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요아스의 성전 사랑 (역대하 24:1-7)
32. 요아스의 성전 사랑 (역대하 24:1-7)
24:1 요아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칠세라 예루살렘에서 사십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24:2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며24:3 여호야다가 왕으로 두 아내에게 장가들게 하였더니 자녀를 낳았더라24:4 그 후에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24:5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유다 여러 성읍에 가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해마다 너희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되 그 일을 빨리 하라 하였으나 레위 사람이 빨리하지 아니한지라24:6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를 불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레위 사람을 시켜서 여호와의 종 모세와 이스라엘의 회중이 법막을 위하여 정한 세를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거두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니24:7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
이스라엘 나라가 왕이 없던 시절에서 왕이 있던 시절로 다시 이어집니다. 그 왕의 이름이 요아스인데 그 요아스가 왕 자리에 나아갈 때 나이 7세라고 되어 있거든요. 일곱 살 먹은 애가 뭘 알겠느냐,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뭘 할 수 있겠느냐고 하시겠지만 왕이 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혹시 생각하시기를 "다른 나라에도 왕이 다 있는데 그게 무슨 기적이냐, 왕 없으면 세우면 되지" 라고 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소홀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만 잠언서 25장 2절에 보면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 일을 살피는 것은 왕의 영화니라"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3절에는 "하늘의 높음과 땅의 깊음같이 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느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나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기를 하나님은 항상 숨어있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추진하시고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은 왕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다는 겁니다. 세상나라, 일반나라에 있어서의 왕은 그저 사람들이 민주적으로 혹은 세습제로 사람의 뜻에 맞추어서 원하는 힘있는 영웅을 세우면 되지만 이스라엘 나라에서의 왕이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이 드러내는 존재로서 출현이 되니까 왕이 있다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 아니고 뭡니까. 하나님의 일을 숨기는 것이 영화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일을 은밀히 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더욱 더 위엄과 경외심을 유발시키고 왕은 다른 백성들이 알지 못하는 그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종 왕에게 드러냄으로서 왕은 다른 사람보다 더 영광스러운 그러한 직책과 사명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그 왕을 오늘날 바로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그 이스라엘의 왕이 일곱 살이라고 무시할 일이 아니라 왕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그 왕을 통해서 전도를 하고자 하는 숨어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를 밝혀내는 것,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 왕과 백성들의 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왕은 무슨 일을 전달하고 무슨 일을 했을까요? 오늘 본문4절부터 7절까지 보면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일을 추진합니다. 멀쩡한 성전이 부서졌나 왜 수리를 하느냐 그렇게 생각하시겠지만, 7절에 보니까 "이는 그 악한 여인 아달랴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전을 깨뜨리고 또 여호와의 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 들에게 드렸음이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왕이 없을 때, 하나님의 뜻이 잠시 감추어졌을 때, 바알의 악녀 아달랴와 그 하수인들이 완전히 하나님의 성전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겁니다. 그래서 왕의 입장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통치하고 하나님이 임재 한다는 그 성전이 그렇게 파괴되어 있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전을 수리하려고 한 겁니다. 4절과 5절에 보니까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레위지파에 속한 제사장들과 사람들에게 성전을 수리할 것을 명령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실행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다그치는 거지요. 너희들은 하나님의 전을 수리할 돈을 거두어 가지고 빨리 일을 진행하라고 요아스 왕이 지시했습니다. 자, 요아스 왕이 지시한, 성전을 다시 한번 수리하고 개축하라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것이고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이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좀 더 깊이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전을 중수하기 위해서 돈을 어떻게 모으느냐, 돈을 어디에서 조달하느냐가 여러분들이 궁금하실 거예요. 하나님의 전 같으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돈 보따리라도 던져 줘야지 아니 사람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돈을 각출해서 하나님 자신의 전을 지으라고 하느냐고 아마 이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다는 것은 곧 다른 나라에 없는 게 있다는 거예요. 다른 나라에는 구원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성전이 있는 이 곳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된 영생과 구원이 있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났을 때에 죽음의 길로 갔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입혀서 하나님께서 생명의 숨통을 트인 거죠. 그 아담과 하와에게 약속했던 그 약속이 그 당시에는 유다 나라에 살아있는 거예요. 성전이 있는 걸로 봐서 알 수 있다고 그렇게 요아스 왕은 생각한 겁니다. 그러면 성전에 돈 내는 것이 어떻게 생명의 돈이 되겠느냐, 성전에 낸 돈은 성전 세지 그게 무슨 생명의 돈이냐고 하시겠지만 이것이 출애굽기 30장에 보면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11절, 1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목숨 값을 내 놓으라는 말이죠. 15절에는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여러분 부자라면 돈을 더 내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가난한 사람은 좀 봐주어서 깎아 주면 안됩니까? 지금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30장 11절에서 요구하는 생명 값, 속전은 그 사람의 경제 상황을 보고 고려해서 내라는 것이 아니고 경제상황은 제쳐두고 "네가 살 거냐, 죽을 거냐"를 따지는 거예요. "네가 내 앞에서 살래, 아니면 죽은 자로 있을 래"를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경제적인 구조 안에서는 나는 너보다 부자다, 나는 너보다 가난하다, 부자와 가난한 것이 이렇게 구분이 되지만 하늘나라 앞에서는 부자고 가난하고 구분도 없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거지 나사로도 천당 가잖아요. 그 나사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바라봤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거지로서 바라봤던, 부자로서 바라봤던, 이 땅에서 한달 수입이 얼마냐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가치도 없는 겁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 때에는 너보다 내가 더 가치 있다는 점을 소득이 많다는 걸로 통해서 증명하려 들겠지만 하늘나라 앞에서는 그것이 다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인간이 죽은 인간인지 산 인간인지 구분하는 것이 관건이고 중요한 문제예요. 그래서 부자라고 인심 써 가지고 더 낼 필요도 없고 가난한 자니까 좀 봐달라고 할 수도 없는 거예요. 부자라고 더 내고 가난하다고 더 내지 말고 동일하게 최저 작은 돈으로 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얼마나 귀하냐가 아니라 목숨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 네가 갖고 있는 경제사정 보다도 더 중요한 사항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배를 골고 있거나 아니면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더 시급하고 더 다급한 문제가 과연 하나님에 의해서 내 목숨이 살았느냐,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서 지금 내 목숨이 죽은목숨이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런 돈을 모아서 성전을 운영하는 운영비로 쓰여질 때 사람들은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내가 돈을 내어서 지었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나의 돈 액수와 상관없이 저 성전이 있음으로서 우리는 산목숨이고 천당 가는 목숨이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인하는 거예요. 재 다짐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올 때 헌금을 하죠. 일반적인 예배당을 짓는다든지 어디에 다급하게 돈을 쓸 게 아니고 운영비로 쓸 때에 여러분들은 '야! 내 돈 아니면 이 교회가 무너진다'라는 생각이 안 들잖아요. 다른 교회는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교회 같은 경우에는 헌금을 하는 것이 교회가 안 무너지라고 헌금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사랑해서 헌금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주님을 아직도 믿고 있다는 그런 마음에서 헌금하실 거예요. '내가 아직도 주님 믿습니다. 나는 주님 없이는 못 삽니다' 라는 그런 의미에서 드립니다. 그래서 시편 50편 8절에 보면 "내가 너의 제물을 인하여는 너를 책망치 아니하리니 네 번제가 항상 내 앞에 있음이로다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취치 아니하리니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이 말씀이 하나님이 배가 고프고 아쉬워도 너희들한테 달라는 소리를 않겠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재물을 많이 바쳤더니만 구원을 빨리 이루고 천당 갈 때 높은 자리 앉는다는 게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돈이 궁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 낼까" 라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는 말이죠. 나에게 돈 갖다 바칠 생각하지 말고, 돈 바쳐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꿀 생각하지 말고 나를 불러라, 나는 돈 없이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너희들의 각양 재물, 수양과 수소를 갖다 바친다고 하나님께서 얼굴을 내미는 하나님, 그 때 인심 쓰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 없이도 값 없이도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돈 내는 인심 쓰기가 힘들겠습니까, 어려울 때 하나님 부르는 것이 힘들겠습니까, 어느 것이 힘들겠습니까? 보통 생각하기로는 하나님 부르는 것이 뭐가 어렵냐고 여기고 돈을 내는 것이 더 힘들지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이 그리워서 보고 싶어서 하나님 없으면 못 살겠다고 부르는 것은, 이건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찾기 힘듭니다. 하나님 없이도 사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아쉽겠습니까. 하나님 없이도 친척 중에 잘 사는 사람이 있고 부모님 살아 계시고 내 자식으로 떵떵거리며 잘 먹고 사는 데 뭐 때문에 하나님 부르겠어요. 어디가도 교회가 천지인데 뭐 때문에 하나님 부릅니까. 하나님을 부른다는 말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고백을 뜻합니다. 부동산이 있든, 식구가 열이든 백이든 간에, 어쨌든 내가 기대고 의지하고 마음 바치고 사랑 바칠 대상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하나님 없이는 죽겠습니다, 못살겠습니다 라는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바로 부르는 마음입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라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사람, 이런 사람이 진짜 신앙 인이 아닙니까. 이 눈치, 저 눈치 안보고, 사람 만나면 고개 숙이지 않고, 어떤 어려운 환경이 와도 기죽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그렇게 신경 쓰지 않고 나는 하나님이 그리워서 교회에 오고 하나님이 좋아서 헌금했고 하나님 말씀이 그리워서 다시 교회 찾았고, 이게 신앙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 한번 안 본다고 굶어 죽을 일이 있나, 친구 많은데 친구와 재미있게 놀지, 하나님 말씀에 흥미가 있나 그냥 심심할 때 가면 된다는 이런 마음이 보편적인 마음과 얼마나 큰 차이를 보입니까. "아이구~ 하나님 없이는 못 살겠다"는 마음이 어떻게 성령이 아니고서야 생기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아예 돈을 교회에 떡 칠을 하는 사람보다도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더 귀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진정한 헌신이고 재물이 되는 거예요. 결국 그 사람은 내가 마지막 내 목숨 구하고 찾을 곳은 바로 하나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서는 부자가 되었든 가난한 사람이 되었든 동일한 마음이 되어야 됩니다. 부자라고 믿음이 더 많아야 되고 가난하다고 믿음이 더 적다는 게 아니라, 부자의 경제적 상황이라든지 가난이라는 악한 상황이라든지, 그런 것에 하나님의 관심은 없고 내가 찾는 것은 진정으로 나, 하나님에게 생명이 달려있는 줄 알고 하나님만 찾는 그런 사람이기를 원한다 해서 성전 세를 누구든지 동일하게 반 세겔, 즉 누구든지 믿음에는 한결같아야 된다는 말이에요. 목사라고 믿음 더 있는 것도 아니고 처음 교회에 나왔다고 믿음 적으라는 법도 없습니다. 동일한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요아스 왕이 성전을 중수하라는 말과 또 정해놓은 성전 세를 더 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건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이 성전이라는 곳에 하나로 모으자는 말이에요. 그런데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이 왕이 지시를 하는데 레위인들이 왜 말을 안 듣는가? 레위인들은 아마 "좀 있다 하지 뭐 그렇게 바쁘나, 대충하면 되지"라는 생각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요아스 왕에 있어서의 성전은 단순히 건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동안 왕이 없던 시절, 하나로 결집될 수 있는 구심체가 없던 시절에 백성들의 마음은 열 갈래, 스무 갈래 다 찢어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전부 다 각자 흩어진 마음, 그 해이한 마음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레위 인들이 말을 안 들었다는 것으로 드러나거든요. 여호야다와 레위인들이 왕의 말을 안 들었다는 이 말은 성전에 관심도 없고 하나님께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밖에 관심 없는 그런 생활을 지금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누구하나 왕에게 성전 고치자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요아스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다고 했습니다. 정직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그 요아스 왕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 시점에서 그 유다 나라에 지시하는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라고 더 내라는 것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덜 내라는 것도 아니고 부자냐, 가난한자냐 하는 그러한 껍데기에 너무 관심들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들에 혼란케 너무 마음을 두지 말라는 말입니다. 변함없는, 변동이 없는, 흔들림이 없는 신앙, 그것은 바로 내 목숨이 거저 우리한테 주어졌다는 겁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한 것이 교회에서 이득을 보자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귀한 예수님의 목숨을 거저 주었기 때문에 거저 준 것에 대해서 너무 고마워서 교회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예요. 항상 그 밑바닥에는 하나님 앞에 산 사람이 된 것이 돈으로 산 게 아니고 저거 얻었다는 거예요. 이 거저 얻은 목숨 값, 이 생명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우리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하나로 모아야 된다는 것이 요아스의 이야기이고,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인 줄 압니다. 현재 경제가 어려워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우리는 "그래 마음껏 혼란스러워 봐라, 하지만 궁극적으로 내 영생은 도대체 어디서 날라 온 거야, 도대체 누가 주신 거야, 내 공짜로 얻은 이 목숨 값은 도대체 누가 대신 치른 거야"라고, 우리가 여기에 관심이 있다면 아마 이 흔들리는 세상에서든, 어떤 자리에서든, 우리 마음이 요동치 않고 곧게 신앙생활을 잘 할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온통 세상이 정신 없이 경제문제, 가정문제, 자식 교육문제에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래 놓고도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묻고 있습니다. 주여! 이미 해답은 나와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거저 얻은 이 목숨, 이것이 누가 주신 것이고 어떻게 얻은 것인가를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관심사는 흔들림이 없이 주님에 대한 고마움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마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