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지에 대해서] 2003-10-13
자유의지에 대해서 김재국 2003-10-13 11:57:28, 조회 : 106, 추천 : 12
먼저 저를 가롯유다에 합하여 저주하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사실 저의 순간순간의 모든 행동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못질하는 영벌의 죄를 짓고 있는 중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마음먹으면서도 매번 가롯유다처럼예수님을 팔아먹고 세상에 안주하고 있음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이 목사님의 지적은 저에게 한줄기 빛으로 다가옵니다.
사실 아직 세상에서 살아남은 자가 무슨 면목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단 말입니까?이 순간 예수님의 진리를 알았다고 하면서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배반 이겠지요.
제가 천주교로 가지 않는 것은 이근호 목사님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천주교의 주장에 반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반대합니다. 그들은인간의 머리와 철학으로 하나님의 세계를 재단하려는 우를 범하는 자들이니까요.동정녀 탄생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고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증명하지 못한다고 거짓은 아니지요.
제가 자유의지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인간이 악질이라는 증거가 되고 그래서 십자가가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자유의지 때문에 가롯유다의 배반이 있고, 다윗의 순종이 있다고 봅니다.자유의지를 사용해서 가롯유다는 하나님 밖으로 탈출했고 다윗은 하나님과 합했습니다.하나님이 자유의지의 속성을 가진 것처럼 인간을 만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본 떠 만들었기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자유의지를 제거하지 않았냐고 물으신다면자유의지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함이겠지요.인간이 악마에게 넘어갈 위험성을 감수하면서도 자유의지를 방임한 이유는 그 방법만이 하나님의 존재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시편 51편이 인간의 죄성에 대한 상한 심령이라면시편 18편은 하나님을 의지하여세상에서 영적전투를 감당하는 성도의 환희의 찬가라 할 수 있습니다.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시18:29)이 다윗의 자세가 성도가 이세상에 불림받은 존재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진리를 추구하는 이근호 목사님을 사랑하며 이만 줄입니다.
==========================================================================[re] 자유의지에 대해서 이근호 2003-10-13 13:16:10, 조회 : 134, 추천 : 6
>귀하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형상론'이 잘못되었습니다.
제가 천주교 이야기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론'이 천주교에 주장하는 것(요즈음 모든 개신교 교회에서 다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주교가 연옥을 거론하는 것은 하나님이 직접 모든 인간에게 부어주신 신적인 요소의 '하나님이 형상'을 스스로 파괴하는 일이 없어도 조치를 취하신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어쨌든 꼬투리를 잡아 신이 되려는 모든 인간의 절대신에 대한 야심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 들어있는 하나님 속성과 공통된 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정도의 형상론은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 신학에서 한결같이 주장해 왔던 바입니다.
유대신학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은 오직 '말씀'으로만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주장해도 예수님의 가치성을 그저 '하나님의 형상' 회복용으로 간주한다면 개신교가 되었던 천주교가 되었던 유대교가 되었던 이방종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형상이란 예수님 자체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골 1:15)
시편 해석에 있어서도 전혀 예수 그리스도의 새언약적 입지를 고려하지 않는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유대신학에서 구약을 해석하는 바와 동일합니다.
그리고 제가 분명히 질의하기를, 왜 '의지' 앞에 '자유'라는 표현을 붙여야 하는 겁니다. 인간의 의지성만으로 인간의 자율성과 가능성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는데 거기에다 왜 '자유'라는 말을 붙이는 의도가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인간의 강렬한 의지성 만으로 악마에 대처하는 인간의 행함이 제대로 설명이 안되든가요?
성경 어디에서 보세요. 하나님의 허락 없이 인간의 자율성만으로 지옥 간다든지 천국 갈 수 있는가요?
도대체 성도가 되었으면 무엇을 증거해야 한다는 정도는 알아야 하는데 이건 자신의 신학의 철벽함과 완전함을 증거하는 식으로 변호하고 나오니 기존의 신학교 교수와 다른 점이 뭐가 있습니까?
##############################################################################################이 목사님과 엇 비슷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신직수 2003-10-13 14:06:00, 조회 : 151, 추천 : 11
목사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1월 셋째 주에 뵈었던 신직수라고 합니다.
어제였습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절 부르시더니 사임을 권고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목회적방향이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저보고 '이단' 이라는 것입니다. ' 그 사상을 쓰레기통에 버릴 거냐 아님 사임을 할 거냐 ' 말씀하시기에 속으로 웃으면서 ' 사임하겠습니다 '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부터 목사님의 의도대로 출근을 못했습니다.
발단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그 교회 가기 전 저의 가장 큰 다짐은 절대 나의 신학을 밝히지 않으리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쪼끔씩 쪼끔씩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얘기하자라는 제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저의 엉성함은 여지없이 드러났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까페가 하나있는데 목사님의 색깔과 비슷한 글을 많이 써 놓는 까페이고 또 그 까페에 담임목사님의 구원의심에 대한 글을 하나 썼었고 목사님과 그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글을 5개 정도 썼는데 인터넷에 보면 기록이라는 곳으로 제 까페에 교인들이 보고 목사님의 귀에까지 들어가서 목사님이 고민 고민 기도 기도 하다가 저는 제명당한 것입니다.
딱 오개월 되었습니다. 어제 목사님의 얘기를 들으면서 ' 참 재미있다 ' ' 나도 이런 경험을 하는구나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단소리 들으면서 짤렸습니다.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목사님과 그 목회를 전혀 건들지 않고 조용히 사임했습니다.
그러나 맘이 조끔은 아프네요? ^ ^
목사님께 알려드리고 싶어서 쪼끔은 위로 아닌 위로 받고 싶고 또 제가 이걸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목사님의 글을 보고 싶어서 글을 올렸습니다.
목사님께 넘 감사하기도 하지만 죄송한 부분이 있네요? 그리고 하나님께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의 답글을 기다리겠습니다.
==========================================================================[re] 하나님은 사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근호 2003-10-13 16:14:22, 조회 : 160, 추천 : 11
하나님은 천국 채우기와 지옥 채우기에 바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귀하의 사임에 언제 신경이나 쓰시겠습니까?
이미 지옥 (사람이 죽어서 새삼스럽게 지옥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 세상은 지옥입니다.)인 이 세상에서 천국갈 자를 따로 분리하는 작업에 분주하십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아직도 이 세상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남들이 교회 만들어놓고 지옥 장사하는 것에 기웃거리고 있습니다.
이제 분명히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복음으로 영생을 나누어주는 일에 봉사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 삶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온 몸이 부서지라 체험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주유소 급유하기, 택배 회사 취직하기, 학원차 운전해 주기, 암웨이해서 가까운 친척들 푼돈 다 쓸어모으고 원수지기, 중소기업에서 외국 노동자들과 함께 짐승 취급받기 , 전남 바닷가에 가서 새우잡이 노예선 타기, 정수기 판매원되어 사기꾼으로 변모하기, 포장마차 하면서 맛없고 불량식품으로 국민 건강 해치기, 노가다 해서 월말 때 회사 부도나서 노임 떼이기, 개인택시 운전해서 위장 장애를 겪고 허리 디스크로 골병들기(일어서서 걷지도 못할 걸요?) 등 등 많이 있습니다.
주일 지킬 생각은 마세요.
남은 것은 망가지 육신 뿐이요 좋은 점은 수명단축입니다.
==========================================================================[re] 하나님은 사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조부상 (Homepage) 2003-10-13 19:39:06, 조회 : 155, 추천 : 10
공개적으로 딴지를 걸어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사임에 관심이 없으신 분이라고추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길을 막으심은 다른 길을 찾아보게 하심이거나아니면 기다리라는(wait)신호로 해석하게 됩니다.
나의 부족함이나 지혜롭지 못함일 수도 있겠지만상대나 혹 현재의 교회 조직이 낡은 부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포도주를 담을 만한 부대가 아닐때는 그 낡은 부대가 거부하겠죠.
구멍가게식 교회와 복음판매, 대형마트와 체인식 복음판매에서이제는 다분히 인터넷 홈쇼핑식 복음 매매로 변화되고 있습니다.이런 변화에 강제로 내 몰린자들이나, 민감하게 받아들여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조직과 조직이 주는 직분이나 돈. 혹 명성에 안주하기보다는 실제적으로영혼들에게 유익을 끼칠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을 찾게 되리라는 확신입니다.
모든 아픔과 상처를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저는 압니다.그러나 그런 아픔을 통해 더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도저는 믿고 있습니다.
==========================================================================[re] 하나님은 사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근호 2003-10-13 21:13:07, 조회 : 132, 추천 : 12
지옥에서 숨을 곳을 찾는다는 것이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성도가 언제 어떤 경우를 만나든 그 자리에서 천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굴림판으로 이해하고 있을 정도로 하늘만을 사모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이런 자유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 밖에 안됩니다.
사도 바울은 소원은 육체를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은 자신이 전해야 될 영생의 복음을 들을 자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사도 바울에 옥에 매여 있어도 놀랍게도 복음은 매이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함입니다.
마귀는 그야말로 인간에 대해 귀신입니다. 인간의 약점을 낱낱이 압니다.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최대의 취약점인 줄로 압니다.(히브리서 2:15)
왜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가도 압니다.
재수 옴 붙은 것을 신의 자비로 떼어내어 액땜을 하겠다는 조치로 교회를 찾습니다.
여기에 목사들은 교인들의 약점을 철저히 뜯어먹고 사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하시면 여러분에게 붙어있는 액운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숱한 간증을 예를 들수 있습니다"라고 목사들은 소개합니다.
바로 죽기를 무서워하는 심약함을 약점으로 삼고 그것을 윽박지르면서 영업을 계속해 나가는 업소가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도라면 이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은 아무나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마 5:11-12), 예수님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순간이 거룩한 성령이 함께 계신 복이 넘치는 순간임을 (벧전 4;14) 스데반 집사님의 죽는 순간을 통해 성령 충만의 샘플되는 경우를 (행 7:55) 확인하는 기회를 주신 줄로 알아야 합니다.
==========================================================================[re] 목사님?? - 하나님은 사임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신직수 2003-10-13 18:06:10, 조회 : 148, 추천 : 12
목사님 전 어리석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어슬렁 거린것이 사실이구요? 목사님께서 복음에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쫌 구체적인 결단을 부탁합니다. 바쁘시겠지만 저의 결단이 평생 확고할 수 있도록 부탁합니다.
사실은 제 머리구조가 누가 다 정리해서 떤져줘야 이해하는 스타일이거든요?
==========================================================================[re] 사명이란 제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근호 2003-10-13 22:41:11, 조회 : 111, 추천 : 2
사명이란 제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겁니다.
사명은 사명자를 위함이 아니라 영생받기로 작정된 자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나의 가치를 찾기 위하여 살아가겠다는 마음 보다는, 남에게 돌아갈 영원한 가치(영생)를 위해서 봉사할 마음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이 되신다면 지금 숨쉬는 것도 사명의 개시(시작)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귀하가 하신 질문 자체가 벌써 사명이 시작된 징후이기를 바랍니다.
주위에 많은 교회가 있기에, 그 교회관이 먼저 마음에 자리잡게 되면, 진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교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명을 마치 교회도 아니고 사명도 아닌 것처럼 배척해 버리기가 일 쑤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 분은 존재함 자체가 곧 사명 때문에 존재했습니다.
즉 자신이 존재하고 거기에 사명이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곧 하나님의 사명 덩어리로서 자신이 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이란 참으로 연약해서 기존에 들어왔는 바, 남들의 주장들이 자신의 욕망으로 재구성 되어 선입견으로 확고히 자리잡게 됩니다.
마치 다들 결혼하는데 혼자 결혼 안하면 비정상인이라고 생각되지만 분명히 고린도전서에서 사도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결혼하지 않는 것을 더 가치있게 보고 있습니다.
"결혼한다고해서 꼭 나쁘다고는 볼 수 없지요"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귀하께서는 자신의 선입견 가운데 성경 이외의 것이 자리잡고 있는지를 살펴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인생을 포기하셔야 합니다.
제가 남긴 글, "손성식 목사님의 신학의 원천'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보다 구체적인 것은 귀하의 사정을 제가 모르니 사정이 된다면 이번 20일날 심플 교회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진짜 교회란... 조부상 (Homepage) 2003-10-13 21:31:12, 조회 : 157, 추천 : 11
교회는 결코 장소(Place)가 아니라 항상 사람(People)이며
교회는 결코 양의 우리(Fold)가 아니라 양(羊)이며
교회는 결코 거룩한 건물이 아니라 언제나 믿음의 모임(a believing assembly)인 것이다.
기도하는 사람, 바로 당신이 교회이지 당신이 기도하는 그 장소가 교회는 아니다.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이나 걸친 것이 당신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벽돌로 쌓아 올린 구조물이 성전이나 교회가 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거룩한 곳이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인간을 제외하고는 없으며 혼(soul)을 제외하고는 인간 내부에 지성소란 없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본성이며 참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초대교회가 말했던 바로 그 교회이며 초대교회가 주장하고 체험했던 그 교회인 것이다.
오늘날은 극심한 말씀의 왜곡으로 교회가 아닌 외부의 것이 당연히 교회가 되어 버린 실정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하워드 스나이더 중에서 발췌
그러나 유대 회당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건물이 아니었던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에 모이지 않았던가? 회당이 그리스도인 예배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이 바울의 견해가 아니었던가?
회당은 첫째로 유대인들의 공동체였고, 둘째로 그것은 건물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로마제국 당시, 도처에 수백개의 회당 공동체와 건물들이 있었고 바울은 언제나 복음을 전할 때에 이런 회당에 먼저 갔다.
의심할 바 없이 바울은 이러한 회당 건물들을 그리스도인들의 중심지로 삼게 되기를 기대했으나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우리가 알다시피 회당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되지 못했으며 "교회 설립 후 30년도 채 못되어서 회당의 문이 그리스도인의 면전에서 닫히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은 목격했다.
바울이 세운것은 결코 건물이 아니었다. 그가 육신적 교회당을 세운 바가 없고, 다만 회당 모양의 공동체만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Ralf Winter가 지적한 대로 "그는 아주 새로운 신자들의 교제권을 회당 형식으로, 그의 선교 활동의 기본적 단위로서 형성했다. 신약에 나타난 최조의 구조는 이와 같이 종종 신약적 교회라고 불리우는 그런 형태의 것이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유대 회당 형태에 따라 세워졌으며, 어느 곳에서나 충성된 자들의 공동체를 포용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자신들을 교회당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ecclesia(교회) 라고 부른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둘다 헬라어로는 모임(Assembly)으로 번역 될 수 있고 문법적으로도 회당은 교회의 명칭으로서 적절한 것 같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에클레시아란 말을 더 좋아한 것은 그들의 공동체를 유대 회당과 분명히 구별짓자고 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회당은 복음을 팔레스타인에서 로마제국 전역과, 유대인으로 부터 이방인에게 전달하는 데에 결정적인 다리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 다리는 한번 건너 갔을 뿐 그 후에는 버려진 다리였다.
(지금은 성도가 건너가기 위한 다리(교회당)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머리 위에서 굴레씌우는 다리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이리라)
초대교회는(제도교회와는 정반대로) 공동체의 모형으로서의 회당을 모방했을뿐 결코 건물로서의 회당(교회당)을 모방하지는 않았다. 제도 교회는 그 자체가 비 성경적이다.
(Green,Evangelsm in the Early Church P-195) 에서
==========================================================================[re] 질문 있습니다. 이근호 2003-10-13 22:44:50, 조회 : 138, 추천 : 13
>예배당을 교회라 여기지 않고 그저 사람들이 모임 자체를 교회의 참 모습이라고 하면서 기존 제도 교회대로 운영하는 교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변하시렵니까?
==========================================================================[re] 질문 있습니다. 조부상 (Homepage) 2003-10-14 08:36:11, 조회 : 120, 추천 : 13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교회이든 개인이든 (자아의 생명이) 죽고자 하면(하나님의 생명이) 살게되고..살고자 하면 죽게 되겠지요.
견고한 조직과 건물을 위하느라진짜 중요한 주님과 성도가 차선이 되지 않는다면, 어느정도 교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실상은 보이는 것이 집착하여보이지 않는 것을 차선으로 하거나, 공공연히 무시하거나성경까지 왜곡해서 세뇌시키는 일이 많은 것 같습니다.
누구 말대로 다이어몬드를 깡통으로 겹겹이 포장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건물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듯, 벽돌로 높이 쌓아올려스스로 권위주의가 되고, 가난한자에 대해 배타적이 되어버린 골치덩어리, 비만덩어리가 되버린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 감성도 위하고, 우리의 영성도 함께 위한다는 차원에서음악을 양념처럼 곁들였는데,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음악은 삭제 합니다)
==========================================================================[re]그렇습니다!. 이근호 2003-10-14 10:20:33, 조회 : 133, 추천 : 10
>>그래서 제가
자기 목숨을 포기하고, 목회를 포기하고,인간을 포기하지 아니하면
악마가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한 것입니다.
기껏해야 불교 고승들 처럼 그 저 '자기 자신과의 투쟁과 싸움'에 그치는 겁니다.
우리는 악마와의 싸움입니다.
악마가 교회 존립을 무기로 하여 십자가 복음을 희석시키고 무산시키려 한다는 것을 귀하처럼 다른 사람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배경 음악을 좀 안넣었으면 좋겠습니다.
초를 다투는 것이 영적 싸움이기 때문에 '시간의 강태공'은 될 수 없거든요.
##############################################################################################하나님의 형상 김재국 2003-10-13 23:11:35, 조회 : 152, 추천 : 11
1. (의지)앞에 (자유)라는 표현을 붙이는 이유 특별한 의도성은 없습니다. 의지는 추구성을 강조하고 자유는 선택의 열림을 내포합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하나님에 의해 열린 선택공간에서 인간의 추구성) 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없이 인간의 자율성만으로 지옥이나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성도라면 누구나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단지 인간에게 부여된 자유의지 안에서 인간은 지옥행과 천국행 티켓 중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절박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아벨이 천국을 가인이 지옥을 향한 것은 그들의 추구성의 결과입니다.(은혜는 동일하게 받았습니다) 아벨과 가인의 추구성에 하나님은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에 수반되는 행동과 불신에 따르는 결과물을 판정하실 뿐입니다.
2.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성경 말씀(창1:27)이 신이 되려는 인간의 야심의 표현이라면, 성경이 인간의 야심을 표현한 것인지요?
3. 시편18편과 51편 구약에서 인간의 교만과 목이 곧은 인간의 신성에의 월권 예수님을 죽인 인간의 자기의에 지친 하나님이 행하신 무조건적이고 강압적인 인간구원 에 부응하여 51편은 교만과의 결별을 18편은 구원의 감격에 의한 삶의 자세(영적전투) 를 계시합니다. 51편과 18편이 합해져야 온전한 뜻이 이루어집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근호 목사님의 세심한 배려에 감사하며 이만 줄입니다.
==========================================================================[re] 심성이 나쁜 분이 아니군요 이근호 2003-10-14 07:45:54, 조회 : 168, 추천 : 11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쓰여졌습니다.(요 5:39)
어떻게 증거되는가 하면
1. 인간의 죄에 대해서 2. 하나님의 은혜로
따라서 성경에서 왜 인간은 죄인일 수 밖에 없는가를 찾으면 되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떤 근거에서 그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가를 찾으면 되는 겁니다.
시편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한 책입니다.
다윗이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내용입니다.
귀하깨서는
제가 보기에 귀하께서 심성이 나쁜 분이 아니라 성경을 전체를 보는 공부에 소홀하신 분 같습니다.
우선 다음과 같이 성경을 공부하셔야 합니다.
1. 구속사를 반드시 공부하세요. 성경을 통채로 보되 시대의 진행과정을 통해서 성경의 일관된 주제(언약)이 어떻게 내용이 확대되고 있는가를 탐색하면서 보셔야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시중의 많은 책이 나와 있습니다. 우선 쉬운 것은 로벗슨 팔머 교수가 지은 '그리스도와 계약 신학'이라는 책과 그리고 김이곤 교수가 지은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지 않는다'라는 책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카이저의 '구약성경신학'이라는 책을 읽으셔야 합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나 에베소서 강해를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박용기 목사님의 책들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김홍전 목사의 책은 구속사가 아니니까 주의하셔야 합니다.
흔히 기존 교회 구속사라고 언급하는 성경 프로그램은 거의 다 가짜이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 뵈트너가 지은 '칼빈주의 예정론' 이라는 책을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선교단체에서 배운 모든 것은 다 잊어버리세요. 애들 기살리기 위해 엉터리 성경해석이 전부입니다.
성경을 실무나 실천에 옯기기 전에 먼저 성경 전체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로 골인 되는가를 먼저 정리되어야 합니다.
==========================================================================[re] 하나님의 형상 이상규 2003-10-14 00:25:17, 조회 : 148, 추천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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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예정론과자유의지에서예정론과자유의지와의 관계(성경에 근거한 자유의지)에대하여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re] 심성이 나쁜 분이 아니군요 김재국 2003-10-14 12:37:34, 조회 : 145, 추천 : 5
우선 길안내를 해주신 이상규님과소상한 책소개를 해주시고 조심해야 할 돌부리까지 가르쳐 주신 이근호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실무와 실천에 앞서서 예수님의 성취를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는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입니다.그런데, 분과 초를 다투는 영적싸움이 바로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지금 현재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마귀와의 씨름에서불의와의 타협을 하나님께 들이밀면서 합리화 시키는 것이 가증스럽기만 합니다.이것이문화명령-->아둘람 굴에서 촉발된 남은 자 사상-->이사야서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 예루살렘의 계시-->십자가의 대속과 부활-->요한게시록에 나타난 예수의 승리와 갱신설에 입각한 천국노선을 옹호하는 이유입니다.
이 노선과 언약적 관점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궁금해집니다.언약적 관점+구속사적 해석+남은 자 사상+내세복음적 해석=기독교적 세계관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만 이 등식의 오류는 무엇인지 알고싶습니다.
소상한 지적에 감사드리며 이만 줄입니다.
==========================================================================[re] 제시해 주신 사상이 바로 新유대신학입니다. 이근호 2003-10-14 16:11:27, 조회 : 163, 추천 : 10
>유대신학과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언약사상의 차이점은, 시간의 진행 방향과는 다르게 의미와 성취의 흐름을 거꾸로 적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현대 유대신학은 유대교 내부보다는 오히려 자크 데리다나 레비나스 같은 명망높은 현존 철학자에 의해서 현 인류를 도로 구제할 수 있는 지혜로 제안되고 있습니다.
쉽게 그 취지를 설명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메시야의 고난과 희생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 실존의 모델은 설정되고 그 실존을 본받아 이웃의 고통 안에서 진정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여 그 고통을 함께 나눔에서 인류는 하나의 동포애로서 단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타인의 고통 안에서 자아의 자아됨의 토대와 정체성을 비로소 찾음으로 그 타인과 사랑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이 열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 실천 방안으로 유대교 내에서 이 점을 모범을 보이고자 합니다. 이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근거를 잡는 이유는, 귀하께서 제시한 그런 시간의 흐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지혜)는 빈틈없이 성취될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 같은 자들은 곧 메시야의 지혜를 지닌 자를 말하는데 오늘날의 종교를 초월하고 국경과 이념을 초월하고 오직 이웃에 다가서며 사랑을 나누어주기 위해 애매한 시련과 고통과 희생을 당하는 현자들의 모습 속에는 신의 메시야성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물론 실존하는 메시야는 하늘에서 천사와 함께 구름타고 와서 전 세계를 이런 정신에 의해서 심판을 감행한다는 것이 구약 성경에 나와있는 남은 자 사상의 유대신학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십자가 사상에 의하면, 바로 그런 식으로 성경을 이해해왔었던 사도 바울 자신이 진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도리어 핍박하게 되었다는 아이러니가 놓여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인간의 모든 기호학적 해석법(신- 인간 사이를 통하는 의사소통적 해석법)이라든지, 지식사회학적 해석법(신에 대한 이념은 개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재구성해 준 것이라는 해석법)에 근거한, 창세기에서 시간의 흐름 따라, '약속-성취'라는 구조로 해석 하는 그 자체가 곧 악마가 가르쳐준 엉터리 말씀 해석법이라는 말이 이됩니다.
그렇다면 이것말고 달리 해석법이 있는가?
인간의 능력으로는 유대신학적 해석법이 한계입니다. 어느 학자, 어느 비평가도 유대신학을 추월할 수 있는 합리적 해석법을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의 유대신학을 포기했는가?
이유는 단한가지 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영 곧 성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해석법을 다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 영광에 기원한 해석법을 구약에다가도 적용해 버리는 겁니다.
물론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베드로의 같은 경우, 사도행전 1장에서 가롯 유다의 죽음과 12번째 제자 뽑을 때 근거를 든 시편 해석이 그런 경우이며 더 확실하게는 베드로전서 1:10-11에 잘 나와 있습니다.
"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것은 구약의 일부 구절에만 적용되는 해석 원칙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아예 구약 전체를 두 언약적 노선으로 결정지어 버렸습니다. (갈 4:24-31) 그러면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대신학자들에게 먼저 신학적인 질문한 대목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22:41-46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세기부터 역사의 끝까지 시간과 동행하면서 '약속-성취'라는 구조로 하나님의 말씀을 분석하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쪽으로 진행될 수 밖에 하나의 사상이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해도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와 정반대로 오신다는 겁니다. (고난받은 메시야라고 해서, 헐벗고 고난받고 가난한 메시야를 찾아보세요. 아마 하나님깨서 반대의 메시야로 오실걸요? 술마시고 방탕한 메시야로 말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인간의 인식을 피하겠는다는 취지입니다. 즉 예수님이 메시야 인 것을 모든 이에게 감추겠다는 겁니다. 그래야지만 구원 자체가 인간적인구원성 요건 안에 내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다머를 비롯한 현대 문예 비평가들은, 모든 비평에는 반드시 '시간성'을 토대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만약 내러티브(설화)의 진행이 시간의 질서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해석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순수 이성이란 필히 절대적 시간성과 공간성 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칸트의 주장에 의하면 말입니다.
이 시간에 대해서 저의 글 [시간과 구원의 연관성]이라는 글이 이 크로스빌리지에 실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남은 자'에 대해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우선은 인간 구원 중심의 '남은 자'가 어떤 개념인가도 같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오해성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적 남은 자 개념입니다.약속을 받았기에 그 약속 안에 있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개념의 '남은 자' 개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십자가 중심으로 '남은 자' 개념을 봅시다. 갈라디아 3:16에 보면, 아브라함 후손이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분 뿐임이 드러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그러니까 분명히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늘의 별같고 바다의 모래같이 무수해야 하는데 사도 바울에게 있어 아브라함 후손은 오직 한 분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석에 주의해야 합니다. 한 분에서 다시 여러 명으로 확산되니 결국 마찬가지가 아니냐 하는 사상은 (총신의 김희보 교수의 주장) 전혀 사도 바울의 사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 후손이 단 1명이라는 말은, 누가 구원받을지, 누가 구원받을 자격이 되는지에 대해서 이미 인간의 포부나 기대감이나 신앙심에서 전혀 무관한 위치에서 작용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참고로 '인간의 신앙=인간의 행함'입니다.
참된 신앙은 은사로 오게 되어 있는데(고전 13장) '예수님의 신앙=언약 된 신앙=선물로 받은 신앙=은혜에 근거한 신앙=약속에 근거한 신앙'입니다(롬 4:16). 그리고 이 신앙은 인간의 '믿는 행위=신앙'을 묵사발 만들고 정죄하고 부정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그 신앙으로 십자가 사건이 발생되었기 때문입니다. ]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제부터 주(예수님) 소관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즉 구약의 주되시는 분=예수님 이신데 바로 구약의 주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므로 새로 선택에 나서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유 권한으로서 아달의 소원대로, 그리고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에게만 자신이 가진 아브라함 언약이 완성을 그대로 적용하시는 절차를 주의 자리에 있기에 성령을 내려 보내실 수 있는 자격자로 일방적으로 자기 안으로 (예수 안으로) 선택해 버리십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예수 안'이라는 새로운 신학으로 정립해 버렸습니다.
예수 안에서는 그 어떤 인간들의 구원에 대한 기대감이나 해석법니나 구속사나 구원에 대한 예측이나 구원의 방정식도 정죄당합니다.
'예수 안'은 그 자체로 종결된 상태입니다. 즉 '예수 안'을 신학적 개념을 펼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펄쳐봐야 시간성이 삽입되어 또 인간들이 나름대로 곡해하는 근거로만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께서 참된 성도에게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너는 어째서 구원되었습니까?
답변은 이것뿐입니다.
"주님의 긍휼로 구원되었습니다"
어째서 긍흉을 입었다고 생각되느냐?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예수님 생각에서 나왔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 구원 중심의 예정론에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만이 아시는 예정론(새언약적 예정론)에 맞추어 구원하시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인간이 구속사적 틀은 반드시 예수님의 예정론 앞에서 멈춰야하고 부정당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속사는 반드시 공부하되 구속사를 믿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의 열망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흔히 히브리적 사고 방식이라 칭하지요.
이것 조차도 구원에 무용지물입니다.
구원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에게만 나오는 능력의 열매일 뿐입니다. (고전 1:18)
예수님은 구약의 그 '주'시니까 마음대로 하실 분입니다.
==========================================================================[re] 이근호 목사님, 수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신현복 2003-10-14 17:28:24, 조회 : 152, 추천 : 11
"예를 들어, '남은 자'에 대해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면 먼저 인간 구원 중심의 '남은 자'를 먼저 상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 11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오해성입니다. 그리고 유대교적 남은 자 개념입니다. 약속을 받았기에 그 약속 안에 있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개념의 '남은 자' 개념입니다."
--> "남은 자에 대해서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면" 은 문맥상 "남은 자에 대해서 유대 신학 중심으로 해석하게 되면"으로 수정해야 하겠습니다.
요즘은 어느 때보다 자유게시판이 후끈후끈 달아 오른 느낌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마가복음 본문 해석으로 토론하기를 요청합니다 조정재 2003-10-15 23:40:31, 조회 : 152, 추천 : 12 [re]목사의 사명은 말씀연구 이근호 2003-10-16 07:04:00, 조회 : 160, 추천 : 11
>참으로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의식입니다.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사시면 본인이나 후배들이나 교인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이 가는지 모릅니다.
[문제는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가 그런 식으로 하니 교인이 안 불러지니 간증주의 목회로 나갔다가 그것도 시원찮은 결과를 가져오니 결국 종착점은 "바치면 복받고 안바치면 저주받는다"는 간단명료한 조직폭력배주의로 나가고 맙니다.- 거의 대부분의 목사가 그러합니다. 안그렇게 하면 다른 조폭들(노회의 다른 목사들)로부터 정신적 린치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야 김 목사. 너네 장로가 우리 교회 장로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말씀대로 가르치고 목회하는 훌륭한 분이라고 자랑하든데 그로 말미암아 내가 얼마나 곤혹을 치르는지 아십니까? 당신 이 목회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장로 소용없어요 목사는 목사 말을 들어야 됩니다. 이 사람이 이 천지를 모르고 까불고 있어. 앞으로 조심해 . 우리는 당신 때문에 완전히 양아치 취급받잖아." 라고 말입니다. ]
-여기서 양아치란 강자에게는 한없이 굽신거리고 약자에게는 무자비하게 굴면서 공갈과 협박을 일삼으면서 상습적으로 돈을 갈취하고 뜯는 조직세계(노회)의 권위와 실질적으로 지탱하는 하부계층의 구성원들을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정신적, 신분적 린치를 당하더라도 끝까지 말씀 탐구위주로 나가는 그런 분이 그립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출애굽 신학의 맥락에서 보신다고 하니 정말 제대로 보신 것입니다. 당연하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파생되는 각가지 논제를 제가 알고 있는 한 열거하겠습니다.
1. 왜 하필이면 마가복음만이 출애굽 신학인가? 마태복음은 출애굽 신학이 아닌가? 누가복음은 출애굽신학을 적용할 수 없단 말인가?
2. 출애굽 신학을 구원론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기독론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율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활용론(거룩의 실제적 적용)으로 접근할 것인가? 즉 무엇을 위한 출애굽이며 누구를 위한 출애굽인가 하는 점.
3. 출애굽 당시의 히브리민족이 단순히 자기를 구원하시는 그런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식했는가 아니면 자신들이 죄인이며 자신을 겨냥한 구원이 아니었음을 그들이 알고 있었는가 하는 점.
4. 출애굽 신학을 마가복음과 연결할 때, 그 중간에 끼어있는 선지서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하는가? 선지서 전체를 출애굽 신학으로 처리하여 그렇게해서 마가복음을 연결시켜 주어야 하는가?
5. 출애굽 신학에서 모세의 입지 문제가 등장됩니다. '모세=예수'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예수=모세'로 봐야 하는가? 즉 모세같은 예수님이 마가복음에 등장하셨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모세가 일부를 담당하는 것에 불과한가? 이것은 모세와 그 당시 백성들의 갈등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갈등인가 아니면 예수님과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의 갈등인가 하는 점입니다.
6. 출애굽에서 '땅'을 약속했다면 마가복음에 있어서 약속된 '땅'은 어디인가?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7.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일 것 같은데요,
다른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십자가로 급속하게 달려가고 있는 마가복음에 있어 십자가에서 비쳐본 이 세상의 죄가 과연 출애굽 신학에서 동일한 깊이와 넓이로 제대로 드러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re]목사의 사명은 말씀연구 조정재 2003-10-16 10:17:57, 조회 : 150, 추천 : 12
[re]부모님은 잘 계십니까? 이근호 2003-10-16 11:55:05, 조회 : 147, 추천 : 8
마가복음에 들어가려면 필히 거쳐야 될 관점에 대해서 언급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대해서 그 어떤 구조로 해체하며 이해하더라도 항상 이러 이러한 관점에서 못벗어나기에 제 의견을 개진할 것입니다.
만약에 귀하께서 마음에 담아두신 본문에 대한 구조 분석이 있다면 서슴치 말고 실어서 다른 많은 분들이 도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