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핵심과 주변 VS 아예 소설을 쓰세요] 2003-10-10
성경에도 핵심과 주변이 있습니다 김병구 2003-10-10 23:00:27, 조회 : 100, 추천 : 10
성경에도 분명히 핵심과 주변이 있습니다
성경이 왜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죄악과 죄성으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길이 계시되어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과 방법과 길의 구체적인 실현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성 육신 하시어 세상에 오시어33년의 생애, 특히 3년의 공 생애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을 마음과 몸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모범을 보이시는 가운데 수 많은 기적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인 것을 증거하실 뿐만 아니라,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과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거듭나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 시켜야 한다는 것을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의 자격으로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세상과 우리들의 죄를 지시고 대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이르게 하는 구속 사역 완성하시었습니다.
그분은 산상 수훈 중에서, 주여 주여 부르는 자 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나며 거듭난 자는 반드시 성화의 길을 걸어 소금과 빛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이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진리의 핵심인 이 산상수훈을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얼마나 귀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산상수훈을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사역을 설명하고 해설하는 사도바울의 로마서만큼 알고, 귀중하게 생각하고 묵상합니까?
한국의 지성인 크리스천들이, 그리고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묵상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데에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묵상과 설교와 가르치는 데 드리는 시간과 열심의 절반이라도 드렸는지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의 지성인 크리스천들이, 그리고 목사님과 장로님들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묵상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데에,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묵상과 설교와 가르치는 데에 드리는 시간과 열심의 절반이라고 드렸다면, 그리고 드리고 있다면, 한국의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돈 사랑에 빠져서 지금 우리들의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영적 간음을 범하지는 않고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도 분명히 핵심과 주변이 있습니다.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그분의 삶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모두 우리의 구속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부속적인 주변입니다.
여러분, 매일같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친히 예수의 제자인 우리들에게 주신 산상보훈을 매일같이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구원과 한국교회의 개혁과 한국 사회의 개혁을 이루어 가십시다. ==========================================================================[re] 아에 새 소설을 쓰세요. 제2의 신약성경이라고 이근호 2003-10-11 00:31:12, 조회 : 97, 추천 : 11
산상설교만 다 지키면 의인이 되는데 무엇 때문에 십자가의 속죄의 피기 필요하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참 쓸데없는 일이 하셨네요?
십자가 믿기+ 산상설교 지키기=구원 이라면,
예수님께서 오시자 마자 먼저 십자가에 피부터 흘리시고 그 다음에 부활하신 몸으로 산 위에 올라 앉으셔서 빛과 소금이 되어라 외쳐서 조금이라고 산상설교대로 못 살게 되는 자에게는 저주하시는 절차를 밟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 나를 보고 주여 주여 한다고? 이놈들아 이 산상설교 숙제 다 했냐? 그 숙제를 다 하고 난 뒤에, 숙제 검사를 통과한 자에게만 보너스로 십자가를 사랑을 추가해서 주겠다."고 하시면 될터인데 말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를 같이 달린 강도는 산상설교 가운데 몇 %를 지킨 겁니까? 혹시 그 강도는, 뻔뻔하게도 그냥 옆에 계신 예수님보고, "주여 주여"한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이 헌금 할 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했나요?
성령받은 초대 교회에서 오른 눈이 범죄한 자들에게 대해서 쇠창살로 오른 눈을 현장에서 쏙 빼버렸습니까?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을 회개했다고해서 그것이 처음부터 마음 속으로 간음을 안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에 인정받는다고 한다면 마음 속으로 간음하고 또 회개하고, 또 마음 속으로 간음하고 또 회개하면 되겠네요?
만약에 인정이 안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주여 주여"만 한 사람에 해당되기에 지옥가겠네요?
귀하께서 무책임하게 성질나는대로 글을 쓰시는 분이 아니라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꼭 답변을 해주실 입장에 있습니다.
==========================================================================[re] 성경에도 핵심과 주변이 있습니다 손무성 2003-10-11 10:49:51, 조회 : 89, 추천 : 11
김병구님!현재까지 김병구님께서 알고 있는 수준은 현재 한국교회 장로님들의 수준이고 아주 수준 높다는 목사님들의 수준입니다. 한국 교회가 병들었다 하며 걱정하며 혀를 끌끌 차는 분들의 수준입니다.
님께서 이곳 crossvillage에 글을 남기시면서 자신의 글이 먹혀 들지 않고 반박하는 글들을 대하면서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나는 많은 나이를 먹기까지 열심히 예수님을 잘믿고 있는데... 이 무지한 crossvillage에 들린 사람들과 목사들이 무지하고 무식하고 안일에 빠져 나를 핍박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님께서 crossvillage에서 님의 글을 읽고 반박하고 있는 분들이 님에게 핍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님께서는 이렇게 이해 하고 계십니다."그분(예수님)은 산상 수훈 중에서, 주여 주여 부르는 자 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성령으로 거듭나며 거듭난 자는 반드시 성화의 길을 걸어 소금과 빛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고로 로이드 존스의 산상설교를 읽어 주십시오.)
산상설교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더욱 강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하나님께 영광 드려 보겠다는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의도하는 바를 더 강화 하기 위해 있는 것이 산상설교라는 것입니다.율법에서 '살인 하지 말라'에 대해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하거나 욕을 하는 자는 이미 살인했다'라고 한 것과, '간음하지 말라' 에 대해 '마음에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이미 간음 하였다' 라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7장 산상설교를 마치고 8장에서 문둥병 고치는 사건이 시작되는 이유는 율법을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는 인간에게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의 일하신 결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의 원 줄기요 성도는 그의 가지입니다. 그러면 그 줄기에 붙은 가지가 무엇을 만들어 내려고 책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줄기에서 보내 주는 것이 있었다고 증거할 뿐입니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분이 몸과 연합되어 있는데 그 머리의 지시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하는 그 자체가 비성도가 가지는 태도요, 몸이 머리가 원하는 것이 없으면 그는 머리와 분리 된 자이지 붙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성도가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증거하지도 않고 예수님의 심정을 싫어하며, 예수님에게서 받은 것이 없으니 머리 따로 몸따로 움직일 뿐이었습니다. 성도 아닌 것을 왜 자꾸 성도로 인정하려 들려 합니까? 이것이 성화를 부추기는 원인인 것입니다.이것은 교육의 문제가 아니고, 머리와 몸과의 분리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다시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가 책임져서 지켜내야 하는 성화의 과정을 위해 주어진 것일까요?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율법을 받아 외쳤던 것과 똑같이 산상설교에서 더 강화된 율법을 제시하시며 인간이 하나님의 법아래서 죄인임이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강화된 율법의 기준에 그 어느 누구도 책임 질 수 없기에 예수님께서 이 강화된 율법의 전부를 다 지키는 분이 되셨음을 믿는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 때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행위가 있다면 그는 자기가 책임져서 그렇게 했다가 아니라, 원 줄기가 이룬 것이 무엇인가를 증거하는 자로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어떻게 하렵니까? 그래도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돌려 보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산상설교에서 말하는 것을 다 행하시다가 하나라도 어기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하나라도 어기면 다 범한 것이 된다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말씀도 참고해 주십시오."마태복음5장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re] 성경에도 핵심과 주변이 있습니다 김재국 2003-10-11 18:57:37, 조회 : 98, 추천 : 12
십자가마을 주인님들은 다른마을 사람들에게 상당한 우월감을 갖고 계시군요.수준이 맞지 않으니 아예 상대조차되지 않는다. 너희들은 지옥갈 인생들이다.행위라는 말만 꺼내봐라. 당장 십자가로 박살을 내버릴꺼야라는 마음가짐입니다.물론 인생은 박살날 처지에 있음은 자명합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지옥갈 인생들에게 사랑을 베풀지요.이미 천국에 앉아서 지옥갈 인생들에게 욕설을 퍼붓는 마을 사람에게는....글쎄요.
그리고 (행위)에 대해서 극단적인 거부감을 표현하시는군요.다른 성도들의 모든 행위를 (자기의)를 내세우는 잘난 체라고, 심지어는 창조주에 대한 도전이라고정죄하면서, 지옥에 갈 자들이라고 저주를 퍼붓습니다.선한 사마리아인을 보고도 마찬가지로 주장하시겠지요?예수님은 (너희들도 가서 행하라)라고 하셨는데요.아마 (당신은 행함으로 구원받기 위해 환장한 사람이다.마귀가 환영할 것이다)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전달받으면 세상에 사랑을 퍼트리고마음속에 저주가 가득차면 타인에게 저주를 퍼트립니다.자기의를 자랑하고 구원에 환장해서 행위하려는 것이 아니고그냥 우러나와서 받은 은혜를 전달하는 과정일 뿐입니다.그런 전달과정을 포착해서 사살하는 행위가 십자가마을의 주특기인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십자가 마을이 진리를 선포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타인의 행위에 대한 무차별적 인신공격은 빼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권적 선택에 의해 은혜와 구원을 주신다면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을까요?솔로몬이 우상숭배한 것도 하나님이 조종한 것인가요?솔로몬이 다위처럼 하나님의 법을 행했으면 분단은 없었을 텐데요.하나님도 간섭할 수없는 자유의지(여기서 무척 싫어하는,그러나 하나님이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며그 고육지책이 인간일 수 있는 존재이유인)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서솔로몬은 책임을 면할 수 없었지요.
마리아도 하나님의 일방적 조종에 의해서 예수님을 잉태했나요?마리아도 솔로몬이나 사울처럼 은혜를 실천하지 않을 선택권이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선택한 것이 하나님의 조종에 의하지 않은 것처럼육적 길을 선택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자신의 책임이 아닐까요?
십자가는 인간의 잘못된 선택을 보상하기 위한 것이지하나님의 일방적 행위를 보상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re] 귀하의 질문을 다윗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이근호 2003-10-12 08:50:58, 조회 : 100, 추천 : 11
마리아님, 다윗님, 솔로몬, 사도 바울님, 당신은 당신의 자유의지를 사용햇고 선택적 행함으로 십자가도 믿고 그래서 구원받았지요? 그지요? 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행함이었다고요? 그렇다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의 세계를 모르고 있군요. 오로지 경건치 못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습니다"(로마서 4:5/ 11:6)
그리고
성경을 볼 때는 성경 말씀이 직접 본인의 마음을 통해서 다시 나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서 "자비를 베풀라"라고 했으면,
답변이, "예, 제가 열심히 자비를 베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자비를 이웃에게 베풀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라는 식의 자기 처지가 나와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그 명령이 충실히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답변되어야 성도입니다.
"예 예수님의 그 명령은 참으로 지당하고 바른 명령이십니다. 저는 그 말씀 앞에 전적으로 죄인일 수 밖에 없군요"라고 말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쉬지말고 기도하라" 혹은 "돈을 사랑치 말라"고 명령이 떨어졌으면,
반응이나 답변이 "예,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인 줄 이제 알았습니다. 더이상 살려두지 않더라도 주님께서는 합당한 일을 저에게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야 바른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요즈음 무쩍 제가 기도 자주하는것 아시지. 많이 향상되었는 것 아시지요. 저도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돈에 대해서는 저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무척 노력합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면 약간이나마 돈에서 초월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모되겠습니다"라는 반응을 나타내는 자들은 가짜 신앙인들입니다.
왜 그렇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은 완벽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숨은 죄악 덩어리의 거대함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따라서 진짜 성도는 자기 행위와 최선의 노력을 자랑하거나 전시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는 자입니다.
==========================================================================[re] 귀하의 질문을 다윗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김재국 2003-10-12 23:15:44, 조회 : 78, 추천 : 14
마리아와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길을 선택했고솔로몬과 사울은 이세상 방법을 따라갔습니다.그들은 모두 은혜받음에 있어서는 동일할 것인데요.그들의 행동이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하나님의 주권적 간섭에 의해 차이가 났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인간의 마음은 하나님도 좌지우지 할 수 없습니다.(이부분에서 제가 창조주가 되려 한다고 오해하지 마세요)그리고 제가 문제 삼는 것은 그들의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구원에 관련하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믿음이 유일하지요.바로 이부분에서마리아와 다윗의 순종과솔로몬과 사울의 불순종이 대조됩니다. 행위가 문제되는 지점이 순종과 불순종의 행동의 차이로 나타납니다.하나님은 그들 4명의 마음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으십니다.이 하나님의 불간섭이 십자가의 대속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구약은 인간이 악질임을 증거하고, 십자가를 통과하여 인간은 새로운 악질로 거듭났지요.인간이 악질일 수 있는 근거는 자유의지에 있습니다.십자가 마을은 자유의지를 빼버린 나무토막, 하나님의 로보트로 인간을 규정합니다.그래서 인간은 피조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생명이 없는 물건 취급을 합니다.왜 피조된 인격체, 하나님의 형상,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귀한 존재를 외면 합니까?하나님의 상대로서의 유일한 인격체가 인간이기 때문에 기도도 하지요.하나님으로부터의 일방성만 있으면 관계가 형성이 안되지요.인격은 선택의 자율성과 책임을 갖고 창조적으로 문화를 이루어 나갑니다.문화명령에 의해 성도는 청지기적 사명을 갖고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야 합니다.이것은 인본주의적 바탕하에 인간의 힘만으로 창조주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는 사상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성경에서 육적계보에 반대되는 영적계보의 사람들에 합류하는 형태로서타락한 세상를 회복하는 흔적으로 성도의 삶은 나타나야합니다.
구원에 개입할 수없는 인간 행위를 은혜에 수반되는 전달과정으로의 행위로 확대하여인간의 인격과 순종을 도말하는 곳이 십자가 마을은 아니겠지요.하나님이 인간구원용이 아니듯이 십자가가 인간도말용이 아니기를 바랍니다.사도바울의 날마다 죽음,예수님의 죽음,성도의 죽음은 지옥으로 가는 죽음이 아니고부활을 향한 산제사입니다.
여기서 주장하는 신학에 의하면 자기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행위조차공로주의나 자기자랑으로 인식하더군요.행동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심해서 이곳 사람들은 면벽수도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re] 자유의지와 의지와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근호 2003-10-13 07:20:45, 조회 : 89, 추천 : 12
왜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고 꼭 자유의지라는 말을 사용하십니까?
그리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범주가 어디까지 일 때를 자유의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설마 인간의 선택의 범위가 무한정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이 선택해서 행동할 수 있는 폭과 범위와 항목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상황이 분명하다면 '의지' 앞에 '자유'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계셨습니까?
인간이 천리안을 갖고 있습니까?
인간이 세상사를 다 알고 있습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이 누군지를 제대로 압니까? 당신의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아십니까?
인간의 결심과 각오와 결단이 하루에서 수백번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환경따라, 처지따라 수시로 자기 변명과 자기 수호에 나선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간이 욕망의 화신인 것을 아신다면 그래도 자유의지에 대해서 강변하실렵니까?
귀하는 왜 천주교로 가지 않으십니까? 귀하의 생각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천주교에서 왜 연옥설이 꼭 들어가야 되는 이유를 아십니까?
왜 자유주의자들이 교회를 버리고 예수님을 버리고 인권운동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아십니까?
왜 자유주의자들이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이유를 아십니까?
다윗에게 물어보세요. 자신을 비롯해서 인간들이 도대체 어디서 만들어지느냐고요. 오직 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상한 심령'일 뿐임을 알았습니다. (시편 51편)
귀하는 인간의 행동을 탐구하여 신과 관계를 짓기 위해 성경을 보십니까 아니면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 위해 성경을 보십니까?
사람이 오래 살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더어둑 죄가 증가한다는 사실을 진정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거룩한 하나님깨서 인간에게 완벽을 원하고 있으면 만약 완벽치 않으면 가차없이 저주해 버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온갖' 거룩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놓인 자인 것을 아십니까? (갈라디아서 3:10)
돌맹이나 로벗이나 해나 별이나 책상이나 걸상이나 나무나 채소는 적어도 악마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논리적으로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하고 메시야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어떠합니까?
스스로 '자기 의'를 포기할 수 있는 위인이 있다고 보십니까? 없습니다.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은 막달라 마리아 마음 속을 귀하는 아십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자유의지에 근거해서 자기 행함을 유지했습니까?
그녀는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사랑 뿐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밝혀주십니다.
"용서받음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귀하는 예수님의 용서하심 보다 여전히 자신의 행함을 크게 생각하며 사는 자니 귀하야말로 진짜배기 불교신자는 입니다.
이 땅의 많은 절간처럼(교회들) 귀하도 이 땅에 민중들의 탐욕을 정당시하는 제단들을 세우기 위해 힘껏 노력하시고 그리고 예수님의 피만을 사랑하는 자들을 마음껏 핍박 하시기 바랍니다.
"너는 네 할 일을 하여라. 저의 입장에서 볼 때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하였으니라."(예수님께서 가롯 유다보고 하시는 말씀) ==========================================================================[re] 김병구님복음을 다시정리하세요. 이상규 2003-10-11 01:10:54, 조회 : 108, 추천 : 11
저도 은혜와 행함사이에서 수십년을 헤매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기성 교회목사님들이 로마서를 바울의 의도대로 제대로가르쳤다면 님처럼 잘못정리해서이해한 복음을 계속해서 게시판에 올리지 않을텐데......
개인 의견인데요지금 알고있는 성경지식은 무시(?)하시고 이 사이트에있는로마서 강해나 신학과 철학란 또는 이 목사님 책등을 처음부터 다시 복음을 배운다는 자세로읽으시면서 궁금하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들을 질문 답변란에 올리셔서 복음을 다시잘 정리 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 이해없는(죄 은혜) 산상 보훈은 .
산상보훈 = 불교의 경전= 유교의 논어=도교의 도덕경= 유대인의 지혜인 탈무드 =회교의코란 =명심보감=국민윤리 교과서=지옥입니다.
산상보훈을 온전히 이루신분은 십자가에 피흘려죽으신 에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re] 그분은 사회관도 잘못되었습니다. 이근호 2003-10-11 10:33:02, 조회 : 100, 추천 : 14
>>새로운 정보 테크놀리지 및 케뮤니케이션 테크놀리지는 인간과 지식의 관계도 철저히 변화시킵니다. 기존의 사회란 개인과 대비되는 관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각자가 갖는 '사회성'으로 짜여진 관계망만 있을 뿐입니다. 즉 자기 고유의 사회성의 연결고리로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관념 자체를 재생산 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습니다. 기업, 제도, 국가, 종교, 정당, 과학 단체, 공동체 같은 것은 하나의 사회를 구성해야만 한다는 동일한 의식 속에서 관념 자체를 변화시킬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시계의 태엽 장치는 인간의 기계적 본질을 강조했고 그것이 사회를 묶는 관념이 되었습니다. 증기 엔진의 등장은 개인과 사회를 한데 묶어야 한다는 힘의 논리로서 관념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컴퓨터로 인해 인터넷의 확장은 소통(커뮤니케이션)의 빠르기와 보다 많은 정보 용량을 처리하기 위해서 인간을 정보 처리기로 전락시켰습니다. 지식을 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빠르기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새 조직를 쉴새없이 분출시켰다가 소멸시켜야만 했습니다.( 정보의 효율성에 방해되면 가차없이 도태되어야 한다.)예를 들면, PC방 열렸다가 쉽게 폐업하고 노래방으로 전업했다가 다시 쉽게 다른 업종으로 변경해야 하는 것은 소비자들의 정보 흐름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며, 소비자가 요구하는 새 정보 서비스에 도움되지 아니하면 새로운 조직에 가담할 수 없고, 그 새 조직에 편승하지 아니하면 돈이 들어오지 않아 생존에 위협받게 됩니다.
그런데 인터넷의 특징은 어디서나 존재하며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 서로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는 자기 만이 고유의 시선(omnivision)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자기 고유의 시선이 용납되지 않고 일방적인 그 사회를 주는 정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텔레비전시대였다. 이것을 '원격 시각 television'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즈음 자기만의 텔레비전을 타인에게 전송할 수 있습니다. 카메라가 달린 휴대폰이나 인터넷 사이트가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상호공존화가 가능해지면서 전에는 개인들이 '단독주체자'의 의식으로 살았지만 요즈음 '집단주체자'의 의식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정보의 집단화에 가입되지 않는 자는 그 자체로 시체로 간주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어디에 존재합니까?"에 대해 다변이 모호해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시체놀이'는 그냥 육신을 가만히 땅이 눕히면 되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시체놀이'는 인터넷 세계에 안들어오면 된다. 그러면 잠정적 '사망한 자'가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개인 대 사회의 시대에는, 사회 안에 개인이 부분으로서만 존재가 허용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말 안듣는 청년회는 당회로부터 예산이 삭감됩니다. 가정에서 말 안듣는 자식은 이웃에게 후레자식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개인은 고정된 그 사회의 관념(이데오르기)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 그 자체를 관념으로 여기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눈으로 그 집단 전체를 재이해하고 재인식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 것입니다. 교회에서 당회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청년들이 따로 나와서 교회를 만들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식이 볼 때에 부모가 자신의 정보 채집에 방해가 된다고 여기면 따로 나와서 동거생활에 들어가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관념의 재생산을 시도하면서 그 안에서 살게 됩니다.
이것을 가지고 개인의 '은유화된 존재성' 이라고 말합니다. 즉 개인이란 사회가 그려낸 은유화된 한 흔적이 되고, 개인에 있어 사회란 고정된 사회가 아니라 그저 개인이 일시적으로 느껴보는 사회성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정보의 흐름에 개입하지 않고서는 시체 취급받는 사회에서 개인이란 분주한 교차로를 달리고 있는 하나의 승용차에 불과합니다. 물론 그 승용차 안에는 전 세계의 인터넷망에 접속할 수 있는 정보처리 장치를 달고 나름대로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독자적인 해석자가 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은 이미 과거의 산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옳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기준도 새 정보의 개입에 의한 일시적 판단에 머물게 될 분입니다.
정보를 잃은 자는 죽은 자요, 정보를 얻는 자만이 의사소통(커니뮤케이션)의 개입하여 산 자라고 인정받는 세계에서 아직도 교회 개혁을 부르짖는다 말입니까?
누구 좋아라고?
정보를 잃어버려 죽은 자로 전락된 노인네들을 뒤늦게 존재 가치를 찾아주기 위해서 교회 개혁입니까?
결국 지난 세대의 권익을 유지하기 위한 치사한 기득권 싸움에 불과합니다.
젊은 세대와의 한 판 승부.
즉 세상이란 이처럼 자기 만을 위한 가상 게임판에 불과합니다.
스타크레프트의 세계! 영토 싸움의 세계!
그래서 땅의 세계에 미련두는 자는 지옥가는 겁니다. (골로새서 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