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옳은 일 (역대하 19:1-7)
16. 옳은 일 (역대하 19:1-7)
1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2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3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4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거하더니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 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5 또 유다 온 나라 견고한 성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6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7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하나님께서 아직도 저희들을 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게 하게 하심인 줄 압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주의 사명의 핵심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서 구체화 될 수 있는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성경에 보면 신앙인이 나옵니다. 요사이도 신앙인을 보기란 드문 마당에, 어느 시대든 하나님 믿는다는 것이 상당히 낯선, 특이한 존재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들어가 보면 그 신앙인들이 나옵니다. 그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기도 하고 칭찬을 받기도 합니다. 거기에 비해 '나도 배울 만큼 배웠으니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조로 나오는 현대인과는 다르게 이 성경 안에 있는 사람은 상당히 겸손합니다. 선지자가 뭐라고 나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곧이곧대로 순응하는 그런 태도를 보입니다. 어쨌든 간에 성경 안에 신앙인이 있다는 이 사실만 해도 오늘날 우리 시대에 대단히 신기하고 특별하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얼마든지 자기 머리를 굴리면서 살수도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겁나서 하나님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존재를 의지하면서 사느냐는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편리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서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지목해 선택했기에 하나님 믿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좋든, 싫든, 그런 운명이라는 거죠. 내가 하나님 믿는 운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 믿는 것이 내 생활에 편리할까, 불편할까, 이걸 따져서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흔히 일반종교도 기도를 많이 합니다마는 기도 많이 했더니만 하나님 알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서 통할 수 없습니다. 인간들이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의해서 그 응답으로 우리에게 신앙이라는 것이 생겨났지, 내 기도의 응답으로 신앙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기도는 내가 있는 현 처지에서 내 욕망의 수위에 맞추어 기도하기 때문에 그것은 주님이 주신 진짜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인은 내가 무엇을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벌리셨기에 나에게 이런 결과가 생겼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특별나고 특수한 사람이죠. 성경에 선지자에게 책망 받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못난 사람인 줄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책망을 받더라도 이것은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므로 말미암아 후세 사람들에게 이러이러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시범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다윗대로 보여줄 것이 있고, 여호사밧은 여호사밧대로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다고 따지지 마시고 이 사람들이 아무리 잘못해도 우리보다는 조금도 못한 사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그것을 초월하는 초능력의 힘에 의해서 완전히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에 감히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차원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의 운명을 통해서 성경책을 읽는다고 보면 틀림없죠.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점을 설명해드리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 믿는 것도 자기의 이득과 연관시키지만, 신자는 손해가 되든, 이익이 되든, 어떤 환경이 오든 간에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의 사명이고 자기가 보여 주어야할 몫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선택되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여호사밧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우리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여호사밧이 구원받았는지, 지옥갔는지, 그런 것을 저한테 묻지 마세요. 그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입니다. 여호사밧이 보여 줄 하나님의 계시는 무엇인지 이것만 챙기면 됩니다. 여호사밧은 왕입니다. 왕의 자리는 유혹의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여호사밧왕이 국가를 스스로 한번 지탱해 보려고 저쪽 북쪽나라와 결탁을 해서 뭔가 외교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시도를 했더니만 선지자가 나타나서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이 어떤 권력의 자리에 앉으면 자기 마음대로 잘 안됩니다. 그 자리가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순간부터 도리어 그 자리가, 직책이, 직위가 자기를 억누르고 그 사람을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 앉게 되면 생각하기를 그 직위와 권한을 내가 가졌다고 생각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그 직위가 자신을 마음대로 조정합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돈을 가졌는데, 돈이라는 것이 나의 즐거움과 욕망을 채워주잖아요. 그런데 일단 돈을 가지고 보면 돈에게 오히려 돈을 더 벌도록 요구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사밧은 왕이기 때문에 북쪽 왕이 외교적 제안을 할 때에 거절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것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깐 여호사밧이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그 선을 자기를 제대로 아는 출발점으로 삼고 다음 행동에 옮깁니다. 자기 실수 한 것을 경험 삼아서 그 다음부터는 전 국토를 두루 심방을 합니다. 전 나라에 순례를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재판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이 백성들 속에 전파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재판관들을 세우는 작업을 합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재판관에게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고 6절에 당부합니다. 이 본문말씀이 상당히 어려운데 7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 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이해를 하려면 먼저 순전히 사람을 위한 재판을 벌릴 때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만 위해서 재판 할 때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를 명확하게 해 주어야합니다. 실제로 교회 속에서 그 차이를 찾아봅시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할 때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일들을 보면 이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기의 자존심을 더욱더 고취시키는 쪽의 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은 너, 나 상관없이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잖아요. 따라서 모두 동일하게 용서받았기에 교회에서 높은 자, 낮은 자가 있을 수가 없잖아요. 자 그런데 실제로는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까? 그 원인을 알아봅시다. 우리가 어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때에 인간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를 먼저 생각해 봐야합니다. 기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에서 기도한다면 기도 오래 하면 응답 많이 받고 짧게 하면 조금 적게 응답 받는다고 여기겠지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감사한다는 내용이 동일하면 하나님께서 그 헌금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헌금의 원리를 인간적인 것으로 바뀌면 금액의 많고 적음으로 수준을 가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예수님의 기도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예수를 믿게 됩니다. 어떤 인간이든 구원되었다는 것은 모든 전도의 원천을 십자가의 능력이신 주님 앞에 돌리게 되어있는데 이것을 인간적인 전도로 바꿔버리면 평소에 사람 만나기 좋아하고 사교적인 사람은 전도 많이 하게 되고, 비사교적이고 적극적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도의 경쟁에서 뒤떨어지겠지요. 이것이 인간적인 전도입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는 전도에 시상을 걸고 사람 많이 데려오지 못한 사람들은 기가 죽게 되죠. 교회에서 벌이고 있는 성경암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작 주께서 원하시는 성경 읽기는 성경이 하나의 삶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을 우리는 지금 예후라는 선지자가 여호사밧에게 온 경우를 가지고 알아봅시다. 세상에서의 실패가 하늘나라에서는 성공한 인생이고,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하는 그런 생각에 아직 매여있다면 그것 자체가 주님 앞에 실패한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거꾸로 된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뒤집어내고자 하는 식으로 지금 여호사밧을 이끌고 있는 겁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교회에 와서 낙심하지 맙시다. "주여 저는 죄 지었습니다."고 고백하는 자는 성공한 자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주여 저 착한 일 많이 했습니다"고 자기의 선행을 나열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아직 교만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보는 관점과 정 반대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인식을 가져야됩니다. 연세 80세 넘어서 성경구절 하나 못 외워도 내가 죄인임을 아는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과, 성경구절 많이 외워 교만한 자와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지금 재판을 할 때 여호사밧은 먼저 인간을 위한 잘못된 재판부터 먼저 거론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지금 자기는 왕의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왕의 자리에 연연해하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재판할 때는 재판하는 자체에 연연하기 쉽기 때문에 힘없는 사람에게는 점수를 적게 주고 무시해 버리며 돈 많고 뇌물 많이 주고 힘있는 사람에게는 후한 점수를 줘서 유리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역대 인간들이 해왔던 재판 아닙니까? 그 원인은 재판장으로서 오로지 성공해서 그 권력의 자리를 계속 유지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실패의 재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뜻과 다르다는 이야기입니다. 왕의 자리가 괜찮고 대단한 사람임을 확인시켜 주는 자리가 아니고, 나 같은 자는 왕의 자리에 앉을 가치도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앉혀 놓는 거예요. 이것은 목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운 이야기인데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을 갑니다. 그 순간만큼은 실패한 거죠. 그런데 밤에 잠을 자는데 사닥다리가 나타났습니다. 그 사닥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봅니다. 거기서 야곱은 도망하게 한 형을 원망하기보다는 하늘에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광경을 보며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지, 놀라운 그 은총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뜻이 야곱을 통해서 이루기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네가 잘된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뜻을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놓치지 않고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사울이 바울 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에게 찾아오실 때에는 사울은 죄인중의 괴수였습니다. 어디 잘난 구석이 있어서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가 이렇게 못되게 굴었더니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정체를 밝혀주면서 들어오시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내가 나된 것은 나의 노력과 나의 잘남이 아니라는 것이 나타나지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란 말을 제대로 정말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왕의 자리도 마찬가지고 재판관의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제일 오해하는 것은 내가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왔다는 그런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하나님이 찾아오셨는데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나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잘난 사람으로 될 것이다, 성공한 인생으로 살 것이다, 이런 착각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그 성공이라는 것이 본인을 더욱 지옥 백성으로 만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내가 잘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오신 줄로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재판할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재판을 해버리면 하나님 빙자해서 계속 자기 잘난 맛에 살고, 타협과 뇌물을 주고받으며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그런 엉터리 같은 사명자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인간의 일과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빈 껍데기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신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이라도 해내시고야 마신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두 차이를 분명히 안다면 그 사람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더라도 분명하게 이야기 할 것입니다. 바로 인간이 하는 것은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 알 것이고 진짜 하나님의 일은 바로 겸손, 마음을 낮추는 것임을 분명히 알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합니다. 선지자가 찾아오고 여호사밧이 순행하면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재판하라고 하는 것은, 왕이 나쁜 짓 해서 선지자에게 꾸중을 듣고 마음을 낮추는 것처럼, 왕도 마음 낮추고 재판하는 너도 마음 낮추고, 그리고 재판 받는 백성들도 더불어 마음을 낮추어서 오직 모두 비어있는 마음으로 돌아가 그 마음속에 모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다 하신다는, 하나님의 공로만 높이 드러내는 그런 나라로 회복되기를 오늘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박사교회는 어떻습니까? 초점을 너무 성공위주, 높아지는 위주로 하지 마시고, 그런 것은 모두 인간적인 생각이고, 낮아도 괜찮더라, 실패해도 봐주더라, 그 어떤 것도 주님의 용서하심에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주님의 용서만 가득 담겨서 늘 가볍고 빈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정신은 세상에 빠져있지는 않습니까? 성공은 해야 되겠는데 어떤 수단을 부려서 하나님을 이용하고 하나님까지 나의 성공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건방진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 높아지기보다는 차라리 낮아지는 쪽을 선택하게 하시고 낮아짐 속에 오직 주님의 위대하심과 주님의 높아짐만 증거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