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장22절 우리 중 하나 같이 / 엘로힘] 2006-07-25
[창세기3장22절 우리 중 하나 같이 / 엘로힘] 2006-07-25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모르는 부분이 있어 질문합니다.
정수태 2006-07-25 19:06:05, 조회 : 185, 추천 : 4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세기3장22절에서
1. 선악을 아는 일을-죄를- 인간이 몰라야 한다고 이근호목사님이 설교하셨는데 아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가요?(창세기강해-선악과 부분에서)
예를 들어 딱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고 했다면 따 먹는 것이 죄인줄은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금하는 명령이란 죄를 정해놓은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아담도 죄가 무엇인지는 아는 것이 아닙니까?
2.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에서 하나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요? 여기서 하나란 도대체 누굴가리키는 겁니까?
3. 우리와 같이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하나라고 말한 의미가 무엇인지요?
4. 엘로힘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엘로힘과 여호와의 언약적 계시관계가 어떻게 되는지 설명해주새요.
하나 하나 상세히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re] 모르는 부분이 있어 질문합니다.
이근호 2006-07-25 20:35:32, 조회 : 203, 추천 : 6
>구약 성경은 전체가 하나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의입니다.
1, 아담에게 있어 선악을 알게 행위한 것이 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행위로 인해 죄의 본질을 보여주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는 오로지 예수님의 행위로 본질을 보여주게 됩니다.
단지 아담은 에수님의 언약 완성의 의의를 보여주는 모형으로 가담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선악을 알지 말아야 하는 것이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의 개인적인 이익을 결부하여 선악과의 본질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선악과의 본질은 장차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행위와 결부시켜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죄란 주님의 행위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악된 행위는 장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새로운 의미 질서에 가담됩니다.
그래서 아담은 죄의 모든 본질을 다 알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
2. 우리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란 곧 하나님께서 스스로 지칭하시면서 표현한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와 같이'나 '우리와 하나됨'이나 같은 뜻입니다.
3. 엘로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호칭하시는 이름입니다.
특히 언약을 말씀하실 때나 성취 과정에는 주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이것은 언약 성취와 ' 여호와'라는 이름이 관련있음을 말해줍니다.
쉽게 말해서
엘로힘 하나님께서 언약 주심과 성취를 하실 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일하신다는 겁니다.
그 증거가
이스라엘 탄생과 인도하심에는 주로 여호와 하나님으로 나타내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
감사드리며...
정수태 2006-07-27 16:19:03, 조회 : 137, 추천 : 1
쉽고 상새한 답변에 감사를 드립니다.
목사님의 그러한 언약적 죄론을 잘 설명한 책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정수태올림
=========================================================================
[re] 감사드리며...
이근호 2006-07-27 16:28:36, 조회 : 195, 추천 : 6
>현재로서는 '교회를 넘어서' 밖에는 추천할 책이 없군요.
더 쉬운 것은 '죽은 세상 산 성도'입니다.
##############################################################################################
이스마엘이 받은 복과 관련하여...
김대영 2006-07-28 10:53:35, 조회 : 211, 추천 : 3
목사님! 창17:20에서 이스마엘에게 복을 주어 생육이 중다하여... 라고 나오는데 궁극적으로 이스마엘은 이삭을 대적하는 자로 언약에서 십자가의 원수라인을 타고 있는데 왜 복을 받았다고 하는것인지 가르침 바랍니다. 항상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
[re] 이스마엘이 받은 복과 관련하여...
이근호 2006-07-28 16:01:55, 조회 : 251, 추천 : 2
>구약에서의 복은 팽창되는 모습을 말합니다.
이스마엘은 언약을 위해 팽창되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 못박아 죽이는 자들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해야만하고
엘리야를 선지자를 체포하기 위해 이세벨 왕비가 실질적으로 권세를 휘둘려야 하는 겁니다.
그 복의 질에 대해서는 오직 언약의 혜택에 입은 사람에게만 알려집니다.
=========================================================================
[re] 이스마엘이 받은 복과 관련하여...
김대영 2006-08-09 18:45:21, 조회 : 141, 추천 : 2
목사님, 그렇다면 굳이 '복'이란 단어를 쓰지 않아도 되는것 아닙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한가지인데 왜 '복'이란 말을 쓰는건지 궁금합니다.
=========================================================================
[re] 이스마엘이 받은 복과 관련하여...
이근호 2006-08-09 21:09:28, 조회 : 162, 추천 : 3
>성경의 단어는 하나님만이 쓰시는 단어가 아니라
도리어 인간들이 쓰는 단어와 개념을 하나님께서 공격하고 정죄하는 차원에서 개입됩니다.
=========================================================================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김대영 2006-08-12 12:09:31, 조회 : 77, 추천 : 0
아.. 알겠습니다.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
인간의 존재성을 정죄하는 언약
이상한 2006-07-30 21:06:10, 조회 : 229, 추천 : 1
가끔씩 심심하면 듣는 게 이근호님의 설교입니다. 한 때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서 들었지만, 요즘엔 여러 가지 사정 상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나는 대로 틈틈이 심심하면 이근호님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이근호님의 설교를 듣다 보면, 받게 되는 "강렬한 인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이 설교자라면, 인간의 공로가 드러나는 방식의 설교는 하지 않겠다는 것과 한국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공로주의에 대해서는 지독할 정도로 확실히 경계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이근호님은 철저하게 윤리와 행위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껏 윤리와 행위를 반박하시는 이근호님의 설교를 들어 보았을 때,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르게 됩니다. 이근호님이 그토록 윤리와 행위를 반박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전에 이근호님과 토론한 경험을 통해 생각해 보게 될 때... 이런 추론을 해 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추론입니다.)
이근호님께서는 "언약은 인간의 존재의 기반을 공격(또는 정죄)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고 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그 이유는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죄인인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들이 있는데,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은 그러한 (죄인인) 인간의 존재의 기반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저의 추론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오래 전의 토론에 대한 기억을 토대로 추론하는 것이라...)
언약은 인간의 존재의 기반을 정죄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있는 것들 중에는 개혁신학을 비롯한 모든 신학, 윤리의식, 선행 등등... 죄인인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하나님이 긍정할 만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즉 "(죄인인) 인간의 자아와 행위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들입니다. 이것은 특히, 근대의 주체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약은 인간의 존재성(즉, 인간의 자아와 행위, 그리고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산물)을 정죄하며 우발적으로 주어지게 됩니다. 인간이 도무지 예상치 못한 상황 가운데, 우발적인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발적인 은혜, 이것은 시간의 연장선 상에서 사는 인간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건 속에서 만나는 진리(=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우발적으로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제가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요? 저의 추론이라...)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렸듯이, 이근호님의 설교를 자주 듣다 보면, 인간의 윤리와 행위를 공격하시는 것을 자주 대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윤리와 행위가 윤리의 공로성, 행위의 공로성을 지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요? 즉, "윤리와 행위 = 윤리와 행위의 공로성"을 지향하는 것이 타락한 (죄인인)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인가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윤리와 행위의 공로성, 또는 공로의식을 토대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시도로 보기 때문일까요? 즉, 이근호님께서,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이 아닌 (거짓) 성화를 "인간의 자기 형상 회복하기"로 이해하신 것처럼... 윤리와 행위의 공로성을 토대로 구원에 이르겠다는 그 의식은 결국 "인간의 자기 형상 회복하기" 이며,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의식과 의지의 발현인가요?
"죄인인 인간이 지향하는 윤리와 행위 = 윤리와 행위의 공로성"이라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제 질문에 대해 꼭 이근호님이 아니라도 십자가 마을에 속해 계신 회원 분들 중 누구든지 답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물론, 이근호님이 시간을 내어 답변해 주시면 더욱 감사하고요.)
좋은 답변 기대하며, 그럼 수고하세요. ^^*
=========================================================================
[re] 인간의 존재성을 정죄하는 언약
이근호 2006-07-30 22:04:24, 조회 : 207, 추천 : 2
>인간은
항상 자신의 본질을 외부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신을 언급하지만 그 신이라는 것도 자신을 모델로 삼아 만들어낸 '신'이기에
세월 따라 성격이 늘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이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적 의미에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 모든 것은
그저 자신의 성질 발산에 불과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십자가의 피에만 의미를 두는 자와 만난다는 것은
여전히 주님이 살아계시다는 증거가 되고 성도에게는 감격스러운 순간이 됩니다.
##############################################################################################
수고하십니다.
최명규 2006-08-02 11:06:30, 조회 : 271, 추천 : 4
엡 4:9에 땅 아랫곳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죽으신 후 사흘간 예수님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
[re] 수고하십니다.
이근호 2006-08-02 18:17:51, 조회 : 248, 추천 : 4
그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는 죽음의 세계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흘 동안
무덤 속에 죽은 채로 계셨습니다.
같은 말로서
죽은 자의 세계에 계셨습니다.
##############################################################################################
모르는 것이 있어 또 질문합니다.
정수태 2006-08-11 17:42:34, 조회 : 172, 추천 : 1
요한복음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 파송하시면서 후 부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 보면 오순절 날 성령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성령받은 시기가 40일 정도 차이 나는데 왜 이런 차이가 납니까?
그럼 제자들은 언제 성령을 받은 것입니까?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이 다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주세요.
=========================================================================
[re] 모르는 것이 있어 또 질문합니다.
이근호 2006-08-13 15:59:15, 조회 : 162, 추천 : 1
>제자들을 위하여 성령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깨서 계속 하실 일 때문에
성령께서 제자들을 이용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심은 제자들의 존재를 감안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지속성에 초점이 모아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의 '성령받으라'라는 말씀의 취지는
제자들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성도들은 예수님과 '하나됨'의 관계에 놓여 있음을 알려주기 위하여 '성령 받으라'라고 하신 겁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그런데
사도행전에서의 성령주어짐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에 (종말) 새로운 방식으로 ( 종말에나 등장될 말씀 완성태로서) 일하심이 개시되었음을 알리는 징표입니다.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요엘 2:28-31)
이라는 이 선지자의 말씀은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부어주심으로 인하여
이제는
성취상태에 돌입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종말이다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구원될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새로운 방식의 구원방식으로 인하여 (인간의 성령 활용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구원되고야 만다는 것을 선언하는 징조로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해서
종말에는
제자들은 성령에 의해 철저하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종말적 활약상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 말입니다.
##############################################################################################
다시 질문드립니다.
정수태 2006-08-18 16:41:08, 조회 : 107, 추천 : 0
다른 각도로 저의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제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1)
종말은 예수님이 오셨을때 부터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언약성취 이후인 성령 부어주심이었을 때 부터인지요?
2) 보통 복음주의자들이 예수님 공생애를 옛언약과 새언약의 중첩의 기간이라고 하는데 타당한 말인지요?
옛언약과 새언약의 중첩의 기간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설명되는지요?
3) 그렇다면 성령의 사역이 예수님 공생애때와 승천하신 이후 어떤 부분에 동일성이 있는 것이고 어떤 부분에
대하여 동일 선상이 없는 것인지요?
4) 공생애 기간 중에도 부활하신 이후와 부활하시기 전의 성령의 사역은 다른가요?
5) 왜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 곧장 승천하시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지상에서 시간을 오랫동안 보내셔야 했나요?
일부 성경학자들은 가르침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예를 들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는 점을 들면서-이것은 타당한 주장입니까?
6) 예수의 공생애 기간중의 제자들과 성령의 관계와 승천 이후의 제자들과 성령의 관계는 다른 것인지요?
* 질문이 많아 죄송합니다. 어쩌면 동일한 질문을 제가 다른 말로 한 것 같군요. 귀찮으시겠지만 상세히 답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re] 다시 질문드립니다.
이근호 2006-08-18 20:13:26, 조회 : 111, 추천 : 0
예수님의 하신 일의 취지는
인간 세계의 시간 인식 순서에 의해서 정립되지 않습니다.
즉
"이것 다음에 이것 하시고 이것 다음에 저것 하시고..."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은은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인식 하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하신 일들이
인간들의 이해틀로서 해석이 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여기에는
십자가 사건의 특창성이 빠져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들의 이러한 인식의 틀까지 용인해주지 않고 파괴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합니다.
즉
인간들은 주님의 일을 이해가능한 지식으로 정립하여 소지하고 싶어합니다. (물론 자기 만의 지식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
인간부정의 취지가 사라지고 인간긍정으로 마당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이 벌리신 모든 일은(십자가-부활-승천-성령오심 뿐만아니라 출애굽, 여리고성 함락 등등)
아직 인간들이 깨닫지 못한 죄를 인간 대신 끄집어내기 위한 작업입니다.
십자가의 대속(=대리 죽음)이란 인간의 자기 파악을 전적으로 인정해주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서려있습니다.
인간들이 회개한답시고 떠벌리는 종교판도 실은 자기 죄를 아는 마당이 아니라 자기 죄를 가리는 마당입니다.
이러한
자기 죄를 가리는 마당에 예외없이 등장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자기 이해'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기 이해'를 분석해보면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들을 자기 이해력에 대한 부정없이 정리정돈된 내용들입니다.
쉽게 말해서
야구에서 피처가 던지는 공을 캣처가 공만 받으면 되고 꼭 공을 받을 때마다
"나는 결코 당신의 공을 받을 능력자가 못됩니다"라는 고백을 되풀이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투수로 보고 자신을 포수로 본다면 투수는 포기가 이해가 가능하고 납득이 가능하는 식으로 공을 던질 것이라고 포수가 일방적으로 생각할게 뻔합니다.
이 상황은 십자가 사건의 의의가 빠져 있는 상황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미처 인간들이 본인도 모르고 있는 죄의 일반성과 보편성(개별적인 입장에서 숨겨진 어릴 적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죄의 권세를 의미함) 을 파내기 위한 개입입니다.
제자들이 시범적으로 예수님에게 당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나 오순절의 12제자들의 집단들이나 모두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여전히 자기 긍정을 기본 바탕으로하고 그 위에 예수님의 업적이 자기에게 덧입혀지기를 원했던 자들입니다.
지난 번 답변에서 제가 말하는 '하나됨'은 이런 배경을 해서 언급한 겁니다.
즉
제자들이나 인간들이
예수님과 자기 과의 '하나됨'을
인간들 자기쪽으로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식의 '하나됨'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일방적 죄성의 발로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해놓으신 '하나됨'이란 예수님 쪽으로 자기 사람들을 끌어당기되 그들은 늘 죽이는 식으로 자기 안에 두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성령님'이 오셔야 가능한 상황입니다.
종말이란
예수님께서 구상한 상황이 실제로 적용되는 와중에서 더이상 '시간적 지연'이 불 필요해져 버린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서 1:2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활동을 개시한 그 상황입니다.
이 '상황'을 자꾸만 '시점'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는 여전히
인간들의 본성적인 순서적 인식틀을 망가트리고 싶지 않겠다는 본능적 반발에 해당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됨 영적 공간성, 그 외부가 다 종말입니다.
이 종말상태에서는
소위 교회에서 가르치는 직분에 있다고 자인하는 자들이
남들에게(교인들에게)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수립해서 그 가능성 자체를 상품으로 확보해 주려는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일하심을 증거하고 고백하는 식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에게 나오는 가능성이란 예수님께서 인정해 준 적도 없고,
또한
십자가를 거쳐서 나오게 된 성령의 사역 앞에서 십자가 의의과 결별된 새로운 가능성을 정립하는 것도 용납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성도들이 성령님 자체의 능력을 증거하라고 임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십자가 공로만 드높이라고 일하시는 겁니다.
##############################################################################################
공력과 상급에 대해
김성수 2006-08-19 02:56:22, 조회 : 120, 추천 : 0
목사님 고린도 전세 3장이 여전히 제겐 숙제입니다.
너무나 많은 주석집에서 성도의 상급을 논하고 있습니다.
목사님이 보시는 고린도 전저 3장의 '불가운에서 얻는 구원'의 의미와 '상급'의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
[re] 공력과 상급에 대해
이근호 2006-08-19 08:54:55, 조회 : 160, 추천 : 2
상급에 탐을 내는 사람에게는 상급의 의미조차 모르고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천국 밖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이 몰고 오신 천국은
이 지상에 사는 모든 정신과 정반대되는 정신만이 허락되는 세상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섬김'에서 '주님 섬김'으로 전환되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 전환과 변환의 과정이
성도을 통해서 외부로 퍼지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성도는 철저하게 불신자들보다 더욱 자신의 죄성의 깊이를 절감하게 됩니다.
주의 말씀이 그 사람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성도에게는 천국 이 전의 의식과 이 후의 의식이 모두 함유되어 있습니다.
즉
행함이 없이는 상도 없다는 이 지상 세계의 의식과
주님의 행하심이 따로 있어 천국의 상이란 그 분의 행함으로 주어진다는 천국의 의식이 함께 공유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자기 의식'은 죄가 되고 상급도 없고 도리어 천국의 참된 상급을 공격하는 태도를 드러내게 됩니다.
잠언 16:3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사람이 제비를 뽑았다고해서 그 공로의 원인이 제비를 뽑은 사람에게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천국 세계의 원칙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은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면 구원되느냐가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이 되레 인간이 흔히 공력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탈취해가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이라는 겁니다.
건축물, 금속, 나무, 풀, 불 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즉 자기 것이 불타고 무너지지 않은 과정이 없이는 구원이 성사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인간들은 오로지 자기 행함의 원칙에 얶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상이란 오로지 주님의 공로로만 생기는 것이라는 것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이 말씀이 지닌 거룩의 능력이 활발하게 작용하는 곳이
곧
성전= 거룩한 성도의 몸이 된다는 사도 바울의 설명입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 3:17)
결론적으로 말씀드려서
스스로 구원받겠다는 자들은
천국 세계에 여전히 못들어온 자들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 자들이 곧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
[re] 공력과 상급에 대해
손무성 (Homepage) 2006-08-19 20:45:24, 조회 : 119, 추천 : 1
고전 3:12-14절
12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개역한글)
12 누가 이 터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13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 날은 불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14 어떤 사람이 3)지은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삯을 받을 것이요, 또는 '세워 놓은 일'
15 어떤 사람의 4)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위의 두 성경을 비교해 보십시오.
참고하시고.
바울은 터가 뭐냐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11 이 닦아 둔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3:9-11)
그렇다면 공력이 불에 태워 질 때 남느냐 하는 것에 대해 바울은 이야기 합니다. 공력 금,은,보석,나무,풀,짚으로 집었을 때 불이 그것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바울파, 게바파, 아볼로파'..에 대한 싸움이 벌어진 상황에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자기와 그의 일행들이 하나님의 동역자(일꾼-하나님의)로서 하나님의 집과 밭(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위에 다 계속 그리스도 예수로 하나님 집, 하나님의 밭을 작품으로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느닷없이 파벌싸움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기초로 시작하였다가 왜 엉뚱하게도 육체로-바울이라는 인간, 게바라는 인간, 아볼로라는 인간-이것을 금,은 ,보석,나무,풀로 표현- 으로 도배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날에' 모두 공력을 확인하게 될 때 태워져 소멸될 것이라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하셨습니다.로 채워지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은 없다.-천국 들어갈 자들은 이 고백으로만 채워져 있다)
차등적인 상급이나 상급이 있다는것을 강조하는 바가 아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이런 공력으로 채워놓은 작품 중에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 있으면(그대로 있으면) ‘상급이 있다, 없다’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다지면 아무 소용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기초로 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집과 밭과 같은 교회(그리스도의 몸)위에 어찌 육체로 그 위에 다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조점이다.
그 날은 공력테스트 할 것인데... ‘누구파, 누구파-인간의 육적 공력 아무리 집어 넣어봤자 아무 소용없이 다 타 버리는데 - 그리스도의 몸이 이런 ’파벌로- 육체로‘ 쌓아서야 되겠느냐- 조심하라- 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고집스럽게 밀어 붙인다면 마치 벌거벗은 모습으로 구원된 것 같다는 말이다. - 이것은 은유지 실제로 팬티 바람으로 구원된다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
공력과 상급에 대해 김성수 2006-08-19 02:56:22, 조회 : 121, 추천 : 0
아래 1758 번 질문에 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김성수 2006-08-20 00:09:03, 조회 : 97, 추천 : 0
아주 잘 알았습니다. 손무성 목사님과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의 의미는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두분의 답변의 말미가 조금 혼란 스럽습니다. 손무성 목사님의 답변과 비교해서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을 제가 이렇게 이해해도 되나요?
우리 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거기에 어떤 육체적인 공로도 보탤 수가 없습니다.
구원은 오히려 우리의 공로를 불태워 탈취해 감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지은 우리의 집을 불로 태우실 때 그 공로가 다 타 버리는 자가 진짜 구원을 받은자요 복된자이고, 그 것을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이라고 이해하면 됩니까?
그렇다면 공력이 남아있는 자가 삯을 받게 된다"보상을 받는다"라는 14절의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죄송합니다. 너무 초보적인 질문들이라 ...
=========================================================================
[re] 아래 1758 번 질문에 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근호 2006-08-20 08:27:05, 조회 : 107, 추천 : 1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성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세례'라고도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주님의 '주'의 입장에서
성도는 그의 '백성'의 자리에 놓이게 되는데
이런 관계를 가지고 '하나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18에 보면, 사도 바울이 받은 상이란 놀랍게도
아무런 대가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권리 자체를 두고 말합니다.
즉 주를 위하여 복음 전하다가 죽게 되는 것이 아무나에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음' 자체가 주님과의 관계, 즉 상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 상의 상다움을 위하여 지금도 성도는 성령님에 의해서 자기 공로가 탈취당하는 관계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
[re] 아래 1758 번 질문에 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김성수 2006-08-20 08:49:12, 조회 : 96, 추천 : 0
목사님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불 가운데서 얻은 구원을
박영선 목사님의 말씀처럼 팬티만 입고 겨우 받는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해석을 하면 안 되는 것이지요?
그 것만 해결 되었으면 되었습니다.
=========================================================================
[re] 아래 1758 번 질문에 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근호 2006-08-20 16:10:58, 조회 : 99, 추천 : 2
>누구나 팬티마저 벗긴채 구원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옷으로 덧입채 구원받습니다.(갈 3:27)
=========================================================================
[re] 아래 1758 번 질문에 대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김성수 2006-08-21 01:06:36, 조회 : 87, 추천 : 0
아하, 명쾌하게 이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목사님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