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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십자가 모르면 성도가 아닙니다. ] 2003-08-17묻고답하기-

[십자가 모르면 성도가 아닙니다. ] 2003-08-17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십자가 모르면 성도가 아닙니다.
이근호 2003-08-17 06:08:53, 조회 : 152, 추천 : 11

인간의 기본 심성은 이렇다. '하나님 믿고 착하게 살기'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런 생각을 뒤집는다.
사람들은 그저 간단하게 살려고 한다.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런데 하나님 믿고 착하게 살면 그만인 문제에 대해 예수라는 분이 와서 십자가 지신 일로 인해 '하나님 제대로 믿기'에 있어 관히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들은 십자가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십자가란, '착하게 살기'의 일부라고.

그러나 십자가란 단지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지혜가 엉터리임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지혜이다.(고전 1:23-24)
십자가가 아니면 인간의 일이 곧 악마의 일임이 드러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 16:23)
곧 '하나님 믿고 착하게 살기=마귀의 일'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다.(마 16:24)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 자신을 따라오라고 하신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결합되지 않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다 악마의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믿고 착하게 살기'의 행위의 주체자로 계속 인간이 나서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시는 분이다.
성도에게 있어서는만 그 모든 행위 하나 하나에 '자기를 부인'이 삽입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만이 부각될 뿐이다. 성도는 모든 행위는 반드시 이러한 결과가 나타난다.

따라서 십자가로 시작해서 십자가로 끝맺지 아니하는 인간 행위론은 모두 거짓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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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살아있다. 항상, 우리의 생각을 뒤바꾸면서
손성식 2003-08-17 18:40:11, 조회 : 121, 추천 : 11

본 글은 중국에서 사역하시는 이름을 알릴 수 없는 한 복음 전도자의 글입니다. 저의 게시판에 올리셨는데 혹시 여러분에게 복음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을까 싶어서 올립니다.

>기차를 타고 16시간을 달렸습니다.
새벽5시가 되기 전에 중간 기착점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두 사람을 만나 목적지로 가야 합니다.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오원짜리(700원) 싸워를 하고(찬물에) 입추가 지났는지 한기가 느껴 지더군요.

9시가 넘어서 그들이 도착했습니다.
표가 없어서 밤새 내내 앉아서 왔답니다. 사실 이런 것은 이곳에서 일어나는 빈번한 형상이지요.

나도 지난 번에 20시간 이상을 앉아서 왔지요.
그러니 몸이 어떻겠습니까?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고, 이제 목적지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버스를 탔습니다.

약50분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버스 정류장에 갔는데, 우리가 목적지로 가는 버스는 없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침 일찍 하루에 한대가 있답니다.

우리는 다른 곳을 경유하여 가기로 했습니다.
다시7시간 버스를 타고, 중간 경유지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3시간 30분을 더 가야 합니다.

저녁을 먹고 도착하니 저녁 10시가 되었습니다.
이틀동안 꼬박 차를 탔습니다.
마침 보름이라 달빛이 아름답게 그 넓은 들녘을 비추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번 여행은 왜 그리 마음이 불편한지.
물론 출발전부터 목적지에서 온 전화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계획이 되어 있어서 가는 것이지만 그 속뜻을 알기 위해서 가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지.

지형이 그곳은 우리들이 평생 볼수 없는 지형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도착하니 열시였습니다.
일단 잠을 자고 내일 이야기 하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그곳의 책임자가 왔습니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오로지 돈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 모든것을 준비했는데 지금은 자신들의 힘을 다 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배우는 학생들이 너무 어렸습니다.18-23세정도.

이들은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둘은 초등학교 중태랍니다.
그러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나이가 조금 많은 것도 아니고.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 마음대로 연락해서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중에는 일천키로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와 함께 간 사람이 말했습니다.
일단 오늘은 시작하지 말고 좀더 학생을 모으자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하기로 하고 했는데, 하루 종일 돌아 다녀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할 집도 찾았는데 결국 얻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 왔는데, 역시 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좀 화가 났습니다.

다음날 나는 냉정을 찾고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8시에서 오후 5시 30분까지 강의를 했습니다.
물론 6시간을 강의한 것이지요.

듣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운것, 들은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특징은 절대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를 오라고 한 사람은 내 강의를 듣는둥 마는 둥 하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 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냐 내 강의가 필요하냐.
웃는 것입니다.

결국 함께 간 친구로 부터 알게 된 것은 그 사람은 돈이 필요 했던 것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물론 일년 반이나 알고 지낸 사이지만. 물론 자세히는 알지 못했지만.

그러면서 그 사람은 내 친구에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렇게 좋은 직장에 있는데, 내가 얼마나 똑똑한데 저런 강의를 들을 필요가 있는가였습니다.
자신은 다 알고, 오직 가르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지요.

이야기 해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여실한데 말입니다.
그 친구는 진리를 지식으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날 저녁 함께 간 친구가 나를 불렀습니다.
더이상 머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명예를 위해서, 욕심을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말합니다. 돈을 도와 주면 그 다음은 자기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돈에 관심있는 사람이 그 목적을 이루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다음날 새벽기도회를 하면서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열심을 내는 자들이 있지는 오늘날 많은 자들이 자기를 섬기게 하기 위해 열심을 낸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 강의를 듣던 사람들도 내일 떠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2주를 지냈는데 이곳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함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들의 신상은 전형적인 기복신앙, 자신들을 위한 신앙이지만 이들 눈에도 그 사람은 악한 자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우리는 새벽일찍 짐을 챙기고 도망치듯 나왔습니다.

다시 7시간, 다시 8시간을 기다려 10시간을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결국 감기에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에어콘 차를 4일동안 탔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기의 목적과 꿈을 이루기 위해 복음을 이용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쫓아가는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또한번 주님의 은혜를 보았습니다.
나와 함께 간 두 친구가 내 강의를 알아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번 잠시 몇시간을 교제했는데, 이번에 나를 도와 주기를 한 사람들인데, 이들이 참 복음을 알았다는 사실입니다.

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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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제 깨달음과 믿음은 이렇습니다.
이석규 2003-08-18 02:08:25, 조회 : 110, 추천 : 11

제가 처음 십자가 마을에 글을 쓴 것이 김종명 목사란 분의 글에 리플을 단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이 분의 답장이 메일로 와서 이곳으로 옮겨 실을까하다 그만 두었습니다.
십자가 마을에서 글쓰기를 막았다고 제 메일로 답장을 보내오셨더군요.
나머지는 기억은 안나지만 첫 줄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시겠지요? 이석규 목사님, 사실 성령의 능력으로 사람이 변화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냥 기존교회에서 말하는 서리집사 입니다만 혀를 찼습니다.

성경에, 특히 바울큰성님의 서신에 하지 말라가 무척 많습니다.
그리고 하지 말라는 짓 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못박아 놓았습니다.

예,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명령이니까요.
그러나 그런 죄가 되는 짓들을 안한다고 성화고 영화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당연히 지켜야 되고 지키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못받지만 그것을 다 지켰다고 구원 받는다는 조건도 아니라는 점 입니다.
그거 지키겠노라고 허덕대다가 잘 지켜내면서 교만해져도 골 아프고 이 짓만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 까맣게 잊을 수도 있겠지요.
저도 전에는 성화의 과정을 거쳐 영화의 과정으로 들어가는줄로만 알았습니다.
성화란 예수의 십자가의 공로를 제대로 믿으면 죄는 그냥 저절로 싫어져 안하고 싶어지는데 이걸 성화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 전에는 예수의 십자가 공로만를 증거하지 않으면 다 다른 복음이라는 것도 몰랐었습니다.

또 배교하는 자들이 예수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눈이 좀 뜨이니까 교묘한 말로 교묘하게 비틀어 아닌 척하면서 도 속내용은 성령이 증거하고 제자들에 의해서만 증거되시는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 정말 무서운 배교하는 자들이란 것도 알았습니다.

제가 제일 우스웠던 경험은 자유주의신학자로 불리우는 것을 싫어하는 어느 자유주의신학자께서
현 신학계에 스승으로 대접 받는 민**교수나 김**교수의 박사논문원문을 읽어 봤는데
그들의 논문 속내용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라며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그런 사람들을 신학계의 선생으로 모시는 우리나라의 신학계가 불쌍하다는 논조를 읽은 것입니다.
그가 지적한 두 분의 논문을 읽은 적도, 읽어서 이해할 실력도 없지만 대체 뭐가 뭔지 어리둥절하면서 한편으론 재밌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성서로 부르며(왜 성경을 성서로도 부르는지 이때 알았습니다만) 한낱 문학작품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p기자, j기자 등을 말하며 소위 고등비평을 하는데
고대 고고학적 증거, 고대 수트라 문학, 고대중근동 문학들을 들이대며 성서는 이들에서 따다가 잘짜깁기한 문학전집이라고 열심히 쓰는 분 입니다.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 등을 배우지 않은 신학자나 성도들이라면 성경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도 했습니다만,

이런 모든게 배도의 사례로 생각합니다만
제일 무서운 배도는 구원에 자기 행위를 어떻게하든 첨가 시키는 행위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언젠가 깨닫게해 주시겠지요. 속중심에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는 자기 아들들을 절대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거든요.
저도 지금도 뭔가 행위를 하고 싶어 몸부림치는 사람 중의 하나 입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종아"

냉중 주님 만났을 때 다만 이 한 마디 듣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소망 중의 한 소망으로 뭔가 하고 싶어 몸살을 앓고 있으니까요.
나머지 소망은 나중 주님 만나기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세번은 강해하는 것입니다만....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올바른 선생을 만나 배우는 성경은 쉽고 재밌는데
성령께서 교사가 되시면 그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만을 가지고 들은대로 가르쳐 주시는데
이게 왜 사람의 지성하고만 섞이면 복잡하고 어려워지는지를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거 마귀 아닙니까?
회당에서 크게 떠들어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려던 그 마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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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혁은 온전한 구원론으로부터
김병구 2003-08-19 05:02:08, 조회 : 120, 추천 : 12

교회의 개혁은 온전한 구원론으로부터

- 구원의 신비와 파라독스-

다음과 같은 성경 말씀들은 한번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면 최종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요한 복음 10: 28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유다서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그러나 바울 사도는 구원의 신비와 파라독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얻는 것이지만, 구원 받는 신자의 말씀에 복종하는 삶, 즉 성화의 노력이 또한 필요함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나 그러한 노력, 즉 성화의 노력도 신자의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주관하심을 말씀 합니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리고 다시,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하여 주신 은혜를 인간이 헛되게 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고린도 전서 15;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 사도는 인간도 자신의 구원을 자신의 의사결정, 즉 주신 은혜를 통한 지속적인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든지, 아니면 믿음을 버림으로 주신 은혜를 헛되게 하든지를 결정 하게 됨을 도외시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후서6: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그는 인간이 은혜로 주시는 구원을 거절할 가능성을 인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오직 은혜에 의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믿음의 삶 가운데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도 오직 성령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써만 이루어갈 수 있는데 그 성령님의 역사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골로세서 1: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러므로 위의 요한복음 10;28-29, 로마서 11:29, 그리고 유다서 24는 믿음으로 거듭난 자가 거듭난 자로서의 영적인 삶, 말씀과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 거룩한 삶을 살아 가는 신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까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합니다. 오직하시면,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셔서 정의를 세우는 동시에 사랑의 구속사업을 이루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신 동시에 의롭고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을 일단 얻었다고 하드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매일과 같이 성화의 길을 닦아 하나님처럼 거룩한 존재가 되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0: 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히브리서 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현재의 구원 뿐아니라 최종의 구원까지 확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 기초로 하지만, 그 말씀의 순종을 주관적 기둥으로 하여 세워집니다.
디모데후서 4: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고린도 전서 15: 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히브리서 6: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위의 성경말씀들을 묵상하면, 믿음의 확실성과 구원의 확실성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크리스쳔의 매일의 삶 속에서 실현되어 진다고 생각됩니다.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알고 영접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전부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웃 사랑에 바치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수고와 진력을 내용으로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니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 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합니다.
게으르거나, 넘어질까 조심하지 않거나,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를 경외하지 않거나, 수고하고, 진력하지 않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헛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에서 저는 한국 교회가 일반적으로 칭의를 통한 구원은 지나치게 강조해온 반면, 구원을 이루어가는 성화는 너무나 소홀하게 다루어오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갖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 날 성도와 목사와 장로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하고 길가에 버리워져 불신자들의 발에 밟히는 참으로 대성 통곡할 일의 단초가 되고 있지 않나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바른 크리스쳔들이 열망하고 기도하는 한국 교회의 개혁은 온전하고 바른 구원론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최종적인 구원의 완성을 믿으면서 죄짓기를 두려워하며 매일 같이 지은 죄를 회개하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예수의 제자의 삶을 살아감을 통하여 매일 매일 성화를 이루어 갈 때 교회는 개혁을 회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개혁이 이루어 진 후에야만 사회개혁이, 국가개혁이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은 역사는 이루어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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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구원론보다 먼저 교회론 정립해야
이근호 2003-08-19 07:15:46, 조회 : 154, 추천 : 11

개인주의에서 시작해서는 결코 이상적인 집단주의가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개인구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홀로 이루어신 업적의 열매로서만 드러나기 때문에, 구원 이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취지가 인간의 개인 구원론과 어떤 충돌을 이르킬 수 밖에 없는 가를 고려해야 합니다.

천국은 놀랍게도 인간의 개인 구원욕을 거부하면서 진행됩니다. 그 이유는, 천국은 사람 위주의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 위주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취지에서 등장된 집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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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만일 내게 이웃 사랑이 없다면..
엄기욱 (Homepage) 2003-08-21 22:25:28, 조회 : 100, 추천 : 10

다시 한번 밝히지만
저는 여호와의 증인에 속하여 있지 않습니다.
이곳에 들어오시는 분들로 하여금 오해없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 만일 내게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일반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날로 성숙하고 있는가에 대한 뚜렷한 징조는 자신의 이기적이던 애정이 점차 질 좋고 순수한 이타적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이 잘 되기를 기뻐하는 것이 주님 가르침의 주요 핵심일진대 그동안 우리의 모든 신앙 경주는 혹 남보다 자기 영혼의 아름다움만을 가꾸고 보전하는 것에 열심을 내지 않았던가요? 나 자신의 기쁨과 평화보다는 진실로 다른 사람들이 더 잘되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 신앙의 명암을 좌우하는 관건이건만 이를 잘못 인식하여 내 영혼의 구원에만 신앙의 모든 초점을 맞춘 채 거기 부어지는 은혜의 감격에 취해있지는 않았던가요?

신구약을 막론하고 성경 전체를 두루 비추고 있는 두 큰 광명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입니다. 생각건대 이 계명들이야말로 너무나 존귀한 것이어서 우리 마음 속 거룩한 지성소에 모셔진 채 영원토록 높임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이라는 실제적 형태로 나타나는 만큼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은 생각할 수조차 없겠지요.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영혼의 구원이 교리나 지식 등 이론의 정립을 통해 머릿속 거래로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중요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럼에도 만일 우리의 구원이 이 계명을 지키는 것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주님의 가르침을 곡해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이웃 사랑은 장차 우리가 들어가 살게될 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로서 우리 눈앞에 놓여져 있는 까닭에 우리 영혼의 구원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계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사정이 있는 고로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 라는 새 계명을 마치 마지막 유언을 하듯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신 것입니다.(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서로 사랑하라! 라는 새 계명은 이기적인 자아 사랑에 물든 우리의 옛 사람을 구원하여 능히 새롭게 변화시켜 줄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삶 속에서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는 그때에 바야흐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우리를 저 하나님 나라로 이끌어줄 선지자요 율법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이의 기쁨과 행복을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내 옆에 선 사람이 누구이건 그저 그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이를 함께 즐거워하는 그런 마음 안에 하나님 나라는 깃들어 있습니다. 또 보잘 것 없는 나 자신이지만 이웃의 기쁨과 평화와 행복이 되어주기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기울이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는 찾아듭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에게 희락과 기쁨을 나누어주고 그것을 함께 즐거워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는 것은 그곳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사랑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서로 나누는 성질이 있는 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사람의 행복을 염원하여 자기의 기쁨을 한량없이 그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 사랑으로부터 기쁨과 희락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흔히 잘못된 생각을 지니고 있듯 성경에 대한 머릿속 지식으로만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예배 행위들 속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지 아니합니다. 다시 말해 말이나 생각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지적 고백이나 시인들 곧 그 안에서 아무리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하나님을 까마득히 높여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할지라도 만일 이웃 사랑의 삶이 그 속에 없다면 그곳은 아직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때로 그곳에 눈물 줄기가 폭포수처럼 흐르고 아무리 은혜와 감격이 넘치더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실제 활동적인 생활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에 형체가 없는 사랑과 믿음에 불과하고 신은 그러한 데서 나오는 찬미나 영광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은 다만 사람들이 씀씀이(선용) 즉 사랑에서 나온 선 안에서 살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은 채 필요 이상의 몸짓과 과장된 생각으로 뜨거워진 예배는 오히려 주님을 속이는 외식이요 위선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진정한 고향인 하나님 나라는 거기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마음 상태를 벗어나 다른 곳에 건설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주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인간의 마음 위에 그 기초가 건설되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이웃 앞에 겸손하여 가장 보잘 것 없고 작은 자로 처신하는 자가 가장 큰 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힘도 없고 지혜도 없으며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 자가 도리어 이 모두를 얻어 소유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작은 자는 가장 큰 자요 가장 행복한 자입니다.

그러나 최대자가 되려는 목적으로 최소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이상형이 아닙니다. 그것은 최대를 바라는 욕심에 불과하기 때문이지요. 하나님 나라는 다만 다른 사람의 선을 원하고 남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며 또 보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순수 사랑으로 이웃을 위하는 자들이 모여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세상과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자는 이와 반대입니다. 자기 사랑은 자기만 잘되기 위하여 남의 기쁨을 빼앗아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 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욕심은 이웃에 속한 것을 빼앗아 내 것 삼으려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은 남의 즐거움을 깨뜨리거나 설혹 나누어주려는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남을 위하여서가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그리하는 것입니다. 이 악한 사랑의 성질은 다른 사람의 즐거움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 때에는 남에게 주지 않는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선한 삶을 사는 자들! 만일 이들이 하나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하늘 아래 인생을 살다간 수많은 사람 중 그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그 주인의 성품을 따라 사랑과 진리로 통치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 수많은 신들과 그들의 왕국 중에서 오직 주님과 그의 나라만을 우리가 높이 받들어 경배하는 까닭은 그분의 통치 방식이 참으로 의롭고 선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신이요 참 하나님이 되시고 오직 그분만이 참 사랑과 참 진리로 그 나라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이 세상은 남의 고통에는 관심 없이 오직 내 기쁨만을 우선 순위로 삼는, 소위 자기 사랑이라는 무섭고 잔인한 임금 아래 지배를 받고 있는데 반하여 주님이 건설하신 하나님 나라는 다른 이의 행복으로부터 기쁨이 나에게 전달되어지는 까닭에 이 세상 여느 왕국과 전연 다른 통치를 받습니다. 거기서는 다른 이가 행복하면 할수록 내 기쁨 또한 그만큼 더 증대되어 궁극에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참으로 사랑에서 나온 선에 의해 질서가 유지되는 나라입니다.

아직 이 세상에 살아있는 가운데 우리 마음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든지 아니면 우리가 죽어서 맞게될 하나님 나라든지 간에 아마 이웃 사랑의 선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는 도대체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더불어 우리 신앙을 떠받쳐주는 두 큰 기둥 중의 하나인 것이지요. 하나님 나라가 여기 이웃 사랑 안에 건설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이 바로 저와 같은 이웃 사랑의 선한 삶 위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우리의 전반적인 생각들은 이웃 사랑보다 자기 영혼의 구원이라는 관점으로만 그것을 바라보며 자기 영혼을 잘되게 하려는 목적 하에 신앙의 모든 노력을 투자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성경의 각 구절도 그런 생각을 뒤받침 하는 식으로 읽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 영혼의 구원만을 위한 모든 몸부림이 마치 주님의 순수하고 참된 신앙인양 거꾸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지요.

마음의 땅이 이렇게 메마른데 어찌 주님의 역사가 있겠습니까? 이는 우리가 자기 사랑에 이끌려 주님의 가르침인 인애(이웃 사랑)를 소홀히 다룬 탓입니다. 신앙의 방법과 목적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고 이래서는 궁극에 자기 영혼의 욕심만을 채우는 세속적 종교로 전락할 뿐입니다. 이러한 신앙 형태는 눈 먼 것과 병든 제물 등으로 주님께 드리는 헛된 제사에 불과한 것이어서 그것은 거룩한 신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자기 영혼이 잘되게 하기 위하여 애를 써왔으나 결과적으로 자기 사랑의 염려만 더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자신을 위한 신앙의 노력은 자신을 망하게 하지만 남에게 행복을 주려는 신앙의 노력은 도리어 나 자신을 잘 되게 하는 법입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을 위하지 아니하고 남을 위하는 것으로부터 유익한 것이 자신에게 돌아오도록 하는 이 한 가지 천국의 질서를 우리는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진실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에 거하는 많은 악들이 먼저 버려져야 할 것입니다. 악이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우리의 애정이 온통 자기 사랑에 둘러싸여 있게 되고 설령 여기서 선한 생각과 행위가 나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외관만 선으로 금박 입혀진 것일 뿐 그 내면의 진실은 궁극에 자기를 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자기 사랑이 주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빛으로 위장되어 나타난 것이지요.

그럼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성벽 저 너머 적들을 경계해야할 우리의 이해성이 악에 물든 애정에 영향을 받아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이라는 악에 지배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의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깊은 영적 세계의 빛에는 눈이 감기고 보다 외적이고 감각적인 빛에만 눈이 열리게 됩니다. 이 상태에서는 사물의 본질보다는 그 겉모습만을 진실인양 간주하게 되고 자기 마음의 본질, 그 속을 들여다보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이렇듯 신앙이 위장된 선으로 감싸져 있을 때 우리의 신앙은 열심히 주를 좇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와 정반대로 자기 사랑의 욕심을 키우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해야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기본 원리는 악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내면에 거하는 악으로 인해 우리의 사상까지 거기 물들어버리면 자칫 우리의 신앙 생활 그 모두가 온통 나를 위한 것 투성이로 변질되어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기초까지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님을 믿고 사랑하며, 성경 또한 나를 위하여 읽고, 말씀 속 진리도 내 기쁨을 위하여 묵상하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도 나를 위하여 하며, 기도와 예배도 나를 위하고, 멸시 천대를 받으려는 것도 낮아지려는 것도 또 겸손하고 온유하려는 것도, 분을 내지 않고 이웃을 미워않으며 그들을 사랑하려는 것도 이 모두가 나를 위함을 최우선적으로 목표 삼고 있다면 그 자체가 벌써 주님 말씀을 그 근본부터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함보다도 그리고 주님을 위함보다도 나를 위함이 가장 강한 힘으로 내 마음을 지배하는 상태에서는 우리의 생각과 애정의 열심에서 우러난 모든 것들이 진실로 주님을 향해있는 듯 해도 실상은 그 열심의 최종 목표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자신의 행복과 기쁨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신앙 형태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기 사랑의 악만 몸과 영혼에 축적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이런 신앙에 더 큰불을 짚이지 못해 몸부림치고 있지나 않는지요? 혹 그런 신앙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장받을 꿈에 부풀어 있지나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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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만일 내게 이웃 사랑이 없다면..
이근호 2003-08-22 06:44:38, 조회 : 85, 추천 : 10

귀하에게 여호와 증인의 신론이나 사상과 비교해 보시기를 요청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귀하의 견해와 유사한지요!

최고의 이웃 사랑은, 복음 소개입니다.
만약 개인이 개인을 상대한다면 이것 또한 개인주의적 행태의 범주에 속한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를 보편적으로 저주받은 죄인으로 간주해서 상대에게 복음으로 다가서는 것은 개인주의적 한계를 극복한 상태의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 진다고해서 그 사람이 그 효과로 지옥에서 면제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에 있어 최고의 이웃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이웃 사랑없는 기도란 가증한 것이겠지요. 그는 사도 자신의 희생을 알아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닙의 사랑만을 소개하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사랑을 결합시켜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아니면 악마의 손아귀에서 못벗어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웃 사랑이든 하나님 사랑이든 모두 십자가 복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저 인류의 복지 증진과 측은지심에 기초한 행태들은 그 자체가 '자기 부인'을 훼방하는 짓들이며 이런 업적들이 모여 예수님의 복음의 대적하는 세력으로 성장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부흥'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악마의 다른 얼굴들입니다.
복음 증거 이외에 그 어떤 이웃 사랑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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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인교회 카페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이근호 목사님 답변 바랍니다.
나그네 2003-08-19 23:09:37, 조회 : 196, 추천 : 8

아래 글은 카페홈 주인(김동환)의 글입니다.

박기삼 형제님의 사역이 중단된 이후 저희 모임이 어떻게
되어야 할지 많은 고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조금은 이해해서 안개가
약간은 걷힌 듯한 느낌입니다.

문단이 엉망이라서 죄송합니다.제가 문서 작성을 잘 못해서요...

'사역의 재고(웟치만 니, 한국복음서원)'에서 인용.

앞으로 몇 차례 더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교회의 집회

나는 우리가 먼저 교회의 성질이 무엇인가를 알아야만 교회의 집회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교회가 무엇인지를 깨
닫지 못한다면 교회의 집회를 알 수 없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가 교회
의 머리이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임을 알고 있다. 또한 교회 안에 있
는 우리 개개인은 ‘우리 많은 사람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5).
그리스도 외에는 교회에 다른 머리가 없다. 교회 안에는 머리 된 자가
하나도 없고 모두가 지체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합하여 지체가 되었
다. 그러므로 교회의 성질은 모든 것이 다 피차적이고 상호적이다. 교회
가운데 모든 관계는 머리와 지체와의 관계가 아니라 지체와 지체의 관계
이다. 교회의 특징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지체이고 머리 된
자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모든 것은 다 피차적인
성질이 있으며 상호적인 특징이 있다. 만일 교회 안에 어떤 일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러한 피차적인 성질을 내적으로 지녀야 하고 이러한 상
호적인 특징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사역은 교회와 다르다. 하나님의 정하심에서 사역 안에는 지도자
가 있다. 그의 사도들은 바로 이런 사람 중의 하나이다. 사도들 가운데에
서 우리는 또한 큰 사역과 작은 사역이 있음을 본다. 그러므로 사역 안에서
우리는 보내심과 파송과 머무름이 있음을 본다. 그리고 권면하는 자가 있고
순종하는 자도 있다. 사역을 실행할 때에 사역하는 사람은 완전히 능동적이
고 사역을 받는 사람은 수동적이다. 사역의 성질은 그렇게 피차 상호적인 것
이 아니라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 것이다. 사역자는 능동적이고 모든 다른
사람들은 수동적이다. 모든 사역에는 다 이러한 일방적인 성질이 들어 있다.
능동적인 자는 쌍방이 아니라 일방이다. 이것이 바로 사역과 교회의 성질이
다른 점이다. 사역은 일방적인 것이고, 교회는 서로 움직이고 피차 움직이는
것이다.

이 점을 깨달은 후 우리는 성경 안의 집회에 관해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왜
냐하면 우리가 그 성질을 볼 때 그 범위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지도자가 한 교회를 다스릴 뿐 아니라 또 한 가지 집회, 소위 예배, 즉 한 사람이 강단 위에서 말하고 여러 사람이 앉아서 듣는 말씀 전하는 집회가 있어야만 교회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소위
예배 , 곧 말씀 듣는 집회를 취소해 버린다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다. 그들의 교회의 기초는 ‘예배’위에 세워져 있다! 그들은 말씀을 전하고 듣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안에서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신이 성경 안에서 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제들이 교회를 이룰 때 즉시
‘교회’ 집회를 갖는 일이다. 내가 말한 교회 집회는 말씀을 전하는 집회와 완전히 다르다. 말씀을 전하는 집회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한 사람이 강단 위
에서 말하고 많은 사람이 강단 아래서 듣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강단 위에서
인도하고 많은 사람들이 강단 밑에서 따르는 것이다. 이런한 집회는 피차 상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 집회가 아니다. 교회 집회는 반드시 피차적
이고 상호적인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집회는 교회 집회가 아니라 사역적 집회이다. 사역적 집회만이 한쪽은 능동적이고 다른 쪽은 수동적이다.

성경에는 두 종류의 다른 집회가 있다. 이 두 종류의 다른 집회를 구분하지
않으면 사역이 사역답지 않고 교회는 교회답지 않게 된다. 성경에는 사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한 종류의 집회가 있고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가
있다. 사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모든 집회에서는 다 사도 자신이 주도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 한 사람이 말씀 전하는 것을 듣는다. 성경에는 또한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는 집회가 있다. 이것은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로서 한 사람이 주도하는 집회가 아니다. 피차 상호적인 집회이다. 성경에 사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는 한 사람의 것이지만 교회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는 두 사람 혹은 세 사람이 실행하고 공헌하는 것으로서 전체 모두가 공헌할 권리가 있다. 바꾸어 말한다면 피차적인 것만이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라고 할 수 있고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은 곧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인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집회는 성겨에서 매우 분명히 구분되어 있다.

사도의 성격을 띠고 있는 집회는 믿지 않는 사람에 대한 것과 믿는 사람에
대한 것의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예루사렘에서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인’(행 2:14) 것은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로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사도가 말씀을 전한 것이다.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가 이스람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한 것(행 3: 12)도 한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말한,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인 것이다. 후에 사도들이 고넬료의 집에 이르러 말씀을 전한 것(행10장)도 또한 거기서 다만 복음을 전하고 한 사람이 말하고 모든 사람이 듣는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였다. 사도행전 13장과 같이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이 모든 사람에게 말씀을 전한 것도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니라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였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런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가 매우 많다는 것을
알 것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에 관하여도 믿는이들에게 전했지만 역시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였다. 거기서 바울은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믿는이들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그 성질은 교회적인 전체적인 것이 아니라 바울의 일방적인 것이다. 바울이 드로아에서 말씀을 전한 것은 바울이 그곳을 지나갔기 때문이다. 지방 교회는 사도가 그 지방을 지나갈 때 기회를 틈타서 사도에게 말씀을 전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와서 듣는 것은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가 아니라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후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거하는 곳에 왔으므로 바울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들에게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 일을 증거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 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행
28 : 23, 30, 31). 이것 또한 사도 한 사람이 전하고 모든 사람이 듣는 사도의 성격을 띤 집회이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독교에는 두 종류의 집회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한 사람이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은 말씀을 듣는 집회이다. 이런 집회는 곧 사역적 집회이다.

성경에 있는 또 한 종류의 집회는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의 집회이다. ‘너희
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이런 종류의 집회는 지방 교회의 집회이다.
교회가 집회할 때에는 한 사람이 말씀을 주도하여 말씀을 전하고 모든 사람이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혹은 찬송시도 있으며 혹은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 등도 있는 것이다. 이런
집회에서는 당신이 전할 수도 있고 내가 전할 수도 있다. 꼭 누가 전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일어날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일어날 수도 있다. 일정한 것이 없고 ‘…도 있다’. 그러므로 이런 집회의 원칙은 피차 상호적이다. 아마 오늘은 내가 일어나서 전하고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일어나서 전할 것이다.
아마 오늘은 당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형제들을 돕고 다음에는 아마 내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형제를 도울 것이다. 이것이 ‘둘이나 셋이나’(27, 29절)의 종류의 집회이다. 이런 종류의 집회는 성질이 피차 상호적인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성격을 띤 집회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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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매인교회 카페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이근호 목사님 답변 바랍니다.
이근호 2003-08-20 21:38:28, 조회 : 157, 추천 : 9

가상해서 이런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약 10명의 교인들이 모였습니다. 모두들 성령받았다고 자부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모두들 성령이 역사하시는대로 설교할 자격이 있으면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어야 참된 교회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10명 교인들이 서로들 설교, 내지는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바, 혹은 은혜받은 바로 고백하고 있었는데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가만히 보니 자기네들 가운데 눈에 띄게 남들보다 말씀을 조리있게 잘 전하고, 내용도 더 깊고 풍성하고 실제적인 상황과 적절하게 연결하게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따로 있음을 감잡은 것입니다.
그것도 이구동성으로 말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설교를 전담하는 봉사자로 세우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은 설교해서는 아니된다든지, 혹은 그 설교자로 세움받은 자는 앞으로 비복음적인 소리를 해도 다른 사람들은 대들어서는 아니된다는지 하는 것을 도저히 그 모임에서 여전히 용납이 하지 않는 조건 하에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같이 설교할 수도 있는데 워낙 다른 이보다 복음을 잘 설명하고 잘 증거하니 설교로 봉사하라고 세운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 따라 사례비와 생활비는 교회에서 전담하기로 합의받습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갑자가 그 설교자가 어떤 사정에 의해서 설교를 그만두고 그 교회에 출석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서 각자 서로 은혜받은 것으로 서로 나눈는 것이 이상적인(理想的)인 교회가 아닌가 하고 교회 정체성을 생각하는 겁니다.

지금 매인교회의 경우, 박기삼 선생님께서 설교를 그만두고 나가시고 난 뒤 분명 그 뒤 전문 설교자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언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그 글을 올린 것이 매인교회 대부분 다수 의견이지 아니면 교회 불만이 가진 소수나 개인이 마치 다수 의견처럼 위장해서 올린 것인지를 잘 분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현 설교자의 설교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간접적 불만을 드러낸 겁니다.

그러니 사태 추이를 지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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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활짝 핀 구원의 꽃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서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김병구 2003-08-22 02:53:52, 조회 : 116, 추천 : 12

교회개혁과 개인구원을 사랑의 실천으로 이룩하자

바울 사도의 주된 관심은 이신 칭의에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로마서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로마서 4: 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그러나 그는 사랑을 통한 의로움도 가르칩니다.

로마서 5: 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골로세서 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여김을 받게 만드나, 그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일함으로써 우리를 성화시켜 갑니다
갈라디아서 5: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빌립보서 1: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칼 발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대가 없는 은혜로 인간에게 얼굴을 향(칭의)하실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나님 자신을 만드신다(성화). 화해는 하나님의 겸손해 지심과 성화를 통한 인간의 높아짐으로 이루어 진다. 발트에게 있어서는 칭의는 또한 의롭게 만드는 것이다. 의화(의롭게 됨)과 성화는 구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의화와 성화는 우열이 없으며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을 위한 것이다.
신자는 믿음으로 의화되는 것처럼 사랑으로 성화됩니다. 사랑과 믿음은 둘 다 인간의 구원에 필수 적입니다. 주님의 주신 새 계명을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아닌가요.
사랑은 믿음 가운데서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베풀어질 수 있으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사랑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는 칼 발트의 생각에 동조하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들을 의화 시키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들을 성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화는 성령님의 주도하에서 그분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만 이루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성화 작업에 우리는 순종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이제까지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많이 들어왔고 그 덕분에 자신들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누구에게나 전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믿음은 강합니다. 우리들에게 아직 부족한 것은 사랑의 실천을 통한 하나님의 성화작업에의 참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제일은 사랑이라는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랑을 믿음 보다 덜 소중하게 생각해온 것은 아닌지요? 믿음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믿음과 그 믿음을 통한 칭의와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구원, 자기 영생, 자기 행복 중심에서 맴돌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할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그러한 믿음으로 영생을 얻겠다는 것은 뻔뻔한 자세가 아닐까요?
다음의 성경 말씀은 깊이 묵상하고 항상 기억해야 할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요한 3서: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거듭난 새 생명,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 영적 생명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우리가 아직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육적 생명을 항상 이기는 거룩한 삶,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감을 통하여 칭의에서 시작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십시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가 열망하는 교회개혁도 목사와 장로를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한다면, 오늘 이라도 당장 이루어 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면, 목사에게 순종해야 복 받는 다는 무속신앙의 편린이 교회를 바르게 하자는 성도들을 회유 또는 협박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당회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 않고 교회의 재산과 재산에 정신을 빼앗기는 일도 사라질 것입니다. 교회재정은 투명하여지고 건전하여 질 것입니다.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수 많은 미 자립 교회의 목회자들이 생계를 위협 당하는 일이 살아질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합시다. 정말 쓸모 없는 우리들, 죄성과 죄악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십자가 사건을 자신의 구원사건으로 믿게 해주신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하나님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새롭게 태어난 영적 생명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매일 같이 육적 생명을 처 물리치고 경건하고, 거룩하여, 죄를 지을 수 없게 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으로 천국에 가서 잘했다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우리 모두가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우리를 성화시키는 작업에 참여한다면, 한국 교회의 개혁도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사랑으로 이루어 지고야 말 것입니다. 교회개혁을 호소하는 일도, 교회나 기독교 기관이나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일도 사랑으로 합시다. 그리고 사랑은 우선 사랑을 받아야 할 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지혜를 얻어 실천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합시다. 성경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사랑이 더 풍성해 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으로 활짝 핀 구원의 꽃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서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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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믿음으로 활짝 핀 구원의 꽃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서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근호 2003-08-22 06:52:14, 조회 : 170, 추천 : 11

엄기욱씨에게 한 답변한 것과 똑같이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최고의 이웃 사랑은, 복음 소개입니다.
만약 개인이 개인을 상대한다면 이것 또한 개인주의적 행태의 범주에 속한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를 보편적으로 저주받은 죄인으로 간주해서 상대에게 복으으로 다가서는 것은 개인주의적 한계를 극복한 상태의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을 완성하신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위하여 십자가 진다고해서 그 사람이 그 효과로 지옥에서 면제될 수 있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에 있어 최고의 이웃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4-19)

이웃 사랑없는 기도란 가증한 것이겠지요.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랑을 집결시켜 이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복음으로 악마와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이든 하나님 사랑이든 모두 십자가 복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저 인류의 복지 증진과 측은지심에 기초한 행태들은 그 자체가 '자기 부인'을 훼방하는 짓들이며 이런 업적들이 모여 예수님의 복음의 대적하는 세력으로 성장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부흥'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는 악마의 다른 얼굴들입니다.
복음 증거 이외에 그 어떤 이웃 사랑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십자가는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완결판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추신:
본회퍼나 칼 바르트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신학과 철학하의 허상' 난에 들어가셔서, '율법의 세가지 용도'라는 글을 통해서 조직신학이 갖는 한계를 구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칼 바르트에 대해서는, 칼 바르트의 예정론과 칼빈의 예정에 대해서 제가 반박한 글이 '성경신학의 세계'라는 난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한 번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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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활짝 핀 구원의 꽃은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서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김병구 2003/08/22 12 117
[re] 님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구득영 2003-08-22 15:17:25, 조회 : 139, 추천 : 12

님은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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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