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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성경적 성화론에 대해] 2006-08-31묻고답하기마태복음

[성경적 성화론에 대해] 2006-08-31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성경적 성화론에 대해
이상한 2006-08-31 09:22:50, 조회 : 104, 추천 : 0

언제나 한결같이 십자가 복음에 대한 일관성을 유지하시려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예수 이름에만 의미를 두는 것이 성도의 삶이라고 여겨집니다. 제도적 교회를 통해 모인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예수의 이름이 있는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지, 예수의 이름에만 의미를 두는지 하는 것들이 중요하리라고 여겨집니다.

예수의 이름에만 의미를 두고 십자가라는 위력적인 복음을 더욱 알기 원하여서 거치지 않으면 안 될 관문은 인간은 죄인임을 더욱 절실히 깨달아 아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것을 통해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아는 것이라 여깁니다. 이 세상에는 고상함을 가장한 즉 진리를 가장한 거짓이 판을 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절감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 중에서도 이번에 질문 드리고자 하는 것은 성화론에 대한 것입니다. 아래에 성화에 관한 질문이 있기에 이참에 질문 드립니다.

1.기존 성화론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아야 합니까? 개혁주의든 순복음이든 감리교든 침례교든, 성결교든 통틀어서 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진리를 왜곡시키고 있는지를 더욱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2.성경적인 성화론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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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적 성화론에 대해
이근호 2006-08-31 16:18:13, 조회 : 135, 추천 : 1

기존 성화론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구원받았음"을 증거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즉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거룩'이 십자가 복음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인간론에서 출발하여

'인간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의 증거가 로마서 4장의 이삭처럼

오직 하나님의 약속(=새언약=십자가 복음)을 믿는 믿음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증거를 역사상에서 발굴하고 발췌하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목사님, 어떤 사람을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역사적인 사건과 사례들을 통해서 예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보고서야 믿겠습니다. 즉 테레스 수녀처럼 되면 구원받은 거룩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칼빈이나 루터처럼,혹은 손양원 목사나 한경직 목사처럼 살면 구원받은 맞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호응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하지요.

"역사상의 사람들에게서 거룩의 징표를 얻을 생각하지 마세요.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진정한 믿음과 거룩은 오로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근호 당신은 구원받은 자 맞습니까? 내가 듣기에는 이근호 당신만 구원받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다 몽땅 지옥갈 이단이라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사람에게서 거룩의 대표인물을 규정짓지 말고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믿게 된 사람이 거룩한 성도입니다."

그러면 이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이렇게 답변하겠지요.

"그렇다면 이 목사님 보기에 저가 구원받았습니까 아니면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저는 다음과 같이 말하지요.

"타인의 믿음을 제 3자인 제가 파악할 자격이나 권리나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것은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건 칼빈이건 루터건 청교도자인건 간에 예수님 말은 특정 인간에게 거룩의 징표를 찾고자 하는 자는 불신자이며 이단입니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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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적 성화론에 대해
이상한 2006-09-01 02:16:25, 조회 : 110, 추천 : 0

네, "특정 인간에게서 거룩의 징표를 찾을 수 없다"는 목사님 말씀에 공감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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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있습니다
손승범 2006-08-31 17:52:03, 조회 : 122, 추천 : 0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
16절의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누가복음 15장 탕자의 비유중 28~30절의 큰 아들의 푸념에 대한 31절의 대답 등등....

윗 구절들을, 인간의 시간개념 속에 빼곰히 고개를 쳐드는 인간의 자기공로를
전혀 인정치 않는 하나님 편에서의 일방적인 묵시적 개입이라고 보는 것인가요?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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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 있습니다
이근호 2006-08-31 22:03:18, 조회 : 121, 추천 : 2

신약성경

처음 나오는 4개의 복음서는,

그 당시 유대교 세계관 속에서 복음이 어떤 식으로 표현될 수 밖에 없는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신관이나 구원관이나 천국관으로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네 자신에게 출발하는 것은 몽땅 거짓된 것이다. 나 예수가 이야기하는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입니다.

여기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반발은 예견된대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없이 구축해 놓은 그들의 신학을 가지고 예수님의 신학을 강하게 배척했습니다.

이런 사태를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천국이란,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는다"고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믿기 보다는,

예수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자신들의 이해력과 그 능력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자들이 바로 천국에서 탈락될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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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있습니다.
문휘웅 2006-09-04 08:36:36, 조회 : 107, 추천 : 0

지난번 목사님 답변은 잘들었습니다. 한번 질문을 하기 시작하니까 계속하게 되는군요. 질문드리겠습니다. 세례요한과 엘리야는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길래 신약복음서에서 하고 많은 선지자들중에 하필이면 구약성경에 나오는 엘리야를 세례요한으로 비유를 한겁니까?굳이 세례요한이 아니라도 엘리사도 있고, 예레미야도 있고, 그 외 선지자들 엄청 많지 않습니까?
세례요한과 엘리야의 연관성을 찾으려고 아무리 해도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구약의 이사야서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 주의 길을 평탄케 하는자, 그리고 말라기 마지막 부분에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에 신약의 세례요한이 엘리야이고 예수님과 성경 모두가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고 증거하기 때문에 엘리야이다라고 이야길 하면 할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혹은 성경이 왜 그렇게 이야길 하고 있을까라고 하는 질문자체가 사실 엄밀하게 따지면 굉장히 불경하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이 왜 하나님은 인간의 손가락을 다섯개로 만드셨나라고 하는 질문과 비슷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민을 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얼마든지 가능한데 어째서 하필이면 세례요한이 구약에서 이야기한 그 엘리야입니까?그리고 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자 주의길을 평탄케 하는 자가 하필이면 엘리야입니까?주님께서 세우신 그 많은 선지자들을 제외하고, 하필이면 엘리야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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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이근호 2006-09-04 08:47:21, 조회 : 108, 추천 : 0

>말라기 선지자가 최후의 선지자로 엘리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엘리야를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윗 왕에 속한 이스라엘을 다윗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로 전환하는 시점에서

다윗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이 엘리야 선지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서서히 역사적 나라로서의 가치가 소실되어 가고

묵시적인(초역사적인) 메시야 나라를 대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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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문휘웅 2006-09-05 00:28:24, 조회 : 82, 추천 : 0

다윗왕에 속한 이스라엘과 다윗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은 어떻게 다른지요?그리고 다윗 언약에 속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이 엘리야 선지자란 근거는 어떤것인지요?
그 당시 선지자의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변할 정도로 선지자 하면 엘리야가 항상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떠오를 정도로 엘리야가 선지자 집단을 대표하는 대명사의 역할을 했다는 말씀이신지요?조금만 더 쉽게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가시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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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이근호 2006-09-05 07:31:37, 조회 : 90, 추천 : 1

>다윗 왕 개인에게 종속되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면

그 다윗왕의 혈육적 가문의 죄악으로 인해 역사적 이스라엘은 의미를 잃어버리고

하지만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한 언약만큼은 반드시 성취되기에

그 다윗언약에 해당될 영원한 이스라엘은 개시됩니다.

그 시점에서

이 영원한 다윗언약은 엘리야 선지자 노선을 따라 전개됩니다.

엘리야가 죽을 때

불수레와 불말을 타고 하늘로 훌쩍 올라가므로서

더 이상 죽음의 세력조차 붙잡을 수 없는

새로운 이스라엘의 효시가 됩니다.

이 때부터

역사적 이스라엘이 묵시적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악마적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마치

오늘날

교회의 존재성에 얶매인 자들이

복음에 얶매인 자들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핍박하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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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입니다.
정수태 2006-09-04 14:28:28, 조회 : 143, 추천 : 0

목사님 질문드립니다.

1. 구약에 나오는 의인이라는 명칭 예를 들어 노아, 욥 에 대하여 의인이라고 한 것과
로마서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것은 동일한 의인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에서 의인인지
설명을 해주십시오.

2. 창세기6장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은 어떻게 해석해야합니까?
목사님은 아담의 타락이후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사라졌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실재성이 없는 명칭에 불과한 것인지요?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언어의 표현은 실효성이 없는 것 같습니다.

3. 에베소서 1장5절에도 보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로 예정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맏아들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서 1장5절의 아들과 창세기 6장2절의 아들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이고 하나는 예수님이 오신 후입니다. 즉 아들됨의 실현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가운데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창세기 6장2절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요?

이 세가지 질문에 대하여 설명을 원합니다. 늘 질문으로 성가시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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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09-04 17:12:56, 조회 : 121, 추천 : 0

1. 옛 언약 시대의 의인도 역시 언약을 믿음으로 의인됩니다.

즉 그들도 행위로 의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전적 죄인됨은 구약에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도 죄인이기에 자기 행위로 구원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2. 그 당시에도 '신의 아들들'이리고 불릴만한 자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단 전적 사람의 정신에만 해당되는 사람들과는 대비적으로 말입니다.(상대적이라는 말입니다. )

하나님의 아들의 속성은 언약의 발전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집니다.

신약에 와서 그 누구도 참된 하나님의 아들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영을 받는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자기 형상으로 아들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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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김정우 2006-09-05 22:50:29, 조회 : 77, 추천 : 0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근거가 '하나님의 아들들'의 타락으로 말미암는 다는 말이 되나요?
창세기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약의 하나님의 아들들과 맥이 같은 것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은 의인의 타락으로 말미암게 된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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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렇다면?
이근호 2006-09-05 22:58:20, 조회 : 77, 추천 : 0

>하나님은 특정 집단이 잘 되기를 은근히 하시기에 심판을 보류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미 인간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심판이란

오로지 언약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펼치는 장으로 삼기 위해 실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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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있습니다.
문휘웅 2006-09-06 09:49:04, 조회 : 114, 추천 : 0

제가드린 질문의 답변 맨 마지막에 교회의 존재성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교회와 복음은 뗄레야 땔수 없지 않습니까?비록 교회가 가라지와 알곡이 뒤섞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복음과 교회의 관계의 땔래야 땔수 없는 관계가 없어지지는 않지않습니까?분명히 주님께서 몸된 교회라고 말씀하셨고, 바울이 안디옥 교회를 떠날때 설교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언급하면서 교회의 중요성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 전서 1장에도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분명히 교회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복음과 원수된 교회의 패단을 말씀하시는 건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자기피로 사신 교회라도 교회의 존재자체가 부인되어져야 하는 겁니까?만일 그렇다면 하나님의 성도도 복음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도대체 누굴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까? 교회가 단순히 유형의 정치제도화 되고 소위 이야기 하는 건물로서 (교회당-성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성전으로 이야기하는)의 존재성을 부정하시는 건지 아니면 진짜 주님이 자기피로 사신 교회라고 부르는 고린도 전서에서 이야기 했던 하나님의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부인하시는 건지 이해가 안됩니다.교회답지 않은 교회, 그리고 우리가 은연중에 교회라고 혼동하고 잘못착각하는 부분을 부정하신다면 목사님의 말씀에 동의하겠습니다만, 전혀 그게 아니라 어떠한 의미에서의 교회의 존재자체도 용납될 수 없고 교회라는 것 자체가 복음과 전적으로 원수되었다고 주장하신다면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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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이근호 2006-09-06 11:55:40, 조회 : 104, 추천 : 1

교회에서 소위 가리지하고 여기는 것,

혹은

소위 성도가 아니라 비복음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잘라내어 보시고 그 남아 있는 교회를 상상해 보세요.

온전한 교회 맞습니까?

교회가 무엇이냐를 출발할 때,

에베소서 1장의 말씀처럼

머리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에서 출발해야 될 것을 믿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흔히 교회라고 여기는 것들 중에서

추려내고 가려내고 추려내고 가려내서 나머지 것을 참된 교회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7 교회 몽땅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을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다.

촛대를 옮기시는 그 주님의 오른 손 안에 있는 교회가 교회입니다.

지상의 교회는 주님의 일하심의 흔적들이지요.

그 흔적을 붙잡게 되면 자연적으로

요동치는 것들, 환상적인 항목을 붙잡는 것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성도는 교회 안에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혼자서라도.

마치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항 속을 헤엄치듯이.

그러니까 제가 교회의 존재를 부정한게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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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의 글입니다. 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이상한 2006-09-07 00:34:59, 조회 : 104, 추천 : 0

최근 일부 복음주의자들이 명제의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식으로 말할 때, 그는 분석적 형태로든 비분석적 형태로든 상층부로 도약한 것이다.

비합리적 - 예수와의 만남

합리적-명제의 진부를 가리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어떤 현대의 사상 논재의 압력에 눌려 절대적인 성경을 제쳐 두고 단순히 상층부에다 예수니 체험이니 하는 말을 갖다 붙인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아 마땅하다. "이렇게 하는 것과, 세속 불신자들이 의미론적 신비주의에서 하는 것이나 급진주의 신학이 하는 일이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런데 아직 두드러지게 눈에 뜨일 정도는 아니지만, 그게 다 동일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음 세대에 가서는 그것이 다 같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농후해질 것이 확실하다.

만일 상층부의 것이 합리성과는 별개의 것이라면, 또한 성경이 우주와 역사에 관하여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검증 가능한 것으로 논의되지 못한다면, 복음주의에서 말하는 상층부와 극단적인 현대신학이 말하는 상층부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무슨 근거로 선택을 할 것인가? 힌두교의 비슈누의 이름하에 만나는 것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다를 것이 무엇인가? 또한 이러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약물을 사용함으로써 어떤 체험을 추구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오늘날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현대 사상의 전모를 이해하는 일이다. 즉 이원론과 이분법 그리고 도약의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전술한 바와 같이 상층부는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종교적인 것, 세속적인 것, 추한 것, 정결한 것, 무엇이든 가능하다. 현대 사상의 골자를 케 들어가면 상층부에 무슨 말을 적용시키든 상관이 없다. 즉 예수라는 애호되는 말까지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는다.

내가 예수라는 말을 들을 때 -역사적인 예수와 그가 하신 일로 인하여 내게 예수라는 말이 너무나 큰 의미를 지니므로- 주의하여 듣는 이유는, 현대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어떤 다른 말 보다도 "예수"라는 말의 사용을 두려워하고 유감스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이 단어는 아무런 내용 없는 표상으로 사용되면서 우리 세대에게도 그것을 따르라는 요청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시비를 가릴 합리적, 성경적 내용이 없고 보니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과는 정반대되는 내용을 가르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 사람들은 대단한 열심으로 이 말을 따르도록 요구받는다. 급진주의 신학을 따르는 새로운 도덕에서 더욱 그렇다. 자기를 원하는 이성(異性)과 동침을 하는 것도 예수와 같은 행위라는 것이다. 인간답게 되려고 노력하는 한, 예수께서 가르치신 특정 도덕을 어기더라도 다른 사람과 동침하는 것은 예수와 같은 행위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예수의 교훈은 문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층부의 합리적인 성경 내용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라는 말이 참 예수의 적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교훈에 대한 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예수"라는 내용없는 표상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내용없는 표상과 싸워야 한다. 이것은 실로 큰 매력을 가지고 인류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 박고 있으며, 또한 사회학적 형식과 통제를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의 영적 자녀들에게도 이것과 싸우도록 가르쳐야 한다.

이와 같이 악화 일로에 있는 경향을 보면, 예수께서 말세에 적그리스도들이 등장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나타날 큰 적은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비그리스도의 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적이다. 지난 수년동안 성경의 내용과는 동떨어진 예수라는 말이 점점 역사적인 예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다시 오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적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만일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분법에 말려들어 예수와의 만남을 성경의 내용과 분리시키기 시작한다면(고의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들과 다음 세대를 현대 사조의 소용돌이 속에 내던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현대 사조는 거의 한 덩어리가 되어서 우리를 포위하고 있다.

프란시스 쉐퍼, "이성에서의 도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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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프란시스 쉐퍼의 글입니다. 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이근호 2006-09-07 08:25:03, 조회 : 137, 추천 : 3

성경에서 십자가 복음을 발견해야 할텐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대하려고 하게 되면

그런 역사적 인물은

그 이후의 시대의 사람들이 얼마든지 상상해내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주의 이름'의 완성태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이란,

오직 그 분을 통해서 구원의 능력이 나오기에

주의 이름이 아닌 일반적 '인간의 이름'에서는 결코 구원의 능력을 발생시키는 바탕이 되지를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프란시스 쉐이퍼를 비롯해서

소위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나 천주교나 개신교나 구원파나 혹은 철학에서 나타내는 보편적인 과오는

마치 인간에게 구원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있는 것처럼, 혹은 신께서 그런 안목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인간의 이름에는 그 어떤 구원받을 자격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자격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처럼 여깁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서 별 의미없이 건성으로 넘겨버리는데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혹은 신의 자비나 사랑으로)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그 본성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이사야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 폭발적으로 나온 고백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구원이란 오로지 출애굽기 33:19의 말씀처럼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을 입을 자에게 긍휼을 입히시는"

하나님의 자기 권리 발생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전에 하나님과 구원받을 인간들 간의 조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굳이 프란시스 쉐이퍼 뿐만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모르고 십자가 복음을 운운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신학자들이 아무리 외쳐도

그저 불교와 하이데거 철학과 동류일 뿐입니다.

즉

"인간은 존재적으로 신으로부터 사랑받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없으면 신은 심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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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네,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상한 2006-09-07 09:53:03, 조회 : 89, 추천 : 0

십자가 사건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저주에 대해서 별 의미없이 건성으로 넘겨버리는데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혹은 신의 자비나 사랑으로)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그 본성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입니다.

이사야가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 폭발적으로 나온 고백은 오직 하나 뿐이었습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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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성령의 시대?
한광수 2006-09-08 16:24:22, 조회 : 132, 추천 : 2

지금은 '성령의 시대'이기 때문에 성령집회이름으로 열리는 것을 인정하고 그곳에서 은혜를 받으려고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그런집회에 참여를 만류하거나 그런집회를 부정하면) 성령훼방죄에 걸려 사함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많은 성도들이 이해하는 성령 이해인 것 같습니다.(누가 가르쳤던간에~)

(1)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구분과 성부 성자 성령의 주체적사역의 구분이 가능한가요?

(2)현재 한국교회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다른 역사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성령과 악령의 역사 구분을 영분별하는 은혜가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3)왜 대부분 교회들의 목사님들은 위와같은 내용을 방관하거나 동조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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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은 성령의 시대?
이근호 2006-09-09 10:23:15, 조회 : 120, 추천 : 3

(1) 구분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날이나 영원토록 주의 이름(=예수님) 중심으로 통일체로 우주가 진행되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2)모두 악령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2:8-12에 보면,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는 십자가 복음을 아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마음이나 종교열심으로도 알 수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마땅히 십자가 알 자격이나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그냥 십자가 복음도 모르는채 저주받는 것이 정상적인 코스입니다.

하지만 왠 은혜인지 십자가 복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작용했다는 증거입니다.

(3) 목사들은 목사 될 때부터 진리에 관심없고 말씀에 진지함이 없습니다.

즉 말씀에 죽고, 말씀에 사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죽고 교회에 사는 자들입니다.

교회가 영혼 장사만 잘된다면 무슨 메뉴도 다 도입하는 자들입니다.

교인들은 목사를 살게하는 희생양들입니다.

행여 관심있는 신학생들이 있다해도 그들은 목사 그룹의 안테나에 포착되어 목사직을 받지 못하고 사전 제거 되거나 행여 무사히 목사직을 받더라도 예배시간에 복음을 증거하면 노회 목사 장로들은 그 목사를 면직처분 시켜버립니다.

목사들은 교회라는 영리단체를 운영하는 사기꾼들이요 종교사업가들입니다.

신종 점장이들입니다.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 그들을 주의 이름으로 협박 공갈처서 그들의 돈과 시간을 빼먹고 자기 배를 채우는 자들입니다.

양아치 알지요?

조폭 밑에 있는 자들인데, 이들은 약한 자들에게는 한없이 강하고, 강한 자들에게 한없이 굽신거리는 자들입니다.

목사들은 이런 양아치들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돈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구제나 이웃 사랑도 결국은 그것보다 더 많은 돈과 자금이 들어온다는 것을 감안해 투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주님께서 날이갈수록 이들이 더욱 번창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라는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의 번창과 번영이 필수적인 배경이 됩니다.

즉 정말

주님으로부터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가 누구냐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너무나도 잘 알기에

그런 현대판 점장이들과 교회의 이름의 대형 절간들을 골목골목에 세우게 해서

그 덫에 걸리지 않는 것이 결국 인간의 능력으로 불가능하고 오로지 성령받은 자들만이 그들의 비젼과 꿈에 말려들지 않는 다는 것을 증거케 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일찍 죽는 자가 복되도다" 고 말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삽니다.(요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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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과 십자가로 드러나는 도약
이상한 2006-09-08 18:47:42, 조회 : 119, 추천 : 0

기독교 세계관, 특히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은 창조의 지평과 타락의 지평, 그리고 구속의 지평이 동일하다고 논리를 개진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구조와 타락과 구속의 방향이라는 일명, "구조와 방향"으로 논리로 풀어나갑니다. 그것이 "성경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인이 인식론적으로 "창조의 지평과 타락의 지평, 구속의 지평이 동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죄인의 인식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자체는 파악될 수 없는 것이 아닌가요? 아무리, (성경)계시를 소유한다고 죄인이 그렇게 믿는다 하여도 성경의 명제적 진리라고 하는 것, 특히 계시의 정보와 지식의 차원에서 파악하려 하여도 계시는 그렇게 사유될 수 없는 것이 아닌지요?

따라서, "창조"도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어늘 죄인의 인식에 가두어 둘 수 없는 것이 아닌지요? 오히려, 죄인에게 있어선 자신이 우발적으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칭의되었다는 사실, 그것만이 중요하고 그와 더불어 나오게 되어지는 그 고백만이 중요한 것이 아닌지요?

창조와 구속의 영역은 죄인의 손 안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영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창조의 지평과 타락의 지평, 그리고 구속의 지평이 동일하다는 논리전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죄인은 그저 "계시의 (명제적 성격이 아닌) 인격적 성격"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그 사건 가운데서 십자가를 체험함으로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고백함이 전부가 아니겠는지요?

이에 대하여, 어느 누가 "그것은 인간 합리성을 부정하고 도약하는 것"이라 하여도 "십자가로 드러나는 그런 도약"은 정당한 것이 아닐런지요?

인간의 인식과 더불어 "창조, 타락, 구속의 지평에 대한 논리 전개"와 인간의 합리성을 부정하고 "십자가로 드러나는 도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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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인식론과 십자가로 드러나는 도약
이근호 2006-09-09 10:32:25, 조회 : 99, 추천 : 0

귀하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

신학의 문제점은

역사를 포기못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사라는 것이

인간이 만들어낸 해석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같은 사건을 경험해도

각자 재구성해내는 역사는

입맛따라 각양각색입니다.

결국

역사를 밑바탕에 까는 것은

존재의 자기 정당성과 의로움을 발산하는 죄악의 한 단면입니다.

만약 역사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해석을 스스로 부정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자기 존재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 일을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해내시고 인간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없이 자기 부인을 하게 되면

부인해야 될 자아 라는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령에 의해서 자아 부정이 일어나는 사태를 만나면

'자기 이름'이 죽는 그 현장에 가리워진 '주의 이름'이 실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4:11이 이 경우를 잘 바쳐주고 있습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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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있습니다.
문휘웅 2006-09-10 14:48:05, 조회 : 92, 추천 : 0

지난번 목사님 답변은 잘 읽어봤습니다. 목사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는 지 대충은 알겠습니다. 제가 목사님을 오해했다는 것을... 그런데 제 나이가 이제 겨우 25살이라서 조금 알아 듣기 어려운 부분도 좀 있었습니다. 뭐 그런건 나이가 좀 더 들면은 아마 이해가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질문 드리겠습니다.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참 많이 설교 하면서 하시는 말씀들...그리고 우리 성도들도 많이 하는 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살아야 한다. 살자.삽시다. 등등...이런 말이 과연 올바른지 모르겠습니다. 근거는 바울이 고린도 전서 10장 31절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란 구절이나 그 외 지금은 잘 생각이 안납니다만 너희의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하라-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구절들이 있지 않습니까?-등등 이런구절들을 근거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고들 이야기 합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까?우리는 전적으로 죄인이지 않습니까?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하나님께서 과연 죄인들에게서, 그리고 죄인으로 인해, 죄인에게서 영광을 취하십니까?그런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전체적인 문맥에 비추어 보면 하나님께서 죄인에게서 영광을 취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다.하나님께서 죄인에게서 영광을 취하시는지 아닌지, 그리고 만일 취하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없다면, 고린도 전서 10장 31절 같은 부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건, 이런 책들 많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공부한다.' 혹은 연예인들이 연말 시상식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드린다.'란 말등... 교회에서도 이런 말 너무 자주 듣는데, 하나님이 과연 우리가 공부 잘 한다고 영광 받으시는지, 우리가 상탔다고 해서 영광받으시는지 의문이 듭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가 공부 잘 했다고 영광받으시고 상탔다고 영광받으신다면, 자기 자녀중에 공부 엄청 못하는 자녀는 하나님께 욕이 되거나, 수치가 되고, 상못탄 자녀는 하나님 앞에 너무 큰 불충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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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이근호 2006-09-10 14:55:33, 조회 : 102, 추천 : 2

교회라는 이름의 현대판 절에서는 그렇게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운영이 됩니다.

교인들간에 경쟁을 붙이지 아니하면 교회는 운영되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 땅에 넘쳐나는 것이

교회라는 이름의 신종 절간들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서 2:11에서는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끓게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 두 구절을 합쳐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옵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아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겁니다.

즉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 일을 통해 자신이 지금 당장 지옥가도 무방한 인간임을 아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의 가치를 더높이는 것, 이것이 영광입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려서

하나님 이름 앞에 내 이름을 부정하는 것이 바로 영광입니다.

이 영광을 위하여 성도가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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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교회들: 십자가는 거듭난 이후 사라져 버렸는가?
이상한 2006-09-10 18:09:47, 조회 : 204, 추천 :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믿기만 하면 됩니다. 믿기만 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이제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십니까?

네, 믿습니다. (이제부터 예수를 믿기로 결심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제도교회에 가입된 그 사람을 향해 어느 누구도 그를 정죄할 수 없다. 이제는 그가 믿는 그 신앙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로만이 그 사람에게 주어져 있을 뿐이며, 성화의 길을 그는 부지런히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말씀도 이전에 선포된 말씀과는 달리 세상과는 단절했다고 하는 그를 향해 그를 위로 하는 말씀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제 그는 거듭났으며, 성도인 것이다. 그가 세상 속에서 믿지 않는 자로 살았을 땐, 그를 허물과 죄로 죽어 있다고 정죄하였던 그 말씀, 그 선포된 말씀이 이제는 그가 거듭났으므로 그를 위로하는 말씀이 되어 버린다. 복음을 향한 그의 고백과 제도 교회 내에 가입되어 있다는 그 이유가 "그를 죄인으로 규정하던 그 말씀을, 위로의 말씀으로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된다. 설령, 그의 인생 가운데 잘 풀리지 않는 일들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어떤 큰 섭리와 뜻이 있기 때문이며, 결국은 그를 그가 알지 못하는 형통한 길로 이끌 것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당신을 향한 섭리와 큰 뜻을 믿고 참아내라 한다.

교회의 목회자들은 때론, 기복주의를 비판하기도 하면서 성도를 위로하며 성화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라고 당부한다. 이제는 제도 교회에 가입되었으므로 남은 것은 성화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는 것 뿐이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동행하심이 있다고 말한다.

더 이상, 더 이상 그는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선언하였던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듣지 못한다. 단지, 그의 삶엔 부활과 성령의 위로와 동행이 있을 뿐...

그러나, 과연 그런가? 십자가는 거듭난 이후 사라져 버렸는가? 또한 예수를 믿노라고 고백한 그 믿음, 이제는 부활과 성령의 위로와 동행을 경험하면서 성화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도록 목사들로부터 당부받는 그 사람은 과연 십자가를 알고 믿는 자인 것일까?

그는 십자가를 모른다. 그토록 그에게 부활 이후의 성령의 위로와 동행을 강조하면서 성화의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도록 당부하는 그 목사도 십자가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십자가는 인간의 노리개감이 아니다. 인간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데 사용되는 그 정도의 십자가가 아니다.

십자가는 우주의 중심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시키는 데 의의가 있다. "나"라는 이름이 죽고 "주의 이름" 곧 "예수의 이름"으로 살게 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것은 위력이며, 폭탄이다. 인간 죄성을 모두 박살내는 폭탄이다.

참된 성도는 "그 십자가의 사건이 날마다 현재화" 되는 가운데서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거듭난 이후에도 여전히 그는 십자가의 위력을 경험한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게 만드는 그 십자가를 경험하게 된다. 성도는 부단히 십자가로부터 도망쳐 보려 하지만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고백하게 된다. 날마다 죽는다. 날마다 얻어 터진다. 십자가에서 날마다 그 폭탄의 위력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죄성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알게 된다.

십자가로 드러나지 않는 인간의 종교성이 또한 그토록 자신에게 성화의 길을 부단히 걸어가라고 당부했던 그 교회가 얼마나 인간의 종교성과 세속적 가치관으로 가득한지를 바라보고 경악하고 탄식한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교회들이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교회를 위한 하나님으로 전락시켜 버렸으며, 그 안에서 곧 그 제도 교회 안에서 자신 또한 예외가 아니었음을, 즉 자신 또한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겨왔던 사실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썩어질 수 없는 영광을 썩어질 것으로 바꾸어 놓으며, 하나님을 믿노라 하였으나 하나님을 상실한 자신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거듭난 이전까지만 유효한 것인가? 거듭난 이후에는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부활과 성령의 위로와 감동과 동행과 성화의 길을 부단히 걸어가는 것만 남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성령께선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십자가 앞으로 모으신다. 그리고, 이 세상 가운데서 예수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 오로지 예수의 이름에만 의미를 두는 자들을 모아 서로를 위로하게 하신다. 자신이 어떻게 구원 받았으며, 교회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신다. 그것을 아는 자는 자신의 삶 속에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발견하는 가운데 예수의 이름에만 의미를 두는 삶으로, 자기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제 그에게는 이전에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로 인한 새로운 의가 주어진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을 의인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에만 의미를 두기에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고백하는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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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존교회의 항변을 대신해서 쓰면 이렇게 됩니다.
이근호 2006-09-11 08:12:47, 조회 : 201, 추천 : 5

귀하는 기성 제도 교회에 대해서

'십자가를 모른다'고 했는데

너무 일방적인 매도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당신 혼자 십자가 알고 우리들은 모른다는 근거를 대보시지요!!!(분노의 표시)

물론

당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외침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 꼭 필요다는 점에 저의 기성제도 교회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 이유로 해서 당신의 말에 동참할 수는 없습니다.

첫째는

성경은 십자가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십자가 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성경은 십자가 말고도 더 넓고 큰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 전체를 거룩된 세계로 대규모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되기를 바라고,

이로 인하여 온 우주는 이 성도들의 거룩된 삶으로 인해 만물이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맨날

신앙의 터나 닦고 신앙의 초보에나 머물러는 아니된다고 봅니다.

성도로서 개인적으로 거듭 태어난 것이 만족할 것이 아니라 이제 본격적으로 더 넓은 세계로 주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것이 바로

창세기 1:28에 나오는 '온 우주를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교회가 중심이 되어서 나서야 합니다.

교회가 결코 완전한 자들만 모인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교회가 질서를 잡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중심처가 될 때

그 교회를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새 역사를 이루어 나갈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귀하는 복음을 빙자해서

이런 교회를 전체적으로 매도하면

마귀만 좋아할 뿐입니다.

귀하의 복음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좀더 성경을 보는 시야를 넓혀서면 합니다.

둘째로

십자가 중심 주의는 교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방종을 확산 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쪽 진리가 전락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해도 죄가 된다는 말은 그 자체가 옳은 말이지만

성경에 보면 분명히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적극적으로 강권하는 말씀을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라고 하면

교인들이 마치 그것이 성경 내용의 전부인 줄 알고

복음을 안답시고 교회에서 아무 것도 아니하고, 심지어 아무런 신앙 양심의 가책도 받지 않고 마구 방종으로 치달아, 순진한 교인들 까지 물들어 버린 사례가

소위 십자가 복음을 안다는 사람들 속에 허다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주님의 바른 뜻이 아나라고 봅니다.

제발 균형잡힌 신학을 하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당신의 말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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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러니까,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2006-09-11 09:19:23, 조회 : 154, 추천 : 1

교회들이 균형잡힌 신학을 한답시고 너무 답답하게 흘러 갑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에 십자가와 따로 부활과 성령을 동원하여 복음 장사로 달려 갑니다. 나름대로 건전한 목회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십자가의 의미를 모르기에 조금 더 지식의 풍성함이 있을 뿐입니다. 제도 교회 내에 있다고 애초부터 구원되지 않은 자들을 구원된 자들로 간주하고 "성도들과 관계 맺기"로 다가섭니다.

관계가 맺어진 다음엔 성령님을 그와 연합시키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를 터치할 수 없습니다. 터치하면 "성령훼방죄"로 걸려듭니다. 성령님이 동행하시고 위로하시고 성화의 길을 걷는 성도를 함부로 정죄할 수 있는가라고 말합니다. 이제 더 이상 십자가의 메시지는 교회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무늬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기존교회의 현실입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권력에 아부하고 있습니다. 신학을 하시는 분들의 한계는 신학을 하는 그 사람의 신앙관이 기존의 현실과 잘 맞아떨어지는 죄성에서 비롯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교회에도 신학에도 세속적 가치관과 권력이 침투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설령, 교회 안에 세속적 가치관이 침투하는 것을 경계할지라도 신학은 계시에서 출발함으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일 뿐입니다. 신학을 하는 그 사람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그저 죄인일 뿐인데도, 신학을 하는 신학자라는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비춰 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에만 의미를 두는 어린아이들 보다도 못한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권력이, 신학을 전개하는 데도 사용됩니다. 소위 교회를 돕는 신학은 기존 교회를 좀 더 풍성하게 꾸밉니다. 휘황찬란한 복음, 거기서 성도들은 안정감을 찾습니다. 이 사람이 이런 출신 신학을 공부했다면 믿을만하다고 말합니다. 소위 총신출신이면, 소위 고신출신이면... 나름대로 들은 게 있는 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오순절파 보단 낫지... 기복주의를 잘 경계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그들도 알지 못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날마다 십자가라는 폭탄으로 얻어터지는 것이 복음의 위력임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에 비해 한 술 더 뜹니다. 목사들은 성도들에게 회심과 거룩을 요구합니다. 마치, 자신은 회심한 사람인 양, 마치 자신은 거룩한 사람인 양... 스스로 부족하다고 말하면서도 성도 보다도 뭔가 다른 부분이 있는 듯 말합니다. 때론, 예수와 성령을 들먹거리기에 성도들은 그저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일, 목사에게 대들면 성령훼방죄로 걸릴까 저어하기에 꼼짝 못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복음이 서서히 변질되어 갑니다. 아니, 애초부터 복음이 거기에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은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고 스스로를 지키며, 다른 누구에 의해서 변질되거나 할 수 있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복음은 그리스도 자신이시니까요.

그러나, 현실 교회를 보면 너무 답답하게 여겨집니다. 그 때마다 성령께선 복음의 위력을 아는 사람들, 십자가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심으로 "위로"를 주십니다. 목회자란 날마다 십자가에 얻어터지는 자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려 하지만, 여전히 주님 손 안에 있음을 깨닫고 그 십자가라는 폭탄의 위력을 경험합니다. 또한 그렇게 십자가 앞으로 성도들을 모으시는 "주님의 이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이름"이 죽고 "주님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고, 곧 십자가 복음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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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권력 단체 : 이것이 정답!
이근호 2006-09-11 16:21:37, 조회 : 142, 추천 : 4

추천사이트에 나와 있는 '아빠방'에서 활약하고 계시는 손성식 목사님께서는

현 교회의 본질을

자본주의 경체 체제가 만들어낸 권력과 욕망의 집합체로 보면서

묵시적 세계에서 이 역사 세계로 퍼붓는 십자가 폭탄에 대해서 치밀하게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즉

기성 교회를 이단으로 보지 못한다면

21세기 세상 안에서 활약하는 십자가 능력의 모습을 제대로 잡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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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