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의 준비론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2006-08-22
[청교도들의 준비론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2006-08-22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청교도들의 준비론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상한 2006-08-22 15:42:03, 조회 : 108, 추천 : 0
오랫만에 들렸습니다. 잘 지내시는지요? 청교도들의 준비론에 관한 글 특히 "조나단 에드워즈에 관한 글"을 읽어 보았는데, 굉장히 성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교도들의 준비론 또는 구도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궁금하여 질문드립니다. 청교도들의 준비론 또는 구도론도 인간적인 발상에 불과하다고 보시는지 평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드러나길 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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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청교도들의 준비론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이근호 2006-08-22 16:52:44, 조회 : 128, 추천 : 0
청교도들은 대단히 종교적입니다.
하지만
청교도라는 이유로 천국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천국문을 열 수 없는 그 어떤 것도
대단히 종교적일 수는 있지만
결국 허무한 짓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은
청교도라든지 여타의 종파에 미련두지 않지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 고백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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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요?
이상한 2006-08-22 18:48:58, 조회 : 112, 추천 : 0
제가 질문을 추상적으로 드린 감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글에 나타난 조나단 에드워즈의 준비론은 비교적 인간이 죄인임을 잘 지적하고 있고, 오직 십자가만 드러내는 듯한데...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부흥 신학으로서의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론
고려신학대학원 양낙흥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나단 에드워즈는 조지 윗필드와 함께 제 일차 대각성의 주역이었다. 그는 1740년대 초 대각성이 일어나기 전인 1730년대 중반 설교를 통해 자기 목회지인 노샘프턴에서 부흥을 주도했고 그것은 뉴 잉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대각성 중에는 부흥 신학을 정립함으로 대각성을 뒷받침했다. 그의 신학의 어떤 점들이 대각성을 낳을 수 있었는가? 부흥을 일으키는 신학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것은 2007년 평양 대부흥 100 주년을 앞두고 이 땅에 다시 한번 그러한 대부흥의 도래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열심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던지는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본고는 바로 그 질문, 즉 “에드워즈의 신학 중 무엇이 대각성을 가능하게 했던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한 시도이다. 동시에 그것은 에드워즈의 신학들 중 가장 특징적이고 본질적인 측면들을 발굴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에드워즈의 통찰들 중 어떤 부분을 이제 1907년 평양의 대부흥 100 주년 기념을 목전에 두고 있는 한국 교회의 또 한번의 부흥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지 발견하고자 한다.
두 가지 전도 방식
제임스 패커에 따르면 전도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대의 전도방식이요 다른 하나는 청교도 전도 방식이다. 전자는 “구도자의 좌석들” (anxious seats), “제단의 부름”(altar call), “질의자의 방” (enquiry room) 등으로 상징된다. 거기서는 새로운 회심자들이 “자기들의 새로운 결단에 대한 공적 증언의 행위”로 앞으로 나오거나 손을 들거나 결신 카드를 작성함으로써 자기들의 “결정” (decision)을 분명히 표시한다. 현대의 전도자들은 자신의 교파적 소속과 상관없이 거의 누구나 전도 설교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단”할 것을 촉구하거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고 요청함으로 구원이 개인의 결단이나 결심에 달린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현대의 전도 집회에서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즉각적, 의식적, 결정적 믿음의 행위 (immediate, conscious, decisive act of faith)를 회심하지 않은 자들로부터 확보하는 데 직접 초점이 맞추어진다.” 이러한 현대적 전도 방식의 원조는, 패커에 의하면, 19세기 초의 찰스 피니다. 현대의 복음 전도는 피니의 방식을 따른 것이요 피니의 인간론의 산물이다. “오늘날 수많은 복음 전도를 특징짓는 것은 수정되고 응용된 피니의 방법이다.” 그런데 패커는 피니가 “명백한 펠라기안주의자”라고 단언한다. 피니는 “일단 사람이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확신되기만 하면 누구나 타고난 능력에 의해 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을 힘주어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피니는 어거스틴-개혁주의-청교도적 전적 무능력 (total inability)의 교리를 비웃었다는 것이다.
패커의 지적에 의하면, 청교도들에게는 “복음전도”(evangelism)라는 단어가 없었다. 그것은 20세기에 만들어진 단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전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도는 청교도들의 “주된 관심사들 중 하나”였다. 뿐 아니라 그들은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설교자들로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리차드 백스터는 대표적 인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만큼 회심에 있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설교자도 없었지만 그의 설교는 전도의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청교도 교리에 의하면 타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회개하거나 믿을 수 없다고 패커는 지적한다.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없이 인간은 영적으로 선한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믿음은 하나님이 자기 때에 주시는 선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때 받을 수 있을 뿐 스스로 가지겠다고 결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로이드 존즈가 지적했듯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했다”는 말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패커는 청교도들이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로 결단”하는 것 대신 그리스도를 “찾을” 의무를 강조했다고 주장한다. 죄인들은 당장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에 이를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은 설교의 말미에 설교자가 청중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신다”고 말하기를 원하신다고 믿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믿기로 “결심”할 수 없다. 그래서 제임스 패커나 로이드 존즈 같은 칼빈주의자들은 찰스 피니의 전도 방식을 비판한다. 피니가 구원을 인간 의지의 결단에 달린 것으로 오해했다는 것이다. 회심과 관련해 성령이 하시는 일이란 “도덕적 설득”뿐이라는 피니의 주장은 교리적 오류이며 회심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단지 도덕적 설득만이 아니라 의식의 차원 아래에서 행사되는 물리적 능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적 구원론에서의 딜레마
칼빈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 만사와 모든 영역에 미치는 것이지만 특히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다. 죄인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이니시어티브에 의해 시작된다. 왜냐하면 부패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자신의 구원 문제에 관한 한 전적으로 무능력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에게는 어떤 선행으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을 능력도 없었다. 하나님이 그를 중생시키시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주시지 않으면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였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첫 번째 작업은 “예정”이었다. 창세 전에 택정된 자기 백성을 하나님은 때가 되면 복음으로 부르시고 그 복음을 믿는 믿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을 주신다. 인간 스스로는 복음을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이 그의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즉 하나님이 “믿음”의 “선물”을 주시지 않으면 누구도 복음의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래서 청교도들은 “회심” 혹은 “신생/중생”이라는 단어를 유효적 소명(effectual calling)이라는 기술적 용어의 동의어로 사용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구원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아직 구원을 얻지 못했으나 구원에 관심있는 죄인들은
자신들을 회심시키려 몸부림친다. 자기들의 마음을 믿는 상태로
만들려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얻는 신뢰를 발휘하
려는 것이다.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만 의뢰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를 믿겠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일을 그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하려 한다.
병상에 누워 있는 자들에게서 이런 일이 아주 흔히 발견된다.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의지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믿으면 되는 줄 알지만 인간 스스로는 믿을 수 없다. 단 자신이 택정된 자라면 하나님이 “자기 때”에 “자기 방식”으로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구원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구원 문제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에 완전히 일임하고 인간은 각자 자기 할 일이나 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난센스가 될 것이다. 인간에게 전도의 여지는 사라질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도론 (the doctrine of seeking)
그러면 전도자는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어떤 권면을 주어야 하는가? 믿으라고 말하거나 회개하라고 말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면 그들에게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가? 에드워즈는 구원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 즉 각성된 구도자들에게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면서 회심의 은혜를 찾으라(seek)고 말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을 가질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지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이 회심의 은혜를 주시기까지 추구하고(seek) 몸부림칠(strive) 수는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의 “전적 무능력”의 교리를 믿는 칼빈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혜의 수단”을 사용할 힘은 자연인에게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심령이 죽어 있고 태만하다 해서 [구원을 위해] 노력할(take pains) 수도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중생하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회심을 위해 수단을 사용할 능력은 있다는 것이었다. “[구원받기가] 어렵다고 해서 사람이 이러한 일들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일들]을 하면서 몸부림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의 견해에 의하면 “추구함 없이 구원얻을 수 있다는 기대”가 오히려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추구한다는 것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구원을 추구하는 방법”(The Manner in Which Salvation Is to Be Sought)이라는 설교에서 그는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 착수해서 성취해야만 하는 일(work) 혹은 과제(business)가 있다”는 교리를 제시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말씀에서 지시하시는 모든 의무(duty)를 중단없이 수행하는 것”이었다("It is the work of seeking salvation in a way of constant observance of all the duty to which God directs in His Word").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은혜의 방편을 성실히 사용할 힘은 그에게 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모든 규례를 지키는”(attend all ordinances) 일, “공사간에”(public and private) 모든 “종교적 의무” (duties of religion)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죄악에 대항해 싸우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감찰”하는 일을 아주 열심히 그리고 기쁘게 행할 수 있다.
구도론의 성경적 근거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해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의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노아의 경우를 제시한다. 노아는 수백 년동안 방주를 준비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그것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그는 인정한다. 노아가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커다란 자비의 한 예”였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노아가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구원을 얻도록 한 가지 일을 지정해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이 일에 착수해서 그것을 수행하지 않고서는 구원받을 수 없게 정하셨다”는 것이었다. 신약에서 에드워즈가 구도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는 구절은 누가복음 16장 16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는 구절이었다. 이 본문의 “천국으로 침입한다”(Pressing into the Kingdom) 이라는 귀절을 에드워즈는 “대단한 노력”(greatness of endeavor) 혹은 “갈망의 힘”(strength of desire)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엄숙하고도 단호한 결단”(an earnestness and firmness of resolution)으로 “반대와 난관을 헤쳐나가는 것”을 나타내었다. 한 마디로 그 구절의 의미는 “수단을 사용하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또 신약 빌립보서의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본문을 준비론의 근거로 제시했다. 철저한 칼빈주의자로서 에드워즈는 인간이 행위에 의해 구원얻는 것은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함이 없이 구원얻는 것은 아니다”(yet they are not saved without works)라고 주장했다. “하나님은 지혜롭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 우리가 선한 일들(good wokrs)을 함이 없이는 최종적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정하셨다"는 것이었다.
윤리적 의무의 수행도 구도의 일환
에드워즈는 은혜의 수단의 범위를 아주 광범위하게 잡는다. 이를테면 그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모든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거기에 포함시킨다. 그는 회심의 은혜를 추구하는 자들이 그러한 일들을 모두 수행하면서 은혜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거기에는 종교적 도덕적 모든 의무가 포함되었다. “구원얻는 회심을 획득하는 길은 당신의 삶을 철저히 개혁하고 율법의 두 돌판에 나타난 모든 의무를 다 행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있는 모습 그대로” 주 앞에 나오라거나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식의 전도 집회식 초청은 발견되지 않는다. 회심의 은혜를 받으려면 심지어 이웃에 대한 도덕적 의무까지 다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자칫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우려될 정도이다.
만일 당신이 회심하고자 한다면 인간들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의무들을 다 수행해야 합니다. 당신의 부모에 대한 책임있는
행동, 당신의 형제 자매들에 대한 사랑의 의무들, 당신의
남편, 아내, 자녀들에 대한 책임, 이웃들에 대한 온유, 정의
그리고 자비의 의무들을 수행하면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모든 악의, 분쟁, 시기, 그리고 험담을 피해야 하며
사랑의 행위에 있어 풍성해야 하며 여러분이 행할 수 있는
모든 선을 행하려 애써야 합니다.
한 마디로, 에드워즈는 회심의 은혜를 얻으려면 종교적, 도덕적 의무를 포함한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일은 단지 몇몇 계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계명에 대한 순종입니다. 즉 모든 예배에 참석하며 모든 지정된 은혜의 수단들을 부지런히 사용하며,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모든 책임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기도, 성경 읽기, 예배 참석 등의 일을 “공로”나 “행위”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것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들을 지키는 것도 역시 은혜를 받는 통로들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비평가들에 의해 행위 구원적 요소를 더욱 더 많이 가진 가르침이라고 지적당할 소지가 있는 교리이다. 이신칭의와 행위 구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예배, 기도 등 십계명의 첫 번째 돌판에 속한 계명들 뿐 아니라 두 번째 돌판, 즉 인간들에 대한 의무에 관한 계명들을 이행하는 것도 일종의 “은혜의 수단”에 해당한다는 것은 철저한 개혁주의 정통 교리의 수호자로서 평생을 보냈던 사람으로서는 대단히 대담한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어쨌건 에드워즈는 자신이 “행위 구원”을 가르친다는 오해를 받을 위험성에 아랑곳없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명하신 모든 명령들을 충실히 지키는 중에 신령한 은혜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에드워즈에 의하면, 실제로 열심히 추구한 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 경우들이 있을 수 있었다. 추구하는 모든 자들이 구원의 은혜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고 에드워즈는 첨언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열심히 찾는 자는 대부분 구원을 얻었다. 일반적으로 최선을 다해 은혜의 수단을 사용하고 단호한 결단으로 목표를 추구한 자들은 다 “회심의 은혜”를 얻었다. 에드워즈는 회심의 은혜를 얻기 위한 구도자적 노력은 한 인간의 생에 있어 최고의 중요성을 가진 일이라고 주장한다. 영원한 구원의 문제는 세상 다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문제에 최우선적인, 그리고 최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칠 용의가 있어야 했다. “단지 능력, 힘, 그리고 재산만이 아니라 시간, 그리고 생명까지도 이 일에 바쳐야 한다. 실로 우리는 전 생애를 그 일을 위해 포기해야 한다.”도 에드워즈는 외쳤다. “당신의 남은 생애동안 그 일에 온전히 전념하시오.”
그들은 종교 문제가 다른 모든 문제들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알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부수적인 문제로 여기는 자들
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그 문제와 경쟁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유일한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 그들은 다른 모든 것들을 기꺼이 희생시킬 수 있
어야 합니다. 즐거움, 명예, 재산, 그리고 생명까지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팔아 버릴 준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conviction of sins)의 필수성
일반적으로 회심은 회개와 믿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에드워즈를 비롯한 많은 청교도들은 회개와 관련하여 죄에 대한 깊고도 확실한 깨달음, 즉 통회를 회심 과정의 필수적 요소로 강조했다. 패커가 잘 지적한 것처럼, 청교도 회심론이 현대의 견해와 구별되는 결정적 지점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관련되어 있다. 청교도들은 죄에 대한 확신(conviction)이 믿음(fatih)에 선행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죄책(guilt), 그것의 오염, 그 추악함, 그리고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해하심이라는 의미에 있어서의 죄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conviction)이 믿음(faith) 앞에 와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사람이 “무슨 죄들로부터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는지를 알기까지는 아무도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믿음을 위한 청교도적 “준비론”(preparationism)으로 알려진 이 견해는 종종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길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오해되기도 했으나 사실은 그것만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갈 문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고 패커는 주장한다. 청교도들은 자신의 죄들에 대해 정확히 중세적 의미의 통회(contrition)가 절대필요함을 알았다. 그것은 자기의 죄가 하나님을 모욕하고 자신을 더럽히는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슬퍼하고 미워하여 그것들로부터 구조받기를 열망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통회가 없이는 아무도 “죄의 형벌로부터만이 아니라 죄의 능력으로부터도 구원받기 위해 참으로, 신실하게, 그리고 전심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청교도들의 회심론에 의하면 “준비” 단계는 “필수적”이었다. 패커는 현명한 청교도 설교자들과 상담자들이 절대로 그 과정을 생략하거나 단축시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신 그들은 구도자들이 참으로 죄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린 것으로 보일 때까지 “계속해서 구도자의 양심에 그의 죄들의 죄악됨과 아울러 그들에게 단지 사죄뿐 아니라 거룩하게 될 필요성을 집요하게 제시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획득하기 전에 원칙적으로--이 말은 예외도 있다는 의미다!-- 통과해야 하는 단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전에 그는 자신의 죄와 비참, 혹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능력을 깨닫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시기 전에 인간들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악(evil)에 대한 어떤 상당한 감각(sense)을 주셔야만(should)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두 개의 극도로 다른 상태들을
거친다. 첫째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은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그러므로 구원받는 인간들이 이 두 상태 속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sensibly) 있어야만 한다(should)
는 것은 합리적이며 하나님의 지혜에도 부합되는 일이다.
에드워즈는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회심되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비통한 재앙과 무서운 비참”(woeful calamity and dreadful misery)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 후에 “느껴지는 방식으로”(sensibly) 구원과 행복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들의 “절대적 극도의 필요”를 느낀 (sensible) 후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상적” (ordinary) 구원 방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광야”의 체험을 거치게 한 후 “위로”하는 것이었다. 즉 먼저 인간의 무력과 비참을 깨닫게 한 후 죄인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구원 순서라는 것이었다.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그들을 광야로 인도
한 후 다정하게 (comfortably)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정한 순서는 그들이 고뇌에 빠진 후 그들 자신의 무력과
하나님의 능력 및 은혜에 대한 절대적 의존을 보게 된 다음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이루시는 위대한 구원을 보게 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인간이 회심하기 전에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정말 회심하기 원한다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의 비참과 무가치함을 깨닫기 위해 애쓰는 일이었다. 그는 서둘러 그리고 신속히 이 일에 착수해야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즈가 제시한 구절은 레위기 26:40-45이었다. 이 본문에 의지해서 그는, 하나님은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굉장한 은혜를 주시기 전에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와 비참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방식을 쓰신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대한 또 다른 성경적 근거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초청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특별히 제공된다는 본문을 지적한다. 그 말씀은 최소한 부분적으로, 죄책과 위험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느 정도로 죄를 깨달아야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자기가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한다고 대답했다. “인간은 자기가 지옥에 합당한 존재임을 깨닫기 전에는 자신의 죄책을 철저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없다”". “...또한 자기가 속수무책임을 깨닫기까지는 자신의 비참을 철저히 깨달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좀 더 리얼하게, 지옥의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절망하고 있을 때 사람은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다고 에드워즈는 확신했다. “영혼이 지옥 구덩이의 가장자리에서 떨며 서 있을 때,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움에 대해 완전히 절망했을 때 비로소 구원의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 복음은 그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 되고 그리스도는 아주 귀하게 여겨진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saving faith)
구도자는 언제까지 은혜의 수단을 사용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해 에드워즈는 “소망과 위로를 얻기까지”라고 대답한다. 혹은 좀 더 막연한 표현으로 그는 “하나님의 때가 오기까지”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때가 오기까지 열심히 진지하게 노력하면서 기다리는 것에 여러분은 만족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에드워즈는 “구원얻는 믿음”이 주어질 때까지 구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구원얻는 믿음이란 복음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니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전심으로 그에게 와서 그를 자신의 구주로 취하며 자신을 그에게 드림으로써 그의 백성들 중 하나가 되며 행복을 위해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truly)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즉 구원얻는 믿음을 가진 자들은 그리스도를 “안다”(know)고 그는 주장했다. “하나님이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므로 그들은 그가 얼마나 위대하며 영광스러운지, 그리고 얼마나 선하고 사랑스러운지를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는 사실들과 그분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도리의 탁월성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온전히 확신합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가련한 피조물들임을 보며 이 비참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구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봅니다.”
반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단지 교리--유일신 교리나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인의 구주라는 교리들--에 대한 지식과 동의다. 일종의 고백주의적 믿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그런 믿음은 있지만 예수를 “참으로” 믿지는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가짜 믿음만 가진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를 인정하고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자 죄인들의 구주임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지는 않는 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처럼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 즉 “참” 믿음이 아닌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겉으로는 훌륭한 신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집회에 참석하고 세례를 받으며 주일을 지키고 주초를 삼가며 도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믿음이란 것이 여러 종류이기 때문에 각자는 자기 검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자기에게 정말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기를 성찰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기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정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 보아야 합니다.”
신적 초자연적 빛
에드워즈는 구원얻는 신앙에 있어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수적이라 생각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여러분의 마음에 비취어 그리스도와 그에 의한 구원의 사역을 가르치는 말씀의 탁월성을 보게 된 적이 있습니까?” 1734년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혼에 직접 수여된 신적 초자연적 빛이 성경적이고 이성적인 교리임을 증명함”("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 Immediately Imparted to the Soul by the Spirit of God, Shown to be Both a Scriptural, Rational Doctrine")라는 중요한 설교를 한다. 이 설교에는 그의 회심론과 관련된 핵심적 사상이 담겨 있다. 이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인데 이 본문에 근거하여 그는 “영적이고 신적인 빛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곧바로 전달된 것으로 자연적 수단에 의해 획득된 어떤 것과도 다른 성질의 것”이라는 교리를 제시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이 직접 영혼에 비추어 주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영적 조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 장님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교리에 대한 지성적, 관념적, 사변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복음이 사실임을 믿고 확신하는 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의 지론인 영적 신적 빛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신적 탁월성(the divine excellency)에 대한 진정한 지각(a true sense),” 혹은 “이해”(apprehension),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a conviction of the truth and reality of them)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 더 좁혀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구속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길과 사역들”에 대한 “영적이며 구원얻는 확신들”(spiritual and saving conviction)은 그것들의 신적 탁월성과 영광에 대한 안목 (a sight of their divine excellency and glory)이 생겨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신령한 빛이 영혼에 비쳐 우리의 영안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보고”(see) “지각할”(sense)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이성적으로 믿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감각(sense)이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선(good)에 관한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사변적이거나 순이론적인(notional) 지식이다. 다른 하나는 마음의 감각(the sense of the heart)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혹은 달콤함에 대한 감각이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한 생각(idea)이 떠오를 때 마음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전자에서는 단지 사변적 기능 혹은 이해력(understanding)이 활용된다. 후자에서는 의지 혹은 성향(inclination), 혹은 마음(heart)이 주로 관련된다. 에드워즈는 견해(opinion)로서의 지식과 감각(sense)으로서의 지식을 구별한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은혜스러우시다는 사실에 대한 견해를 갖는 것과 그 거룩함과 은혜스러움의 사랑스러움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다른 예를 들어, 꿀은 달다는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꿀맛이 어떤 것인지 모르면서도 전자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마음 속에 꿀맛에 대한 관념(idea)이 없으면 후자가 결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복음의 진리에 대한 “참되고 구원얻는 믿음”(saving faith)이 생긴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었다.
믿음의 전제 조건으로서 영적 빛
《종교적 정서》에서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루면서 에드워즈는 인간은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의 발동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현대에 흔히 발견되는 복음전도자들의 방식과 중요한 견해 차이를 드러낸다. “아무 영적 빛이나 시각 없이(without any spiritual light or sight)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밀어 붙이거나 촉구하는(press and urge) 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 현대 전도 집회에서는 믿음을 촉구하고 재촉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presumption)이다.” 아마 에드워즈는 현대 전도 집회에서 결신했다고 주장하는 많은 이들이 “주제넘은 상상”을 하고 있다고 말했을 것 같다.
신령한 초자연적 빛을 비췸받아 영적 감각을 가지게 되는 것을 에드워즈는 은혜의 체험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생생한 은혜의 역사”(lively excercise of grace),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sensible Christian experiences) 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living by faith)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는 것이 무서운 죄라고 생각해서 자기는 구원받았다고 무조건 믿는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세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believing that he has faith)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believing that he believes)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믿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도 복음의 축복에 초청받았다고 믿을 수 있는 “유일한 확실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그 정도의 자격을 가진 자들(persons so qualified as he is)도 초대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하신 분은 진실하여 거짓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의 진실하심에 대한 확신(convinced of the varacity of God)이 생기고, 둘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이 확신되며, 셋째, 성경은, 와서 복음의 은택에 참여하라는 죄인들을 향한 초청으로 가득하므로 자기도 초대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에게 새로이 말씀하시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단언한다.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그 복음의 초청을 믿을 수 있게 되는가? 믿음을 인간의 능력으로 일으킬 수는 없다면 성경에 나타난 구원의 약속을 어떻게 믿고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성령의 “영적 조명”(spiritual enlightening)과 영향에 의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적용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복음의 초청, 혹은 제시(offer)를 “영적으로 적용”(spiritual application)하는 것은 “제공된 거룩하고 신적인 축복들”, 그처럼 은혜로운 제공(offer)을 베푼 “제공자의 달콤하고 경이로운 은혜” 및 자기가 제안(offer)하는 것을 성취하시는 “그의 거룩한 탁월성과 신실성,” 그리고 그것을 위한 그의 “영광스러운 충족성”에 대한 영적 감각(spiritual sense) 혹은 미각(relish)”을 인간에게 줌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인도하고 이끌어 그 제안(offer)을 받아들이게 하고, 그리하여 제공된 것에 대한 그의 소유권(title)의 증거를 그에게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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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 글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요?
이근호 2006-08-22 22:43:20, 조회 : 107, 추천 : 0
에드워즈나 제임스패커나 로이드 존스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전도'가 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전도'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것을 뜻합니다.
고린도후서 3:15-16에 보면, "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냥 냄새피우는 것이 전도입니다.
냄새를 피우는 상황과 말, 내용, 모두 다 성령 소관이지 인간들의 소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0:19-20에 보면, "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의 만남도 성령님이 주선한 것이고 빌립집사가 구스 고위 관리의 만남도 성령께서 주선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전도의 의의는 사도행전 28:26-27에 너무나도 명확히 잘 나와있습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의 전도는 철저하게 인간들이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 점을 소위 칼빈주의나 청교도주의자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사도바울에게 사도행전 28:26-27에 나오는 상황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전도'의 의미조차 모르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약 중심으로만 일하시지, 인간들이 세운 '교회'라는 이름의 종교집단 위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약 중심으로 '전도'의 의미를 살펴보면,
십자가 사건을 지속적으로 발생시키는 방식으로 전도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도'란 '십자가의 도'를 말합니다.
'십자가의 도'란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미련한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호소력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이가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이고 겸손한 사전 준비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그런 것들이 전혀 필요없음을 자각하면서 그 사람을 덮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적인 심판사태'입니다.
즉 "아무도 구원될 수 없음'을 선언한 심판입니다.
'전도'란 모든 인간을 심판하시므로서 비로소 예수님이 지정해내는 사람에 대해서 순전히 성부 하나님과의 계약에 준해서만 건진다는 '언약적 방식'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 그 어떤 정형된 순서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도리어 순서를 고려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 결과입니다.
교회란 오로지 주님만이 해내신 언약적 전도의 결과적 개념이지 결코 사람들의 관리 대상의 개념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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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짤린 부분 추가
이준 2006-08-22 22:18:49, 조회 : 96, 추천 : 0
**윗글 바로 뒤에 이어지는 부분임.
**출처 : 양낙흥(2005). 한국개혁신학(제17권). pp.58-59.
**개인 소장중 자료 형태 : pdf 파일 <- 고로, 복사해서 붙여넣기가 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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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들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
에드워즈에 의하면, 참된 종교적 정서는 "하나님의 일들-복음 혹은 구원의 역사, 혹은 하나님의 계시 - 의 도덕적 탁월성의 사랑스러움"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일들을 그 도덕적 탁월성의 아름다움과 달콤함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모든 거룩한 감정의 최초의 시작이요 원천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도덕적 탁월성은 "도덕적 완전"과 같은 말이며 그것은 동시에 "덕"과 동의어다. 한 마디로 그것은 거룩이다. 지성을 가진 존재의 이 도덕적 탁월성이 거룩이다. 고로 거룩은 모든 참된 도덕적 탁월성을 포함한다. 진정한 거룩 외에 다른 참된 덕은 없다. 그러면 "거룩"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그것을 "선한 사람이 가진 모든 참된 덕,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인간들에 대한 은혜로운 사랑, 정의, 자비, 동정심, 온유함과 유순함을 망라한다"고 본다. 기타 "모든 기독교적 미덕들이 거룩에 속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거룩"은 기독교의 본질에 닿아 있다. 참 신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에 의하면, 그의 거룩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들의 사랑에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이다.
조금 더 좁혀서 말하자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 "아름다움"이라는 미학적 개념에 직면한다. 그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신학 개념들 중 하나요 가장 자주 사용하는 용어들 중 하나다. 앞에서 에드워즈는 새로운 영적 감각이 회심시에 주어진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는 그 영적 감각의 유무가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는 분수령이다. 그런데 이 영적 감각의 대상이 무엇인가? 즉 마음으로 무엇을 감지할 수 있게 됨으로써 인간은 회심되는가? 그 대상은 거룩의 아름다움이다. 성결의 미를 감각할 수 있게 되는 순간이 회심의 순간이요, 구원의 은혜를 받는 순간이다.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가 회심을 아주 어렵게 정의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회심론은 독특하지만, 전통 신학의 가르침과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한다. 후자에서는 영적 감각 같은 개념을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령한 지식
**타이핑 생략 : 몇 줄 안 되지만 별로 안 중요해 보여서.
결론
**타이핑 생략 : 양이 많아서.
참고문헌
**타이핑 생략 : 귀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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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답변, 감사합니다. 이제야 좀 명확해 진 느낌이네요.
이상한 2006-08-23 00:32:14, 조회 : 81, 추천 : 0
네, 한국교회에 전도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잘 알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올린 글의 뒷 부분에는 "양낙흥 교수의 평가"에 대한 부분도 있는데, 굳이 그 분의 평가는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아서 올리지 않았습니다. 전도는 성령소관이지 인간 소관이 아니지요. 그저 도구로만 쓰여지는 것이며, 모든 인간들을 심판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지정하신 자들만이 구원된다는 말씀 그리고 언약적 전도의 결과 교회가 형성되는 것이지, 교회는 인간의 관리 대상의 수준이 아니라는 말씀. 잘 기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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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에만 의미를 둔다는 것은...
이상한 2006-08-23 04:04:24, 조회 : 139, 추천 : 1
"인간이 죄인이다!!!"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증언하는 바이며, 그것은 우리의 처절한 현실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 속에 갖혀 있습니다. 죄 속에 갖혀 있는 인간은 "자기 의"로 구원 받아 보겠다고 발버둥을 치고, 몸서리를 치며 살아갑니다. 행함의 정당성을 꾀하기 위해 동원하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 중에는 윤리가 있고, 종교가 있고, 교회가 있으며, 심지어는 신학도 한 몫을 합니다. 죄라고 하는 현실과 무관한 신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기반을 삼위일체를 들먹거려 정당화 하려 하거나, 성령을 들먹거려 정당화 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든 성령이든 교회든 전도든 윤리든 종교든 그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이 "자기 의를 위해 동원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결국, 죄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자기 의를 증거하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시도가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들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증언하기를, 그 모든 것은 "죄"이며, 자기 의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은 결단코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서 삼위일체를 들먹거리고, 성령을 들먹거려 본들, 그렇게 해서 구원된 예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되었다고 믿는 것은 자기 믿음안에서 자기 믿음으로 구원되었다고 믿는 어리석음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왜 솔직하지 못할까요? 바로, 죄가 자기 의를 증언하는 시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바로 그것을 솔직하게 시인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일반 자연인과 다른 점입니다. 일반 자연인은 자신들이 자기 의를 위해서 수 많은 것들을 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선 속에서 그렇지 않은 양 살아갑니다. 자기의 존재의 기반이 죄로 가득차 있는 것을 부정하고 자기 안에 조금이라도 의가 있는 줄 알고 자기 의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성도는 자기 의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되었다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따라서, 어떠한 몸부림도 "죄"이기에 더욱 죄 짓고 살아야 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죄 속에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지정하셔서 발벗고 나서서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해 주었더니 다시금 자기 의로 살겠다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자가 있다면, 그것은 단지 단순히 예수를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십자가에 의미를 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자기 구원용으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는 자기 의로 살았던 자신의 죄를 철저히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된 것을 증거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죄인 것으로 알기에 정죄하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이든 성령이든 교회이든 언약이든 신학이든 선행이든 윤리든 죄 속에서 자기 의를 위해 동원하는 모든 것들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단지 모든 인간들을 정죄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루터는 성도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신분 상으로는 의인이지만, 성품 상으로는 여전히 죄인인 인간을 지적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음에도 여전히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의 실수입니다. 성도는 결코 의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성도를 "자녀"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그를 의인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신분이 자녀의 신분이라 하여 의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의로 의인되었다는 지적이라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루터가 진정 십자가에만 의미를 둔다면, "참된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하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서 하나님의 언약은 죄인인 인간이 자기 존재의 기반으로 삼는 모든 것을 정죄하는 동시에 성도의 죄에 대해서도 정죄합니다. 성도의 존재성도 역시 "자신의 자아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성도의 존재"를 기뻐한다는 말 따위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존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고 성도를 용납하실 뿐이십니다. 그저 예수의 피로 성도를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크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인의 당연한 발상이요, 죄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도도 자신의 존재를 크게 상정하여, 구원 받기 이전과 구원 받은 이후의 자신의 존재를 더 나은 존재로 본다는 자체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성도의 존재 마저도 그 안에 있는 성도의 죄성을 하나 하나 완전히 들추어 내어 그리스도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의 존재는 허상에 불과합니다.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존재도 허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허상입니다. 성경적인 복음을 믿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 역시 허상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 의미를 두지 않을 때만 생기는 거짓 십자가를 붙드는 짓거리 입니다.
성도의 존재가 허상이듯, 성도가 바라는 예수 또한 허상입니다. 성도의 죄성 속에서 나오는 그 예수, 그 우상 예수까지도 쳐 내야만 참으로 십자가의 의미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은 이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믿던 하나님 마저도 예수의 십자가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정죄한 언약입니다. 하물며, 성도가 섬기는 예수, 그 예수를 믿는 성도와 연관된어 있는 성도가 섬기는 예수, 성도의 존재성을 뒷 받침하는 예수라 한들 별반 다를 게 있겠습니까? 모든 우상이 철저히 쳐 내지고, 자신의 존재마저도 부정되며, "성도의 존재가 허상"임을 깨닫고, 자신이 그 동안 섬겨왔던 모든 것들이 장난에 지나지 않은 혹은 자기 의를 위해 동원된 "우상 예수"였음을 증거하면서 다가오는 예수만이 진짜 예수 입니다.
성도의 존재라는 허상, 그 허상 즉 죄 가운데 있는 성도가 섬겨 왔던 거짓 우상 예수... 그 거짓 우상 예수를 몰아내지 못한 채, 예수라는 이름을 들먹인다고 구원된 자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약은 그렇듯 무서운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마저도 허상으로 만들고, 허상인 성도가 섬기는 예수도 우상으로 지적하는 언약입니다.
이렇게 모든 성도의 존재가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을 쳐 내고 나서야 다가오는 그 예수야 말로 참된 예수이십니다. 성도는 오늘도 자신 안에 의가 없음을, 자기 밖에서 다가 오시는 예수로 말미암아 그 사건을 날마다 경험하며 사는 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므로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십니다. 내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따라서 내 안에 새로운 의가 주어졌으므로 나는 의인이라는 고백도 안됩니다. 늘 새로운 사건을 통해서만 만나야 하고, 늘 나의 외부에서 그리스도의 의로 다가오는 그 예수를 경험해야만 합니다. 사실, 그런 의미에서 경험이라는 용어 조차 쓸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 편에서 내게 오는 것이지, 내 편에서 경험한다는 의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며, 그것은 사건으로만 예수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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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새벽에 잠에서 깨어, 제 나름대로 "십자가에만 의미를 둔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십자가 마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이 기다려집니다. 십자가에만 의미를 두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저의 바램을 잘 헤아려 주실 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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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에만 의미를 둔다는 것은...
이근호 2006-08-23 07:01:01, 조회 : 176, 추천 : 2
인간에게는
추상적 의미의 자아가 죽을 때까지 계속 살아있기에
뭔가 늘 '기대'하게 됩니다.
그 기대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죄 문제가 십자가 피로 해결되었으니 이제부터 조금 죄를 지어도 상관없지 아니한가'하고 죄를 짓는데서 오는 해방감을 맛보겠다는 기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보여주는 삶이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매일 같이 고백이 터져나오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종교적, 교리적 분석보다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종교적, 교리적 분석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기 우월성 발휘'라는 죄를 은근히 짓고 싶은 기대에서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라는 폭탄으로 인해 매일같이 얻어터지고 있다면
그 얻어터지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곧 새언약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삶은
그것을 상호 내놓을 수 있는 형제들을
'교제'라는 이름으로 일어나게 합니다.
그럴 때,
성도는
주 안에서의 사랑을 교회 안에서 느끼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분석에 몰두하여
'주 안에서' 부담없이 방어자세 취하지 않고 교제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여전히
자기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함을 보고 많이 걱정이 됩니다.
누구를 위한 자유 발휘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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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제야...
이상한 2006-08-23 11:11:49, 조회 : 128, 추천 : 1
이제야 이 목사님의 깊으신 "진의"를 조금은 알 듯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