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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손성식 목사님의 신학의 원천은?] 2003-10-11묻고답하기-

손성식 목사님의 신학의 원천은? 이근호 2003-10-11 07:43:49, 조회 : 161, 추천 : 14
손 목사님은 세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습니다.
1. 악마의 시선과 마주치는 눈동자를 갖고 있습니다. 악마를 노려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며 글을 쓰고, 신학을 논합니다. 특히 세계의 유명하다는 신학자들이나 보수주의 신학자들이나 신학교 교수들이 그러한 작자들입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은 대중들과 무리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한뼘 쯤 불쑥 솟아나서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악마의 눈초리를 놓치지 않습니다.
즉 글을 악마를 겨냥해서 쓰고 있습니다. 악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악마의 흐름과 반응에 민감합니다.
악마의 시선을 찾아내려면, 자기 목숨을 포기하고, 목회를 포기하고, 인간을 포기한 경우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경우에, 말을 하든, 글을 쓰든, 설교를 하든, 누구를 만나든 악마을 염두에 두고 사는 자는 성령을 받지 않고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기적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사람들의 평가와 반응을 의식하며 도리어 악마가 시키는대로 놀아나는 사람이 됩니다.
2. 손목사님은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의 시선과 마주치는 눈동자를 갖고 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손목사님은 예수님의 눈동자와 마주 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묻은 손이 손목사님의 손목을 잡고 있음을 본인이 압니다. 십자가 안에서 쏙 예수님과의 그 손이 나타났음을 손목사님은 알고 계십니다. 다른 곳에서는 예수님께서 나타내지 않음을 아십니다. 그 손목의 힘은 창세 전에 가졌던 힘이기에 아무리해도 주님 안의 거룩성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아십니다. 이것으로 손목사님의 운명은 종결된 것입니다.
3. 손목사님은 진리를 보는 눈동자를 갖고 계십니다.
여지간한 목사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자 이제 복음에 대해서 알았으니 대충 이 복음으로 목회하면 주님이나 다른 이들이 나보다 나쁜 목회자라는 하지 않겠지"
하지만 손목사님은 자신의 목회 훌륭함에 이끌려 사시는 분이 아니라 진리에 이끌려 사시는 분입니다.
목회자, 혹은 설교자로서 만족하는 그 테두리 자체가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덫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손목사님은, 자기가 자신에게 변명하거나 자기 처지나 자기 입장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철저하게 용서하지 않는 분입니다.
진리가 바로 저긴데, 자기 만족이나 자기 변호나 자기 안일에 빠지는 것은 예수님과 대치 국면이 될 뿐임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진리가 주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풍성함을 만끽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은 한없이 작아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결코 자기 존재나 활동 그 자체의 정당성을 제일 미워하는 분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흔히 손목사님의 글이 공부 많이 하면 나온다고 여기는 분이 있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사람, 전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우리 앞에 등장될 경우에만 나올 수 있는 글입니다.
==========================================================================[re] 손성식 목사님의 신학의 원천은? 성재필 2003-10-15 19:49:42, 조회 : 94, 추천 : 16
손 목사 뿐만 아니라 모든 목사 아니 모든성도들이 이와같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한 개인을 이처럼 평가하시는 것은 참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알기로는 성령님은 수시로 변할 수 있는 어느 한 개인에게 집착하시는 분이 아니기에 한 목사를 마치 선지자처럼
표현하시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저 역시 손 목사의 글을 좋아하지만 "손 목사님은 세개의 눈동자를 갖고 있습니다." 대신에 " 진정한 목사는 세개의 눈동
자를 갖고 있습니다."가 어떨런지요?
==========================================================================[re]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근호 2003-10-15 21:11:13, 조회 : 75, 추천 : 13
지금 손성식 목사님이 그러하다는 겁니다.
제가 그 분을 관리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관리하기에 장래까지 제가 책임져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분들은 손성식 목사님보다 뒤떨어진다고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사실 글을 쓰면서도 같은 손씨 성을 가지신 손무성 목사님께서 어떤 마음이 가질 지에 대해서 걱정조차 안했습니다. 손무성 목사님도 저하고 같은 생각으로 손성식 목사님을 장하고 칭찬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손목사님!)
성령께서 아마 분명히 참된 성도를 수시로 그런 모습으로 드러내실 것입니다.
##############################################################################################글들을 읽으며 여러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만.. 조부상 (Homepage) 2003-10-11 20:45:47, 조회 : 133, 추천 : 11
구원론에 대한 이 근호목사님의 정치한 말씀은새롭고 확고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먼저 감사함으로 문안 인사 드립니다.
그러나 구원이 영적생명의 탄생이라면성화(혹 거룩. 성결)은 자라가는 과정이 됩니다.영적 생명의 확장, 내지는 단단한 식물을 먹는장성한자가 되어가는 과정중에 있음을상대적으로 무시하시는 것은 아니신지요?
사도바울 역시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잡았다 함도 아니요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이런 많은 부분들이 단지 은혜아래 엎드리고 자아소멸이라는 한가지로 다 설명되어 질 수 있고그외의 다른 부분들은 일괄 무시되어져야 할 것처럼 매도되어 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간단히 제 견해를 남깁니다.
==========================================================================[re] 구원은 영적 생명의 탄생이 아닙니다. 이근호 2003-10-12 09:02:12, 조회 : 126, 추천 : 12
성도는 임산부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새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세계(육의 세계)에서의 생명이란 소유개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소유하게 되면 키울 수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의 세계에서의 생명이란 소유 당함의 개념입니다. 이것은 필히 우리를 죽이는 힘이 작용하는 겁니다.
자 생명이 무엇인지 성경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후 4:10-12)
그동안 우리 사이트 수많은 가짜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런 핑계를 댑니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기존 교회에서 배운대로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죽고 난 뒤에 천국가고 싶은 구원에 열망이 강렬해서 하나님이 주신다는 그 생명도 소유, 예 소유하고 싶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진리가 아니라 오직 그것 뿐이었습니다. 자기 잘 되면 그만이었습니다.
챙길 것은 확실하게 챙기면서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용이 아니라 자신의 거룩으로 인간을 죽이시는 분입니다.
사랑요?
그것을 요구할 자격이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이 원하는 자에게 사랑을 줍니다.
그렇게해서 사랑받은 자는 결코 생명에 대한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고백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이 내 안에 활동하므로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말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자라남'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구체적 체현(밖으로 그 생명이 드러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서 사도는 그것을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결코 자기 구원을 위해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의 능력말입니다.
==========================================================================글들을 읽으며 여러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만.. 조부상 2003/10/11 11 134 [re] 글들을 읽으며 여러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만.. 김상철 2003-10-12 01:28:36, 조회 : 138, 추천 : 11
매도 라뇨? 언제 매도 된적이라도 있었나요? 매도된다면 하늘에서 천사들이 기뻐 노래 할것입니다. 그렇게 시시한 인간이 아닙니다. 스스로 은혜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유의지를 고지곳대로 주장하는 것이 인간 아닌가요? 죄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인 하나 찾으면 기적입니다.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는 세례요한의 증거는 오늘날도 바로 우리에게서 무시 당합니다. 인간은 절대 자기소멸을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늘 부활의 탐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지요.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율법의 중요성(이진희 목사) 엄기욱 (Homepage) 2003-10-13 00:15:18, 조회 : 91, 추천 : 14
* 율법의 중요성(이진희 목사)
종교개혁자 말틴 루터는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재발견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믿음만을 강조하거나 율법에 대한 반대하지 않았다. 그는 율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해서 죄의 본성을 깨닫게 해야 한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에로 사람들을 인도할 것이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레는 "사랑이나 자비나 은혜를 선포하기 전에 항상 먼저 죄와 율법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설교한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에게 "율법에 대하여 90%를 설교하고 나머지 10%는 은혜에 대하여 설교하라"고 권고했다.
설교의 황제라 일컫는 찰스 스펄젼은 사람들은 의롭고 거룩한 율법 앞에서 두려워 떨기 전에는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죤 위클리프는 우리가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은 하나님의 율법을 설교하는 것이라고 했다.
*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신약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1) 율법을 단지 귀로 듣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가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이다(롬 2:23). 2)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다(요일 2:3-4). 3)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면 기도의 응답이 없다(요일 3:22). 4) 우리가 율법을 지킬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요일 3:24). 5)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다(요일 5:2-3). 6) 성서적인 사랑은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요이 6). 7) 율법을 지키는 자들만이 생명의 나무를 소유하게 된다(계 22:14). 8)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이다(요일 2:4).
* 율법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만 유효하다?
율법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율법은 세례 요한의 때까지만 유용했다고 주장한다. 누가복음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눅 16:16).
그러나 이 말씀은 율법이 세례자 요한의 때까지만 유용했다고 하는 뜻이 아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세례자 요한의 때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주어진 것은 율법서와 예언서만이 있었고, 그 후에 복음이 선포되었다는 것이다. 복음을 듣기 이전까지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율법서와 예언서였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들이 정경화 되기 이전의 초대교회들은 율법과 예언서를 그들의 성경으로 인용하였다. 신약 성경에서의 "경"(성경)은 우리가 말하는 구약성서(율법서와 예언서)를 말한다. 신약성서에서도 구약성서를 상당히 인용하고 있다. 구약의 율법이 세례자 요한의 때까지만 유효했다고 한다면, 왜 초대교회에서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계속하여 구약을 사용하고 인용하였겠는가?
* 우리들은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행함이나 선행, 공로나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구원론의 핵심이다. 그러나 구약은 행함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으나,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흔히들 구약은 율법 시대였고 신약은 은혜의 시대라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잘못된 것이다. 바울이 최초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주창한 것은 아니다.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는가? 구약을 통해서이다. 바울이 그 예로 누구를 제시하는가? 신약의 인물이 아니라 구약의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 사람이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원리는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적용되어진 원리이다. 신약 시대에 와서 비로소 적용되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믿음의 장이라고 불리우는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 대표적인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제시되어진 인물들은 모두 구약 시대의 인물들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는 말씀은 바울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박국 예언자의 선언이었다(합 2:4; 참조 갈 3:1).
바울은 믿음을 통한 구원을 구약을 통해 인증하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받도록 하였으나, 신약의 시대에 들어서 믿음을 통하여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면 구약 시대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은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다.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아벨, 에녹, 노아, 이삭, 야곱, 모세, 입다, 다윗, 사무엘등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로 제시되어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율법을 철저하게 준행한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보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아브라함은 율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였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 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 아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율법을 안 지켰는가? 아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페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노라"(롬 3:31).
* 구약(옛 언약) 시대는 율법의 시대였음으로 율법을 지켜야 했으나, 신약 시대(새 언약)는 은혜의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이지 않아도 된다? 흔히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복음으로 대조한다. 구약 시대에는 율법을 지켜야 했으나 "새 언약"의 시대에 살고있는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새 언약"이 율법과는 무관한 것인가? 구약은 새 언약에 대하여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임이라"(렘 31:33). 새 언약 시대에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내(하나님의) 법"(my Torah)을 새긴다. 첫 언약은 돌판에 새겨졌으나, 새 언약은 마음판에 새겨질 것이라는 것이다. 새 언약의 백성이 된 기독교인들은 그 마음 속에 "내(하나님의) 법"을 새기고 있는 사람들이다. 새 언약의 백성이라면, 즉 마음 속에 하나님의 법(계명, 율법, 토라)을 새겨져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법을 지키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더욱 훌륭한 직무를 맡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더 좋은 약속을 바탕으로 해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재자이시기 때문입니다"(히 8:6). 새 언약(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은 "더 좋은 약속을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세워지다(enacted, established)"로 번역된 단어는 nenomothetetai로서 nomos(계명, 율법)와 tithemi(위치시키다)의 합성어로, "법을 제정하다"(legislate) "법제화하다, 제정하다(enact)"는 의미이다. 곧 법으로 세우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서에서 nomos는 14회 나타나는데, 모두 토라(계명, 율법)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8:6에서는 예외적으로 다르게 번역된 것을 보게 된다. 사실상 이 단어는 이곳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 히브리서 7:11에서 사용되었는데, 거기에서는 "율법으로 받다"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구절을 유대인을 위한 신약성서에서는 이렇게 옮겼다. "왜냐하면 이 언약은 더 좋은 약속에 근거해서 토라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For this covenant has been given as Torah on the basis of better promises.) 즉 새 언약은 토라(계명, 율법)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새 언약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새 언약에 대한 새로운 빛을 던져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에스겔서는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새로운 심령이 주어지고 새로운 영이 부어질 것이라고 한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 .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새 언약의 백성들에게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새언약의 백성된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새언약의 백성이 되었음으로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 오해가 편견을 낳는 구절들 1) "그는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엡 2:14-15).
표준 새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겼다. "그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을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개역성서에서는 예수께서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신 것으로 되어 있으나, 표준 새번역에서는 원수된 것(유대인과 이방인 사이)과 그리고 율법을 폐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번역자들에게 난해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과연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율법을 폐하셨느냐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현재의 번역의 문제는 율법을 페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의 선언이나 율법에 대한 바울의 기본 사상과는 상반된다는데 있다.
영어 번역 성경들도 우리말 번역 성경과 같이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을 폐하셨다고 번역을 하고 있다. Living Bible은, 유대인에게 호의적이고 이방인들에게는 적대적인 유대 법이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분노와 적대감정을 갖게 했으나, 예수께서는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그러한 적대감을 없이 하셨으며, 예수께서 모든 유대 법 체계를 무효화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풀어 옮겼다.
James Scott Trimm은 Peshita Aramic New Testament를 영어로 번역하면서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겼다. "By his flesh and also the Law, because of commandments in its mandates, enmity is abolished."
예수의 죽으심과 율법을 통해 적대감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하는 이 번역은 전통적인 번역과는 상당히 다르다. James는 전통적으로 능동태로 옮겨온 "없이하다"(abolish)는 단어를 수동태(is abolished)로 옮길 수 있다는데 착안을 하였다. 이 단어를 수동태로 볼 때, 주어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 형태가 와야 한다. 즉 "원수된 것"(적대감)과 율법이 주어가 아니라 "원수된 것"이 주어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단어는 "그의 몸"과 함께 연결시켜 이해를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이 구절의 구문을 이해할 때, "그의 죽으심과 율법을 통해 원수된 것이 없어지게 되었다"고 옮길 수 있으며, 이러한 번역은 예수나 바울의 율법관과 일치한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 3:13)
여기에서 "율법의 저주"는 율법 그 자체가 저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에 선포되어진 저주"를 뜻한다. 율법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 자에게 저주를 선포하고 있는데,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는 결코 율법(토라)의 체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하여 주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율법은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다 신령하다"(롬 7:12). 이러한 율법의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저주가 주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구절의 컨텍스트로 미루어 볼 때, 율법의 저주는 율법을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또는 이른바 율법주의적(legalistic)으로 지키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식으로 율법을 대하는 것은 그 자체가 율법에 대한 불순종인 것이기 때문에(합 2:4) 그들에게는 저주가 주어진다.
3)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갈 3:10).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갈 4:5)
율법 행위"(erga nomou, works of the Law)라는 용어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10여회 나타나고 있다. 흔히 이 용어를 기독교에서는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acts of obedience to the Torah)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거룩하고 신령하고 선하고 의로운" 율법을 준수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유대인을 위한 신약성서에서는 이를 "토라의 계명들을 율법주의적으로 준수하는 것"으로 옮겼다. 이렇게 옮긴 이유를 Stern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용어는 바울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소위 "율법주의적"(legalistic)이라는 헬라어가 없었다(C. E. B. Cranfield). 그래서 바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적당한 용어가 없어 분명하게 밝히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지금 여기에서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관해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오용 또는 율법에 대한 오해를 경고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율법을 믿음 가운데 진실함으로 지키지 아니하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이지 율법을 행하는 자들에게 저주가 주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같은 맥락에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토라를 율법주의(legalism)으로 변질시키는 체계아래 속해있는 자들"(in subjection to the system that results fromperverting Torah into legalism)로 옮기고 있다.
* 오늘날 적용되어질 수 있는 율법은 얼마나 될까?
토라에는 613개의 계명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이 계명을 다 지키고 있는가? 아니다. A.D. 75년 제2차 성전이 무너진 후, 성전과 관련된 제의에 관한 규정은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유대학자 Chafetz Chayim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오늘날 유대인들이 지킬 수 있는 율법 규정들은 긍정적인 계명 77개와 부정적인 계명 194개로 모두 271개가 된다고 한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계명은 몇 가지나 될까? Solomon Schonfeld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유대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규정보다 103개가 적은 168개(긍정적인 계명 33개, 부정적인 계명 135개)로 밝혀졌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더 이상 적용할 수 없는 규정들을 통해서도 그 규정들이 주어진 이유와 정신을 배워야 할 것이다.
==========================================================================[re] 율법은 참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이근호 2003-10-13 08:05:33, 조회 : 111, 추천 : 11
율법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퍼질 수 있는 매개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로마서 5:20)
율법이 없었으면
모든 인간이 왜 꼭 죽어야 하는지 이유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율법이 없었으면, 인간들이 아직도 자신들이 심판과 저주와 무관한 중립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율법이 없었으면, 인간들은 자신이 신에게 올리는 예배와 찬양과 기도와 전도와 헌금이 마치 죄가 아니라 영광이 되는 것처럼 오해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율법이 없었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양심껏 한 행위와 신앙적인 행위가 마치 의가 되는 줄로 알고 오해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는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이로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이 얼마나 근본적으로 악마에게 매인 자들이미 하나님과 원수관계에 놓인 가가 밝혀집니다.
율법이 있으므로서
사람들은 본성상 율법과 십자가, 둘 중의 하나의 편으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4:14장에서 '두 언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언약 사이에는 영원히 갈라섬이 성립됩니다.
율법이 없었으면, 아브라함의 의가 결코 '율법과 무관한 예수님의 공로'에 의한 것인지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갈 3:8)
율법이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나온 예수님의 행위에서 나온 의와,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의가 일치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치 않았을 것입니다. (고후 5:21)
왜냐하면 십자가의 능력은 날마다 성도를 죽이기 때문입니다.(고후 4:10-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없었으면, 인간들이 왜 그리스도의 의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지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가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율법이 없었으면 인간을 죄 안에 가둘 수 있는 수단이 없었을 것입니다.(갈 3:23)
율법이 없었으면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폐기하시는지, (히 10:9) 왜 율법을 마치려 하시는지,(롬 10:4) 왜 율법의 완성이 인간의 육신으로 불가능하고 오로지 예수님의 육신(롬 8:4)으로만 가능한지 모르게 됩니다.
율법이 없었으면 왜 예수 믿는 자만이 의인이 되고 그렇지 않고 왜 행함을 더 추가하려는 자들은 자빠지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서 9:33)
그리고 왜 그동안 의가 율법을 통해서 달성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주어지는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율법이 없었으면, 왜 부활의 권능과 부활의 영이 율법과 무관한 새 피조물을 출현케 하는지 모를 것입니다.(고전 15:57)
율법이 없었으면, 왜 율법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끊어질 자인지를 모를 것입니다.(갈 5;4)
율법이 없었으면, 아직도 '율법의 정신 계승'을 운운하는 자들이 율법을 다 지켜야 될 의무 아래 놓인 저주받을 대상인 것을 모르게 될 것입니다. (갈 5:3)
율법이 없었으면, 예수님 사랑의 위대성과 능력을 모르는 자들이 왜 지옥 가는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모든 율법을 이룬 그 상태 안에 놓인 자이기 때문입니다.(롬 13:10)
율법이 없었으면, 왜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이 어리석은 자가 되는지 분명치 않았을 것입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면 예수님께서 헛되이 죽으셨도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리스도깨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를 꾀더냐"( 갈 2:21, 3:1)
이로서 율법은 자유케 하는 율법입니다. 즉 자유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율법입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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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