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에 대해서...] 2006-07-19
[사도신경에 대해서...] 2006-07-19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사도신경에 대해서...
지복직관 2006-07-19 02:20:10, 조회 : 108, 추천 : 4
<사도신경에 대한 궁금함>
1.사도신경에 대해서 칼빈은 4구분으로, 루터는 3구분으로 보았다고 들었습니다. 이 목사님께선 사도신경을 몇 구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여기십니까?
2.사도신경의 모체가 되는 신경은 고대로마신경(주후 150년경으로 추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사도신경은 서방교회의 대표적 신경(5세기 말엽에 확립, 8~9세기 경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이라고 하며, 동방교회가 받아들이는 유일한 신경은 니케아 신경(대략, 4세기 경)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3.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사도신경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고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고 보는 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봐야 옳습니까?
4.제가 보기에 "사도신경을 통해 나타난 주된 교리"는 "삼위일체론적 신론"과 "기독론", "성령론", 그리고 "교회론"과 "구원론"이 주된 골격인 듯 보입니다. 기독론에선 비하-승귀의 교리가 제시되어 있고, 성령론에 대해선 특별한 것이 없고 단지, 성령을 믿는다는 고백이 전부이네요. 이렇게 볼 수 있다면, 사도신경을 오늘날도 고백한다는 것은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그리고 성령론 및 교회론과 구원론이 중요한 교회의 교리라는 의미가 아닐런지요? 그렇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늘날의 교회가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도 사도신경에 나타난 주된 교리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면, 여전히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성령론 그리고 교회론 및 구원론은 중요한 교리인 듯 보입니다만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도신경에 나타난 주된 교리들이 이단분별의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즉, 삼위일체론과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및 구원론의 주요 교리들이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이단분별의 기준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각 론에 대한 세부적인 사항에 대한 궁금함은 앞으로 차차 질문 드릴 예정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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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도신경에 대해서...
이근호 2006-07-19 16:46:33, 조회 : 113, 추천 : 2
우선
예수님께서 '신경' 혹은 '신조'라는 것을 만들어내었을까요? 예수님에게는 그런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구원이란
인간들이 단체로 하나의 신조 아래서 궐기 대회 연다고해서 제공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님에게 있어 구원이란
자신의 영을 주셔서 그 영으로 인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케 하게 하는 자에게만 한정됩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새삼스럽게
교회라는 것을 조직해서
자기네들 끼리 입장을 천명하노라고 하늘을 향해 맹세해도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의 정치적 활동을 권장하거나 독려하거나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이 유행되었다는 말은
이미 교회가 인간들의 정치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으로 구원이 확정되는 장치로서 '교회'라는 이름의 조직체가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성만찬, 세례식, 예배 전문 진행자들,
이런 자들이 설쳐댄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머리가 예수님에서 인간들로 넘겨졌다는 말이 됩니다.
사도 신경을 그대로 외운다고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도 아니요
사도 신경을 모른다고해서 하나님깨서 지옥보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교회가 사람 장사하기 위한
기본적인 상품성을 제공하기 위한 수완으로
주님이 주신적도 없는 권위를 스스로 생산하고 양산하고 오고 있습니다.
칼빈의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것이
민중들의 종교적 욕구에 호응해주고 부응해줘야지만 계속 존재할 힘을 집약시킬 수 있기 때문입나다.
이것은 여타의 모든 사회 단체 생리와 같은 원리로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 종이 아니라"(갈 1: 10)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것이나 세례식이나 성만찬이 비복음적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비록 그런 것을 정기적으로 반복하는 이유가,
교회로 교회답게 하기 위함이라면
그런 행위 자체가 이단입니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기 위한 행위는 일체 인간에게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여전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존재, 그 자체가 미흡함이 없이 충분합니다.
그동안 교회 역사에서 종요시한 삼위일체나 교회론이나 구원론이나 그 외 조직 신학같은 것들이
여전히
교회를 사람들을 구원시켜주는 특별 단체로 정당화하는데 활용되는 것이면 그것이 곧 스스로 이단임을 자인하는 겁니다.
이들의 결정으로 인해
지금도 예수님의 참된 종들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길에 접어들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의 완성시기'라는 것이 뚜렷하게 정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역사 이해하기'와 '역사 읽기' 란 어느 시대에 사느갸에 따라 더욱 더 중요시되고 혹은 무시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이란
그 자체로 중요시된 적이 없으며
그 역사를 거론하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치적 인식과 상황에서 '역사 운운'이 얼마나 큰 권력을 자기네들에게 안겨 주느냐에 따라 이용가치가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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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유익은?
지복직관 2006-07-19 17:25:44, 조회 : 83, 추천 : 0
여전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의 존재, 그 자체가 미흡함이 없이 충분합니다.
좋은 답변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또 의문이 생깁니다. 흔히,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이라는 이름으로 고백하곤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으로만 충분하겠지요. 그런데, 질문드리고 싶은 것은, 그렇다면 도대체 사도신경을 예배 중에 고백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미 말씀 드린 것처럼 구원 받기 위한 조건으로 사도신경 고백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함으로 얻게 되는 유익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실, 구원 받기 위한 조건이라면 그것은 인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일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인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성삼위하나님"의 사역이 아니겠습니까?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사도신경과 기독교 강요를 말씀 드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고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칼빈도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주는 유익과 가치가 있는 것이기에 사도신경과 그러한 고전들이 읽혀지는 것이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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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유익은?
이근호 2006-07-19 18:33:18, 조회 : 135, 추천 : 1
>인간들의 행위란 (예배 행위도 포함) 유익을 생각해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 가운데 유익을 찾아 나서는 방식을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간에게 유익되고자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축구를 하는 가운데 보다 유익되는 방향으로 오프사이드 규칙도 새로 수정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전쟁통에 돌입했다하면
축구 경기를 잠시 멈추는 것이 인간에게 유익이 되다가
휴전하면 축구 경기를 다시 하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행위가
과거의 바탕없이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만약에
옛날부터
사도신경이 없이 예배가 처음 진행되었더라면
사도 신경이 과연 유익하냐 마냐에 대한 논의조차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배 순서에서 묵도 다음에 춤추기 같은 순서는 옛부터 도입되지 않았기에 예배시간에 과연 춤추는 것이 교회에 유익되느냐 마느냐 혹은 '춤추는 순서는 빼버리자'라는 주장도 거론조차 안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왕에 들어가 있기에 꼭 뺄 필요가 있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산물입니다.
새로움이란 과거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반성의 바탕 위에 도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주요한 사상을 공통적으로 한목소리로 고백하는 것이 반드시 해서는 안될 일인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예배 중에라도 사도신경 고백을 중지해야 합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남의 나라로 파견 근무하고 있는 첩보원들이 모여서 공개적으로 신앙고백을 낭독하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그 외에는 구태어 과거를 억압할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새로운 요건을 첨가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즉
사도신경을 라틴어로 외워서 한다든지, 한 사람이 대신 하고 나머지는 아멘으로 화답한다든지 하는 요령같은 것은 쓸데없이
예배를 기계화시킬 요인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후대에 그 시대에 유익이 된다고 판단되면 가미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관심둘 필요가 없는 것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삼가해야 될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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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예배 시에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유익은?
지복직관 2006-07-20 00:20:24, 조회 : 87, 추천 : 1
네, "인간의 행위"에 대해서 생각해 볼 만한 중요한 교훈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도신경을 무조건 찬성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듯, 무조건 반대하는 것만도 능사는 아니라는 교훈으로 받아들여도 될런지 모르겠네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것이니... 이 십자가 마을을 통해서 유익한 교제가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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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철학과 율법폐기론
지복직관 2006-07-20 00:35:15, 조회 : 114, 추천 : 3
포스트 모던의 시대이기에 사람들이 형식을 탈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만, 형식과 제도를 탈피하려고 하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가령, 설교자들 가운데서도 기독교가 도덕철학으로 전락할 까 염려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사는 것은 윤리나,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물론, 일면 타당한 지적이기도 한 듯 보여집니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들이 경계하는 것은 기독교가 도덕철학으로 전락할까 우려하는 것이며, 율법주의적인 기독교, 공로주의적 기독교를 경계하는 것이지만, 자꾸만 율법의 제 3용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에 대한 강조는 사라진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즉, 기독교가 율법주의화, 도덕철학화 될 것을 경계한 나머지 다른 극단에 빠져, 율법폐기론으로 치우치게 된다는 느낌입니다.
물론, 기독교가 율법주의화, 공로주의화 되는 것은 분명 비성경적임에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단순한 일반 윤리의식, 선행을 강조하는 것... 이런 것들이 아니라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인들 중에서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그러한 제자훈련과 자기 위주의 노력들이 마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전부인 양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그들에게선, 성령을 의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철저한 훈련으로 제자가 된다는 것이 그들의 구호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율법주의적 기독교의 한 단면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또 다른 한 편에선 율법무용론, 율법폐기론이 거론되어지기도 합니다. 도덕철학을 너무 경계한 나무지 다른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은 아닐까요?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은 강조되어야 마땅하다고 저는 그렇게 여깁니다. 성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나 "능동적인 성도의 반응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전적인 사역"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은 도덕철학을 경계하는 한편, 율법무용론 내지 율법폐기론도 함께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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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도덕철학과 율법폐기론
이근호 2006-07-20 09:00:50, 조회 : 155, 추천 : 3
규범 윤리가 거론된 것은
이미 규범 윤리를 바쳐주던 교회 윤리로 부터 사람들이 눈길을 돌려버린 후의 일입니다.
쉬운 예를 들자면,
시골에서 대대로 양반집 자제분으로서 양육받던 젊은 도령이 서울의 개화된 곳으로 취직되어 홀로 상경하고 난 뒤에는
철저하게 재벌 회사에서 요구하는 직장 윤리의 복종하며 살아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양반집 가풍이 일종의 교회가 요구하는 윤리와 같은 겁니다.
중세 때만 해도
윤리라는 것조차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성화나 윤리는 개인의 행동에 의해서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지정해 놓은 일년 스케줄에 의해서 진행되었던 겁니다.
따라서
개인이 스스로 규범을 정해놓고 그 규범대로 실천하고 지켜 나가는 그 모양새 자체가 중세 교회로봐서도 영 바른 뜻이 아닐 뿐더러 성경적으로 봐서도 주님의 요구하고 바와 전혀 상관없는 모습입니다.
즉
이미 주체자가 자아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된다는 것 자체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도의 성화의 삶 하고는 별개입니다. 왜냐하면 근대 주체 의식 자체를 성경에서는 용납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거기에 예수님이 동행하시지만 두 제자는 대화하면서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떡 때면서 눈을 열게 하니 비로소 예수님과 자신들이 동행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 관계가 거룩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말하는 성화의 삶이라는 것은
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요구하는 개별자 주체, 즉 개별적인 노동이 그 개인의 가치를 결정하는 그런 틀에 맞추어 나가기 위한 윤리요 그것은 곧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으로서의 윤리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과 동행함에 그 동행함을 증거하는 그런 성화의 삶이 아니라
돈이 흐르는 노선에 자신을 투입시켜서
남들에게 착하고 성실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가치로 인해 돈이 손에 쥘 수 있는데 힘이 되는 윤리를 의미합니다.
마치
대재벌 회사의 사원으로 취직한 양반집 자제분이 자신의 바쁜 회사 일을 제쳐두고
고향의 큰 제사 드리기 위해 뻔질나게 고향을 찾아갈 수 없듯이
오로지 자신의 가치는 본인이 알아서 챙겨주어야
소위 '착하다', '거룩하다'라는 평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정받게 되는 그런 관계 틀 속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늘 사건과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의(義)에 대한 증인보다는 자신만이 성실도에 의해서 따로 축적하고 챙겨놓은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내놓기 위해서
자기가 기어이 지킬 수 있는 구절들을 따로 뽑아놓고서
그것을 규범화 하기 위한 성경 해석에 돌입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을 날마다 죽이라는 말씀보다는
온유하고 화평한 것이 성령의 열매에 신자답다는 말씀에 더 관심을 갖고 그것으로 규범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를 나타내게 됩니다.
곧
자신 행위의 정당화를 추구하는 겁니다.
이런 자본주의 사회에는 주체화된 근대 교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아는 설교자는 오로지 십자가 피를 가지고
그들의 죄인됨을 파헤쳐서
진정 주님이 원하시는 뜻은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사랑에 있음에 알려서 늘 자신을 부인하게 해야 합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자유가 있다'는 까불대는 자와
"나는 십자가 피 앞에서 늘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하고는 완전히 극대 극입니다.
한국 교회가 성화에 필요한 규범을 안 가르쳐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그런 것을 가르쳐서 자기 교회를 십자가 복음 앞에서 부인하지 않는다는게 문제입니다.
즉
자기 교회의 정당성을 감히 십자가 피 앞에서 포기 못하는 것이 한국 교회를 이단으로 치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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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경계함인가요?
지복직관 2006-07-20 10:38:47, 조회 : 95, 추천 : 3
근대주체의식을 말씀하시고, 성화가 행위의 정당화를 위한 것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으로 들립니다. 자기부인과 성화가 대립적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지만, 목사님의 마음도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인간행위의 정당화를 철저히 말살시켜야 그리스도가 드러난다고 생각하시는 것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근대주체의식을 말씀하시니, 문득 데카르트가 생각나는군요. 아마도 목사님께선 현 개혁신학에서 규범윤리를 말하는 것이나 성화를 통해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 인간의 자아의식은 자연신학으로 나아갈 경향이 있음을 경계하시는 것으로 사료됩니다.
한 때, 바르트와 브룬너의 신학논쟁이 있었고, 그 때 바르트는 브룬너가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긍정한다고 생각하여, "Nein!"라는 말로 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바르트는 브룬너와 화해하였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그러한 바르트를 "새로운 바르트"라고 했다지요.) 아마도 목사님께서 개혁신학을 바라보시는 눈길이 그러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현 개혁신학을 바라볼 때, 그렇게 바라보시지 않겠냐"고 반문하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개혁신학이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긍정한다고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자연인의 인간본성에서 말미암는 자아의식과 행위를 철저히 말살시키고 죽여야만, 좁은 길을 걷는 성도의 삶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현 개혁신학을 데가르트적 신학에서 발생된 산물로 보시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현재 교회의 모습이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교회"라고 질타하시는군요. 물론, "인간본성에서 말미암는 행위의 정당화"을 경계하는 것이라면, 저도 충분히 공감이 됩니다. 허나, 제가 우려하는 것은 인간이 자아의식을 갖는 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목사님의 주장에서 동양철학적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것입니다.
존 스토트는 그의 저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에서 "하나님의 의지와 성도의 의지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동양의 신비주의 철학에서는 신의 의지에 인간의 의지가 흡수되는 것으로 이해한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책을 남에게 빌려주고 책이 없어 제 머리에 있는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있으니, 정확한 인용이 아니더라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그 의미에 있어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범신론적 경향에선 하나님과 인간의 구별이 사라진다는 것을 목사님께서도 이미 아실 것입니다. 이렇듯, 동양의 신비주의와 범신론적 세계관적인 분위기가 목사님의 글에서 나타나기에 정작, 목사님께서 그토록 부정하고자 하는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의 정당함"에 대해 한 편으론, 공감이 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론, 경계하게 되는 면이 있음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현 교회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개혁신학에 충실했다기 보다는 도리어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드러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개혁신학에 문제가 전혀 없다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실상이 한국교회가 "오순절파적인 번영신학"의 영향 아래 있는 것이 자본주의와 맞아 떨어지게 한 요인이지, 개혁주의 성화론과 자본주의를 연결시킨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봅니다. 도리어 개혁주의 성화론을 알게 되면, 성령님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고, 자기부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저 역시도 "인간행위의 정당성을 경계"하지만, 인간존재와 행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즉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부정함이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인간의 행위, 공로주의적인 인간의 행위를 부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가령. 로마교의 사제주의적인 발상을 들 수 있지요. 만일, 그렇지 않고 인간을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부정하기 시작한다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를 부정하다가 동양의 범신론적 사고에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저의 우려 입니다. 혹, 저의 말로 인해 마음이 상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저는 목사님의 생각이 동양철학적이고 범신론적이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를 부정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부정하되, 또 다른 극단으로 빠져들 수 있는 위험도 경계해야 하지 않느냐는 측면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오해한 사람들이 율법을 한편으로는 "율법주의적"으로 이해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율법폐기론"으로 나아갔던 것은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주장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와 잘 맞아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이 자본주의 사회와 잘 맞아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런 말씀 드린다고 해서 제가 번영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일까요?
인간이 죄인인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며, 현 교회가 자본주의 사회 내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부패하였음은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경계합니다. 그러나, 그 요인이 성화론에서 말미암는 것일까요? 그 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하다면,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중세를 말씀하셨는데, 아마도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의 성화론이 성경적 성화론이었던가요? 그것은 로마교의 사제주의적 성화론이었습니다. 즉, 율법주의적, 공로주의적 성화론이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중세의 성화론을 자기부인을 모르고 인간행위의 정당성을 꾀하기 위한 시도요, 살아남기 위한 자기노력이라고 지탄하셨다면, 그것은 어쩌면 잘 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겠습니다. 로마교의 사제주의는 그만큼 공로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에서 말미암는 것을 마치 개혁신학의 성화론에 문제가 있어서 그러한 것인 양 말씀하심은 가당치 않습니다. 오히려, 현 교회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번영신학이 팽배하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아의식과 인간본성으로 말미암는 행위를 철저히 말살시키시려는 목사님의 시도로 알고, 이쯤에서 글을 맺으려 합니다. 바르트가 말년에 브룬너를 인정했다는 것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없는 것일까요?
저 역시도, 자기부인의 길을 걷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화의 길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의 의지와 능력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성삼위하나님의 구원의지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생각을 더욱 솔직히 나누며, 서로를 조금이나마 더욱 알 수 있기를... 토론이 무익한 논쟁으로 끝맺지 않고 유익한 교제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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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경계함인가요?
이근호 2006-07-20 17:29:44, 조회 : 94, 추천 : 1
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경계함이 아니라
신학 자체의 가능성을 지적하는 겁니다.
신학은 반드시 신학 하는 본인의 가능성으로 되돌아오게 합니다.
그러다보면
십자가 복음을 가로막는 자가 다름아닌 본인임이 들통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이러한 딜레마는 철학에서 다루어져 왔습니다.
(지금의 동양철학이란 서양철학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서 진정한 동양철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철학, 혹은 신학을 펼치려고 하니
두 가지 문제가 해결 나지 않은 겁니다.
하나는 시간 문제요 하나는 공간 문제입니다.
개혁주의신학을 비롯해서 모든 신학은 시간 문제에 대해서 난감한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즉 미래를 향해 계속 열린 신학을 전개하겠노라고 선언하고 보니, 현재의 신학이 상대적으로 미흡한 것으로 자인한 셈이 되어 버려서 믿을게 못되는 신학을 쥐고 하염없이 미래로 미루고 넘겨버리는 무책임한 신학이 되어 버린 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껏 믿는다는 것이 고작
"앞으로 갈수록 더욱 더 완전에 가까운 신학이 전개될 것입니다"라는 것을 믿어야 될 판이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서 모든 신학의 문제점은 공간문제입니다.
타인의 의견을 계속 참작해야 하는 신학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참고로 해야 할 신학인지 말아야 할 신학인지를 본인이 일방적으로 사전 겸열한다는 점에서 타인을 참작하는 신학이 아니라 일방적인 독선적 신학 성향을 삽입하는 식으로 견지해야 한다는 모숩을 띤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가린다는 것을 사람들은 외면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은
신학 자체가
자신의 그동안의 노동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려면 모든 신학을 포기하고 십자가 피의 증인으로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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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 자체의 가능성을 지적하신 것이라면...
지복직관 2006-07-20 18:42:50, 조회 : 74, 추천 : 1
저는 개혁신학이 그렇게 무책임한 신학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칭의와 성화가 대립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만, 이러한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것은 그렇게 생산적일 것 같지가 않다는 생각입니다. 단지, 제 질문에 대해 신학 자체의 가능성을 지적하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된다면... 부정되어야 할 것이 한 둘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종교도, 윤리도, 선행도, 신학도, 시간도... 이렇게 하다 보면, 모든 것이 끝다 없이 부정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인간의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겨냥하려는 시도라고 보여집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겨냥하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주라고 고백하는 삶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보시는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성화론을 죽여야만 그리스도가 주로 고백되어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이것은 제쳐두고라도.)
만일, 신학과 종교와 윤리와 선행, 시간... 이 모든 것들을 부정하신다면, 혹자는 반문하기를 이 모든 것들이 폐기되어야 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아마도 일반적인 자연인이 묻게 되는 습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때, 제 추론에 의하면 목사님이 하실 수 있는 대답은 두 가지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이 모든 것(인간의 자기 행위의 정당성)이 부정되고 예수만이 드러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요. 또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가 드러나시는 데 있어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과거를 억압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놔두는 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도 두 번째 답변이 목사님이 선택하실 수 있는 가까운 답변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과연 그러한지요?
(제가 언변이 부족함으로 질문을 어렵게 해서 죄송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예를 들어 표현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행하심만으로 충분하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반문하기를...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햏함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하느냐고 질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이 사람은 가만히 있는 행위를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자연인의 본성상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반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에 사도신경을 통해 몇 가지 질문을 들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질문드렸습니다.
그 때, 목사님께선 예수님이 사도신경을 만들었느냐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위의 경우와 비슷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필요없는 것입니까? 유익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목사님께선, "굳이 과거를 억압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아마도, 제가 신학도, 윤리도, 선행도, 종교도, 시간도.... 이 모든 것들이 부정되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게 된다면, 똑 같은 대답이 반복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드러나시는 데 있어서 굳이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라면 굳이 과거를 억압할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실 듯 합니다.
제가 지금 말 장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기서, 제기될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를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논리가 전개되다 보면, 인간이 적극성을 띄고 하는 모든 것들은 정죄될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적극성이나 능동성은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적극성이나 능동성이 사라져야 한다고 보시는 것이라면, 거기에도 인간의 주체의식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고 또 다시 근대주체의식을 들어 답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결국 성도는 적극적으로 문화를 즐기는 것도 버려야 하고, 신학이나 기타 학문도 버려야 하고, 종교도 버려야 하고... 사실, 버린다는 표현 보다는 소극적으로만 접근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즉, 성도에게 있어서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반응이 기대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의 적극적이거나, 능동적인 반응은 아마도 근대의 주체의식이 살아 있기 때문이니, 버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은 심하게는 자아의식을 버리고, 그 자아의식에서 나오는 모든 산물들, 신학이나 여타 학문-교육학, 경제학, 정치학, 종교학, ... 비롯하여, 종교, 윤리, 선행, 기타 등등에 있어, 성도는 버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그렇다면, 신앙이 삶의 전체를 통하여 표현되어야 한다고 볼 때, 설령, 진실로 성령께서 간섭하여 성도를 통해 일하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적극성을 띠거나 능동성을 띠게 된다면, 그 모든 것은 성령으로 위장한 인간의 주체 의식이 살아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나요?
즉, 이 모든 적극성, 능동성을 띈 반응들은 "인간주체의식의 발로"라고 보아야 한다면, 성령께서 하시는 일과 인간이 근대의 주체 의식을 가지고 하는 일들이 어떻게 구분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행위의 정당성을 정죄한다고 하는 것이 결국에는 "모호함"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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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학 자체의 가능성을 지적하신 것이라면...
이근호 2006-07-20 21:36:52, 조회 : 78, 추천 : 2
우리 인간이 자신의 행함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부정하고 버리는 쪽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말씀 성취자 부류에 우리 인간들을 넣어주지 않기로 언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는 일까지도 자신의 선한 행함으로 되돌아오는 본성을 보여주지만
성령님은 그런 순환 고리 속까지 개입하셔서 그 안에서
인간은 뭘해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고
예수님만은 계속해서 언약 완성자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로서
성도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일까지 성령의 몫으로 돌릴 수 밖에 없는 현실에 노출됩니다.
추가적으로 말씀드려서,
지금은 종말의 시대입니다.
종말의 시대에는 심판이 가속되는 시대이며
이 심판은 십자가 복음에 준해서 실시되지
결코
인간의 행위나 마음가짐을 가지고 새삼스럽게 문제 삼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을 실시하느냐 마느냐는
주님께서도 신경쓰지 않는 바입니다.
주님은 오직 자신의 행함이신 복음 완성에 대한 관심사 여부로 지금도 심판을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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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의 가능성을 경계함인가요? 지복직관 2006/07/20 3 96
[re] 몇 가지 느낀 점입니다.
이준 2006-07-20 17:32:44, 조회 : 86, 추천 : 2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저 역시도 "인간행위의 정당성을 경계"하지만, 인간존재와 행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즉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인간을 부정함이 아니라, 율법주의적인 인간의 행위, 공로주의적인 인간의 행위를 부정한다는 의미입니다.
->귀하께서 말씀하신 내용 가운데 '존재론적인 것'과 '공로주의적인 것'을 굳이 구분하시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인간의 실존을 다룸에 있어서 오히려 인간은 전인격적이요, 총체적인 인격체로서의 실존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타당하지 않을까요?
아담 타락 이후의 인간 실존은 존재론적인 부분과 공로주의적인 부분이 분리되지 않고 늘(지독하게) 결합되어 있는 상태, 즉 인간 자아 속에 자기 중심주의, 공로주의 본능이 뿌리 박혀 있는(하나가 되어 있는) 셈인데 말입니다. 인간이 그러하기에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를 통해서 늘 공로주의 본능, 자기 중심 속성이 표출되는데 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을 두고 접근할 때 존재론적인 측면과 공로주의적 측면으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을 듯합니다만.
"죄인"이란, 존재론적인 측면(또는 아래 글에서 귀하의 표현처럼 '자아의식과 행위'로서의 측면)과 공로주의적인 측면(부연하자면 인간 중심 주의, 율법주의에서 비롯되는 것에 대한 귀하 나름대로의 표현)으로 구분(혹은 분리)하여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인간을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부정하기 시작한다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를 부정하다가 동양의 범신론적 사고에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저의 우려 입니다.
->귀하께서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측면에 대한 부정을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에 대한 부정과 동일한 것으로 놓고 있는데요. 위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귀하의 입장처럼 인간 존재론적인 측면, 즉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라는 것이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이라는 실존을 두고 볼 때 '공로주의적인 속성'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있는 그런 성격의 것인지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인간 실존은 존재론적인 부분(자아의식과 행위 측면)과 공로주의적인 부분을 따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 속에는 공로주의적인 것이 늘 녹아 있어 그대로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그동안 접해 온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 속에는, 인간의 존재론적인 측면(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에서 끊임 없이 공로주의적, 자기 중심적인 것들이 흘러나오기에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새기며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자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압니다. 반면, 제가 그동안 접해 본 동양사상 어디에서도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 공로가 "자기 공로와 자기 중심성이 끊임 없이 줄줄 흘러나오는" 인간의 자아의식과 행위를 죽이고 없이 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주장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와 잘 맞아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이 자본주의 사회와 잘 맞아 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정신은 프로테스탄트들의 자본주의 윤리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의 자본주의 윤리에 따른 행동 강령은 자본주의 사회 속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자본주의 사회를 튼튼하게 지탱할 수 있는 버팀목으로서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게 만들었지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굳이 "돈을 좋아하는 속물 근성(에서도 볼 수 있는 인간 죄성)이 자본주의 사회와 잘 맞아 떨어진다"라는 직설적 표현에만 진실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이 죄인인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인간이 죄인이며, 현 교회가 자본주의 사회 내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부패하였음은 저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경계합니다.
->제가 말씀 드린 바가 위와 같을진대, 귀하의 "인간은 죄인이며"라는 표현 속에는 다음 중에 어느 의미가 담겨 있는 지요? 인간의 존재론적 측면, 즉 (귀하의 부연 설명대로 하자면) 인간의 자아 의식과 행위로서 죄인이라는 말인지요(물론 이 입장은 아니겠지요. 존재론적 측면과 공로주의적 측면을 굳이 구분하신 것으로 보아), 아니면 인간은 공로주의적인 측면에서 죄인이라는 말인지요, 아니면, 인간은 존재론적 측면, 즉 자아 의식 및 행위 속에 공로주의적인 본능이 뿌리 깊게 박혀 언제든 줄줄 흘러나오는 그런 실존적이며 총체적인 인격체로서의 의미에서 죄인이란 말인지요?
그러나, 그 요인이 성화론에서 말미암는 것일까요? 그 보다 더욱 근본적으로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하다면,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 자체가 부정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기능은 언제나 성화론의 입장(점진적인 성화)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압니다. 즉, 점진적인 성화 과정에는 반드시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기능과 역할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화론의 입장에서 볼 때 처음에 중생은 믿음으로, 그 이후에 삶의 과정으로서의 성화는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기능과 그에 순응하는 순종의 조화로운 삶이 요구되고...라는 논리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만 구원(롬 1:17 참조)"과 양립되지 않는다고 봅니다만.
논의를 위해 사례의 범위를 좀더 넓혀 보자면,
약 2장의 경우, 성도("형제") 간에 요청되는 삶의 모습으로서의 "행위"들은 언뜻 보기에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이 지니고 있는 윤리, 도덕적인 측면과는 관계가 없는 듯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려 한 것, 라합이 거짓말한 것 등은 누가 봐도 보편적으로 윤리, 도덕적 규범에 어긋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야고보님께서 그 두 가지 사례를 언급하게 된 계기는, 형제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말로만 사랑을 늘어놓는 신자들에게 일침을 가하기 위한 데 있는 것으로 보아, 한편으론 성도들 간에 있어 믿음에서 비롯되는 행위는 윤리, 도덕성을 띠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나 사라에게서와 같이 윤리, 도덕성의 여부와 관계 없는 사례들도 있는 반면, 형제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하는 윤리, 도덕성이 요청되는 사례도 있음으로 보아,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성도의 삶은 율법 폐기론으로 단정지을 수도 없고,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이 성도의 인생을 장악해야만 한다는 식의 율법 기능론적인 표현을 쓰기도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우리 성도들의 삶에 '은혜'와 '교훈'으로 작용하시는 주님의 주체적인 이끄심이 그러한 '은혜'와 '교훈'의 열매들을 우발적으로 표출해 가신다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듯합니다만...
저의 짧은 이해와 소견에 대해 귀하를 비롯해서 목사님과 형제님들의 지적, 고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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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몇 가지 더 느낀 점...
이준 2006-07-21 08:12:11, 조회 : 74, 추천 : 2
인간의 존재론적 측면(인간의 자아 의식과 행위)과, 그와는 별도의 율법주의적, 공로주의적 행위라...
일단 인간이라면 생각하는 것 자체, 행동하는 것 자체는 당연한 것인데 비해, 무슨 생각을 하는가, 어떤 행동을 하는가라는 점이 죄와 관련되어 있다는 말처럼 들린다. 마치,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이며, 죄와 상관없는 것인 양 여겨지지만, 반면 거짓말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는 것 등등의 특정 범죄만이 죄와 상관있는 것인 양 여기는 것이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언뜻 보기에 라면 하나 끓여먹는 행위는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 굳이 거창하게 무슨 학문, 신학, 종교, 윤리, 직업, 문화, 미래 따위를 거론하지 않아도, 평소 길을 걸으며 한발 한발 발걸음을 내딛는 것, 녹차 한 잔 마시는 것...등등, 위의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가 일상사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기는 바, 삶의 사소한 파편들도 분명한 어떤 명제 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그(녀)가 성도라면 말이다.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일종의 장막과도 같아서 성도의 삶 전체 위에 쳐진다(덮여진다, 계 7:15). (그 장막 속에서)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성도들의 일상사가 시간선상에서 직선적으로 펼쳐져나가는 것처럼 보인다(육체를 지닌 인간의 시간 의식에 비춰보면 그렇게 느껴질 따름이다).
그러기에 분명한 것은, 그가 온 종일 가도, 하루 이틀, 한 해 두 해...가 흘러도 누군가에게 이렇다 할 전도, 봉사...못했다 하더라도(물론 이런 것은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를 것이다. 사람을 만나게 해 주시고, 사건이 일어나게 하시고...) 그는 이미 그 장막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이다.
위의 말씀에 비춰보면, 특정 범죄들만 저지르는 게 죄가 아니라, 먹고 마시며 지극히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도 죄이다. 아울러,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라는 말씀까지 미루어 볼 때, 인간 의식이 주체가 되어 산출되는 결과물들로서의 행위에 따라 죄, 죄 아님, 죄인 됨, 죄인 아님...이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죄란, 하나님의 장막 밖에 놓여 있는 운명 자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라면 하나 끓여먹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죄인 셈이다. 인간의 눈에 보기에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죄 아닌 것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위의 말씀 끝부분의 "~하라"라는 표현을 두고서, 믿음을 발판으로 삼아 능력 받아서 이것저것 열심히 행해야되겠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믿으라"고 하셨건만,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듯이, "~하라"고 하셨건만, 제대로 행할 수 있는 이는 애초부터 아무도 없기에 말이다. 위 말씀은 성도의 삶의 모든 국면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명제 하에 놓여 있음을 선언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성도들 위에 쳐졌다는 말씀의 핵심중 일부는, 장막을 치신 분이 인간(성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는 말씀 그 자체에 담겨 있다. 달리 말해, 더이상 삶의 주도권이 성도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인간은 삶을 현상적으로만 접근하기 십상이지만, 그 이면에 하나님께서 이미 삶의 “적극적/소극적, 능동적/피동적인” - 게시판에 질문한 어떤 이의 표현을 끌어오자면 - 부분들을 섭리해 나가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상적으로 어떻게 느끼던 말던 이미 인생의 주도권은 그분께 넘어가 있다는 점을 우리가 시시때때로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는 게 문제다.
학부 때부터 신학을 전공해 오다가 신대원을 중간에 자퇴하고 현재 (당분간) 철가방 배달을 하는 중, 선교 훈련원의 선배 목사로부터 러브콜이 들어오고 있다는 한 친구와 그간 나눈 이야기 끝에, "네가 '그 장막' 안에 놓여 있다면 - 달리 표현해서, 하나님의 언약 속에 놓여 있는, 혹은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사람이라면 - 철가방 배달을 하든, 신대원 복학해서 마저 공부 끝내어 네가 말하는 그 필수적인 ‘증’을 따서 꿈에 그리던 국외 선교사로 나가든 뭐가 문제냐.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네 삶만을 두고 말한다면, 지금 확실히 결정하지 않으면 신대원 시절로부터 어느새 수년이 지난 30대인 지금 그냥 그대로 10년이 더 지나가고 말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 10년이 또 지나가겠지..."라고 말했었다.
그 친구로선, 늘 뭔가 앞날의 진로에 대하여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경험들이 누적되어 왔다. 여러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서 - 교육전도사로 봉사하던 당시 그 교회의 담임 목사의 온갖 처신을 보면서 신학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돈 내고 안수 받는 현행 제도 하에서 목사가 굳이 꼭 되어야만 하는 걸까, 신대원을 그만 두어야 할까, 국외 선교사가 꿈이긴 한데 그리로 부르심이 확실한 걸까...등등을 놓고서 - 막상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뭔가를 결정하려 들 때면, 그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지 아닌지를 확신하지 못한 채 그때그때 제대로 자리매김을 하지 못했던 경험들이 표면적으로 볼 때 늘 그에게 쌓여 왔던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그 친구는 내가 해준 말들에 담긴 생각들을 머리로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처지나 형편은 그동안 달라진 게 없었다. 이렇다 할 결정을 내린 게 여지껏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두고서 사귀던 여자 친구도 ‘비전이 없다’면서 그의 곁을 떠나갔다고 한다.)
인간은 한편으론 늘 자신의 판단과 계산이 내심 서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접촉점이 어디인가를 찾아 헤매는 듯 보인다. 그래야 ‘자신의’ 소신(내지는 소명)도 펼칠 수 있고, 하나님의 뜻도 산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어쨌든, 위에서와 같이 '그 장막'에 덮여진 삶(삶의 주도권이 하나님께로 이양된 삶)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삶도 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 지 그 장막 안에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닌 경우 말이다. 아담 세계에 포함된 모든 유형의 삶이 그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런 인간은 라면 하나 끓여먹어도 지옥 갈 짓을 하고 있는 셈이다. 신학을 해도, 종교를 가져도, 직업 생활을 해도, 문화를 향유해도...그 모든 것들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든, 소극적으로 반응하든 간에 여전히 그 장막 밖에 있는 것이다. 마치, 그 옛날 방주(또는 언약) 밖으로 배제될 운명에 이미 놓여진 삶들처럼 말이다.
노아가 방주로 들어갈 때, 방주 안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신 것들 외에 그 당시 인류가 이룩해 놓은 나머지 것들은 일체 배제되었다. 생명의 문제 앞에서 신학도, 윤리도, 종교도, 직업도, 꿈도, 장래도, 그 어떤 것도 의미를 갖지 못했다. 평소 그 아담의 세계 속에서 인간들은 서로 부대끼며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문화를 적극 향유하기도 하고, 주변들에 대하여 소극적으로 반응하기도 했겠지. 그럼에도, 그들의 운명은 모두 동일했다.
(한편으론...역설적으로, 방주는 그 당시 건조 기술을 이용하여 짓지 않았던가. 이집트의 모든 문화를 뒤로 하고, 광야 생활을 시작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건만, 정작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기본적인 장인 기술은 어디로서 온 것이었을까. 이집트의 그것이 아니었던가. 이런 것들 두고서, "봐라, 하나님께서는 문화를 건전하게 사용하시도록 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하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면서, 문화적 도구들은 중립성을 띤다고 역설하면서 급기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자리까지 나아가는 것이 인간 속에 늘 도사리고 있는 속셈일 것이다. 그러나, 성도라면 같은 사건을 놓고서도 하나님의 관심은 애당초 문화에 있는 게 아니었다는 점을 간파할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 실존을 놓고서 인간에게서 비롯되는 활동성을 분리시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서는 끊임없이 그 내부의 욕망들이 다양한 활동들로 분출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인간 자아의식에서 발현되는 행동들을 대상으로 하나씩 하나씩 죄인 것과 죄 아닌 것들을 분리하고 골라내려는 의식 자체가 이미 인간의 죄인됨을 규정하는 기준이 뒤틀려져 있음을 드러낸다. 만약 어떤 특정한 행위가 죄로 여겨진다면, 어떤 특정한 삶의 방식이 잘못으로 여겨진다면, 그렇지 않은 나머지 행위들이나 방식들은 얼마든지 취사선택하여 마음껏 향유해도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며,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게 인간 아니던가. 이러한 의식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이 아담의 세계를 둘로 가르고 있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이런 의식을 가진 자들은 지금 나는 삶의 실제적인 부분을 말하고자 함인데, 왜 굳이 죄라는 용어를 써서 구원 여부의 문제를 다시 끌어다 개입시키느냐 라고 반문할 지도 모를 일이다. 여전히 ‘죄’의 범위를 모르는 소치에서 나오는 질문이다.
특히, 성화론의 입장에서 보면, 구원은 이미 챙겨놓았다고 주장하면서도, 삶이라는 여정에 대하여 주관하는 뭔가 분명한 규범이 있어야 하고, 또 그 삶의 과정 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살아야 할까요, 아닌가요...라는 식의 논의가 필요함을 역설함으로써, 자신들이 받은 구원의 진정성과 아울러 자신들이 향유하고 있는 삶이 구원으로 이어졌으면 하는 여망을 그때그때 보증해 두고자 하는 욕망이 표출된다고 본다.
위와 같은 내막을 생각해 보건대, 흔히 거론하는 '율법적 사고방식'이란 우리가 평소 제기하는 다양한 의문문들 속에 이미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적 사고방식이 무엇이던가? 흔히들 행함으로 구원받고자 하는 유태인들의 종교적 열심 내지는 그와 유사한 경우가 율법적 사고방식이 아니냐고 일축해 버리고 말지만, 평소 우리가 끊임없이 자문하거나, 또는 주변의 전문가들에게 공개적으로 또는 넌지시 확인받고자 하는 의문점들, 즉, "~는 해야 할까요, ~는 하지 말아야 할까요, ~는 버려도 되나요, ~는 적극적으로 행하면 안 되나요, ~라는 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로 반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는 버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소극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등등에 이미 율법적인 사고방식이 녹아 흐르고 있지 않는가. 그러한 의문형에서는 은혜로부터 받은 그 어떤 자유함도 묻어나지 않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위와 같은 의문형 진술의 주어가 무엇인지 한번만이라도 자문해 본다면...여전히 그것은 “내가”이다. "내가”. 자아의식과 행위의 주체가 바뀌지 않은 채 여전히 자신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아담의 세계 안에서는 이미 선악과 성분(?)의 탓인지,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필요성과 더불어 성화를 말하지만, 실제적 삶 속에서는 어느새 자유함 대신, 즉 영이 아닌 의문(규범, 규정)에 끊임없이 구애받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할까요. ~하지 말까요.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 아닌가요. ~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살면 안 되나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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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부분들
지복직관 2006-07-20 23:01:15, 조회 : 172, 추천 : 4
개혁신학에선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이 분리될 수 없으나 구분은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구속언약은 은혜언약의 기초가 됩니다. 제가 보기엔, 목사님께선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을 혼동한 결과가 언약에 있어서 "인간이 배제"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은 그의 택한 백성들이었다는 것을 지적해 줍니다. 물론, 언약에는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개념을 빼놓을 수 없고,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까지 나아가도록 되어 있으며, 결국 언약의 성취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지적하는 것은 그의 택하신 백성들과 관계하는 것이 언약이라고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바로, "언약의 중심주제"입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글을 대하다 보면, 목사님의 언약에 대한 이해는 "인간이 배제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은 개혁신학에선 "구속언약 또는 평화의 의논"이라고 합니다. 물론, 구속언약에 대해선 성부와 성자 사이의 언약이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신가 하면, 성삼위 하나님 사이의 언약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때, 평화의 의논에는 인간이 참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속언약에 기초한 은혜언약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과 그의 택한 백성 사이에서 언약을 맺게 됩니다.
제가 목사님의 글을 대한 소감의 결론은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을 혼동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속언약과 은혜언약은 분리될 수 없으나 구분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 개념에 대한 혼동이 불러 일으킨 결과는 은혜언약에 있어 일방성과 쌍무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성만이 강조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성령으로 말미암는 성도의 능동적 반응마저도 정죄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게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도의 능동적 반응이 결국엔 능동적 반응이라는 이유로, 또한 능동적이기에 자아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근대주체의식의 발로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앞선 글들 가운데서,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오해를 언급했었습니다. 기억이 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설교자는 율법주의를 경계하되, 또 다른 한 편 율법폐기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님의 글을 대하고 내리게 되는 소감은, 목사님께선 율법주의를 잘 경계하실 수는 있으나, 율법폐기론에 대해선 잘 경계하시기 힘들겠다는 것입니다. 혹, 이러한 저의 글로 인해 저를 율법주의자라고 몰아 세우실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저의 느낀 그대로입니다.
개혁주의 성화론과 율법의 제3용법이 교회를 상업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이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 윤리를 말씀하시는데, 그 프로테스탄트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광범위합니까? 프로테스탄트를 복음주의자들이라고 한다면, 복음주의 안에도 다양한 그룹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교회를 상업화 하는데 기인한 것일까요? 도대체 청교도들의 삶에 대해선 알기나 한 것일까요? 복음주의 안에도 알미니안이 있고, 루터파가 있고, 웨슬리안이 있으며, 개혁주의도 있고...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