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명을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2003-08-09
[십계명을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2003-08-09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십계명을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구득영 2003-08-09 21:32:39, 조회 : 146, 추천 : 12
십계명은
제 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제 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
제 3계명: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제 4계명: 안식일을 지켜서
제 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 6계명: 살인하지 말라
제 7계명: 간음하지 말라
제 8계명: 도적질하지 말라
제 9계명: 거짓 증거하지 말라
제 10계명: 탐내지 말라 입니다.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제 1계명: 예수의 이름 외에 모든 존재는 다 무가치하다.
제 2계명: 예수님의 이름만 남겨라
제 3계명: 예수님의 이름을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는 용도로 사용하지 말라
제 4계명: 예수님의 안식일의 주인이기에 이미 완성되었다
제 5계명: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6계명: 살인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7계명: 간음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8계명: 도적질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9계명: 거짓 증거한 죄를 용서해주겠다
제 10계명: 탐을 낸 죄를 용서해주겠다
이근호 목사님의 마태복음 설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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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근호 목사님, 주기도문을 출애굽식으로 설명하면 어떻게 됩니까?
언젠가 강의를 하셨는데, 그 부분을 찾을 수가 없네요. 억수로 좋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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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계명을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이근호 2003-08-10 10:03:25, 조회 : 131, 추천 : 11
>출애굽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앞장 세우십니다.
'이름'을 앞장 세운다면 말은, 자신의 언약을 적용 개시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출 6:6-6)
'이름'은 곧 '기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 기능은 자기 아들 만들기와 연관있습니다.(출 4:22-23)
주기도문 처음에 이렇게 시작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의 등장은, 하나님의 이름만이 해내시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십계명이나 주기도문이나 모두 '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수립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의 작품인 것을 인정하는 고백문입니다.
주기도문의 내용 가운데서, '죄에서의 건짐'이나 '일용할 양식'이나 이 모두가 '아들됨'이라는 언약적 조건 안에서 가능함을 고백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 이름 덕분에 저희들은 죄용서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친 아들'이 되었음을 신앙하는 자의 기도가 되지요.
그런데 십계명에서는 그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로 되어 있지만, 주기도문에서는 아직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영광이 어떤 식으로 유효할 수 있는지 유보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지신 이후에는 이점이 확연해집니다.
"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결국 주기도문의 실질적인 성취자는 예수님 뿐이며, 이러한 공로성이 오늘날 그대로 적용된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양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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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구득영 2003/08/09 12 147
[re] 이러면 어떨지
김인학 2003-08-10 12:45:10, 조회 : 113, 추천 : 9
하여튼 기발하신 아이디어에 두 손 다 들었습니다.
저도 흉내 한 번 내보려는데 괜찮을지요?
신약은 주의 영으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자동적인 삶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십계명의 틀에 이렇게 써넣어 보면 어떨까요?
가령- (서문) 나의 큰 은혜를 예수 안에서 받은 성도들아
1 : 나(하나님)만 섬길 은혜를 너희에게 주었노라
4 : 내(예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라.
7 : 예수 안에서 죄악을 다 이겼노라.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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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러면 어떨지
이근호 2003-08-10 16:12:58, 조회 : 138, 추천 : 10
>하나님과 예수님이 상호 혼돈될 수가 있고,
또 죄악을 이기게 해주시는 것이 십계명의 완성인지, 아니면 인간이 죄악을 이기는 것이 완성이지가 모호합니다만, 대체로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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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을 주기도문식으로 말로 바뀌면.... 구득영 2003/08/09 12 147
[re]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 아닙니까?
최종운 2003-08-10 13:07:59, 조회 : 119, 추천 : 12
복음이란 율법을 폐하는 동시에 완성는것인데 십계명을 주기도문식으로 표현하신것을 보니까 바로 복음의 핵심을 적절하게 표현하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멍청한 우리의 머리로서는 상상할 수 도 없는데 복음의 메세지를 이렇게 간결하고 쉽게 말하는것을 보면 존경스럽고 예수님의 참된 복음의 의미를 깨닫지 않고서는 불가능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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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무성 목사님.
피옷입은자 2003-08-10 20:15:34, 조회 : 137, 추천 : 8
매번 이렇게 부탁드려 죄송합니다.
존머레이의 결정적 성화교리를 비판하신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에 대해선데요.
그 강의 참고자료로 김광렬 교수의 논문을 사용한 것 같은데.
김광렬 교수의 논문이 있어야 아무래도 강의를 이해하기 쉬울것 같다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혹시 김광렬교수의 성화에 대한 논문을 웹상에서 구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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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손무성 목사님.
구득영 2003-08-10 20:24:31, 조회 : 132, 추천 : 13
저도 그 당시 노력을 했는데 못구했습니다. 지금은 혹시 지금 가지고 계시는 분은 좀 올려주시묜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그 강의정리에서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를 빼버리면 김광렬 교수의 논문이 됩니다.
제가 그 당시 스캐너로 떠서 아르미로 변환하며 만든 자료입니다. 단 각주만 빼고 말입니다.
'*'로 시작하는 것이 강의정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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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손무성 목사님.
손무성 2003-08-11 08:26:37, 조회 : 109, 추천 : 11
저도 이 부분을 복사한 것으로 받았을 뿐 현재로는 문서로 작성된 것은 없습니다.
혹시 이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 김광렬 교수의 성화에 대한 논문 가지고 계시는분 올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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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렬 교수의 논문은...여기에...
이창섭 2003-08-15 13:03:04, 조회 : 115, 추천 : 4
이게 책으로 나왔습니다...
총신대출판부에서 구원과 성화라는 제목으로 출판 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어떤 분이 김광렬교수의 논문을 평을 해둔것을 제가 가지고 있는데 누구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숙한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발전을 기대하면서
총신대학교와 미국 웨스트민스터에서 수학하고 총신대학교 신학과에서 후배들을 가르치고 계시는 김광렬 교수께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제출했던 박사 학위 논문("A Tension between Desire to Follow the Example of Jesus' Life and the Desire to Trust in His Redemptive Work: Theology of John Wesley Reflected in his Christian Library," 1992)에 서 가졌던 관심을 우리 상황에 더 맞게 고쳐 써서 그 동안 여러 곳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으 고, 또 일부를 보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과 성화}라는 제목으로 귀한 책을 출간하 셨다. 귀국 후 수년 동안에 발표된 논문들이지만 기본적으로 학위 논문에 기초해 있고, 계속 해서 구원과 성화라는 한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쓰여진 이 글들은 논문집으로보다는 훌륭한 한 권의 단행본으로서의 형태를 잘 갖추고 있다. 이 책은 한국 교회 조직 신학의 두 번째 세대의 성숙해 가는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박형룡 박사를 비롯한 초기 한 국 신학자들이 서구 개혁파 신학을 잘 번역, 번안하여 소개했다면, 이제는 더 진전해 가는 서구 개혁파 신학을 반영하면서 이전의 개혁 신학을 좀더 창의적으로 전진시키고 있는 두 번째 세대 조직신학자의 역할을 김 교수께서 이 책에서 훌륭하게 감당하셨다고 생각한다. 이 서평에서 나는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이 책에서의 김 교수의 공헌을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김 교수께서는 20세기 후반에 나타나고 있는 미국 개혁신학계의 발전을 잘 반영하면서 구원과 성화에 대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그의 은사인 개핀 등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입장의 충실한 반영자라고 할 수 있다.
(1)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대한 전통적 논의에 대한 대안으로 김 교수는 그 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 구원의 서정을 원형적으로 접근하여 이해하려는 개핀 등의 입 장을 따르며 구원의 서정을 논의하고 있다.
(2) 그리고 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임을 분명 히 하여(28), 이런 접근법이 그리스도 중심의 접근 방식(28, 37)일뿐만 아니라, 성령 중심의 접근법이기도 함을 잘 시사하신다.
(3) 이와 연관하여 김 교수께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표현하고 계신다. 예를 들어서, 그는 구약 시대의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세대주의 신학자 샤퍼(Chafer)에 반해서, "구약 시대를 포함해서 오순절 전에도 중생의 역사가 있었고, 따라서 그와 같은 성령님의 중생 역사로 인하여 구약 성도들 도 구원을 받은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고(226), 또한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을 개개 인들의 성도들에게 적용되도록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도 신, 구약 속에서 모두 존재한다 고 본다"는 분명한 입장을 잘 표현한다(217). 또한 오순절주의의 성화론을 논박하시면서 진 정한 중생을 성령 세례와 함께 보는 개혁주의적 입장을 잘 드러내신다(183). 이와 연관하여 오순절 신학의 "제 2 의 축복의 신학"의 다양한 문제점들에 대한 바른 비판(273, 275), "내 적 음성"의 계시에 대한 바른 비판(274), 감정주의와 반지성주의에 대한 비판(276) 등에서 그의 개혁신학적 태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기적적인 은사들은 "사도들 에게만 제한된 역사"라고 하며, "교회의 기초가 세워지고 성경 말씀의 계시가 종결된 이후 에는 더 이상 불필요하다"고(274) 개혁신학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4) 중생에서의 인간의 수동성을 강조하면서 "중생케 되는 것이라고 해야 더 정확 한 표현이 될 것이다"는 지적도(51, 339)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도 개혁신학적 입장에 충실 할 것을 요구하는 중요한 한 표현으로 인정될 수 있다. 더구나 중생에서의 죄의 인지적 영 향을 제거를 언급하면서 중생에 인지적 측면이 있음을 밝힌 것은(51f.), 앞으로 개혁신학계 에서 이 측면이 폭 넓게 발전되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시사적인 것이 아닐 수 없 다. 또한 "중생자는 그의 감정, 욕구들도 과거와 다른 새로운 방향성을 지닌 감정과 욕구들 을 느끼며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는 지적도 매우 훌륭한 것이다(53). 이런 측면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해오신 김홍전 목사님의 저작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충한다면 개혁주의적 중 생관의 분명한 입장이 잘 드러나게 되리라고 본다.
(5) 중생의 뿌리에서 온 회개와 신앙의 밀접한 연관성을 설명하면서 "모든 참 믿음 은 회개하는 믿음"이라고 잘 표현한 것도 개혁신학의 입장에 충실한 것이다(58). 그리고 믿 음의 단지 도구적 성격에 대한 강조(65)도 칼빈적 믿음 이해를 잘 반영하는 것이다.
(6) 특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표현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표현은 "상호 교체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개념들이다"고 밝히고 있는 것은(32) 매우 중요한 성경에 대한 통찰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7)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심판대 앞에서의 최종적 선언을 칭의의 '이미'와 '아 직 아니'로 설명하고 있는 것도 개혁신학적 논의를 따르는 매우 중요한 통찰의 표현이다(41).
(8)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신자는 더 이상 "옛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162) 과거의 개혁신학자들도 부정확하게 썼던 용어의 사용을 머레이와 후크마의 논의 를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바꾸어 사용하고자 하는 매우 중요한 개혁신학적 논의의 하나임을 강조해야 한다.
그 외에 (칭의와 성화의 연관성, 성도의 견인 교리 등에 대한) 김 교수의 설명은 전 통적 개혁주의의 입장을 잘 반영하고 있는 좋은 논의들로 여겨 질 수 있다.
둘째로, 이렇게 개혁주의적 구원론에 충실하면서도 (특히 그의 관심 영역인 성화론 과 관련해서는)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구원론과의 비교적 밀도 있는 비교적 성숙한 신학적 작업의 한 예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 논의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자들 사이의 토론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논의들이 성경적 성 화관에 대한 더욱 온전한 이해를 얻기 위한 발전적 논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김 교수의 말씀 가운데서도(98, 315), 우리는 다양한 복음주의주의자들과 대화하면 서 보다 성경적 방향으로 교리를 발전시키려는 개혁주의 신학 작업의 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성화론을 고찰하면서, 고전적 루터교의 성화론(제 5 장)과 웨슬리주의 적 성화론(제 6 장), 19세기 미국의 성결 운동과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제 8 장), 오순절주의 의 성화론(제 10 장)을 개혁주의적 성화론과 비교하면서 고찰하고, 종국적으로는 결정적 성 화(definitive sanctification)와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에 대한 머레이의 입장 을 좋은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따르고 있는 것은(제 7 장, 9 장, 11장) 한국 교회 제 2 세대 개혁주의 조직신학이 다양한 복음주의적 입장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와 대화하면서 좀더 성 경적인 개혁신학적 입장을 제시하려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고 여겨진다.
셋째로, 김 교수는 전통적 개혁신학을 보스 등에 의해서 제안된 성경신학과의 연관 성 가운데서 전개할 것을 제안하고 실천하는 개혁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유기적 관계"를 강조하면서(300), 보스(Geerhardus Vos), 머레이(John Murray), 클라인(Meredith G. Kline), 개핀(Richard B. Gaffin) 등의 신학 작업에 따를 것을 강하게 제 안하고 있다. (이는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쓸데없이 대립적으로 바라보는 보수 신학계의 상황 가운데서 매우 중요하고 정상적인 관계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는 종 말을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하는, 즉 교회의 현재 상태를 포함하는 종말 개념으로 보게" 한 보스의 공헌을 말하는 개핀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런 성경신학적 통찰을 "종말론 에서뿐만 아니라, 기독론, 그리고 구원론과 같은 논의들 속에서도 ...... 새로운 회복"을 기대 해야 한다고 말한다(303). 이는 보스와 개핀의 중요한 지적을 아주 잘 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적용의 하나로 칭의가 "종말론적인 의"라는 것을 개핀을 따라서 잘 제시하고 있다(73, 85).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에서도 김교수께서는"이미 도래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304)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역시 같은 이해를 잘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고(故) 박형룡 교수조차도 벌코프에게 충실하여 이점에 대해서 정확한 지적을 하였다는 것도 잘 지 적하고 있다: "그도[박형룡도] ...... 신자들은 이미 임재한 천국에서 살고 있으며, 영생이 원 칙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들을 언급했었기 때문이다"(307). 이제 문제는 이런 통찰을 지 적하는 신학자들과 함께 우리의 일상적 종교 언어 의 사용에서 이런 종말 개념과 하나님 나 라 개념을 실제로 반영하느냐 하는 것이다.
넷째로, 김 교수는 이 책에서 정상적인 조직신학은 매우 실천적인 사역임을 잘 드러내어 주고 있다. 그는 이 책 전체를 통해서 독자들이 온전한 의미에서 "주만 바라보는 신 앙"을 가지도록 하려는 관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1, 12, 317). 그의 글에서 그가 결론에서 말하고 있는 "한국 교회 안에서 구원과 성화에 대한 이해가 개혁 신학의 가르침 속에서 좀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자리잡아 가기를" 바라는 염원이 잘 나타나 있다(317). 특히 성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것이 "현실적인 중요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 에서도(93, 94) 이런 실천적 관심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전형적인 개혁신학 자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가르침과 글들 속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를 "'신학 과 실천' 혹은 '교리와 삶'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와 작업"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153) 유의하라. 이처럼 바른 신학은 매우 실천적이다.
더구나 그는 부록으로 실은 두 편의 논문 가운데서 자신이 전공한 구원론과 기독교 교육을 연관시키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교육을 통한 회심," "교육을 통한 성화." 총신대 학교의 기독교 교육연구소에서 주최한 학술세미나에서의 발제였었다는 외적인 요구가 있었기는 하지만, 이런 시도는 좋은 개혁파 신학자가 기독교 교육에 관심을 나타낸 오랜 전통, 즉 헤르만 바빙크, 코넬리우스 반틸, 죤 머레이가 보여준 전통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져 환영하게 된다. 우리들의 왜곡되어 있고 잘못된 인상에도 불구하고, 좋은 조직 신학자는 늘 기독교 교육이라는 실천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신 학의 실천성을 보여 주는 한 좋은 예가 된다.
이상의 네 가지 측면에서 김 교수님의 이 책은 좋은 개혁신학서의 모습을 잘 드러 내어 주고 있다. 그의 논의는 개혁 신학적이고, 다양한 복음주의 전통들과 긍정적으로 대화 하는 신학이며, 성경신학과 유기적 관계를 나타내는 건강한 조직신학이고, 매우 실천적인 신학이다. 만일에 김 교수님과 우리 모두가 이 네 가지 특성에 끝까지 충실해나가려고 한다면 우리는 과거에 영광스러웠던 개혁신학을 오늘 이 땅 가운데서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몇 가지만을 사족으로 지적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점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 다.
첫째로, 구원의 서정에 대한 전통적 입장에 대해 제시되는 문제와 비판과 관련해서, 그런 입장의 현대의 극단적 대변자가 머레이(Murray)라면(20), 그에게 대해서 과연 베르까 우워가 말하는 비판이나(23, 24), 김 교수님께서 26쪽에서 제시하는 비판을 적용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를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의 서정'에 대한 머레이의 이해를 과연 직선적 접근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전통적 논의 방식의 대안으로 지적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은 김 교수님께서 인정하시는 대로 이미 머레이가 강조하는 것이며(27), 사실 벌코프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과거 선배들이 사용한 구원의 서정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느냐는 것이 된다. 개핀이 잘 말하듯이 구원의 서정의 여러 요소들은 한 구원 사건의 여러 측면을 말하는 것이나, 과거의 신학자들은 (김 교수님께서 정확히 지적하고 있듯이) "그 각각의 요소들 사이에 놓여 있는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를 확보하려는"(18, 44-45, 71) 것이 아닌가? 심지어 후크마도 "중생이 ...... 믿음, 회개, 성화 등등에 대해서 원인적 우선 순위"(causal priority)를 지닌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전통적 신학자들도 어떤 것들은 "서로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는 없다"(43)는 것을 밝히지 않았는가? 그러나 "구원의 서정" 개념을 계속해서 사용할 것인가 하는 것은 개혁신학자들 사이의 매우 중요한 논쟁 거리(agenda)가 될 수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개핀이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시사하였으나 근본적으로는 다루지 않은 이 문제가 앞으로의 조직신학 논의의 중요한 논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전통적 구원의 서정 논의가 신약적 종말론적 특성을 잘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논의는 매우 중요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머레이도 그런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또 제기 될 수 있다.) 김 교수님은 개핀, 베르까우워, 후크마 등에 동의하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으나, 어떤 점에서는 전통적 입장을 따르는 김 교수님의 논의에 아직 설득되지 않은 신학자들과의 논쟁이 남아 있다고 여겨진다.
둘째로, 김 교수님께서는 현대의 다양한 복음주의 성화관과의 대화 가운데서 개혁 주의 성화관을 제시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본인이 학위 논문을 썼던 웨슬리적 성화관에 대한 논의에서는 비교적 자세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나, 그 외에는 주로 도날드 알렉산더 (Donald L. Alexander)가 편집한 {기독교적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Downers Grove, Ill.: IVP, 1988)에 나온 논의들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 아쉬운 점이 있다.
셋째로, 김 교수님처럼 성경 신학과의 밀접한 연관성 가운데서 조직신학을 하려는 신학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아쉬운 점들을 언급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고린도후서 5:17의 "새로운 피조물"(kaine ktisis) 개념을 하나님의 재창조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336) 여전히 개별적인 개념으로 말씀하고 계신데 (48, 336), 이것이 피조계 전체의 새로움을 말한다는 보스의 말을 알고 있는 신학자에게서 이는 기대하기 어려운 표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2) 주해적으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구절들에 대해서 김 교수님께서는 개혁신학 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하나의 해석만을 선택하여 비교적 그 입장에 충실한 태도 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논의를 위해서는 좋으나, 주해적 가능성을 다 제시하고 자신이 택한 해석이 지지되야 하는 이유를 좀더 밝히는 주해적 논의의 아쉬움 을 나타내는 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예를 들자면, 히 6:4ff.에 대한 논의나 로마서 7장 에 대한 논의는 그런 주해적 단면성을 나타내 보이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3) 성경 신학적 종말관과 하나님 나라[天國] 개념을 비교적 정확하게 사용하시면서도 때때로 한국 교회의 전통적 용어의 사용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점은 매우 아쉬운 점의 하나이다. 예를 들어 다음 같은 진술을 보라: "신자가 된 후에도 하늘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의 안에는 내주하는 죄는 여전히 있게 되기 마련이다"(151).
넷째로, 기독교 교육과 관련한 논의에서 중생과 중생 직후에 나타나는 처음 단계의 신앙과 회개는 교회 교육의 목적이 될 수 없지만, 계속되는 신자의 삶 속에서의 믿음과 회 개는 교회 교육의 목표가 될 수 있다는 논의는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계속되는 신자 의 삶 속에서의 회개와 믿음도 '회심'(conversion)이라고 명명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제 기 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일반적으로 '회심' 또는 '변개'(conversion)라는 말은 죄를 향해 나 아가던 삶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삶으로 방향 전환하는 것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러 므로 이는 중생 후의 첫 단계에서의 회개와 믿음에만 적용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계속되는 삶에서의 회개와 신앙에 대해서도 회심(conversion)이라는 용어 가 과연 사용될 수 잇는가 하는 심각한 질문이 제기 될 수 있다. 김 교수께서 동의하고 있 는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이런 의미의 회심은 하나님께서 중생을 통해 사람으로 하도록 하는 사역이므로 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단지 교육의 주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으 로 보며, 인간 교사는 하나님의 교육(educatio Dei)의 조력자라고 보는 입장에서는 중생과 회심이 불신자에 대한 교육의 목적이고, 성화, 죽 계속되는 믿음과 회개가 중생자를 위한 교육의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출판부에서는 각주의 사용과 참고 도서의 작성과 교정과 교열에 좀더 신경을 썼었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고 싶다.
그러나 이런 문제 제기는 우리 모두가 좀더 성숙하고 온전한 개혁신학을 해 나가 우리네 교회를 좀더 잘 섬기기 위해서 하는 지적일 뿐이다. 부디 우리 모두가 이런 점들에 유의해서 김 교수님께서 이 책 가운데서 잘 제시하고 있는 온전한 개혁 신학을 이 땅에서 전개하여 나갈 수 있기를 원하면서, 이 책의 진지한 일독(一讀)을 여러 층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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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근거한 온전한 구원론만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김병구 2003-08-14 02:21:06, 조회 : 170, 추천 : 6
성경에 근거한 온전한 구원론만을 설교해야
I. 성경에 근거한 온전한 구원론
로마서10:9-10은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하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의 죄를 회개 자복하고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될 때, 성령의 임하심으로 거듭나게 되며 의롭게 여기심(칭의)을 받아 구원을 얻게 됩니다.
한편, 로마서 7: 22-23은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9:26-27은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 이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22-25은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 지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9:23-24에서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은 인간도 육신을 입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은 육신의 욕망,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을 쫓는 자신의 육신을 제어해야 하는 투쟁을 회피할 수 없으며 매일과 같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주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자기 자신의 구주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인간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예수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웃 사랑에 자기 모든 것을 바치는 청지기의 삶을 통하여 성화되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죄악의 흔적마저 씻겨져 영화롭게 됨으로써 구원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9-21은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20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21 나더러 주여 ! 주여 !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구원의 진리를 극명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II. 칭의(Justification) 구원론은 온전히 복음적이 아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행위가 공동으로 구원을 이룬다는 로마가톨릭의 신인(하나님과 사람)협력 구원론에 대한 반동으로 개신교단이 세례를 받고 공중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편의상 필자가 명명하는 바, 칭의 구원론이 미국에서도 한 때 영향력을 발휘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러한 미국 교단의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칭의 구원론이 위세를 떨쳤으며, 작금도 그러한 칭의 구원론이 칭의-성화-영화를 통한 구원론과 함께, 무분별하게 설교되어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즉석 구원론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대속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의 삶 간의 분리 할 수 없는 관계 홀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원을 칭의와 동일시하여 구원이 전 생애 걸친 성화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마침내 육신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인간의 영혼에 묻은 죄악의 흔적이 완전이 소멸됨으로써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선물이 복음에 대한 피상적인 지적 동조와 자발적 순복 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온전한 헌신과 일생에 걸친 제자의 삶을 요청하는 것을 한국의 개신교의 주류는 아직도 온전하게 강조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된다.
구원의 선물이 밭의 보화나, 그것을 갖기 위하여 모든 것을 팔아야 하는 값진 진주에 비유되는 천국의 예화가 응분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하나님의 나라는 종의 품(행위)으로 얻는 것이 아니고 아들이 받는 유산(은혜)라는 예화는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산 상속자는 온전한 순종과 제사의 삶을 통하여 그러한 상속을 받게 된다는 것을 칼빈 자신의 경건한 삶을 통하여서 간증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떠나서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 없음을 분명하게 한 것은 경건주의자들과 청교도들이었다. 크리스천의 삶은 단순한 믿음의 열매나 부산물이 아니고, 많은 유혹과 핍박이 있는 역경 가운데서 선한 싸움을 통하여 믿음이 만들어 내는 산물이다.
본 훼파에 따르면 구원은 은혜와 행위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타락한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이 있기까지는 아무런 선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은혜가 베풀어진 이후에야 만 선한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오직 은혜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다.
III. 칭의 구원론의 해악
구원의 시작만 말하고 필수적인 구원의 과정과 완성을 도외시하는 칭의 구원론은 이미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에서는 이를 이단시하고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자에게 시작은 있으나 과정이 없고 완성이 없는 구원을 가르침으로써 삶을 통한 하나님 나라확장과 이웃사랑 실행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도외시하게 하는 경향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칭의 구원론의 해악은 우선 성도들의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나 세상에서는 믿는 않는 불신자와 똑 같은 세상을 쫓는 삶을 살게 만들고 있다. 아니 이제 세례 받고 신앙 고백하여 천국 가는 승차권은 확보되었다는 잘못된 믿음으로 세상 사람들 보다도 더 쉽게 죄악을 범하는 경향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경우에는 5,000년 동안을 이어온 무속신앙이 신자들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히 씻겨내 지지 못하고 있는 개연성이 큼을 생각하면, 그러한 칭의 구원론이 기복 신앙의 온상이 되고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야 복받고 천국간다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구원론을 목사와 장로들의목사님의 불의를 지적하는 신실한 신자들을 회유하고 때로는 위협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현실을 낳고 있는 원흉이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허다한 중대형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성경말씀에 순종하여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보다 교회 재산과 재정 등에 정신이 팔려 갖가지 불미 스러운 작태를 보이고 있음도 설교를 담당하는 목회자 자신이 이러한 칭의 구 원론을 신봉하기 때문에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인당 소득이 미화 1만 달러를 상회하여 경제적으로 살만한 대한민국에서 작년 통계로 매일 36명의 인명이 자살을 범한다는 한국 사회의 현상, 그리고 그 중에 신자와 심지어 목사까지 포함되어있는 참혹한 우리의 현실의 전개에 칭의 구원론이 한 몫을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견강부회일까?
최근 필자가 뉴스파워에 기고한 “크리스천을 자살할 수 없다”는 글에 대하여, 한번 구원 받았으므로 자살해도 칭의 구원을 받았던 신자는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음도 저간의 실상을 말해준다고 생각된다.
IV 맺는 말
그러므로 미국의 복음주의 교단이 이미 이단으로 판정한 칭의 구원론에 머무르기를 하루 속히 끝내고, 칭의-성화-영화의 온전한 구원론 만을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설교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주의할 것을 칭의 구원론과 온전한 구원론를 무분별하게 편의에 따라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불필요한 혼동과 방황을 초래하는 해악을 저지르는 선한 목자가 할 일이 아님을 지적하고 싶다.
이 글을 일고 많은 분들이 질문해 오실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그러한 질문에 답하려 애쓰고 공부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과 깨우치시므로 더욱 온전한 복음주의 구원론이 완성되어 갈 수 있기를 기도 드린다.
참고 서적:
Martin Luther, John Dillan Berger
The Holly spirit, Billy Graham
Essentials of Evangelical Theology, Donald, G Bloe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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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말씀에 근거한 온전한 구원론만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이근호 2003-08-14 06:49:43, 조회 : 215, 추천 : 15
>이래되면 막가자는 이야기입니까?
사람의 행위란 그 사람의 존재성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귀하께서 계속 꾸준히 오해하시는 것은, 사람 자체가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한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칭의 끌어당기고, 그 다음에 또 성화 끌어당기고, , 그 다음에 또 영화 끌어당겨서 그래서 종합적으로 자신을 천국에 도달시키는 것으로 오해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 구속 사업을 자신이 마음껏 이용에서 천국이나 가보자는 속셈 밖에 안됩니다.
저는 이런 구원론 자체를 지지하고 유지하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싶습니다. 만약에 이런 구원욕구를 가지고 말하기를 "성화없이 칭의만으로 구원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저도 귀하와 같이 그 사람을 이단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는, "하나님 이용해서 너 구원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하니 구원되더라"를 남에게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은혜와 공로를 주셨다"라는 것을 증거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23-24에 보면,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악한 지혜와 대처하는 지혜와 능력은, 교회 개혁도 아니요, 괜찮은 교회 만들기도 아니요, 자신의 성화됨도 아닙니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귀하의 문제점은, 수십 년 교회 다닌 그 쓰레기 같은 경력을 못 버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쓰레기는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버리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 버려도 예수님이 주신 피의 공로만 담긴다면 괜찮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제발 자신의 과거의 업적에 눈 돌리지 마시고 귀하께서 어떠한 것을 증거할 사람이 되기를 지금도 예수님이 고대하는 지 그 점만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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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말씀에 근거한 온전한 구원론만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엄기욱 (Homepage) 2003-08-14 21:12:29, 조회 : 136, 추천 : 11
아래의 글은 죄사함이라는 주제와 관련지어 우리의 구원을 생각해본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가 라는 각도로 이 글을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되어야 할까?
영혼의 구원과 관련지어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그 영혼이 이제 죄를 범하지 않도록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내면의 악은 그대로인 채 이미 범한 죄와 그것에 따르는 형벌을 어떤 특수한 방법으로 제거해 주는 그런 기적 같은 사면을 고대하는 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의 구원이란 오랜 신앙 여정을 거치는 동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에 빠져 있던 삶에서 돌이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삶을 즐거워하는 상태로 우리 영혼의 성품이 변화되어진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성된 영혼의 성품은 저 세상에서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사람 내면에 형성되는 신앙의 질이라는 것은 그의 의지와 이해성에 끊임없이 찾아오는 악이나 거짓된 사상과의 싸움을 통해서 아주 조금씩 변화되기에 이는 어느 한 순간 혹은 짧은 시간 안에 급조되지 아니하고 전 생애를 망라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우리 주위에서 갑작스런 영혼 변화의 물결을 타시는 분을 보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저 길고 긴 인생 여정에 비추어보면 한 시점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요. 구원은 육신의 생명이 끝나는 그 날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할 인생의 최대과제일 것입니다.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가 하는 것은 그 영혼의 질이 어떠한가와 같습니다. 영혼의 형상은 사람 자신이 본질적으로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애정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때까지 그 영혼에 형성된 수많은 애정들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지배적인 애정이 곧 그 사람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비록 겉마음과 속마음이 다르고 또 한 가지 일을 수행할 때에도 그 일을 하는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여러 가지 복잡한 심사를 지닐 수도 있기에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마음인가를 가리기는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사람이 어떻다는 것은 영혼이 그 무엇보다도 가장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형성되어진 그 사람의 지배적인 애정만큼은 변하지 않고 저 세계로까지 영원히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 삶 안에서 우리 영혼의 지배적인 애정이 악에서 떠나 선한 형상을 갖추지 못하였다면 그 영혼은 사후에도 자신의 악한 애정에서 나온 그대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 안에 이미 굳어진 그의 지배적 애정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는 그의 생명, 곧 그가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바로 그것을 빼앗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은 그의 사후에 이 세상에서와 같이 더는 가르쳐서 다시 나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한 인간이 지옥에 처하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살 때 지은 죄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한 형벌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악인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누구에게 벌을 주거나 해를 가하는 일을 조금도 하시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천국의 빛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을 향하는데 이는 거기 지옥적인 환경이 오히려 그 영혼의 성품에 적합하여 안락함과 자유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들을 통하여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미 지은 죄와 그것으로부터 받게 될 형벌이 사면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에 형성된 성품이 어떠한가의 문제입니다. 영혼의 구원과 관련지은 죄 사함이란 영혼이 자기 악과의 투쟁을 통하여 이를 극복하고 주님과 이웃 사랑의 선한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할 뿐이지요. 물론 이 모든 변화는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자명합니다.
성경에서 죄를 사함 받는다는 의미는 '이제 네 죄가 없어졌노라!' 라는 식의 선언 정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적인 마음의 변화를 가리키는데 죄를 사함 받았다면 적어도 이전과는 달리 죄에 대한 유혹을 견뎌낼 힘이 생성되어 그만큼 내적 상태가 정결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사함이라는 의미를 잘못 이해하면 내면의 악은 이전의 지옥적 상태 그대로이면서 다만 그리스도의 피를 믿었다는 이유와 또 자신이 범한 죄를 자백했다는 이유 등으로 그 죄가 제거되었고 나아가 구원에 이르렀다고 이 모두를 주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는 일을 진실한 신앙인양 간주하기도 합니다.
현 기독교의 구원관은 죄를 향하여 마음이 무능력하게 끌려가는 것으로부터의 구원은 등한시한 채 죄의 형벌로부터의 사면에 대한 구원만을 부르짖고 있어 이러한 구원관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 그 자체는 하나님에 반하는 악한 것이기에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영혼이 벗어나게 되는 이런 구원은 참 구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고 연약하기에 이러한 인간에게 죄는 어쩔 수 없이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명목 하에 오직 유일한 방법은 그 죄로 인해 받게 될 두려운 결과들을 피하는 것에서 구원의 본질을 찾는 것은 잘못이라 봅니다. 마음 속에 죄를 범하고 싶은 욕망은 그대로인 채 그 형벌만을 면하게 하여주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것이 어찌 온전한 죄로부터의 구원이겠는지요!
구원의 본질은 우리 마음이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에 있을진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어주시고자 하는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지옥 갈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대속을 믿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런 식의 결과적인 것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과거 죄에 끌려가기만 하던 우리의 의지와 이해성이 이제 변화를 받아 새롭게 되는 상태로부터 건설됩니다. 그것은 악을 떨치고 선을 사랑하며 거짓에 눈감고 진리에 눈이 뜨이는 이 모든 능력이 실제 이 땅 위에서 자연스럽게 삶으로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새 의지를 받아 이전의 악을 끊고 주님의 계명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 행하는 이러한 본질적 구원은 없이 그저 그분의 피 흘리심의 대속을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식의 생각들 또 그 앞에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그 죄가 제거되었다는 생각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관한 한 정작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지옥이나 그 형벌의 고통과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에 이 모든 지옥적인 것들을 초래하는 우리의 악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악이 이전처럼 가득 차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고 좋아하는 것은 오히려 저주에 속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같은 이치로 죄를 짓고 난 후의 마음 상태가 죄를 짓기 전에 비해 전혀 변화의 조짐이 없어 여전히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들을 자백하는 순간 그것들이 도말 되었다는 사실을 믿으면 무엇할 것인가요. 이 모든 잘못된 생각들은 우리가 성경의 깊은 뜻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문자적 의미만을 해석함으로 성경을 너무 가볍게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장의 이 말씀을 예로 들면 우리가 죄를 자백한다는 글자의 의미는 그저 주님 대속의 피를 의지해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면 주님께서 그 죄를 없던 것으로 해주시겠다는 그런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일은 그 마음의 중심에서 우러난 진실이 동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진심으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은 각오를 한 상태에까지 마음이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자백은 주님께 받아들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마음의 진심이 실리지 않은 입술만의 고백에 불과할 뿐인데 그런 예배를 주님께 드리면서 그것이 주님께서 대신 흘리신 피 때문에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예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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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여호와 증인이 또 시작했군요
이근호 2003-08-14 21:27:55, 조회 : 189, 추천 : 11
악인에게는 지옥이 더 마음이 끌리어 편안하게 지낸다구요?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
이빨을 갈고 있는 것이 편안한 마음 자세입니까?
기본적으로 엄기욱씨나 김병구 씨나 죄가 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죄란 예수의 공로를 모르는 것입니다. .
그리고 의란 예수님의 공로을 아는 것입니다.
죄를 모르는 가운데 어떻게 사랑을 논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같이 사랑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사랑이란 감정으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지옥이란 이를 갈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실감하는 곳이요,
천국이란 감사함으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찬양하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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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상을 교류할 때..
엄기욱 (Homepage) 2003-08-15 22:35:07, 조회 : 131, 추천 : 8
먼저 저는 여호와증인이 아님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사상을 교류할 때 글을 쓴 사람의 소속과 배경이 그의 글을 판단하게 되는 주된 요인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진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만을 겸손하게 발표함으로 이에 대한 판단은 글을 읽는 분들의 영적 눈에 맡겨야 하겠지요.
사상을 교류할 때 이런 자세는 어떨까요?
<사상을 교류할 때>
어떤 생각을 사상으로 섣불리 결론짓는 것은 위험한 일이므로 이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더구나 이를 자신의 지식이나 이성의 활약 등으로만 확고히 하려는 것은 자칫 오류를 그대로 굳힐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하겠다. 따라서 자기만의 확실한 개념이 정리된 연후에도 다른 이와의 사상 대조를 통해 미흡한 부분에 대해 보완이나 수정의 여지를 남겨두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사상을 글로 정립하여 발표하고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의 생각을 들어보는 것은 서로의 사상간 비교를 통하여 각자 자신에게 있는 오류를 제거하고 보다 순수한 진리를 얻어 궁극에는 영혼을 선한 성품으로 변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이런 교제를 통하여 평상시 성경을 읽을 때 뜻이 어려운 부분에 관해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묵상 중 주님께서 깨우쳐주신 은혜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눌 수 있으며 자신의 깨우침에 남의 생각을 더하여 듣고 배움으로 선과 진리의 무한한 증대효과를 누릴 수 있다.
말씀을 묵상할 때는 가능하면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정립해 봄으로 보다 투명하고 뚜렷한 진리를 마음에 부각시키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특성상 그것이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 경우 의지의 확고한 동의를 얻어내기가 힘들어 삶으로 반영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진리는 조그마한 시각 차만 있어도 서로 충돌되기 일쑤이고 조금만 달리 표현되어도 전연 그 의미를 판독하기 어렵게도 되며 특히 그 속 깊은 곳을 탐색할 때는 우리 이해성의 한계로 인해 추리나 사색을 할 수밖에 없는데 오류는 진리의 표면보다는 바로 여기 추리나 사색의 깊은 데에 주로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 속 깊은 데에 있는 것을 다른 이들 앞에 드러내놓고 그것을 수정하고 고침 받으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상과 믿음은 대개 진리의 겉보다 속이 잘못됨으로 입는 피해가 크기 때문이다. 혹 자신에게 오류가 있는 것을 두려워하여 구체적 표현을 꺼리게 되면 그 오류는 고침을 받지 못하고 그대로 자기 내면에 갈무리되어 남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사상의 교류는 이런 류의 악과 거짓들을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그동안 자신이 강하게 주장한 것이 종내 올바르지 못한 것으로 판명이 될 때 이를 남 앞에 있는 그대로 시인하는 양심의 고백은 대단히 훌륭한 신앙이다. 진리의 속성이 무한하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누구나 자신이 어느 주제에 대해 충분히 모를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아야 하며 자신의 잘못을 재빨리 시인하고 수정하는 모범을 보여주어야 하겠다.
사람마다 영적 진행 과정이 각기 다르기에 진리를 이해하고 애정을 표현하는 상태 또한 옆의 교우가 나와 충분히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신의 주장만을 앞세워 남을 가르치려는 생각을 배제해야 한다. 남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남의 사상을 배우려는 자세를 취하고 혹 묵상 중 받은 은혜를 나누기 원할 때는 형제의 신앙 진전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이 진실한가를 먼저 살펴야 한다. 자기 것을 드러낼 때 자신과 대립하는 사상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삼가고 그것을 오히려 포용하도록 노력하며 설령 자신에 동조하는 사상일지라도 이를 무작정 기뻐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대개 자신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은 반기려는 반면 반대하는 사람은 싫어지고 거부감을 갖게 된다. 이것은 명백히 이웃 사랑과는 반대적인 악에 속한다. 남과의 사상 교제를 통하여 반대의 의견을 포용하고 남을 존중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은 남을 나처럼 사랑하라는 주님 말씀을 배우는데 무척이나 유익할 것이다.
반대적인 생각을 드러낼 필요가 있는 경우 우리는 다만 '그 부분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라며 자신의 생각만을 단순히 발표하고 되도록 자극적인 말투와 감정적인 언행이 표출되는 것을 조심하며 온화하고 공손한 표현을 쓰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남에게 자신의 주장을 너무 진리라고 강조하며 내 사상을 강요해서는 안 되고 결과는 다만 주님과 듣는 이에게 맡길 뿐이다. 그러나 글을 읽고 듣는 대상을 위하여 최대한 논리를 펴 자신의 주장을 확고히 표현하는 태도는 우리의 취할 바이기에 따라야 한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만을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남의 마음을 내 뜻대로 움직이려는 지배욕에서 비롯된 악이다. 우리 대부분 이러한 마음이 없을 수는 없으나 만일 사상 교류에서 다른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악 중의 가장 큰 악에 속하는 이 한 가지 지배욕을 극복하는 법이나마 배운다면 그 교제는 다른 무엇보다 아주 소중한 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사람이 모인 곳을 저 홀로 장악하려는 지배애가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자신을 항상 낮추어야 하며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는 선한 애정을 최우선으로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에 앞서 글에 나타난 상대의 의중을 먼저 명확히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혹 자신의 생각이 불변하는 절대 진리 그 자체로 여겨질지라도 인간은 그 누구나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유한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여차하면 한 발 물러설 수 있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사실 우리 각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신앙 초기에는 얼마나 오류 투성이의 분명치 않은 진리들을 참 진리인양 반겼었던가.
끝으로 진리는 수단일 뿐 우리의 목표는 선한 애정을 형성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하고 또 이 모든 우리의 노력에 인간의 총명을 앞세우지 않고 오직 주님의 역사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이 모두를 진행해야 하겠다.
참고 : 이러한 주의 사항 하나 하나는 바로 저 자신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같이 노력해 보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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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상을 교류할 때..
이근호 2003-08-16 06:37:34, 조회 : 146, 추천 : 12
사상 교류에는 반드시 '자기 부인'의 모습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르시고 계시군요.
불교처럼 아무리 '자기 부인'을 열심히 해도, 십자가 앞에서 전적 자신이 죄인 인 것으로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되면 그것은 기껏 유동성있는 '자아 변신'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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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근거한 온전한 구원론만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김병구 2003/08/14 6 171
[re] 말씀에 근거한 온전한 구원론만을 가르치고 설교해야
로즈마리 2003-08-17 18:37:33, 조회 : 109, 추천 : 12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옛날 유대인들이 다해본거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율법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완성 해볼려고 했던 것들을 이제 님께서 예수 십자가로 해보실려는 것입니까?
율법인들, 예수님의 십자가인들 자아의 의도와 목적(이웃사랑, 성화, 교회개혁 등)으로 꽉차있는 사람에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용해서 자기 존재성의 의미와 가치를 찾으려는 헛된 시도만 할뿐입니다.
결국 어떤 일이 있어도 '이땅에서의 나의 아름다운 변화'를 못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묻은 십자가를 이용해서라도 말입니다.
결국, 2000년전 율법을 의지한 유대인들이나, 예수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이뤄볼려는 사람들이나 전혀 다를바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나의 아름다운 변화를 꿈꾸는 모든 시도'가 죄로 드러나는 곳이며, 그래서 결국 내가 사라지는 곳이며, 온전히 예수만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웃 사랑을 하고 싶다면, 십자가 없이 하는 것이 훨씬 속편하고 잘 됩니다.
나의 성화와 변화를 꿈꾸신다면, 십자가 없이 참선수도하시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 후의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설계하십니까?
그건 머리로 상상하고 설계한다고 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들을 꺼내 끼워맞춰도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십자가 앞에서 내 본질이 드러나고 예수가 드러날때, 그때 그때마다 예수께서 알아서 하실 사항들입니다.
예수께서 어련히 알아서 맘대로 하실일들에 관심가지는 것은 월권이지요.
'나'라는 존재를 십자가 앞에서 직시한다면, 그 월권에 관심 가질 겨를이 없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만 가슴을 치며 한마디도 못하고 울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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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여호와 증인이 또 시작했군요 이근호 2003/08/14 11 190
[re] [re] 여호와 증인이 또 시작했군요-엄기욱님은 성경을 부인하고 다른 계시를
문지원 2003-08-15 18:52:58, 조회 : 136, 추천 : 11
추종하는 새예루살렘교회인가 뭔가하는 쪽의 열심인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아니구요..-_-
스베덴보리인지 뭔지 하는 새 계시를 받은 자의 사이비 사상으로 출발한 조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엄기욱님 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