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노회의 의미에 대해..] 2006-09-12
[개혁노회의 의미에 대해..] 2006-09-12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한 가지 궁금한 점, 개혁노회의 의미에 대해...
이상한 2006-09-12 00:25:42, 조회 : 131, 추천 : 0
이근호 목사님께선 개혁신학 조차도 비판하시며,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증거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개혁노회"라고 되어 있으니 조금은 "의외"라는 생각도 듭니다. 기존 개혁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교단들과 혼동을 가져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름하신 까닭이 있는지요?
혹, 기존의 모든 신학을 비롯한 개혁주의 신학 까지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인가요?
물론, 저는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만, 개혁노회라고 불리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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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한 가지 궁금한 점, 개혁노회의 의미에 대해...
이근호 2006-09-12 07:39:58, 조회 : 150, 추천 : 2
이름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아
흔한 이름으로 한 것입니다.
마치 , 철수나, 영자 씨라는 이름이 별 의미없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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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어차피, 예수의 이름이 중요하니...
이상한 2006-09-12 08:18:53, 조회 : 138, 추천 : 8
저는 무슨 큰 의미가 담겨 있는 줄 알았네요. 단순히 흔한 이름이기 때문이었군요.
어차피, 예수의 이름이 중요하니 문제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예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인간 죄성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인간은 늘 자기 이름이나, 예수 이름 외의 다른 이름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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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근호 2006-09-12 09:34:59, 조회 : 204, 추천 : 0
사람의 이름 안에서
사람의 명예, 위신, 업적, 공로, 재산, 신용도, 대인관계, 사사로운 인정, 조국애
이 모든 것이 다 담겨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오직
십자가 복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이 십자가 복음 앞에
삼위일체 이론이나
교회사나,
노회나
교회나
목사직이나
신앙고백서나
세상 개혁도 중요치 않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이나 본인의 목숨까지 중요치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사실을 모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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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건 다 이해가 가고 동의가 갑니다만...
문휘웅 2006-09-13 00:40:11, 조회 : 163, 추천 : 0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왜 삼위일체 이론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목사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 하나님을 부정하고 오직 예수님만 인정하시는 겁니까?삼위일체 이론이 왜 중요하지 않습니까? 예로부터 많은 이단들이 그 삼위일체 이론을 부정하고 성경과는 명백히 다른 신관을 가지고 복음에 대해 도전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서 자기를 증거하시고, 성경이 증거하고, 성령이 증거한 것에 대해서 절대적인 비중과 권위를 두어서 이야기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중요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에 있어서 전부이고, 복음 내용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그러나 삼위일체 이론도 뗄레야 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부분들은 목사님 말씀이 이해가 갑니다만, 도무지 이 부분만큼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삼위의 하나님을 부정하십니까? 아니면 구원 사역에 있어서 예수님의 사역만 인정하시고, 성부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의 사역은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하시는 겁니까?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중에서 어떻게 따로 하나만 떼서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모든 것에 대한 증거는 자기 혼자만의 증거로 충분하지 않고 아버지의 증거로 말미암아 완전해 짐을 요한 복음에서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는데 어떻게 삼위일체이론의 중요성이 부정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주님의 십자가 복음과 삼위일체 이론은 도저히 뗄레야 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가 무너지면 다른 것은 저절로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삼위일체 이론 아니 삼위일체 교리가 무너지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도 순전히 엉터리가 된다고 생각합니다.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의 계시가 진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이론에 불과하고, 전혀 있지도 않은 이야기 입니까?t삼위일체 이론과 십자가 복음은 중요성에 있어서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제 귀에는 꼭 기존교회에서 예배의 종류를 나누는 것 같은 엉터리로 들립니다. 전혀 성경에서는 있지도 않은 분류기준과 잣대로 대예배란 엉터리 예배를 만들어내고 소예배란 엉터리 예배를 만들어 내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 어떤 예배는 중요하고, 어떤 예배는 중요하지 않다는 그런 식의 분류 말입니다.저는 목사님이 진짜 정통중의 정통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제가 아무래도 잘못 생각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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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른 건 다 이해가 가고 동의가 갑니다만...
정판옥 (Homepage) 2006-09-13 06:53:53, 조회 : 171, 추천 : 0
우선은 님께서 생각하시는 삼위일체론을 말씀하시면서 질문을 하심이 옳지 않겠는지요?
예를 들어서 이러 이러한 이론이 성경적 삼위일체인데, 이것을 부정하느냐 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대부분의 교회나 신학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지도 않은데,
그들에게서 나오는 신학이 과연 성경계시와 일치하겠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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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리스도 중심의 삼위일체론만을...
이상한 2006-09-13 01:45:26, 조회 : 195, 추천 : 1
제가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과 깊이에 대해 잘은 알지 못하지만, 제가 이해하기로는, 삼위일체론도 그 형성과정에서 "교회의 권력"이 개입했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삼위일체론은 초대교회 혹은 고대교회의 기독론 형성과정에서 정립된 이론입니다. 물론, 삼위하나님은 창조 이전부터 영원 전부터 계시겠지만, 삼위일체이론은 기독론 형성과정에서 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 개입한 학파들을 살펴보면, "초기 신학파"로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와 소아시아(안디옥?) 학파, 라틴학파(북아프리카, 카르타고 학파) 사이에서 "삼파전 힘겨루기"를 하는 가운데 확립된 이론이 바로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이근호 목사님이 하신 말씀을 되새겨 보면, 당시 안디옥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로마(라틴학파)가 자기 세력권 내에 다른 두 학파들을 포섭하려고 하는 가운데서 삼위일체론이 확립되었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보입니다. 세 신학파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교회란 늘 권력암투로 물고 뜯고 이단정죄하기 일쑤니까요.
그렇다고 볼 때, 이근호 목사님께선 삼위일체론을 부정한다기 보다는 그리스도 중심의 삼위일체론이 성경적인 삼위일체론이라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의 자기 존재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동원되는 성령론(성령론은 예수 믿기 이전 과는 또다른 인간존재를 상정함으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됩니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제도)교회가 자기 존재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즉, 권력투쟁 하는 가운데서 삼위일체론을 확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론도 결국엔 인간을 위해 이용당하는 셈인데, 그것을 피하기 위해선 성경적 삼위일체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죄성을 공박하며 다가오는 곧 "그리스도 중심의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늘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보하기 위해선 동원하지 않는 것이 없기에 삼위일체론이든지 성령론이든지 언약론이든지 다 "십자가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십자가는 인간의 죄성을 공박하며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도 기존의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그리스도 중심의 삼위일체론이며, 성령론도 기존의 성령론과는 달리, 성령님은 "십자가의 영"이라는 것을 주목함이 필요합니다. 죄를 깨닫게 하고, 의를 깨닫게 하며, 심판에 대해 말씀하지 않는 성령이 계시다면 그것은 곧 가짜 성령이요, 인간에게 조롱 당하는 성령이며, 우상에 불과합니다.
삼위일체론이나 성령론이나 모두 십자가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인간에 의해 농락당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인간구원 중심의 신학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는 것이 이근호 목사님의 지론이 아닌가 감히 추측해 봅니다. (혹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용서해 주시고, 어떻게 수정되어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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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이근호 2006-09-13 07:56:08, 조회 : 211, 추천 : 0
예수님께서 오늘날도 통용되는 소위 '삼위일체론'을 어떻게 보시겠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신을 존재론적으로 규정지으려는 시도는 스스로 인간 지혜의 한계와 모순만 드러내어 줄 뿐입니다.
우선
언어 자체가 실재를 실제로 함유할 수 있는 도구가 되지를 못합니다.
언어는 모든 것이 비유에 불과합니다. 심지어 과학, 기술적 용어까지도 말입니다.
언어에서 자동적으로 실제로 복음의 능력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언어를 가지고 복음의 능력을 전달하는 것은
순전히 성령 하나님의 낮아지심에서 나온 배려입니다.
인간의 존재론적 발상은
자신의 존재조차 잊지 못한 상태에서
그 안에서 온 우주 전체의 움직임을 다 담으려고 시도한 무리한 발상의 개시에 불과합니다.
우주 안에서 자아를 잊으버리도록 무한 반복적 시도를 하든지 (불교의 무아론처럼)
아니면 자아만 남기고 우주를 잊어버리든지(피이테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움직이지 않는 고정점은 자아로 마감됩니다.
'신'이라는 용어도 역시
'자아'의 대체 용어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신'이란 '자아'가 부단히 시시때때로 본인들이 편리하게 임시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는 존재를 포착하거나 합류시킬 수 없습니다.
이미 타락한 존재는 자기 외에 모든 것을 튕겨버리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말씀이 성도 안에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14)
이 말씀은 '삼위일체론'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역사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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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들의 장난감
이상한 2006-09-14 03:10:42, 조회 : 245, 추천 : 1
기존교회가 이미 "권력집단"이며 세속적 가치관이 침투해 있는 "세속집단"이라고 하는 외침은 더 이상 불신자들만의 것이 아니다. 눈뜬 장님이 아닌 이상 기존교회의 신자들마저도 교회를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교회에 대해선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음에도 소위 "교회를 돕는 신학"이라고 하는 그 신학에 대해서만큼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신학서적의 서문을 통하여 종종 짖어댄다. 오늘날의 현대는 사고가 너무 가벼워져 버렸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큰 문제이다. 특히, 신학에 대한 불신이 오늘날의 현대에는 팽배하다. 신학을 공부해야 할 필요성이 어디 있는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 이유는, 성경을 좀 더 풍성하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주고, 인생을 좀 더 풍성하게 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오직 성경"이 중요하고, 신학주의에 빠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성경을 똑바로 보는 관점을 기르기 위해서도 신학공부는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일면,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 있어 보인다. 확실히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신학은 그들의 말처럼 성경을 풍성히 볼 수 있는 관점, 인생을 풍성히 볼 수 있는 관점을 길러줄런지도 모른다. 신학이 잣대가 아니라 성경이 잣대라고 그들이 말하는 이상, 그들의 주장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들은 "교회를 돕기 위해서도"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점을 "신학의 부재현상"으로 돌린다. 올바른 신학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많은 문제점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올바른 신학만 견지할 수 있었다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같은 그러한 모습들은 없다는 논리가 된다. 과연 그런가?
이쯤에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신학이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신학자들의 장난감"이다. 처음부터 회심하지 않은 자들이 계시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며 논리를 전개해 나간다. 자신의 신학으로 교회를 돕겠다고 한다. 교회를 돕는 신학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유대인들이 그러했음을 알려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했다. 심지어는 자신들의 신학으로 역사상에 나타난 예수 마저 못 박았다.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권력, 곧 기득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이라고 해서 그 때와 별반 다를 것인가? 신학을 공부하면 확실히 지식이 는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성경을 보는 관점과 인생을 바라보는 관점을 풍성하게 해 줄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신학이 신학의 논리를 펼치는 죄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경향성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신학은 지식의 풍성함을 주는 것 못지 않게 부작용이 있다. 그것은 죄성에서 비롯된다. 어떤 이에게는 신학이 자신의 존재의 기반이 된다. 지적 동의만으로 구원될 수 없다고 자신조차도 인정하면서도 자신이 신학적 지식을 습득한 것을 스스로 대견스러워 하기도 한다.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하다. 조금 아는 자신의 지식으로 교회를 돕겠다 한다. 자신이나 잘 돌볼 것이지...
신학은 신학자들의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신학을 포함한 그 모든 것이 십자가로 귀결되고 자신의 이름이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이름만이 증거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신학은 무용하다. 쓰레기이며, 신학자들의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일하신다.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십자가 앞으로 부르신다. 주의 이름이 증거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성도의 참된 위로인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쓰레기에 불과하다. 인간의 자기 의는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옷과도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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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옳습니다.
이근호 2006-09-14 08:15:55, 조회 : 189, 추천 : 3
>야구선수가 야구를 열심히 하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어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회화를 열심히 가르치는 것을 누가 뭐하고 하지 않습니다.
측량기사가 토지를 열심히 측량하는 것을 누가 뭐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야구선수가 야구를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영어선생님이 영어를 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측량기사가 자신의 토목기술을 진리하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신학 놀이를 진리하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단들입니다.
십자가 복음을 가로막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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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은 "죄인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권력의 시녀"라고 봅니다.(냉무)
이상한 2006-09-15 12:48:27, 조회 : 104, 추천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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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 상담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목사님...
이성민 2006-09-17 06:14:38, 조회 : 195, 추천 : 0
개인적인 상담을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목사님...
현재 유닉스 엔지니어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30대중반입니다.
지금 회사에 있은지 2년차이며(직장생활은 6년여정도), 갑자기 저희회사(a회사)와 협력관계에 있는 회사(b회사)팀장으로부터 스카웃제의가 들어왔습니다.
B회사 팀장과 평소 안면이 있었고 저를 좋게 보고 계셨기도 하고 해서
소개를 받아 일단 예의상 면접까지 보았고 그쪽 사장님께서도 저를 ok를 했다고 하십니다.
솔직히 회사(a)를 아직 옮길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직 부족하기도 하고해서요
그런데 갑작스런 제의가 들어왔고 연봉수준을 800여만원 정도 올려주는 조건과 현재 하는 업무를 밑바탕하면서(하드웨어,os)윗단에 올라가는 업무(클러스터나 DR같은)를 하게 되는 그런 새로운 일을 하게 되게 됩니다.
교육이나 다른 업무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다 가르쳐준다고 얘기를 하십니다만 .
두려움은 있습니다. 회사가 3년밖에 안된 신생회사이고 모험을 하느냐 아님 지금 a회사의 안정성을 보는냐 차이입니다.
물론 a,b두회사를 비교했을때 안정성을빼고는 b회사가 사람을 더 생각하는듯 보입니다만...
선택은 저한테 달려있으니 답을 달라고 하시는데...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앞에서 어떤 회사를 갈것이냐 택일해야한다는 결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결정하고 할수있는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예수님의 읂혜로 매일 살고 있고 그렇게 살아가는 백성으로서무슨 선택권이 있겠습니까?
차라리 모세나 기드온이 하나님께 확신을 얻기위해 몇가지 답을 얻었듯이 그렇게라도 해서 답을 얻고 싶어 기도하지만(예를 들어 " 하나님 아버지 제가 선택을 못하겠습니다 알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니라면 B사장님과의 면접에서 저를 떨어뜨리게 하소서...")라고 했는데... 그냥 OK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이것이 응답인지 아님 제 생각의 틀에서 만든건지.. 부끄럽습니다..
제가 선택하는 것은 해봐야 모두가 죄라고 생각합니다 . 그러나 주께서 준비하신 길이라면 맨땅에 헤딩하기의 새로운 일을 하게 되더라도
만족할것 같습니다.... 이길인지 저길인지 알길이 없습니다 제가 겉모습만 나이가 들었지 아직도 연약한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부족한 성도입니다.. 현재 삶이 죽음앞에서 십자가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겠지만 바로 느껴지고 해야되는 현실에서 그냥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를 기동하게 하시는 주님이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느껴지질 않습니다만 이제지의 제 삶을 이끄신것은 제가 아니며 주님의 인도하심만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는 모든결정이 주님이 하는 것이야라고 단정지어서 생각한다면 교만한게 아닐까 생각하여 조심스럽게 상담부탁드리겠습니다.
제 결정은 모든게 이렇든 저렇든간에 죄만 드러나는것 같습니다.... 주님의 인도함이 여기인지 저기인지 아님 제결정인지
.살펴볼 지혜가 없어서이니 그래도 인생연배가 있으시고 오로지 복음에 전념하시는 목사님께 간곡히 상담부탁드립니다..
행복한 고민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고민이 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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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직 상담 부탁드려도 될런지요? 목사님...
이근호 2006-09-17 08:07:12, 조회 : 211, 추천 : 2
이 사회는 구조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회이지 개인이 결정할 사회는 아닙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사회입니다.
이미 결정지어진 것에 대해서 수긍해야 하며 그 안에서 생존욕구를 감추지 못한채 발악을 최대한도로 요구하는 사회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사회는 내가 그리는 그림이 아니요 작품도 아닙니다.
그저 이미 그려진 그림 안에 소품으로 자리잡고 있을 뿐입니다.
소품은 곧장 소모품으로 전락됩니다.
특히 IT 산업 분야에는 더합니다.
기술이 너무나도 세분화되어서
자신이 자신만만한 기술도 바로 옆 공정에서는 쓸데없는 기술로 간주될 정도이고,
몇 년 전의 기술도 노후 기술이라고 취급받기 일 수입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두 가지점을 고려합니다.
단지 기술자로만 일시적으로 써먹을 직원인지 아니면 사람을 통제하고 이끄는 매력을 지닌 간부급 직원이 될 사람인지를 봅니다.
둘 다를 겸비하게 되면 사용자가 부담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고위직에 이르면 회사의 재정적 치부까지 건들릴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이쯤 되면 같은 동입자 내지는 투자자로서 협조해 주기를 요청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회사가 더 나은가 하는 것은
첫 째, 어느 회사가 자신의 잠재력을 꾸준히 존중해 줄 수 있는 회사인가 하는 겁니다.
둘 째, 본인의 자신감입니다. 즉 '내가 언제까지 회사라는 집단에 매여살 것인가? 회사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여러 회사의 생리를 맛볼 수 있을 기회가 생길 때 충분히 파악해두자'라는 모험심 말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쪽에 우월을 두는 것은 귀하의 마음입니다.
세째로, 결정적으로 직장 옮김의 관권은 가족들의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혼자 사는 입장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독신이라면, 첫째와 둘째 사항만이 검토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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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렇다면 목사님 선택의 재량은 저에게 있다는것인지요?
이성민 2006-09-17 09:28:21, 조회 : 180, 추천 : 5
모든 선택의 권한은 제게 있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주님께서 그런 자유를 주셨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렇다면 사람의 길을 정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주관하시는게 아니고
제 선택하에 달라질수있다는 이야기인지요?
가장 객관적으로 답을 주셨지만...
저는 지금 어떤것이 주께서 인도하시는 길인가 생각하는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너무 확대해석할필요도 없겠지만 신앙인에게는 모든 일이 그냥 우연히 생기는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어느 직장에 가던 죄된 모습만 보이겠지만말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간에 주님이 주가 되고 나머지야 그냥 한부분이지만 말입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하나의 소모품대로 그리고 어떤 집단하에 어우러져 살고 있지만...
막상 선택을 하라고 하니 머뭇머뭇합니다...
목사님께서도 직장생활을 하시다가 목회의길로 오신것 같은데
목사님의 선택으로 이렇게 복음을 증거하게된건지 아니면 목사님의 선택이 아니 하나님이 이끄시는 방법에 의해 온건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목사님께서 만약에 목회의길이 아니라면 계속 직장생활할수도 있었던것인지요?
그것이 목사님께 의한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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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렇다면 목사님 선택의 재량은 저에게 있다는것인지요?
이근호 2006-09-17 13:27:26, 조회 : 190, 추천 : 1
뭔가 오해를 하셨네요
죄가 아닌 방향으로 선택하려고 하지 마시고 본인의 욕심이 가장 잘 드러내는 쪽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욕심이 억제하는 식으로 선택하게 되면 여전히 그 선택을 못마땅한채 계속 그 선택의 책임을 하나님께서 돌리면서 원망할 것이 뻔 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죄가 무엇인지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무엇을해도 죄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지 아직도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는 인간이 할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무엇을 해도 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무엇을 해도 자기 욕망대로 선택하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오줌누면서
"하나님, 지금 오줌눌까요, 아나면 일주일 후에 한꺼번에 눌까요?"라고 괜히 하나님쪽으로 견눈질 해봤자, 그 사람은 얼마안지나 오줌누게 되어 있습니다. (오줌이 자신을 지배하지 자신의 신앙심과 윤리와 도덕이 오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의 의지를 수시로 철철넘치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할 것은 그 의지를 마음껏 발휘하시되,
결국 남는 것은, '마음껏 했음'이 인간에게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과 모든 것이 자기 정당화를 위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런 사실에 감사하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요(왜냐하면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예수님의 피로 선택된 자기에게 뿌려져서 구원받았음을 믿기에)
이런 사실에 안절부절하는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되려는 사람입니다.(왜냐하면 실수를 줄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을까 하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이방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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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2006-09-17 15:00:52, 조회 : 191, 추천 : 2
제 의로움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주의 의로움으로 되어진다고 믿지만은...
그사실을 망각할때가 너무 많습니다...
구원은 주께로 말미암는다고 고백을 하면서 그 사실을 망각함으로 제 자신의 의(안하던 기도 더 하기 말씀읽기등등)나 도덕성을 좀 더보탤때 조금이나마 안심하는것도 인간의 욕망인가요?
위와같이 주의 의로움밖에 없다고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믿고 생각하지만
제 볼품없는 행위와 결부될때는 흔들릴때가 있습니다..이럴때는 구원의 확신까지도 흔들립니다
(믿는자라면서 아직도 이 모양인가?-_-)
제 마음과 행위등등 어떤것도 작정하심에 손끝하나 건들수 없음을 고백한다해도
똑같이 반복되는 불신적인 행동과 불안함이 있을때는 답답할때가 많습니다
이것이 제 믿음인지 위로 부터 주어진 믿음인지 어떻게 확인할수있나요?
타인이 제 속을 알수없고 더욱이 저도 제속과 마음을 모를때가 많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제 자신을 보아야 주께서 주신 믿음인지 아닌지 확인할수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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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답변감사드립니다...목사님 그리고 다른 질문을 드립니다...
이근호 2006-09-17 17:25:46, 조회 : 228, 추천 : 5
>사람은 최선과 최악 사이에서 최악을 버리고 최선을 선택한답시고 그것을 골라냅니다.
하지만 본인이 최선이라고 선택하는 것은 항상 최악이라는 것을 배경으로 깔아놓고 한 작업이기 때문에
만약에 본인이 정해놓은 그 최악이 없다고 한다면 본인이 정해놓은 최선이라는 것도 의미가 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손에 돈이 들어왔을 때, 도박을 할 것인가 아니면 은행에 저축을 할 것인가를 놓고서, 즉
도박=최악, 저축=최선으로 이미 본인이 임의대로 확정해놓고 있는 상태에서의 선택입니다. 이럴 경우에 사람은 항상 자신이 결정을 내리지 결코 그 결정을 남들에게 넘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중의 돈은 당연히 자기 돈이지 남의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이 결정한다'라는 것 자체가 그 어떤 경우에도 오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도박하기로 결정할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최선을 두고서 최악을 일부로 할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본인이 그 결정을 내린다는 그 '올바른 결정권' 때문입니다.(남이 내린 결정이 아니기에)
심지어 자살하고자 하는 자가 자살을 하는 이유는, 남들이 뭐라해도 본인의 결정사항 속에는
자살=최선, 더 살아보기로 함=최악이라고 이미 정해놓은 이후에 벌어진 현실입니다.
만약 수중의 돈을 가지고 도박장에 가기로 결정했다면, 이 경우에 도박=최선, 저축=최악 이라고 순간적으로 일시적으로나마 마음에 결정을 내린 이후입니다. (도박으로 생기는 각가지 파생적 부가 이익이 생긴다는 것을 핑계를 대면서)
따라서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있어 가장 기쁘고 즐겁고 다행스럽고 행복한 것은, 내가 내린 결정과 선택은 항상 내가 옳다는 식으로 되돌아오는 이유를 은근히 내가 고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있어 결정권이 따로 주어져있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이 내가 신이 되는 (더 이상 올라갈데가 없을 정도로) 최고의 순간임이 자각되는 시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처럼 인간들의 '자기 존재 정당성 사수'에 의해서 벌어진 사건이 예수님 십자가 사건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곧, "나는 그 어떤 경우에는 내가 한 행위를 옳지 않다'고 할 경우는 없다. 따라서 내 행위는 구원될 수 없고 일방적인 십자가 피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이 안됨'을 자인하고 동의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십자가 앞에 선 자는 더이상 자기 존재나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피의 공로를 증거할 뿐입니다.
구원의 원천을 자신의 심리적 변화에서 찾지 마시고 2000년 전의 사건, 십자가 피에서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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