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악한자의 교제 (대하 20:31-37)
23. 악한자의 교제 (대하 20:31-37)
20:31 여호사밧이 유다 왕이 되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수바라 실히의 딸이더라20:32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20:33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20:34 이 외에 여호사밧의 시종 행적이 하나니의 아들 예후의 글에 다 기록되었고 그 글은 이스라엘 열왕기에 올랐더라20:35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이었더라20:36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배를 지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었더니b20:37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가로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가 파상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너무나 오묘하여 우리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심령이 이 시간 불일 듯 일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성경은 어떤 사건과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드시 이 지상에 살고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잘못된 하나님인 사실을 같이 들추어내면서 자신을 소개하고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변경할 수 없는 확정된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은 다른 하나님을 따로 둔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하나님만이 하나님이지, 우리의 느낌이나 우리의 체험가지고 조작된 하나님은 백날 믿어도 여러분들을 지옥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심각한 마음으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과연 일치하느냐는 점에 대해서 좀 관심을 가지고 봐야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자신의 운명과 장래에 대해서 아예 포기상태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달리 어떻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뭐 되는 대로 살 테니까 내버려 둬"라는 그런 투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이 누구시며, 나는 그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일치되는지를 점검하고 싶다는 마음이 정해져있다면 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고 하나님이 주신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왕이 나쁜 짓을 했거나 백성들이 나쁜 짓을 했을 때에 이것은 나쁘다고 지적을 하십니다. 방관하시거나 못본척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지적을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채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됩니다. 나에게 하는 잔소리가 아닌데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아, 이런 것을 악하다고 보시는구나. 그러니까 참된 하나님은 이런 마음을 지녔구나" 라고 점을 딱 잡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32절, 33절에 보면 "여호사밧이 그 부친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마음을 정하여 그 열조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산당을 제거해야 됩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산에 있는 제단을 철수시키고 그것을 철거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산당을 철거하지 아니했다고 하나님께서 지금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볼 때 편리를 위하여 산당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왜 구태여 산당을 철거해야 됩니까? 그것부터 우리가 한번 따져봅시다. 백성들이 좋아서 섬기는데 그것을 왜 철거합니까. 그것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찾겠다고 나선다면 그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방민족들을 향하여 그들의 산당을 제거하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단군의 후손들에게 산당을 제하라는 소리를 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의 택한 백성, 택한 민족, 택한 이스라엘에게는 진짜 하나님이 이렇다는 것을 알려야 될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신앙은 신앙이라고 인정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진짜 하나님은 산당을 제거하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에 산당을 제거해야되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산당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시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구약시대 때, 하나님의 성전을 통해서 연결되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전 외에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산당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보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거기까지만 이야기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 뒤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자,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라는 말씀은 그 어떤 다른 길을 더불어 용납하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합니다. 그러니까 산당을 자연스럽게 여기지요. 거부감 없이 말이지요. 모든 인간은 뭔가 절대자에게 섬겨야 복이 온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그 신을 달래기 위해서 어떤 행동으로든 심술궂은 신의 성품 맞춘다고 온갖 귀한 돼지나 소나 양이나 곡식 같은 것을 바쳐서 어떻게든 신의 노를 누그러뜨려서 자기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조치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타고난 본성입니다. 제가 여기서 본성이라는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는데 인간의 본성은 두렵고 무서운 것이 많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힘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이라는 인간의 힘보다 더 큰 힘이 좌우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진이나 홍수나 태풍은 인간의 힘으로 안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최첨단 과학 연구소를 차리고 과학자들이 돼지 머리를 모셔놓고 거기다 만 원짜리 지폐 꽂아 놓은 것 보셨잖아요. 한국 과학자들이 인공위성을 띄울 때, 그전에 고사를 지냈습니다. 예배당 짓고 난 뒤에 "헌당식"이라는 고사를 지내잖아요. 이건 부동산이고 아무 것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예배라는 이름의 고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뭔가 모르게 우리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하는 요소, 그것이 옛날에는 아주 노골적이고 구체적으로 심술궂은 신들을 달래기 위해서 하늘과 땅이 제일 맞닿은 산위에 신전을 세워서 거기서 신에게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이게 뭐냐하면 보이지 않는 신과 내가 알고 있는 마음속의 신은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제사 드려놓고 하나님께 저주받은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가인입니다. 가인의 제사 드린 형태를 한번 봅시다. 가인은 최고급 예물을 성의를 다해서 하나님께 바치고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그 제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과 통하는 길은 두루 도는 화염 검으로 차단되어있습니다. 에덴동산에 들어가는 그 생명, 축복의 길은 이미 창세기 3장에서 막혀져있어요. 그 쪽에서 뚫어주지 않으면 들어갈 길이 없습니다. 저 쪽에서 제시하는 길이 아니면 이 쪽에서 아무리 사다리를 올려도 하늘에 도달될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 그것을 "벧엘"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야곱입니다. 야곱이 꿈꿀 때, 하늘에서 사다리가 내려오면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했습니다. 이게 창세기27장에 나오죠. 야곱이라는 사람, 하나님에게 선택되어서 태어난 사람, 그 위에 진짜 하나님께서 오르락내리락해서 하나님의 복과 저주의 결정을 거기서 내리죠. 신약 때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과 이야기하면서 나다나엘이 기도하는 것을 예수님이 홀로 아시고 "나다나엘아 네가 무화과나무에 있을 때에 내가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나다나엘은 "주님 내가 기도하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하고 놀랍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보고 놀라느냐 앞으로 인자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면 더 놀랄 것이다 너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구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한테 낯선 이야기만 자꾸 내뱉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하나님과는 전혀 거리가 먼 쪽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자꾸 제거해 버리기를 하나님은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제시한 길을 바로 믿는 자에게 오는 것이지, 성의와 정성을 바치면 하나님께서 축복 준다는, 그런 가인의 제사의 사고방식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돈 번다고 바쁘다 보니까 성경을 안보죠. 그러니까 제거하기는커녕 악마가 심어놓은 심성만 암 덩어리처럼 크게 온 몸에 퍼져있는 것입니다. 그 암 종양과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천당 가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산당을 제거하라고 하시느냐하면 이스라엘에는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이라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하나님이 정해준 길이 따로 있는데 무엇 때문에 가짜 하나님을 거기에서 찾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면 성전과 산당이 뭐가 다르기에 산당은 제거하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느냐하면, 성전 안에는 뭔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6장 18절에 보니까 거기에는 바로 언약궤가 중앙에 있습니다. 언약궤를 두기 위해 전 안에 내소를 준비하였는데, 바로 언약궤, 약속의 궤, 약속의 상자가 있습니다. 그 약속의 상자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죄를 유일하게 씻어주는 장소, 바로 그곳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모세에게 만들라고 당부했던 그 약속의 상자가 거기에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성전의 모든 구조는 그 약속의 상자가 해내는 능력, 사죄의 능력, 구원의 능력, 그것을 집중해서 성전구조가 짜여지는 것입니다. 제단에서 제물을 태우는 것도, 그 피는 7월 10일, 속죄일에 언약궤 위에서 피를 뿌리므로 말미암아 백성들의 부지중에 지었던 죄나 고의로 지었던 죄나 그 날만큼은 일년에 지었던 백성들의 모든 죄를 몽땅 씻어주는 날이 대속죄일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에서 보통 고의적인 죄는 속죄제를 지내도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십니다. 부지중에 지은 죄는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소를 정화하고 거룩하게 유지하면 되지만, 고의로 지은 죄는 제물 갖다 바친다고 용서받는 게 아닙니다. 산당 신과 다릅니다. 산당 신은 무슨 죄를 지었든 간에 제물을 갖다 바치면 축복을 해 주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지은 죄는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속죄일 만큼은 제사장이 들어갑니다. 제사장이 직접 그 안에 들어가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처럼 해서 제사장이 직접 소나 양이나 염소의 피를 가지고 죽음을 각오하고 들어가서 직접 하나님과 대면해서 뿌리는 그 피는 그 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해줍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는 그 제사장이 바로 우리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산당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거지요. 산당에는 바치면 복 받는다는 것만 있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같은 진리와 길은 없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속죄한 그 값어치를 무시하지 마세요. 우리를 속죄하기 위해서 흘리신 그 속죄의 가치를, 그 고귀함을 우리 쪽에서 돈이나 명예보다도 더 무시하고 멸시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성공이나 출세보다 무시하면 안됩니다. 우리의 성공이나 출세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흘리신 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피가 없더라도 나는 바치면 복 받는 게 좋다고 나오면 그 사람은 신자 아닙니다. 바쳐서 복 받는 게 좋은 사람은 성전이 아니고 언약궤가 없는 산당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산당을 제거하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은 절대로 둘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당 가는 길이 두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쪽에서 하나를 제시하면 그 하나로서 족하고 확정되었다는 거예요. 달리 인간 쪽에서 주물럭주물럭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그것으로 끝내야지, 민중들이 무엇을 원하고 어떤 신을 원하니까 우리 교회도 거기에 따라가야 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그건 교회가 아닙니다. 교인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는 거예요. 성경에서 하나님이 제시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본문 35절부터 37절에 보면 이 어리석은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다는 이 인간도 결국은 이스라엘왕 아하시야와 교제하며 심히 악을 행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취미가 맞고 성격이 맞고 대화가 되면 사귈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우리는 그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네 것이 아니고 하나님 것이니까 네 마음대로 하나님 없는 인간과 사귈 수 있는 자유도 없다는 거예요.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 몸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누구를 사귀든 상관이 없지만, 네 몸은 내가 들어있는 성전이니까 네가 함부로 믿지 않는 자와 사귀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키기 힘든 말씀 아닙니까. 목사들도 마찬가지지만 일반 교인들이 사회생활에서 먹고 살아야하는데 안 믿는 자와 동업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복잡한 사회에서 불신자와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산당을 제거하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복 주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이 결정하는 것이지, 인간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나라이기 때문에 제거하라면 제거해야지 여호사밧은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사밧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악한 인간과 사귀면 안 되는데 아하시야왕과 사귀어서 두 왕이 서로 결합하고 다시스란 먼 동네에 원정을 가기 위해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지어 보내니까 여기에 하나님이 보내신 엘리에셀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여호사밧왕을 향하여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는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지은 것을 파하시리라"고 예언하더니 그만 그 배가 파상하여 다시스로 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짜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를 다시 한번 결정합시다. 하나님과 세상, 둘을 사랑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남들처럼 출세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정말 우리가 기뻐해야 되고 고마워해야 할 문제는, 진짜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구원의 사다리를 제대로 알았고 제대로 믿게 되었다는 이 사실만 해도 우리 인생에 어떠한 어려움이 온다 할지라도 우리 영혼의 평화와 안정을 빼앗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꾸 마음이 갈라져서 뒤돌아보고 세상을 돌아보니까 불평과 하나님에 대해 대드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교회 키우는 것이 우선이 되면 안됩니다. 내 가정의 안정과 평안이 우선이 되는 게 아니라, 우주의 비밀, 감추어진 비밀, 하나님의 속죄의 놀라운 희생의 가치를 알고 깨닫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가 감격하고 너무나 고개 숙이면서 감사하는 그 마음이 한평생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짜 하나님 섬기면서도 죽으면 천당 가리라 여기는 가짜 신자로서 가득가득 채워지는 오늘날 교회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그런 자들을 용납하고 봐 준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줄 압니다. 선지자처럼 이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