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선지자의 예언 (대하 21:11-20)
26. 선지자의 예언 (대하 21: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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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선지자의 예언 (대하 21:11-20)
21:11 여호람이 또 유다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고 또 유다를 미혹케 하였으므로
21:12 선지자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가로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21:13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으로 음란하듯 우상을 섬기게 하기를 아합의 집과 같이 하며 또 너의 아비집에서 너보다 선한 아우들을 죽였으니
21:14 여호와가 네 백성과 네 자녀와 네 아내들과 네 모든 재물을 큰 재앙으로 치리라
21:15 또 너는 창자에 중병이 들고 그 병이 날로 중하여 창자가 빠져나오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21:16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사 여호람을 치게 하셨으므로
21:17 그 무리가 올라와서 유다를 침노하여 왕궁의 모든 재물과 그 아들들과 아내들을 탈취하였으므로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21:18 이 모든 일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람을 치사 능히 고치지 못할 병이 그 창자에 들게 하셨으므로
21:19 여러 날 후 이년만에 그 창자가 그 병으로 인하여 빠져나오매 저가 그 심한 병으로 죽으니 백성이 그 열조에게 분향하던것 같이 저에게 분향하지 아니하였으며
21:20 여호람이 삼십 이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저를 다윗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 아버지! 진리와 비 진리의 길이 우리 앞에 있는데, 어느 쪽이 생명의 길인지 우리가 알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한 이 나약함을 용서해주시고 정말 사는 길이 어느 것인지에 목숨을 걸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성경에 나와 있는 여러 등장 인물들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 담겨있고 우리주위에, 우리교회 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많은 사람들이 여기 성경에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별 게 아닙니다. 다같이 우리는 한 아담, 하와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여기에 등장하는 하나님께 책망 받고, 징벌 받고, 저주받은 이 사람이 타인의 얼굴이 아니고 바로 나의 얼굴입니다. 같은 우리 조상의 핏줄을 타고 아담으로부터 아담의 본성을 이어 받았기 때문입니다. 늘 상 우리도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이렇게 성경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겉모습만 보여주는 거울만 들여다보지 마시고 거룩한 거울, 우리의 속내를 파헤치는 이 성경 앞에서 자신의 본성을 다시 한번 재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여기 오늘 성경에 보면 길게 읽었습니다마는 내용은 쉬운 내용입니다. 여호람이라는 악하기 짝이 없는 한 인간이 하나님 말씀은 지독하게 듣지 않고 산당을 의도적으로 세워서 음란하게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때, 선지자 엘리야가 편지를 보내어서 하나님 말씀을 여과 없이 그대로 전합니다.
자, 우리는 이 성경을 보면서 왠지 우리 마음속에 "아 참, 답답한 인간, 엘리야가 그렇게 이야기 많이 해 줄 때에 잘 듣지, 그 지독스럽게 말 안 듣네" 라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지요. 선지자를 보냈다는 말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까 자기의 종 선지자를 보낸 게 아니에요? 그러면 선지자가 벌써 이 내막을 알고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으면 얻어맞기 전에 알아서 회개 할 것이지 뭐 잘났다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아니하고 심지어 더 악한 길로 나가서 징벌을 받았는가 이 말입니다.
징벌이 두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16절에 나오는데 가만히 있는 이웃나라 블레셋 사람과 가까이 있는 아라비아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일부러 작동을 시켜서 여호람이라는 왕을 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렇게 자랑하던 왕궁의 모든 재물과 보물을 몽땅 다 빼앗겨 버리고 아들들과 심지어 아내까지 빼앗기지요. 말째 아들 여호아하스 외에는 한 아들도 남기지 않고 전부 살해되었습니다. 그 뿐입니까? 18절부터 나오는데 자기가 죽을 때에는 고치지 못할 병이 들어 이년만에 창자가 빠져 나오는데 그 병을 우리가 생각만 해도 엽기적 아닙니까? 끔찍하지요. 이렇게 해서 20절 마지막에 보면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속이 후련하게 잘 죽었다고 할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이렇게 겁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미리 앞당겨 알았으면 엘리야가 편지 보내고 메시지 전할 때에 알아서 회개하고 자기를 다스렸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고집이 세어서 하나님 버리고 우상 섬기고 이렇게 말씀을 안 듣고 살아가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이야기 한 것이 사실은 이야기하나마나 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선지자가 없습니까? 하나님이 안 살아 계십니까? 아니, 오늘날 기독교 교인 가운데 선지자의 말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던가요?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무서워하고 회개하며 마음이 낮아지고 겸손한 성도를 요즘 찾아보기 힘듭니다.
여호람이 마음이 완악하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교인들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아마 막상막하일 것입니다. 목사들도 얼굴에 철판 깔고 목회 하기에 말씀 연구하는 자들이 거의 없습니다. 말씀을 원하지도 않는 대중들을 상대하다보니 말씀을 깊이 연구한다고 해서 목회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은 초신자들, 진짜 지옥이 겁나서 지옥만은 가지 말아야겠다고 목사 붙들고 "성경말씀 어떻게 됩니까?"하고 묻는 그런 사람들이 말씀이 관심이 많습니다. 몇 달 전부터 계속 전화 오는 다른 교회 교인이 있습니다. "목사님 성경 어떻습니까, 이 말씀 어떻게 해석합니까?"라고 오늘도 전화가 왔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관계없이 몇 개월 째 계속 성경을 물어 옵니다. 그런 분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것 때문에 살고 있기에 친절하게 이야기 해줍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분이 없습니다. 워낙 예배시간에 다 들어버렸으니까. 제가 너무 위로해 드린 겁니까? 예배 시간에 다 들어버렸으니까 전화도 하지 않지요.
서울서도 전화 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러니까 교회에 처음 나와서 어떻게 하나님 잘 믿어 볼까해서 "목사님 어떻게 하면 하나님 한 분을 잘 섬길 수 있습니까?"라고 문의해 오는데 여기에 관심을 두는 분은 초 신자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어요. 마음이 하나님에게 모두 다 빼앗겨서 일상적인 일은 별 중요시하지 않고 가사문제, 가정문제도 별로 중요치 않고 하나님 말씀에 마음이 빼앗겨서 말씀과 더불어 거기에 관심을 가집니다.
저는 성도가 예수 처음 믿을 때 성경에 관심 두고, 한 2, 3년 지나면 성경에 관심 없어도 천당 쏙 들어간다는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겁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에 이끌려서 계속 사랑하는 대상을 좀 더 많이 알아가고 자기가 사랑하는 그 분을 더 깊이 알고 더 사랑하기 위해서 많은 것에 궁금한 것이 생길 것이고 사랑하는 그 분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싶어서 행동에 조심하는 것이 극히 정상적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남편이고 우리는 그 분의 신부입니다.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한테 3년 지나고 관심이 없어집니까. 갱년기입니까? 주님하고 살다가 그만 살자고 작정한 것입니까? 저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 신앙을 신앙이라고 저는 간주하기가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에 딱 두 가지 노선입니다. 여기 엘리야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하면 12절에 "여호람에게 글을 보내어 가로되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네 아비 여호사밧의 길과 유다 왕 아사의 길로 행치 아니하고 오직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같은 하나님 믿는 나라라고 하지만 그 안에 두 가지의 정반대 되는 길이 놓여있다는 겁니다. 완전히 정반대 방향으로 운명이 결정되는 두 갈래 길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나중에 왕이 된 사람들은 어느 쪽을 갈 것이냐를 날마다 선택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여호사밧과 아사왕의 길이 사는 길이고 나머지 왕들의 길은 멸망 받는 길이고 저주의 길이고 잘못된 길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지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이유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또다시 예수님을 죽일 사람이고 그렇지 않고 정말 자기를 부인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사랑하면 그는 예수와 함께 영생에 들어갈 사람으로 그 중간에 십자가가 딱 놓여 있어서 "십자가를 사랑할래? 세상을 사랑할래?" 양 갈래 중간에서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면사무소에 가서 주민등록증 떼는 것은 그냥 수수료 주고 떼면 그만입니다. 면장한테 가서 절하고 아부할 그럴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천당 보내주는 증명서 끊어주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 너는 너고, 나는 나"가 아니에요. 그래서 먼저 천당 갔던 사람, 먼저 영생에 성공했던 사람의 길이 어떤 길인지는 여호사밧과 아사왕이 보여주고 있지를 않습니까.
"목사님 선지자 말도 틀릴 경우가 있잖아요, 선지자 엘리야 말이라고 다 맞습니까?" 이런 의심을 품는 사람이 있나 싶어서 제가 에스라 1장 1절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만히 있는 바사 왕, 하나님 믿는 인간도 아니에요, 하나님 안 믿는 그 고레스 왕의 마음까지 움직이는 이유가 뭐냐하면 예레미야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성취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명기 18장 끝에 보면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선지자의 말은 자기가 기분 내키는 대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일어날 일을 미리 앞당겨서 누구를 통해서 전달을 해줘야 되는데 그 전달하는 우편배달부 역할을 선지자가 한 거예요.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있을 때에 천사가 와서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담아 준 것처럼 또 아모스에 보면 성읍에 나팔을 불지 않고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자가 울부짖듯이 선지자의 울부짖음 후에는 반드시 그 성읍에 큰 재앙이 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게 나팔이에요. 나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선지자란 말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아사 왕이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구원에 성공한, 하나님께 칭찬 받는 사람이 되었는가, 역대하 15장을 2절을 잠시 보면서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그러니까 구원에 성공하고 하나님께 사랑 받은 사람의 특징이 별거 없지요.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이 특출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요. 대학을 나왔다든지 돈이 많다든지 그것도 아니지요. 성질이 부지런하다든지 성실하다든지 한 것도 아니지요. 단지 하나 겸손한 것뿐이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보다 더 어르신이 계시다는 것을 매 순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제가 방금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하나님 앞에 구원에 성공한 사람의 특징은 자기는 자그맣게, 너무나 덩치 큰,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어떤 분이 자기를 통치하고 지배하고 있기에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여러 가지 조그마한 일에 대해서 깜짝 깜짝 놀라지 않는다는 겁니다. 거기에 걱정 늘어지고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씨름선수 강호동이가 뒤에 있는데 앞에 깡패 몇 명 있다고 겁나겠습니까. 그런데 강호동이 보다 더 큰 하나님이 함께 있는데 마주치는 어떤 상황이 벌어진들 그게 무슨 대수냐 이 말입니다. 그게 깜짝깜짝 놀랄 일입니까? 현대 교육의 핵심은 아무도 너를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너는 스스로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립정신을 빨리 고취시켜서 스스로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정신자세가 "이 세상에는 날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내 스스로 살수가 없다"이러한 것이 몸에 딱 베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현대 과학정신에 부합되지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해서 활발하게 활동하니까 선진조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죠. 그런데 이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는 방해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면 왜 한없이 초라해지고 부끄럽고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건방지기 짝이 없고 거만하고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잘난 것만 생각하고 남한테 뽐내기만 좋아하고 남한테 안 지려고 하는 이런 자존심 뭉치로 살아가는 이것이 바로 세상이 우리에게 물려준 속성이고 익혀준 하나의 버릇입니다.
여기 아사 왕의 특징인 마음을 강하게 했다는 말은 자기가 강하게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태권도 배우고 유도 배운 게 아닙니다. 갑자기 자기 머리가 똑똑해진 것도 아니에요. 무슨 말이냐 하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도 "이 모든 일은 하나님 소관이다,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나는 자족한다, 범사에 감사한다, 항상 기뻐한다, 쉬지 말고 기도한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나는 거기에서 겸손한다, 이 세상은 내가 움직여 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이 움직여 간다"는 것이에요. 이게 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현실에서 움직이고 있고 그 현실대로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마음을 모를 리가 있습니까. 중심을 보시는 분인데. 여기서 제가 주의할 것을 당부하겠습니다. 여러분, 윤리로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면 복 받는다고 하는데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에게 하나의 무기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통 잘못된 게 아니에요.
믿음이 좋고 기도 많이 하면 된다는 것도 잘못된 거예요. 왜냐하면 믿음 좋고 기도 많이 하는 것은 기도와 믿음으로 내 것을 만들었다고 되니까 역시 자기도 그 힘으로 스스로 서는 것과 다를 바가 뭐 있겠습니까. 그건 믿음이 아니고 "하면 된다"는 신념이에요. 신념의 반대가 신앙이에요. 그런데 신념을 마치 신앙인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면 큰일날 이야기입니다.
신념이라는 것은 내가 가진 힘을 믿는 것이고, 신앙이라는 것은 아예 나를 안 믿는 것입니다. 엄청난 어르신네가 내 배후에서 어떠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 내시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범사에 합력하여 네게 유익하도록 하는 그 사랑을 네가 감사하고 있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다 아시지요. 그것이 바로 생명에 성공한 것이고 구원에 성공한 믿음입니다. 지금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입니까. 이 나라가 여호람의 나라가 아닙니다. 아사의 나라도 아니고 여호사밧의 나라도 아니고 다윗의 나라도 아닙니다.
오늘본문 11, 12절에 나오지요.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존경받는 왕이지만 다윗의 나라가 아니에요, 다윗의 하나님의 나라예요. 하나님이 엄연히 지배하고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서 스스로 설려고 하고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의 힘과 존재를 얕잡아보고 그걸 무시하고 내 힘으로 해결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은 그 천국이 깨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선지자를 보내서 경고하고 듣지 않으면 실제로 일을 발생시켜서 한없이 그 인간을 낮추고... 낮추고 상상하기조차 너무나 무서운 지경으로 낮추어서 다른 사람에게 경고가 되도록 시범적으로 여호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람의 병으로 빠져 나온 그 창자가 나의 창자라고 좀 간주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창자가 예수님의 창자예요. 우리가 저주받아야 될 것을 예수님의 창으로 찔림 받아서 나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버지에게 처참하게 당한 것은 바로 우리가 그 현장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저주받아야 될 당사자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될 그 자리를 주님께서 대신 담당하신다고 그런 수모를 당한 것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잖아요. 그가 징계를 받아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 십자가에서 다시 한번 우리를 거울삼아 비쳐보자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호람을 나무랄 게 없잖아요. 여호람이 바로 우리의 자신 아닙니까. 그냥 마음을 겸손하게 낮춘다고 신앙이 아니라, 진실하게 내가 어느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인가를 여호람과 십자가를 통해서 분명히 자기 자리를 알고 정리해야 됩니다.
"하나님! 저는 지금이라도 창자가 나와 죽어도 마땅한 인간인데 오늘도 웬 축복이고 웬 은혜인지 이렇게 살았습니다. 여호람은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이며 나는 그보다 더 못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려주시니 이건 주님의 기도 덕분이고 십자가 은혜 덕분입니다."라는 것을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시 우리 신앙을 점검케 하여 주옵소서. 교회에 대해서 좀 안다고, 성경에 대해서 좀 안다고 서서히 자립하면서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신념과 힘으로 살려고 오기로 버티는 저희들의 잘못된 것을 용서해 주시고 진실로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내가 서있는 내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 십자가를 통해서 날마다 확인하고 되풀이해서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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