 그들이 교회를 나가버리는 것이 교회측에서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한 번 온 고객을 달라야하고 구슬려야하고, 위로해 주어야 하는까 교인들보다 이렇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겁니다.
"성도님은 일단 믿음은 생겼으니 분명히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조금 더 관심을 가져 보시기요. 그 일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측에서 교육관도 짓고, 주창장도 넗비면서 만반의 교육준비, 성화 준비를 다 해놓았습니다. 이제 걱정마시고 우리 교회측에서 시키시는대로 헌금 생황, 전도 생활, 예배 생활, 찬양 생활, 경건 생활, 선교 생자 돕는 생활을 해 보세요. 반드시 하나님께서 귀하의경제 사정을 호전시켜 주시고, 가정에 행복이 넘치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꼬십니다.
확실한 양아치(목사)와 앵벌이들(장로)이지요. 간단 명료하게 말해서 "성경은 내가 알고 있으니 나에게 돈 바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도 야고보께서 그 현장에 계시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생 라합이나 아브라함처럼 안 살려거든 구원 때려 치어라!"고 말입니다.
바로 행함이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행함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다운 행함으로 진짜 믿음이냐 가짜 믿음을 가려내는 측정용입니다.
따라서 믿음+행함=지옥입니다.
==========================================================================[re] 행함이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조부상 (Homepage) 2003-10-17 15:28:01, 조회 : 154, 추천 : 14

이 근호 목사님의 글이나 답변에 항상
주의를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새롭게 얻게되는 도전도 감사하고
여러 비유들도 감사합니다.
성실하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잠시 쉬어 가세요*- ♡♥♡ -*
==========================================================================[re] Babe- 정말 제가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근호 2003-10-17 16:14:20, 조회 : 125, 추천 : 12
그런데 이곳에 들리는 사람은 저 처럼 성질 무지하게 급한 사람들입니다.
조금만 늦게 뜨면 그대로 나가는 사람들인 것을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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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서론(1:1-15)에 대하여(1) 조정재 2003/10/16 11 160
[re] 성의있는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근호 2003-10-17 08:49:17, 조회 : 152, 추천 : 13
귀하께서 마가복음과 출애굽 신학을 연관시키겠다니까, 저는 좀 의아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에서 구체적으로 출애굽 신학을 이미 연관시키고 있는데, (산상설교에서의 모세와의 연관성이라든지, 예수님의 애굽 귀환 같은 것) 어째서 하필이면 전혀 모세 오경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보고 있는 마가복음과 출애굽 신학을 귀하께서 구태어 연관시키겠다고 하시는가 하고 말입니다.
귀하의 신학은이사야에 나오는 '제 2의 출애굽' 사상을 신약에 와서 특히 마가복음에서 뚜렷하게 완성물로 등장했다고 보고, 그 '제 2의 출애굽 사상'은 바로 출애굽 사상에 토대를 두고 있기에 보다 더 전으로 돌아가 원 출애굽 사상과 연계되는 것은 너무나도 지당하고 당연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고로 '제 2의 출애굽 사상'의 특징이란,
1. 인간의 실패와 하나님의 회복을 극명하게 대조시키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2. 묵시가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묵시와 역사가 같이 등장하면서도 결코 어울릴 수 없는 성격을 가지고 한꺼번에 등장됩니다. 3. 이방 메시야의 등장(고레스 왕)이 특징입니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일개 한 민족의 하나님으로 머무는 것이 범우주적인 하나님으로 본격적으로 작업을 개시하겠다는 신호탄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4. 그런데 어려운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분명히 '다윗의 자손'이 와서 재언약을 맺도록 되어 있는데 왜 실제적인 제 2의 출애굽은, 신명기 18:15의 말씀, 즉 '모세같은 선지자'를 세우지 않고 왜 이방 민족의 지도자인 고레스를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로 등장하느냐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정말 제대로 '제 2의 출애굽'이냐 아니냐의 관권은 민족이 도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누가' 모세의 입장에서 모세 같은 역할을 제대로 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것이라면 요한복음이 더 강력합니다.(특히 요한복음 6장의 '만나' 이야기에서 절정)
5. 문제가 또 있습니다. 원 출애굽에서는 광야에서 직접 하나님께서 태어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신 소위 '광야 시련'을 체험한 '광야 세대'들은 그들의 잘 잘못과 상관없이 모세언약(모세와 여호수아는 그 언약 속에서 같이 묶여 있습니다.)에 의해 전부 가나안 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로서 재규정해 보는 '제 2의 출애굽 프로젝트'에는 일부만 가나안 땅으로 귀환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분류가 등장합니다. (1)고레스의 이주정책에 의해 에스라, 느헤미야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귀환한 무리(2)그냥 바벨론 넓은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무리(에스더 이야기의 주인공들) (3)그냥 바벨론 사람으로 귀화한 무리
그런데 (1)에 해당되는 무리들은 또 다시 역사에서 묵시로 출애굽을 해야될 입장에 놓여 있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을 '제 3의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귀하께서는 말라기를 '제 2의 출애굽'에 종사해서 예언하는 선지자로 보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보겠다면, (귀하께서는 그냥 세례요한의 복장과 엘리야의 복장에 착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나 다른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엘리야로 못 알아볼 리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복장이나 광야에서 외치는 것 이상의 역사를 초월한 묵시적 연계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 3의 출애굽'의 의의가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이 '제 3의 출애굽'은 역사의 공간으로의 귀환이나 출애굽이 아닙니다. 이 인간 세상 자체를 애굽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합니다. 출애굽이냐 아니냐는 단순한 묵시 세계로의 귀환이 아니라 지도자가 어떤 신분(제 3의 출애굽에서는 묵시적 신분자이어야 합니다.)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를 뒤 따르는 백성들은 그들의 잘, 잘못됨과 상관없이 지도자가 속해있는 신분에 합류할 수 있는 특권을 배정받도록 언약적으로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마가복음 1장을 보게 되면 무게를 세례요한에 둘 것이 아니라 1:11 즉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여기에 두어야 합니다.왜 그런가 하면 '제 2의 출애굽'에서 배제된 (2)과 (3)번에 해당된 자기 백성된 자의 관리가 '제 2의 출애굽의 지도자' (실질적으로는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이들은 예레미야가 받은 하나님의 새언약 규정을 타고 그 성취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자입니다. 예레미야 31:31-33/ 역대하 36:22-23 참조)가 감당하는 범위를 넘어서고 있기 때문입니다.'제 3출애굽'의 지도자를 이해는 왜 하나님께서 멸망받을 이방인 민족의 왕인 고레스를 메시야로 규정했는가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이해는 이사야에서 말라기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스가랴'로 빠져야 가능합니다. 물론 이렇게 되면 원출애굽과의 연관성은 희박해지고 '제 2의 출애굽'의 실패성이 그 신학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멀리 있는 출애굽과의 연관성은 마태복음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됩니다.(특히 주기도문의 형식과 내용이 더욱 그리합니다.)특히 '갈릴리'이라는 지역의 집결도 마태복음에서 훨씬 더 강조되어 있습니다.(마 2:22/28:16)이것은 '예루살렘'의 집결을 명한 누가복음과 대조가 되어 공간복음의 신학을 이 두 책이 양분하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마태나 누가의 원천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가가 마태나 누가의 내용 중에 핵심되는 내용만 요약한 책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스가랴에서는 성전 붕괴를 예언합니다. 고레스는 제 2의 출애굽 당시의 최고 권력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임마누엘로 오실 다윗의 자손이 이런 고레스와 같은 절대 권력자의 모습으로 등장함을 보이시는 겁니다. 물론 고레스는 역사 속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고레스의 한계가 아니라 역사 그 자체의 한계로 인하여 고레스를 통해서 일했던 역사성은 그 뒤에 오시는 묵시성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당해야 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붕괴와 더불어 사단(악마)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미 묵시세계에 접어들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묵시세계가 될 때 악마는 그 정체를 비로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사야 이외에 별다른 구약 인용이 되지 않은 것은, 바로 복음서 단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귀하께서 해석하시는 것에 대해서 모든 면에 동의합니다. 단 그것이 마가복음의 특징으로서가 아니라 전체 공관복음의 대략적인 흐름상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사항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좀 더 들어가게 되면 언약적 '단절성'을 반드시 개재시켜 주어야 합니다. 이점에 대해서 손성식 목사님이 너무나도 잘 언급해 주셨습니다.
즉 성경을 보거나 해석하는 자는 성경이 바로 자기 자신을 구원에서 배척하고 있다는 점을 아울러 반드시 강의되어야 올바른 해석된다는 겁니다. 이점이 다소 부족한 것 같습니다.
'남은 자'에 대한 계속적인 해석에 있어 제가 조마조마합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요즈음 시대에 아직도 말씀이라는 전혀 목회 도움 안되는 이 말씀에 관심을 갖고 있다니 입이 벌어지도록 놀랄 수 밖에 없군요.
==========================================================================[re]감사드리며 반론 조정재 2003-10-18 15:57:02, 조회 : 133, 추천 : 6
[re] [re]언약 흐름의 점프? 이근호 2003-10-18 17:31:13, 조회 : 137, 추천 : 7
이사야 같으면 마땅히 다윗 언약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데 귀하깨서는 마가복음에 나오는 이사야 인용에 대해서 새로운 출애굽언약(신학)으로 정립하시겠다고 했습니다.
모세언약을 다윗언약이 수용, 성취하는데 있어 뭔가 누락된 부분이 있어 그것이 다윗언약에 흡수 통합되지 아니하는 다른 샛길로 빠져 신약까지 직접 이어질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서 좀 의심되네요.
지금 귀하께서 저자의 마가 본래의 정신에 천착하자는 의도로 마가복음을 해석하려고 하니, 이는 예상하기에는 분명 마태복음이 보는 출애굽신학과 또다른 마가복음만의 출애굽 신학이 따로 있을 수 있다는 늬앙스로 다가옵니다.
그렇게되면 물론 누가나, 요한복음 나름대로의 출애굽 신학이 따로 있겠지요.
만약 따로 따로가 아니라면 출애굽 신학의 다양성을 제공한다는 좋은면 보다는, 결국에는 십자가로 한데 모아져질 때, 십자가 위에서 당기는 밧줄이 각기 다른 밧줄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강요받기에 '성취'가 아니라 흡수, 통합의 의미로 "다 이루었다"를 해명할 위험이 있습니다.
'성취'에는 단절적인 토대를 가지지만 흡수, 통합은, 질적인 그 어떤 초월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운동장에 사람들을 모았더니만 사람은 간데 없고 로버트 태권 V가 하나 갑자기 등장되었더라'라고 한다면 이는 '성취'가 됩니다.
그런데 '운동장에 사람을 모았더니만 많은 사람이 하나의 조직체가 탄생되었다' 라고 나오면 이것은 흡수 통합입니다.
마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 흡수 통합의 입장이 아니라 성취의 입장이라면 마가강해를 통해서, 질적인 의미가 드러나야 하고, 또한 인간들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인위적 해석 가능성과 병행해서 소개해서 그 진위를 오직 복음에 근거해서 과감하게 제거해 버리려는 모습을 함께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1의 강해만 듣고 그날 밤에 죽게 된 자가 진실로 구원되려면 마가복음 1:1에서도 복음이 터져나왔어야 했습니다.
신학의 완성도를 위해서라면 연속극처럼 길게 끄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했던 것도 다시 되풀이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자의 증거하고자 하는 복음이 핵심은 하나의 설교와 하나의 강해를 통해서도 충분히 반영되어야 합니다.
"마가에게 호소합시다!, 마가에 충실합시다."라는 주장은 핵심은 될 수 없고, "마가가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이것입니다." 라고 나와야 합니다. "기다려보세요"가 아니라 "이 복음적 핵심이 끝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다음날을 기약하지 못하더라도 안심하시고 지금 이 복음을 받아들이세요"라고 되어야 합니다.
제가 만일 마가복음 1:1를 강해 설교한다면, 1:1부터 마가복음 끝까지의 흐름을 다 이야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1:2부터 16:20까지 설교할 때에는 그 양파껍질 같은 윤곽이 하나 둘씩 벗겨지고 보다 선명하게 복음에 다가서는 식으로 되풀이되는 것이 저는 옳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법적 해석을 강조하셨는데, 문법적 해석의 근원은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인간의 실존적인 심층 구조가 층류를 이루면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그레마스나 촘스키나 같은 현대 기호학과 언어학, 문예학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는 대목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이 선입견없이 해석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귀하께서는 마가복음의 강해를 통해서 새삼 정리한번 해보자는 입장이시고(그렇게 되면 자신의 교리를 정당화하는 아전인수격의 신학에서 탈피할 수 있다고 보고),
저의 입장은, 문법적 해석이 되었던 심미적 해석이 되었던 완성도를 자꾸만 미래로 지연시키는 미완성적으로 드러나는 해석은, '복음 전파'의 차원(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겠다는 마가의 본래의 차원) 보다는 '완벽한 신학 정립'의 차원처럼 느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저는 90살을 이미 훌쩍 넘겨버려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위기의 할아버지의 입장에서 귀하의 그 다음 마가복음 해석을 귀담아 듣고자 합니다.
"할아버지 이 복음 들으시고 믿고 천국가세요"라는 봉사정신을 말입니다.
==========================================================================[re]옛 언약과 새 언약이 점프인가? 아담 이후에 막 바로 예수님 오실껄? 조정재 2003-10-18 18:48:39, 조회 : 119, 추천 : 2
[re] [re]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이근호 2003-10-19 07:23:27, 조회 : 115, 추천 : 11
>어쨌든 그 다음 글이 궁금하네요
==========================================================================[re]메시야=고레스, 제 3출애굽에 대하여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조정재 2003-10-21 14:20:50, 조회 : 84, 추천 : 19
귀하가 말씀하신 그러한 사상은 어떤 학자의 것인지, 또 귀하만의 독특한 의견인지 듣고 싶습니다. 참고로 삼기 위해서 입니다.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마가복음 서론(1:1-15)에 대하여(1) 조정재 2003/10/16 11 160 [re] 마가복음 서론(1:1-15)에 대하여(1) 손무성 2003-10-18 10:48:16, 조회 : 114, 추천 : 22
저의 마가복음 설교를 보시고 '문법적인 해석, 즉 관찰도 충실치 못하다.'지적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앞으로 계속될 비판과 본문해석을 통해 더 보충되어야 할 부분을 다른 형제들을 위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사정없이 비판해 주십시오.
==========================================================================[re] 마가복음 서론(1:1-15)에 대하여(1) 손무성 2003-10-18 11:53:52, 조회 : 113, 추천 : 11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는 본문에 없는 자기 사상으로 접근해 버렸다.모든 성경을 구원론의 입장에서 개진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이 하셨는가?' 아니면 '인간이 했는가?'라는 관점으로만 성경을 보는 것도 문제다."
라는 지적을 하셨는데 어느 부분이 그러한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 조정재 목사님의 <비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신현복 2003-10-18 15:49:43, 조회 : 118, 추천 : 16
안녕하세요, 조정재 목사님. 님이 올려주신 마가복음 강해를 읽으면서 그리고 답변으로 이근호 목사님이 올려주신 글까지 보너스로 읽으면서, 역시 마가복음은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합니다. 공부가 되는 좋은 기회입니다. 다만 님이 글 마무리 부분에 올리신 <비판>에 대해서는 견해를 달리해서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 이 곳의 설교는 문법적인 해석, 즉 관찰도 충실치 못하다. 예를 들면 '기록된 것과 같이'와 같은 경우이다. 그 시작이 어떤 시작인지 성경은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런 말은 그냥 쉽게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
님이 말씀하신 ‘이 곳의 설교’란 십자가 마을의 <성경 강해>란에 있는 손무성 목사님의 마가복음 설교(2번 글/1:1-8/복음의 시작)를 지칭하는 것이더군요. 님의 비판이 있어서 저도 찾아서 읽어 보았습니다. 님이 지적하신 대로 문법적인 해석이나 관찰 같은 것은 거의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1절만 가지고 강해설교의 거의 반 이상을 할애하다시피 했더군요.
님은 이사야서의 새 출애굽 관점이 마가복음 해석의 중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파악하고 있는 새 출애굽이란 죄와 죽음과 지옥과 악마에게서 탈출한 상황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정죄 대신 용서를 받았고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 대신 영생을 얻었고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우리의 거처를 준비해 주신 덕분에 지옥 대신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고 예수님이 하늘에서 보내주신 성령님 덕분에 악마의 권세에서 벗어나 주님의 통치 아래에 성도가 귀속되었습니다. 성도의 성도로서의 삶은 당연히 이 예수님을 향해 정조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 처음부터 내가 염려한 것처럼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는 본문에 없는 자기 사상으로 접근해 버렸다. >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님이 생각하시는 설교는 무엇입니까? 성경 본문을 남김없이 충실하게 전한다는 목적으로 30-40분 되는 설교 시간에 관찰과 문법 설명을 세밀하게 해 주고, 본문과 다른 성경 말씀과의 관계를 조명하고, 본문 메시지의 핵심을 설파하면서 이 본문과 관련된 기독교 교리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삶 속의 적절한 예화와 간증을 설교 주제와 접목시켜주면서 자연스럽게 말씀에 따른 실천 방안까지 성도들에게 친절하게 전할 수 있는 설교를 생각하십니까? 예, 좋습니다. 저도 그런 설교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설교하든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예배 설교 시간에 성령의 칼이라는 말씀을 받든 목사는 강대상 앞에 앉아서 신실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설교를 청종하는 성도들의 숨은 죄악을 찌르고 쪼개고 자르고 벌거벗기는 작업을 인정사정없이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 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를 설교하는 목사가 이 본문에 나오는 각 용어의 뜻과 성경적인 내력, 신학적 의의, 적용 방법 등을 열심히 강해한다고 하더라도 정작 회개해야 할 죄가 무엇인지 그 정체를 까발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인들은 “회개를 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고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지? 까짓것 잠깐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나를 용서해주세요 하는 것이 뭐가 어렵겠어?” 하면서 회개를 구원을 위한 나의 행위로 전락시키지는 않을까요?
마가복음이 새 출애굽을 위해 새 율법으로 새 땅을 약속으로 주는 어린양 되신 새 모세의 책이라는 것을 목사가 파악했다고 한다면 당연히 성도로 하여금 성도가 탈출해야 할 애굽이 무엇인지 폭로하고 어서 그 곳에서 빠져 나오도록 촉구해야 하지 않을까요? 조정재 목사님의 기준에서는(문법과 관찰!) 손 목사님의 설교가 충실하지 못하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지만 복음에 대한 충성에선 손 목사님의 설교는 모범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손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는 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예수에 대한 관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날카롭게 대조시키면서 설교를 진행시킵니다. 이를 위해서 본문과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신앙의 선배들을 자세하게 예를 들고 있습니다. 금과 은이 없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으로 배불렀던 베드로의 모습, 돌에 맞아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모든 것임을 설교하는 데 혼신을 쏟은 스데반, 매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감옥을 빠져나갈 궁리는 하지 않고 기쁨의 찬송을 부르는 바울과 실라. 왜 이런 역설적인 모습이 나오는 겁니까?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 하는 사람들을 해방하시려고 한 것입니다.”(히2:14,15 표준새번역)
그들은 모두 죽음을 무기로 인간을 노예화시킨 악마의 감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죽음이나 고난 따위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흐름이 이러한데도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자기에 대한 관심'이라는 본문에 없는 자기 사상으로 접근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손 목사님 개인의 의견이나 사상이라 할 수가 있습니까?

< 모든 성경을 구원론의 입장에서 개진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이 하셨는가?' 아니면 '인간이 했는가?'라는 관점으로만 성경을 보는 것도 문제다. >
설교자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세상이라는 애굽에서 탈출하십시오.”하고 끝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신약 시대의 애굽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자기 사랑이며 현실적으로는 돈을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 자기 부인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애굽에서 해방된 백성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라고만 설교하는 것은 뭔가가 모자르다는 뜻입니다. 하늘의 영생을 바라보기 위해 자기 부인을 하려고 경건의 생활을 시도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구원을 위한 욕구만이 터져 나올 뿐이라는 것을, 인간이 스스로 애굽에서 탈출하기에는, 자기가 자기를 죽이기에는 얼마나 무능한 죄인인지까지 남김없이 알려주는 것이 설교입니다.
부자 청년이 영생을 얻겠다는 일념으로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습니다(막10:17-31). 율법 계명을 지키는데 열심이었던 이 선하고 경건한 청년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어린 눈길에도 불구하고 걸림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막10:21)
저는 그 뒤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을 다시 복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22) 설교는 자기 행위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어 넘어뜨려서 그들의 코를 부러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예수님이 선택받은 자에겐 구원의 반석이지만 선택받지 않은 자에겐 걸림돌, 즉 구원을 적극적으로 막는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이 율법을 지키면 영생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겠는가 생각했지만 가진 소유를 다 팔아 나를 좇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사실은 자신이 사랑한 대상은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을 누리려는 자기 자신이었음을 여지없이 폭로당한 것입니다.
슬프게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뒷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25)에 대해서 제자들이 맞장구치면서 “맞아요. 부자들은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니 그걸로 족하고 천국은 우리처럼 가진 것 없고 가난한 민중들이 들어가야죠. 그래야 공평한 것이죠”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조차 근심의 얼굴을 하고 돌아간 부자 청년처럼 충격을 받고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
부자나 가난한 자나 돈을 사랑하는 것은 동일한 인간임을 그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이렇게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부도수표임을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장소에서, 그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음을 증명하고 그런 뒤에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이제는(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전적인 무능력에도 불구하고!)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19-22)
부자도 가난한 자도 그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패닉 상태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저 로마서에서 인간의 입을 막아 버리고 인간의 손과 발을 꽁꽁 묶어 버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10:27)
설교란 바로 이 지점까지 골인해야 합니다. 인간의 행함이 하나님의 행함 앞에서, 저 십자가 앞에서 어떻게 박살나는지 실감나게 전하는 것이, 출애굽기를 설교하든 마가복음을 설교하든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 하십니다”라고 선포하는 설교자의 영광입니다. 저는 그래서 <모든 성경을 구원론의 입장에서 개진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이 하셨는가?' 아니면 '인간이 했는가?'라는 관점으로만 성경을 보는 것도 문제다>라는 님의 말씀에 역시 동의하기가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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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51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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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