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와 일꾼 2003년 7월 27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9:35-38
Re..마 9:35-38 (추수와 일꾼)
이름 : 이근호(IP:)
추수와 일꾼
2003년 7월 27일
본문 말씀: 마태복음 9:35-38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9:36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9: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9: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추수하시겠다고 나서시면 우리 인간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조용하게 한평생을 보내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뜻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현재 인간이 인간다우냐 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노동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보상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진정 어느 수준에 도달된 자인 것을 발견하려 합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이 기대한 보상치만큼 도달되지 아니하면 누구에게도 막대 놓고 화를 내게 마련입니다.
마치 백설공주 동화에 나오는 왕비처럼 거울을 보고 자신의 기대치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쁜가?" 만약 거울이 딴 소리하면 거울이라고 깨버릴 기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지금 우리들의 거울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보고서 자신의 가치를 드높이려 하는 우리들도 동일한 이런 심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라는 거울마저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은 없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참다운 거울 앞에 자신이 세워야 합니다.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에다 자신을 세우지 말고 아무런 노동도 없이 우리 앞에 등장된 거울 앞에 자신을 세워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악마와의 싸움의 절정인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는 비로소 영생이란 우리의 노동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노동의 대가로 주어짐을 압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거울 속에 계시는 예수님쪽에서 나 자신을 다시 봐야 합니다. 모든 것을 거꾸로 볼 줄 아셔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일해도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들의 정상적인 관계 때문입니다. 즉 이미 살아있는 자로서 사는 겁니다.
그런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비로소 인간은 순전히 자기 위주의 독단적인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음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지만 그 모든 노동에서 고통이 따릅니다.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일부로 그런 한계를 제공하셨습니다. 그리고서는 아에 죽여버릴려고 하십니다. 창세기 3:17-19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본디 흙입니다. 이점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흙에서 인간으로 된 것은 인간의 노고나 희망사항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희망사항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인간은 그냥 흙으로 있어도 손해날 일 없습니다. 처음부터 흙이요, 원래가 흙이요,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본전치기에 해당됩니다.
오히려 흙이 사람된 게 이상스럽고 황홀하기까지한 신비스러움입니다. 우리 인간이 천사의 영역까지 넘 볼 주제가 못됩니다. 하물며 신이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주책입니다. 뭔가 악한 기운이 씌지 않는 이상 이러한 자기 주제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객기는 부리려고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관점에서 인간을 보고 있습니다. 흙에서 난 존재를 도로 흙으로 돌리는데 있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하등 반발할 근거가 없는 겁니다. 만약에 학생들이 미술 시간에 진흙으로 인형 만들기를 했는데 미술 시간이 끝나가면서 인형들이 들고 일어나서 우리를 산 인간으로 변모시켜 달라고 데모를 한다면 참으로 엽기적인 일일 것입니다.
혹시 그 중에 예쁜 여자 인형이 남학생보고, "자기 나하고 결혼해서 같이 살자"라고 나온다면 그 학생은 가차없이 그 인형을 뭉개버리고 말 것입니다. "진흙 주제에 까불기는"하면서 말입니다.
흔히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잠입되어 있기에 함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물건 다루듯이 하지는 못할 것이다"고 착각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 아니면 불리하게 작용할지는 순전히 하나님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지 우리 인간이 자기 의견을 개진할 입장이 못되는 겁니다.
마치 집에 돈이 많다는 사실과 돈이 없다는 사실 중 어느 사실이 그 집안을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집안이 되는데 유리한가 하는 것은 당사자가 마음대로 정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차라리 이미 돈 맛을 알았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이제는 산산조각 날 집안으로 보십니다. 왜냐하면 돈은 마약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이 되고 싶어 환장한 마음이 든 이 실제적 변화가 결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도로 흙으로 사라져야 될 요인이 된 겁니다. 이것을 '저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의해서 새로 지음받는 일일 것입니다. 저주가 아예 없었던 것으로 하고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불리는 개념 설정과 기준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이미 정해놓으신 그 틀에서 한치로 달라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축복이란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의 영이 임하는 겁니다.
로마서 8:9에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예수님께서 가졌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선물로 영생주기로 작정된 자에게 주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자가 바로 알곡입니다.
그 외는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알곡이 아니고 가라지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후, 그 다음부터 출발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형상'를 유지하고 성취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로 움직이는 일들이 됩니다. 전체적으로 봐서 이것은 일종의 '추수 작업'입니다.
알곡은 천국 창고에 들이고, 쭉정이는 지옥불에 태우는 작업 말입니다. 감히 인간에게 이럴 수 있느냐 라고 항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흙이었고 먼지였습니다. 자꾸만 자기 본질을 놓치거나 잊으면 아니되십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는, 인간의 범죄 때문에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마저 망가질 수는 없는 차원에서 성취될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추수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 수준의 새창조를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달라붙어있는 고귀한 하늘의 속성처럼 이해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마치 '하나님의 복사판' 정도로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형상'이라고 하니 원판 따로 있고 거기에 관한 복제판 따로 있는데 그 복제판을 실체에 대한 '형상'인 것처럼 이해합니다.
붕어빵은 붕어의 형상이 담긴 빵이며, 호수에 비치는 달은 하늘에 떠있는 달의 형상이라고 간주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형상'에 대한 엄청난 오해이십니다. 비록 땅의 세계에서는 그런 식으로 '형상'을 사용해도 그 원리를 하나님 나라까지 개입시키지 마세요.
하나님 나라에서의 '형상' 개념은 이런 지상 개념의 정반대 개념입니다. 즉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형상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이 형상'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은, 흙에서 인간된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분인가를 이제부터 증거해야 될 임무가 있는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고귀한 것은 잘나서가 아니라 그가 해내는 일과 기능들이 하나님이 형상의 속성을 반영해 주기 때문에 귀한 겁니다.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에게 있다면 그 사랑으로 인해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천사도 부러워할 만한 신분을 지닌 피조물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15에 의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분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은 양보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데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십니다. 은혜 줄 자에게는 은혜를 임의로 주시고 저주를 할 자에게는 임의로 저주하시는 그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추수 작업'입니다. 여기서 다시 당부합니다만, 우리는 원래 흙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본인들이 흙에서 사람된 것도 하나님의 형상의 능력이듯이, 우리의 추수 작업도 모두 주님의 놀라운 은혜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추수라는 것은 사전에 마음에 담아 두었던 계획에 대한 성과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하심에 있어 흐지부지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추수를 내다보지 않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탐색이나 관람이나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목적이 차질을 빚는 일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3:38-40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때는 세상 끝이요 추숫군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것 같이 세상끝에도 그러하리라"
자.. 이 얼마나 예수님은 자신의 일에 확고한 지를 아시겠지요. 추수라는 그 일이 이토록 확실성을 보고 추진되는 일이라면, 이 일에 차출된 자들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성이 보장되는 사업에 종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성도들입니다.
문제는 이들을 차출시키주신 주님의 뜻과 같은 마음이냐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어떤 희생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더불어 추수 작업에 나서는 제자들도 잃어버린 양 하나라도 무시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교인이 교회 나오는 것이 막무가내 자기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나오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채기 위해서 나와야 합니다. 요한복음 4:35-38에 보면, "너희가 넉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추수란 새삼스럽게 인간의 능력이 동원되어야 할 바는 아닙니다. 추수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실행되며 다른 능력으로 차단됩니다. 마치 예수님으로부터 병고침을 받는 자가 스스로 능력으로 병고침을 받거나 귀신들린 자가 스스로의 자기 관리로 귀신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이치와 같습니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시는 예수님의 추수작업에 동원자 자들로서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몸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본인들이 흙에서 사람된 것도 하나님의 형상의 능력이듯이, 우리의 추수 작업도 모두 주님의 놀라운 은혜의 능력임을 크게 알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