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브라함의 언약은 민족 단위언약인지] 2006-08-23
[왜 아브라함의 언약은 민족 단위언약인지] 2006-08-23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질문을 드립니다.
정수태 2006-08-23 17:24:44, 조회 : 143, 추천 : 0
늘 자세한 답변을 해주시어 감사를 드립니다.
사소하지만 잘 모르는 것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왜 아브라함의 언약은 민족 단위언약인지 궁금합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으리라
왜 아브라함 개인에 한 언약이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고
또 그 언약의 파급효과가 민족 단위로 이루어지는 궁금합니다.
설명해주시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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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을 드립니다.
이근호 2006-08-24 11:32:53, 조회 : 125, 추천 : 1
인간의 혈통 자체에 근원적인 죄의 권세가 지배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밝히보이시면서
장차 오실 언약의 분(메시야)는
이런 아담 혈통의 보편성을 부정하시면서 다가옴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의 육을 공격하지 않는 하나님의 뜻은 없음을 처음부터 개시하시려고 한 겁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이삭의 출생'입니다.
그 결과적인 증표가 '할례'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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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이상한 2006-08-26 03:54:43, 조회 : 132, 추천 : 0
“주관-객관”과 “주관-주관”의 관계방식: 신앙과 신학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수환 (광신대학교 교수, 윤리학)
1. 들어가는 말
신학은 링크(Ch. Link)의 말대로 “하나님에 대한 말을 사유하는 책임”을 가진다. 이것은 신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하면서 사유된 신앙과 현실을 적절하게 관련시켜 책임있게 말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직접 계시하신 “신에로 이르는 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신앙을 사유하는 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사유로 하나님에 대해 책임 있게 말해야 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학은 신앙과 구분되는 면이 있다.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 인격적으로 관계하는 존재방식을 가지면서 일어나는 역사이다. 이 역사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는 자”가 되시며 인간은 하나님 자신을 받으면서 동시에 “자신을 주는 자”가 된다. 이 관계를 말의 관계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거시면서 그 인간의 말을 듣는 생명의 실재성으로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로지 말을 들으면서 비로소 하나님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이다. 즉 하나님은 원래 말을 거시는 생명(das Wort)이고 인간은 말을 듣는 존재(das Antworten)로 창조되었다. 인간의 책임(Verantwortung)은 하나님의 “거시는 말”을 들으면서 일어나는 인격에서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응답하는 활동성(responsorische Aktivitat)”으로 규정하는 브룬너(E. Brunner)의 말이 옳다. 인간은 말을 거시는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인격이 되면서 비로소 책임을 가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신앙이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과 자신을 드려야 하는 인간 사이에 일어나는 인격의 역사라면 신학은 이 인격의 역사를 사유하는 과제를 가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학이 하나의 “신앙적 사유”라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인격의 역사가 신학이 아니라 그 역사를 책임 있게 사유하는 것이 신학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체험의 문제”이고 신학은 그 체험을 객관적으로 사유하고 설명해야 하는 “경험의 문제”이다. 그래서 경험은 신학의 본질적인 문제 가운데 한 개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경험의 부족이라는 것은 신학에 있어서 곧 치명적인 하나의 병으로 간주하는 에벨링(G. Ebeling)의 말은 일리 있다.
체험이 “나와 너” 또는 “주관-주관”의 인격적인 관계방식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경험은 이 인격적인 관계를 하나의 “나와 그것” 또는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신앙이 주관-주관의 관계방식에서 일어나는 역사이고 신학은 이 인격적인 역사를 사유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학문이라는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학문의 방식은 곧 “주관-객관”의 방식에 따른다. 이 점 때문에 설명될 수 없고 사유될 수 없는 인격적-영적인 신앙적 체험이 사유와 서술, 정의, 묘사의 경험적 방식을 가지는 신학과 불가피하게 대립하게 된다. 자유주의에서는 신학과 신앙의 분리를 강조하고 보수주의에서는 신학과 신앙의 일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념적 대립은 생명의 관계방식인 “주관-객관”, “주관-주관”의 문제로 보인다. 신앙과 신학의 대립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주관-주관”과 “주관-객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본 소고에서는 이 문제를 취급하면서 신앙과 신학의 대립, 갈등과 적절한 관계 문제를 숙고하려 한다.
2. “주관-주관”과 “주관-객관”의 논쟁사의 스케치
실존철학자 M. Heidegger는 서구정신사의 종말을 “존재상실”로 규정하면서 이것을 가져오게 된 주된 원인을 “이성적 인간(animal rationale)”으로 이해한 인간이해에 있다고 보았다. 서구의 정신사가 인간을 이성적 인간으로 파악했다는 것은 서구의 정신사가 생명의 실재성을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며 거기에서 인간은 “존재의 근거를 스스로 놓는 주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서구정신사의 종언은 인간이 주관-객관의 인식이론적인 방식에서 존재 또는 실재성을 파악하려 한데서 기인된다고 하였다. 하이데거가 진단한대로 라면 주관-객관의 문제는 단순히 인식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서구의 형이상학의 종말과 관계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형이상학이 존재문제를 취급하고 있는데 주관-객관이라는 인식이론적인 방식으로 존재의 상실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이런 지적이외에도 수많은 현대학자들에 의해 지적되는 사실은 인식이론의 방식이 생명의 실재성을 접근하는데 실패했다는 데는 공감하고 있다. 그러면서 새로운 대안을 찾은 것이 바로 주관-주관의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주관-객관의 문제는 곧 인식의 방법문제이고 인식은 실재성에 적절하게 접근할 수 없음을 간파한데서 나오는 일종의 반대이며 동시에 대안이 바로 주관-주관의 방식이다. K. Jaspers의 말대로 “우리를 위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주관-객관의 알력 속에서 파악된다. 존재는 객관적 존재의 방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주관성의 방식을 취하는데 객관은 이 주관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는 말처럼 존재 또는 실재성은 주관-객관의 문제와 맞물리면서 우리에게 생명과 그 생명을 묘사해야 하는 학문의 문제로 다가온다. 실존주의와 실존철학의 빼 놓을 수 없는 공로가 하나 있다면 주관-객관에서 생기는 인식의 문제가 생명의 실재성을 다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면서 공통적으로 주관-객관의 사유에 투쟁했다는 점이다.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주관-객관의 사유를 비판하면서도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자는 입장과 주관-객관의 사유를 강하게 부정하려는 입장이 서구의 정신사에 뚜렷하게 발견된다.
주관-객관의 문제는 서구 정신사의 출발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관계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이 방식이 생명의 실재성을 이해하는데 무엇인가 한계를 준다고 여기면서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가져온 것이 바로 주관-주관의 방식이었다. 주관-주관의 방식이 발견되고 학문적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나 서구 정신사의 역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역사를 가진다. “생각하는 나”의 발견이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었다면 근대 이후로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계몽주의 이후로 나와 타자와의 관계방식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생겨난다. 로고스 개념을 사유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으로 이해해 왔던 종래의 이해와 달리 “언어”문제와 관련시키려는 시도는 적어도 학문적으로는 계몽주의 이후부터였다. 로고스를 “언어”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할 때 “듣는 자아”와 “말하는 자아”의 관계 방식을 생각하게 되고 언어를 매개로 일어나는 정신의 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G. Hamann, Humbolt, M Heidegger, E. Ebner, M. Buber, H-G. Gadamer 등은 로고스를 언어 문제로 이해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로고스를 이성으로 이해하는데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 보게 되었고 그 결과로 서구 정신사가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실재성을 파악하려 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로고스를 “말”로 이해하면서 주관-주관의 관계방식을 구상하게 된다.
사실 주관-주관의 발견은 18세기 독일 낭만주의 철학자 F. H. 야코비라고 할 수 있고 L. Feuerbach가 이 방식을 자신의 인간학에 사용했다. 반면 S. Kierkegaard는 Feuerbach와 정반대로 이 방식을 자신의 신학적 관점으로 활용했으며 신칸트주의자 H. Cohen, F. Rosenzweig의 저서들에도 이 개념이 나온다. 주관-주관의 방식을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한 사람은 M. Buber와 F. Ebner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 둘에서 실재성의 유일한 접촉은 오로지 주관-주관이라는 관계방식으로만 가능하였다. 이들의 실재성 이해는 현대 정신사에, 특히 실존주의자들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E, Brunner, K. Barth, F. Gogarten, K. Heim의 신학과 G. Marcel, K. Lowith, E. Grisebach, J. Jaspers, H. Ehrenberg의 철학과 E. Resenstock-Huessy의 사회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관-주관, 주관-객관의 문제가 실재성 이해에 중요한 방법인 것을 현대 신학자들은 간과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재성 이해를 위해 주관-객관의 방식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기도 하고 불가피하게 때문에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도 주어진다. 전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은 F. Ebner, M. Buber, E. Grisebach, G. Marcel, K. Heim 등과 같은 자들이고 후자에 속하는 사람들은 R. Bultmann, E. Brunner, F. Gogarten, G. Ebeling 등이 속한다고 하겠다. 본 소고에서는 다 소개할 수 없고 대표적인 경우만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F. Ebner는 실재성이란 오로지 내가 “너”를 발견하는데서만 일어나는 것을 강조하면서 실재성은 주관-주관의 방식으로만 접근할 수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주관-객관의 방식은 생명을 “실체로 만드는 성향(Substantialisierungstendenz)”으로 간주하면서 이것은 근본적으로 정신의 고립(Isolation)이라고 본다. 모든 학문은 사실상 이 성향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주관-객관의 사유는 모두 “나라는 고독(Ich-Einsamkeit)”이며 그것은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갇히는 존재(In-sich-selbst-Befangensein)”인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M. Buber도 F. Ebner와 같이 주관-객관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주관-객관은 실재성을 분리(Trennung)시키는 것이며 분리란 생명을 하나의 “그것”이라는 구역으로 가져다 놓는 것과 같다. 분리란 생명의 근원을 “상대”에게서 찾지 않고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데서 생기는 자아의 이기성(Egologie)이라고 본다.
E. Grisebach는 주관-객관이 관계하는 용어는 System, Innerlichkeit, Wahrheit, Dogmatismus, Identiat, Selbstbehauptung, Erinnerung 등의 말과 관계한다고 주장한다. 이러 용어들은 “정신의 꿈”을 반영하는 말들인데 주관-객관은 인간의 내면의 세계에서 시작하여 마치 꿈에 모든 것이 자신에게로 관계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나타나듯 생명의 실재성을 자신의 내면성으로 가져오는 공허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것을 그는 이기성의 무한성(Grenzenlosigkeit der Egoitat)으로 규정한다.
주관-객관의 방식에 대한 부정도 있지만 그 불가피성을 인정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E. Brunner는 주관-객관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선 주관-객관의 관계에서 파악되는 실재성을 반대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는 나타나는 실재성은 인간을 인격(Person)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비인격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브룬너는 주관-객관의 관계가 소크라테스 이후 오늘까지 총체적인 서구철학사에 기인하는 근본적인 문제이며 이것이 서구 인간이해의 근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서구사상이 3가지 유형의 흐름이 있는데 실재주의(Realismus), 사변주의(Idealismus), 범신주의(Pantheismus)가 그것이다. 실재주의는 객관을 주관보다 앞세우는 사상이었고 반대로 사변주의는 주관을 객관보다 앞세웠으며 범신주의는 주관과 객관의 동일시를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런 사상들에 있어서는 “너”로 인해 “나”가 되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의 실재성이 사라진다고 보면서 이것은 신앙으로 인해서 주어진다고 한다. 실재성은 오로지 “주관-주관”의 관계에서 성립되며 신앙은 바로 이것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주관-객관의 방식은 교회의 실천적인 가르침을 치명적으로 방해하기도 하고 공동체의 선포와 신앙을 약화시키는 존재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단언하길 성경적인 진리이해는 주관-객관의 방식에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곡해시킨다고 하였다.
그러나 브룬너는 주관-객관의 방식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앙에 대한 학문으로서 하나님 말씀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신앙을 의미 있게 사유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F. Gogarten도 주관-객관의 관계에서 말하는 주관의 개념을 강하게 비판한다. 신학은 신앙의 실재성을 취급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주관-객관의 관계에서 파악되는 주관이란 이런 실재성을 열지 못한다고 그는 본다. 그는 여기서 주관성(Subjektivitat)과 주관주의(Subjektivismus)를 구분하면서 전자는 기독교 신앙과 관계하고 있고 후자는 세속주의와 관계한다. 기독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주관성을 통해 자신을 하나님에로 결단하는 주관과 관계한다. 이 신앙은 오로지 “주관-주관”의 관계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주관주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주관성이 세속주의(Sakularisation)로 나타난 형태로서 주관성의 왜곡된 형태이며 이것은 현대인의 주관개념으로 그는 보았다. 이것은 “자아가 스스로 자신 안으로, 자아가 스스로 자신의 내면적으로 되는 인간의 내면성(Inwendigkeit des Selbst sich auf sich und des Selbst sich nach innen wendenden Menschen)”을 뜻한다. 반면에 신앙에 의한 주관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통해 자신으로 그리고 내면으로 향해진 인간의 내면성(Inwendigkeit des durch den Anruf Gottes auf sich und nach innen gewendeten Menschen)”이다.
3. “주관-객관”의 극복으로서의 “주관-주관”인가?
여기서 우리가 “주관-객관”, 또는 “주관-주관”을 논할 때 이것은 “나”와 “상대”와의 관계를 가리킨다. 여기서 “나”란 일상적인 삶 속에서 사용되는 용어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의 인식이론적인 주체개념인 것을 알아야 한다. 뢰드(W. Rod)는 여기서 일상적인 용어와 주관-객관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나”와 구분하는데 전자는 “단순히 경험적인 나(das empirische Ich)”를 뜻하지만 후자는 학문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서 자아가 대상을 통해 의식되어 “경험으로 사유하는 나(das erfahrende Ich)”를 뜻한다고 한다.
“단순히 경험적인 나”는 지시대명사인 “이것” 혹은 “저것”으로 환원해서 사용될 수 있으며 세계 속에서, 세계에 의존하여, 세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나 개념이다. 반면에 “경험으로 사유하는 나”란 하나의 철학적인 나로서 대상을 경험하면서 인식하는 주체이며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주체를 뜻한다. 그러니까 “주관-객관”에서 사용되는 “주관” 또는 “나”의 개념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나, 즉 지시대명사로 환원되어 사용되는 존재가 아니라 사유하는 나로서 대상을 하나의 객관으로 만들면서 자신을 의식하는 자아 개념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신앙과 신학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신학은 신앙을 사유하는 학문이라고 이해한다면 신학이 가지는 문제는 신앙이라는 관계방식과 학문이라는 관계방식의 상호 충돌문제이다. 신앙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각 개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영적 관계로서 객관화될 수 없는 관계에서 주어진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외에는 제 삼자가 결코 알 수 없고 묘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절대적으로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라고 할 때 비과학적이거나 비논리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자아 관계가 서로 주관으로서 관계하기 때문이라고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는 주관이시고 동시에 인간으로부터 인간 자신을 받으시는 주관이다. 인간은 주관으로서 하나님 자신을 받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에게 자신을 드린다. 이렇게 주관과 주관이 서로 만나는 관계이기 때문에 주관적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신학은 학문의 성질을 가자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객관성을 가진다. 객관성이란 인간이 “상대”와 거리를 가지면서 자신을 의식하려는 성질이다. “상대”와 거리를 가진다는 것은 곧 “상대”의 실재성을 상실한다는 것과 같다. “상대”와 거리를 가지면서 그 거리를 가지는 자신을 의식하는 것이 객관성이다. “상대”를 객관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상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나의 의식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객관성에 있어서 “상대”의 실재성은 사라진다. 학문은 바로 이런 객관성을 지녀야 한다는 점에서 주관-주관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생명의 실재성이 학문에는 불가피하게 상실한다. 상실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인간이 생명이나 실재성을 하나의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식이란 3인칭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을 뜻하는데 생명을 3인칭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것은 생명을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나의 의식을 사유하는 것이 된다. 본질적으로 “어떤 것”이 될 수 없는 생명이 3인칭으로 인식 가능한 어떤 존재가 되면서 묘사, 서술, 정의로 인식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상대”가 더 이상 생명이 아닌 것이다. 학문의 방식이 필연적으로 3인칭의 서술방식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문 속에는 생명이 실재할 수 없다. 다만 생명에 관한 서술자의 의식을 반영하는 행위가 될 뿐이다. 신학도 하나의 학문이기 때문에 생명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불가피성을 가진다.
신학은 하나의 학문이지만 그것은 여타의 학문들처럼 단순히 생명의 현상을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신학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실재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하는 학문이기 때문인데 이 신앙은 단순히 하나의 객관적 현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칭의(Rechtfertigung)된 자의 신앙이기 때문에 이 신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오로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자아에 의해서만 받아들여지는 신앙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주관적이다. “주관적”이란 주관-주관에 의해서만 인정되는 방식임을 뜻한다. 그렇다면 신학이란 주관-주관에 의해서만 인정되는 생명의 실재성을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사유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주관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생명의 관계를 주관-객관의 인식의 차원으로 가져와야 하는 것이 곧 신학의 임무가 된다. 그렇다면 이 임무를 어떻게 잘 수행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신학의 참된 방법론에 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선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지적되어야 하는 사실이 있다면 신학은 객관성의 이데올로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과 반면 신앙은 주관성의 이데올로기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학은 객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해서 객관성 자체가 절대적 척도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신학은 오로지 학문이어야 한다.”는 공식을 가지게 되고 그 결과로 사유할 수 없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하나의 형식으로 고착화, 화석화시켜 도그마주의, 신학주의, 교리주의에로 이끌게 된다. 그래서 신앙을 신학이라는 형식 안으로 불러들여서 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자칫 학문적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다. 또 하나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신앙의 주관성의 이데올로기이다. 신앙은 처음부터 주관성의 문제이다. 주관성의 문제라고 해서 주관성 자체가 실재성 이해의 척도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론은 “신학은 오로지 신앙이어야 한다.”는 공식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검증, 반증할 수 없는 절대적 사변주의, 초월주의, 초자연주의, 신비주의에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신학은 객관성이 부정되고 각 개인의 체험이 절대적인 척도가 되어 어느덧 자신의 정신과 하나님과 일치시키려는 범신주의에로 나가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객관성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신학은 인간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거룩한 생명을 땅 아래에로 현세화, 속세화시키는 형태로서 그 종결은 세속주의이다. 반면에 주관성의 이데올로기에 빠진 신앙은 반증할 수 없는 체험을 절대화시킴으로 그 신앙을 하나님과 일치시키는 형태로서 우상숭배이다. 인간의 정신이 하나님의 정신에까지 고양되어 그것들이 서로 동일시(Identifizieren)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신학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생명의 실재성을 결코 다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성이 신학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이 실재성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신학이 만약에 생명의 관계를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다 설명될 수 있다고 믿거나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 신학은 학문으로서의 신학(Theologie als eine Wissenschaft)이다. 달리 말한다면 여러 많은 학문들 가운데 하나의 학문인 셈이다. 사실 학문들이 나름대로의 관점들을 가지고 생명을 관찰하겠다는 특정의 세계관을 펼치는 정신의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생명을 그 특정의 세계관에 따라 이론적으로 펼치게 된다. 특정의 관심을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펼치게 된다. 만약 신학이 생명의 관계를 주관-객관의 방식으로만 서술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여타의 다른 학문이론 가운데 하나의 학문이 될 것이며 그것은 곧 학문으로서의 신학이 된다. 이것은 신학을 하나의 종교연구로 간주하거나 신을 믿는 자의식을 연구하는 종교 심리학이 될 것이다. 이것이 18-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이었다.
기독교 신학이 종교학이 아니라면 어떤 방식을 가져야 하는가? 그것은 신학이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생명의 실재성을 서술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유란 본질적으로 의식된 사유이고 의식된 사유란 특정의 세계관에 의해 채색된 사유이다. 이 사유에 의해 인간은 자신이 주관이 되고 “상대”를 객관으로 만든다. 객관이란 주관에 의해 사유된 객관인데 이미 그것은 나의 특정의 세계관에 의해 사유된 객관인 셈이다. 그래서 주관-객관의 방식은 “상대”에게 “세계를 파악하겠다는 나의 신념”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세계를 내 나름대로 보겠다는 나의 신념”과 “상대”를 일치시키려는 노력인 셈이다. “상대”를 나의 세계관 안으로 불러들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력이 하나님의 관계에서 펼쳐진다면 이 노력은 전형적으로 세속주의로 보인다. 왜냐하면 세속주의는 거룩한 존재를 거룩하지 못한 존재 안으로 끌어내리려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주관-객관의 방식으로만 파악할 수 있고 동시에 그렇게 파악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 생명(das Leben)”, 즉 하나님을 “하나의 생명(ein Leben)”, 즉 하나의 신으로 파악하겠다는 세속주의로 보인다. 여타의 다른 학문들의 학문적 노력으로 생명은 세속주의로 파악된다. 신학도 그러하다면 이런 신학적 노력은 여타의 학문보다 더 세속주의를 주도하는 학문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신학은 “신”이라는 이름을 구체적으로 학문의 장에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결코 이런 종류의 학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여타의 다른 학문들처럼 내용 없는 형식만 가지는 학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생명의 실재성에 관한 나의 의식만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렇게 된다면 신학은 오로지 인간학이 될 것이다. 신학이 인간학과 구별되는 점은 생명의 실재성,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자신의 실재성을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인간학은 신에 대한 인간의 사유(Denken des Menschen von Gott)이지만 신학은 인간을 향한 신의 계시를 믿는 신앙을 사유하는 것(Nachdenken von der Offenbarung Gottes zum Menschen)이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는 “어떤 것”으로 객관화시킬 수 없는 생명이다. 생명은 오로지 신앙이라는 장소에서만 일어난다. 신앙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선포되는 장소이며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실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재성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는 신앙이다. 신앙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 먼저 말을 거는 주체적 존재가 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말을 먼저 거시는 주체적 존재가 되시는 장소이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은 말을 거시는 주체가 되시고 인간은 그 말을 듣는 주체적 존재가 된다. 이런 점에서 신앙은 하나님의 자기가 인간 자아의 주체 또는 주인이 된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장소이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과 인간 정신과의 관계가 오로지 주관-주관의 관계인 것을 말해준다.
신학과 신앙과의 관계에서 드러난 사실은 생명의 실재성은 신앙이라는 장소에서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주체로서의 인간 정신이 만나면서 일어난다는 것이고 신학은 바로 이것을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객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과 문자의 관계로 표현하면 주관-주관의 관계방식은 신학의 프뉴마에 해당되고 주관-객관의 관계방식은 신앙의 그라마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러니까 신앙 없이는 신학은 생명의 실재성을 상실하게 되고 신학 없이는 신앙은 마치 육을 가지지 않는 영혼과 같이 “실재성에 대한 인간의 말”인 문자가 사라진다. 마치 인간을 가리켜 “육을 가진 영혼”으로 규정한다면 영혼과 육은 구분될 수 있지만 서로 분리시킬 수 없듯이 신학과 신앙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서로 분리한다면 신앙의 주관성에 빠지거나 혹은 신학의 객관성에 빠지거나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겠다. 즉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하는 학문이기 때문에 신학의 프뉴마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오로지 주관-주관의 방식에서만 성립이 된다. 신학의 방식은 불가피하게 주관-객관의 방식에 따라 펼쳐져야 하기 때문에 이 프뉴마틱한 신앙의 관계를 그라마틱하게 나타내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은 학문으로서 실재성, 즉 주관-주관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신학적 문장으로 책임있게 가져와야 하는 사명을 가진다.
4. 필요악으로서의 “주관-객관”의 관계
신학이 취급하는 문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사유하는 학문으로서 그것은 실재성의 문제이다. 실재성이란 곧 생명의 실재성으로서 오로지 신앙에서만 주어진다. 이 실재성은 주관-객관의 인식이론적인 방식으로 다 설명이 될 수 없다. 생명을 주관-객관의 방식을 통해서 다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신학을 하나의 실증과학으로 전락하게 한다. 실증과학이란 정신의 실재성을 취급해야하는 정신과학의 입장에서는 정신의 상실이고 정신의 세속주의이다. 정신을 육으로 묘사하고자 할 때 그 때 육에 의해 파악된 정신이란 곧 정신의 세속주의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신학의 내용인 실재성을 실증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정신의 세속화와 같다.
그렇다고 신학은 주관-객관의 방식을 전혀 무시할 수 있는가? 과연 주관-객관의 방식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실재성에 관해 인간의 말로 말할 수 있을까? 신학은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신앙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불가피하게 인간 사유의 방식, 즉 주관-객관의 방식을 도외시할 수 없다. 만약에 신학에서 인간의 학문적 사유라는 방식을 통해 신앙이 사유되어야 한다는 점이 간과되면 신학은 절대적 주관주의라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빠진다. 이데올로기란 특정의 관심이 절대적인 진리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것은 객관적인 검증과 반증을 전혀 도외시한다. 신학이 오로지 주관-주관이라는 방식으로만 펼쳐져야 한다고 믿고 학문적 방식인 주관-객관의 방식을 간과할 때 그 신학적 가르침은 신앙적 이데올로기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와 관계하는 존재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세계로 인해 실재성, 즉 생명을 발견한다는 것을 뜻한다. 생명이란 인간이 하나의 “그것”으로 가질 수 있거나 3인칭의 서술방식으로 묘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가지는 존재로서 “생명이 되는 존재(Leben-Werden)”가 아니라 “생명인 존재(Leben-Sein)”이다. 반면에 인간은 하나의 피조물로서 “생명인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가지는 존재”이다. 인간이 생명을 가진다고 할 때 생명이라는 어떤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이 인간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인간의 존재방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인간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식의 관계방식인데, 즉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하는 데 이 방식으로 하나님과 관계할 때 그 결과는 생명, 즉 실재성의 상실이다.
생명은 오로지 주관-주관의 존재방식에서만 일어난다. 이것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 신앙의 생명은 주관-주관의 관계에서만 일어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신학은 이런 신앙을 3인칭의 서술방식으로 표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다. 따라서 주관-객관의 방식을 통해서 이것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렇다고 생명의 실재성을 오로지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다 설명될 수 있다고 믿거나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객관성의 이데올로기이다. 반면에 실재성이 오로지 주관-주관에 의해서만 발견된다고 하여 주관-객관의 방식을 도외시하면 이것은 신앙의 이데올로기에 빠진다. 신학은 신앙을 떠나서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 신앙은 신학을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신학과 신앙은 마치 육과 영혼의 관계처럼 서로 분리시키거나 어느 한쪽을 강조할 수 없다. 서로 구분되지만 그러나 동시에 분리시킬 수 없는 관계이다. 신앙이라는 프뉴마적인 관계를 신학이라는 그라마의 방식으로 기술되어야 한다. 예수의 성육신은 신앙과 학문의 적절한 관계를 말해준다. 영이 육으로 화하신 것처럼 신앙은 신학의 방식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이 필연적인 관계에서 조심해야 한다면 신학은 학문으로서 학문의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과 신앙은 주관성으로서 신앙의 이데올로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적절한 대안은 신학은 항상 자신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성은 주관-객관의 방식으로 결코 이해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신앙은 실재성의 직접적인 관계로서 전적으로 주관성의 관계이다. 그렇다고 주관-객관의 방식을 무시한다면 결과적으로 초월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신학과 신앙의 필연적인 관계를 생각해 본다면 주관-객관은 하나의 그라마로서 프뉴마를 제시해야 하는 기능을 가진다고 해야 한다. 그라마는 그 자체가 의미가 없으며 오로지 프뉴마에 의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겠는데 그라마는 프뉴마를 제시하는 하나의 기능을 하는데 있다고 보겠다. 프뉴마가 발견되었다면 그라마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프뉴마 앞에서 여전히 그라마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그라마주의, 즉 교리주의에 빠진다. 교리주의란 프뉴마의 상실을 뜻하며 이것은 곧 실재성 상실을 뜻하고 동시에 악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즉 주관-객관은 실재성 설명에 있어서 불가피한 방식으로서 필요하지만 그것에만 의존하는 것은 하나의 “악”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주관-객관은 그 자체가 고유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실재성을 위한 하나의 형식(Formel)으로서 실재성이라는 내용이 채워져야 한다는 하나의 요구에 불과하다. 그것은 오로지 주관-주관에 의해 열려지는 생명의 실재성을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있기 때문에 필요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의 “악”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 정신이 거기에 매이면서 실재성 상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제1회 고려신학회 발표논문, 2003. 12., 각주생략-편집자)
<윗 글에 대한 저의 질문>
1.주관-객관의 방식을 죄(또는 악)로 규정해야하나요?
2.주관-객관의 방식을 악으로 규정하되, 불가피하다고 봐야 하는지? 혹은 악으로 규정하고 부정해야 하는지요?
즉, 인식이론적 방식에 대해서 위에서 제시된 부버, 에브너의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혹은 브룬너, 고가르텐 등의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요?
3.신학을 부정하시는 이유는 신학에 인식이론적인 주관-객관의 관계방식 때문이신지요?
그렇다면, 신학은 "필요악"인가요? 아니, 신학을 비롯한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것들, 즉 윤리, 종교, 선행, 학문 등등은 "필요악"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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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글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이근호 2006-08-26 08:46:23, 조회 : 127, 추천 : 0
1. 주관- 객관 방식이 악이 아니라
그 외 어떤 방식을 취하더라도 인간은 이미 악하기에 악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주관-객관을 따지지 않고, 강원도 깊은 산 골에서 평생 감자만 캐며 살던 순박한 할머니도 지옥보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참으로 대단한 하나님이십니다.
2. 논문의 저자는, 인간이 누구를 믿고, 무엇을 대상으로 삼고 믿고자 하는 그 '신앙현상'을 붙잡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이란 '신앙'이라는 현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말합니다.
논문의 저자는 한 마디로 십자가 사건에 대해 그 우주적 중심점을 거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지 논문의 저자는
인간들의 일반적 논리성의 한계와 그 범주를 탐색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식론 자체도 십자가 사건 앞에서 소유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단지 이러한 인식론은
안정된 인식론을 바탕으로 안정된 신앙을 구축하려는 본인이나 타인을 도리어 공략하는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처럼 "네 자신을 똑바로 알라"라고 질책하는데 도움될 것입니다.
3. 자신이 진정 죄인인 줄로 안다면, 생각과 사고와 삶의 출발을 주님의 저주와 심판으로부터 시작을 할 것입니다.
만약이 자신에게 약간의 가치와 의로움 있다고 여긴다면 (예를 들면, 자신의 존재 자체에 무슨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여전히
죄와 십자가와 심판과 지옥에서 항상 얼굴을 돌려버리게 되고, 그런 저주는 자기하고 상관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위 논문에서 언급된 모든 글들이 바로
인간이란 어쨌던 뭔가 의미가 가치가 있으며,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신학자나 교회의 일이라고 여기는 자들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이러합니다.
"겸손하게 학문하라, 오만한 태도만 안 가진다면 신께서 뭔가 아이디어와 힌트를 주실 것이고, 그 아이디어를 가진 신학자 인 본인은 여저히 존재할 가치가 있으니라"입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 교수들이 하나 같이 십자가 복음을 가리는 이단이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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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글에 대한 몇 가지 질문들
이상한 2006-08-26 12:30:14, 조회 : 90, 추천 : 0
역시 대단하십니다. 십자가 복음에만 의미를 두시기 때문에 그러한 줄 압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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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제에 대하여
정수태 2006-08-29 15:43:41, 조회 : 94, 추천 : 0
이근호목사님께
몇가지 질문을 드립니다.
(1)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구제를 하는 것이 정당한지요?
성경중심사상의 전개-누가복음-에서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베품은 교회로부터 실제로 일어나야 하는 사회운동입니다. 그 운동이 말씀 전파로서만 아니라 실천생활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출발됩니다"
이 말씀은 희년의 회복이 세상 가운데서 실천적인 베품을 통해 일어나냐 한다는 말씀으로 비추어지는데 그렇다면 교회가 세상 가운데 언약정신으로 베품이나 구제같은 사회운동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인지요?
이광호목사에 의하면 그는 글을 통하여 교회는 세상의 구제나 봉사하는 것은 성경의 정신에 위배된다고 합니다.
이유로는 사도행전이나 성경 어느 곳에서도 교회 공동체가(개별 성도가 아님) 세상을 향한 구제를 한 증언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는 언약공동체로 말씀선포와 증인의 역활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 동의하시는지요? 동의하신다면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신 진의는 무엇인지요?
(2)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일어났던 구원의 사회성과 새언약에서의 구원의 사회성은 어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3) 누가복음 16장 14-18절에 온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새 방언을 말하며...
여기서 귀신 쫒고 독을 마셔도 해를 당치않고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는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문자 그대로 이러한 일들이 오늘 날에고 일어난다는 약속입니까?
아니면 사도행전에서의 새언약의 확산 가운데 일어나는 사도들에게 국한된 약속입니까?
세가지 질문인데 크게 두가지 정도될 것 같습니다.
자세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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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구제에 대하여
이근호 2006-08-29 17:29:19, 조회 : 118, 추천 : 0
>주님의 약속 성취를 점검하는 일은
우리 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성취 되었음을 파악하는데 있어
그 뒤의 결과들을 모두 '주님의 약속'으로 믿는 '믿음으로만' 증명됩니다.
즉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에 대한 유일한 증거란
바로
세상 만사를 '주님의 약속 성취'임을 믿게 되는 '믿는 자'가 생겨나 버렸다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따라서
새삼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아무리 '주님의 약속 성취'에 관한 증거를 찾고자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에 대항해서 일어난 창조론자들의 문제점이 바로 이런 사고방식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믿을 만한 증거를 출발점으로해서 믿음을 발생시킬 방도는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구제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하는 일은 모두가 '구제'가 되도록 주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성도가 구제에 나서게 되면
'구제'와 '구제 아님'을 본인이 일방적으로 경계 지어버리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성경적으로 봐서
구제자는 오직 예수님 밖에 없고
구제 대상은 오직 성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가 '구제 대상자'임이 어떤 것으로 표현되느냐 하면
바로 '남들을 구제하는 방식'으로 표현된다는 겁니다.
그 대상이 신자이냐 불신자이냐를 구분 짓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권리와 판단력이 성도에게는 나올 수 없고, 오로지 주님에게만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종말 때는 반드시 교회는 구제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교회에 대한 약속은 주님께서 알아서 성취 차원에 돌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확인하려고 해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확인하려는 그 순간
그 사람은
성경 말씀을 근거로 믿는 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사건, 사건들을 줏어모아
주님이 하신 '계시'로 구축하려는 불신앙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의 한계가 이런데 있습니다.
고백이 되지를 못하고
중명으로 나가는 것이 신학의 불신앙성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의 말씀도
실제로 주님께서 그런 일을 하심을 믿는 믿음으로서 주님께 영광이 됩니다.
그 증거들을 역사속에서 파악해내고 그 정보들을 정리, 정돈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런 태도가 곧 불신앙일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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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전에서 느낀 성화....
손승범 2006-08-29 18:47:32, 조회 : 123, 추천 : 0
1. 어쩌다 교회출석.
2. 신선한(?) 설교와 교회 분위기로 흥미유발.
3. 교회에 굳이 나오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못느껴(?) 주기적으로 출석 및 세례종용으로 소정의 교육을 통한 절차이수.
4. 교회 생활의 ABC인 주일성수, 헌금, 봉사 적응단계에 돌입.
5. 집사 계급장 수여(위관급).
6. 술 담배 혐오모드 돌입.
7. 목사와 각별한 친분관계모드 돌입.
8. 수입중 교회에 지출하는 액수 급격히 증가.
9. 안수집사(대령 정도라 사려됨..) 도전을 위한 닌자모드 돌입.
10. 안수집사 획득....
나름대로 성화교리를 적용시켜 봤습니다.
군생활 얼마 안해서 10단계까지밖에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군대야말로 성화교리가 가장 유용한거 같습니다.
황금어장(?)에서 최대의 수익을 창출하고 열매를 쏟아낼 수 있단 믿음 때문이죠.
지금도 세례 많이 주라는 갈굼때매 귀가 따갑습니다 ㅡ.,ㅡ;;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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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대표적인 성화의 모습
이근호 2006-08-29 18:58:42, 조회 : 142, 추천 : 0
성화(거룩한 영역 속으로 흡수됨)된 자들의 마음가짐은 이러해야 합니다.
"제가 거하는 방을 모임의 처소로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말씀만 들을 수 있다면..."(눅 10:38-42)
언제든지 교회(모임)의 일원이 되는 것을 자기 인생의 최고의 영광과 축복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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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최혁 2006-08-30 03:20:55, 조회 : 102, 추천 : 0
언제가 책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찰스 스펄젼도 그렇고, "구원얻는 믿음"이라는 책을 쓴 데이비드 클락슨도 역시 불신자의 기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견해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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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불신자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이근호 2006-08-30 07:26:44, 조회 : 153, 추천 : 0
>손이 있고
입이 있고
혀가 있고 마음 속에
신에 대한 나름대로 의식이 가진 것이 인간이기에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쉬지 않고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수는 없다는 점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0:35-38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단, 성도에게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알려주시는 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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