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없다] 2003-04-29
[교회가 없다] 2003-04-29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교회가 없다
박기삼 (Homepage) 2003-04-29 14:58:27, 조회 : 404, 추천 : 37
교회가 없다
프랭크 바이올라 지음 이영목 옮김 신국판 288쪽 도서출판 대장간에서 10,000원
추천의 말: 이 책은 300년 전에 나왔어야 했다
역자의 말: 50년 전에라도 나왔어야 했다
감사의 말: 나온 적이 없는 책
머리말: 어처구니없는 듯한 제안
서론: 우리는 과연 성경대로 해 왔는가?
1. 예배 순서: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주일 아침
2. 설교: 건드렸다간 큰일나는 개신교의 신성한 소
3. 교회 건물: 대를 물려온 집 콤플렉스
4. 목사: 지체들의 역할을 훔쳐가는 도적
5. 주일 아침 의상: 문제를 덮는 가리개
6. 음악 사역자들: 조연급 성직자들
7. 십일조와 성직자 사례비: 상처뿐인 지갑
8. 세례(침례)와 주의 만찬: 물 탄 주스같이 된 의식
9. 기독교 교육: 잔뜩 부어 오른 두개골
10. 다시 봐야 될 구세주: 혁명을 일으키시는 예수님
11. 신약성경에의 재 접근: 성경은 그림 맞추기(Jigsaw
Puzzle)가 아니다
놀랍게도 오늘날의 교회의 사상과 관습은
신약성경에 근거하기보다는 1세기 이후의
역사적 사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옳다.
하지만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에 무지하다.
그것에만 무지할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사건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인간적 전통들을 만들어 내고,
그 전통에 “크리스천”이라는 표딱지가 붙어져서
기독교 전통으로 고정되어 버렸다는 사실 또한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지금의 교회 전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그것을 오히려
이상한 단체로 단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추천의 말 : 이 책은 300년 전에 나왔어야 했다
이 책은 300년 전에 이미 나왔어야 했다. 그랬다면 기독교 역사는 완전히 다른 행로를 택하였을 것이다. 만일 오늘날 세상의 모든 목사가 이 책을 읽는다면, 그들은 당장 목회를 그만두든지 아니면 평생 자기를 속이며 외식하며 살게 될 것이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대부분의 관습들은 신약성경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답습하고 있는데, 실은 대부분 우연히 생겨난 것들이다. 우리가 중요시하는 그 관습들은 실지로는 콘스탄틴 황제(A.D. 324) 이후 50년 또는 종교개혁 시작(A.D. 1517) 이후 50년 안에 등장했다.
바이올라 형제가 우리를 위해 그러한 개신교의 관습들의 기원을 추적해서 밝혀 내는 수고를 해 주었다. 단 하나 안타까운 것이 있다면, 이 책이 금년 한 해 동안 출판될, 적어도 십만 권은 되는 기독교 서적 가운데 하나밖에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300년 전에, 아니 200년 전에만 출판되었더라도, 이 책은 수백 권 정도의 책들 중 하나로서 많은 크리스천들에 의해 읽혀졌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은 당신이 친구들에게 이 책을 소개함으로써 더 많이 읽혀졌으면 하는 바램이 내게는 있다.
그런데 잠깐, 이 책을 읽고 나서 당신 역시 양심의 가책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들이 성경에서 유래하지 않은 이교 관습임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다시는 “우리는 성경 중심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신약성경에 근거해서 행하고 있다”라고 주장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우리가 실로 신약성경과 아무런 관계 없는 것들을 행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더 슬픈 현실이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뒤틀리게 비비 꼰 후에 신약성경으로 하여금 오늘날 우리가 행하고 있는 것들을 승인해 주도록 요구한다. 이런 사고방식은 평신도들이나 목회자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보편적인 현상인데,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의 신앙을 파괴해 왔고 또 지금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모든 관습들을 접어놓고 밑바닥부터 완전히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그리고 1세기 때의 초기 교회의 이야기를 바로 알아서 우리의 신앙에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책을 읽은 후에 다른 크리스천들에게 소개하여 그들에게 읽히기를 권고드린다. 그리고 나서 당신의 양심에 따라 행하라. 그렇게 한다면 초기 교회에서 행하여졌던 단순한 신앙생활이 머지않아 재현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진 에드워즈
역자의 말 : 50년 전에라도 나왔어야 했다
몇 년 전 「예수는 없다」라는 삐딱한 책이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조금 생각이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그 책을 읽고 어떤 부분에선 공감이 갔을 것이다. 문자주의에 매여 있는 기독교의 문제들을 조리 있게 파헤친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책의 저자가 정작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는 잘 몰랐던 것 같다. 하나님이신 예수님,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예수님, 만물을 창조하신 예수님, 사람으로 오셔서 인생을 살아 보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인자 예수님, 그리고 그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신 주 예수님은 알지 못한 것 같다.
하긴 성령님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실 수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고전 12:3). 따라서 「예수는 없다」는 도전적인 제목으로 “예수를 모르겠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손에 들고 있는 이 책 「교회가 없다」는 「예수는 없다」처럼 그렇게 삐딱한 책이 아니다. 저자의 편견에 따라 현대 기독교를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이 나타나지 않고, 그분의 몸인 교회가 몸으로서의 역동적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쓴 책이다.
앞의 ‘추천의 말’에서처럼 정말 이 책은 300년 전에 나왔어야 했을 책이다. 아니, 50년 전에만 나왔어도 오늘날 한국 교회들이 이처럼 인간 제도에 묶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서양에서 이미 굳어진 인간적 기독교 전통들이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자유롭게 주장하시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에 인간적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준 미국 기독교의 현주소는 날이 갈수록 암담할 뿐이다. 2002년 8월 5일자 Christianity Today(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크리스천 잡지 중의 하나)에 의하면, 조지 바나(George Barna, 미국 기독교계에서 크리스천 갤럽[Gallup, 통계 조사로 유명한 사람]이라 불릴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은 미국 목회자들에게 실망하고 자신의 사역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는 미국 교회들을 위해 많은 통계 자료들을 분석해서 교회 지도자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왔다. 베스트셀러가 된 많은 책들을 저술했고, 지난 10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지역(2001년도에만 51개 도시)을 돌아다니며 목회자들을 상대로 세미나를 열었다. 그의 세미나 주제는 언제나 교회의 “개혁”이었다. 그런데 10년 동안 교회 개혁을 부르짖었건만 다 실패로 끝났다는 것이다. 개혁은커녕 좋게 변한 것은 하나도 없고, 더 나빠졌다고 그는 말했다.
바나는 실패의 원인이 목회자들의 지도력 때문이라고 했다. 목회자들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이긴 하지만 지도자감은 아니라고 분석했다. 다들 설교하고 가르칠 줄만 알지 개혁 같은 것엔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미국 목회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일까?
바나의 실패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왜 그런가? 지도력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다. 개혁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교 전통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한 제도권 교회를 개혁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제도권 교회를 변화시키려는 것은 마치 조난당한 타이타닉호와 같은 난파선들을 찾아다니며 내부를 수리하라고 부르짖는 격이다. 불가능하다. 이 책은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 줄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Pagan Christianity」이다. 기독교가 이교사상으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면 뜻이 잘 통하지 않을 것 같아, 「교회가 없다」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예수는 없다」는 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밝히는 바이다.
표현이 좀 도발적이지만, 두 가지 이유에서 이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첫째는 “오늘날 제도권 기독교에 정말 교회가 있는가”를 묻고 싶어서이다. 현대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질적으로 머리 구실을 하고 계신가? 예수님의 몸으로서 모든 지체가 차별 없이 활동하고 있음이 눈에 보이고 피부에 와 닿는 그런 교회가 있는가? 예배당 건물도 많고, 목사도 많고, 교인 수도 많고, 교단도 많고, 기독교 단체도 많건만, 머리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몸의 움직임은 왜 발견하기가 힘든가? 그것을 묻고 싶었다. 오늘날 교회의 전통들이 예수님이나 사도들과 관계 없이 대부분 이교문화에서 흡수되어 접붙여진 것들이고 그것들이 한국에 직수입되었으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 책이 제도권 교회 안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많은 크리스천들의 눈에 띄게 하고 문제 의식을 더 강하게 제기하기 위해 그런 제목을 선택했다. 좋은 책들이 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의 홍수 속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안타깝게 사장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보배 같은 책이 보다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읽혀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에서 다소 건방진 듯한 제목을 달게 된 것이다. 흑백 논리를 펴기 위함이 아니라 더 많은 크리스천 독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함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
이 책에서 “제도권 기독교”라 함은 주로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회들과 기독교 단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Institutional Christianity 혹은 Organized Church). 인간이 만든 제도에 따라 운영되는 조직으로서의 교회를 일컫는 표현이다. 교파에 속했든지, 초교파 교회든지, 셀을 가진 교회든지, 가정교회를 두고 있는 교회든지, 제자훈련 단체든지, 캠퍼스 선교단체든지, 평신도 선교단체든지 관계 없이 모두를 포함한다. 물론 제도권 기독교 밖에서 그 이상으로 탄탄한 조직과 율법적인 규제, 혹은 개인 우상화로 가득한 분파들(Sects)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이 책의 원본에는 무려 1,100개가 넘는 각주들(footnotes)이 기록되어 있다. 수백 권의 문헌들을 참고해서 책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번역본에서는 대부분 생략하였다. 왜냐하면 책의 부피만 커지고 읽어나가기가 수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포함시켰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영어 원본을 구입해서 더 연구하기를 바란다.
이 책은 한 번에 그치지 말고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를 권한다. 겸손하게 진리에 서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에서부터 뭔가 꿈틀거리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곧 머리이신 예수님에 의해 움직이는 몸을 사모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2003년 3월
이영목
광고로 생각되시면 지우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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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동의하면서
이근호 2003-04-30 06:27:22, 조회 : 216, 추천 : 20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느냐" 라는 생각은 사고 방식 자체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어떻게 성전으로서 살아야 하느냐 하는 개인적인 삶의 문제일 것입니다.
교회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드신 교회가 이미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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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 받는 자의 신학"을 읽고
손성식 2003-05-02 15:21:05, 조회 : 151, 추천 : 12
“버림 받은 자의 신학”을 읽고
-시편 22:1-5에 대한 신학적 명상-
저자: 김 이곤 출처: 구약성서의 고난신학
출판사: 한국신학연구소 (서울:1993)
성경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는 자뭇 그 위상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선택된 자의 삶의 자리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읽어 내려면 선택된 자들로부터 솟아 오르는 모든 사건들을 계열화 시켜야 한다. 즉, 선택된 자들에게 우발적으로 솟아오르는 사건 하나 하나를 포괄적인 하나님의 은혜성 속에서 그 메시지의 내용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본 글에서 저자는 선택된 자 다윗으로부터 튀겨 나오는 “탄식”을 가볍게 치부할 성질이 아님을 논거로 잡는다. 왜냐하면 다윗의 탄식은 일반대중의 단순한 한숨소리를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의 외침과 연결되는 계시적 사건이기 때문에 묵직하게 들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저자는 시편 22:1-5에서 터져 나오는 다윗의 탄식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어떤 맥락에서 연결시키고 있을까?
우선 저자에게 있어서 “탄식”은 중요한 신학적 연결고리이다. 즉, 하나님과 선택된 자 사이에 일어나는 언어적 소통이며,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어주는 맥이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하나님의 구원사는 선택된 자의 탄식사라고도 부를 수 있겠다.
자, 여기서 한 번 물어보자. 도대체 선택된 자들이 왜 고난을 받으며 탄식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개인적인 잘못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다. 선택이 아니면 생겨나지 않을 고통이 우발적으로 솟아난 것이다. 그리고 그 고난과 탄식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선택은 두가지의 양상을 띄고 있는데 하나는 선택으로 인한 고통과 탄식이며 다른 하나는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실체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탄식과 십자가 사건에서 연결되는 맥락은 하나님은 어디에서 현존하시는가이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선택된 자의 고통과 탄식속에서 자신을 보여주시고 계셨던 것이다. 자. 결국 이 논문은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에 대한 문제로 귀착된다.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그리고 자신의 현실을 십자가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자들과 동행하시는 것이다.
@ 평가 @
저자는 “탄식을 구원으로 가는 문이다” 고 했다. 하지만 탄식이 구원으로 가는 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으로 가는 문이며, 구원 안에 있기에 나오는 것이 탄식이 아닐까? 여기서 탄식에 대한 계시적 사건과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신앙상의 현실과는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성도는 날마다 실패한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실패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역사는 성공과 번영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탄식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성을 깊이 깨우쳐 가는데서 구현되는 것이다. 인간은 날마다 성공을 향하여 움직인다. 성공에 미친 교회, 그들이 만난 하나님은 마귀이다. 하지만 끝장난 상황에서 만난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며,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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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과 자유의지"를 읽고
손성식 2003-05-08 00:34:25, 조회 : 166, 추천 : 13
"예정론"을 읽고
저자: 박 영선
출처: 신앙클리닉 출판사: 규장문화사(서울:2000)
하나님의 예정이란 인간 쪽의 적용을 위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속성을 설명하는
영역에 관한 개념이다. 이 말은 누가 구원 받았는가 아닌가를 알아보기 위한 '생명책의 열
람'이란 차원이 아니라 구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그가 얻은 구원의 확
신과 보증을 얻기 위해 사용할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예정 교리가 다루는 영역은 태초로부터 종말까지이다. 그런데 태초와 종말에 관한 계시의
불빛은 인간의 죄에 의해 가려지고, 인간의 어두운 지혜에 의해 가려지고, 인간의 여러 부족
함들로 가려지고 희미하다. 그러나 그 희미한 것만으로도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위해서는
충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각 개인의 구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역사의 중심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구원은 내가 예정을 받았는가 아닌
가, 종말에 내가 심판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데서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나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서 확인해야 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나 미래의 문
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이다.
이 현재적 시점에서 내가 얻은 구원의 문제를 되돌아보면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 구원
을 믿음으로 받았는데 이 믿음이 도대체 어떻게 내게 왔는가? 내가 믿는 순간에는 믿음으로
그 복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믿음의 결단을 한 것 같으나 믿는 자가 되고 보니 나같이 영적으
로 눈이 먼 자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
이고 그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받아들이면서 구원을 얻게 되었을까?' 그래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가 미리 있었기 때문이구나.' 하는 것
이다. 믿음이 행위가 아니라 선물이며 은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예정교리를 깨
닫게 되는 것은 태초로부터 추적해 내려오는 것에서가 아니라 현재에서 되돌아보는 입장에
서만 가능하다.
이렇게 과거와 연결시킨 현재의 믿음은 이 예정교리를 종말이라는 미래와도 연관시켜준
다.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알지도 못했던 상태에서 죄인이었던 나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
사를 베푸셨다면, 그 분의 성품상 번복하거나 실패하실 리는 없으니 이는 그의 계획 아래
들어가 있는 나의 구원은 결국 완성된 것이나 진배없다.'라는 구원에 대한 보증이다.
만일 구원이 내 자신의 믿음과 자유의지에만 달려 있다면, 내가 변덕을 부릴 때 나의 구
원도 매번 변덕스러울 것이지만 변치 않는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이니 안심이 된다는 것이
다. 이와 같이 예정교리는 설령 우리가 약해서 실패한다 해도 하나님께서 태초에 날 구원하
시고자 예정하셨으므로 나를 끝까지 지켜주시리라는 것을 확신 시켜준다. 그래서 그리스도
인으로서 고난을 받는 상황 가운데서도 구원이 끝내 완성될 것임을 강조하고 그 고난 속에
있는 신자들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기 위해서 로마서 8장에 이 예정론의 중요한 진리가 선포
되고 있는 것이다.
@ 평가 @
본 글은 예정론을 전도에 대한 열심과 관련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과 연결시키고 있
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의지"를 읽고
저자: 박 영선
출처: 신앙클리닉 출판사: 규장문화사(서울:2000)
예정론을 설명하다보면 언제나 자유의지와의 관계가 문제이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일을
다 하신다면 우리는 할 일이 없을 것이고, 우리가 할 일이 있다면 하나님의 예정이 어느 부
분인가에서는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서로 충돌하는 관계이거나 어느 한쪽의 권리를 위해 다
른 쪽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관계일 거라는 지점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생기는 가장 큰 이유는 자유의지라는 용어에 대한 이해를 성경적이거나 논리적으로 하지 않
고 정리되어 있지 않은 평소의 막연한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려는 데 있다.
정리되지 않은 시각에서의 자유의지는 '내가 해야 할 것을 내가 할 거냐, 말 거냐?'를 결
정하는 결정권이라는 의미에서 쓰여진다. 그런데 내가 내린 결정이 그보다 앞선 하나님의
예정이 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라면 실제로 나는 하나님의 예정 속에 갇혀 있는 셈이지 그
게 무슨 자유로운 나의 결정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냐 하는 자유의지 무용론이 대두되는 것
이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적인 근거를 가진 차원에서 정리된 자유의지는 '자유로운 결정권'
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개별인격이 행한 행동'이란 뜻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자유란 '어디에도 예속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라는 행동 이전에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는 인간 존재 자체의 위치가 그 창조주에 예속되지 않은 독립체라는 데서 생긴 개념이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일부가 아니라 각자의 의사대로 반응하는 별개의 개체로서의 인격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자유의지'에서 '자유'라는 용어가 지닌 의미이다.
그리고 '의지'라고 하는 말은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내 존재의 실존
을 뜻하는 말이다. 이 말은 인간 존재를 논리적으로 구분할 때 지, 정, 의의 부분으로 나누
는데 근거를 둔 말인데, 지와 정은 아직 그 사람 속에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므로 의지
가 그의 존재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군대에서 사단장이 일등병에게 물을 떠오라고 명령해서 그 일등병이 물을 떠왔
으면 거기에 그 일등병의 실존이 있는 것이며 그의 의지가 행사된 것이다. 이 예를 연장시
켜 자유의지 전체에 적용시켜보면, 그 일등병은 사단장의 몸의 일부가 아니란 뜻에서 자유
를 갖고 있는 것이며, 그가 그 일을 했다는 데서 의지를 행사한 셈이 된다. 그래서 그가 한
일은 자유의지를 갖고 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정리된 자유의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런 설명을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그 명령권과 권위를 자신이 행사하게 해달라는 마음 때문이
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국 자유의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권위 또는 질서에 관한 문제가
된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가장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죄
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정리해야 하는 부분은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라 독립
된 인격체의 실존으로서 의지를 행사한다는 사실이다.
@ 평가 @
본 글은 자유의지의 핵심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문제로 본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는 죄의 모습이겠지만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
하는 자에게 자유의지란 자기를 부인하는 하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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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워요 좀 쉽게
김대환 2003-05-10 00:57:51, 조회 : 141, 추천 : 12
십자가마을 거기엔 십자가 외엔 아무것도 없을것같아요
저도 복잡한것은 싫거든요 (말씀 쉽게 해주시와요 어린이도 알아들을 수 있엇으면 해요)
목사님의 십자가는 나무로 만든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일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그래서 가끔 찌르고 후려치시는 통에 멍도 들고 안마 받은것 처럼 시원하기도하고 ...
그리스도인들 왜 이렇게 힘이 없을가요?
사회복지도 중들이 다 꿰차고 뭐좀 세우고 활발히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이단이라 정죄된 자들이니
우린 뭐하나 싶어요
기독교 이젠 그 수명을 다한걸까요? 맡겨줘도 세상일에는 잼뱅이니
신령해서 그런가요?
이나라는 이제 더이상 십자가가 필요없게 된 것같은 생각이 들걸랑요
그냥 내버려두고 내 갈길 가자니
껄쩍지근하고 말입니다.
(저희 아버님이 목사님이신데 은혜가 안되면 다른 교회가도 되지요?)
목회는 죽을때가지 꼭 해야하나요?
목사님의 고견을 듣고싶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 어떻게 살아야합니까?
3가지만
말씀 내려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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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어려워요 좀 쉽게
이근호 2003-05-10 06:02:50, 조회 : 155, 추천 : 11
예수님께서 이 악한 세상에 오셔서 뭘 하셨지요?
그냥 자포자기하고만 있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펼쳐습니다.
사랑 중의 최고의 사랑은 복음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천국이 있음을 이웃에게 알려주는 일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했듯이 말입니다.
그 형태가 사회 복지 일 수 있고, 목회 일 수도 있고, 공직에 근무하거나 , 택시 운전 하거나, 장사이거나, 심지어 백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봉사 정신만큼은 소실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세가지 질의는 다음의 한 가지 답변으로 해결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로마서 14:7-8)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의 영광, 즉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과 봉사의 정신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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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의 단점과 장점
이근호 2003-05-16 08:02:34, 조회 : 474, 추천 : 38
1. 노회의 단점
(1)영원성 추구
구약 다니엘에 보면, '인자의 제국'만이 영원하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은 지상에 영원한 제국을 만들고자 한다. 이와 같이 우상적 심성이 모든 인간에게 있다. 따라서 '노회'라는 것을 만들게 되면 '자기 노회'를 영원한 제국처럼 사수하려는 우상적 태도를 취할 것이 분명하다.
(2)계급성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끼리 길에 가면서,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벌리게 된다.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시면서, "너희가 돌이켜 이 어린 아이들과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하셨다.
천국은 세상 권력 구조와 다르다. 계급이 없다.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다. 그러나 노회라는 조직이 생기면 천국을 보여주는 단체가 아니라 정치적 권력의 맛을 놓고 그것을 차지하려는 성인들의 게임방이 될 것이 뻔하다. 마치 천국에 안가도 좋으니 일단 권력의 맛이나 보고 죽겠다는 설쳐대는 더러운 성품들의 정치판이 될 것이다.
(3)목사들의 합법적 생계 시장
고린도전서 4:11-13에 보면, 사도가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도다"
그런데 만약 노회가 있게 되면, 목사직을 마치 평생 전문직업으로 여기고 목회자들이 노회 내의 많은 교회에 군침을 삼키면서 달려들 것이 뻔하다. 목사는 굶주린 삵괭이들이다. 돈에 목말라 헐떡이는 삵괭이들! 그리고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받는다고 여기면 그 다음에는 명예에 목말라 헐떡이는 야수들이다. 이들에게 있어 노회 내에 교회란 그저 밥그릇 진열장으로 보일 것이 틀림없다. 눈 앞에 교인만 하나 나타나면 그저 자기에게 당하게 될 가련한 먹이감이 하나 나타난 것으로 해석한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교회 바꿔치기', 노회 내에 유력하고 예산이 많은 교회에 교역자로 진입하기를 끊임없이 시도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 교회의 예산을 보충하기 위해 다른 교회의 예산을 탐을 내며 넘보게 될 것이 뻔하다. 그렇게 해서 이 모든 것이 이 땅에서 목사 본인의 목숨부지 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될 것이다. 이것은 "고생은 예수님이나 사도들이나 하는 것으로 족하고 우리는 그 덕으로 배나 채우자" 하는 식이다.(롬 16:18)
그런데 행여 성경을 보는 일반 성도에게 이런 잘못된 행태가 들킬까봐 두려워 노회 법으로 이중 3중 철저하게 보호막을 갖추고, 합법적으로 목사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목사'라는 기득권을 영원히 신성한 것으로 공표하기 위해 자기네들끼리 쉽게 손을 잡게 될 것이 뻔하다. 다같은 처지이기에 한 통속으로 신속히 마음이 움직여 질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 정신은 어디로 날아가 버리고, 남는 것은 "누가 누가 더 뻔뻔스럽게 성경까지 인용하면서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양들을 확실하게 늑탈하는가"를 경쟁하여, 그래서 다들 목사직업을 가진 것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무한히 감사를 하게 될 것이다. 곧 노회는 목사들을 악마로 전환시키는 확실한 사전 지옥이 될 것이다.
(4)장로직의 권력성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쳐다보며 모인 단체이다.(고전 12:1-3)
그런데 교회 오래 다닌 자들, 소위 장로라 불리는 자들이 텃세를 부리기 시작하고 횡포를 부리게 된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교회 초자들이 감히 넘보지도 못할 '노회'라는 공식 상위(上位)(?) 세계에 참여하는 권한이 가졌으니 그만큼 평신도보다 더 거룩한 권위가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달라는 식이다.
장로들은 자신의 권위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도리어 목사들은 자기보다 더 높은 분으로 대우하려 한다. 이것은 목사를 최정상 계급으로 올려 세워줌으로 말미암아 그 부산물로 자신들의 계급성도 덩달아 교인들로부터 권위 있게 확정 받으려는 짓이다. 이러한 수법을 위해 자진해서 목사의 앞잡이 노릇을 자청한다. 동시에 교회 재정 확보와 소위 '부흥'을 위하여 목사에게 압력을 가한다.
즉 성경에서 돈 될만한 것은 다 동원해서 설교하라는 것과 교인들이 교회에 열심을 낼 수 있는 구절이나 간증들을 놓치지 말고 설교하라고 한다. 이러한 짓을 보다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기 위해 노회의 다른 목사나 다른 장로들끼리 교류하여 편들어 준다.
장로들의 이런 짓들은, 일단 교회 세울 때 자신의 목돈이 들어갔기에 이것은 자신의 평생의 신앙적 자존심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오직 예수님을 바라보는 교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된 자신의 신앙의 연조와 신앙의 우수함을 자랑하기 위한 근거로 자신이 세운 교회가 날로 부흥되고 헌금이 많이 들어오는 것으로 측정하려 한다. 이러한 불신앙을 커버하는 방식으로 노회라는 상위(?) 계급 단체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인정받았다는 점을 내세운다. 목사 건드리면 저주받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장로직 건드리면 누구든지 저주받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는 간증까지 놓치지 않고 장만하고 있다.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자신이 세웠다는 교회라는 이름의 가게를 사수하는 이런 종교 고참들은 그 행위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살해하는 악마적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노회로부터 기름부음으로 안수 받아 정식으로 거룩한 성직인 장로가 되었다는 것으로 합법화하게 되는데 여기에 노회가 들러니 노릇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5)의존성
요한 일서 2:27에 보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안에 거하라"라고 되어 있다.
즉 생명이란 노회라는 상위 단체에서 합법적으로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성도 각자에게 찾아오신 성령님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가져다 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성도들은 성령님의 지시에만 따라야하고 그 분의 인도하심에만 의존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노회가 있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을 가르치고 지시할 또 다른 조직이 있는 것마냥 두려워한다. 거룩한(?) 노회나 거룩한(?) 목사 말을 듣지 아니하면 저주가 임할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생명이 누구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주어지는 지도 모르는 채 그저 노회 말만 들으면 천국 가는 줄로 알고 있다.
노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세상 권력에 대한 의존성이 더욱 갈수록 심화된다. 나중에 노회 탈퇴하면 지옥 가는 줄로 안다. 그리고 자기 교회의 목사 말만 듣고 의심하던 교인들도 노회에 있다는 다른 목사들이 줄줄이 강단에 서서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되면 과연 그것이 진리인양 설득 당하게 된다.
평생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만 의존하며 살아가야 될 성도를 노회가 있으므로 서 오히려 구원에 있어 대단히 성가시는 걸림돌 역할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사람에게는 '소속의 욕구'하는 것이 있다. 즉 어느 단체에 소속되므로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법이다. 하지만 성도는 슬프거나 외로워도 '예수 안'에 이미 소속될 것으로 여겨야 한다.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7-38)
그런데 노회가 생기면 '노회 안'이 있는 것이 마치 '예수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안심 놓게 된다. 이것은 악마의 써먹는 술책에 완전히 말려든 꼴이다. 이렇게 되면 노회가 곧 사람들을 지옥으로 안내하는 마귀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식이 된다.
"우리도 정통 보수 노회에 가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우리보고 이단이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세요. 같이 삽시다"라는 생각을 교인들이 갖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그 구원의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모독하는 셈이 된다.
하늘 나라 심판에서 노회는 하등 소용없다!
2. 노회의 장점
(1)장로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다.
장로회(노회)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것이고 그냥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 존재함을 부인할 수 있는 그 어떤 주장도 있을 수 없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 4:14)
이 세상에는 교회는 하나밖에 없고 그 지체들끼리는 마땅히 교류해야 하고 교제해야 한다. 만약 자기 혼자서 구원받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개인용이 아니라 공유용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자이다.
노회(장로회)를 만들어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기에 당연히 교제해야 한다. 따라서 각가지 부작용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참된 장로회(노회)가 있기에 세상의 노회(장로회)가 잘못된 장로회(노회)로 이해될 가능성을 늘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로회 안에서의 교제를 통해서 성도들은 늘 회개할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장로회(노회)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는 주님의 몸을 부인하는 자이다.
(2)왜 교제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아직 재림전이다. 사도행전 13:48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되어 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분명히 아직도 남아 있다. 그렇게 때문에 아직 예수님은 재림하시지 않은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됨을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만 달랑 구원받았다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섬기는 자세가 아니라 예수님을 철저하게 이용해서 자기 이익만 챙기겠다는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 "또 복음을 필요로 하는 같은 지체가 어디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서다보면 자연스럽게 장로회가 구체화된다.
(3)어떻게 교제하는가?
장로회는 봉사에서 봉사로 끝나야 한다. 누가 누구를 주관할 수 없다. 성령님은 괜히 계신 것이 아니다. 성도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노회가 존재하고 크게 해야된다는 생각만으로 봉사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직 상대방의 교회나 상대방에게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 그리스도를 봉사하는 자세로서 봉사해야 한다.
특히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연이어 이 땅과 세대를 살 분들에게 복음으로 봉사해야 한다. 그들이 목회 하는데, 그리고 서로 돕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들 달려들어 도와주어야 한다. 가르치는 은사를 인정하고, 교회를 돕는 은사를 서로들 인정하는 것은 성경에서 마땅히 해야만 하는 지체들 간의 모습이다.
"자기 혼자, 혹은 자기만의 교회만 천국가면 됐지"라는 것은 예수님 재림 전에 전 세계에 상주하는 참으로 복음에만 따르는 형제들을 마치 지옥 가는 자들처럼 취급하는 셈이 된다.
3. 결론
이미 노회나 교단이 있는 그 자태가 오히려 참된 장로회를 생각하는데 혼선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그것을 핑계삼아 성경 안에 나와 있는 복음에 기초한 교제를 피할 길은 전혀 없다.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기뻐해야 한다.
"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요 4: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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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손성식 2003-05-31 12:09:32, 조회 : 323, 추천 : 38
“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인간의 죄된 본성중에 하나가 끊임없이 조직을 세우고자 하는 점이다. 그러면 왜 조직을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조직에는 [힘]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전모의해서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일들은 바로 [힘]에 의해서 달성된다. [힘]의 장점은 추진력이 있다는 점이지만 단점은 바로 이 [힘] 때문에 소외당하고 아픔을 겪는 현상들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결국 [힘]은 [힘]자체의 유지를 위해 소외당하고 아픔을 일으키는 현실을 지속시킨다. 이러한 현상은 조직이 만들어지는 장에는 어디서나 필연적으로 발생된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문제를 제기해본다. 왜 [힘]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된 현실을 경험당하며 탈주에 성공한 분들이 도로 [힘]을 만들기 위해서 회귀하려는 것일까? 봉사를 하기 위해서 란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 한 명분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해 왔던 봉사를 [힘]안에서 할 봉사와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구별하려는 움직임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왔던 봉사 말고 왜 굳이 낯선 봉사를 하려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다. 바라기는 일상적이고 우발적인 봉사 안에서 [힘]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외당한 자들과 함께 하기를 소원한다. 필자의 주장을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 몇가지 신학적 명제를 마지막으로 제시해본다. 첫째. 하나님의 은혜성은 우발성이다. 여기서 우발성이라 함은 인간의 사전모의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돌발적인 개입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둘째. 성도란 탈영토화를 지향하는 종말론적 운명공동체이다. 여기서 탈영토화란 영토화(조직, 관료화)하려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자기부정의 몸짓을 나타낸다. 그리고 종말론적 운명공동체란 기존조직의 세력권으로부터 단절된 경험속에서 묵시적 생명의 띠로 묶여진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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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이근호 2003-05-31 18:23:12, 조회 : 264, 추천 : 22
>노회를 조직하려는 사람들이 비복음적이기에 그런 사람들이 모여봤자 비복음적 노회가 된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아예 '장노회' 그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악한 조직체라는 말입니까?
그러면 디모데전서 4:14의 말씀은 뭡니까?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제가 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혼자서 밥을 먹고 있으니, 옆에서 어떤 사람이 위로하듯이 말합니다.
"당신은 조직의 힘에서 축출되어서 이렇게 홀로 밥을 먹고 있군요. 장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죽지 왜 밥을 먹으십니까? 아, 봉사하기 위해서 힘을 내기 위해 밥을 잡숫고 계시는군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봉사시키기 위해 우발적인 은혜성으로 당신에게 밥을 제공하시고 당신은 그 은혜의 덕으로 주님의 몸을 봉사할 수 있는 겁니다. 장하십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사람이 둘이서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전에 위로했던 사람이 또 찾아와서 하는 말이,
"왜 둘이서 밥을 먹습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도 잊었습니까?"
그러니까 밥을 먹던 두 사람이 대답합니다. "이 밥을 먹고 힘을 내어 주님의 몸에 봉사하기 위해서랍니다."
그 소리를 듣던 위로하던 사람이 역정을 내면서 말합니다.
"혼자서 따로 따로 떨어져서 밥을 먹지 왜 둘이 붙어서 밥을 먹습니까? 둘은 곧 힘의 조직체로 발전하는 것을 모른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힘으로부터 소외시켜서 일하십니다. 그런데 이 둘이 뭉쳐있으니 여기서는 필히 힘이 생길 것이고 그 힘은 곧 하나님을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더나아가서 당신들 둘은 반드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입니다.
자 이 역정을 내는 사람의 문제점이 무엇일까요?
제가 알기로는 하나님의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공로로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직의 존재성으로 출발해서 조직의 존재성으로 끝맺는다면 이것은 명백하게 비복음적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의 경우는 복음적일까요 아니면 비복음적일까요?
"조직은 이유를 막론하고 악한 힘의 집단으로 돌변하기에 나는 처음부터 비조직성으로 출발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나는 끝까지 비조직적으로 하나님께 봉사한다"
제가 보기에는 이것도 비복음적 의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은혜에다 자신의 비조직적 성향 자체를 마치 복음인 것처럼 정당화하여 집어넣기 때문입니다.
손목사님도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 뿐입니다. 제가 알기에는 이 복음을 증거하느냐 아니하느냐에 하나님의 모든 일하심의 가치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손목사님은 조직 속에 내기 있느냐 아니면 조직 밖에 있느냐 하나님의 일의 가치를 결정된다고 강변하십니다.
그래서 만약 손성식 목사님의 견해가 옳으신다면 꼭 다음의 질의에 답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노회 자체의 정당성이나 노회 자체의 영원성이나 노회 자체의 절대성을 사수하기 위한 봉사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절대성이나 영원성이나 정당성을 증거하기 위해 봉사하는 장노회가 왜 우발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에 끼지 못하고 아예 생겨서는 아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즉 디모데전서 4:14에 나오는 '장로회'가 그리스도의 몸체와는 다른 별도의 개념이기에 일시적으로마나 아예 처음부터 나타나지도 말았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 같이 복음 안에 있는 옆에 있는 다른 교회와 더불어 교제하는 것을 '장로회'라는 부르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만약 손성식 목사님에게 누가 와서 요청하기를 복음을 증거해 달라고 했을 때 이 모습을 왜 같은 '장로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4. 만약 손성식 목사님에게 누가 와서 요청하기를, 우리 교회에 와서 안수해 달라고 했을 때, 이 모습을 왜 같은 '장로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라고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끝으로 다시 묻습니다.
노회를 만들겠다는 그 사람들이 비복음적 인물들이기에 때문에 그 노회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장노회, 즉 교회 간의 교류 자체가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말씀입니까? (왜냐하면 교회 간의 교류를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그 교류는 곧장 악한 조직체의 모습으로 변모되기 때문에)
꼭 답변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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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손성식 2003-06-02 20:16:16, 조회 : 186, 추천 : 15
> 제가 제기했던 문제의 촛점과 목사님께서 저에게 답변을 부탁하는 내용은 서로 맥락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제기한 문제의 핵심은 지금까지 해 온 목사님의 봉사(힘 빠진 봉사)를 왜 굳이 다른 방식(힘이 들어간 봉사)으로 하려고 하는 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아쉬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평생 지금까지 해 온 방식(힘 빠진 봉사)으로 하셔도 되는 것 아닙니까!. 지금까지 해 오셨던 봉사(힘 빠진 봉사)에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시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방식(힘이 들어간 봉사)을 찾으시는 것을 보니 왠지 꺼림칙하다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사치가 아닌가? 를 느끼며 하루 하루(노아 언약의 기반에서)를 연명해 나가면서 우리의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 되어감을 놀라워 하는 것 아니신지요. 여기서 저는 목사님께서 조직(힘이 들어간 방식) 가운데서 봉사를 하시려는 것이 "사는 것이 사치인데 쇼핑까지 하려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글을 맺는다면, 저는 노회를 구성하고자 하시는 분들의 신학적 성격이나 교회간의 교류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해 오셨던 봉사가 다른 봉사를 필요로 할 만큼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면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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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이상규 2003-06-03 18:37:25, 조회 : 148, 추천 : 14
평신도가 끼어들어 죄송합니다.
손목사님 글 내용 가운데 힙없는 봉사<지금가지 해온 방식> 힘있는봉사<노회 방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그것보다는 이근호 목사님이 노회를 통해서 하시려는 봉사가 사람의 봉사냐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은사>으로 하시는 봉사냐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합니다. 제 소견으로는 이목사님이 은사로 하시는 것이라면 1.복음을 변치안고 증거하시면서 2.봉사하시는 가운데 죄성들을 보면서 자기 부인하시며 자기십자가지고 봉사하시다가 3.누가 목사님 휼륭하십니다. 라고 칭찬하면 바울처럼 나의 나된것은 내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고백하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복음 잘 증거 하시므로 개인적으로 은사로 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목사님이 앞으로 노회에서 하실 봉사가 은혜로하시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수있을 까요? 또 은혜로 봉사하는 자의 삶의 모습은 어떻 습니까<특징>
<<성령님과 목사님의 관계이므로 답변 안하셔도 됩니다. 단지 공인 이시기 때문에 봉사하시는 마음으로 대답해 주신다면 복음이 혼란 스럽고 편협되고 연약한 자들에게 도움이 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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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이근호 2003-06-03 20:58:56, 조회 : 211, 추천 : 15
구약 예레미야 17:5에 보면,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의 힘을 믿고 사람의 능력을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사기기 2:20-23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을 비언약 백성들이 둘러쳐진 환경 가운데 두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능력을 무시하고 주위에 있는 이방민족의 본을 보다가는 언약적 규정대로 그대로 실시해서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겠다는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무도 안 띄는 곳이 아니라 아예 세상 한 가운데 두시는 것은 그 속에서도 과연 인간의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는가 보시기 위함입니다.
자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게 하셨고, 왜 솔로몬에게 성전을 만들게 하셨습니까?
아예 하나님만 계시만 그만이 아닙니까?
그러나 결국 모세가 만든 놋뱀이나 솔로몬이 만든 성전도 다 붙태워지고 맙니다.
왜 결국 불태워질 것을 왜 그 당시 만들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인간이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르지만 결국은 그 지시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이 의지하는 그 자체를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어 마지막 때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회개케 하기 위함입니다.
또 한 적절한 예가 사무엘상 4:10에 나옵니다. 언약궤를 앞장 세워 전쟁하라고 분명히 민수기 10:35-36에서 지시해놓고서 그것을 실행에 옮긴 홉니와 비느하스는 그 언약궤 곁에서 죽게 하시고 언약궤도 적들에게 빼앗기게 하십니다.
이로서 요단강을 건너게 했고 여리고성을 무찔렸던 그 위대한 언약궤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버린 대용으로 전환될 수 있음을 보입니다. 이것도 회개용입니다.
신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예가 교회요 노회(장로회)입니다. 이미 있는 것입니다. 없는 교회 새로 만들고 없는 노회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있는 교회와 있는 노회를 구체화하는 겁니다. 마치 구약 때의 성전이나 언약궤나 놋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교회와 노회를 통해서 교회끼리 교제케 하시고 봉사케 하시는 겁니까?
아예 교회도 다 없애버리고 '장로회'라는 그것조차 가증된 악의 조직체라고 정죄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서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 교제와 봉사에 참여하므로서 전에 미처 몰랐던 자신의 죄의 깊이와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크심을 그런 것을 통해 알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회개의 연속이 아니라 '자기 절대화'의 지속으로서 구원에 이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설거지 해야 하는 주부가 아예 손 끝에 물을 안묻히겠다는 식입니다. 왜냐하면 설거지 해봤자 자치하면 그릇 깨뜨리게 되니 그런 죄악을 일부러 찾아 나서서 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겁니다. 순전히 자기 신앙 순결성만 지킬데까지 한번 지키겠다는 의식입니다.
쉽게 말해서 봉사없이 예수님 뜻만 제대로 알아서 제 구원만 챙기면 그만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저는 이런 의식 자체를 회개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한 생각보다 자기 살아남을 생각으로 주님쪽으로 조심스럽게 접근를 시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쉽게 말해서 또 다른 한편의 '자기 행함으로의 구원방식'입니다.
"나는 아예 나쁜 짓 안하겠다."는 사고방식 자체가 자기 종교성의 발로입니다. 자기 구원만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 대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누구도 섬기리라" 이런 정신자세로 나가다 보면, 그 과정에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그동안 미처 몰랐던 하나님의 사랑도 더 크게 깨닫게 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은혜 여부는 '회개'라는 열매를 통해서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만이 구원과 거룩의 원천임을 더욱 더 알아가는데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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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이근호 2003-06-02 21:02:23, 조회 : 201, 추천 : 15
공포란, 자기 세계를 자기 힘으로 구축하려고 할 때는 필히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킬만한 것조차 자기 속에 없다고 한다면 공포스러울 일은 없을 것입니다.
기존 한국 교회 노회가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공포를 주는 괴물처럼 작용해 왔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 노회를 노회원들이 스스로 구축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발생되는 공포심을 바깥으로 터뜨려서 해소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 바깥으로 나온 것이 바로 손성식 목사님께서 지적하는 '힘'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힘 들어 있는 봉사'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서 그동안 얼마나 피해망상에 시들렸나 하는 점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이처럼 '힘 들어있는 봉사'라는 표현을 할 때는 필히 그 노회가 노회를 스스로 지키고 구축하려고 노력할 때만 생기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손목사님 본인을 생각해 보세요.
노회의 힘의 단체로 바라보고 있다는 본인에 대해서 말입니다.
왜 노회가 힘이 있으면 아니되는 겁니까?
그것은 그 힘이 손성식 목사님을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손 목사님은 스스로 힘이 없다고 여기시는 겁니다. 노회에 대항할 만한 힘은 없고 그러면서도 남에게 지배받기는 싫고, 그러니까 해결책은 오직 하나, 그 누구에게도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것 뿐일 것입니다.
손목사님, 그러나 봉사라는 것은 지배하고, 지배받는 차원이 아닙니다. 즉 자신이 과연 어느 세력으로부터 지배받을 것인가 아니면 지배받지 않을 것인가에 신경쓰면 봉사라는 것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손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힘 빠진 봉사'만 생각하신다면 은연 중에 그 밑바탕에서 "나는 그 누구로부터 지배받지 않고 자유롭고 싶다"는 비봉사정신이 깔려 있기에 나온 봉사일 뿐입니다. 즉 자신의 자유는 자유대로 챙기고 봉사는 봉사대로 하겠다는 의식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공포심의 발로입니다.
복음은 주님의 몸에 대한 사랑입니다. 결코 '연약한 자기 지키기'가 아닙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마련입니다. 장래에 어떤 사태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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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손성식 2003/05/31 38 324
[re] "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이상규 2003-05-31 22:42:39, 조회 : 289, 추천 : 30
손성식목사님의 글내용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손목사님이 알고있는 신학으로 노회를 조직하려고 준비하는 분들을 비판하는것은 현명치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는 개개인을 통해서 일하신다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노회를 준비하는 분들에게도,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의 소원을 주시고(빌2:3)추진하는과정에서 손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조직과 관료주의를 통해 힘을 의지하려는 모습과 각자 다양한 자기죄성들을 보면서 이죄때문에 죽의신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고 조직하려는 개인이나 노회가 하나님 계획하신대로 복음(십자가은혜만)
전하는 도구로만 사용하신다고 고백한다면 이노회는 하나님의 돌발적인 은혜로 만들어진 종말론적 공동운명체
(그리스도의몸) 의 한지체라고 생각합니다
또이런 공동체(노회)가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기존 조직의 세력권으로부터 단절된 경험속에서
묵시적 생명의띠로 묶어진 공동체(언약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런고백(자기부인과 십자가 은혜만 자랑)들은 바로 택함받은자들을 통해서 하시는
성령님의 일이시기때문입니다.(요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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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를 조직하려는 움직임을 보며" 손성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