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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37. 요담 왕 (역대하 27:1-7)성경역대하

37. 요담 왕 (역대하 27:1-7)

이름 : 우리교회(IP:122.47.52.38)

37. 요담 왕 (역대하 27:1-7)

대하 27:1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대하 27:2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대하 27:3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대하 27:4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대하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대하 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 졌더라
대하 27:7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성경 초반 창세기 3장에부터 하나님은 죽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담보고 "너는 죽어서 흙이 된다"고 했습니다. 창세기 5장에서도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연속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긴 수명을 누린다해도 이것으로 끝납니다. 따라서 성경을 펼치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너도 살아남아야 되지 않겠는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축복이다"라는 취지로 다가옵니다. 물론 성경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도 않지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라고 되어있습니다. 성경은 처음에 "너는 죽어!"라는 말씀을 하시다가 중간을 쭉 거쳐오면서 "너만은 살아야 돼"라는 취지로 하나님이 다가오시다가 마지막에 가면 "결국 너만은 살았구나 나머지는 죽었구나"로 표현합니다. 마치 무인도에 떨어진 사람에게 하늘의 헬리콥터에서 성경책 하나 뚝 떨어 뜨려주는 상황과 같은 겁니다. "성경보고 살자!"라는 이런 절박한 심정으로 성경을 봐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온통 안일하다보니 은행에 잔고가 많고 재산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생각하면 "나도 이 정도만 해도 산다고 말해도 되잖아"라는 태도로 "하나님이 나에게 그렇게 절박한 존재라고 여겨지지 아니한다. 예수가 왜 나에게 꼭 필요한 분인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보아라 예수 없이 사는 가정들조차 저녁마다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고 화기애애하고 행복이 넘치고 온갖 주위 사람의 부러움을 사지 아니한가.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 우리도 또한 이러한 풍조에 휩쓸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성경은 한결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렸더니만 좋게 살았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시시하게 여겼더니만 엄청나게 망했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 어떤 자들이 예수님이 다가왔을 때 반갑게 맞이했겠습니까? 배부른 자들이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의로운 자들이겠습니까? 아니면 그러면 도덕적인 자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세리와 창기들이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소경들이 예수님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다급하게 찾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절박성입니다. 취미로 교회 다닌다든지,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를 다닌다든지, 혹은 지금의 나를 좀 더 향상되는 쪽으로 변신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의 고상한 말씀이나 배워서 실천에 옮겨 볼까 라는 이런 마음가짐이라면 이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절박치 않습니다. 집에서 부모님에게 가정 교육만 잘 받아도 세상에서 사람 대우받습니다. 된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세리이다. 나는 창녀이다"라는 의식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또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사람들이 너를 칭찬하면 도리어 화가 있을 것이다. 배부른 자여. 너희들이 받을 위로는 더 이상 없다. 따라서 배부른 자는 너희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절박성이 없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제공하신다는 그 복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납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예수님으로 자기 몸을 들이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절박성이 있는 사람이 이런 각오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 눈알 빼자. 그래 오른손 하나 톱으로 자르지 뭐. 그것 하나 없어도 지옥 불 들어가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말입니다. "어쨌든 간에 예수님 믿고 살아야겠다"는 절박감이 있어야 합니다. 자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기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어떤 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제대로 살았다'라는 내용을 대하면서 우리는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가 있을까요? "그래, 시간이 남아돌아 처지를 못해서 심심하니까 성경을 많이 봤겠지 뭐. 왕이 되어서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이왕 좋은 게 좋다고 말씀대로 살아 복이나 받자 했겠지 뭐"라는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대해 잘못 접근하고 있는 겁니다. 6절에 보니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 졌더라"라는 말씀이나 또 2절에 보니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라고 되어 있는데 바로 이 말씀을 대할 때에 "그것 정도야 나도 하겠다"라고 우리가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금 요담 왕이 뭐가 부족합니까? 왕인데 말입니다. 아니, 선배 왕들은 왕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저주받은 왕들은 왕 아닙니까? 왕이라고 해서 자동적으로 시간이 남아돌아서 "심심한데 말씀이나 지킬까"라는 식으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위치에 있던, 어떤 환경에 있던, 마음가짐 자체가 심령이 가난하게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절박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항상 솟아오르게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의 취지는 이렇습니다. 요담 왕이 정도를 행했더니만 하나님이 나라를 강성하게 해주었다는 아주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자... 이러니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너희들은 어떻게 할래 라고 묻고 계십니다. "아이구 요새 많이 바빠서. 이상하게 일이 밀리네요."라고 변명합니다. 그렇다면 안 바쁘고 일이 안 밀린다면 어떻게 살려고 하십니까? 이럴 때는 꼭 이렇게 변명하지요. "요새 돈이 좀 재촉되네요. 우선 돈부터 벌어놓고…"라는 궁색한 변명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아담이 타락한 것이 에덴동산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죄를 지었습니까? 문제는 절박성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말씀의 절박함이 없어 안일에 빠져 그렇게 타락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정도를 행했다'고 되어 있는데 도대체 정도가 무엇입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봤을 때 정도라는 겁니까? 이것을 한 번 살펴봅시다.

일반 사회에서 정도라는 것은 주로 옆 사람이나 어떤 인간을 내세우면서 정도를 규정하려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그것을 원천적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비교 할 걸 비교하지 어떻게 같은 인간끼리 하냐 고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저나 나나 똑같은데 어떻게 비교가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나는 40일 금식 기도했다"라고 나오는데 인도에 한 번 가보세요. 그 정도 기간은 오래했다는 축에도 못 듭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연속적으로 40일 새벽기도회 나오기 해서 부흥되었는데 우리 교회는 뭐 하노" 하고 비교하는데 왜 딴 교회하고 비교합니까? "그러면 목사님, 사람하고 비교하라 하시면 그러면 비교할 대상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시겠지만 잠언 8:22-2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런 말씀에 보면, 이 세상이 창조 될 때에 모델이 되는 어떤 어르신네를 이미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 어르신네를 모델로 해서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겁니다. 쭉 더 나아가서 32절에 보면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35-36절에 보면, "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러나 나를 잃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생명나무를 따먹었습니까 못 따먹었습니까? 못 따먹은 것입니다. 따먹을 자격조차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나무와 분리되어 버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생명나무는 어떤 어르신네의 원형을 위하여 에덴동산에 심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무서운 말이 나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라는 겁니다. 자 이 본문에 나오는 말씀, "생명이 없느니라"가 무슨 말입니까? 어떤 사람이 돈을 수천 억을 벌어드렸다 할지라도 그것이 영생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목사가 5만 명을 목회 한다 할지라도 그 5만 명 목회하고 영생 얻는 것하고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하는데 사흘 밤낮으로 기도해도 그 기도하고 영생하고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영생은 모든 것이 '나' 즉 잠언 8:32에 나오는 그 '나'하고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창조가 바로 이 '나'라는 어르신네로부터 출발했지 다른 어떤 피조물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위가 주체가 우리 인간들이 자기를 지칭하는 '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행위는 '생명나무나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창조 전에 이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라고 외칠 수 밖에 없는 어떤 분이 이미 계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그 분을 쳐다 볼 때만 영생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행동 할거냐를 포기하고 그 분에 쪼르르 쫓아가서 그 분 품안으로 고목 나무 쓰러지듯이 기대버려야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잠언 8장에서는 "나는 얻는 자는 생명을 얻는다"라고 하신 겁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내가 제시한 도를 네가 인정하느냐"하는 말씀이 됩니다.

인간들이 흔히 하는 종교 생활은 이런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 가만히 계세요, 제가 열심히 해서 주님에게 다가가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자기를 훈련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훈련의 모델이 누구입니까? 그 모델이라는 것이 기껏 결국 인간들이 열심히 행하기만 하면 달성할 수 있는 그 목표점을 미리 점유한 그 어떤 인간에 머물고 말지요. 바리새인들이 그런 짓 한 사람들입니다. "믿으려면 나처럼 믿어야 된다"고 동네방네 선전하고 다닌 자들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건강한 자를 위함이 아니다. 또한 알아서 건강해 지려고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나는 죄인을 불러서 그냥 영생 주겠다"는 겁니다. 내가 잘나서 그래서 구원을 얻는 방식은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대로 옛 부대에 옛 술을 담는 식입니다. 한물 간 방식입니다. 세 술은 새 부대에 담는데 그 부대에 예수님에게만 나오고 술도 예수님에서만 나옵니다. 마치 중풍병자를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죄를 사했느니라"라는 능력의 말씀 선포와 동시에 그 환자가 벌떡 일어서 길을 가는 것처럼 구원도 "네 죄가 나의 의로 없어졌느니라. 너는 병자였고 죄인이지만 이제는 없느니라"라는 선포에 의해서 그 사람은 그 순간부터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담 왕이 정도를 행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가 무언가 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까 생각해 놓은 그 모델이 바로 정도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데 그 육신이 되신 분이 바로 정도입니다. 다른 세상에서 모델 될 사람을 찾지 마세요. 교회 내에서 찾지 마세요. 예수님이 정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고 싶은 바는 바로 예수님을 믿는 그 모습이고 이것이 천지창조 할 때부터 하나님의 마음에 품었던 뜻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버리고 생명나무를 따먹는 그 인간의 모습을 하나님은 지금도 원하고 계십니다. 그 모습을 지닌 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그 자가 정도를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이제는 자기 자신을 좀 놔주세요. 오늘날 내가 아무리 아름답고 귀하게 여겨지지만 내일이 되면 오늘날은 하나의 어제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지나간 어제에 불과합니다. 잊혀져야 하고 그렇게 잊어버려야 될 과거일 뿐입니다. 사람이란 과거를 모아서 자기를 미화하고 미래를 꿈을 앞당겨서 자기를 치장하기 마련한 자신의 영광과 자존심의 짊어지고 사는데 이제는 자기 자신을 그만 놔주세요. 행동을 이렇게 하든 행동을 저렇게 하든 좀 묻지 말고 놔주세요. "왜 내가 그런 짓을 했지"라고 후회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제발 놔주세요.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마귀가 완전하지 못하다고 옆에서 놀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더욱 더 질곡에 빠집니다. "내가 왜 이 모양이야, 내가 왜 이럴까" 이것이 바로 말씀으로 사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창세 전에 말씀이 규정지어 놓은 우리가 믿어야 될 그분에 관한 겁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그분 말입니다. "내 살을 먹으라 내 피를 마셔라"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너희가 너희를 주장하지 말고 이제 나에게 인계하라는 겁니다. 너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의 사람으로 바뀌어져라 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네가 너를 붙들고 살아왔고 작업해 왔지만 이제는 놔버리고, 확 털어 버리고 이제는 정도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구약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국력이 강해지고 군사들이 많아지고 주위 나라들이 자발적으로 상납을 한다는 것이고 신약 적으로 이 축복을 풀면, "너는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하늘의 것을 생각하라"이라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 인생에 너무 미련 둘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식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구약 식으로 표현된 불가능성이라면 신약에서의 불가능성은 과연 무엇일까요? 부자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불신자들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무얼 까요? 그것은 바로 오른 손 잘리는 한이 있더라도 천국 가는 현실입니다. 이 은총이 바로 축복이요 보물이요 재산입니다. 살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진정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죽어도 산다는 것이 진정 사는 것입니다. 천년을 살기를 원치 마시고 영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가 세상 사람과 자꾸만 비교하니까 안 지려고 어설픈 몸짓으로 일관하는 피곤한 인생을 삽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놔주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시고 차라리 소경이고 세리고 창기가 된다할지라도 그 몸뚱이마저 예수님께 돌려주는 홀가분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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