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使徒信?)의 모순 점들] 2003-07-05
사도신경(使徒信?)의 모순 점들 원종석 2003-07-05 11:51:07, 조회 : 142, 추천 : 6
사도신경(使徒信?)의 모순 점들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신앙고백”이란 뜻으로 AD 325년 6월. 두달에 걸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신조(일명 니케아 신조)를 변형, 발전시켜 천주교에서 사용하던것을 여러 개신교파에서 비판없이 넘겨 받아 사용하고 있는 반면 또는많은 교파에서 사용을 금하고 있음도 본다.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든것도 아니고 내용의 60%(15 구절 중 9 구절은 성경말씀에서 직접적 이탈)가 비성경적이며 어떤구절은 성경의 내용을 바꾸워 인식되도록 유도되고 있음을 본다. <사도신경---사도들은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한 내용을 성경에서 찾을수 없다.>※ 표는 문제되는 부분들
1,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2, 그 외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3,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 4,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5,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6,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자 가운데서다시 살아나시며, 7, 하늘에 오르사, 8, 전능하신 한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9,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10, 성령을 믿사오며,※11, 거룩한 공회와,※1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13,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14, 몸이 다시 사는 것과 15,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2, 외 아들 ---- 예수를 가르쳐 <외 아들>로 표현된 성경구절은 전혀 없다. 예수는 외 아들(독자, ?子)이 아니라 독생자(?生子)다. 독(?)---홀로 독. 생(生)---날 생(태어나다). 자(子)---아들 자. 고로 한문으로 “독생자”라 함은 “홀로 태어난 아들”, “스스로 태어난 아들”이란 뜻이며 세상 어느 누구도 스스로 태어 날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이 스스로 인간 세계로 태어난 “아들”이 될수다. 신약성경 그릭 원어도 “홀로(스스로) 태어난 아들”이란 뜻으로 기록되어 있다.육신으로는 사람의 아들(인자,人子)이며, 육신 안에 ‘아들 하나님’이 아니라 “아버지”가 계셔 이를 일커러 “하나님” + “아들(인간)”이라 하여 “하나님의 아들”(신자, 神子)이라 한다. 고로 “외 아들”이 아니라 “독생자”이어야 한다.
3, 동정녀 마리아---‘사도 마태’와 ‘의사 누가’가(“누가”는 사도가아님) 성령으로의 동정녀 잉태와 탄생의 사실을 기록한것 뿐이며(마1:18-25, 눅1:26-38, 2:1-7) 사도들은 그들의 믿음과 관련하여 동정녀 탄생이나 그녀에 관한 신앙고백으로 기록된 구절은 일체 없다. 아마도 ‘마리아 숭배’를 유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강요한 것으로 보여 진다.
4,5. 빌라 도에 의한 고난과 죽임---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잡아죽이기로 결안하고 후에 잡아다 사형 선고를 내린 후 빌라도에게 집행을 요구했다.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고 놓아주려고 애를 쓴 사람인데도 “사도신경”이 빌라도를 살인자로 뒤집어 쒸운다. 빌라도는 죽이는 도구(칼) 역할만 했을 뿐이다. ☞ 참고 성경 구절 <예수는 누가 죽였는가?>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마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마26: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마27: 1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2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행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유대인들)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행3: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유대인들)가 저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행 7:52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행10: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유대인들,)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구약 제사법에서 제사에 바쳐지는 희생 양, 특히 속죄일의 양과 염소는 반드시 대제사장이 잡겠금 규정화 되어 있으며, 유월절 양은 이스라엘인의 가장(家長)이 잡아야 한다. 이방인은 유월절 양이나 속죄제의 희생양을 잡기커녕 성막 가까이에 접근도 할 수 없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어린 양(속죄제에 쓰는 염소와 동일)이며, 유월절 양이신 예수는 100% 대제사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해야 하며 이방인인 빌라도는 예수를 죽일 자격부터 없고 만약 이방인 빌라도에 의하여 예수가 죽임을 당했다면 그는 “구세주가 아니며 그리스도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의 어린 양”도 아니다. 고로 “예수”는 반드시 대제사장을 포함한 유대인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옳다.
10, 성령을 믿사오며---성경엔 “성령을 믿는다”는 말은 없다. 성령은 믿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야만 한다.” ‘하나님 안에 세분이 계신다’는 신앙 때문에 ‘제삼위의 하나님’도 믿어야 한다는 개념을 심어주게 된다.
11,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 사도신경의 원본이나 영어에는 ‘거룩한 공회’가 “카토릭”이란 단어로 되어 있으므로 개신교가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하면 “카토릭을 믿는다”는 우수광스러운 소리가 된다.
12,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것을 믿는다---‘사도신경’이 카토릭에 의하여 작성 사용된 것이라면 성도(聖徒, Saint)란 칭호가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카토릭에서 ‘Saint, 聖’란 칭호를 주는 경우는 ‘많은 업적을 남기고 죽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붙여지는 것’으로 예를 들면 “성(聖) 베드로”. “성(聖) 누가”등등--- 이런 경우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함은 결국 “죽은 사람과의 교통한다”는 뜻으로써 카토릭에서 죽은 ‘베드로상’이나 마리아상‘ 앞에 끌어 앉아 죽은 그들에게 소원을 알리고 기도함을 뜻하는 것이 된다. 개신교에서 “교인들이 서로 교제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지만 “교인들이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는다”는 말은 우스광스런 표현이 된다. 13, 죄를 사해 주는것---카토릭의 경우 “죄 사함”이란 신부(神父-하나님 아버지란 뜻)라 칭하는 사람에게 ‘고백성사(告白聖事 고해성사)’하는 것으로 죄사함 받는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14, 몸이 다시 사는것을 믿는 것---내가 가지고 있는 “현재의 몸(육신)”이 <죽었다가 현재의 몸(육신) 처럼 다시 되돌아온다>는 개념으로 받아드리게 되는데 성경은 “몸이 다시 산다”고(성경에 없는 구절임) 하지 않고 “죽은 자가 다시 산다”고 설명하면서 “현재의 육체”로가 아니라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여 “신령한 몸”(신령체)으로 변화됨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것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옳다.<부활에 대한 참고성구 고린도 전서 15장 12절-54절>
##############################################################################################거듭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원종석 2003-07-05 12:29:16, 조회 : 114, 추천 : 12
중생과 변화
거듭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성경 -- 하나님의 말씀 > 진리 > 복음
성경은 하나님이 쓰셨음으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우리는 믿는다.성경 안에는 “진리의 말씀”과 ‘비 진리’가 기록되어있는데,
예를 들면 창 3:1-7에 있는 사단이 말한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이 말은 분명 성경 책 안에 있지만 ‘비 진리’인 것을 우린 알고 있다.
또한 사람이 ‘사람의 생각으로 말 한’(변사 더둘로가 사도 바울에게) 행 24:5“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이러한 것들은 “진리” 밖에 있는 것이며,
또한 “진리 안에 있는 말씀”이라도 “진리”의 전부가 “복음”은 아니다.
예를 들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05:03)라고 한 말씀은 “진리”이지만 “복음”은 아니다“
“진리”라는 말씀 안에 있는 어느 한 부분이 “복음”의 내용으로 기록됐으며 이 “복음”은<구원의 복음>이며(엡1:13),<거듭나게하는>(벧1:3, 23-25,약1:18) 내용으로 기록되고 있다.
<복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경대로 “그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이 있으며, (고전15:1-4)“회개와 죄사함과 새 생명”이 있고, “물침례와 성령침례”가 있어태어나는(중생하는, 거듭나는) Story가 있다.
“<말씀>”이라고 기록 된 <상자>를 열면 그 안에는 하나님 말씀 안에 진리 진리 안에 복음 복음 안에 “거듭나는 방법”(내용)이 있다
성경을 가르친다는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복음이다”라고 역설한다.이 역설하는 “복음의 내용”을 보면 사람마다, 교파마다, 그 내용이 수도 없이 다르고 많으며 어느 것이 진짜고, 가짜인지 혼돈 되어져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지적하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오직 하나 뿐>이다
절대 <다른 복음>은 없다.
가짜가 진짜 보다 보기도 좋고, 먹기도 좋고, 그럴 뜻 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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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이시여 !
“거듭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변화”는 “탄생”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로든지 “변화”는 “출생”한 사람에게 이러나는 현상이고, 이미 태어난 사람에게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태어나지 않으면 변화 될 수도 없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름도 없습니다.
출생되지 않았으면 “출생신고”도 할 수 없으니 “생명록”에 등록 할 수도 없습니다.“생명록”에 ‘이름이 없을 때’“물과 성령”으로 낳지 못했을 때 무론 대소하고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태어남”은 있던 존재의 “변화”가 아니고 없는데서 새롭게 창조되어 나타나는 현상입니다“거듭남”은,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그 다음에 신령한 자
그래서, “육체”로 태어난 사람 안에 “육체”가 아닌 또 다른 존재,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는 비교도 안 되는,성령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고귀한 존재”가 창조 될 때,하나님은 이를 “거듭났다”, “또 태어났다”고 갈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려면“물과 성령으로” 낳아야 하며이는 “물침례 성령침례”로 된 것임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선포하셨거든요.
############################################################################################원종수 이사람 사도신경에 시비 왜 안거나 싶었죠 김상철 2003-07-05 13:03:50, 조회 : 189, 추천 : 11
원종수 이사람 사도신경에 시비 왜 안거나 싶었죠
이제 성경 번역에도 시비 걸껍니다
아마 한글킹제임스 번역만 제대로 된 성경이고 다른 번역은 잘못 되었다고 우길껄요
침례교 교파중에 이런 해석이 10년 전부터 유행하더니 많이 퍼졌군요
말씀보존학회 쪽이 이런 주장하고 하여튼 안끼여드는 곳이 없네요
==========================================================================[re] 아 그런것이었나요? 남상수 (Homepage) 2003-07-05 13:28:37, 조회 : 163, 추천 : 11
원종수 님은 자신의 속한 교회와 교단도 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야 누가 맞든지 틀리든지 서로 알고 토론할 것 아닙니까?
자신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있지 않다면 좀 밝혀주시죠..
##############################################################################################그것은 김진홍 목사님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김병구 2003-07-08 01:54:57, 조회 : 232, 추천 : 15
그것은 김진홍 목사님 개인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님들의 교회 재산 및 재정 전횡, 교회 세습, 성적 간음 등에서 역력한 한국 교회의 영적 타락은 청부냐 청빈이냐를 두고 이 나라의 기둥 같은 목회자들이 책을 내며, 텔레비전에서 설전을 벌리는 양상으로 번지더니, 마침내 교계의 한 거목이 세상에서도 말이 많은 다단계 판매망에 걸려 들었습니다.
왜 목사님들이 돈에 이렇게 관심이 많고 돈 때문에 평신도들인 우리들에게까지 고민을 안겨다 주는 것일까요? 저는 그분들이 돈에 대하여 지나친 관심을 갖고, 인간보다 돈을 앞세운 것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다음에 돈이 중요하다고 설파하는 행위의 동기는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목사님들이 처절하게 원하는 선교, 교육, 그리고 구제 등의 하나님의 사업에 돈이 절실하게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돈 없이는 하나님의 사업 마 저도 추진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돈이 얼마나 강력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왜 돈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가르치고 계신지를 가르쳐 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이 직접 돈을 버는 데 나선다는 것은 전문성을 떠나고,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신 천직에 충성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저의 생각이 짧아서 인가요?
성경에 따르면 모든 교회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사도들이 직접 섬기던 초대교회에서는 목자와 영적 지도자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하여 구제를 포함한 교회의 세상일은 집사들에게 맡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지 않고, 교회의 재산 재정의 운영에 까지 깊이 관여하는 것이 거의 일반화되더니 이제 거목 같은 목사님이 직접 회사의 설립 주주가 되시어 다단계 판매 사업을 시작하실 뿐만 아니라 교인들에게 이를 권유하시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김진홍 목사님 개인 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 날 수 있는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영적 상태가 이루고 있는, 이 거목 같은 목사님을 둘러 쌓고 있는, 한국교회의 영적 환경의 문제입니다. 저는 김목사님께서 시험에 빠지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마찬 가지로 한교 교회의 메조리티는 시험에 빠져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성도님들이 교회가 해야 할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헌금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한국 교회 성도님들의 영적 상태가 온전치 못함을 의미하는 것이요, 이는 곧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사업에 필요한 재원을 헌금 하도록 교인들을 영적으로 양육시키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목사님들이 뒤 따라야 할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돈을 버는 사업을 하신 기록이 있습니까? 오늘날 한국의 중대형 교회의 목회자님들이 사도 바울처럼 생계를 위하여 부업을 가져야 하는 형편입니까?
문제의 해결은 목사님들의 말씀과 기도에의 전념에서 찾아질 것 같습니다. 목사님과 장로님들께서 교회의 세상일 들은 집사들에게 맡겨 두시고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전념하심으로 성령이 충만하시어 교인들을 말씀으로 성화시켜가신다면, 하나님께서 필요로 하신 만큼은 충분한 자금이 성도들의 헌금으로 조성될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모든 교인들이 진짜 크리스천이 되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10의 1조만 하게 된다면, 각 교회의 헌금 수입은 지금의 수배로 늘어 날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다단계 판매망에 걸려들 필요가 말끔히 씻겨질 것이 아니겠어요.
저는 이러한 작금의 한국 교계의 영적 상태를 중대형 교회 목사님들의 교인들이 듣기 좋은 달콤한 설교에서 느낍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한지 1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대치상태의 유지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최선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6.25 기념 설교를 하는 수 만 명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설교에서 저의 희망은 좌초되는 슬픔을 앓게 됩니다.
정녕, 회개하라! 민족을 위해서 회개하라! 하나님 보다 돈을 더 섬겨온 우리의 죄를 회개하자! 민족과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님들을 위하여, 아니 눈앞에 닥쳐오는 것 같은 핵 전쟁의 모면을 위해서라도 민족과 교회의 회개를 외치는 목자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 지요?
==========================================================================[re] 핵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근호 2003-07-08 06:04:17, 조회 : 246, 추천 : 22
핵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뉴질랜드나, 핀란드나 스웨덴, 노르웨이처럼, 핵 전쟁의 위험이 없이 세계 최고의 이상적인 복지 국가 나라 안에 사는 사람들의 불신앙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보세요. 그들의 일년 소득이 몇 만불이나도 됩니까? "먹는 것과 입을 것이 있는 줄 족한 줄로 알라",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라는 말씀이 절실하게 적용되는 그 때 그 시절의 성도들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즐거움보다 위의 것을 생각하는 즐거움에 사로잡혔습니다.(골 3:1-5)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진홍 씨는 원래부터 사회 사업가였습니다. 목사라고 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분이 암웨이 사업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된단 말입니까? 대중들이 복음을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광야의 떡을 원했기 때문에, 김진홍 씨나 오용진 신부나 최일도 씨나 한경직 씨 같은 사람을 마치 대단한 목사인 것처럼 오해하고 있을 뿐입니다.복음이 참 목사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인데 대중들은, 나라를 잘 살게 하고 삶의 질을 높이고, 생존 문제를 겸하여 해결하는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그 기준에서 목사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려 합니다. 김진홍 씨나 최일도 씨 같이 아에 노골적으로 사회 사업가로 나서게 되면 차라리 사기꾼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과 같이 환경 운동이나 사회 운동에 종사하지 않고 소위 복음 사업을 벌리는 대부분은 목사들은 대부분이 영적 사기꾼들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지도 못하면서 천국을 팔고 다니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결 같이 주장하는 바가 바로 , "돈을 사랑하지 말고 회개하라, 수입의 10%만이라도 자기 교회에 바쳐라는 겁니다. "라는 겁니다.
이유여한을 막론하고 목사가 강단에서 돈 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정신을 딴데 두고 있는 음흉한 자들입니다. 어떻게든 돈보다 귀한 것이 복음임을 전해야 될 자가 어떻게 복음보다 교회 유지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복음보다 교회가 우선이다는 말입니까? 복음도 교회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제쳐두고 교회보고 천국 들여보낸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살후 1:9) 돈 있고 없고에 그토록 신경쓰는 마음이 과연 복음에 관해서 어린애같은 순한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까?(마 18:5)
교인들, 본인들이 복음보다 돈을 사랑해서 교회에 헌금하기 싫다면 그것도 아직 믿음이 없어 나온 행동이니 만약 억지로 회개를 촉구해서 돈을 갈취한다면 이런 목회자의 태도가 바로 거짓 선자지요 사기꾼의 행세입니다.
쉽게 말해서 재주는 곰이 하고 돈을 중국사람이 번다는 식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재주는 예수님이 하시고 그 덕으로 목사들이 교회 사업 성공해 보겠다는 의식이 어떻게 정상적인 예수님의 종입니까?
예수님께서 목사하고 동업했습니까?
진짜 목사는 오직 복음만을 외치는 자입니다. 그리고 진짜 성도는 복음만 들리면 족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복음이 들여지다니!"라고 말입니다. 마치 예수님 품 앞에서 서 있는 어린아이처럼 ... ...
##############################################################################################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원종석 2003-07-11 09:51:32, 조회 : 114, 추천 : 12
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성령으로 난 사람은<다>이러하니라”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언어가 존재합니다. 기금까지 발견된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만도 6천여 종에 속한다는 학자들의 발표를 들을 수 있습니다.(70년 중반에는 2500여 종으로 발표) 여기에 동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가 될 것이며, 인간은 이 모든 언어를 다 알거나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종족의 언어는 우리가 듣기에 전혀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그들끼리 대화를 할 것이며, 또한 그들도 우리 한국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역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로 “지절거린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듣기에 거북스러울 만큼 한 그들의 “주절거림”이라 할지라도 “그 것이 무슨 언어냐?”고 욱박지르고 천시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옳은 자세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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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요3:1-91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출생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9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예배당에 나가는 사람이라면 위의 성경말씀은 누구나 다 듣고, 기억하여 알고있는 내용입니다.그러나 많이 알려진 내용만큼 그 내용의 심각성은 결여되어있고 또 전혀 알지 못하여 무관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혹 누가 그 내용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질문을 해도 “성경을 가르친다는 사람” 자신도 옳게 알지 못하여 답하는 사람마다 그 답이 수 십 가지로 나오거나, 또는 전혀 대답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예수님은 찾아온 밤손님 니고데모와 아주 신비스러운 대화를 하게 됩니다.(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시작합시다)
학교에서 ‘역사 선생님’은 역사를 가르치고, ‘국어 선생님’은 국어를 가르치며, ‘영어 선생님’은 당연히 영어를 가르칩니다.니고데모는 2절에서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즉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실 줄 아나이다, 믿나이다>입니다. 니고데모는 정말 순수하고, 정직하며, 의로우며, 분명한 사람입니다.예수님은 그런 고백에 만족하시어 직접적이고 직설적으로 그러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누구나 아주 쉽게 알 수 있도록 내용을 풀어 나갑니다.처음에는 “이것을 하지 아니하면” “저것을 할 수 없다”라는 ‘부정의 부정문’을 도입하여 “거듭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똑 잘라 말씀하십니다.단순히 “태어난다”는 말은 누구나 쉽게 이해되지만 “또 태어나야 한다”는 말은 쉽게 이해 될 수 없습니다.그래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라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예수님은 “---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심으로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또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육체로 또 출생되는 것이 아니라 “물로, 그리고 성령으로” <두 번째로 출생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려 하셨습니다.6절.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그래서 바울은 <첫 번째 출생>은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전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물과 성령으로 출생되는 것”이 <두 번째 출생>이라고 분명히 설명되고 있습니다.“물로, 성령으로 출생”되는 이 <두 번째 출생의 존재>가 “신령한 자”라고 성경은 설명합니다.그런데 “성령으로 출생 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그 것이 무엇인지 “체험하기 전”에는 어찌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예수 님은 8절에서 100% 설명의 문을 엽니다.
8절--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Born. 출생)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많은 사람에게 질문을 합니다.8절 끝의 성령으로 난(Born. 출생)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했으니 “다 어떻타는 것인가요??”라고 질문했을 때의 그 대답은 주로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바람이 불어 올 때 그 바람이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렇게 알 수 없는 것입니다”과연 사람에게 알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2) “바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성령으로 심령이 변화되는 것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위의 설명자는 <태어남>과 <변화>를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성령으로의 태어남은 결코 변화가 아닙니다. 먼저 태어난(출생) 존재가 후에 변화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위의 1)과 2)의 설명자는 결국 “모른다”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엇을 모른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면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는 어리벙벙함”입니다.그런데 9절에서 니고데모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라고 반문하는데 이는 8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서(알지 못한다)가 아니라 <신비스러움과 놀라움>으로 인한 “감탄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 출생되어 질 때,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즉 하나님의 영으로 입술과 혀가 이상해지고, 알지 못하는 어떤 언어가 나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입에서 술술 나와 진다>면 놀라지 않을 수도 있습니까?아마도 “내가 왜 이러지! 누가 내 대신 내 속에서 말을 하지! 이 소리가 어디서 오며, 누구에게 하는 소리지!”라고 놀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십니다.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랍비(선생)입니다. 성경을 많아 아는 사람이요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예수님 말씀의 내용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지만 <믿지 못할 만 큼>의 놀라움의 표현으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로 응수하신 것입니다.니고데모는 8절의 내용을 “알 수 없다”가 아니라 100% 알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예수님은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관한 질문과 그 대답>이 알쏭, 달쏭 이해 할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예수님의 사람을 향한 설교 말씀은 어떻게 해서라도 잘 이해 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셨는데, 직설적으로, 때로는 예화를 들어, 어떤 때는 쉽고 단순한 표현법으로 해 오셨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한번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사람의 유전 따위를 모르는)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이어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덮지 말고 폅시다.
“영”이란 단어는 pneu/ma(푸뉴마)이며“성령”이란 단어는 pneu,ma+toj의 복합 명사 pneu,matoj(푸뉴마토이)입니다즉 “성령”(실은 “성령”이 아니라 그냥 “영”)(pneu,matoj)이란 단어는 “영”(pneu/ma)이란 단어의 어미변화 입니다.그런데요 3장 5절부터 8절까지에는 우리나라 성경이나 영어성경 KJV에 “영”(Spirit)이란 단어가 4번만 나오는데 원어 성경에서는 “영”(pneu/ma)이란 단어가 5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 다섯 번째의 “영”(pneu/ma)이란 단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많은 경우의 번역자들은 직역하기를 피하고, 자기가 속해있는 교파 교리를 지나치게 의식한 결과 교리에 맞도록 번역하게 됩니다.예를 든다면 우리나라 성경번역에서 그릭어 “밥티조”라는 단어를 “침례”로 하지 않고 “세례”로 한 것이나, 고유명사 “여호와”란 이름 대신에 “주”라고 쓴 것이나 ----중성명사를 “셋”이란 단어를 인격체로 표현하여 “세분”이라고 한 것 라든지 ------이제 제 5번째의 “영”(pneu/ma)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8절에서 “바람”이란 단어가 바로 그 것입니다.물론 원어의 pneu/ma의 뜻은 영, 호흡, 바람이란 뜻을 포함하고 있지만 “영”이란 단어 대신 “바람”이란 단어 사용은 그 뜻이 전혀 다르거나 혼미하게 되어 집니다. 원어를 아는 사람이 그대로 읽으면 아무런 걸림이 없이 이해되지만 우선 한국어로 “바람”이란 단어 사용은 몇 가지 잘 못된 멧세지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우리나라 말에 “말”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여러 뜻이 있지만 그 단어를 합당하게 써야 말이 통하듯 말입니다.
장기 말은 말(馬)이 아니고, 말(言)이 없으면 말(末)이 되고, 말(斗) 가지고 말(이웃집에 놀러) 간다*뱃군(배의 군. seaman)이 배(베)옷을 입고 배(Boat)를 타고 배(Pear)를 먹으니 배(stomach)가 배(Double)나 부르다.*만약 위의 글에서 <뱃군(배의 군. seaman)이 배(베)옷을 입고 배(stomach)를 타고 배(Boat)를 먹으니 배(Pear)가 배(Double)나 부르다.>라고 했다면 누가 이해 할 수 있겠습니까?*첫째 문제점<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바람”은 의지가 없음으로 “임의로 불매”란 표현이 될 수가 없습니다.“공기”의 “움직임”(movement, 불매)이 “바람”이고, 그 움직임은 공기의 대류 현상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결코 <공기는 임의로 불> 수가 없다는 모순입니다.바람은 인격체가 아님으로 ‘제 맘대로’ 불수 없습니다.그러나 “바람”이 아니고 “성령”이란 원어의 뜻을 대입하여 보면 모순 없이 뜻이 통해 집니다.“성령이 임의로---” 주어가 되는 “성령”은 의지가 있고 신격체 임으로 “임의로”란 말이 이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문제점<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8절의 주어가 “바람”이라면 “그 소리를 들어도”에서 “그 소리”는 당연히 “바람 소리”를 지적하는 것이므로 “성령으로 태어나는 사람”에 대한 설명이 “바람”과 상관되어 진다면 우수개 소리가 됩니다.예수님은 요3:1-10에서 중요한 “성령” 이야기를 계속 중인데 느닷없이 “바람”이란 단어 사용이 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셋째 문제점“바람”과 “그 소리”와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함을 연결 해보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처럼 “바람 소리”가 난다>는 결론에 도달 해 집니다.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찌 “바람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원어에서 “푸뉴마”을 “성령”으로 번역하여 읽어보면 예수님의 멧세지가 분명하고도 이해 될 수 있게 됩니다.?????????????????????<성령이 임의로 행하시매(또는 역사하시매) 네가 그 소리(성령의 소리, 방언)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처럼 성령의 소리가 나느니라)>
<성령이 임의로 역사하시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가 옳은 번역이 됩니다.
이런 재 번역과 해석이 기존의 번역을 무감각으로 저장 해둔 사람에게는 억지나 황당한 것 같지만 사도행전 2장1-4를 연결해 보면 100% 정립이 됩니다.
행2:1-41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3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4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 4절에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이라 함은 요3: 8절에서 성령이 임의로 역사하시매 그 소리(성령의 소리)와 직결됩니다.다시 설명한다면 <방언에 대한 정의>는--- 성령에 말하게 하심을 따라 나는 소리가 “방언”입니다.고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는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처럼 성령에 소리, 방언의 소리가 나느니라”로 이해되고 믿어지게 됩니다.예수님은 “하나님께로써 남”(거듭남, 또 출생됨)에 대한 설명을 사람들이 이해 할 수 있도록 실지로 “출생”에 대한 경험적 사건과 직결시켜 “태어난다”(Born)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태어남은 변화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로 태어남”(거듭남)이란 뜻을 “변화”로 가르치고, 그렇게 믿도록 하고 있습니다.“변화”는 ‘태어난 사람’이 “변화”하는 것이지 ‘태어나지 않았으면 변화란 단어가 해당되지도 않는 <무 존재>’라는 것을 대개의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아래의 0-4번까지는 사람의 “육(체)으로 태어날 때”와 “성령으로 태어날 때”를 비교 한 것입니다.
육으로 출생 시0) “씨”가 9개월간 어머님 몸 안에서 성장하여 사람의 모양이 되어지고, 때가 되면 1) 아기가 어머니 몸 밖으로 나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갈 때 <태어남>의 표적으로 울음의 “소리”가 납니다. 출생의 “표적 울음”2) 첫 번 “소리” 뒤에 두 번째 “소리”는 1)과는 뜻이 다른 “소리”입니다.3) 이후로 계속 여러 종류의 “소리”가 지속되면서 “언어”라는 형태로 바뀌어 집니다. 첫 번 체험의 “울음소리” 뒤에 “소리”는 <은사로 주어지는 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별로 말 같지도 않던 소리’가 어느 날 “언어다운 소리”로 변하게(율동적, 액쎈트, 감정 등) 되어 자기 모국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외국어도 하게 되구요--- 그러나 어떤 사람은 1)의 울음을 운 후로는 “소리”가 언어로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벙어리 혹은 “농아”라고 하죠.4) 태어난 사람은 성장하게 되는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건강과 용감하여 훈장도 달고, 높은 지위와 권력도 소유하며,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병들기도 하고, 또는 병들어 죽기도 하며, 사고로 죽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 살기가 싫어 자살도 합니다.
성령으로 출생 시0) “말씀”의 “씨”가 사람의 마음 안에서 필요한 기간동안 성장, 믿음이 익고, 때가 되면1) “하나님의 영”이 몸 안으로 들어갈 때 <태어남>의 표적으로 울음의 “소리”가 납니다. 이러한 “소리”를 성경적으로는 출생의 “표적방언”이라고 합니다.2) 첫 번 “소리” 뒤에 두 번째 “소리”는 1)과는 뜻이 다른 “소리”입니다.3) 이후로 계속 여러 종류의 “소리”가 지속되면서 “언어”라는 형태로 바뀌어 집니다. 첫 번 체험의 “울음소리” 뒤에 “소리”는 <은사로 주어지는 소리>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리”는 ‘별로 말 같지도 않던 소리’가 어느 날 “언어다운 소리”로 변하게(율동적, 액쎈트, 감정 등) 되어 “유창한 언어”가 됩니다. 이런 언어는 “모국어”에 속하는 <하나님과의 비밀을 말함>이라면 <다른방언>은 외국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를 성경적으로는 “은사방언”이란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1)의 방언을 한 후로는 “소리”가 언어로 바뀔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벙어리 혹은 “농아”라고 하듯이 “은사 방언”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4) 물과 성령으로 태어난 속사람은 성장하게 되는데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사람은 병들기도 하고(믿음이 연약함으로), 또는 병들어 죽기도 하며, 사고로 죽기도 하고(마귀의 공격으로), 때로는 하나님 나라 가기를 포기하여 자살(믿음을 버림)도 합니다.
?????????????????“육(체)으로 난 사람은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 갈 때 다 ‘소리’를 냅니다”“육(체)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와 같이“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이 몸 안으로 들어 갈 때 <다 ‘소리’를 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성령에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 ‘성령의 소리’를 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re] 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손무성 2003-07-12 14:31:48, 조회 : 115, 추천 : 14
원종석님은 아래와 같이 말했는데...
"그리고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십니다.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랍비(선생)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요 가르치는 사람이므로 예수님 말씀의 내용을 충분히 알고, 이해하지만 <믿지 못할 만 큼>의 놀라움의 표현으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로 응수하신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8절의 내용을 “알 수 없다”가 아니라 100% 알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관한 질문과 그 대답>이 알쏭, 달쏭 이해 할 수 없도록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의 사람을 향한 설교 말씀은 어떻게 해서라도 잘 이해 되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취하셨는데, 직설적으로, 때로는 예화를 들어, 어떤 때는 쉽고 단순한 표현법으로 해 오셨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는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사람의 유전 따위를 모르는)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이어야 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덮지 말고 폅시다. "
정말 성경(요한복음)이 이런 식으로 말씀하고 있는가?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이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 하고 있었다'는 것은 받아 들일 수없다. 위의 논리가 맞다면 바리새인들과 모든 서기관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어린아이 같은 순순하고 더러움이 없는 마음을 안 가졌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 못했다는 말이된다. 아니면 그들도 니고데모와 같이 다 알고 이해 하고 있었는데 안 받아 들였고 안 믿으려고(이성적으로) 거부했다는 말이 된다.
만약 이렇게 되면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Search the scriptures; for in them ye think ye have eternal life: and they are they which testify of me.) 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the scriptures"(성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면 누구나가 다 이해 되는 그런 것이란 말인가? 어떻게 이해 해야 하는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예수님에 대하여 중거하는 것" 이다. 그렇다면 원종석님의 논리로 하자면 성경에 기록된 것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니고데모와 같이 성경에 박식한 사람 같으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말씀을 100% 이해 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못받아 들인 이유는 순진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안 가져서 못 믿는 것이란 말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이 구원받는 일에 관한 질문과 그 대답>이 알쏭, 달쏭 이해 할 수 없도록 하실 것인가?'라는 말을 했는데...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온다. 당시 바리새인들도 서기관들과 모든 종교 지도자들도 성경을 외울 정도로 바싹했다 그러면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뿐만 아니라 성경의 기록들을 어린아이같이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면 100% 이해 할 수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 논리는 결국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예수님에 대해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잘 설명하거나 깨우쳐만 주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싶게 말하면 누구에게나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하고 공부시키고 이해 하도록 도와 주면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된 것을 이해하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정말 그런가? 성경이 그렇게 니고데모 같이 성경 선생이 되고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만 가지면 구원에 대해 알고 이해 하고, 더 나아가 구원 된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어린아이를 예수님께서 앞에 세워 놓고 제자들에게 천국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천국은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마음, 순수하고 더러움이 없는 순전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면 이해하고 알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복음서에서 어린아이를 등장시킨 것은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나 낮으냐에 관한 다툼이 있을 때 등장시킨 것이다. 그러니 천국은 누가 순진한 마음을 소유 하면 가는 곳이 아니라, 자신이 남긴 업적과 내세울 것이 없는 자를 상징하는 것이 어린 아이라는 것이다. 결국 천국은 자신이 내세울 것이 있느냐 없느냐, 높임 받을 자인가 아닌가와 상관 없이 예수님의 하신 일(십자가의 일)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누가복음18장11-16)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그외 참조(마가복음9장 36절, 누가복음 18장 16절 ,마태복음 18장 5절... )
위의 논리에 의할 것 같으면 원종석님의 해석이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종석님은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말씀도 예수님께서 쉽게 말씀했기 때문에 누구나 알아 들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린 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을 갖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이 필요 없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과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인간의 마음만 있으면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도 없이 구원은 받을 수 있다는 이상한 종교가 하나 발생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감각과 이성과 지각의 모든 것으로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다는 것이다. '너로 말미암지 않겠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뿐만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만 듣기만 들으면 이해 되고 그것을 자기 의지를 동원하여 믿는 일을 하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이다.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길과 진리와 생명은 육으로는 보이지 않고 얻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너가 찾아냈다든지 너가 생각해서 만들어 낸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진리도, 생명도....
그래서 특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자의 눈을 뜨도록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중도 실명자는 사물의 개념이 있다. 예를 들자면 붉은 색하면 개념이 있다. 그러나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그 개념이 없다.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어떠한 개념이 없는 육을 대표로 내세우신 것이다.육은 그리스도에 대한 개념이 없다. 아버지 하나님, 성령님에 대한 개념도 없다. 있다면 가짜다. 마치 오병이어 기적을 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여기되 자기 육을 배불르게 하는 왕(요6장)으로 삼으려는 정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개념이 설려면 눈이 열려야 하는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된자의 눈을 뜨게 하듯...
니고데모(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가 예수님의 말씀을 100% 이해하고 있었는데 안 받아 들인 것은 그들이 순전한 마음을 안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 아니면 모두가 소경이요 눈 뜰 수 없다. 육은 육이다. 육은 영을 알 수 없다. 오직 육이 원하고 육이 원하는 것만 만들어 낼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우편에 올리워 가신 후에 성령을 보내겠다는 것이었고 성령이 우리에게 덮쳐 온 것이다. 육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었듯이 선택된 자를 위해 대신 저주 받아야 하고 이를 살리는 생명 되시는 분(예수님)에 의해 주어져야 했던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구원은 인간의 소관이 아니다. 성경을 읽는다고 100% 예수님을 이해 할 수 없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에 대한 증거의 말씀들을 알아 먹을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을 뜨게하시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에게 이끌지 않으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는 인간이 아무도 없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 4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 6) 이 은혜를 아는 자만 안다.
##############################################################################################실로암 못 원종석 2003-07-15 12:13:04, 조회 : 94, 추천 : 26
실로암 못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소경의 눈을 밝게 요 9:1- 11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 이니라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8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10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되었노라'
복음서 중,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일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소경의 눈을 고치시는 그 방법이⑴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만으로도, (막 10;46-52) ⑵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말씀만으로도, (눅 18;35-43)⑶ 소경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하심으로도, (마 9;27-31) ⑷ 소경의 눈을 만지심으로, (마 20;30-34)⑸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눈에 침을 뱉으시며 두 번씩 안수>하여 (막 8;22-26) ⑹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로(요 9;1-끝) 또 그 이외에도 소경을 고치신 일이 여러 번 있지만 그 방법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이 중 요한복음 9장 전장에 기록된 사건은 어느 경우보다도 특이하고 이해되기 어려운 점이 많다.
제자들의 촛점은 “뉘 죄가 소경 되게 했느냐”였는데 예수님은 “본인이나 그 부모(사람)가 범한 죄(자범 죄)”가 아니라 에덴에서의 원죄로 인함을 암시하고 ‘그 죄의 문제 해결책’을 보이시되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사람 구원”이시며 그 방법을 보이시되 <소경의 눈뜨는 일>을 통 해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하신다. 그런데 눈을 뜨게 하는 방법이 왜 하필이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서 인가? 예수님은 소경에게 이르시되 “보냄을 받은 못”(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다. 그래서 명 한대로 하니 “밝은 눈”으로 왔다. “침 뱉아 이겨진 진흙”이 왜 눈에 있어야 하는가?소경의 눈에는 ‘발려진 흙’이 있어도, 없어도 앞이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소경은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자기 눈에” 발라 준 사실을 알고 있다. 만약, 소경의 눈에 아무 것도 없는데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 되겠는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없는데 무엇을 씻는단 말인가?”소경은 씻을 것이 없는데 실로암에는 왜 가겠는가? 소경이라 어디 다니기도 불편한데....... 결국 소경은 가지 않았을 것이고, “실로암”(보냄을 받은 장소)에 “실로암”(보냄을 받은 자)이 되지 못 했을 것이며 “감은 눈”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씻어야 할 구실을 만들어 씻도록 보내진 사건이 “실로암 못”과 소경. 인간은 태어나면서 죄가 눈에 발려 져 있어도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살다가 “율법”이란 매체를 통해 어느 날 ‘내게 죄가 발려져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죄 씻음”의 비밀을 알고, “물로 보냄”을 받고 “보내 진 못”에 가게 된다는 Story.그래서 “씻게”되고 보게 되며 “밝은 눈으로 왔더라”는 성경을 응하게 한다. 실로암 못은 씻는 곳이며, “물 침례”의 상징이고, 보냄을 받은 자(택함 받은 자녀들)의 갈 곳이며, 예수께 와서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눈에” 발려진 사람들이 죄인 됨을 깨달아 “가라”고 명령되어진 곳. 실로암이 그 곳이다.<죄 씻는 일>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며. “나를 보내신(실로) 이의 일”이고, “우리(실로들)의 일”이다.씻을 것이 없는 줄로 아는 사람들과 씻을 것이 있는 줄로 아는 사람들.침 뱉아 이겨진 진흙이 눈에 안 발려진 사람들과 눈에 발려진 사람들
전자는 실로암 못에 못 가고후자는 실로암 못에 순종하여 가던지, 불순종하여 안 가던지------ -----**********-------------************--------
<성서대사전>에서 발췌셀라 =파견된 자 =셀라(히브리어 음사) =(그릭어 음사) =실로아 ========================================================================== [re] 눈에 흙을 바른 것이..... 구득영 2003-07-15 13:23:10, 조회 : 106, 추천 : 12
과연 순종하고 안할 그런 근거가 되는가? 오히려 그런 것이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전혀 소경을 연못으로 인도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예수를 저주하면서 물 한바가지 퍼와서 그냥 씻으면 그만이다.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왜 그런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가?마치 눈에 빠진 자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다. 그러나 그런 지푸라기로는 결코 그 물 속에서 나오지를 못한다. 밖에 누군가가 감당치 못할 힘으로 끌어당겨주어야 한다.
같은 말씀을 보는는데 왜 이리 다른가? 그것이 어디 성경번역상의 문제인가?분명 딴 생각을 하는 것이다. 걸어가는 길이 다르다는 말이다.
분명히 강조하지만 하늘나라에는 그런 인간의 어떤 무엇을 했다는 근거가 전혀 없다.아들의 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 왜냐하면, 아들의 나라이니 말이다. 지금 이 십자가 마을에서 고생(?)하는 우리들도 그런 고생이 전혀 근거가 되지 못한다.왜냐하면 우린 북한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배부른 자들이니 말이다.그렇다고 교회나 집을 장만한다고 분주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모습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얼마전 아비타에 백여만원을 투자해서 부모에게 야단맞아 목숨을 버린 학생이 남의 일이 아니다.지금도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의 삶이 유지됨을 잊지 말자.올 여름 수련회가 그런 모임이 되기를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