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세례)가 인간의 행위인가요? ] 2003-07-25
[침례(세례)가 인간의 행위인가요? ] 200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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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세례)가 인간의 행위인가요?
김인학 2003-07-25 13:56:24, 조회 : 113, 추천 : 12
* 퍼왔으며 제 질문은 아래 있습니다.
Name 유갑성
Subject ☞ 이근호목사와 그 측근들
최초 한국에 언약신학을 소개하신 분이 현 총신대총장 김의원박사시다.
최근에는 김두석 박사가 그를 이어 언약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줄 안다.
김의원박사는 로버트 팔머슨의 계약신학과 그리스도라는 유명한 책을 교재로 삼았는데 그 당시 얼마나 그 책을 해득하려고 애썼는지 최근 보니 책이 까맣다.
그래도 너무 어려워 대부분 학부 재학생들도 30% 정도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최근 다시 연구해서 본 결과 미흡하나 거의 해득했다고 생각한다.
구속사신학으로 담지 못하는 것 언약신학으로는 그것까지 포함하여 다 담을 수 있어 참으로 오묘하기만 하다.
이근호 목사는 이것을 충분히 읽어 보았을텐데 엉뚱한 결론들을 수없이 돌출시킨다.
즉 눈을 씻고 봐도 언약신학이 물세례의 불필요성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런데 이근호목사 그 분은 왜 물세례의 필요성을 부정할까?
세례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을텐데 말이다.
언약신학을 지나치게 확대 적용하지 않았는지 염려스럽다.
김의원박사님에게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질문) 침례가 인간의 행위에 관한 것인지 여쭙습니다.
┃이근호 2003-07-21 14:11:49, 조회 : 150, 추천 : 0
┃문제는 십일조와 예수님의 행위를 어떻게 연관시킬겁니까?
┃이것을 연관시키려면 모세언약 속으로 들어가야 하고, 모세언약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나중에 등장된 예수님의 새언약과 만나게 되고, 예수님의 새언약을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과 십자가와 일치 시켜야 하고, 그래서 그 결과로 성도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의'인데 이 '하나님의 의' 앞에서 무슨 "침례 받아야 함"이라는 추가적인 인간 행함이 끼어들 여지가 어디있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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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침례(세례)가 인간의 행위인가요?
이근호 2003-07-25 16:56:53, 조회 : 138, 추천 : 14
우선 유갑성씨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1. 김의원씨가 언약신학을 어렵다고 한다면 제가 보기에 그 사람의 신앙이 엉망이라서 그렇습니다.
(15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뒤 이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달라졌는지는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제발 지금쯤 달라졌으면 좋겠습니다. )
따라서 그 때 당시의 그 김의원씨라면 기본적으로 그 사람은 자신의 신앙이 제대로 인가부터 검토되어야 될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
그리고 유갑성께서 저의 언약신학을 문제 삼으려면 , 저의 책부터 읽고, 그 다음에 김의원씨의 책을 읽고, 그 다음에 성경을 검토해서 과연 어느 쪽이 성경에 합당한가라는 순서를 밟아야 옳은게 아닙니까?
신앙에 문제점이 있는 김의원씨가 언약이 어렵다고 한다면 저까지 꼭 어려워야 합니까?
로벗슨 팔머슨의 언약신약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귀하는 알고나 계십니까?
이 사랍의 언약 신학의 문제점도 알기에 제가 그들과 차이나는 언약신학을 말할 수 있는 겁니다.
벌써 15년 전에부터 그 책들의 문제점을 지적해 왔습니다.
성경에서 출발하지 않고 기존의 독일식 계언신학의 취약점을 물고 늘어지는 식으로 언약신학을 해왔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제대로 언약신학을 하려면 헤겔철학을 비롯해서 숱한 구속사적 역사관도 함께 검토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더 더 중요한 것은 전 성경을 강해설교로 다 해봤어야 합니다. 김의원씨에게 그만한 실력과 신앙이 있는 줄 아십니까?( 그 때 당시에)
저는 수차례 김의원씨의 언약신학을 논평한바 있습니다.
일관성없이 마치 바구니 온갖 과일 한꺼번에 쑤셔넣는 식의 언약신학이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에 나오는 신학 개념들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채 언약과 연결하기 위해 혼란스럽게 한데 모으기에 급급했습니다.
따라서 본인도 이해못하고 듣는 사람도 이해못하는, 그러면서도 무식한 학생들은 신선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도 속아넘가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언약신학에 관심이 있다면 제발 사건에 검토를 같이 해서 저의 신학이 무엇이 문제인지를 지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 침례의 필요성에 대해서 질의하셨는데, 도대체 '필요성'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신앙 이야기 하면서 '무슨 필요성'이라는 용어가 툭 튀어나옵니까?
무엇을 달성하겠다고 필요한 '필요성'이란 말입니까?
세례(침례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침례'라는 말이 성립되지 아니하기에 성령 세례를 표시하는 상징적 말로서 부합되지 못합니다. )
3. 세례 뿐만 아니고 모든 것이 행함에 속합니다. 따라서 그 행함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십자가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싶어 노력하고 애쓰고 부르짖고 다름박질해도 구원이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나오는 것은 행함이지만 성도에게는 본인에게 나오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주어진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주어진 것이, 인간에게서 나오는 모든 행함에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가 없음을 지적하고 그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의인되는 겁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말입니다.
물 세례에 대해서란 이미 여러번 답변했기에 다른 분이 문의하신 것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새시대의 찾아듬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에 대해 표현하는 방식으로 세례 뿐만 아니라 성찬식, 직분 안수 등 각가지 유대교적 방식들이 동원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구원에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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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 이해가 맞는지요?
김인학 2003-07-25 17:55:47, 조회 : 110, 추천 : 12
이목사님 반갑습니다.
목사님의 답글이 즉시 있으니 감사합니다.
우선 답글을 짧게 답하시면 이해하는데 유익하겠습니다.
저 처음으로 왔습니다. 잘모릅니다. 혹시 이해 못했다면 양해 구합니다.
다만 김형희라는 사람이 하도 기독게시판에 와서 현재의 기독교 신학과 목회 등에 대해서 자체조차 모르면서 복음을 강조한답시고 헤쳐 모여만 시키니까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었고, 그 글들이 이근호목사님의 십자가마을과 연관됨을 알고 들어와 보았습니다.
이 목사님의 글을 보니 세례 부정에 관하여 기록된 글이 있길래 세례를 부정하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알고 보니 그냥 상징적인 의미의 세례가아닌 구원 받기 위해서 하는 [인간행위로서의 세례]라면 부정한다는 뜻이군요. 제가 바로 이해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도 오해를 풀겠습니다.
목사님 소관이지만 오해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라며, 김형희 같은 사람들이 짧은 지식으로 십자가 마을의 주장을 전하면서 오는 오해도 크다고 봅니다.
목사님의 주장이 오해 없이 교계에 인식되었으면 좋겠고 목사님이 쓰신 언약신학은 어디서 구입합니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잠시라도 심려 죄송합니다. 앞으로 의문 있으면 늘 들리겠사오며 배척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이해가 되면 수긍하는 사람입니다. 충분히 수긍시켜 주십시오. 한 눈에 볼 참고자료 어디서 얻습니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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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 이해가 맞는지요?
이근호 2003-07-25 20:10:57, 조회 : 125, 추천 : 14
>이해를 바로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 언약신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사상과 그 전개]라는 책을 필두로 해서 여러 책이 많은 확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약 신학이 너무 방대해서 그러합니다.
여기 크로스빌리지에 들어오시면. 홈페이지 맨 위단에 걸쳐 있는 성경 강해, 성경 연구, 강의 녹취, 믿음의 글 통해서 접할 수도 있고 기타 저서를 통해서도 접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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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세례)가 인간의 행위인가요? 김인학 2003/07/25 12 114
[re] 소위 측근 중에 한 사람입니다
구득영 2003-07-25 14:36:22, 조회 : 128, 추천 : 11
측근이라니 조금은 웃음이 나오네요.
본 인터넷 공간에서는 세례를 인간의 행위라는 분들도 있고, 그것을 부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물론 이근호 목사님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고 하시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여러차례 이렇게 논쟁이 붙고 있는 줄 압니다.
세례를 인간의 행위, 즉 로마서에서 말하는 '행함'라고 들고 나오는 자들이 있으니
당연히 그것을 부정하는 겁니다.
전혀 세례 자체의 부정이 아니고 말입니다.
구원은 세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하니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오직 그분의 피만이 '하나님의 의' 아닙니까?
아니면 인간이 세례를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입니까?
이근호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우리교회에도 분명 세례식이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거두절미하고 세례를 부정하는 쪽으로 광고(?)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간단한 남의 글도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분들이 어떻게 그 어려운 인터넷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은 신학교 시절 김의원 박사님에게 배울 만큼 배운 줄 아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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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과 청부를 넘어선 청지기의 삶
김병구 2003-07-26 01:43:47, 조회 : 101, 추천 : 13
말씀에 따르는 신자의 경제 생활
-청부와 청빈을 넘어서-
I. 어떻게 벌 것인가?
성경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최소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을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죽으라” 고 바꾸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재화나 서비스의 생산에 참여하는 일은 생산적인 일에 속하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도박, 사기, 뇌물 수수, 그리고 부동산 투기 같은 일은 생산적인 일이 아닌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의 말씀을 좀더 달리 표현하면 하면 “도박, 사기, 뇌물 수수, 그리고 부동산 투기 등을 생업으로 하는 사람은 차라리 죽으라”고 표현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들은 먼저 우리의 생업이나 소득의 원천이 무엇인가에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비 생산적인 일에 노력을 투입함으로써 얻는 소득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부동산 투기는 땅이 좁은 한국에서 빈부차이의 심화에서부터 경제의 고비용화에 이르기 까지 각종 국가적인 문제의 주된 원인임에 유념할 때, 신자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분야입니다. 그것은 곧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는 반대로 부지 부식 간에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기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수년 후를 위하여 교회가 토지를 사두는 일도 매우 신중을 기하여, 행여나 교회가 부동산 투자 통한 불로 소득을 얻는 일로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구약의 희년법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경제 사상이라고 생각됩니다. “레위기 25장 24절 - 27절에서는 토지를 한시적으로 판매했다 하더라도 본인이나 가까운 친척이 토지 대금을 마련하여 무르기를 요청하면 언제라도 토지를 되찾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10절에서는 희년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기업과 가족에게로 돌아가야 한다고 명령한다. 이것은 설사 토지를 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가 조건 없이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희년은 7년 만에 돌아오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나고 난 다음 해, 즉 50년 째를 말한다.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기업을 회복시켜 주는 것은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레 25:10)하는 일의 기초이다(http://land.kimc.net/study_1.htm) 참조.”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제사상을 현대 경제환경에 적용한 헨리 조지의 토지단일세제는 우리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시각에서 한국의 경제정책으로 채택되도록 수고하고 진력해야 할 경제 제도입니다. 헨리 조지의 지단일세 제도는 위의“성경적 토지 정의를 위한 모임” 웹사이트에서 자세히 알아 볼 수 있습니다.
II. 어떻게 쓸 것인가?
생산적인 일을 열심히, 성실하게 하면 가계를 유지하고 남을 만큼 큰 소득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특별한 재능을 주시어, 예를 들면 새로운 발명, 탁월한 저술이나 예술 및 스포츠 활동 등으로 큰 돈을 깨끗한 방법으로 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깨끗하게 얻는 소득이 개인의 가계 지출을 초과하여 잉여분이 생긴 경우, 이 잉여소득을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 세상에 부를 쌓지 말고 하늘 나라에 부를 쌓으라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더 큰 소득을 창출하여 하늘에 더 큰 부를 쌓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저축과 재투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늘 나라에 부를 쌓는 일, 즉, 하나님나라 확장과 이웃 사랑에 우리의 잉여소득 전액을 사용하는 것이 주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가계에 사용하는 금액이 얼마인가는 우리 자신의 성화의 정도에 달려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자유스러워 지는가,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을 몸과 마음을 받쳐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들로서는 이상적인 이야기 이지만,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의 정당한 소득을 자유롭게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우리가 성화된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 정도의 성화를 달성할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마는, 신자된 우리는 그 정도의 성화를 목표로 삼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매일 같이 기도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한 성화의 목표를 향하여 이미 출발한 것으로 여겨지는 김동호 목사님의 이삭줍기, 34.99%의 헌금 실행을 저는 매우 높히 사모합니다.
III. 청빈과 청부를 넘어서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양심이라는 것은 각 개인에 따라 다를 수가 있고 또 같은 개인의 경우에도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별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시고, 자기 양심을 믿지 못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날 때에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훨씬 즐겁고 기쁜 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신자가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고 고통스럽기 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즐겁게 여겨지게 되면, 그러한 신자는 청부와 청빈을 모두 초월하는, 말씀으로 자유로운 영혼으로 복된 삶을 누리어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 자신은 이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들의 주인이 아니고,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위탁하여 관리케 하신 청지기의 신분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해야 하는 인생임을 아는 청지기의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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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비교해 보세요. 불교에서는 어떤 직업윤리관을 요구하는지..
이근호 2003-08-08 14:37:09, 조회 : 81, 추천 : 10
>불자의 직업인이 가져야 할 윤리적 자세들로는 무엇이 있을까? 첫째 올바른 직업관을 확립할 것, 둘째 연기론(緣起論)적 직업윤리 의식을 가질 것, 셋째 직업을 해탈(解脫)을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을 것 등 세가지를 들수 있을 것이다.
첫째 올바른 직업관을 확립하자
불교에서 바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덕목으로는 8정도 가운데 정명(正命)을 들 수 있다. 정명은 정당한 방법으로 의식주를 해결하는 생활태도를 권장하는 덕목이다. 현재적으로 이해하면 정명의 취지는 올바른 직업관을 확립하여 이에 따라 생활하라는데 있다.
경전에서는 그릇된 직업을 나열하는 것으로 정명의 길을 제시한다. 예를 들면, 증지부(增支部) 경전에서는 피해야 할 다섯 가지 직업으로 무기매매, 매춘을 포함한 인신매매, 도축업, 마약매매, 술 판매, 사기, 기만, 위약(違約), 점술, 고리대금업 등을 들고 있다. 이것들은 범망보살계경(梵網菩薩戒經)의 48경계(輕戒) 중에서 제29계와 제32계에서도 볼 수 있다.
불교에서 바른 직업에 대한 강조는 생계 유지를 위한 수단의 정당성에 있다. 이 정당성을 증지부 경전에서는 재산획득의 원칙으로 제시한다. 이에 따르면 재산은 강제나 폭력이 없이 합법적 수단으로 속임수가 없이 성실하게 타인에게 고통이나 손상을 초래하지 않게 재산을 얻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생황에서 적용해야 할 정명의 정신 또는 바른 직업관이 바로 여기에 응축되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5계와 10선계(善計)에서도 볼 수 있다. 곧 살아있는 목숨을 빼앗을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 것, 주지 않은 것을 빼앗거나 훔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 것, 옳지 못하게 성을 매매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 것, 정신을 흐리게 하는 것을 만들거나 파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 것 등이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선한 일을 업으로 삼으면 내세에는 천상에 태어난다고 하고, 반대로 이를 어기고 악한 일을 업으로 삼으면 지옥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이것은 얼마나 성실하게 자신의 직업에 종사하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애에서 삶의 양태가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직업적 양심을 가지고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면 미래에 좋은 삶이 보장된다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둘째, 연기론적인 직업윤리 의식을 가지자.
인간은 개인이면서 사회적 동물이다. 늘 더 나은 삶의 질을 꿈꾸며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운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살아간다.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같은 직장 동료들 사이는 물론, 같은 종류의 기업 및 다른 종류의 기업 사이에도 연대의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다같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상호 연관되어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연기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직업윤리 의식을 가져야 한다.
소요지족의 삶
우리는 이를 통해서 현대의 직업 윤리를 이타(利他)적인 직업윤리로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공존공생(共存共生)하고 있다. 내 자신의 삶이란 사회구성의 틀을 벗어나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그리고 내 자신의 이익과 욕망의 충족이란 결국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충족될 수 밖에 없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기본적인 원칙은 베푸는 삶이 되어야 한다. 나누고, 베풀며, 아우르는 것이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종교적인 조절장치인 셈이다.
모두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직업을 통해 실천할 수 있는 불교적 해법은 사섭법(四攝法)의 실천을 통한 이타적 직업윤리를 실천하는 데 있다. 첫째 보시(布施)는 자신의 직업을 통해 얻은 부를 사회에 되돌림으로써 모두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여기서 소욕지족(所欲知足)의 삶, 또는 무소유의 삶이 실현된다. 둘째 애어(愛語)는 직장 안에서 상사와 부하 그리고 동료에서 정다운 말을 건네어 직장생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게 된다. 셋째 이행(利行)은 남의 입장에 서서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열린다. 고객과 소비자의 입장에 서서 일하는 고객 중심의 서비스 정신이 생긴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현대사회에서 요구하는 직장인일 것이다. 넷째 동사(同事)는 고객을 생각하고 고객의 이익을 위하며, 나아가서는 고객과 하나가 되는 정신으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게 해 준다.
사섭법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먼저 내가 양보하고 감싸주며 희생하는 직업인이 되겠다는 마음자세다. 그러면 직장, 사회, 나라, 나아가서 온 세상이 편안해진다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론적인 세계가 이룩될 것이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이익과 행복이 아니라 우리 모두 더불어 함께 사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직업윤리이다. 더 나아가서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가 되는 이타적 직업윤리이다.
노동선과 선농일치
셋째 직업을 해탈을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 삼자
선(禪)에서 노동선(勞動禪) 또는 선농일치(禪農一致)라는 말도 있듯이 노동은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성불(成佛) 또는 해탈(解脫)을 실현하는 중요한 방편 가운데 하나다. 초기 불교경전은 모두 경제행위를 해탈을 위한 수도 라는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규정하고 있다. 잡아함경(雜阿含經)권4에서는 재가자가 현실생활에서 안정과 안락을 얻은 4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로 '직업을 가지고 바르게 사는 것 (방편구족 方便具足)'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직업이 자아를 실현하는데 중요한 방편 가운에 하나임을 의미한다. 이런 자아실현을 위한 방편 가운데 으뜸은 정진(精進)이다. 정진은 불교에서 자아를 실현하는 실천덕목을 제시하는 곳이며 어디에나 들어가 있다. 이처럼 불교에서 정진에 대한 강조는 노동, 또는 올바른 직업에 대한 강조와 연결된다.
부처님 자신도 자신의 수행을 밭가는 농부에 비유했던 것처럼 정신노동도 육체노동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욕망에 근거하지 않는 노동, 곧 열반을 지향하는 노동은 어떻게 가능할까?
첫째는 노동은 종교적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수단임을 인식한다. 둘째는 노동은 그 자체로 종교적 수행과정임을 이해한다. 셋째는 노동의 결과는 고통받는 중생에게 되돌림으로써 그 궁극적인 종교적인 의의가 있다고 이해한다.
불교적인 삶의 목표는 바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고통을 해결하는 참다운 행복을 지향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물질적인 풍요는 자기 삶을 유지하는 필요조건이지 자신의 삶을 채워주는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사회적인 불평등 구조는 개인의 탐욕에 기반을 둔 경제적 부의 불균형에 있다고 본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의 목표를 바꾸어야 한다.
해탈을 위한 삶의 현대적인 의의와 실천은 자기 직업의 목표를 수단이 아닌 목적지향적(目的地向的)으로 바꾸는데 있다. 그러면 직업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아닌 직업을 통해서 사회에 봉사하고 자신의 노동의 결과를 사회에 되돌리며 그 과정에서 무한한 기쁨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습니다. 귀하의 주장이나 불교의 주장이나 모두 땅의 것에 정신을 쏟는, '자아실현의 욕구'의 일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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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언약'만이어야 하는가?
이근호 2003-07-26 14:02:08, 조회 : 183, 추천 : 18
왜 '언약'이어야 하는가?
누구나,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다. 당연해 보이는 이 상식에 철퇴를 가하는 것이 옛날 아브라함이 받았던 언약개념이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거룩한 무리에서 끊처진다는 것이다.(창 17장) 언약은 스스로 구원의 한계를 지정하고 결정지어 버린다.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언약이다. 따라서 언약적으로 출발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그 어떤 구절을 해석하더라도 결국 본인을 구원 바깥에 그냥 세워 두는 꼴이다. 왜냐하면 언약 안에서만 구원이 되기 때문이요, 언약 바깥에서는 언약의 효과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만한 그 어떤 권한이나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신학에 능통하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약이 자체적으로 손길을 내밀지 아니하면 누구도 언약 안으로 못 들어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언약에 의해서 구원된 자는 오로지 언약의 능력에만 매료되고 그 놀라움에 탐복한다.
따라서 특별나게 자기들에게만 언약 공동체로 간주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 갖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리고 언약공동체인 유대나라는, 그 주어진 언약으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신앙적인 실험은 다 해봤다. 언약을 핵심으로 한 신학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혜를 동원해서 수립할 수 있는 모든 시도는 다 해봤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친히 인정하셨다. 마태복음 5: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즉 어느 민족, 어느 인간 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탐구한 업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전제해 놓고서, 그 다음에 천국갈만한 진정한 의가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께서 설명할 참이시다.
따라서 흔히 쉽게 말해서 십자가의 의(義)로서 구원된다고 말들 하는데, '십자가의 의(義)'를 알려면 인간들이 종교와 도덕적 선행으로 얻어낼 수 있는 '의'가 과연 어떤 종류가 있으며 어느 수준에 머무는가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 최고의 신앙심과 의를 추구했고 또한 달성했다고 자부한 그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의가 십자가 형벌을 통해서 명백하게 거절당했기 때문에 그 거절당한 '그리스도의 의'를 이해하자면 먼저 그 '그리스도의 의'를 헛신짝처럼 간주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최고 의'의 수준을 아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에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의'의 한계를 미처 알지 모르는 채 십자가의 구원과 예수님을 거론하게 되면 그것은 기껏 하나님에 의해서 시도된 '언약 있음'과 '언약에 의한 구원'의 바깥에서 혼자만의 착각으로 신봉되는 십자가요 예수님이다.
다시금 언급하거니와, 언약이 말씀하는 바는, 언약 밖에 있는 인물은 아에 구원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 구원에 대해 운운할 권리조차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언약은, 언약의 내용된 사실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에 나서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그렇기 때문에 언약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나 자녀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끝난 문제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일단 언약 백성이 된 자들만의 몫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언약공동체인 유대인들이 이 언약(율법)을 가지고 정립해 놓은 각가지 조항의 신학과 신앙적 지침조차 예수님 보시기에 천국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함량이 모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이런 평가를 받는데 하물며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주장에 대해서 가만 있을 이방민족들이 아니다.
그들의 신학은 유대인들이 독단적인 선택론의 근거가 되는 언약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이방민족들의 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언약'이란 하나님이 계시한 각가지 신학 개념 중에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신학자들의 주장은 언약을 제치고, 신의 존재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이 말하는 신이란 존재를 존재케 하신 원인자이다. 즉 모든 인간은 다 신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 가운데서는 신이 자신을 만드신 것도 모르는 불손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지옥가도 싸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격적인 신께서 자신을 친히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충분히 천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을 알아 주었으니 그만한 보상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 있어 메시야의 의미는 무엇인가?
메시야는 야구로 말하면, 중간 계투 요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미리 선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자들은 인류의 봉사하기 위해 잠시 선택 받은 것 뿐이며, 그 핏줄에 의해서 출현된 예수라는 메시야도 결국 전체 인류 구원에 봉사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꽤나 수고 했다는 것이다. 그 수고한 것이 바로 '죄 씻음'으로 보고 있다. 대신 희생제물이 되어서 죄가 남겨질 근거 자체를 아에 없애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예수님에게도 "수고했습니다"라는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겠지만 그러나 그 분은 어디까지나 하늘 나라의 2인자이기에 마냥 예수님에게 머물러서 아니된다는 것이다. 수고한 것은 수고한 것이고, 일단 구원받았으면 그 다음으로 예수님을 제치고 하늘 나라의 진정한 실권자이고 1인자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나아가는 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막후에서 인격적 성숙까지 책임지고 높은 수준까지 이끌어 주시니 이제 직접 하나님을 만나도 별 하자가 없을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 중세신학이었다. 인간을 '영, 혼, 육'으로 쪼개어 놓고 보든지 아니면 ' 영혼, 육'으로 쪼개어 놓고서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정신의 주인공인 신만 아는 정보까지 공유케 하는 이 쪼개진 영과 육을 합치시켜 신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보겠다는 것이다.
그 후에 나오는 근세 신학이든 개혁신학이든 현대신학도 마찬가지로 바로 이 정신에서 한발자국도 이탈하지 않았다. 단지 방법론에 있어 중세철학 대신 근대철학이 주입된 것 뿐이다. 즉 중세철학은, 신 존재론적으로 출발해서 중세신학을 도왔지만 근대 철학은 신 존재론이 아니라 인간 존재론, 즉 인간의 주체의식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현대 신학을 재구성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언약으로 출발하지 않고 신의 존재하심으로 출발하는 이방인인 자신들도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신을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에 동원된 신앙적 아이디어들이나 '신학적 사고(思考) 실험'들이 이미 유대인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 의해 이미 아우르듯이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그 안에는 신의 존재성으로 출발해서 세상의 피조성과 그 품성들과 상호 연계 했을 때 어떠한 신학들을 수립할 수 있느냐 하는 각가지 방안들이 제시된다. 물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파생된 열매들이 바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쿰란공동체신학, 열심당원들의 신학, 그리고 영지주의적 유대교, 묵시주의적 유대교 등등의 신학들로 돌출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도 신처럼 거룩해져서 '신 대 신'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만나자"는 방책들이다. 그런데 이들 신학이 결국 예수님으로 하여금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는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십자가의 영을 받아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말세에 영이라는 성령을 받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안다.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의 대상이 아니되었다. 구원되고 아니되고는 오직 예수님의 자기 권한에 속한다.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예수님은 결코 계투요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이시다. 어느 누구도 이 언약적 주님을 뛰어넘지 못한다.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아니되었는지의 여부는 다음과 같이 외치는 고백을 통해서 차후 확인될 뿐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3-16)
결론
이방인은 분명 언약밖에 존재했다.(엡 2:12) 애초부터 누가 예정된 자인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 감람나무에 궐이 생겼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포기할 생각은 없으시다. 따라서 차후 조치가 아닌 근본된 뜻이 마지막 때에 드러났는데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도 감히 구원에 참예되기에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언약적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지 감탄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 언약이 이것이라"(롬 11;25-27)
즉 그 누구에 언약 외에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정말 구원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언약 자체의 능력으로 구원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절대로 인간에게는 나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언약을 성취할 능력이 애초에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놓고 자기 행함을 두둔해요? 그런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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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앤조이 게시판에 최종운님이 쓰신 글입니다!!
구득영 2003-07-26 23:17:05, 조회 : 267, 추천 : 26
게시판에서 어느 의견에 리플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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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포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어떤 연유에선지 모르나 근사한 신앙관의 차이로 상대를 매도한다는 것은 참을수 없는 가벼운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논리적 이성적 반박보다는 섭섭한 감정의 표현이 많이 있는 듯 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이근호 목사는 적어도 순수 무균질에 가까운 천연기념물적인 하나님의 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았고
헌금의 노예가 되지 않았고
인간의 눈치를 보지 않고 복음진리를 전하고
세상의 처세대로 교회를 경영하지 아니하고
목회성공의 병에 오염되지 않았고
전혀 권위와 가식과 위선의 옷을 입지 않았고
촌사람의 냄새가 줄줄 흐르는 토속적이고 인간적인인 목사입니다.
전혀 가공되지 아니한 천연의 목사이자 인간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복음을 외치는 순수성과 매치가 되는것입니다.
복음의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목사가 추구하고 있는 목회성공의 헛된 야망을 십자가의 길로 대체하는 등등의 기성교회의 브랜드목사에 비하면 그 특이성과 차등성은 조족지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목사도 인간입니다. 결함도 있을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을 완벽하게 신학적으로 표현할 수 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신학적 학문영역에서 거의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다른 사람의 의견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같은 음식을 먹더라도 사람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끼듯이 다 다를것입니다.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아량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대구에 계시는 분이면 한번 만나 보십시요.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서울에 가보지 않는 사람이 서울에 간 사람보다 많이 아는 우를 범하는 꼴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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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근호 목사님 팬은 따로 있었네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는 이런 분이 없는데 말입니다.
목사님, 수련회 강의 잘 준비해주시고, 앞으로 한달이 무척 덥다고 하는데 건강 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수련회 때 진지하고 반가운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에구에구, 이번 강의에는 졸지 말아야 할텐데 벌써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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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아이 기분좋아라 ^ ^ (내용무)
이근호 2003-07-27 05:59:01, 조회 : 134, 추천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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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용의 언약인가? 무효하고, 상관 없는 언약---
원종석 2003-07-28 13:31:12, 조회 : 174, 추천 : 12
두 언약
언약을 주장하는 사람이 “언약”의 내용도 분변치 않고 소리만 지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여러 종류의 언약과 그 수많은 언약들.
언약 중에는 오래되고, 이미 이루어졌고, 무효한 구언약도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언약 중에도 이미 성취되고 계속 유효한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함으로 이루어지는 새 언약도 있다.
두 언약은 구약과 인가???
아니면 신약의 두 언약인 물 침례와 성령침례인가“?????
언약을 주장하는 사람의 언약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보였다.
물론 일부분 일수는 있으나 그 맹락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아래 글은 이근호님의 글과 그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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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언약'이어야 하는가? (이근호 7-26-03)
누구나,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산이다. 당연해 보이는 이 상식에 철퇴를 가하는 것이 옛날 아브라함이 받았던 언약개념이다.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거룩한 무리에서 끊처진다’는 것이다.(창 17장)
성경을 말할 때 <구원>이란 단어 사용을 너무나 남용하고 있다.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이냐’도 참고 해야 하고, 또 ‘어떤 종류의 구원이냐’도 생각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구원받을 자격’과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거룩한 무리에서 끊처진다’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오해된 글이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이 선별하여 택한 백성”(선민)이 되는 조건과 방법일 뿐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가는 구원>의 조건과 방법과는 무관하다.
할례는 거듭남의 모형이며 그림자이고 비유다.
갈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히8: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두 언약은 ‘구약’과 ‘신약’이며, <육체에 관한 언약>과 <영(靈)에 관한 언약>이다
멍청한 인간임을 잘 아시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영(靈)에 관한 것을 알려 줄 수가 없으니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초등학문을 통하고, 고등학문을 알고, 믿고, 순종함으로 후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길이 두 언약이다.
언약은 스스로 구원의 한계를 지정하고 결정지어 버린다.
구원받고 싶어도 구원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언약이다.
따라서 언약적으로 출발하지 않는 성경해석은, 그 어떤 구절을 해석하더라도 결국 본인을 구원 바깥에 그냥 세워 두는 꼴이다. 왜냐하면 언약 안에서만 구원이 되기 때문이요, 언약 바깥에서는 언약의 효과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 만한 그 어떤 권한이나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신학에 능통하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언약이 자체적으로 손길을 내밀지 아니하면 누구도 언약 안으로 못 들어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언약에 의해서 구원된 자는 오로지 언약의 능력에만 매료되고 그 놀라움에 탐복한다
따라서 특별나게 자기들에게만 언약 공동체로 간주해주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유대인이나 이스라엘이 갖는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리고 언약공동체인 유대나라는, 그 주어진 언약으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신앙적인 실험은 다 해봤다. 언약을 핵심으로 한 신학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혜를 동원해서 수립할 수 있는 모든 시도는 다 해봤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친히 인정하셨다. 마태복음 5:20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즉 어느 민족, 어느 인간 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탐구한 업적을 능가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전제해 놓고서, 그 다음에 천국 갈만한 진정한 의가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께서 설명할 참이시다.
따라서 흔히 쉽게 말해서 십자가의 의(義)로서 구원된다고 말들 하는데, '십자가의 의(義)'를 알려면 인간들이 종교와 도덕적 선행으로 얻어낼 수 있는 '의'가 과연 어떤 종류가 있으며 어느 수준에 머무는가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류 최고의 신앙심과 의를 추구했고 또한 달성했다고 자부한 그 자들에 의해서 예수님의 의가 십자가 형벌을 통해서 명백하게 거절당했기 때문에 그 거절당한 '그리스도의 의'를 이해하자면 먼저 그 '그리스도의 의'를 헛신짝처럼 간주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최고 의'의 수준을 아는 것이 마땅하다.
만약에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의'의 한계를 미처 알지 모르는 채 십자가의 구원과 예수님을 거론하게 되면 그것은 기껏 하나님에 의해서 시도된 '언약 있음'과 '언약에 의한 구원'의 바깥에서 혼자만의 착각으로 신봉되는 십자가요 예수님이다.
다시금 언급하거니와, 언약이 말씀하는 바는, 언약 밖에 있는 인물은 아에 구원될 자격조차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 구원에 대해 운운할 권리조차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언약은, 언약의 내용된 사실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일에 나서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말고 사마리아인의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
그렇기 때문에 언약이 이방인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나 자녀로 간주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끝난 문제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운운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일단 언약 백성이 된 자들만의 몫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언약공동체인 유대인들이 이 언약(율법)을 가지고 정립해 놓은 각가지 조항의 신학과 신앙적 지침조차 예수님 보시기에 천국에 이르기에는 턱없이 함량이 모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이런 평가를 받는데 하물며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언약은 구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이 있다.
구 언약은 아브라함과 모세 이전의 선진들의 구전으로 전 해 내려오다가
모세와 그 외 여러 <선지자들의 글>로 기록화 되어 경전이 완성돤 것을 우린 알고 있다. 곧 “구약”이란 책이다.
이 구약의 내용은 <신약의 내용을 위해 약속 된 것> 뿐이며(구약은 실체의 그림자, 모형으로 봐야 한다.)
구약 시대 사람들은 신약의 내용을 받지 못했고 “모두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이 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죽어” 갔다.(히 11:13) 다
구약은 육신에 관한 약속들이며, 신약은 영에 관한 약속이고,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고, 신약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림자이다.
육신의 본향은 <흙>이지만, 하나님께로 온 영의 본 향은 <하나님 나라>이다.
그러기에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본향은 <흙> 이외의 다른 본향은 없다. 혹 있다면 <무저갱>이고, <불 못>일 것이다.
히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신약시대에 살았고, 살고 있는 <영혼>의 “구원 받을 자”들은 아직 아무도 신약의 <실체>인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자는 없다.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시고(살후1:8),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의 심판이 끝나기까지는(계20:11-15) 새 언약의 실체는 오지 않는다.
새 언약시대의 우리(육신)도 다만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죽어” 갈 뿐이다.
그런데 이런 성경의 주장에 대해서 가만있을 이방민족들이 아니다.
그들의 신학은 유대인들이 독단적인 선택론의 근거가 되는 언약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이방민족들의 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언약'이란 하나님이 계시한 각가지 신학 개념 중에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방신학자들의 주장은 언약을 제치고, 신의 존재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들이 말하는 신이란 존재를 존재케 하신 원인자이다. 즉 모든 인간은 다 신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 가운데서는 신이 자신을 만드신 것도 모르는 불손한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들은 지옥가도 싸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격적인 신께서 자신을 친히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충분히 천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성을 알아주었으니 그만한 보상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인들에게 있어 메시야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은 모든 것을 지으신 분으로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만유의 아버지 ;엡 4:6)이시니 당연히 <모든 피조물은 신의 아들들>임이 당연하고, 그러므로 신은 사람의 아버지도 되시고, 소와 말의 아버지도 되시며, 나무와 풀과 개의 아버지도 되신다.
그러나 이러한 신의 아들들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없다. 물질로의 존재임으로----
그런데 인간육체 안에 ‘신의 영을 임하게 하여’ <성령으로 태어나게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은 영으로 태어 난 “하나님의 아들들”이 영의 나라, 하나님 나라에 올 수 있도록 창세전부터 계획(로고스)되고, 사람에게만 주어진 언약의 일부분 이다.(성령으로 태어남은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는 조건들 중에 하나)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 4:6)
메시야는 야구로 말하면, 중간 계투 요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미리 선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자들은 인류의 봉사하기 위해 잠시 선택 받은 것뿐이며, 그 핏줄에 의해서 출현된 예수라는 메시야도 결국 전체 인류 구원에 봉사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꽤나 수고 했다는 것이다. 그 수고한 것이 바로 '죄 씻음'으로 보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가 사람의 육신은 입고 아기로 태어 난 즉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 것은 “내가 그리스도로써 너희들에게 올 것이다”고 오래전부터, 옛 날부터 약속한 구약의 일부분이 이루어진 것 뿐 구약 전부가 이루어 진 것은 아니다.
그 분은 <주와 예수와 그리스도>가 되기 전 까지 키와 지혜가 자라며(눅 2:52) 모든 것을 체휼(히 4:15)
을 해야만 했고 때가 되어 선지자로써 많은 <영에 관한 새 언약>을 말씀 했으며, <신약의 모형과 그림자>로 구약에 언약으로 기록된 “복음”(죽음과 장사와 부활-고전;15:1-4)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향해 가셨다.
그분(인자)이 할 수 있었던 일은 “인간의 죄를 대신 하여”(속죄 양) <죽음>에 이루는 것이며,
그리고 그분의 <죽음>을 <장사>하는 것은 ‘인간의 손’이 할 수 있는 몫이었고,
<장사>된 무덤에서 할 수 있는 <부활>의 몫은 하나님의 것이었다.
대신 희생제물이 되어서 죄가 남겨질 근거 자체를 아에 없애 주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예수님에게도 "수고했습니다"라는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겠지만 그러나 그 분은 어디까지나 하늘나라의 2인자(??????)이기에 마냥 예수님에게 머물러서 아니된다는 것이다. 수고한 것은 수고한 것이고, 일단 구원받았으면 그 다음으로 예수님을 제치고 하늘나라의 진정한 실권자이고 1인자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직접 나아가는 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막후에서 인격적 성숙까지 책임지고 높은 수준까지 이끌어 주시니 이제 직접 하나님을 만나도 별 하자가 없을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바탕으로 구성된 것이 중세신학이었다.
인간을 '영, 혼, 육'으로 쪼개어 놓고 보든지 아니면 ' 영혼, 육'으로 쪼개어 놓고서 인간으로 하여금 절대정신의 주인공인 신만 아는 정보까지 공유케 하는 이 쪼개진 영과 육을 합치시켜 신의 경지까지 끌어올려 보겠다는 것이다.
그 후에 나오는 근세 신학이든 개혁신학이든 현대신학도 마찬가지로 바로 이 정신에서 한발자국도 이탈하지 않았다. 단지 방법론에 있어 중세철학 대신 근대철학이 주입된 것뿐이다. 즉 중세철학은, 신 존재론적으로 출발해서 중세신학을 도왔지만 근대 철학은 신 존재론이 아니라 인간 존재론, 즉 인간의 주체의식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현대 신학을 재구성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러니까 언약으로 출발하지 않고 신의 존재하심으로 출발하는 이방인인 자신들도 이해되고 납득이 되는 신을 재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업에 동원된 신앙적 아이디어들이나 '신학적 사고(思考) 실험'들이 이미 유대인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에 의해 이미 아우르듯이 시도되었다는 점이다. 그 안에는 신의 존재성으로 출발해서 세상의 피조성과 그 품성들과 상호 연계 했을 때 어떠한 신학들을 수립할 수 있느냐 하는 각가지 방안들이 제시된다. 물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지고 말이다. 그래서 여기서 파생된 열매들이 바로 사두개파, 바리새파, 쿰란공동체신학, 열심당원들의 신학, 그리고 영지주의적 유대교, 묵시주의적 유대교 등등의 신학들로 돌출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도 신처럼 거룩해져서 '신 대 신'의 차원에서 하나님과 만나자"는 방책들이다. 그런데 이들 신학이 결국 예수님으로 하여금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인간의 죄는 무엇인가?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나지 않는다. 단지 십자가의 영을 받아 십자가를 알기 전에는!
말세에 영이라는 성령을 받게 되면 인간은 비로소 십자가 앞에서 자기 죄를 안다.
인간은 처음부터 구원의 대상이 아니되었다. 구원되고 아니되고는 오직 예수님의 자기 권한에 속한다.
성경에 ‘십자가의 영’이란 말은 없다. 만들어 낸 말이며 혼미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인간은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오도록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구원을 위해 오실 것이 창세전부터 계획되어 있었으며,
그의 오심과 그분의 구언약과 새 언약을 알고,
<새 언약>에 있는 “하라, 말라”를 순종함으로 구원에 이루게 될 뿐이다.
엡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다만 청함을 받고, 그리고 택함을 받고, 또한 거룩함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 갈 수 있는 <구원>을 받는다.
그의 정하신 뜻(계획된)대로 그들)(듣고, 믿고, 순종 할 자들을 이미 아심을 부르시고
이 부르심(청함)은 그분의 <새 언약>을 듣고, 믿고, 순종함으로 물로 태어나게 되어 의롭다(물침례는 죄 사함 받은 것이며 의롭다함을 인침 것)함을 받고, 또한 성령으로 태어 날 준비 과정이라면
택함은 “그의 영” 곧 성령을 받아 “성령으로 태어 남”(Born of Spirit)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영화롭고, 거룩함이 되었으며 또한 이 거룩함을 유지(지켜야)해야 할 것이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아들과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예수님은 결코 계투요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이시다. 어느 누구도 이 언약적 주님을 뛰어넘지 못한다.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아니되었는지의 여부는 다음과 같이 외치는 고백을 통해서 차후 확인될 뿐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 1:13-16)
어찌하여 위의 구절로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단 말인가????
너무 막연한 말일 뿐이다.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에 이름이 기록 되려면 “태어나야”(출생=Born)한다. 곧 “물과 성령으로 출생” 해야 한다.
태어나지 않으면 이름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성경은 구 언약에서 태어나고 8일일이 되었을 때 할례 받으며 할례를 때 이름을 받으며
새 언약에서는 물침례(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침례)와 성령침례 받을 때(신령으로 할례 =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 “예수”라는 이름을 받는다.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성경에 기록 된 방법과 표적으로 <물과 성령으로 태어났는가>를 알면 된다.
결론
이방인은 분명 언약밖에 존재했다.(엡 2:12) 애초부터 누가 예정된 자인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 감람나무에 궐이 생겼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포기할 생각은 없으시다. 따라서 차후 조치가 아닌 근본 된 뜻이 마지막 때에 드러났는데 그것이 바로 이방인들도 감히 구원에 참예되기에 예정되었다는 것이다.
언약적 차원에서 볼 때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지 감탄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