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십자가신학] 2005-08-27
[루터의 십자가신학] 2005-08-27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루터의 십자가신학
이준 2005-08-27 22:12:34, 조회 : 237, 추천 : 20
목사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다름 아니라, 루터의 십자가신학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 지 여쭙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십자가신학의 내용을 액면 그대로 수용해도 됩니까?(특히, 그의 십자가 신학이 제시하는 예수님의 고난과 그에 상응하는 성도들의 고난 -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동참이라는 안목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수용 여부)
혹시 목사님께서 보실 때 "루터의 십자가신학"과 "이근호의 십자가 신학"의 차이점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이 점이 매우 궁금합니다)?
루터는 사변적 신학에 대해 통렬히 비판함과 동시에 자신의 십자가 신학의 경험적 토대를 강조했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자신의 십자가 신학은 이근호 목사님처럼(성경신학의 세계1을 비롯한 목사님의 신구약성경강해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성경신학적 방법론에 기초를 둔 것인지요?
그의 십자가 신학에 담긴 바, 숨어계신 하나님, 노예의지론, 성부의 거울이신 그리스도, 그리스 철학의 유신론적 신관에 대한 배격...등을 신학사전과 두 편의 루터의 십자가 신학 관련 석사 논문을 통해 접하면서 이근호 목사님의 십자가 신학과 상당부분 중첩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의 성경신학적 방법론의 터 위에 구축된 십자가 신학의 전통(연원?)을 루터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루터의 그러한 "고난" 신학은, 자신이 정립한 정교한 신학 체제의 철저한 경험적 적용을 위해 76명을 추방하고 58명을 사형시켰던 칼빈의 처사 - 고난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 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인상을 받습니다(물론, 살인의지는 누구에게나 그 내면세계에 도사리고 있긴 하지만).
우리 주님의 고난과 그러한 주님 자신의 고난에 동참시키시는 섭리에 대한 안목에 대하여 좀더 알고 싶은 차원에서 여쭙는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만 자랑하려한다는 사도 바울의 말씀의 내막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과 일치하고, 또 그것이 다행히(!) 이근호의 십자가 신학과 일치한다면 이 고난 신학이 제시하는 안목을 성경을 대하고, 삶을 대하는 중심 관점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리는 것은, 특정인과 그의 사상을 우상시해서라기 보다는, 루터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글을 대하면서 그의 그러한 고난 신학은 참으로 그에게 삶을 가르는 절대적인 안목으로써 작용했으며, 교회 아닌 교회들을 겨냥하는 하나님의 엄정하신 메시지였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의 신학은 가짜 하나님(유신론적 신관)을 들추어 내고, 예수님의 고난을 도외시하고 그분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따라감이 없음을 지적하며, 무엇보다 지상 교회들의 비복음적 실상을 십자가로 겨냥하고 있었습니다(물론 교회개혁운동가들이 이것을 가지고 그들 주장의 재료로 삼기도 하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사도 바울이 자랑하려했던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라면 그것을 절대적인 안목으로 택하는데 무엇을 주저할 것이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제 생각에 문제가 있다면 여지 없이 지적해 주세요. 목사님의 고견 부탁드립니다.
목사님과 봉사하시는 모든 분들께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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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루터의 십자가신학
이근호 2005-08-28 06:52:21, 조회 : 259, 추천 : 35
루터의 전 신학적 진술들은 십자가에서 흘러나와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의 생각과 동일합니다.
십자가에서 도출하지 않는 신론이나 구원론 삶을 논하는 것을 루터는 거부합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죄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계시에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선택론에 대해서, 주권론에 대해서, 은혜에 대해서, 신앙에 대해서
그 모든 여타의 주제들도
모두 십자가에서 출발해서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루터의 신학은 한마디로 말해서, 숨어있는 하나님께서 오로지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 고난을 오직 자기 백성들에게만 그대로 제공해서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신학입니다.
이것은 인간 쪽에서 신을 추론해서 파악하는 모든 시도를 이방종교에서 말하는 우상숭배의 반복적 행위로 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인간이 주체자라고 여기고 나오는 '행위'는 곧 '숨어있는 믿음'에 대적하는 것이 되고
참된 믿음이란 곧 십자가 고난 안에 놓이게 하신 숨어있는 주님의 능력이요 선물이 됩니다.
여기서 알아야 될 참으로 점은,
'숨어있다'는 그 십자가 안의 세계를 따로 빼내어 그것만이 '긍정적으로 진술하는 신학 전개'가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왜 그런고하니
신학 논리 전개나 진술조차 인간을 부정하시는 십자가 능력 안의 고백으로만 증언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루터적인 복음 전파로 목사가 밥먹고 살려는 생각은 아에 버려야 한다는 겁니다.
십자가에게 올인(몽땅 다 거는 것)하지 않는 자를 결코 주님께서 '십자가 안'에 놓인 자라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루터 이후
루터를 추종하는 자들이 곧장 변질됩니다.
그들은 '개인의 십자가'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을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즉 십자가 신학을 하나의 상품화된 신학으로 포장해서 유통시킨 겁니다. 그들은 그것을 통해 '교회 갖기'를 노렸던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은닉된 교회'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개연적으로 구원 보장이 유력시 되게 하는 그런 '보이는 교회'를 지향해서 자신들의 존재성을 사회적으로 인정받고자 한 것입니다.
십자가 신학에서 제일 중요한 요건인 '본인의 죽음길'을 기초로 하지 않고 그 반대로 '사는 길'을 택한 겁니다.
그 이유는,
살고자 하는 자의 눈에서 십자가 마저 '긍정적으로 사는 십자가'로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신학과 루터의 신학을 비교하지만
루터의 신학의 시대는 교회 정치가 사회 이데오르기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시대는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교회든, 가정이든, 국가든 돈의 획득이 곧 '하나님이 배후에서 후원해주심'의 측정치로 간주하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종교적인 요소와 '숨어있는 십자가'를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 획득에 나서는 목회 정책'과 '십자가'를 대비하는 연계가 십자가 신학 안에서 마련되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노골적인 교회 종교로 인간의 죄악이 양성화되는 시대와
돈에 대한 욕망으로 넘치는 식으로 죄악이 양성화된 이 시대와는 서로 다르기에
십자가 복음은 또다른 고난의 얼굴을 띠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돈 바치지 않고서도 용서가 되고, 돈 바치지 않고서도 의인이 되는 십자가 복음이어야 말로 비로소 자유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복음을 위해 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돈에 무관심해지는 고난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돈을 벌어서 그 번 돈으로 복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식이라면 이 자본주의 경제 구조 속에서 '창기'가 버는 식으로 더럽게 돈을 벌어야만 하는데, 이런 식으로 돈 벌기에 깨끗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복음과 자기 노동의 대가를 연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사는 것이지, 자기 노동으로 인해 사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기가 복음과 대비가 되는 '인간 행위의 그 노고성, 혹은 대가성'을 루터 시대보다 더 광범위하게 조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자본시장에서 "칼빈의 주권론이나 성화론이 어떤 경로를 밟아 교회가 돈을 획득하는 정당성을 부여하는가?"를 조시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주권론과 성화론이 얼마나 비복음적인 가를 고발하므로서 이러한 고발이 곧 십자가 복음이 이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여전히 '은닉의 능력을 발휘함'을 증언할 수 있는 겁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지면,
제 글 '악마의 진격'에서 밝혔듯이
"오늘날 교회관이나 신관이나 종교관이나 구원론이 자본주의적 배경에서 나온 산물이다. 욕망의 흐름이 뭉쳐져 종교라는 형태로 전환된 것에 불과하다.
이 자본주의 사회는 악한 영의 조정을 받는 의식이 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유통되고 있다. 따라서 이 자본주의 사회에 '종교'라는 영역을 따로 확보해서 거기서 교회라는 이름의 조그마한 가게라도 시작하려면 자본주의적 욕망에 편승해 주어야 한다.
자본주의적 욕망은, '개선' 내지는 '개혁'되어져 간다는 여운을 남기는 그것을 곧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양상은 '이성'이 의한 '반성적 기능'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이다. 즉 자기 반성과 자기 회개들을 양산시켜 이런 자기 반성과 회개 작업을 접속시키고 결합시키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역사'라는 상상적 활주로가 요청되는 것이다.(오직 믿는 것은 자기 멋대로 정리한 역사에 대한 기대를 거는 일 뿐!)
쉽게 말해서 "앞으로 점차 나아진다는 기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나의 존재는 상당히 건전함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보는 의식이다. 따라서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나아짐'과 '개선되어짐'을 확인시킬 그런 사건들을 신경곤두세우면서 수집에 나서서 모아놓으면 그만이다.
곧 '자기 의로움 수집 기능' 여기에 자기 교회의 사활이 달렸다고 보고 있다. 자기 정당함을 얻기 위해 교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자기 의로움을 확인시켜줄 사건을 유발시킴으로서 그것을 신의 계시로 간주하는 짓들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주의에서 '자본'이 '자본'을 낳는 자본 '재생산'기능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나의 의로운 행위'가 내가 살아 있는 한 지속적으,로 '나의 의로움을 재생산시키는 기본 토대가 된다고 본다.
쉽게 말해서 자신의 종교심에다 목숨을 다 바치고 충성을 다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여전히 걸림돌이 된다. 이들은 십자가 복음을 회피하고자 예수님 대신 삼위일체 신학으로 대체시킨다."
라는 식이 되지요.
루터는 자기 사후에 일어난 이런 자본주의적 특성을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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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아멘!
이준 2005-08-28 08:07:54, 조회 : 228, 추천 : 70
목사님,
늘 감탄...
감격....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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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5:39에 관한 질문 입니다.
김대영 2005-08-29 20:57:25, 조회 : 199, 추천 : 42
반갑습니다. 성경을 보다가 의문이 생겨서 질문드립니다. 요5:39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경이 곧 예수님에 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여기서 예수님이 성경이라 말씀하신것은 토라를 가리키는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5:39에서 말하는 성경과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66권)이 분명 다를텐데 어떻게 모든 성경이 예수에 관한 계시라 말할때 요5:39을 들면서 말할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분명 지시한 그 부분만이 예수님에 관한 부분이고 나머지는 적용되지 않을수도 있는것 아닙니까? 귀찮으시더라도 답변 부탁드립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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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요5:39에 관한 질문 입니다.
이근호 2005-08-29 22:04:50, 조회 : 213, 추천 : 36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십자가 이후에 본격적으로 성취될 말씀입니다.
구약에 대해서 자신에 의한 성취를 언급하셨다면 십자가 이후의 신약의 말씀에 대해서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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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요5:39에 관한 질문 입니다.
김대영 2005-08-30 22:42:19, 조회 : 129, 추천 : 37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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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66권에 관한 질문입니다
김대영 2005-08-29 21:04:09, 조회 : 183, 추천 : 42
한꺼번에 질문하여 죄송합니다. 이것도 갑자기 생각이 나서 물어봅니다. 70인경과 개신교에서 보는 66권 성경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외경이 빠져 있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당시에 66권으로 확정된것이지 예수님과 사도들 조차도 70인경으로 사역을 하였고 그후 약 1500년간 교회(지금의 캐톨릭)가 70인경을 보아 왔는데 종교개혁당시 66권만을 선택하여 나머지 7권을 외경이라 이름 정하여 빼버린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 66권만을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를 충분히 알수 있고 신앙생활하는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별 문제 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지금 성경(66권)에서 일부분을 제하여 버리고 나머지 성경만으로도 신앙생활 할수 있다 한다면 상당히 심각한 상태에 직면하리라 봅니다. 우리 개신교가 보고 있는 66권의 성경은 이런 부분에서 몇권이 빠진 성경이 아닙니까? 전에 캐톨릭 신부랑 이야기 도중 의문이 들었지만 답변을 찾지 못했습니다. 혹시 알고 계시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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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 66권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근호 2005-08-30 18:56:15, 조회 : 210, 추천 : 43
>성경은 너무나도 통일성이 있어 66권이 마치 단권처럼 느껴집니다.
숱한 유사 성경이 이 '단권적 말씀의 끼어들기'를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혹은 어떤 성경 내용은 배제시켜 '단권적 성경의 통일성'을 깰려고 했지만 여전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의 굳건한 사도성을 기반으로 계시적 권위를 지속하려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흔히 외경이라고 알려진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전체 내용과 조화되지 않는 겁니다.
따라서 당연히 성령님에 의해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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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 66권에 관한 질문입니다
김대영 2005-08-30 22:34:27, 조회 : 168, 추천 : 38
감사합니다. 그런데 목사님 제 질문을 잘못 파악하신것 같은데 목사님 말씀대로 사도성을 기반으로 계시적 권위를 지속하려는 성경이 종교개혁 당시에 정해졌다는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사도들 조차도 70인경(당시 외경은 포함되었으나 신약이 제외된)을 보았고 교회(지금의 캐톨릭)는 그것을 성경이라 정하고 계속 보아 왔습니다. 즉 지금의 66권 성경의 조합은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고 70인경만이 성경으로 교회가 보아 왔는데, 그렇다면 종교개혁 이전 약 1500년간 보아온 성경에서 지금 외경이라 불리는 7권(다니엘서 제외)도 명백히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보아 왔을 것 입니다. 그것을 외경으로 분류한 것이 종교개혁 당시입니다. 즉 종교개혁 이전에는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가 지켜오던 것이 종교개혁 이후 외경으로 치부되어 성경이 아니라고 하는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럼 1500년간 외경을 보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보아온 믿음의 선조들이 모두 잘못되었고 종교개혁 당시 외경이 성령님에 의해서 분류 되었습니까? 정말 궁금합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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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경 66권에 관한 질문입니다
권범식 2005-09-01 19:40:57, 조회 : 177, 추천 : 33
안녕하세요...김대영님
님의 질문은 언제나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도 이전에는 캐톨릭 신자였는데 제가 알기로는 외경은 구약에 있던 것이 아니고 신약이후에 쓰여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도 정확히 알아보진 않았지만, 외경이 제외된 이유는 예수님 시대까진 외경이 없었고요 이후에 로마 국교로 정해지면서 캐톨릭에서 추가했다고 들었습니다.(정확한건 인터넷 지식 검색 해보시는게 빠를듯)
일단 외경의 유래는 차지하고요, 목사님의 답변의 뜻은 이렇게 풀이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성경은 요한복음5:39에 예수님이 분명 성경의 목적에 대해서 말씀 하셨습니다. 그런데 외경이 제외되었다면 그것은 분명 그 목적에 부합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성경 66권은 위의 목적에 아주 잘 부합되고 있으며 글 쓴이들이 각기 틀리지만 예수님의 성경 소개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지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런데 외경이 제외된 것은 필경 예수님의 소개와는 다른 의도로 추가된 책이었기에 성령님에 의해서 잘려져 나간 것으로 보아집니다.
그럼 언제나 평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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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제 질문은 그게 아닌데...
김대영 2005-09-01 23:20:09, 조회 : 228, 추천 : 38
70인경의 유래에 관하여는 캐톨릭측과 보수측에서 서로 주장하는 바가 조금 다릅니다. 바로섬에서 70명의 히브리 학자가 모여 해석했다는 설을 개신교측에서는 부인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유능학 히브리 학자 70명을 그리 한곳에 소집하기가 어려웠다는 말도 있고 한데 어쨌든 70인경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성경임은 확실하고 시기는 주전 2세기로 추정됩니다. 이때 히브리어로 쓰여지지 않은 성경 7권이 함께 쓰여 지는데 이것이 당시에는 외경이 아닌 명확한 성경으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지금 우리가 외경이라 부르는 7권의 성경이 포함된 70인경을 가지고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 7권의 성경(우리가 지금 외경이라 부르는)은 주로 말라기 이후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쓰여진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셨을때는 이 70인경이 널리 퍼져 있었던 상태였고 당연히 7권의 성경이 포함된 상태 였습니다. 즉 예수님이 인용하신 성경이 70인경 이고 이 성경과 함께 신약을 합쳐서 교부들이 정경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전 약 1500년동안 교회가 보아온 성경이요 종교개혁 당시 프로테스탄트는 70인경중 히브리어로 쓰여지지 않은 7권을 빼고 나머지 66권만을 채택하여 지금껏 보아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보는 66권의 성경은 예수님도 성경으로 인정한 7권의 성경을 마음대로 빼서 외경이란 이름하에 쓰잘데기 없는 것으로 치부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 의문으로 저에게 작용하냐면 그냥 쓸데없는 의문이 아니라 말라기 이후 400년의 공백기와 그 이후에 예수님께서 오신 사건을 일반적으로 400년간의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계시하지 않은 상태 즉 인간과 상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모든것을 동원하였지만 할수 없었던 인간의 실패한 인생인 구약을 가르치신후 신약에서 예수님이 등장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뭔가를 제시하지 않으시고 바로 "회개하라"라고 하시면서 등장하시는 이유가 바로 구약에서 해볼만큼 해봤다는 것 입니다. 여기서 400년간의 암흑기라는 해석은 66권의 성경으로부터 해석된 것으로 보아집니다. 하지만 70인경에 의하면 이 당시에도 계시는 계속 되었던 것 입니다. 따라서 암흑기가 아닌 것 입니다. 신구약중간기의 역사와 맞물려 돌아가는것이 7권의 성경인것 입니다. 즉 7권의 성경을 인정하냐 인정하지 않냐는 성경해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치부됩니다. 얼렁뚱땅 얼버무려 성경이 이것이라 말은 하지만 역사가 그렇지 않다는 것 입니다. 물저는 고등비평을 제 신앙으로 막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입니다.(뭐 이건 고등비평이 아니지만) 다만 어거지성이 있는 부분이 우리 개신교에 있는것 같아 질문 드립니다. 그럼 평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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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죄송합니다. 제 질문은 그게 아닌데...
이근호 2005-09-02 06:53:14, 조회 : 276, 추천 : 37
그래서 역사란 현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위한 장식품이라는 겁니다.
전체 교회사나 개별 교회 역사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신앙고백 공동체가 그 이후에는 정치적 이데오르기로 곧장 전환되는되고, 또한 그것이 실제 독립국가체제로 구체화되는 예가 허다합니다.
오늘날 교회들도 간이 정치조직체들입니다.
진리 위주가 아니라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과거 유물을 수호하는 집단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신적으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의 후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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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에 관해 다룬 괜찮은 서적 부탁드립니다.
손승범 2005-08-29 23:17:32, 조회 : 147, 추천 : 41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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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약에 관해 다룬 괜찮은 서적 부탁드립니다.
이근호 2005-08-30 19:02:43, 조회 : 213, 추천 : 40
>요즈음 나오는 구약 성서(성경)신학 책들이 거의 모두 언약을 다루고 있습니다.
'계약신학과 그리스도'(CLC)라는 책과 카이저의 '구약신경신학'이 보수측에서 유명합니다.
자유주의 계열에서는 '히브리식사고와 기독교'와 '조직신학'(한국신학연구소)'책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김이곤 교수가 쓴 '신의 약속은 파기되지 아니한다'는 책도 보면 얻을 것이 많은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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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김대영 2005-08-30 22:48:58, 조회 : 185, 추천 : 43
구약 당시 모세나 다윗 같은 사람들이 구약성경중 일부분만 보면서 하나님을 믿었을 것 입니다. 물론 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이들이 언약의 핵심체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시110:1에서 다윗의 고백과 같이 "내주"가 있었던것을 다윗이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며 즐거워 했다 하면서 자신이 제사장권을 침범했지만 살수 있었던 것은 다윗은 구약을 살았지만 신약을 산 사람이라고 봅니다. 비단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율법만 가지고도 율법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제대로 믿어 구원에 이른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율법만을 보는 랍비나 유대교 사람들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참뜻을 발견하여 구약의 인물들과 같이 예수를 만날수 있지 않습니까? 즉 구약속에 그리스도가 계시되어 있다면 구약만 보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에게 접속될수 있는것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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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이근호 2005-08-31 09:23:13, 조회 : 246, 추천 : 39
믿음이란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일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연구해서 구원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 사람들에게도 활동하셔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게 한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 신학을 연구한 신학 박사들이라고 해서 구원되는 사람이 아니요 신약 성경 신학 박사들이라고 구원되는 사람이 아닙니다.
참 성도란 구약을 보면서도 복음적으로 이해가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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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김대영 2005-08-31 14:33:24, 조회 : 171, 추천 : 46
그러면 토라를 보는 지금의 유태교에도 구원이 있을수 있는겁니까? 또 신약 성경을 보지 않고도 구원에 이를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답을 좀 명료하게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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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이근호 2005-08-31 15:04:09, 조회 : 212, 추천 : 44
>지금은 판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장기판이었다면 지금은 바둑판입니다.
장기률의 안목으로서는 바둑을 둘 수 없습니다.
지금 율법을 읽는 눈은 오직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에 국한 됩니다.
십자가로 보아서 십자가만 발췌하게 됩니다.
신의 존재성, 주권론, 이런 것들은 장기둘 때 사용하던 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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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김대영 2005-08-31 20:18:41, 조회 : 178, 추천 : 43
자꾸 질문드려 죄송합니다. 궁금증이 많아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구약성경만 가지고 구원에 이를수 없습니까? 즉 구약시대에 바둑판의 안목을 몇몇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까? 율법을 보고 그것을 지키려 하지 않고 거기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중보자를 찾았던 구약의 사람들은 분명 바둑판의 안목을 가졌던 자들일 것 입니다. 그럼 이제 더 이상 구약의 율법만을 보아선 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물론 신약을 배제하는 유태교와 같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 입니다. 어떻게 구약의 사람들이 보았던 율법과 동일한 말씀(율법)을 지금 보는데, 당시에는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길이 열렸는데 지금은 열리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조금더 구체적인 답변 부탁 드립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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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이근호 2005-08-31 21:13:25, 조회 : 221, 추천 : 58
>지금도 구약 때 보았던 그 바둑판 안목이 바로 복음적 안목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구약을 보더라도 신구약 다 합친 복음적 안목이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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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김대영 2005-09-01 09:44:30, 조회 : 165, 추천 : 44
목사님 그러면 유태교에 지금도 구원이 있을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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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지금도 구약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나요?
이근호 2005-09-01 10:39:23, 조회 : 244, 추천 : 42
특정 종교가 구원이 되고 아니되고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합니다. .
유대교 뿐만아니라 기독교도 사람을 구원시켜 주지 못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이 시켜주시는 겁니다.
특정 종교를 붙잡기 보다는 예수님이 하신 공로를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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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김대영 2005-09-01 22:56:35, 조회 : 149, 추천 : 38
감사합니다. 제가 목사님께 얻을 수 있는 답은 이게 전부 일듯 합니다. 여기서 종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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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리나요?
김대영 2005-08-30 23:15:34, 조회 : 165, 추천 : 46
언약궤 위에 제사장이 피를 일곱번 뿌린다는 어느 글을 보고 예전부터 의문이었는데 생각나서 질문드립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내용이 안나오는것 같은데 언약궤 위에 제사장이 일곱번 피를 뿌리는지 알고 싶습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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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약궤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리나요?
이근호 2005-08-31 09:20:33, 조회 : 211, 추천 : 40
> 대 속죄일에 양을 7 마리 잡는다고 아마 7 번 뿌리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몇 번 뿌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예수님께서 일곱 법 십자가 지고 달려 죽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단번에! 죽으심으로 성도에게 거룩이 제공됩니다. 이 은총은 우리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번 정도가 아니라 영원도록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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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약궤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리나요?
김대영 2005-08-31 14:36:31, 조회 : 165, 추천 : 43
감사합니다. 죄송하지만 성경 어느 부분에 여기에 관하여 나오는지 알고 싶습니다. 레위기 4장에 봐도 언약궤 위에 피를 뿌리는 것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성경 어느부분에 나오는지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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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약궤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리나요?
이근호 2005-08-31 15:07:14, 조회 : 194, 추천 : 43
레위기 23:14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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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언약궤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리나요?
김대영 2005-08-31 20:02:50, 조회 : 174, 추천 : 45
목사님 죄송한데요 거기에도 나오지 않는데요? 혹시 구절을 잘못보신것이 아닌지...
레23:18 너희는 또 이 떡과 함께 일 년 되고 흠 없는 어린 양 일곱과 젊은 수소 하나와 숫양 둘을 드리되 이들을 그 소제와 그 전제와 함께 여호와께 드려서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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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리나요? 김대영 2005/08/30 46 166
[re] 언약궤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리나요?
이장우 2005-09-01 06:34:09, 조회 : 215, 추천 : 39
레위기 16:14절에 나옵니다.
"그는 또 수송아지의 피를 취하여 손가락으로 3)속죄소 동편에 뿌리고 또 손가락으로 그 피를 3)속죄소 앞에 일곱번 뿌릴 것이며"
언약궤 뚜껑이 속죄소입니다. 그 위에 피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일곱번 뿌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 C.D에서 검색하면 바로 찾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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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렇군요
이근호 2005-09-01 07:10:24, 조회 : 210, 추천 : 43
레위기 16:14로 수정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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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16:14에 나오는 내용과 언약궤에 관하여...
김대영 2005-09-01 09:53:06, 조회 : 156, 추천 : 38
감사합니다. 저도 이 구절을 알고 있었는데, 속죄소 위에 뿌린다는 말은 나오지 않더라구요... 그러면 결국 속죄소 위에 피를 일곱번 뿌린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까? 예전에 언약궤에 관한 글을 보니까 인간의 죄악을 담은 3가지 물품(항아리,지팡이, 돌판)을 담고 그것을 어린양의 피가 덮고 있다고 하시면서 속죄소 위에 피를 뿌린다고 말씀하시던데, 그래서 항상 언약궤 위에는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다는 글을 읽었는데 그 내용이 잘못된 것 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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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레16:14에 나오는 내용과 언약궤에 관하여...
이근호 2005-09-01 10:37:38, 조회 : 210, 추천 : 38
그렇지 않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언약궤 앞에 뿌리나 위에 뿌리나 속죄소(즉 언약궤 뚜껑)에 피가 발리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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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그런것 같습니다
김대영 2005-09-01 22:54:53, 조회 : 202, 추천 : 46
감사합니다. 원문에 보니 여러가지 뜻으로 나오는데 "파님"의 의미가 위에 뿌리는 것으로 보는것이 타당할듯 합니다. 도움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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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선지자와 고멜의 결혼
김명현 2005-09-10 08:36:50, 조회 : 207, 추천 : 42
호세아 선지자가 고멜과 결혼한 것은 분명한 일인데, 이 사건에 대해, 이것은 역사적인 실제 사건으로, 또는 상징과 비유라는 등으로 신학자들이 나뉘어져 해석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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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호세아 선지자와 고멜의 결혼
이근호 2005-09-10 09:18:06, 조회 : 235, 추천 : 21
>오늘날 성화론자들은
성화된 자들의 모델을 성경에 나오는 성도들에게서 찾게 되는데
만약 진실로 호세아와 타락한 여인과 혼인을, (그것은 의도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했다면,
오늘날 성도들이 자신들의 성적 쾌락을 즐기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면서 호세아의 예를 들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소지가 있기고 여기기에 아예 성경 전체에서 '경건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상징적 해석에다 눈을 돌리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발상이 도리어 십자가 복음을 가로막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의 삶이란, '죽음에서 올라오는 힘으로 사는 삶'을 두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기 주체를 확립한 자가 '자아'라는 자기 주체를 얼마나 경건되게 다듬는가에 관한 삶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자신이 죽어도 감사하겠습니다'라는 삶의 태도를 뜻합니다.
즉 '죽음으로부터의 자유합'이 바로 거룩이요 경건입니다.
살기 위해서 사는 자들은, '죽음에서 올라오는 힘'이 아니라 '죽어가는 힘'에 의존해서 사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를 살리기 위한 그 정당함을 위해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이웃과 교회와 성경 말씀까지 총동원해서 이용하려는 자들입니다.
호세아는
오직 '십자가에서 올라오는 힘으로 산 선지지이기에, 하나님에 의해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십자가의 사랑을 구현해야 될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음란이란 딴 게 아니라, 이 땅을 사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서 '땅의 사랑'과 '하늘의 사랑'의 격차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겁니다.
복음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만이 이 땅에서 산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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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한광수 2005-09-10 12:52:57, 조회 : 262, 추천 : 33
(1) 어떤 특정지역에서 예배를 드릴 때 예배자(어떤 성도)의 신체적 내지 정신적 고통(두통과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픈 충동) 이 오는 경우
- 영적으로 민감하고 기도많이 하신다는 분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많이 봄
일례로,
어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데, 다른 교회성도가 예배에 참석하여 말하기를 이 교회에 대해 기도하는데 가슴(마음)이 아프다고 함
(2) 교회 자리(예배당)을 보러 갔는데, 이리저리 둘러보는중 두통을 호소하면서 빨리 나가자고 재촉함
- 그 곳은 이전에 예배당 자리였는데 다른 곳으로 이전해간 자리였다고 함
- 이 분은 어떤 사람을 만나면 머리가 아프다고 함 ---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방이 우상을 심하게 섬기는 사람이었다"는 둥
-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분별해야 되는게 아니냐고 함
(3) 그렇다면 이런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무엇이며 있는 사람과의 차이는 무엇인가?
---항상, 답변이 초고속이어서 너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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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근호 2005-09-10 15:13:12, 조회 : 286, 추천 : 33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을 주체화시킬 만한 요소와 요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습관과 관행으로 굳혀집니다.
즉 자신이 즐겨왔던 취향들의 집합 속에는 인간은 자아상을 고수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예배라든지, 기도라든지 할 때는,
무의식의 자아가 습관적으로 요청하는 그 습관성 요건에 부합될 때 그 습관으로 인해 관행적으로 부드럽고 수월하게 진행되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성격'이 됩니다.
인간의 평소의 행함도 이 성격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군중들 속에서도 자기만의 개성을 깨뜨리지 않고 발휘시킵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 그렇게 사는 것이 진리스러워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편하고 수월하니까요!
그런데 낯선 환경속으로 떠밀리게 되면
무의식 속의 주체는 재조립을 강요받게 됩니다.
주체의 구성은 원래 타인이 요구하는 욕망에다 자신의 욕망을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하여 형성됩니다.
사람들의 따가운 낯선 시선들을 인간이 함부로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도 타인의 욕구조건이 없으면 주체화의 '자기 형성' 갱신이 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이야기해서, 상상계에서 상징계(질서계)로 진입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낯선 상징계가 등장하게 되면 기존의 주체상을 스스로 파괴해서 '분열된 주체성'으로 전환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일종의 자결인데,
이 자결의 두 가지 양상은, 반항하거나 하니면 그 영역에서 벗어난 고립된 채로 자아를 남겨두는 겁니다.
이러한 이러한 자결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새로은 타인의 욕망에 순응하기 위해 이 현존의 질서 세계를 떠다니면서 어느 한 곳에 새로운 정착을 하기 마련입니다.
질문하신 바의 신속한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수런 본능입니다! 하지만 그 낯선 환경에 좀 더 오래 머물면 분명 좋은 친구를 그 가운데서도 사귀게 될 것입니다. 영화관의 자리 찾기에 약간의 적응이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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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한광수 2005-09-11 00:14:56, 조회 : 239, 추천 : 31
결국 인간의 본능이지
신앙의 한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군요
자아의 주체가 수시로 상황에 따라 변하면서 나타나는 뒤틀림이라고 보아도 되나요?
새로운 상황에 적응을 위한 초기과정이라고 할까요?
그런데 그런 상황을 당할 때, 성도가 악마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왜일까요?
오히려 불신앙의 한 단면인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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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이런 현상은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근호 2005-09-11 09:00:13, 조회 : 249, 추천 : 37
그렇습니다.
성경적으로 악마는 오직 언약의 완성을 공격합니다.
성도는 자기 신앙 기준으로 악마를 논해서는 아니됩니다.
도리어 십자가에서의 '다 이루심'을 거부하고 성화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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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때에
이성민 2005-09-13 22:08:27, 조회 : 295, 추천 : 37
예수님께 기도하고서(직접적인 기도/대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서(직접적인 기도/대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고서(직접적인 기도/대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장난은 아닙니다.,-_-
그냥 바르게 기도하고 싶어서 여쭤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기도하는것인지요?
아니면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것이 맞는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것은 잘못된것인지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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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도할때에
이근호 2005-09-14 08:06:22, 조회 : 346, 추천 : 40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른 기도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뺀다고해서 틀린 기도도 아니요
'예수님의 이름'을 집어넣어도 바른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뒤에 삽입하는 것은 기됵교의 오랜 관행입니다.
마치 동양인들이 쌀을 주식으로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쌀 안먹고 굶어주어도 짐승으로 죽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오직 예수님(로마서 8:34/히브리서 7:25)과 성령님(로마서 8:26)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자신의 종교 행위를 믿지 마시고, 예수님이 지금 벌리시는 일에 관심을 두시고 사시면 그것이 바른 믿음이요 바른 기도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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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도할때에
이성민 2005-09-14 23:38:05, 조회 : 247, 추천 : 36
지금 종교적인 행위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때에 누구에게 기도하는게 해야하는건지 물어보는겁니다.
어차피 목사님도 설교시작과 끝에 기도하고 아멘하지 않는지요?
그런 관점에서 여쭤보는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런 단순 끝맺음의 이야기가 아니라
기도할 대상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는것 아닌가요?
엉뚱하게 예수님 아버지는 안되는건가? 그런 뜻으로 질문드리는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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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도할때에
이근호 2005-09-15 07:04:24, 조회 : 264, 추천 : 35
기도의 대상을, 기도하는 사람이 임의로 구분 지어 골라 잡을 입장이 못됩니다.
예수님에게 기도하나, 성령님에게 기도하나,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하나, 이 모두가 우리 개인의 자격으로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도는 어디까지나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회에서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 간에 일단 군이이 되면 거수경례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군에 가보니, 거기에 자기 친구도 있고, 자기 사촌 동생도 먼저 군에 와서 고참이 되어 있고, 자기 아버지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평소에 사회에서 아는 사이라고해서 모자 벗고 인사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거수경례를 하지요.
아는 사람이라고해서 거수경례 안하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수경례 할 입장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군인 신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그의 모든 기도는, 기도의 대상에 의해서 그 때그때마다 기도하는 입장이 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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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교회연합회
최상영 2005-09-14 18:38:45, 조회 : 295, 추천 : 40
작은교회연합회 최온유 목사님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작은교회 연합회로
개척교회 목사님들이 3천명정도가입이 전국적으로 되어있는줄압니다.
개척교회목사님들이 지쳐게셔서 그런지
그기에 빠지면 푹빠집니다.
범교단적으로 빠져들고 잇습니다.
작은교회 연합회에 대해알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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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작은교회연합회
이근호 2005-09-15 07:22:59, 조회 : 349, 추천 : 38
>남의 친목회까지는 잘 알 수는 없습니다.
그 친목회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마치
목사님들 낚시 모임, 등산 모임 같은 것으로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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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보다가 그냥 생각해본건데요....
손승범 2005-09-14 22:35:20, 조회 : 305, 추천 : 32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사역을 도외시한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강조가 필히 교회의 대형화와 자본화에 대한 그럴듯한 명분을 제시해주지 않는가 싶습니다.
뭐.... 저런 얘기가 하루이틀된 것도 아니지만, 죄로 인해 필히 죽어야 할 인간의 본모습과, 기어코 약속을 죽음으로 완성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더더욱 절실해지는 요즘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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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책 보다가 그냥 생각해본건데요....
이근호 2005-09-15 07:07:54, 조회 : 336, 추천 : 32
교회가 아니라 절입니다.
자기 야심이 종교조직체로 구체화된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같이 죽자고 요청하는 십자가 하고는 처음부터 다른 세계이지요.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마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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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와 복음의 관계성?
한광수 2005-09-28 01:11:31, 조회 : 230, 추천 : 42
(1)진리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닌지요?
그런데 상대적 진리는 무엇입니까?
1+2=3 , F=ma, 이와같은 원리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와는 어떤 구분이 있나요?
(2)복음과 진리와의 관계성은?
복음의 배타성이 절대적 진리라면 (제가 알기로는...)
그렿다면 상대적 진리가 다른 복음이 아닌가요? 예를들어, 과학/철학/수학.....이론등
(3)'복음'과 '진리'라는 용어 사용의 주의점을 말씀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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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리와 복음의 관계성?
이근호 2005-09-28 07:03:32, 조회 : 253, 추천 : 34
성경에서 진리란, '어떤 분'을 두고 이야기하지
결코 인간들이 말하는 어떤 논리체계나 사유체계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리만이, 즉 예수 그리스도라는 그 분만이 하나님의 뜻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아무리 논리에 합당한 결과를 내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행위'에 불과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로마서 3:23)
그래서
인간들의 진리체계라고 내놓은 철학과 신학과 과학과 여타의 학문과 종교과 윤리와 도덕은 그 자체로서 진리되시는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 악마의 하수인 자격으로 내쏟아진 것들입니다.
어떤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까?
소위 "진리", 혹은 "상대적 진리"라는 개념과 용어를 들고 나오면서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인간들의 관심사에서 흐릿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가능성과 자질과 지혜로 출발해서 '신의 뜻'을 달성하려고 시도한다면 (소위 창세기 1:28에 나오는 '문화 사명'을 운운하면서)
필히 그들은 인간들 속에 있는 신적인 요소를 들먹이면서 상대적 진리, 혹은 진리의 흔적, 혹은 진리의 공유적 속성을 근거로 유사 진리와 복음이라고 선전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아는 자들은,
십자가 복음 앞에서 인간의 지혜가 참으로 어리석고 악한 것임을 고백하면서 살게 됩니다.(고린도후서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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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리와 복음의 관계성?
한광수 2005-09-28 19:12:59, 조회 : 215, 추천 : 60
자연법칙을 활용하여 주님을 드높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거지요?
인간에게 부여해 주었다고 보는 달란트는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나요?
단지 죄악만을 생산해 낼 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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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리와 복음의 관계성?
이근호 2005-09-28 22:39:13, 조회 : 201, 추천 : 50
>달란트란
기존 교회에서 교인들을 부역을 끌어내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단어를 동원한 것 뿐입니다.
불꽃놀이 아시죠?
검은 밤하늘을 채우는 폭죽의 산란처럼,
인간의 모든 행위는 죄의 오색찬란한 조각조각들입니다.
마치 폭탄의 파편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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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그마? 묵시?
이성민 2005-09-30 02:03:38, 조회 : 196, 추천 : 46
여기서 사용되는 단어를 좀더 쉽게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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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케리그마? 묵시?
이근호 2005-09-30 06:57:53, 조회 : 240, 추천 : 33
>영어로는 'kerygma'라고 씁니다.
사도들의 설교를 말하는 것으로 신적 권위가 그 설교 안에 담겨있기에 구원의 능력도 함께 들어있는 설교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구원이란, 상대방의 주장을 듣는 자가 판단해서 본인이 결정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 설교자의 권위는 '설교 사건'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체계있는 교회 조직 질서나 그 운영방식에 의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항해서 '칼 바르트' 신학자가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지금도 외쳐지는 복음적인 '설교 사건'만 구원된다고 말입니다.
묵시라는 말은, 역사와 대비되는 말로서,
원인과 결과라는 연쇄고리에 얶매임이 없이, 신적 능력이 언제든지 역사와 마주쳐서 새로운 창조능력을 지금도 발휘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역사적인 인식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며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일종의 심판이요 위기로 다가오게 됩니다.
즉 자신의 예상밖의 일을 가지고 자신들의 역사인식에 구멍을 뻥하고 뚫어버리니 하나님의 돌발적인 사태에 인간은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신학이나 철학도 모두 시간인식에서 다듬어지기 마련인데, 바람같은 성령의 묵시적 활동에서는 그런 인식 자체가 죄악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불트만'이라는 신학자가 강하게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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