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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변종길교수-율법과 복음의 관계] 2003-09-10묻고답하기-

변종길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의 논문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율법 (원제: 율법과 복음의 관계)' 보시고 평가를 해 보시죠 예병환 2003-09-10 20:01:53, 조회 : 154, 추천 : 10
[교회와 교육] 146호(98년 11월), pp.22-26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율법(원제: 율법과 복음의 관계) 변 종 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I. 여러 견해들
율법과 복음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고대 교회의 말시온은 율법과 복음을 날카롭게 대립적으로 이해하여 구약 성경을 비롯하여 율법적인 것은 성경에서 다 삭제하고 말았다. 종교개혁시대에 루터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인 것으로 보았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며 절망하게 만들며, 율법은 우리를 정죄하며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한다고 보았다.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은 폐지되었으며, 신약 시대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법 곧 사랑만이 있을 따름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에 의하면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을 의식할 필요도 없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킬 필요도 없으며, 단지 사랑의 원리를 따라 행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으며 율법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구약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을 신앙의 진수로 파악하고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안식일 계명을 구약에 기록된 그대로 지키기 위해 주일에는 밥도 짓지 아니하고 차도 타지 아니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이런 것을 통해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과거의 엄격한 전통과 현재의 여러 혼란한 풍조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곧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마 5:17). 따라서 우리는 율법과 예수님의 관계가 '폐함'의 관계가 아니라 '완전케 함'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의 관계도 '대립'이나 '폐지'의 관계가 아니라 '완성'의 관계임을 말해 준다.
II. 완성의 의미
그러면 복음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셨다고 할 때 이것은 구약의 율법을 그대로 두고서 거기다 무엇을 덧붙여서 완성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의 '보충'의 의미밖에 안 될 것이다. 또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기록된 내용들을 그저 수동적으로 이루셨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기계처럼 지시되어 있는 대로 '실행'하는 것밖에 안 된다. 마치 컴퓨터 소프트웨어에 이미 '프로그램'되어 있는 것을 실행하듯이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신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주체가 되셔서 능동적으로, 주체적으로 율법을 이루셨다. 왜냐하면 율법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몸'이시기 때문이다(골 2:17). 따라서 예수님에 의해 율법의 의미가 충만히 드러나고 그 온전한 내용이 채워진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어떻게 이루셨을까?
III. 율법의 성취
예수님은 먼저 율법에서 자신에 대해 기록된 것들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태어나심과 애굽으로 피난 가심과 십자가에서 죽으심 등이 다 "주께서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마 1:22, 2:15, 4:14, 8:17, 12:17-21, 13:35, 21:4 등). 이처럼 예수님은 성경에 자기에 대해 기록된 대로 다 이루셨다. 또한 예수님은 율법의 계명들을 다 지켜 행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들을 다 이루셨다. 즉,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삶을 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충족시켜 드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정죄를 당하셨다. 그 이유는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롬 8:3). 곧 우리 인간이 육신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지 못하고 늘 정죄 아래 있으며 고통과 자주 가운데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의 정죄를 대신 당하게 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대신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요 19:30). 이것은 곧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통하여 구원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길이 열린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롬 10:4). 여기서 율법의 '마침'(telos)이란 율법의 폐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자기 의를 세우려고 율법의 계명들을 지킴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모든 노력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뜻이다.
IV. 율법의 원래 의미 회복
나아가서 예수님은 율법의 원래 의미를 충만히 드러내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의가 되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정죄하며 저주하는 기능으로서의 율법의 역할은 끝이 났지만, 이로써 율법의 모든 기능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난 후에도 율법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표준이 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굳게 세운다'고 말하였다(롬 3:31). 우리가 믿은 후에도 계속 남아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생활의 표준이 되는 율법'을 말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율법의 제 3 효용'이라고 부르는데, 개혁교회에서 강조하는 기능이다. 율법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토라'로서 그것은 원래 '가르침, 교훈'을 뜻하였다. 이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율법은 원래 우리의 생활의 안내자가 되고 길잡이가 되기 위해 주어진 선한 것이었다(롬 7:12). 문제는 우리가 죄에 빠져 이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도리어 율법의 정죄를 받아 저주와 멸망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된 우리에게는 율법이 다시금 원래의 선한 기능을 회복한다. 그래서 거듭난 신자의 생활을 인도하며 지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서는 '감사의 규칙'이라고 불렀다. 곧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노예처럼 두려워하며 굴종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루터파 교회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상당수가 정죄하는 율법의 기능, 곧 몽학선생적 기능(율법의 제 2 효용)만 강조하고 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은 등한시함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생활이 소홀히 되고 윤리가 약해지는 경향이 많은데, 이는 율법에 대한 치우친 이해로 말미암은 것이다.
V.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된 율법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모든 계명들이 문자 그대로 오늘날 우리들에게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은 유대교나 안식교에서 주장하는 것으로 사실상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율법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되고 만다. 바울은 이러한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다(갈 4:10,11). 나아가서 이러한 유대주의적 노력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갈 2:21). 따라서 우리는 구약의 모든 계명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안식일 계명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 안식일의 주인은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모든 삶을 그리스도를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신앙의 표현으로 안식일(주일)을 보내어야 한다. 두려움과 금지의 소극적인 안식일 개념에서 기쁨과 선행의 적극적인 안식일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신약적 안식일 개념에는 일상적인 상거래나 자기를 위한 시간 사용이나 세상 쾌락은 당연히 배제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은 온전한 헌신을 요구하고 있는 신약적 수준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최소한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구약적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으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최소한 구약 시대의 수준을 능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율법을 능가하며 율법을 참으로 율법 되게 한다. 전에는 억지로, 두려움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율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전에는 단지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외적 순종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율법의 '원래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그저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이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마음의 살인임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마 5:21-26).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도 단지 외적 간음뿐만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죄가 됨을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성결을 위해 노력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이며, '복음의 빛 아래서' 율법을 바라보는 것이다.
VI. 그리스도의 법
이러한 것은 곧 율법의 근본 정신인 '사랑'의 관점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2:37-40). 이는 곧 온 율법과 선지자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곧 우리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곧 이웃에게 사랑을 행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랑'은 각각의 계명들 전체를 포함하는 포괄적 개념이며, '각 계명들'은 그 사랑의 구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율법과 사랑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을 다른 관점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약 시대에 사는 우리가 율법을 대할 때에 그 핵심과 근본 정신은 사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의 구체적 실천은 율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율법의 각 계명들에 주목하여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 제사 드리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국가의 멸망으로 말미암아 신정국가와 관계된 시민법들은 이제 더 이상 시행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도덕법도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엡 6:1).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본 율법의 핵심은 사랑이다. 이런 점에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하신 계명을 야고보는 '최고한 법'이라고 불렀으며(약 2: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불렀다(갈 6:2). ♧
==========================================================================[re] 변종길교수는.... 구득영 2003-09-16 16:23:37, 조회 : 103, 추천 : 12
제가 직접 배은 적은 없지만, 제가 졸업하고 막 교수로 들어왔는데, 그분의 글을 몇번 보았는데, 신율법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그의 글에서.....
-----------------V. 그리스도 안에서 이해된 율법
...이런 점에서 복음은 율법을 능가하며 율법을 참으로 율법 되게 한다. 전에는 억지로, 두려움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율법을 이루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전에는 단지 율법의 '문자'에만 얽매여 외적 순종만으로 만족하려고 하였으나 이제는 율법의 '원래 의미'를 생각하고 그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전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 그저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생각을 가졌지만, 이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마음의 살인임을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마 5:21-26). 또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해서도 단지 외적 간음뿐만 아니라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도 죄가 됨을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마음의 성결을 위해 노력한다. 이는 곧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이해하는 것이며, '복음의 빛 아래서' 율법을 바라보는 것이다. ---------------------구약의 살인하지 말라의 의미를 이제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확대해석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우리는 죽어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노력해서 순종할 수 있는 차원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 아래서' 율법을 바라보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자기가 모친의 죄중에 태어났음을, 죄인의 괴수임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변종길 교수의 이런 율법관이 오늘 한국교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보시면 맞을 것 같습니다.
* 참 이번 매미바람에도 저는 살아있습니다. 예배당 지붕이 날아가긴 했어도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염려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re] 변종길교수(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의 논문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된 율법 (원제: 율법과 복음의 관계)' 보시고 평가를 해 보시죠 손무성 2003-09-16 18:10:51, 조회 : 102, 추천 : 13
예수님께서 어떤 자들과 싸웠는지를 아시면 됩니다.바리새인들과 서기관 율법사들과 싸웠습니다. 그들이 십계명을 잘 안지키고 불경건한 행동들을 했기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싸움의 대상은 율법을 이룰 수 없는 인간이 율법을 이룰 수 있다고 덤벼들었던 자들과 싸웠습니다.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1)망대를 세우던 자가 재정이 부족하여 뼈대만 짓게된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웃겠느냐? 처음부터 짓지를 말아야지...2)1만명의 군인을 거느린 임금과 2만명의 군인을 거느린 임금이 있었는데 싸움을 하면 인원수가 밀릴 것이 뻔한 것을 알면 화친하지 않겠느냐!
곧 오늘날 교회가 변종길 교수와 같은 수준에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를 이야기 하려덤벼든다 그래야 이단이라는 소리를 안듣는다는 것 때문이다.
바울은 분명이 말했다. '율법외의 한 의'가 등장했다고...곧 이말은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통해 전달된 율법이 성도에게 한 역활이 무엇이었던가? 를 보여 주려 했던 것이다."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롬11:30-31)
율법외의 한 의 되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에서 자유하기를 바란다. 변종길 교수의 수준에서 놀지 않기를 바란다.
##############################################################################################성령님과 함께 걷는 기쁘고 즐거운 성화의 길 김병구 2003-09-11 01:23:06, 조회 : 143, 추천 : 3
성령님과 함께 걷는 기쁘고 즐거운 성화의 길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의 탄성이 영적 생명으로 거듭난 신자가 성화의 삶을 시작하는 신호탄입니다. 그 무엇 보다도 그 무거운 죄 짐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룩하다 여김을 받게 되었으니 이 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잔재인 양심의 가책이라는 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쫓는 죄짓는 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지적한 데로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자유를 상실한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로서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치 소금 물을 마시는 것처럼 채울수록 목이 마르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끊임 없이 남을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며, 거짓을 꾸미는 추악한 삶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고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왕 노릇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에덴 동산에서의 타락 이래로 인간을 지배해온 사탄의 올무에 묶여 사탄의 뜻에 순종하며 지옥으로 행진을 하루도 쉬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으로 거듭난 새 영적 생명은 죄 밖에 지을 수 없는 자유 대신, 하나님 말씀과 성령의 인도에 순종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아직도 육신 속에 살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앞세운 사탄의 유혹 가운데 살지만, 그렇지만 이제는 그 사탄의 유혹에 빠지기 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기가 더 쉬운 영적 능력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원죄를 씻음 받아 거듭난 인간은 타락 이전의 에덴 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영적 상태를 회복하여 성령 하나님과 영적 교통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사탄의 유혹을 능히 물리쳐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거듭난 영적 새 생명도 성령님과 동행함 없이는 세상 사람과 똑 같은 타락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일에서부터 칭의 구원을 받기까지의 모든 구원의 역사가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던 것에 유념하면 성령님과의 동행함이 없이는 다시 세상에 속하는 사탄의 종 노릇을 할 수 있게 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에서 저희가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게 해주시라고 기도하시고, 또 제자들에게 주님이 승천하시면 성령을 보내줄 것이고 성령께서 보혜사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면, 성령님이 곧 하나님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말세에 성도들에게 진리를 깨우쳐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며 신자에게 성화의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순종의 자유와 사탄을 물리치는 능력을 주시는 성삼위의 한 분이심을 새삼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성령에 충만해지는 일에 수고하고 진력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에 충만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매일같이 말씀 묵상과 기도와 찬양에 열심하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신통한 능력이 있음을 저는 경험하고 삽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온 우주를 창조하심을 생각하면 성경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이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우리를 엄습할 때 성경을 펴십시다. 그 어느 구절을 묵상해도 우리는 성령님의 강력한 주장과 인도하심을 얻게 되며 사탄은 물러갑니다. 예배소서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매일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에 열심하는 삶이 바로 성화의 길을 걷은 신자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이 충만한 삶이며, 성령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며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의 삶을 닮아 거룩하게 되어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성화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일이므로 무겁고 힘든 일리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지고 가기 때문에 성화의 삶은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입니다.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신자는 그가 칭의 구원을 받는 순간에 외친“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를 매일 같이 외치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 불평이나 불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에 슬픔이 있을 수 있을까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남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는 마음에는 불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많은 물질, 세상의 명예, 세상적인 미인과 즐기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과 함께 성화의 길을 걷는 신자는 세상적 어려움에 봉착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극복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고난이 지금 이 시간 이 장소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최선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에서 의미를 찾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을 더욱 단련하여 정금처럼 순결한 영으로 만들기 위한 훈련이며, 때로는 징계인 것을 감사하며 받아드립니다.
다윗 왕은 성화의 삶을 살았던 하나님의 종이지만, 여러 번 넘어지고 실수 했습니다. 그는 낮잠을 자고 난 후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여 살인죄까지 지었습니다. 충성스런 군대들은 생명을 내놓고 적군과 싸우는데 군대의 총수인 다윗 왕은 낮잠을 즐겼음을 보아 그가 당시에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게을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게을렀던 다윗 왕은 육욕의 노예로 떨어져 살인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 왕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 한자라고 기뻐하신 것은 그가 곧 나단 선지의 질책 앞에 왕의 체면과 권위를 내 던지시고 회개하고, 베개가 썩을 만큼, 회개의 눈물을 흘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윗의 회개 기도인 시편 51편을 성화의 길을 가는 신자가 항상 드려야 할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성화의 길을 걷을수록 자기 자신이 더욱더 부족하고 보 잘 것 없는 존재임을 처절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가 성화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신자입니다.
저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만 있으면 이 세상도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칭의 구원을 얻은 신자가 말씀과 기도와 찬송으로 매일 성령에 충만하다면, 아직도 육신 속에서 꿈틀거리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꺾어 이기며, 우는 사자와 같이 신자를 삼키려 드는 사탄의 괴계와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성화의 길, 거룩한 삶의 길을 성령님과 함께 걸어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서서히 그의 성품이 변화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의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신자의 성품으로 자리 잡아가게 됩니다. 마침내 우리 구원의 동역자 이신 성령의 열매가 우리의 변화된 성품을 통하여 맺어지기 시작하며 그 열매가 매일같이 여물고 익어가서, 육신의 옷을 벗을 때, 신자는 영화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화의 길을 가는 신자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화의 길을 걷는 신자는 청지기의 삶을 살게 됩니다. 생명과 건강을 포함해서 재능 그리고 물질과 재산을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잘 관리하여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웃 사랑에 사용하라고 그 관리를 담당시킨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자는 십일조에서 끝일 것이 아니고 선한 방법으로 능력껏 벌어서 자기 생활비와 확대 재생산을 위한 투자를 제하고는 모두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의 선진국에서 기부가 성행하고 유산을 자신의 자녀가 아니라 교회나 사회에 받치는 것은 청지기의 삶의 본보기가 되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 구원의 길이기도 합니다.
저는 찬송가 427장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들의 공통된 고백이고 찬송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신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또는 자매님 곧 찬송가 427장을 불러보세요. 기쁘지요, 즐겁지요, 행복하시지요? 우리 모두 한 사람의 낙오자가 없이 성령님과 함께 기쁘고 즐거운 성화의 길을 육신의 장막을 떠날 때까지 걸어감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고 종국적인 구원을 얻도록 하십시다.
==========================================================================[re] 성도는 날이 갈수록 죄를 더 많이 알게 됨 이근호 2003-09-11 19:55:16, 조회 : 197, 추천 : 12
의란 인간의 죄가 병행해서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의를 위하여 성도는 날이 갈수록 더 죄가 밝혀지도록 조치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귀하께서는 날이 갈수록 죄를 더 적게 짓는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더욱 더 자기 죄를 더욱 더 깊이 있게 깨달았다는 말입니까?
==========================================================================[re] 성도는 날이 갈수록 죄를 더 많이 알게 됨 김병구 2003-09-12 00:54:42, 조회 : 170, 추천 : 11
주안에서 사랑하는 이근호 목사님,
답글을 다신 대상인 저의 글에 다음과 같은 부문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저의 생각으로는 목사님께서 바쁘신 가운데 그 대목을 읽지 않으셨거나 놓지신 것으로 훝어 본 것으로 이해됩니다.
목사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 저는 다윗의 회개 기도인 시편 51편을 성화의 길을 가는 신자가 항상 드려야 할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성화의 길을 걷을수록 자기 자신이 더욱더 부족하고 보 잘 것 없는 존재임을 처절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말씀과 기도 그리고 찬양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자가 성화의 삶을 살려고 애쓰는 신자입니다."
==========================================================================[re] 성도는 날이 갈수록 죄를 더 많이 알게 됨 이근호 2003-09-12 08:29:05, 조회 : 235, 추천 : 12
제가 놓친 것이 아닙니다.
시편 51편의 내용을 '성화'라고 하니 이차에 복음에 대한 내용 정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제가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겁니다.
시편의 내용은, 성도의 성화대목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실활동상을 말해주는 겁니다.
즉 시편 51편은 다른 시편 전부를 포함해서 모두 장치 오실 메시야의 활동 사항을 예언한 책입니다.
1. 먼저 찾아오시고2. 그 사람의 죄를 지적하시고3.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겸손을 위장한 자기 변명을 들어주시고 (흔히 이 대목을 성화라고 잘못 오해하고들 있습니다)4.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따로 죄사함의 제사함의 구조를 제시하시고5. 그 일 조차 메시야가 친히 하시는 차원에서 성령(성신)이 오시고6. 그렇게 해서 구원된 사람은 4번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증거하는 사람이 되는 이런 절차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이번에 있을 인천 강의의 주제를 [성경신학적으로 본 구원론]이라고 잡은 이유 이근호 2003-09-30 09:23:16, 조회 : 139, 추천 : 2
기존의 조직신학적인 구원론은, 구원받는 틀을 제시하므로서 누구든지 그 구원론에 유사하게 살게 되면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안심과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아, 나는 지금 이 구원론에 몇% 따라 붙었는가? 15%인가, 아니면 58%? 생업에 종사하다보니 좀 처졌군. 나중에 세상 일에 은퇴하고 난 뒤 75%까지 끌어올려야지"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이란, 인간의 구원의 노력과 무관하게 평소에 본인들이 살아가는 방식 그대로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 보시기에 성령이 들어가서 사는 사람과 성령이 안들어가 있어 사는 사람이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바로 성령이 들어가 있는 인간을 건져내는 것이 곧 구원 방식입니다.
따라서 성경신학적으로 구원론을 정립해야 하는 이유는, 일체의 인간들의 구원노력이 무용지물임을 밝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필히, 구원얻고자 하는 자를 떨쳐버리는 하나님의 필사적인 '천국 차단' 노력에 초점을 맞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는 모든 권세나 방편을 동원해서라도,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들의 모든 노고를 헛수고로 만들어 버리십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이 해석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마치 천국 열차에 매달려서 함께 탑승하겠다고 매달리는 무수한 사람들을 가차없이 발길질해버려 밖으로 떨쳐내는 여객 승무원과 같은 노력을 지금도 쉬지않고 하고 계십니다.
은둔 생활을 자청하며 도(道) 닦듯이 기도하고, 성경보고, 신학을 해봤자 하나님께서는 가차없이 천국 밖으로 밀어내어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너무 냉정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구원받지 못했기에 오늘도 열심히 구원받고자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본인에 대해서 잘 압니다. "왜 나는 예수님이 그토록 싫은가. 왜 날이 갈수록 예수보다 내가 더 좋아지는가?"하고 말입니다.
그동안의 자기 신학에 대한 업적이나 복음 이해에 대한 열심이나 목회에 안정을 얻게 한 자신의 업적을 결국은 포기 못하는 것들이 이들의 본심입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조직신학적인 구원론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탁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그 구원론의 틀이 맞추어 살면서 구원의 길에 합류하기 위해서 노력하기 때문이죠.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고 신자됨에 합당한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므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 생활을 말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떤 식으로 천국 밖으로 차이는지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에 의해서 구원론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일단 여기서 미리 숙제 하나를 내겠습니다.어떤 분( 뉴스엔죠이 게시판에 올라온 글인데 탈레반? 이라는 분이 쓴 글입니다.)이 주장하신 발언인데 이 점에 대해서 복음적으로 반박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전에 이 게시판에서 쇳대님이 다섯 개 항의 명제를 늘어 놓고 어느 것이 옳은가를 질문한 적이 있다.
질문의 요지는 믿는 자는 다 거듭나는가와 거듭난다면 언제 거듭 나는가였는데, 사두환님의 글은 쇳대님의 그 질문에 대한 답글이 될 수도 있다.
사두환님은 예수 믿는 자는 근본적으로 죄에 대하여 심판의 자유를 획득한 자라는 전제하에 글을 올리셨다.
곧,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더 이상 사단적 죄의 정죄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평안의 은총 아래에 영원히 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사두환님은 주어진 바 자유를 사용하여 '선한 뜻'을 가리우는 범죄를 저지르고는 이를 세상적 관습이라는 등의 변명으로 자신이 범죄하지 않았다는 자기 변명의 막을 세운다고 하였으니, 이러한 막이 처음에는 엷어 그 자신도 잘 인식하지 못하다가 거듭되어 두꺼운 막이 되고서는 다시금 회개하지 못 하므로써 징계에 처하여 진다고 말하신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으므로써 사단적 정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는 전제는 무효가 된다.
결국 쇳대님이 질문하신 바 5개 항목 중, 예수 믿는 자도 거듭나지 못하는 자가 있다는 항목이 정답이 된다는 말씀과 동일한 것인데, 이는 사두환님이 여타의 주둥이 개신교인과 같이 예수 믿음으로써 이미 구원 받았다라고 하시면서도 그 구원에 대하여 오직 거듭남으로써만이 완성된다고 또한 말하고 있는 것이니, 얼핏 모순된 주장을 말하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두환님은 바이블의 근거 구절로 벧전2:16을 들고 계시니, 그 의도는 이런 것 같다.
예수 믿음으로 인하여 자유하나 그 받은 바의 자유로 다시금 자기의 악을 숨기고 변명하는데에 사용한다면 자유는 사라진다.
공감한다.
사두환님은 아주 작은 일부터 자신이 범죄한 그 즉시 회개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조금 다른 생각을 제기하고자 한다.
먼젓글에서도 표시한 바와 같이, 사두환님은 예수 믿는 자는 사단적 정죄로부터 자유하다는 전제하에 말씀 하셨고, 그러면서도 그 자유가 범죄에 대한 회개하지 못하므로써 박탈당하고 징계에 처해진다고 주장하셨다.
이 부분에 대하여는 공감한다고 하였으니, 회개 부분에 대하여 말해 보겠다.
사두환님의 말씀대로 아주 작은 범죄부터 깨달아 늘 회개한다면 믿는 자가 자기의 죄로 인하여 멸망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의 양태를 보면 아주 작은 범죄에 대하여는 수이 회개하면서도 바이블적 중죄인 성령훼방에 해당하는 죄에 대하여는 의외로 자기가 그 죄를 범하였음을 모르는 자들이 많다.
그러한 자들을 한 예로써 말해 보라 하면,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한 믿음을 아주 버리게 하는 행위를 공공연히 행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예수를 전하겠다고 극성스럽게 길거리나 전철 등에서 고성방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행위도 어떤 면에서는 예수 믿음에 대한 혐오감을 들게 할 수는 있겠으나, 근본적으로 그것은 전한다는 것이니 성령을 훼방하는 행위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신앙이라는 상품을 들어 장사를 하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자들에 대하여, 그들과 거래하면 최소한 사기는 당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는 그나마 바른 믿음 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날보다 많아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오늘날과 같이 예수 믿음을 앞세우면서 파렴치하게 부를 축적하는 자는 그다지 없었다고 본다.
말하고자 하는 취지는 이렇다.
예수 믿음을 앞세워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건 다만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만 아는 상대방과 거래를 하건, 그가 세상의 거래에 성실하지 못하거나 사기를 친다면 그 상대방은 필경에 '예수 믿는 자는 다 저래'라는 고정관념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로써 예수 믿음이라는 길에서 영원히 멀어질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니, 온 세상 사람 모두가 구원되기를 예수가 진정으로 바랐다면, 예수 믿음을 내세워 거래한 그는 곧 한 소자를 실족하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그는 성령이 하고자 하는 일(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일)을 훼방한 것이며, 그가 다만 성실치 못했음과 사기를 저지른데 대하여 회개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회개에 이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성실하지 못했음과 사기는 작은 일이다.
그러나 남을 실족하게 하거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큰 일이니, 스스로 예수 믿어 자유하다고 하는 자는 함부로 행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번 돌이켜 예수 믿음을 고백한 자가 거듭난 때는 회개할 일을 만들지 않을 때라고 본다"
이 숙제를 한 상태에서 집회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목사의 아내가 겪는 아품과 보람 이근호 2003-10-01 21:41:00, 조회 : 136, 추천 : 5
/www. hp7.org/ 전남 무안 화평교회 사이트입니다.
"버리기 아까운 휴지통" 이라는 란에 들어가 보세요.
복음을 추구하는 목사 겉에서 사모님(구자근)이 겪는 심적인 갈등과 행복을 함께 느껴보세요.
참고: 구자근 사모님은 신학을 전공하신 분입니다.
##############################################################################################사랑과 공의, 천국과 지옥을 함께 설교해야 김병구 2003-10-01 22:51:05, 조회 : 119, 추천 : 11
사랑과 공의, 천국과 지옥을 함께 설교해야
사행 20: 26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설교자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 이심과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셔야 합니다. 설교자는 복음과 산상수훈을 함께 설교해야 합니다. 구원과 함께 죄를, 천국과 함께 지옥을 설교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믿음과 더불어,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실제적 증거가 되는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에의 순종을 내용으로 하는 성화를 똑같이 중요하게 설교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복음뿐 아니라, 하나님의 죄에 대한 분노와 심판에 대하여 설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분노를 빼놓은 설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영혼을 순결하게 정화시켜 구속하는 거룩한 사랑이 아니라, 인간을 위로해주고, 인간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감상적인 사랑으로 이해시키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아직 죄인이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 것은 진리이지만, 우리가 계속 죄 중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계속 수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칭의 구원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빛 속을 걷도록, 세상의 빛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빛 가운데로 불러 내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의로우심을 전심으로 추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입으로부터 토하여 내치실 것입니다(계 3:16).
복음은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의 선포일 뿐 아니 이라 믿음과 회개 중의 순종에의 초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설교하고 그의 거룩하심과 분노의 심판 주 이심을 소홀히 설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세주가 아니라 거룩한 보혜사로 오해시키게 됩니다. 그의 십자가를 대속의 상징이 아니라 사랑의 상징으로만 오해시키게 됩니다.
존 웨슬리의 주장대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신 구약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입니다.“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고 설교할 때에 “악한 자들과 하나님을 잊은 모든 자들은 지옥 불에 떨어 질 수 밖에 없다”고 더불어 설교할 때에 설교자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re] 그래서 무엇을 얻겠다는 겁니까? 무엇을 보겠다는 겁니까? 이근호 2003-10-02 08:38:59, 조회 : 144, 추천 : 11
사람의 모든 주장이나 행위는 반드시 목적성을 띠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을 늘어놓든지 아니면 아무리 완벽한 이론을 제시해도 하나님은 그 목적성을 보고서 심판해 버립니다.
예를 들면, 인류를 난치병에서 구원할 수 있는 멋진 약을 개발했다고해서 그것으로 인해 그 과학자를 지옥 안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웨슬레라는 부흥사가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해서 아무리 영국을 기독교 분위기로 전환시켜 놓더라도 본인이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귀하께서는 먼저 자신의 글씀과 주장을 나열하시는 그 목적에 대해서 복음에 의해서 점검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귀하께서는 복음은 관심이 없고 그저 한국 사회가 기독교 분위기로 전환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이렇게 되면 기존의 모든 이단들(한국교회 목사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밖에 안됩니다.
오징어 잡이 어부들은 한국 사회에 오징어 먹기 붐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어부들 천국갑니까?
아무리 한국이 기독교 분위기로 다시 돌아선다 할지라도 이미 다른 천국을 염두에 두고 이상 실컷 종교노름하다가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복음을 보고 구원하지 다른 것으로 구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복음이란 '사랑+공의'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겠다는 그 의욕 자체가 바로 죄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인정하는 자만이 제대로 십자가의 복으을 아는 자입니다.
전혀 구원될 필요조차 없는 자가 오직 아무런 조건없은 은혜로 구원받은 겁니다.
'칭의+성화'로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칭의'만으로 구원되거나 '칭의+성화'로 구원되거나, '칭의+성화+영화"로 구원된다는 사고방식은 몽땅, 인간들의 종교적 아이디어 창안한 것이지 결코 복음이 아닙니다.
구원되고자 욕구에 충만해 있는 인간들에게 무슨 좋은 소리들 못하겠습니까!
귀하께서는 여기 글 올리기 전에 왜 한국 전체가 이단인 것을 제대로 아셔야 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민중들의 구원관을 부추겨서 그들의 영원을 사모함에 부합하기 위한 이론들을 상품으로 팔아먹기 때문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개인구원이 곧 사회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귀하의 주장입니다.
이런 너무나도 철없고, 안일하고, 무책임하고, 몰상식한 주장은 이미 종교학자 막스 웨브가 20세기 초에 주장한 겁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사회'라는 개념조차 비실질적 개념임을 밝혀집니다. 즉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인간의 무더기만 존재하는 겁니다. 즉 개인이나 인간 보다 더 높은 상위 개념은 반드시 그 하위 개념을 형성하게 되어 있고 그 하위 개념을 억압하고 그 가치성을 훼손하게 되어 있는 겁니다.
보다 더 확실한 점은 인간들이 "사회, 사회"를 부르짖을 때는 필히 자아의 독자적 절대성을 그 배면에 감추고 그런 구호를 외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가문, 가문!"를 부르짖는 자는, 그 내면에 반드시 '조상 팔아먹기 심보'가 들어 있고, "교회(교단) 부흥, 교회(교단) 부흥!"을 부르짖는 작자들은 반드시 그 내면에 그 덕을 보아서 자기 힘을 비축하려는 자들입니다.
자기 부인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지요.
사회를 위해, 교회 개혁을 위해 희생을 하고 계시다고요?
희생이면 다 희생입니까?
희생하면 할수록 희생하는 본인이 얼마나 신처럼 고양되지 아니십니까?
구원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희생은, 그냥 우리의 죄의 다른 모양에 불과합니다.
정 구원받은 자라면 죽으실 때까지 회개나 하십시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말씅믈 설교하셔야 김병구 2003-10-02 22:44:40, 조회 : 103, 추천 : 10
이근호 목사님,
자신의 생각을 설교하시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시기 바랍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와 목사들이 이단이란 말씀입니까?
==========================================================================[re] 진리에 관심있는 사람과 교회에 관심있는 사람의 차이 이근호 2003-10-03 07:51:24, 조회 : 122, 추천 : 16
>그 질문을 방주 안에 자기네 끼리만 달랑 들어가 있는 노아 식구보고 물어보세요.
당신 가족만 구원받느냐고 말입니다.
노아는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니네들이 언약을 알어?"
"언약에 관심이나 있어?
아직도 거듭난 자는, 관심사의 변동이 제일 확연한 변화임을 모르시는 것 같군요.
진리란 숫자나 비율이나 양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관점에서 보면, 아무리 서울 시내에 사람들이 움집하고 물결쳐도 그런 존재들이 존재로서 보지를 않습니다.
길에 돌멩이가 깔려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불쌍히 보이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길의 돌멩이는 최소한 죄는 짓지 않습니다. 진리에 도전하지는 않는 순한 돌멩이들입니다.
관심을 인간편에 두게 되면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제 이야기하기 말고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 하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다음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창세기 6:6에 보면, 하나님은 땅 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고 계십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런 일들 외에 인간들이 하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생존욕구와 문화욕구와 경제 욕구 외에 인간들이 추구하는 것이 뭐가 있습니다. 누가 이 용감히 이런 기본 욕구를 죄라고 규정짓겠습니까? 바로 노아가 들고 나온 언약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 24: 39에 보면 인자의 임함도 이와같은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자 방금 언급한 두 개의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귀하께서 글을 쓰게 되면, 귀하는 세상 관심과 전혀 상관없는 글을 남기시는 것이 되는 겁니다.
하지만 진정 거듭난 성도라면 그래야만 합니다.
그런데 왠일인지 귀하께서는 주저하시는 면이 보입니다.
위엣 것을 중요시하기 보다는 땅을 포기 못하겠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러니까 기껏 관심두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세상 교회는 이단은 아니지만 문제성 있는 것은 사실이다. 아, 내가 조금만 잔소리를 해대면 혹시 아냐. 그들이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해서 한국 땅의 사회 분위기가 기독교 분위기로 출렁거릴지. 오, 이럴 때 진정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가 아니고 무언가! "
바로 이런 관심사 자체가 복음과 진리와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이왕 구성된 땅의 세상의 결집력에 힘을 실어보려는 세속 야망의 다른 면입니다.
진리란, 그냥 하나님 손에 현실을 내맡기는 겁니다.
왜 그런줄 알아요?
그것은 우리 속에서 매일 같이 비진리가 쏫아나와 하나님이 일을 도리어 방해하는 자로 움직이며 살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 전체가 이단이라는 것이 뭐어거리 가슴 아픈 일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게 된 것이 더 가슴 아프지 않습니까?
진리와 복음에 관심이 없다면 아마 한국 교회 전체가 이단된 것이 더 가슴 아플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원래 처음부터 이단이었고 지금도 이단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서도 , "한국 교회가 과연 이단이구나"하고 깨닫게 된 자들이 더러 있다는 이 사실에 대해 저는 하나님의 기적 내려 주심에 대해서 오늘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 이단들 속에서도 영생 얻을 자들이 있기는 있구나" 하고 속으로 기뻐합니다.
==========================================================================사랑과 공의, 천국과 지옥을 함께 설교해야 김병구 2003/10/01 11 120 [re] 김병구님께 질문합니다. 손무성 2003-10-03 14:15:54, 조회 : 114, 추천 : 10
김병구님께 질문합니다.님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설교자는 복음과 산상수훈을 함께 설교해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산상수훈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십니까?
답변바랍니다.
==========================================================================[re] 김병구님께 질문합니다. 김병구 2003-10-03 22:44:20, 조회 : 99, 추천 : 11
산상 수훈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성된 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re] 김병구님께 두번째 질문합니다. 손무성 2003-10-04 10:15:51, 조회 : 88, 추천 : 12
김병구님께서는 산상수훈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다고 보십니까?에 대해>>"산상 수훈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성된 율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답변하셨습니다.
그러면 김병규님께서 이렇게 말한적이 있습니다.>>"설교자는 복음과 산상수훈을 함께 설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복음과 산상수훈을 함께 설교할 때 어떻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까?
산상수훈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완성된 율법이기 때문에 빠짐없이 성도라면 지켜라는 것인지요? 아니면 예수님께서 혼자 완성하신 율법이기에 예수를 믿으라는 것인지요?
김병구님께서 설교자라면 어떻게 강조점을 두고 가르치겠습니까?
>> 답변바랍니다.
##############################################################################################신(新) 사도신경- 퍼온글입니다. 이근호 2003-10-03 19:13:27, 조회 : 120, 추천 : 6
전능하사 교회를 세우신목사 선상님을 믿사오며,그 외아들 우리 담임목사님을 믿사오니,이는 헌금으로 축재하사벤츠나 아우디에 타시고,개독교 안티들에게 고난을 받으사,추적25시에 가끔씩 나오시고,체포된지 사흘만에구속된 자 가운데서 다시 풀려나시며,교단에 오르사 전능하신 정치가 옆에 앉아 계시다가,달러바꿔 비행기 타고 미국으로 가시리라.십일조를 믿사오며, 안되면 내탓,잘되면 다 교회 덕이라는 것과,예수천국 불신지옥과,목사님 아드님이 교회 물려받는 것과,교회가 영원히 세습되는 재산임을 믿사옵나이다.아멘.
##############################################################################################복음을 온전하고 균형있게 설교하고 계십니까? 김병구 2003-10-03 22:53:31, 조회 : 123, 추천 : 14
복음의 설교는 편파적, 분파적이어서는 안되고 성경 말씀을 온전하고 균형 있게 전해야 합니다. 예정에 대한 강조가 그리스도 영접의 중요성을 훼손해서는 안되며, 견인에 대한 강조가 성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 가운데서 안주하게 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대가 없는 은혜에 대한 강조가 성화에의 수고와 진력을 훼손할 때에도 그 설교는 균형을 상실한 편파성을 지니게 됩니다.
설교자의 책무는 칼빈주의, 루터주의, 또는 웨슬리주의 등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의 폭과 깊이, 그리고 복음의 능력이 듣는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달되도록 선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간음, 도적질, 살인, 알코올 및 마약 중독과 같은 개인적인 죄악뿐만 아니라, 부정부패, 빈익빈을 낳는 그릇된 제도, 집단 이기주의, 이익의 극대화 만을 추구하는 기업의 행태 등과 같은 사회적 범죄도 지적해야 합니다.
오늘날 보수주의 교단에 속한 교회들이 개인의 범죄에 비하여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죄악을 드물게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개인의 구원에만 설교의 초점을 두는 것은 “구원 이기주의”(salvation-egotism)입니다. 그것은 또한 사회의 거룩함과 개인의 구속함을 동시에 요구하는 복음을 축소하는 “구원 축소주의”(salvation reductionism)이기도 합니다.
끝으로 설교는 듣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뿐 아니라, 듣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하도록 하는 도전을 주어야 합니다.
히 12: 25 너희는 삼가 말하신 자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자를 거역한 저희가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 좇아 경고하신 자를 배반하는 우리일까 보냐
복음은 그것이 거역되고 배반될 때에 저주로 변하게 됨에 유념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그 복음에 회개와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만 평화와 기쁨의 샘이 됩니다.
설교자는 큰 용기를 가지고 설교해야 합니다. 그 자신이 설교하고 있는 죄악에 자신도 연유되어 있음을 고백하는 긍휼, 겸손, 그리고 양선의 자세로 설교해야 합니다.
==========================================================================[re] 예수님과 사도들과 스데반 집사님이 어떻게 설교했습니까? 이근호 2003-10-04 09:12:33, 조회 : 111, 추천 : 11
>예수님과 사도들이 설교 한대로 설교하면 오늘날 한국 강단에서 맞아죽습니다.
귀하의 희망대로 지상의 '신의 나라'를 염두에 두었던 유대성직자에 의해서 사도 바울은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이단소리 들었습니다. 미쳤다고 했습니다.
"당신 같이 설교하면 사람들은 은혜를 거하기 위하여 죄를 더욱 짓게 될 것이라"고 공격받았습니다.
산상설교는 그 당시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종교적 성과를 공격한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심과 예정을 이야기하자 사람들은 어렵다고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요한복음 6장)
도대체 귀하께서는 무슨 귀와 무슨 눈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얼마나 믿음이 없으면 자꾸만 뭔가 보고자 하십니까? 봐야 믿겠다는 주의입니까?
귀하같은 자들이 교회를 찾기 때문에 교회는 20세기 이후의 절간이 된 것입니다.
즉 마귀가 교회를 장악하고 있다다 귀하같은 분들이 오면 대환영을 하는 겁니다.
"우리 교회는 뭔가를 보여줍니다. 이웃 사랑이 뭔지, 사회 개혁이 뭔지, 헌금을 바르게 쓴다는 것이 뭔지, 교회 부흥이 뭔지, 성령의 뜨거움이 뭔지 확실히 보여줍니다. 보고서 믿으시기 바랍니다"라는 장사꾼 심보로 귀하를 반깁니다.
실제로 보이는 것이 없다면 믿지도 않겠다는 것에 대해서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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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