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생활과 장사] 2006-04-19
[신앙생활과 장사] 2006-04-19
이름 : 관리자(IP:122.47.52.38)
신앙생활과 장사
채덕준 2006-04-19 13:11:25, 조회 : 230, 추천 : 0
신앙생활을 잘하면(즉, 새벽기도며 기도생활, 헌금, 교회봉사와 기타 사회에서 존경받는 행위 등) 경영하고 있는 사업이 잘되고
그렇지 않으면 사업이 잘 되지 못한다고 성도들간에 나누는 말씀이 있는데
옳은 생각인지요? 그릇되었다면 성경의 어떤 말씀으로 이를 설명할 수 있습니까?
믿는 자에게는 형통한 삶을 주신다고 했는데 혹 , 이런 것이 그와 같은 뜻으로 봐도 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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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앙생활과 장사
이근호 2006-04-19 21:30:07, 조회 : 259, 추천 : 1
요한일서 2:15-16에 보면, "누구든지 이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쫓아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쫓아 온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멸망으로 통하는 넓은 길에 같이 동참하는 작당들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3:1-5에 보면, 이미 성도는 이 땅에서 죽은 자인고 더이상 땅의 것을 생각치 말고 하늘의 것만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만약에 땅의 것에 욕심내면 바로 그것이 '우상숭배'라고 단정짓습니다.
따라서 땅의 형통을 가지고 복받았다고 하는 자들은 지옥에서 죽을 자들입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삼성그룹과 현대그룹들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지옥으로 직통하는 놀이동산(에버랜드)이 등록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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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분별이라는 말이 무슨 말 입니까?
배재인 2006-04-23 08:29:13, 조회 : 163, 추천 : 2
첫째질문: 한국교회 목사들이 이야기 하는 영적분별?
둘째질문: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영적 분별?
셋째질문: 아래 편지 글에서 영적 분별?
작년 인터넷 숭사리 카페에서
누군가 저를 향하여 당시 카페주인에게 뒤로 편지를 보낸 내용이며
당시 편지를 보낸 사람은 현재 숭사리카페 주인 입니다.
현재 숭사리 카페주인은 서울 강동 평신도교회 목사(급)입니다.
(뒤로 보낸 편지 내용)
느보산님, 이것은 영적분별의 문제입니다.
...........
똥은 아무리 미화해도 똥입니다.
.....중략......
영분별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그의 열매입니다.
.......중략.......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온유와 인내와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 등이라고 했습니다.
그에게서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한국교회를 깨부수고자하는 열정?
그것은 안티기독교도들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나와 대영가스 사이의 문제때문만이 아니며,
숭사리가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안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나 대영가스님과 같은 이런 유치한 인신공격이나 독설이 난무한다면
숭사리에 누가 글을 올리려고 하겠으며, 여기서 무엇을 배울수 있겠습니까?
숭사리 형제들을 언제까지 대영가스님의 독주에 취해있게 하렵니까?
독설을 내뿜는다고 다 세례요한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증오를 품고 있는 사람은 결코 선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중략...........
관리마저 대영가스의 궤변에 휘둘리고 있으니 개탄할 노릇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숭사리 사람들이 교회 비난에만 들떠서 영적 분별력이 모두 사라졌나요?
이것은 영적 분별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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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영적분별이라는 말이 무슨 말 입니까?
이근호 2006-04-24 21:15:10, 조회 : 157, 추천 : 4
사도들이 세상과 교회를 어떤 기준점을 통해서 보았느냐 하는 것이 성경에 나와있습니다.
사도들은 주님의 계시적 권위를 가지고 오고 오는 모든 인간들에게 영적인 합당한 기준점을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우리들은 성경에 나오는 그들의 의견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곧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의 일관된 뜻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그 당시 목회자들을 향하여 '사단의 종'이라고 단언한 것은 어디까지 주님의 확정된 뜻을 펼치는 증인으로 행한 것이지 개인적인 결단이나 의지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님의 경우를 보면, 그 분은 성령에 충만해서 설교해놓고서는 그냥 주님의 뜻에 의해 돌에 맞아 죽어버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분의 복음 전달이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예는 다른 사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복음 증거는 그 어떤 효과나 결과를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복음 전달 자체가 곧 성공이었습니다.
여기서 영적 세계의 특징이 나옵니다.
참된 영적인 증거의 특징은
악마에게 이미 사로잡혀 있는 세계에 대하여 이미 완성된 세계의 존재를 알리는 식으로 등장됩니다.
악마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정 영역이나 구역은 이 세상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복음의 증거는 결코 바람직한 영역을 새로 창출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바른 교회가 되어라"가 아니라 "이미 주님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바른 교회가 이런 교회다"라는 식으로 다가서게 되어 있습니다.
새언약의 효력에 대해서 세상에 그 어떤 권세라도 끊을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는 겁니다.
따라서
특정 개인이나 교회를 상대로 공격을 하는 것을 영적인 증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습은 곧 그 특정 교회 바깥에 건전한 교회가 따로 존재함을 은근히 암시하는 바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그 어떤 개인이나 교회도 주님으로부터 계속 지적받지 않아도 좋을만큼 완전한 대상은 없습니다.
'이미 주님에 의해서 사로잡혀 있는 바른 교회'는 예수님의 화묵제물의 능력과 취지를 전하는 그 활동 자체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영적 세계에 속하는 사람의 특징은
특정 개인이나 교회를 파쇄하고자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피의 가치를 증거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피의 능력이 아니라면 모두 마땅히 멸망당해야만 될 이유도 아울러 배경으로 삼아 증거되어야 하는 겁니다.
제가 만일 숭사리 라는 집단에서 복음을 증거하라면 다음과 같이 증거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들이며 천국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숭사리 자체를 절대화할 것이 아니라 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의 모습을 보입시다"라고 말입니다.
영적 분별이란 결국
이미 완성되어서 불심판과 더불어 곧 들이닥치기 위해 대기해 있는 십자가 안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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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영분별과 성령의 열매의 관계성
배재인 2006-04-25 01:07:58, 조회 : 102, 추천 : 1
목사님 윗글 답변에 고마움을 전 합니다.
찾아 뵙지도 못하고 죄송 합니다. 꾸벅^^*
윗글에서 중략(생략)부분 입니다.(평신도목사(급)==>숭사리주인에게)
'영분별 은사가 없는 사람들이 사람을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그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열매로 그를 알라고 하셨습니다."
질문: 성령의 은사와 성령의 열매와의 관계성
1. 은사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 납니까?
2. 은사와 열매는 따로 혹은 분리 입니까?
3. 은사종류 전체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습니까?
4. 열매의 식별은 어떻게 알수 있나요?
5. 성도에게는 은사 혹은 열매가 반드시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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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영분별과 성령의 열매의 관계성
이근호 2006-04-25 06:45:42, 조회 : 167, 추천 : 3
성령님께서는 성령이 임한 사람을 예수님을 위해서 해체시켜 버립니다.
은사를 주시는데
은사는, 그 사람의 모든 인생을 그 사람의 소유로 여기지 못하고 만들고 오로지 '선물'인 점을 알게 합니다.
따라서
은사가 임한 사람은, 타인과의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못하게 하지요.
무슨 선물을 받았든지간에, 선물 주신 분에게 관심을 두게 하시지
타인이 받은 선물과 자아라는 존재와 비교해서 우열을 논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 타인과의 경쟁이라는 것은 성령께서 용납해주지 않습니다.
이 예는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높으냐를 두고 제자들 끼리 논쟁이 될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다
아예 비교 우열이 되지 않는 어린이를 세우시고는,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이와 같이 받들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들어간다"고 단어하신 취지와 같습니다.
즉
관심사가 오직 주님의 나라에게 신경쓰라는 말입니다. (천국이 자기 구원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주님이 세우신 나라'로서의 주님만을 위한 나라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바로 이것을 열매라고 하는데
열매에 대한 적절한 예는 바로 요한복음 15장에 잘 나와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알려주시기를,
포도나무와 열매 사이에다 '가지'를 집어넣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가지'의 '가지됨'은 항상 열매와 포도나무 사이에만 머물러 있을 때만 역할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즉
'포도'라는 열매는 두 말 할 나위없이 원 포도나무 원통에 속한 포도로 드러나게 하지 결코 가지에게 속한 포도로 드러날 수 없게 하겠다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가지'가 나름대로 생각하는 열매를 예수님 본인이 원 포도나무의 원통이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부정하고 거부해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열매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열매'로 인정하는 자는 결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선물로서의'의 가지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만약
성도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반드시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열매는
반드시 성도의 자기 공로성이 늘 부인되는 가운데 예수님의 행하심의 결실로만 증거된다는 겁니다.
총괄적으로 정리하면
빌립보서 2:11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름으로 (성도의 존재도 포함) 주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해서,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방식을 창세 전부터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참된 주님이 선물로서 허락된 성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 앞에 자신의 이름이 날마다 해체되는 그 사람입니다.
이러한 속사정을 아는 것은
존재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즉 '나'라는 주체가 '타인'이라는 존재를 관찰 대상으로 삼아 고정시켜 놓고서 아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 복음을 거부하는 사건을 통해서 (즉 예수님의 공로를 제치고 자아의 고귀한 가치를 내세우는 그런 사건들) 접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신은 참으로 그 발언과 행동은 현재로서 볼 때 지옥갈 불신앙적입니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미래가 그 사람이 운명이 어떻게 될지는 함부로 장담할 수 없지만)
마치
사도 바울이
'양의 탈을 쓴 사단의 종'이라고 규정했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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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한 삶
채덕준 2006-04-23 16:34:04, 조회 : 126, 추천 : 0
목사님 궁금한 내용에 대한 대답에 힘을 얻습니다만
우리 성도는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의 길을 얻었으니
즉, 미래에는 하나님과 함께 복된 삶을 누릴 것이고
이것 역시 형통한 삶의 하나이겠지요
다만 이 땅에서는 생활인으로서 살아야 하기에
물질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잘못된 생각인지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한 삶은 우리의 현실도
포함하는 것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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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형통한 삶
이근호 2006-04-23 17:03:45, 조회 : 196, 추천 : 1
'물질을 기대하며 사는 것이 잘못된 생각'이 아니라
'물질을 기대하며 사는 것만이 잘못된 생각'이 잘못된 삶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물질을 기대하지 않는 그런 고상하고 착한 삶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모든 인간은 물질을 기대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생산하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삶이란
그런 죄인을 인도하시는 주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한 삶이란, 주님의 인도하심 자체로 인해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따로 생각해놓은 '형통한 삶'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시시하게 보면 일이 됩니다.
주님께서 인도하신 삶이 현재의 삶이라는 범사에(모든 일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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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엘사상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김대영 2006-04-27 19:35:28, 조회 : 59, 추천 : 0
목사님 평안하십니까? 항상 성실하게 답변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경을 보다가 출22:21-24의 고엘사상이 걸려서 질문을 드립니다. 구약에서 고엘사상이 결국
출애굽정신의 연속선상에서 언약안에 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신약에 와서 어떻게 하는 것이
1. 구약의 약자는 신약에 와서 누구입니까?
2. 구약에서는 마음과 함께 물질로 약자를 도와야 바른 도움인데, 현 우리시대에 있어서 약자에게 도와야 하는 내용물이 복음입니까 아니면 민중신학에서와 같이 물질도 함
께 도와야 합니까?
3. 교회있으면 노숙인들이 너무 많이 찾아 오는데 돈을 줘야하는것이 성경적인지 안줘도 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물론 줘봐야 정말 아무 도움 안되더라고요. 나가는 돈
도 만만찮고, 소문나면 너도나도 오니 교회에선 돈을 잘 안주는 쪽으로 이미지를 굳히고 있거든요... 그리고 구약에서 이스라엘백성이 이방땅에서 고아와 과부를 돕지 않으
면 그것이 그들의 구원과 직결디는데 현대에도 노숙인에게 돈을 안주는것이 구원과 직결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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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고엘사상과 관련된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04-28 20:32:10, 조회 : 116, 추천 : 0
구약의 언약의 내용이
인간의 행함을 거쳐 신약의 새언약과 연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언약의 내용은
다리가 끊어진 정도에 머물지 않고 그 끊어짐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와 저주가 쏟아져나옵니다.
구약의 언약(후견자 사상=고엘 사상도 포함) 안에는 유일하게 하나님의 뜻을 합당하게 만족시키는 분이 숨어 계십니다.
그 분의 행함을 거쳐 신약의 세언약과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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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김대영 2006-04-27 19:40:00, 조회 : 127, 추천 : 0
밑의 질문이랑 비슷한데요, 성경에서는 형제를 사랑하라 했고 원수도 사랑하라 하였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과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이 그 본질과 나타나는 모양이 어
떻게 다른지 알고 싶습니다. 제가 알기론 형제와는 그리스도안의 사랑과 교제를 나누면 되는것이고, 원수(불신자)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
차원의 사랑을 줘야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부대끼며 살 때 우리가 형제들에게 하는 형식의 사랑(서로 통용하고 사는삶)은 할 필요가 없는 것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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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랑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04-27 20:41:49, 조회 : 164, 추천 : 1
어떤 사랑이든 대상에 따라 내용의 차이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보고 "사랑하라"는 말은
"너 안에 내가 있어?"라는 물음과 같은 질문입니다.
요한 1서 4장에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먼저 성령을 성도에게 보내셔서 성도는 비로소 주님이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또 요한일서 3:15-16에 보면,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곳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해답이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되었든 형제가 되었든 원수가 되었든 사랑할 수 없는 자입니다.
만약 우리 힘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면 성령을 통해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 사랑, 주님 사랑의 몫은
우리 안에 이미 들어와 계시는 주님께서 날마다 우리를 사용하여 완성된 차원 내에서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러한 와중에서 우리 성도는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으로는 주님과 타인을 사랑할 능력이 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오로지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사랑이 펼쳐지는 양상이 됩니다.
주님의 사랑요구 앞에서 '나'라는 주체는 연속적으로 허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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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랑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김대영 2006-04-27 20:44:59, 조회 : 107, 추천 : 1
그럼, 주님의 사랑이 덮친 사람은 이방인도 형제와 동일하게 사랑하는가요?(성령안에서 나타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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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랑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04-28 06:47:41, 조회 : 156, 추천 : 1
제가 답변하기를
사랑이란
예수님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노아 언약에 의해서 주님의 은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구분없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데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왜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가를 보여주는 양상이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왜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랑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양상이 됩니다.
(이점이 중요한데, 어떤 인간이든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랑은 오로지 십자가 안에만 담겨 제시되는데,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인간이 자기 자신의 그 모든 심성을 죄악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결심, 혹은 자신의 지적, 감정적, 의지적 마음 행위로 예수님 받아들이기 믿기'마저 죄악으로 간주해야 된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수긍하기 곤란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불가능한 일까지 용서의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이 예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결국 성도는 순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능력으로만 사랑이 전달되었음을 최종 레벨 안에서 늘 증언하게 됩나다.)
"모든 사람을 강퍅-순종치 않음-케 하신 것은 오로지 긍휼하심으로만 구원시키기 위함이다."(로마서 11:31-32)
아무튼
어느 경우든 다 예수님이 창세 전부터 계획하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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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랑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김대영 2006-04-28 12:32:38, 조회 : 118, 추천 : 0
목사님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갑니다. 제가 질문의 포인트를 잘 못 잡은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사랑의 차원이 아니라 남을 그리스도인으로써 남을 돕는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가르침 바랍니다. 목사님이 예전에 쓰셨던 글 "약자보호법이 현대목회에 미치는영향"을 읽어 봤는데 그것과 관련하여서도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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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랑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6-04-28 17:19:37, 조회 : 145, 추천 : 1
성도, 본인의 결정으로 타인을 도와준다는 것은 전혀 성경하고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미 자신의 몸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진 돈도 자기 돈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에
'남을 도와줌'과 '아니 도와줌'의 차이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남을 도와주지 않더라도 주님께서 남을 도와주는데 촛점을 맞추어 준비태세를 갖추게 하시기에 그것도 넓게 봐서 남들에게 유익이 되는 존재로 만들어 나가시는 겁니다.
마치 기업에서 생산라인에 직접 투입되지 않는 직업 훈련생들도 이미 생산라인에 참여되도록 연관되어 있는 신분과 같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타인의 도와줌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성도에게 있어 초점은 하나님께 영광이지 타인의 도와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짓는, 비록 타인을 도와주는 경우라도 항상 벌어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사랑 앞에서 자기 부인이 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타인을 도와주는 그 행위를 통해서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짓을 되풀이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십자가 복음에만 관심이 없는 교회에서 벌리는 모든 행사(성만찬, 세례식, 예배, 전도집회, 성경외우기, 새벽기도회 및 금요 철야회, 이웃 구제 등등)가 십자가 영광을 훼방하는 마귀짓이 된다는 말입니다.
세째로 , 타인을 도와주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 그 일을 통해서 성도는 평생을 통해 얼마나 '자기 소유와 자기 의로움에 집착하고 축적하고 하고 있는가'를 절감케 하시는 방편으로 주님께서 활동에 나섭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베드로전서 4:10-11입니다.
"누구든지 봉사하거든 주님께서 힘을 제공하시는 그 절차에 준해서 이루어짐을 고백해서 오로지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의 자기 사랑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증거됩니다. (사도행전 3:12)
끝으로
구약의 약자는. 신약에서는 성도입니다. 그들만 오로지 주님의 긍휼없이는 못사는 죄인이며 이 땅에서 고아와 과부며 나그네입니다. (마태복음 25:3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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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정치
채덕준 2006-04-27 23:16:43, 조회 : 122, 추천 : 0
신앙과 삶이 부딪치는 부분에 대한 목사님의 지적에 많은 도움을 얻고 있습니다.
최근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모든 교회가 그렇겠지만 후보자들이 교회를 방문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문제를 두고 신앙의 지기들 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신앙이 좋은 사람이 선출되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고 또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얘길 하곤 하는데
신앙인이 선출되면 얻게 되는 교회의 이득(예를 들어 교회의 도로 사정이 개선되는 것 등) 에 대해 먼저 생각하고
있는 듯 해 뜻의 본질이 왜곡된 듯 합니다.
즉, 교회가 사회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것에 관점을 두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고가 잘못인 것 같지만 저의 이런 생각 역시 잘못일 수 있다고 봅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과연 믿음의 형제들이 최대한 이 땅의 정치 판도를 주름 잡을 만큼 많이 선출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것이라 보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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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신앙과 정치
이근호 2006-04-28 06:56:59, 조회 : 162, 추천 : 0
민주주의 제도 하에서의 정치형태는,
대의정치입니다.
주권이 군주에서 일반 대중으로 전환되고 난 뒤에
권력의 구심점을 찾아내고자 하는 방식이 바로 '다수결'에 의한 대의정치(정당에 의한 의회제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있듯이 인간들은 좁은 길보다 넓은 길 가기를 선호합니다.
인간들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것은 백이면 백
자기 실존을 멈춤이 없이 보존하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제도'라는 정치 형태보다 먼저 오늘날의 인민들의 신체를 지배하는 제도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형식입니다.
따라서
자본, 즉 돈이 없이는 인간들은 자기 실존을 보존할 수 없고,
돈을 보다 많이 소유할 수 있는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본주의 분위기 안에서는 재산이 없는 사람은 아예 존재 자체가 없는 자라고 (죽은 자) 취급받기 때문입니다.
있어도 있으나마나 하는 존재자입니다.
이것은
신앙적 표상이나 윤리적 감각들이 일단 돈 감각에 밀리거나 협상의 대상이 될 뿐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어떤 신앙심을 갖고, 어떤 선함과 덕성을 가질 때, 가장 돈이 많이 들어오겠는가"라는 식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태를 보면,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적절합니다.
"가아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즉
세상이란 이래사나 저래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배척받아 운명하실 수 밖에 없는 그 탐욕 덩어리를 표출하는 세상입니다.
"윗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치 말라(골로새서 3:2)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반드시 어느 한 쪽을 위하여 어느 한 쪽을 미워하게 되어 있느니라"(누가복음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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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의 직분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신영식 2006-04-30 01:26:44, 조회 : 280, 추천 : 3
저의 어머니는 시골의 작은교회에 개척을 하고 계십니다.
이야기중 목사의 직분에 관해 충돌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말씀의 요점은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자 특별한 기름부음으로 쓰시는 성도와는 다른존재이며
계시록중에 일곱촛대와 그뜻을 같이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리고 교회의 머리가 목사이며 그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꼭 첫번째가 목사여야 함이라고 말하시더군요
주의 종임을 특히 강조하신다는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모세의 존재와 같다는 말도있었습니다.
맘이 너무 답답합니다..
위의 이야기들이 비슷하게 느껴질뿐 본뜻과 다른것이 아닌지요..
자세한 오류들을 말씀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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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목사의 직분을 어떻게 봐야할까요..?
이근호 2006-04-30 08:27:56, 조회 : 339, 추천 : 3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나름대로
정신적인 안정성을 갖고 싶어합니다.
특히 중요한 사항은 눈에 보이는 안전성을 취득하기를 원합니다.
뭔가 손에 잡혀야 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니다"고 했고 (로마서 8:24)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증거일 때 비로소 믿음"(히브리서 11:1-2)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부터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반 대중들의 우상적인 종교심성과의 충돌이 일어납니다.
즉
손에 잡히는 구체화 대상으로 자기 구원이 보장될 때만 정신에 안정성을 얻을 수 있다고 대중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마치 바람같은 성령의 활동이 사건과 사건으로써만 다가오는데 그것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사건인가 하면
바로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구체적 대상으로서의 구원 장치와 제도'를 박살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귀하의 어머니께서는 기존의 교회의 가르침과 자신의 정신이 일치되었다는 점에 정서적 안정성을 확보해 오신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일치하느냐 하면
특정 인간에게 소위 '거룩한 직분'이라는 목사직은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인정해주는 조건 하에
그런 조건을 인정해주었다는 본인도 같은 조건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계약대로 자기 구원을 확보하고 보장받으려는데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문제은 바로 '소유 정신'에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제도와 조직체를 '소유'의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신적 안정감을 도모한 것입니다.
소위 복음 안다는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자기 소유용으로 여긴다면 도리어 복음을 훼방하는 편에 서 있는 것이 됩니다.
복음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새언약의 내용 증명을 위해 본인이 소모용으로 부름받은 자가 참된 성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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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표시
채덕준 2006-05-02 21:17:25, 조회 : 264, 추천 : 1
1. " 구원은 인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요 예수님이 지배하고, 통치하는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이 잃어버리고 할 입장이 아예 서 있지 못합니다. "
목사님께서 예전에 답하셨던 구원과 관련된 답변입니다.
제가 아는 동료 중 한 분이 예전에 신앙의 외형으로 볼 때 너무나 신앙적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물론 셰례도 받았지요
그런데 어떤 변화로 인해 불교로 개종했는데 이젠 불교에 너무 심취해 후덕한 보살의 모습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교회에서 초신자들을 가르치는(너무도 부족하지만)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구원은 일회적으로 한 번의 구원은 결코 번복될 수 없다라고 가르칩니다.
개종한 제 동료를 두고 보면 지금 이렇게 불신앙의 삶을 살고 있으니
현재는 구원 받지 못한 인생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만약 언젠가 또 마음의 변화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 지 확인할 수는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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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구원의 표시
이근호 2006-05-03 07:37:45, 조회 : 300, 추천 : 2
인간은 처음부터 보살입니다.
누구나 보살입니다.
그 분은 자신의 본색이 드러난 겁니다.
따라서 여전히 복음 전달에 대상이 됩니다.
길에 다니는 일반인들처럼 말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다니든 절에 다니든 늘 일반인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평소에 저는 설교를 시작할 때에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이라도
늘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이라고 간주하고
복음의 기초부터 출발을 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보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다니고, 세례 받고, 절에 갔다가, 다시 교회 오고 이러한 모양새는 의미없습니다.
성도란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께서 직접 그 사람을 복음 사건으로 친히 인도하시는 대상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지 아니하시는지는
복음의 말씀 안에서 교제하는 가운데 느껴집니다.
그 십자가의 공로를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피의 능력의 완전성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그 복음 증거이 바탕이 되는 성경 계시의 완벽성과 창세 전의 예정하심을 훼손하는 태도를 보인다면 여전히 구원 여부에 대해서 유보해야 될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교회에서, 절로, 다시 회개하고 교회로, 또다시 절에 관심이 있어 보살로, 그러하다 다시 신학교 가서 목사로, 그러다가, 워치만 니에 빠졌다가, 다시 천주교로, 그러다가 다시 무당이 되었다가 다시 그 어떤 종교를 안 갖다가 .. 뭐, 이런 식으로 살아도 여전히 그 사람의 장래에 대해서는 제 3자가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단 다음과 같은 사도 바울과 같은 견해는 혼자 말로 밝힐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된 사람이군 흠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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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표시
채덕준 2006-05-03 12:05:47, 조회 : 297, 추천 : 1
질문을 띄우곤 금시 궁금해 집니다.
목사님께서 어떤 답변을 주실지 말입니다.
역시 신속하게 답변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목사님께서 말씀 하시는 바는 제게
좋은 지침이 되고 있어 흡족하긴 하지만
현재 대부분의 교회에서 구원에 대한 교육을
'세례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했으니
구원 받았다.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더라도
결코 구원은 변질되지 않는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함과 동시에
영원히 변질되지 않으니 확고하게 믿으라 고
얘길했는데 이런 교육이 목사님의 답변과 상치되는지
죄송하지만 다시 짚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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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구원의 표시
이근호 2006-05-03 15:51:55, 조회 : 378, 추천 : 4
상치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해서
'행함으로서의 믿음'과
'믿음에서의 믿음' 두 종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믿음에서 나온 믿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수립된 예수님 자기 공로로서 열매인 '믿음'을 성령을 통해 받게 됩니다.
인간은 그 때부터 '자기 행힘에서 나오는 믿음'을 부정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인간이 자력으로 구성해 낼 수 있는 '행함으로서의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님을 참된 예수로 알게 됩니다.
욕망이란 결코 자아의 가치와 대단함과 위대함을 포기하지 않게 합니다.
따라서
욕망을 채워주는 예수는 악마가 소개한 우상스러운 예수, 거짓 예수가 되고 맙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주시는 선물로서 믿음은 십자가 앞에서 도리어 '자신의 죄악성'이 들추어지는 열매로 비쳐나오게 됩니다.
십자가 앞에서의 자기 부인의 반복입니다. 이렇게 되면 타인과의 비교가 아니라 십자가 지신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늘 서게 만들므로서
나의 나됨이 모두 주님의 은혜임을 알게 됩니다.
나에게 복을 달라고 요구할 의로움이란 애초에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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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동이 되어서요...
김규범 2006-05-08 12:14:03, 조회 : 232, 추천 : 0
1.갈5:16을 근거로 성령의 소리(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생각합니다.)가 있는 줄 믿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음성과 양심의 소리를 어떻게 구분하면 됩니까?
성령의 소리가 양심의 소리는 아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에게도 양심의 소리가 있기때문입니다.
2. 순복과 순종의 차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먼저 순복과 순종의 정의를 부탁합니다.
목사님에 순복해야합니까? 순종해야합니까? 남편의 권위에 순복해야합니까? 순종해야합니까?
3.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의 단어가 나오다 여호와란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과 여호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왜 이런 구분을 갖고서 성경을 기록했나요?
바쁘실텐데 답변을 기다립니다. 죄송하지만 목사님 개인 e-mail 알 수 있나요?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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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혼동이 되어서요...
이근호 2006-05-08 17:25:56, 조회 : 226, 추천 : 3
제 메일주소는
knowcross@hanmail.net/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고
양심은 인간에게 속한 품성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케 합니다.
그런데 불신자들의 양심은,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기 용도로 쓰입니다.
2. 순복과 순종과는 차이가 없습니다.
목사한테 순복하라고 하는 목사도 이단이지만 목사한테 순복하는 교인도 이단입니다.
성도라면 오직 복음에만 순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도 엄연히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목사같으면 그 내용에만 순복해야 하고 또한 그 목사가 언제까지 계속 복음이 나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복음이 나오지도 않는데 불구하고 목사한테 순종하는 교인은 이단입니다.
3. 여호와란 언약을 앞장세우고 실행에 옮기기 위해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다른 이방민족의 신의 이름과 구별되기 위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름과의 구별되게 거룩하신 분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안 바쁩니다.
좋은 질문 많이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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