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칼 부림은 의의 혀를 낼름거린 목아지만 남는다] 2005-05-04
[지식의 칼 부림은 의의 혀를 낼름거린 목아지만 남는다] 2005-05-04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창1:28-창3:15절 논쟁은 그만 두길.
정수태 2005-05-04 13:58:22, 조회 : 302, 추천 : 34
창1:28절도 약속을 겨향한다.
약속이나 언약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약속)를 지향하지 않는 언약이 도대체 어디에 있고
성경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향하지 않는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지식 또한 피묻은 그리스도가 없으면 울리는 꽹꽈리이다.
이근호목사는 창3:15절을 언약으로 보지 않는다 노아 언약때 부터 정식적인 언약의 표출로 본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도 다 있다.언약은 약속의 표출이다.
창조언약도 약속을 겨냥할 뿐이다.
나는 가끔 논쟁들을 볼때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지식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을 갖는다.
논쟁은 그만 두길.
그의 영혼 속에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의 고백이 있다면
그것으로 한 형제임을 알기를....
지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임이 터져 나오는
피묻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받음을 알기를...
지식이 형제의 영혼을 베어내는 칼이 되지 않기를...
치매걸린 인간에게도 십자가는 꿈틀거린다는 사실을....
이성적 기능이 결여된 영혼에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고백은 있다는 사실을..
젖먹이 입으로 찬양받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잇다는 사실을....
지식의 칼 부림은 의의 혀를 낼름거린 목아지만 남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
[re]십자가에 대한 오해
이근호 2005-05-04 15:54:24, 조회 : 359, 추천 : 39
귀하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오해가 마음 속에 담겨 있을 경우에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십자가 신학'이라는 신학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상
'십자가 신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란 신학을 때려 부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학이 부셔진 버린 상황에서
십자가 복음만 증거하는 것이 참된 십자가의 영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인데
만약에 이토록 십자가 복음만 증거하는 자들끼리 만나면
주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함만 나올 뿐입니다.
==========================================================================
[re]십자가에 대한 오해
정수태 2005-05-10 13:04:36, 조회 : 306, 추천 : 33
동감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만 나오길 원합니다.
==========================================================================
[re] 미리 자기방어와 공격으로 처세술에 능한 종교꾼들
김대식 (Homepage) 2005-05-04 15:12:11, 조회 : 263, 추천 : 38
점점 종교기술자로 변질되는 우리의 모습을 누가 심판하리요?
심판의 주님이 활동하시니 그저 감사할 뿐 (창 3:15)
##############################################################################################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배척 당하는 선지자?
김대식 (Homepage) 2005-05-04 16:42:08, 조회 : 227, 추천 : 19
목사님!! 선지자가 자기고향과 자기 집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고 배척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곳 외에는 다 존경받는데 말이죠?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것은 그 당시에 사람들에게서 통요되는 말인가요? 아님 어떤 의미인가요?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하면? 제가 만난 목사들 중에 거의 대부분이 이 구절을 통해 "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말씀이다" 라고 주장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 구절 안 좋아하는 목사 없더군요.
아무도 갈구지도 않는데 혼자 맨날 이 구절로 나발을 불어대더군요.
그런데 살펴보면 삯꾼들이니 이상하게 삯꾼들이 이 말씀이 그렇게도 좋은가 봅니다.
오히려 반대가 아닙니까? 자기 집과 고향에서 인정받지만 타향에서 텃새가 심해서 받지 못하는? 등등
왜 자기 집안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배척을 받는 것인가요?
(마 13:57)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고』
(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 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왜? 비방받는 표적이 되어야만 합니까?
==========================================================================
[re] 자기 고향과 자기 집에서 배척 당하는 선지자?
이근호 2005-05-04 21:22:56, 조회 : 277, 추천 : 35
목사가 되고자 하는 의도에는
사회적으로 그럴사하고 존경받고 인정받는 인사로 변모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회는 '목사'나 '신부'에 대한 공경심을 보이게 되면 그런 공경심을 보이는 그 당사자가 되레 신사답다는 평을 또한 주위로부터 받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인 대로에서 신부나 수녀의 욕을 공개적으로 하게 되면, 그 욕하는 그 인간을 도리어 막대먹은 천박한 자로 지탄을 보냅니다.
따라서 이 사회는 목사라는 성직자에게는 기본적인 예의나 존경심을 표하기 마련입니다.
평범한 인간에게 목사라는 수준높은 인물로 격상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 토박이 동네 친구들이나 일가친척들은 이런 사회적인 '품위 격상'에 동조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나 함께 막가던 막연한 관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속으로 불쾌하게 여깁니다.
일반 사회에서 받는 대우에 미치지 않고 인상을 받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취지는 그런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깝고 친한 사람일지라도 복음이란 여전히 파악 불가능한 비밀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안목으로는 복음의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까운 일가 친척으로부터 박해받아야 참된 성도가 아니라
도리어 복음을 알게 된 것을 주님께 감사하는 자가 참된 성도입니다. 비록 세상 친구로부터 버림받는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
[re] 예수님께서 배척당하신 이유, 그리고 산상보훈에 대한 접근 관점
이준 2005-05-05 17:52:41, 조회 : 259, 추천 : 14
김대식 선생님과 이근호 목사님의 문답을 보면서, 평소에 정리해 둔 글을 두서 없이 올립니다. 사정없는 지적 부탁드립니다.
-----------------------------------------------------------------------------------------------------------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위의 말씀에는,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뵐 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 외에 아무도 하나님을 뵌 적이 없다고 되어 있다.
(요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이와는 달리, 성경에는 예수님을 뵌 것이 곧 하나님을 뵌 것이라는 말씀도 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바로 위와 같이 말씀하신 취지는, 예수님의 육신적 겉모습이나 처지만을 가지고 예수님을 파악하는 이른 바 “혈육적인 관점”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부터 받은 관점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느냐는 데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의 타고난 보편적인 인식 체계를 겨냥하신 의도적인 발언이다.
유태인들은 예수님을 남다른 데가 있는 랍비, 혹은 출신이 보잘 것 없는 목수의 아들 등으로 보았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 대한 혈육적인 관점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진정한 안목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따라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뵙는다”는 말, 즉 “하나님을 뵙는 마음 청결한 자”란, “예수님을 뵌 것이 곧 하나님을 뵌 것과 같음을 아는 자”라는 뜻이다. 이런 자들은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자, 즉 하늘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눈을 받지 못하고, 혈육적으로만 예수님을 파악하는 자들과는 구분된다는 취지도 담겨 있다.
이렇듯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들이란,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마 11: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위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어떤 자들은 분명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알아볼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당하신 이유나, 유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핍박한 이유 또한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된다고 본다. 예수님을 배척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인식할 수 있는 안목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일전에 TV 채널을 선택하다가 문득 기독교방송에서 어떤 이의 설교가 나오길래 유심히 들어보았는데, 그의 설교는 마침 마5:8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심령이 가난하고 마음이 청결해야 한다는 말씀에 따라 세상의 온갖 욕심과 잡다한 것들로부터 마음을 깨끗하게 비워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야, 깨끗해진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믿음 주시고 복을 내리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인간이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있는가 라는 기본적인 신학적 회의(懷疑)나, 산상보훈이 어떠한 취지로 제시된 것인가 등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었다. 하라는 대로 실천하고 행동에 옮기면 믿음이 커지고, 복이 임한다는 논리였다. 그가 말하는 “청결”이나 “겸손의 미덕”과 같은 윤리적 덕목들이 지닌 의미는, 성령 없는 아담의 후손들이 다루는 사상적, 종교적 윤리에 담긴 가치관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또한,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으로 구원시켜주셔서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긴 하지만, “구원 그 이후”부터는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잘 실행에 옮김으로써 우리 자신의 내면도 점진적으로 쇄신해 나감과 동시에 교회 안에서와, 사회 속에서의 윤리?도덕적 책무를 다하여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믿음을 받고, 교회적으로는 부흥과 성장을 구가하며,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일구어 내자는 것이 오늘날 교회 안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닌가.
이렇듯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인간의 종교는 여러 모로 그 쓴 뿌리를 더욱 깊이 다져나가고 있다.
한편, 여태까지 전개된 이 글 초두의 말씀(마 5:8)과 관련된 내용을, 이 구절이 포함된 산상보훈 전체를 대하는 원리에 대한 논의까지 확장해볼 필요성이 불가피해진다(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산상보훈의 세세한 구절들을 상세히 다루고자 함이 아니라, 산상보훈을 대하는 관점에 대한 것이다).
세 장(마 5~7장)에 걸친 산상보훈의 세세한 말씀들의 결론은 산상보훈 말미에 등장하는 “반석”에 귀결된다고 본다. 산상보훈의 모든 말씀을 실천하는(듣고 행하는) 자들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들이라는 바로 그 말씀 말이다.
(마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아무도 산상보훈을 제대로 지킨 사람도 없고, 지킬 수 있는 사람도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이 동의하는 바로 알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내막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산상보훈의 말씀들을 문자적으로 지킬 수 없으며, 미래의 천년왕국에 가서야 실천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보수주의자들 또한 이 말씀들을 액면 그대로 지킬 수는 없으니, 그 정신만이라도 훌륭한 강령으로 삼아 개인의 경건 생활과 교회의 부흥,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윤리?도덕적 책무를 다하도록 하자고 역설한다. 진보주의자들 또한 이 말씀 속에 담긴 종교적 색채를 걷어버리고 거기에 담긴 고상한 가르침들을 인류 사회의 개선과 진보에 밑거름으로 삼자는 입장이다. 이 모든 백태들이야말로 “부딪히는 돌이요, 거치는 반석”에 부딪히고, 실족하여 넘어진 모습들이 아닌가.
과거 유태인들은 율법을 지키려 했으나, 아무도 지킨 자가 없었고, 도리어 자기네들이 지키려 했던 그 율법이 그들을 정죄, 심판하여 파국에 이르고 말았다. 그 이유는, 율법이 어떤 용도로 주어진 것인 지 몰랐기 때문이다.
율법에 대한 유태인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산상보훈을 지키려 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는 처음부터 성도가 아니라, 멸망당한 유태인들의 반차를 따르는 종교인에 불과한 셈이다.
다시 말하건대, 산상보훈을 지켜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는 자들은, 앞서 말한 멸망당한 유태인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다. 이들은 모두 행함을 통해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했던 자들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기 마음을 청결하게 유지하여 하나님을 뵙고자 했던 자들이다.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심령이 가난해 지려 했던 자들이다. 하늘 아버지로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관점을 스스로 취하려고 했던 자들이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가능했던가.
이들의 실상은 아예 처음부터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다름없었다. 행함을 통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들은 여태까지 아무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기 때문이다.
이와는 상반되게, 베드로의 반차를 따르는 자들의 경우, 믿음이라는 반석 위에 집이 지어진(자기 뜻과는 무관하게) 자들이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말씀처럼,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제대로 알아보게 하신 분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늘 아버지이셨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 고백은 어디까지나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관점을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점을 거부하기에 천주교는 베드로가 교회의 반석(기초)라고 주장하며, 개신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반석이라고 주장한다.
분명히 단언하건대, 반석(교회의 기초)은 베드로도 아니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라는 행위)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 자신 한 분만을 가리킨다.
성경에 등장하는 반석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이 유일한 반석이 어떤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으로 작용하는 반면, 어떤 자들에게는 굳건한 반석으로 다가서신다.
어떤 이들은 이 반석 위에 자기 행함으로 올라가서 버텨보려 했지만, 다른 이들은 자신들이 뜻하지 않은 믿음(하늘 아버지로부터 우발적으로 임한 예수님을 제대로 인식하는 관점)이라는 것에 의해 그 위에 서게 되었다. 이렇듯 상반된 운명을 지닌 자들에게 되돌아 온 것은 바로 그 반석으로부터의 상반된 반응이었다.
(마 21: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배척한 것은 필연적으로 위의 대조적인 원리에 기인한다고 본다.
좀더 넓게 확장시키면, 성경은 인간들에게 뭔가 실천에 옮기라는 메시지가 담긴 책이 아니라, 특정 인물을 소개하고자 하는 책이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그렇다면, 산상보훈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산상보훈의 모든 구절들을 인간 행동의 책무성이라는 입장이 아니라, 어떤 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산상보훈은 처음부터 인간이 부지런히 인내심을 갖고 행동으로 옮겨서 반석 위에 서게 하고자 제시하신 그런 성질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담의 후손들이여, 너희가 과연 반석 그 자체이신 분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느냐?”라는 메시지라고 본다. 이 메시지에 걸려 실족한 자들이 역사적으로 무수히 발생되어온 반면, 여전히 시대를 초월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은혜로 받은 자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언뜻 “~하라”는 명령문 형식의 말씀을 접할 때마다 곧잘 오해하는데, 문제는 성경이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만큼 성경 전체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함인가에 대한 우리의 무지에 있다. “(성령님이라는) 조명의 주체”가 없이는, 조금 달리 표현하여,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아담의 후손들은 성경을 행동지침서로 오해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금단의 실과를 따먹은 이후부터 줄곧 그 의식 체계를 지배해 온 것이 바로 “결국 (또) 저지르고 말았네, 이제부터는 내가 도대체 무얼 어떻게 해야 계속 목숨 부지 할 수 있을까? 내가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라는 것이다.
늘 행위의 필요성 속에 갇혀서 살기 마련이다. 이는 곧 생명의 부지 여부가 자신에게 책임 있다는 의식을 반영한다. 늘 빠지지 않는 것이, “내가”, “하다”라는 것들이다.
이러한 인식 체계가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 알아볼 수 없는 “혈육적 관점”이다. 이러한 혈육적 관점을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는 인간들 앞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라”는 말씀 앞에서 아담의 후손들은 스스로가 아무 것도 하지 못함을 깨달아야 함에도, 계속 “할 수 있다”라고 부추기거나, “이 정도 최선을 다 하면 봐주시겠지”라며 서로를, 스스로를 기만한다. 반면, “~하라”는 선언 앞에서 “믿음” 안으로 피하여 온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수님 희생의 산물들이다.
예수님 앞에서는 은혜로 주어지는 믿음 이외에 인간의 그 어떤 행위도 용납되지 않는 처지임에도, 인간은 여전히 행함의 본능과 필요성을 품은 채, 상반된 입장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이 강렬한 인간 본능은 보다 적극적으로 폭력성과 공격성까지 유감 없이 발휘해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 세상에서 제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성경은 늘 우리더러 다음과 같이 물으신다.
(마 16:13)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5)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위와 같이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의 엇갈린 반응을 의도적으로 이끌어내어 대조시키신다. 그러나, 위의 말씀에 따른 합당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경우 외에는 없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화답하신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이런 사람만이 산상보훈의 취지와 의도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 지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눈(영)을 받은 사람이며, 진정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며, 배척당하신 예수님의 반차를 따라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으로 인해 세상 속에서 나그네로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마 5:8로 되돌아가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이런 음성을 들어야 한다고 본다.
“나(예수님)를 본 것이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믿는 사람만이 산상보훈이 말씀하시는 마음 청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네가 깨닫느냐?”
“마음 청결한 사람이 하나님을 뵙는다는 말씀의 뜻은, 어디까지나 나(예수님)를 제대로 알아본 걸 두고 말한 것이라는 걸 아느냐?”
“다른 사람들은 나를 랍비, 선지자...라고 하지만, 너는 과연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내가 바로 율법과 이 모든 교훈(산상수훈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가를 치르러 온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느냐?”
이런 질문에 “그러하나이다”라고 화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의 의만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
[re] 잘 보셨습니다.
이근호 2005-05-05 21:01:57, 조회 : 270, 추천 : 37
오늘날의 교회는
'인간의 가능성→돈'
이것 외에는 아무 데것도 관심없는 집단들입니다.
##############################################################################################
야고보서 5장 15절-16절에 대한 질문
김성석 2005-05-06 10:19:30, 조회 : 299, 추천 : 23
야고보서5장 15~16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 하는 힘이 많으니라
의인의 기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수도 있다는 말인지...아니면.. 말그대로.. 일반적인 육신의 질병만을 이야기 하는것인지...
16절에서...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하셨는데..죄지은자가 병낫기를 위해 의인에게 죄를 이야기하고(그러니까.. 성당에서 말하는 고해성사와 비슷..) 기도함으로 그의 죄를 고백하고 병을 치료하라는 말씀인가?...
그리고 여기서 말한 의인이란... 오직 의인은 예수님일 터인데 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구를 어떻게 의인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요...
==========================================================================
[re] 야고보서 5장 15절-16절에 대한 질문
이근호 2005-05-06 18:35:39, 조회 : 327, 추천 : 35
인간은 질병을 통해 자신의 연약함과 문제점을 파악하게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반드시 죽어야 될 소지를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즉 죽음의 원리 만큼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보여주는 원리가 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조차 병든 상태이기에 자신의 진면목을 착각하며 살게 됩니다.
성도에게 있어 하나님이 주신 병으로 자기 주제 파악을 할 수 있는 사랑의 기회로 삼으라는 겁니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아는 자(의인)은 영적 차원에서 그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수도 있고 영적으로 유익한 권면과 충고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
마태복음27장52~53절
최은영 2005-05-12 16:32:04, 조회 : 304, 추천 : 37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이근호 목사님께 질문 드립니다.
저는 이말씀이 이해가 안됩니다.
답변 부탁드립니다.
==========================================================================
[re] 마태복음27장52~53절
이근호 2005-05-12 20:38:02, 조회 : 310, 추천 : 34
이해 안되어야 정상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모든 말씀은 어느 것 하나라도 이해되지 않도록 쓰여진 글들입니다.
따라서 상식 밖의 내용이 나오시거든 기쁘고 신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신의 이해력을 저주하고 정죄하는 기회가 되고 본격적으로 믿는 자가 될 순간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일개 예수님 개인에게만 해당되라고 터져 버린 사건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배꼽이 있듯이 이 우주의 배꼽은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 십자가 사건이야말로 세상의 속살을 유일하게 뒤집어서 공개된 찰라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다 이루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냥 무작정 내뱉아 놓은 공언이나 농담이 아니라 진실로 그러한 내용을 방출하게 된 일입니다.
'대신 죽으심'은 곧장 '드디어 '영생 제공'으로 이어짐이 현실적으로 구체화 된 시점이기도 합니다.
열왕기하 13:20-21에 보면, 엘리사의 시신이 묻힌 무덤에 어떤 시체를 던져놓았더니만 엘리사 시체와 접촉하는 순간 그 죽은 자들이 도로 살아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
예수님께서 평소에 하신 말씀은 , 사람들이 믿든 아니믿든 상관없이
이미 세상의 성격이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확정된 상황으로 접어 들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복음 속으로 뛰어들어 살 것인가
아니면 그냥 십자가를 구경만 할 것인가를 가지고
지옥행, 혹은 천국행으로 결판되는 시대가 오늘날 21세기로서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
[re] 이 글을 제대로 읽으시면 이해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준 2005-05-13 07:50:29, 조회 : 558, 추천 : 23
귀하께서 이해 안 가신다는 그 구절에 대한 언급이 아래 설교의 후반부에 실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구절이 왜 그 부분에 가서 등장하는 지를 우선 염두에 두시고 아래 설교의 맥락을 따라 천천히 읽으시면서 설교의 취지를 이해하신다면, 그 구절 또한 자연스레 이해될 것이라 사료됩니다.
본 구절이 왜 이해가 안 가는 지에 대하여 나름대로 약간의 부연을 하자면, 아담의 후손(인 인간)으로서의 본연의 의식 체계로 볼 때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 자체가 생경하기 때문이요(아담, 그리고 아담의 후손이라는 말은 곧 죽음의 혈통, 다시 살아날 수 없는 반열이라는 말이 아니던가요), 이러한 혈통과 반열을 거부하고 새 아담(죽음과 대비되는 생명 혈통의 조상)으로 오신 예수님의 다시 살아나실 수 있음 및 다시 살려내실 수 있음과 관련된 능력의 실제성이 바로 이 아담(다시 살 수 없는, 죽음의 혈통의 조상)의 후손들에게는 본디 낯선 이야기로 다가오기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저로서도, 지난 날엔 이해가 안 갔지만, 이제는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귀하께서도 이 반열에 합류하실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아래 글을 옮겨 놓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는 허락 받지 않고 무단으로(?) 게재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이준 올림.
-------------------
No, 171
이름:이근호
2005/4/20(수)
Re..행 20: 7-12 (유두고)
유두고
2005년 4월 20일 본문 말씀: 사도행전 20:7-12
20:7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20:8 우리의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20:9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 앉았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 누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20:10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저에게 있다 하고
20:11 올라가 떡을 떼어 먹고 오래 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20:12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
사람들은 본인들이 인생을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도 미덥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보이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일을 하시다가 행여 실패하거나 저지 당하여 취소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걱정합니다. 특히 오늘 같은 본문인 경우 사도 바울이 강론하는 그 현장이 있었다면 아마 많이 마음 조이고 안스러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도 마음대로 잘 안풀리는구나"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 8장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 찾아와도 절대로 끊어지는 법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인생을 가느다랗고 허약하기 짝이 없는 줄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의 모든 힘이 다 동원해서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쇠줄보다 더 완벽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놀라키기 위하여 병주고 약주는 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에게는 특별히 관리하시고 다루신다는 겁니다.
결코 사도 바울의 전도에 불상사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마음상태가 항상 뒤죽박죽이 되어 있습니다. 이 걱정 저 걱정을 끊어질 새가 없습니다. 마치 혼잡스러운 수납공간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 서랍을 때를 따라 흔들어버리십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 상태가 잠시나마 하늘 나라를 향해 정조준되도록 조치하십니다.
즉 세상이란 인간의 힘으로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란 착한 일을 해도 시험에 듭니다. 왜냐하면 착한 일을 하게 항상 거기에 따르는 상응한 보상을 은근히 기대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착한 일에 착한 일을 누적을 시켜서 강제로 멋진 기적으로 이끌어내려는 시험을 받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든 일은 그 주체자가 예수님 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님만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할 자격을 가집니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 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제촉해서 우리가 하늘나라로 밀착시키려고 하는 것은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구원의 일은 순전히 예수님 혼자 해내시는 혼자 몫입니다. 그렇게해서 자기 사람을 마지막 날에 기어이 다시 살려내시려는 겁니다.
바로 그러한 예수님의 주되심을 보여주기 위해 예수님은 그 현장에 있는 사도 바울을 통해 유두고라는 죽은 청년을 살려내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에게 있어 성도란 자신의 일을 적용시키는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이 하실 일이란 과연 어떤 일일까요? 이사야 26:19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일을 하실 분이 예수님이고 바로 이 일을 다 이루었다고 십자가 위에서 선언하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유두고의 죽음은 인간의 참된 모습을 새삼 우리 앞에서 펼쳐 보인 것입니다. 전도서 7:1-4에 보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라는 이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평생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죽게 하십니다. 모든 인간은 상식적으로 출생한 생일날을 자기 죽는 날보다 더 즐겁게 느끼게 마련입니다. 이 마음은 아직도 우리가 하늘 나라에 상관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인간의 본질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밝혀지는 것이지 아무리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해서 자동적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유두고의 죽음과 살아남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게 주님이 하시는 일에 꽉 잡혀있는 가를 믿어야 합니다. 죽은 자의 살아남이 단순한 허풍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루어짐은 구약에서 여러 번 나옵니다.
열왕기상 17장에서는 사르밧 과부의 아이를 엘리야 선지자가 살려준 적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는 엘리사 선지자가 수넴 여인의 자식을 살려줍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열왕기하 13:20-21에 나옵니다.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 섰더라"
즉 이미 엘리사가 죽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사의 시신과 접촉한 자가 도로 되살아나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길에 도리어 그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몇 몇 무덤에서 죽었던 자가 도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경황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 마르다에게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더 이상 무슨 긴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마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을 살려냅니다. 남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 딸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의 관점이고 예수님이 보시는 관점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은 그 소녀의 손을 잡아 당기시면서 '그만 자고 일어나거라'라고 했습니다. 그 소녀는 도로 살아났습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의 대상으로 오늘 본문에 유두고가 있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신자와 불신자를 각기 따로 다루신다는 겁니다. 다같이 죄를 짓고 살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보면, 성도는 의인으로 보시고 다른 사람은 그냥 멸망 받을 죄인으로 보십니다. 인간들이 보고 있는 행함의 관점과 동일한 관점으로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신의 일에 충실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봐와 같이 사도 바울은 하등 놀라는 기색이 없습니다. 한 숨 돌리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실패로 끝날까봐 노심초사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능력이 막히는 법이 없다는 점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자신의 인생을 가느다란 인생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에게는 더 이상 실패란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생의 의미와 목적도 모르는 자들과 같이 땅만 바라보고 살면서 실의에 잠기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