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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30. 왕 세우기 (역대하 23:8-11)성경역대하

30. 왕 세우기 (역대하 23:8-11)

이름 : 우리교회(IP:122.47.52.38)

30. 왕 세우기 (역대하 23:8-11)

23:8 레위 사람과 유다 무리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모든 명한 바를 준행하여 각기 수하의 안식일에 입번할 자와 안식일에 출번할 자를 거느리고 있으니 이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출번하는 자를 보내지 아니함이더라
23:9 제사장 여호야다가 하나님의 전 안에 있는 다윗왕의 창과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백부장들에게 주고
23:10 또 백성들로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되 전 우편에서부터 전 좌편까지 단과 전 곁에 서게 하고
23:11 무리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세워 왕을 삼을쌔 여호야다와 그 아들들이 저에게 기름을 붓고 모두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우리가 왕이 없이 구원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 자신들이 구원의 대상자이기 때문에 따로 왕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불교 같은 경우에는 스스로가 부처고, 미륵이고, 스스로가 도를 통하면 그것이 바로 구원이 되고 해탈되어 극락에 간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경에 보면 왕 없이 구원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왕은 다른 말로 기름 부은 자,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왕 없이 구원될 수 없기에 구원되는 사람은 자기를 구원해주신 왕만 드러내게 됩니다. "이분 덕분에 나 구원받았소"라고 이야기하게 되지요.
그런데 요즘 현대인에 있어서는 왕 개념이 없습니다. "이 민주제도 사회에서 왕이 뭐 필요한가, 인간이 인간을 믿다니 그게 무슨 되지도 않은 이야기냐"라는 생각에 왕 의식을 거부합니다. 그 왕 의식이 없는 대신에 그 자리에 불교처럼 내가 성화 되어 가지고 혹은 멋있게 달라진 사람이 되어서 나의 이 멋있는 윤리와 괜찮은 성품을 근거로 해서 천당 가보자고 하는 분위기가 온 교회에 확대되고 확산되고 있는 추세에 있습니다.
새 생명운동이라든지, 성화운동이라든지 하는 것이 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인간을 긍정하자는 거지요. 우리 박사교회에 나왔다가 안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는 이야기가 왜 박사교회는 인간의 행함을 긍정하지 않느냐라는 것 때문에 삐쳐서 나간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종교 생활의 목표가 없으니 도전할 맛이 없는 신앙이 뭐가 재미있겠느냐는 뜻에서 불만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게 아니에요. 왕만 증거하자는 겁니다. 왕이 없이는 우리는 구원될 수 없다, 그리고 왕을 전면에 앞장세우지 않는 자를 신자라고 용납할 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왕을 내세우지 않을 경우에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필연적으로 그 자리에 자기의 솜씨가 파고 들어가게 되어 있고 그 솜씨를 가지고 타인의 입지와 비교하게 되어 있고 그 비교에서 욕망이 불붙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과연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까요? 아닙니다. 모든 세상사의 근심 걱정은 우리 자신들이 짊어져야 됩니다. 앞으로 1년 뒤에 어떻게 될까, 몇 개월 뒤에 어떻게 될까, 내 장래는 어떻게 될까, 내 가족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걱정과 근심과 두려움과 공포를 마주하면서 역시 믿을 자는 나밖에 없구나 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내가 이토록 착하니 내 착한 덕분으로 미래의 난관을 해쳐봐야지 하는 생각이 현대 인간들의 사고 구조에 맞습니다. 이게 더 끌리는 겁니다.
사람들이 이런 논리를 더 좋아한다는 그 점은 인정할게요. 왕이 없는 대신 자기를 절대자로 모시고 사는 것이 현대인들입니다. 잘나도 내가 잘나야 되고 모든 문제는 내가 알아서 내 손에서 해결해야 된다는 식으로 훈련받고 몸에 배겼다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글쎄요, 그게 신앙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건 신념이지요. 자기를 독촉하고 자신을 관리하면서 부축이고, 절제하고, 자기를 치고, 자기에게 촉구하고, 이건 하나의 신념체제입니다. 쉽게 말하면 "하면 된다"는 거예요. 그러나 왕을 앞장세우는 사람은 늘 왕만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겸손하게, 자기를 가볍게 무게를 줄이고, 왕을 앞장세우고 그 뒤에 숨는 겁니다.
우리나라 유명한 노래 중에 "그대 앞에 서면 난 왜 작아지는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가사입니다. 그런데 이게 현대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거예요. "너 잘났냐? 나도 너 못지 않아"이렇게 나오거든요. 너 앞에 서면 작아지기는커녕 이참에 널 아예 따라 붙이겠다는 이게 도전하는 현대인의 속성에 맞는 거예요. "나는 아무리 잘나도 당신 앞에 서면 왜 이렇게 초라해지고 작아지고 당신을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지"하는 생각이 없다 말입니다. 하나의 라이벌로 여기고 도전하는 대상으로 잡는 겁니다. 이게 무슨 사랑입니까? 그런데 이런 비 신앙이 오늘날 교회에서는 신앙됨이고, 성화 됨이고, 이게 신앙생활에 본질인 냥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거예요. 그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현대인의 심리구조에 맞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야다 라는 사람이 보면 어디 나쁜 짓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최고의 대제사장 아닙니까. 말씀과 경건에 대해서 모범 되는, 누가 봐도 훌륭한 제사장이요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도 의와 선행이 많이 확보해 놓은 사람처럼 간주되는데 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의 의로서, 자신의 선행으로 천당 갈 수 있겠고 생각하지 않고 반대로 자꾸 왕만을 앞장세웁니다. 왕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것을 이 분은 아는 것입니다. 구원되고 안 되고는 내 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왕 하나 잘 만나면 그분 덕분에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미래도 보장되고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서 될 상황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하기를 우리가 세상일에 너무 걱정 근심하는 것을 세상 탓으로 돌리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요즈음 경제가 어려워서 현대건설 쌍용, 전부다 회사가 어려운데, 이런 상황이라든지 환경이 나를 괴롭게 한다고 자꾸 핑계를 대지 마시고 이런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님과 사도들은 어떻게 살았겠는가, 이런 환경을 하나님이 던져 줌으로 말미암아 정작 내가 신앙인인지, 아니면 신념에 죽고 신념에 사는 비신앙인 인지를 한번 확인해보세요. 내가 과연 평소에 누구를 앞장세우면서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왔는가, 한번 생각해보면 이거 참, 어려울수록 신앙이라는 것이 찾기가 힘들다는 주님의 말씀이 실감 날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은 왕은 어떻게 생겼으며 왕이 해야될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한번 봅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에 띄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11절에 "무리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세워 왕을 삼을 새"라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율법 책을 주고 왕을 삼으라는 거죠.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내가 온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왔다"고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자, 그리스도, 왕으로 오신 분이 왜 율법 책을 옆에 두어야 됩니까.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구원하면 안됩니까? 왜 율법 책이 있어야 되는 거예요. 자, 여기 본문 가지고는 왜 율법 책을 주면서 왕을 세워야 되는 이유가 안 나타납니다. 그러면 그게 어디에 나오는가? 신명기 17장 18절에서 20절에 보면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 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 신명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약속이 뭐냐하면 왕 하나 제대로 만나면 그 왕 때문에 온 나라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예요. 그러면 왕만 있으면 복 받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거기에 조건이 붙는데 그 조건이 바로 왕이 자기의 평생을 다하도록 율법책을 옆에 두고 그 율법책에 적힌 내용대로 하나님의 말씀 뜻대로 모든 율법과 규례를 지켜 행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 왕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진정 장차 올 메시야의 모습대로 나타나게 되거든요. 그럴 때, 그 왕이 말씀 속에서 나타나 보여주는 그 예수님의 정신 속에서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게 된다는 법칙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왕을 세울 때, 그 왕이 인물이 잘났느냐, 키가 크냐, 자식이 몇 명이나 이런 것을 보지 말고 그 왕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사랑의 모습이 비취느냐 안 비취느냐를 봐야 됩니다. 거기에 따라 이스라엘이 은혜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왕의 존재, 왕이 바로 율법 책을 모범적으로 수행해야 될 그런 위치에 있다는 이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 민주주의 사회, 모두다 평등을 주장하는 그런 사회에서는 굉장히 이상스럽게 들리는 거지요. "아, 우리도 개인적으로 잘할 수 있는데, 나란 인간도 신앙생활 괜찮게 한다고 자부하는데 이 신앙생활 잘하는 나를 제쳐두고 내가 또 누구를 의지해야 된단 말인가. 왕을 믿어야되고 그분을 앞장 세워야되고, 에이 그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자, 그런 생각이 드는 이유를 제가 지금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그게 삼상 8장에 보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아주 중요한 교훈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사무엘상에서 보면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하나님이 왕 그 자체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여호와를 왕으로 섬기면 어느 나라도 이스라엘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완전히 작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서히 하나님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에이 보이지도 않는데 보이는 저 사람들이 훨씬 정감이 가지, 하나님이 보이지도 않는데 무슨 정이 가"하는 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웃 나라처럼 자기들에게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게 6절에 나옵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라고 되어 있지요. 이 내용대로 이제 여호와께 묻는 거예요. 그러니까 7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왕을 주기는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관점에서 주느냐하면 회개하라고 주는 겁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요구에 부응해서 주었다는 것은 그 달라는 인간의 의식이 훌륭하거나 의로워서가 아니라 도리어 반대로 "이러니까 너희들이 스스로 힘으로 구원이 안 되는 거지"라는 것을 더 밝혀주기 위해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준다는 것입니다. 주신 그것을 증거물로 삼아 너희들의 죄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점은 예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오셨다는 소식을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이 들었지만 "에이 당신 같은 인간이 무슨 왕이야"하고 차버렸거든요. 그건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을 주실 때는 우리들의 속에 품고있는 죄가 얼마나 추잡고 더럽고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자 들인지 이점을 회개하라고 주셨는데,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의 왕은 어떤 메시야를 원했느냐하면 자기가 생각하는 욕망과 자기의 꿈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서 왕을 원했던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왕을 만나고 난 뒤에 "참, 내가 잘못되었구나, 진짜 하나님은 이런 모습인데 나는 왜 엉터리 왕만을 고대했을까" 하고 회개하기 위해서 왕을 모셔야 되는데 회개는커녕 자기의 야망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차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나중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달려 죽게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 그 자체로 인간에게 더 이상 의로운 것이 없다는 것이 발가벗겨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회개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로 반긴 사람은 누구입니까? 날 때부터 소경 된 자, 문둥병자, 창기와 세리들, 소위 이 땅에서 희망을 잃고 절망에 속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이 말씀이 유일한 빛으로, 최후로 얻은 기쁨 소식처럼 받아드려진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그들은 뽕 가버린 겁니다. "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자에게만 예수님이 제대로 메시야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을 자기의 야망을 달성하는 이용가치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무용지물의 존재 밖에 안됩니다. 교회 목회나 성공시켜주고 목사를 살리는 그런 메시야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인간들에 의한 하나님 버림을 언급하시면서 왕 제도의 실체를 알려주라고 합니다. 사무엘상 8장 11절부터 쭉~ 나옵니다마는 "너희들이 왕이 너희들의 야망을 채운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왕을 세워 놓으면 왕은 너희들이 갖고있는 제일 좋은 것을 다 빼앗고 그것을 착취할 것인데 그래도 그 왕이 좋으냐?" 그러니까 백성들이 대꾸하기를 "그래도 좋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인간들은 그저 베풀어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그저 사랑해주시고 대가없이 용서하시고 대가없이 영생주시는 진짜 왕, 진짜 하나님은 사람들은 버리고, 인간이 조금만 성의만 보이면 즉시 자기 소망과 자기 욕심을 달성해 줄 수 있는 그런 왕을 자꾸만 찾고 있어요.
"내가 당신 믿어 줄 테니까 당신도 내게 메시야로서 할 도리를 다하라"는 식입니다. 이러면 바로 왕과 백성들의 흥정이 되는 겁니다. 이런 왕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왕이고 그런 왕 때문에 이스라엘은 나중에 망합니다. 백성들에게 희생하는 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위에 군림해서 모든 걸 맡기면 모든 것을 자기의 야심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노릇 하는 그런 왕을 사람들은 자꾸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 요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는 하나님을, 예수님을 왕으로 믿습니다 고 해놓고는 뒤에 결과를 보는 겁니다. "자,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난 뒤에 나의 욕망의 손익 계산이 어떻게 되는가, 손해보면 나는 예수 안 믿는다"이런 식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이 얼마나 우리 주님과 비교할 때 못났으며 저질이며 더럽고 추한지 어떤 이들은 그 분에 자복하고 "용서하소서,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반면에 대다수의 인간들은 이용하기 좋은 가짜 예수를 더 신봉하려고 합니다. 자꾸만 예수 믿고 난 연후에 손익계산을 따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엉터리 예수라는 말입니다.
신명기에서 왕 옆에 율법 책이 있다는 말은, 만약 율법 책과 무관한 왕이라면 사람들이 그 왕을 마음껏 이용해서 자기 야망을 채우려는 식의 왕이 되겠지만, 참된 율법의 정신이 들어있는 왕 같으면 진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참된 그 사명과 그 증거물을 전하는 그런 진짜 모범적인 왕이 된다 말이죠. 그럴 때 백성들은 그 왕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의 모습을 대비해보고 그 왕 앞에 회개하면서 "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 왕 앞에 진정으로 무릎을 꿇고 회개한 사람은 소경들이었고 문둥병자였고 세리였고 창기였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왜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왕이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는가를 정리해 봅시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고 우리가 율법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는 누구를 앞장세워야 됩니까? 하나님 말씀 잘 순종하고 믿음 생활 잘하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야 됩니까? "나 이만큼 성화 되었다, 너희들 따라오너라, 나는 이만큼 예수 믿고 착해졌다 그러니까 칭찬해 줘" 이런 것을 내세워야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만 바라보면 저는 부끄럽습니다, 주님이 십자가 지시고 날 위해 피 흘리신 것, 생각만 해도 저는 참으로 나쁜 놈입니다"라고 회개를 촉구하는 진짜 왕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시 한번 낮추면서 "나 이제 예수님 없이는 못산다, 예수님만 자랑할거야", 이런 사람이 바로 신자고 성도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왕 옆에 율법 책이 있는 것은 나머지 백성들로 하여금 그 왕 앞에서 회개하고 자기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인 줄 압니다 오늘날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세리처럼, 창녀처럼, 문둥병자 처럼, 소경처럼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진정으로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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