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라와 하지말라 그리고 방종] 2006-10-10
[하라와 하지말라 그리고 방종] 2006-10-10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질문
한진영 2006-10-10 12:15:24, 조회 : 216, 추천 : 2
목사님
구약의 말씀 뿐만 아니라
신약의 모든 말씀 조차도 (명령법 서술법 모두)
율법적 기능으로 죄를 만들고 저주를 만들어 내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하여 죄인들을 상한 심령으로 이끌어 내고
결론적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면
설교에서 하라 말라는 성경의 말씀을 해석하고 정제하며
바로 핵심으로 치고 들어가
십자가를 논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에 대해 질문이 생깁니다.
성령께서 삶의 현장에서 신자 각자를 이끌어 가는 방식이
죽임으로 다시 살리는 방식이라면,
해석되고 정제되지 않은 하라 말라 '생'자 성경 말씀도 과정에서 주된 역할을
한다면, 설교에서 모든 것이 해석되고 축약되는 것은 과연 적절한가요?
'방종'이라는 표현이 나올 만한
어떤 비 은혜적 행위들이 복음적인 교회내에서
나타난다면 그런 이유도 있지 않나 추측도 해 봅니다
고단한 문제 풀이 과정은 없이
정답을 외워서 시험을 본 허전한 느낌을
저도 일상 중에서 겪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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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
이근호 2006-10-10 13:52:22, 조회 : 211, 추천 : 3
'육'으로 성경 말씀을 해석하느냐 아니면 '영'으로 성경해석을 하느냐 문제입니다.
성경에서, 참으로 신기하기 짝이 없는 당부을 해놓은 점은, 베드로전후서 1장의 말씀처럼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아니되고 '영'으로 풀어야 한다는 겁니다. (고후 3:6)
이것은, 인간들이 성경 문장을 문자로 풀어내어놓고서는 그것을 자기에게 적용할 때는 마치 '영적'인 해석인 것처럼 적용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한계성을 뻔히 알시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귀하께서는 '정답'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수능시험에서 수학문제 정답을 맞춘 자를 향하여 '정답'이 말하기를 '너 죄인이야. 너는 정답을 알고 있는 이상 지옥 가야 돼'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너는 정답을 알았으니 참으로 잘난 인간 맞아"라고 확인케 하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그런데 영적 세계는 이렇지 않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기 짓이 잘못인 것을 안다고해서 가룟 유다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아는채로 지옥불에 들어가야만 하는 자입니다.
이로서 성경은, 정답을 소유하고, 정답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일방적 권한에서 진행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영적'으로 푸는 정답입니다.
인간의 육적 정답 소유욕구와 예수님의 자기 권한과 대판 싸우게 되는 영역이 영적 영역입니다.
육적 영역에서는 이런 싸움을 못느낍니다. 이미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정답을 알았버렸으니 구원 내놓아라"는 것이 인간들의 육적 본능에서 발산하는 몸짓이요 사고방식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적 세계에서는 이렇게 소리치십니다. "악마도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안다. 지옥에 간 사람도 모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안다. 하지만 구원은 순전히 예수님 소관이다"라고 말입니다.
인간의 육은 순전히 자기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이런데서 나오는 본심은, 하나님도 자기(인간)를 위한 하니님이요 예수님도 자기(인간)를 위한 하나님이요 성령님도 자신의 존재(인간 본인)를 위대하게 하는 성령이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이런 입장에서 성경을 해석하고 거기서 소위 '정답'이라고 끄집어내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웨스트민트스 신앙고백' 및 '사도신경' 및 '삼위일체 이론'들입니다.
언젠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가 설교와 진리 전파에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강단에서 본문 성경을 그래로만 글 읽고 그냥 일찍 내려오면서 '설교 끝'하고 외치면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것마저 육적인 죄로 간주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의 지향점을 알고 계시고 때문입니다.
영적인 설교자는 어느 성경 본문가지고서는 영적 세계의 실상을 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설교자 본인이 자신을 마구 패야 합니다. 개패듯이 패야합니다! 죽어라고! 뒈지라고!
왜냐하면 설교자 본인이 하는 설교를 마치 의로운 일을 한 것처럼 간주하는 육적 습성에서 못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으로 설교하는 것에는 육적인 요소가 발생하지 않으리라고 여기는 것은 터무니없는 육적인 생각입니다.
마치 수능시험에서 수학 정답을 알고 맞추었다고 싱글벙글하는 수험생과 같은 욱적인 태도입니다.
성경 말씀 가지고 장난치고 방종하는 자, 그 자들이 설교자입니다.
진지하게 복음만을 전했다면서 방종하는 자, 그 자들이 설교자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설교로 교인을 구원시켜 준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영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구원은 예수님 소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케 하십니다.
면류관 벗어 주님 발 앞에 던질 준비나 하세요. (계 4:10-11)
" 주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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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
한진영 2006-10-10 16:47:23, 조회 : 164, 추천 : 0
감사합니다..
정답이라고 여기고 붙들었지만 그것이 바람을 잡은 듯 헛 것이고,
진리가 육의 소유되자마자 금새 비진리가 됨의 신비 속에서
모든 것 주께 던지는 기쁨은
정말 말할 수 없는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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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 이근호 2006/10/10 3 212
[re] [re] 질문
고관규 2006-10-11 11:01:14, 조회 : 112, 추천 : 1
목사님의 글에서..나온 설교문제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여러 책을 끄집어 보면서...설교학도 보았습니다만...
소위..미국에서 나온 강해설교법이나....달라스신학교가 설교강해,주석법에는 탁월한가 봅니다.그...출신들을 중심으로...해돈 로빈슨이나,,,한국의 장두만박사등...그 부류들의 설교법이 지나 10 여년 각광을 받았습니다.
귀납법이니...연역법이니...설교 해석학이니....
이게 다 실용주의적인 미국이나..영국의 영향이드라구요
이런거 몬하면 세련..??되지 못하고,시대에 뒤떨러진 사람이며..시대를 못보는 사람인거 처럼 인식되는것 같드라구요
그 쪽의 해석학적인 설교법이 최고라구 하면서 을마나 선전을 했나요?
거기에 원어까지 들먹이면 이건 사실 꼼작마라 입니다.ㅎㅎ
물론 역사의 한,,장치들을 연구하여 효과적으로 써 먹..을 수는 있겠죠?
그런데..나중에 한 편으로 더..보니까...
이것도 뭔가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스데반의 설교.바울의 설교.선지자들의 설교,세례요한의 설교가....
위의 것들과 다르다고 강변하면...그들은 뭐라고 할가여
그냥 가볍게 웃으면서 가소롭다고 할가요?
그러면 저는...이러케 답변합니다.
그래서...그게 어터했다는 겁니까?
쏘 홭 !! 그래서요
뭐가 어터케 됫답디까?
추가하여 여기에 목회상담학이니...교회행정학이니..상담학이니까지 더,,나간다면 골치 아픕니다.
참고) 줏어듣고,,귀동냥도 하고...스스로 느낀거지만 ?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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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한진영 2006/10/10 2 217
[re] 질문
손무성 (Homepage) 2006-10-10 14:32:32, 조회 : 193, 추천 : 2
메인 홈 아래 있는 칼럼의 글
'서신 속에 있는 하라와 하지 말라는 명령어들'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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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방종과 관련하여 제가 생각하는 바가 맞는지에 대한 질의
김세은 (Homepage) 2006-10-11 15:13:39, 조회 : 183, 추천 : 0
이근호 목사님 안녕하세요 ! 전 올해 28의 울산에서 교회를 다니는 성도입니다.
금번 방종과 관련하여 목사님께서 답변하신 내용을 토대로 전 다음과 같이 알고 있습니다.
방종이냐 아니냐의 개념은 결국 그 잣대가 사람의 가치관에 있다고 봅니다. 저는 서경수 목사님께 배우기를 인간의 가치관은 죄라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방종인지 아닌지는 중요하다고 보지 않고, 그저 무엇을 하든 인간은 죄만 터뜨리니 십자가만 바라보아야 한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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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근래 방종과 관련하여 제가 생각하는 바가 맞는지에 대한 질의
이근호 2006-10-11 16:06:11, 조회 : 209, 추천 : 3
성령님이 임하게 되면,
손무성 목사님의 말씀처럼 '인간의 이름'은 죽고 '주의 이름'만을 증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지 못한 종교인에게는 이런 능력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되레 자신의 달라짐을 주내용으로 증거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거저 주신 것들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본인이 고대하던 바가 예수님에 의해서 드디어 획득했다고 남들에게 증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들은 '상한 심령'이 뭔지를 모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쓴 잔도 모릅니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못하는 자들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 5:8)
왜 이런 고백을 못할까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만 사모하다가, 자기 이미지에다 예수 이미지로 덧칠 한 것입니다.
참으로 십자가 앞에 선 자아는 다음과 같은 고백만 내뱉게 됩니다. .
"화로다. 나는 망 할 자구나!"
이런 자가 과연 방종을 하고 싶어 할까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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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입니다.
정수태 2006-10-13 11:59:25, 조회 : 166, 추천 : 3
오래만에 질문을 드립니다.
1.
창세기 1-2장4절에 나오는 창조에 관한 기사에 대한 질문입니다.
창세기 1-2:4절의 창조 안에 이미 구속적 창조를 지향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1장5절에 의하면 창세전에 이미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하고 아들삼으시기로 작정
하셨다고 되어 있다면 이미 창세기1장-2:4절의 창조 안에 구속을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2. 그렇다면 창세기1장-2:4절 안의 창조 속에 구속의 암시는 어떻게 찾을 수 있나요?
3. 창세기 1:2-3절 안에 창조 속에 구속적 계시가 있다면 창세기1장-2:3절의 창조는 불완전한 것인가요?
4. 또 엘로힘이라는 신명과 야웨라는 신명이 창조와 구속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명되나요?
5. 만약 창세기 1장-2장4절에 나오는 창조가 구속적 지향이 없다면 그렇다면 구속적 창조는 어디에서 그 근원을 찾나요?
목사님 귀찮으시더라도 상세히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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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10-14 02:15:17, 조회 : 149, 추천 : 2
'구속적 창조'라는 표현되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의 창조'라고 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한 창조 밖에 없습니다.
창조 안에서 구속이 따로 들어있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심이 곧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한 작업이었습니다. (히 1:2)
따라서 불완전한 창조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이름이 여호와입니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이 여호와입니다. 그렇다면 그 여호와에 근거해서 참된 하나님을 포괄적으로 표현할 때 엘로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이 자기 학생을 들을 지칭하면서, '이 청소년들은 특별히 우리
고등학교에 소속된 학생'이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서 마음놓고 '어이 학생!'이라고 포괄적으로 불러도 틀린 표현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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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질문입니다.
정수태 2006-10-16 12:18:55, 조회 : 145, 추천 : 0
좋으신 답변 감사합니다.
창조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몇가지 이해가 안되는 것이 있어 다시 질문 드립니다.
1."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이 되신다"(고전1:30)라고 성경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것과 구속을 지향한다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2." 처음부터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없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에베소서 1장에 보면
모든 만물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통일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예정 가운데 있는 일이며 그 가운데
우리의 구속함이 있는데(엡1장) 처음부터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일은 없다라고 말씀하실 만한 성경근거나
요절은 있으신지요?
3. 엘로힘과 야훼의 신명이 목사님이 설명하신 것 처럼 증거되는 성경요절이나 본문이 있으면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다시 좋은 답변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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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재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10-16 12:31:57, 조회 : 135, 추천 : 0
1.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다'는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일을 하신다'라고만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하신 일 모든 것이 다 표현되지를 못합니다.
그리스도깨서 진정 해야만 하는 일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을 통해서 달성하시는데 그 일입니다. 이 일의 중앙에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엡 1:10)
인간의 구원도 그리스도로 통일되기 위한 일의 일부입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2. 창세기 1장과 2장에 나오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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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재 질문입니다.
정수태 2006-10-16 14:45:37, 조회 : 114, 추천 : 0
종으신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soo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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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상한 2006-10-20 08:07:53, 조회 : 82, 추천 : 1
오래 전에 이근호 목사님께서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했다고 들었던 것 같습니다. 맞는지요, 아니면, 제가 잘못 알고 있나요? 그 때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용어가 무얼 말하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고, 생소한 용어인 것으로만 여겨졌습니다. 인식론적 단절이 무엇인지 쉽게 풀어 설명해 주실 수 있으면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 인식론적 단절이란 인간 합리성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신앙으로 도약함을 일컫는 것인지요? 즉, 인간 합리성에는 답이 없다는 것을 신앙경험을 통해 체득하여 고백하게 되면서 신앙으로의 도약을 추구하게 됨을 일컫는 것인가요?
프란시스 쉐퍼는 키에르케고르 이후의 세대를 "절망선"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이성과 신앙의 통합에 대한 희망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압니다. 즉 인간 합리성에 대한 절망인 셈이지요.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합리성의 영역에서 비합리성의 영역으로 도약을 시도합니다. 합리성의 영역에선 인간은 기계와 다름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비합리성의 영역으로 도약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지요. 프란시스 쉐퍼에 따르면, 루소,칸트,헤겔,키에르케고르 등은 일종의 인식론에 있어서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물론, 존재 및 실존의 영역, 도덕의 영역 등과 함께..) 쉐퍼는 바르트적인 신신학도 일종의 도약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저는 쉐퍼를 비판해 달라고 이 글을 적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근호 목사님의 인식론적 단절이 의미하는 바가, 인간 합리성에 대한 절망인 것인지, 또한 그로 인한 신앙적 도약을 말하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바가 있다면 저의 지레짐작에 대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고 지적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쉐퍼 계열에 속한 자들은 늘 신앙과 이성의 통합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역사는 말하기를... 주지주의와 주정주의의 싸움이 계속 되어 왔음을 늘 말해줍니다. 고대부터 이것은 계속되어 왔습니다. 철학사에 있어서도 주지주의와 주정주의는 계속해서 싸워 왔던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굳이 쉐퍼가 진정한 답이라고 생각하고 이 글을 적은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어차피 치우치기 마련입니다. 균형을 추구한다 하여도 치우치기 마련인 것입니다. 단지, 저는 이근호 목사님이 인간 합리성의 희망에 반론을 제기하고(문제의식을 가지고) 신앙으로 도약을 추구하는 것을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다른 것 보다, 인식론적 단절이 의미하는 바가 궁금합니다. 저의 무지를 깨우쳐 주시기를...
(다른 모든 인간적 시도는 사라지고, 십자가의 영이 증언하는 십자가만 남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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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인식론적 단절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근호 2006-10-20 08:43:45, 조회 : 101, 추천 : 1
인식론이 등장한 것은 서양 근대 주체의식이 싹 틀 때입니다.
자기만의 인식을따로 갖겠다는 독립의식이 퍼지게 된 것은, 그동안 '자연 안'의 인간으로 머물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이러합니다.
‘일자(一者, 혹은 신)→ 누스(이성, 로고스)→영→자연’ 이런 식으로 세상이 구성되었기에
이 세상은 ‘자연→영→이성→일자(신)’의 경로를 거쳐 되돌아가는 운명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충분히 타당한 것은, 인간의 생존이 토지(땅)에 국한 되었기 때문입니다.
토지 중심의 봉건 사회 말고는 달리 세상을 읽을 대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 봉건 사회에서는, 홀로 있다는 식의 개인이나 개별자 개념은 성립될 수 없습니다. 신이 지정해 준 자기 위치로 행복해야만 했습니다. 이 토지를 바탕으로 신께서 건설한 사회에는 는 어떤 위치에서 신에게 봉사하는 운명을 지녔느냐 하는 것만 생각하면 됩니다.
자연을 볼 때, 자연과 더불어 탄생하고 소멸하는 운명론 속에서 녹아지는 자아만 연상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과학이 발달하고, 자연을 과학적 안목으로 분석하고 비판하는 대상이 되면서 인간은 대자연의 운명 속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여기서부터 주체의식이 굳혀지고, 주체의식을 전제로 한 사회가 구성되고, 대화가 되는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무엇이 참된 진리냐가 아니라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식으로 사물을 대하고 보아야 하느냐부터 따져 봐야 된다는 겁니다.
즉 사물을 보는 방식에 따라, (인식론에 따라) 진리 고백이 상호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개별적인 주체들은 다른 주체들이 관여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 고유 영역이 있다고 보는 겁니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단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單者는 그저 조그마한 창문만을 지닌 단자라서 그것으로만 외부와 교류하는데 그 창문이 너무 작아서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단지 자기 이야기만 상대방에게 반복할 뿐인 것입니다)
이 주체의식이 전체 인민으로 확산될 수 밖에 없는 사회로 돌입되는데 그것은 사회 자체가 토지에 기초하지 않고 돈과 자본에 기초해서 우발적으로 늘 재구성되는 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입니다.
즉 '시장'에서 주체자들의 가치가 그 때 그 때 시세에 따라 결정될 사항이므로 그 때그 때부터 자신에게 돈이 들어오는 식으로 인식론과 거기에 따른 진리관을 수시로 변경시킬 수 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신이라든지, 계시라든지, 선과 악의 개념도, 자신의 존재 가치와 결부되어 자신에게 돈이 될수 있는대로 많이 들어오게 되는 식으로 개념변동을 시도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통일교를 평소에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욕하더라도, 막상 통일교 단체에서 상당량의 봉급을 주고 취직 시켜주겠다면 얼씨구나하고 거기에 종사해서 통일교를 옹호하는 사람으로 돌변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사회입니다.
시장 변동에 따라 '나'라는 주체가 어떻게 달라지고 어떤 인식론을 취할지 각자 본인들도 장담할 수 없고, 또한 장담할 필요조차 없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12:2과 3절에 보면,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 있어 '인식론 파괴', 혹은 '인식론 단절'의 순간을 고백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운명과 갈 길을 자신이 결정될 수 없고, 외부에서 (하늘에게) 사전 확정지어진 코스대로 이끌려 갈 수 밖에없는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인식론 발휘가 무용지물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 몸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자신이 관리 여하에 따라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 그런 사건과 사건들을 만나는 코스를 자신이 가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에 대해서 인식론적 단절이 생겼다면 이는 곧 타인을 자신의 팬으로 만든다든지 이 땅에서 자신이 유명인으로 버텨보겠다든지, 남들이 인정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조차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을 일방적으로 이끄시는 주님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를 통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다음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이로서 사도 바울에게는 '내 교회'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곧 '나는 남을 설득시킬 수 없는 말을 해야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뭡니까?
오직 증인=목격자=고백자 되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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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실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이상한 2006-10-20 09:11:57, 조회 : 67, 추천 : 1
인식론적 단절이란 근대주체의식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시장변동(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축적정신)에 따라 주체자의 인식과 가치가 늘 달라지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었군요. 그러한 주체의식에서 결별하겠다는 선언이기두 하구요. 그렇다면, 처음에 제가 본 것처럼 인간 합리성에 대한 문제의식과도 연관이 있을 듯 싶습니다. 또한 신앙적 도약과도 관련이 있을 것 같구요.
중요한 것은 목사님께서 지적하신데로, 바울처럼 십자가의 영이신 그분만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내 교회, 내 목회, 내... 자기 소유의식에서 떠나... 자기 이름을 증거함에서 돌이켜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 것으로 돌이키는 것이구요. 성도의 참된 존재의미는 주의 이름을 증거하는데 있는 것이겠지요.
이곳에 와서 늘 배우고 돌아가게 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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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신학에 대한질문입니다.
정수태 2006-10-21 12:44:39, 조회 : 90, 추천 : 0
저번 질문과 답을 생각한 후 다시 질문드립니다.
<질문에 앞선 전제질문>
구약신학에 있어 개혁주의가 바라보는 입장이 크게 언약신학, 하나님 나라, 혹은 구속사 그리고 기독론적 해석이라
생각합니다.(자유주의자들은 역사비평 혹은 정경론입장 근자에 와서는 보수주의 학자들도 문예적 방법 혹은 다양한 해석방법도용 등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근호목사님께서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론적 해석이라 생각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측면에서 기독론적 해석이라 보여집니다.
아니라면 목사님의 구약신학 해석입장은 무엇인지요?
<질문>
1. 그렇다면 기독론적 해석 차원에서 언약과 하나님 나라, 구속사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명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께서 성경중심사상의 글들은 성경을 언약적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성경신학(1)에서도 그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 나라로 성경을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론적 차원에서 성경을 보는 것과 언약적 차원에서 성경을 보는 것은 같은 것인지 다르다면 어떤 식으로 다른지 설명하여 주십시오.
2. 목사님이 자주 해석의 틀로 인용하시는 히브리서 1:1-2절은 많은 구약학자들이 기독론적 해석에 있어 모형론해석으로 인용을 합니다. 그렇다면 모형론적 해석과 언약적 해석은 어떤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까?(1번 질문과 동일할 수도 있음)
3.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구약을 본다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차원으로 해석하는 범위는 어디까지 입니까?
이른바 개혁주의자들이 성경해석의 원리로 제공하는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차원입니까?
예를 들어 가죽옷을 아담에게 입힌 것을 보고
개혁주의 자들 안에서도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형이다라고 해석합니다. 그들의 근거는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신다는 성경요절을 인용합니다.
(2) 그리스도의 모형을 나타낸다는 직접적인 해석은 불가하다고 주장합니다. 풀로 옷을 입혔기 때문에 그들의 수치를 들어줄 가죽 옷을 입힌 것인데 지나친 해석을 한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구약으로 볼때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궁금하여 여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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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구약신학에 대한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10-21 16:03:53, 조회 : 93, 추천 : 0
구약이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말에 두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존재하심을 미리 내다보는 식으로 기록되었기에 메시야라는 존재의 등장과 관련지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예수님이 하시는 기능적인 일과 관련지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째 해석이나 둘 째 해석이나 필히 전제될 수 밖에 있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을 보는 독자가, 자신의 존재와 기능에 대해서 어떤 개념을 지니고 있기에 그 개념만이 용납되는 동일한 안목에다
'예수'라고 불리우는 그 분의 존재와 기능을 관여시키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남여가 서로 교제하는데, 남자가 여자보고 '자기 날 사랑해?'라고 물어봤자, 그것은 남자가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사랑 개념이 이미 성립되어 입장에서 여성의 답변을 자기 쪽에다 관여시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여성이 말하기를, "그래, 나도 당신을 사랑해"라고 말했다고해서 서로가 같은 사랑의 개념 안에서 서로 통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도 이와 비슷합니다.)
사실은 서로 곡해하는 가운데 한시적으로 교제를 나누고 있는 바입니다.
구약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구약을 본다하더라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예수'가 어떤 '예수'인지는 그 사람이 내놓은 구약 해석물을 통해서 결과적으로 짐작할 뿐이지요.
따라서 이 때는 신약이 사도들이 구약을 어떻게 해석했느냐라는 경로를 거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에 있어 구약 해석은, '피' 즉 '십자가의 피'를 가지고 해석합니다. 결코 부활을 개시점으로 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사도들의 이런 현상을 예수님의 '새언약'의 완성에서 비롯된 능력이 비로소 제자들의 심령을 장악했기에 나온 결과라고 보고 싶습니다.
즉 예수님의 존재하심이나 각가지 기적 중심으로 구약이 해석되어져서는 아니되고, '피'(=새언약의 피와 살) 중심으로 구약을 해석해야 사도의 해석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고 보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의 피'의 의미란, 인간의 모든 육체적 해석능력을 죄라고 규정하면서 저주하시는 메시야의 고유 기능을 두고 말합니다.
구약을 해석해서 신학을 구축하거나 구원되고자 하는 인간 자체를 아예 죽여버리고, 또한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하겠다는 것이 십자가에서 흘러나온 피의 의미입니다. (함께 저주받아 죽었으니까)
이같은 관점에서 구약을 해석하게 되면, 구약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이 '주'와 '주'사이에 맺어진 언약과(시 110:1) 그 성취성에 의해서 진행된 결과들입니다. 인간의 죄인이기에 이 언약 달성에 철저하게 배제됩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요소가 정리됩니다.
하나는, 왜 인간은 죄인이며 왜 말씀 성취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가?
둘째는, 인간의 못한 말씀 성취를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은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을 은혜로 달성했는가?
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것이 '언약'입니다.
첫 째 요소가 빠지고 둘 째 요소만 있어도 언약이 아니요, 첫째 요소만 부각되어도 온전한 언약 해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귀하께서 문의하신 신학적 제안들은 명칭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 바탕에 인간이 해석 능력에 대한 부정성이 깔려 있지 않기에 기각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신학자가 말하기를 , "나는 모형론을 옹호하지만 그것으로 십자가 복음을 구약에서 발췌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한다면 그 분의 모형론을 저는 옹호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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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노회라는 가칭의 교제권안에서....안수를 받을 수가 있나요?
고관규 2006-10-21 15:06:52, 조회 : 128, 추천 : 0
저는 기회가 되면 소정의 절차를 통과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사업을 생업으로 하지만,,,,
여기 개혁노회에서 소정의 커리큘럼을 이수?하여 가입할 수 있나요/
제가알고,입수한 정보에는....기존의 신대원의 이상의 수준과, 각종 말씀의 십자가신학과,
언약신학에 입각한 해석학과, 철학적신학등...커리큐럼이...십자가마을 정도라면
하드 트레이닝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저는 성서침례교단에서 78년도에 회심하였고....현재 만 45세의 집사입니다.
소위 말하는 교단신학교가 수없이 많지만....탁하니 맘에 들지 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보수,복음주의 계열입니다만...진보측의 해석학에도 맘은 열려 있습니다
개혁노회가 독립적인 개혁교단을 말 함은 아닌 줄 압니다만 ㅡ
형제들의 교제권이라면...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능도 하지 않을까요
10 여년간 개인 독학을 하였지만 부족함이 많아요
여기서 다시 공부하고픈 개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일단은....강도사까지만 받고 싶습니다.
목사 안수는.... 유사시에...차후미래에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차후미래에 풀타임이나...적극적인 파트타임 사역에 임 할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배우고 싶은 것은 !1 ㅡ 십자가마을의 교제권에 나타나는 성경 전체를 보는 십자가 언약신학의..
말씀의 해석학입니다.
진지한 고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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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개혁노회라는 가칭의 교제권안에서....안수를 받을 수가 있나요?
정판옥 (Homepage) 2006-10-21 15:54:53, 조회 : 127, 추천 : 0
먼저 복음 안에서 교제가 이루어지게 됨에 반갑고 감사드립니다.
우선은 "개혁노회" 사이트에 가셔서 가입을 해 주시거나
아니면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자세하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정판옥 목사( 011-389-0675, 052-236-7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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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퍼"라는 말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 이름이 아닌지요 ?
이준 2006-10-23 06:03:56, 조회 : 102, 추천 : 0
개역 성경에 루시퍼라는 말은 없읍니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하늘에서 쫓겨난 대천사가 루시퍼다> 라고 말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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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루시퍼"라는 말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 이름이 아닌지요 ?
이근호 2006-10-23 07:37:26, 조회 : 147, 추천 : 0
계명성이란 바벨론 제국의 교만성을 말합니다.
그것을 목사들이 사단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들이 악마하고는 상관없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은 심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특정 명칭이나 호칭을 부르는 순간, 그 대상은 하나의 '자신'과는 독립된 객체로서 존립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객체가 되면, 주체인 자신이 구태여 관계 맺지 한, 자신의 외부에만 머문다고 여기게 됩니다.
즉 사물에게 이름을 붙여놓으면 그 사물의 이름을 자신이 불러주지 전까지는 자신과 상관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악마는 인간의 허락없이 인간 속까지 이미 점령하고 말았습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겁니다.(마 12:29)
오늘날 소위 '사단의 문화를 차별화해서 배격하기 운동'을 벌리는 것도 이런 착각에서 비롯된 겁니다.
자신이 저주받은 자임을 모르는 자는 여전히 악마에게 점령당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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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루시퍼"라는 말은 사단이 만들어낸 거짓말 이름이 아닌지요 ?
이준2 2006-10-23 10:48:33, 조회 : 117, 추천 : 0
올바른 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
올바로 알려주면 알아보려고 하여야 하는데
대부분 들은 풍월로 설교들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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