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구원을 위한 자기부인? 자기부인이 구원조건?] 2005-01-10
[인간 구원을 위한 자기부인? 자기부인이 구원조건?] 2005-01-10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김홍배님의 질문과 이규호님의 지적에 대해서
이효종 2005-01-10 01:53:53, 조회 : 418, 추천 : 19
김홍배님! 이규호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시온지요? 주일은 잘 보내셨는지요?
님의 질문에 빠른 답변을 해드리지 못해서 먼저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먼저 제가 님께서 양해를 구한대로 지난 주말은 몹시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었던 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님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하기에 앞서 이근호 목사님께서 1281번의 글의 통하여 제가 올린 글들에 대하여 반박하신 내용들에 대하여 먼저 답변을 드리고 님의 질문에 대하여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이점 양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규호님께서 1280번 글에서 자신의 경험상 저의 주장은 맞지 않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부터 제가 올리는 글들을 읽어 보시면 어는 정도는 납득하리라 믿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성경이 무어라고 말씀하는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제가 이글을 쓰기에 앞서 조회건수를 보니, 다른 사람이 올린 글들에 대해서는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이근호 목사님께서 쓰신 답변 글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조회건수를 늘리는 일부독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 글들을 독자들이 제대로 읽으셨다면, 앞서서 주장한 내용들이 도대체 무엇이었길래 이근호 목사님이 이러한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 하는, 의문 때문에라도 앞서, 다른 사람이 올린 글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읽어봐야 될 터인데, 이근호 목사님의 이름만 나오면, 내용은 거두절미하고 자세히 읽어 보지도 않고 조회건수만 올리는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쓴 웃음만 나올 뿐입니다.
1281번의 글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지적에 대해서 제가 답변할 필요성이 전혀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시 글을 올리는 것은 이글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바른 진리를 소개하고 싶어서 임을 말씀드립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제가 예수님의 공로 보다는 인간의 가치성에 대해서 방어하고 나선다고 말씀하시면서 저에게 정신을 도대체 어디다 팔고 다니냐구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앞서 소개한 글들을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읽으셨다면, 이러한 말씀은 나오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의 글이라 하여 대충 읽어버리고 자신의 주장만 옳다고 주장하시니 거기에서 무슨 유익된 말씀이 나오겠습니까? 앞서의 맹목적인 추종자들처럼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자신의 주장을 펴기에 앞서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들에 대하여 ‘정말로 그러한가’에 대하여 베뢰아 교회원들의 심정으로 성경을 다시 한 번 상고하시는 지혜가 필요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더 좋은 하나님의 섭리를 맛보시라 봅니다.
앞서 소개한 저의 글들 속에는 주님의 공로 사상이 지배적입니다.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 전혀 나올 수 없는 존재이기에 주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구원을 누리는 자들로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은 바, 이 은혜를 깨달은 성도의 삶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 건져주신 아버지의 뜻을 쫓아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강조했지만,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제가 무턱대고 주님의 공로를 부인하는 것처럼 말씀하고 계시니 참으로 한심할 노릇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기본 태도는 ‘자기 부인’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말씀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그 말씀에 대하여 반박하는 내용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삶의 내용이 진정 무엇인가를 말씀하고자 한 것입니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삶의 내용이 없으면, 사실 입술로는 십자가를 말하나 행위로는 십자가의 능력을 거부하는 사악한 존재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를 주장하고, 십자가 앞에서 ‘자기부인’을 주장하면서 ‘나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었음을 깨달은 삶의 내용이 없다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한 사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는 입술로는 주님의 은혜를 말하나 행위로는 주님의 의를 무시하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 십자가 앞에서 ‘자기 부인’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김홍배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말씀하기로 하겠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도 아니고 성화론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삼위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절대주권을 거부하시면, 이근호 목사님의 삶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영역입니다. 그 안에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를 받고 있는 질서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파괴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뿐입니다(여기서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임을 아실 것입니다). 따라서 이근호 목사님께서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무서운 범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귀하께서 그토록 신봉하는 교리 '자기 잘남의 성화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도록 사용하시는 겁니다”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도의 성화라는 것이 자기 잘남의 성화론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이것은 이근호 목사님께서 뭔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성도에게서는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와야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의 생명이 나오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말로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제가 이근호 목사님께 질문을 하면,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증거 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또다시 질문하고 싶은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증거 하는 삶의 내용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묻고 싶은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리는 것은 삶의 내용이 없는 것은 허공에 입술만 조아리는 별 볼일 없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는 것은 성도는 자신의 인격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은 모습을 보여 주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말도 동일할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닮은 인격’은 말씀의 순종함의 역사로부터 나오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성도의 성화적인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은 저를 가리켜 성령을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나 쉽게 말할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아 두셨으면 합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이는 성도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는 삶을 가리켜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성령은 부단히 구원 얻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며, 말씀의 순종을 통하여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역사하시는 보혜사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에 성령이 없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대하여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권세에 대하여 싸울 능력도 없고, 그저 나무십자가 깃발 아래 모인 패잔병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 받지 못한 사람입니까?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딤후3:15~17)”
마지막으로 이근호 목사님은 제가 성화론을 빙자하여 생계를 보장 받겠다고 하는 사람처럼 묘사를 하고 있는데, 이는 저를 한참 잘못 보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몇 가구 살지 않는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농사짓는 농사꾼임을 아셔야 합니다. 지난해에는 농사가 신통치 않아서 빚만 더욱 늘어났지만 말입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여기 저기 불려 다니면서 강사비 같은 것을 챙길 지도 모르는 그러한 유혹을 받을 소지는 없다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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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배님! 오래 기다리셨죠? 그리고 이규호님도요.
지금부터 님께서 질문하신 이근호 목사님과 제가 생각하고 있는 성화론의 차이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김홍배님께서 앞서 올리신 이근호 목사님에 대한 글들을 읽어 보았습니다. 그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근호 목사님은 참으로 인기 있는 강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하니 조금은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김홍배님께서는 요즘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현상들이 일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는 것에는 저로서도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강의가 인기 있는 비결이 과연 무엇일까? 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의 강의를 들은 적은 없지만 추측컨대, 한국교회의 잘못된 유전적인 전통들을 통렬히 비판하는 과정 속에서 청중들과 함께 느끼는 카타르시스의 이완 작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사람들의 속성에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사고방식이나 부정적인 내용에 대해서, 자신을 대신하여 다른 사람들이 대신 비판해 주는 일에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한다는 사실입니다.
실로 요즘 한국 교회의 현실은 암흑기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중세 암흑기 말입니다. 개혁파 교회가 주장하는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말씀제일주의는 사라진지 오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시대마다 복음을 사수하고자 하는 남은 자들(Remnant)이 있다는 사실 속에서 어느 정도 위안을 받고 있다하겠습니다.
요즘 한국교회는 선배목사님들께서 아직 신학의 정립이 미숙한 시대에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의 어지러움을 탄생시켰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짧은 소견입니다. 대부분의 선배목사님들은 세대주의 사상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외람되게도 ‘예수 믿고 천당’이라는 단순한 논리로 교회를 세워나갔고,
그 중간에 오순절 성령파 교회들이 우후죽순처럼 기복주의를 내세우며 부흥하게 되자 개혁파 교회들도 덩달아 그들의 모습을 답습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즘 역사적 개혁파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들도, 다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불순 세력들에 의해 자기 소견대로 성경을 마구 해석하고 적용시키는 것이 인본주의로 흘러버려서 사사시대의 암흑기를 연상케하는 모습들로 나타났으리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요즘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사수하고자하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는 찾아보기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설령 역사적 개혁파 사상들을 가진 젊은 신학도들도 기득권 세력에 대하여 소신 있는 발언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 보기에 급급한 실정입니다. 이미 커다란 제도권을 형성하고 있는 선배 목사님들로부터 잘못하면 이단으로 몰리거나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자리가 위협을 받지나 않을까하는 걱정일 것입니다. 사실상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자신들의 돈줄을 쥐고 있는 곳이 기득권 세력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수신학교(총신, 고신, 합신)에서는 어느 정도 역사적 개혁파 성향을 띈 교수들로부터 부분적인 가르침을 받기는 하지만, 목회 현장에 나가면 역사적 개혁파 교회를 이루어 나가고자 하는 목회자들이 드물다는 것도 하나의 큰 문제이기도 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양식 있는 신학교 교수들도 눈치 보기에 급급해서 정치적인 위협을 느끼고 어물쩡하게 바른 가르침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도 문제가 되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유형들 가운데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성공지상주의에서 나온 기복주의, 누가 뭐래도 교회 양적 부흥만 일으키면 된다고 하는 부흥성장 마켓팅주의, 말씀의 편향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성경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하질 못하고 인간적인 도움의 방편으로만 선포되어지는 것이 한국교회의 병폐를 가져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나 말씀의 잘못된 해석으로 말미암아 기복적인 산물로 나타난 ‘야베스의 기도’ ‘일천번제’ ‘십일조’ ‘성전제일주의’ ‘이적주의’ ‘기도만능주의’등등 엄청 많은 신학적 오류들과 함께 재벌목사들의 무분별한 권위주의와 교회의 재산증식의 문제가 오늘날 심각한 한국교회의 영적 위기를 몰고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 많은 교회들은 바울이 배설물처럼 여겼던 세상적인 것들을 예수의 이름을 동원하여 얻어 보고자 하는 노력들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므로 말미암아, 그동안 맹목적으로 기존의 제도권의 권력을 추종하던 분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희망으로 떠오르고 함께 기뻐하는 모습들이 인기 상승의 비결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는 남을 비판하는 것 만큼, 속 시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현실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는 글들이 부분적으로는 많은 부분에서 옳다고는 해도 그가 주장하는 모든 신학사상이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한 번쯤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근호 목사님과 토론을 해오면서 느끼는 것은 이근호 목사님은 역사적 개혁주의에 입각한 개혁교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역사적 개혁주의라 함은 중세교회의 잘못된 오류들을 지적하며, 바른 말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 걸었던 종교개혁자들의 순순한 전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칼빈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의 신학사상이 우뚝 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칼빈이 서술한 모든 글들을 제가 추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칼빈을 사랑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그의 열정과 당시의 모든 신학자들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심도 있게 해석한 분들이 없었다는 사실 속에서 그 분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는 교회들을 가리켜 역사적 개혁파 교회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파 교회들은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1643~1649),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1563), 벨직 신앙고백서(1561)등의 내용들을 근간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근호 목사님은 칼빈이 주장하는 절대주권 사상과, 하나님의 예정론, 그리고 성도의 성화적 삶에 대해서 부정할 뿐만이 아니라 칼빈을 상업주의를 생산한 장본인으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예수그리스도의 단독 사역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저는 찬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창세전에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협약 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어진 구원 역사인 것입니다.
때문에 이곳 십자가 마을에서 사용하는 ‘개혁노회’라는 명칭도 시대조류에 따라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자 그렇게 붙인 것이지 역사적 개혁파 교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각설하고
이제부터 김홍배님께서 질문하신 이근호 목사님과 제가 가지고 있는 성화론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또한 제가 언급하는 내용들을 통해서 이규호님께서 오해하시는 부분들이 해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까지의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말씀들을 보면, 철저하게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아 이근호 목사님에게는 성화론 자체가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성화론에 대해서는 제가 어떻다고 말씀할 내용이 없습니다. 다만 이근호 목사님은 단순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의만 나타내자, 오직 십자가만 증거 해야만 한다고 하는 논리에 대하여, 말씀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때문에 김홍배님의 질문에 답하면서 저는 저 개인의 주장보다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서 사실이 그러한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성경을 통해서 입증해 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물론 그것이 저 개인의 성화론에 대한 입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는 말씀들 속에는 저도 따를 수밖에 없는 진리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공로로는 절대 구원 받을 수 없음을 저는 분명하게 밝힙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들의 심령 속에서는 오직 죄 밖에 나올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명백히 밝히면서 말씀을 올립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크게 착각하시는 것은 성도가 구원을 깨닫기 이전의 삶과 구원을 확인한 이후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구원을 깨닫기 이전의 삶이나 구원을 확인한 이후의 삶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구원을 확인한 성도들의 삶도 여전히 죄 아래 놓여 있는 인간처럼 취급을 하기 때문에 성화 무용론을 주장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성화론 자체를 부정하는 이근호 목사님의 설득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호감을 갖는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생각할 때에 인간의 간악한 죄성을 파고 들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심리 말입니다. 뭔가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해도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 죄성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어쩔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경험을 이규호님께서 질문하신 고백 속에도 담겨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나오는 명령들 예를 들면, ‘원수를 사랑하라’ ‘나보다는 남을 낫게 여겨라’‘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저주를 하는 자에게 축복하라’라는 말씀들은 아무리 구원 받았다고 하는, 우리 인간으로서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명령들은, 우리가 지키라고 주신 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살수 없는 우리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우리는 역시 죄인입니다. 오직 그것을 실현하시는 분은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신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명령들을 지키기 위한 노력들에 대하여 포기한지 오랩니다. 다만 오직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우리는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디 나 같은 죄인들을 너그럽게 어여삐 보아 주셔서 구원해 주시길 간절히 간절히 소원합니다. 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근호 목사님 뿐만 아니라 십자가마을을 넘나드는 추종자들이라 생각되어집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성화라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죄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짓지도 않는 완전한 성화를 이룰 수 있단 말인가?라는 이 물음에 대하여 개혁파 교회에서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구원 얻은 자들의 완전한 성화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단의 세력을 무저갱으로 가두어 두기 전까지는 구원받은 성도들일지라도 죄의 오염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직접 명령하신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하는 말씀들은 인간들이 지킬 수 없기 때문에 다만 구호에만 그치는 것일까? 정말 주님은 그러한 의도로 이러한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말인가? 우리는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지혜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앞서 이근호 목사님과의 토론 속에서 저는 성도의 점진적 성화나 완전 성화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까지는 불가능함을 피력하였습니다. 우리가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화’라는 단어 자체가 갖는 뉘앙스입니다. 다는 아닐지라도 많은 분들이 ‘성화’라고 하면 예수님처럼 똑 같은 모습으로 완전한 변신을 생각하기 때문에 갖는 오해입니다. 그래서 만약 구원 받은 사람이라고 하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처음보다는 점점 연륜이 깊어 갈수로 승화되어 결국에는 완전 성화에 이를 수도 있다는 착각들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웨슬리언들(감리교)이나 세대주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들 가운데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명령들을 어떻게 이해하며 순종해야 하는가?
이러한 주님의 명령들은 성도들이 지속적으로 주님을 닮아가야 하는 ‘목표 지향점’이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이러한 ‘목표 지향점’은 성도 개인이 자기의 의지로 이루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성도 각인의 사명에 관련된 믿음의 분량대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이는 믿음을 지키기 위한 순교자의 길을 가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말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수준까지도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교회사들 통해서 믿음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성도들의 순교적 삶을 통해서 우리는 증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죽음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며 나가는 삶 말입니다. 때문에 성화적인 삶을 모두가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의 성화적인 삶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발적인 순종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임을 스스로 자증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부인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성도가 성화를 이루어 감에 있어 죄에 대하여 실족하고 넘어 질수는 있으되, 그 넘어진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산을 향하여 올라가는 등산가가, 산을 올라가다 넘어질 수는 있는데 그 넘어지는 위치가 처음 위치보다는 한 단계 높은 위치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의 견해와는 조금 다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가 약간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성화적인 삶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빈이 성화론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시는 다음의 내용을 한 번 쯤 생각해 봐야합니다.
“어느 날 주인은 노예 시장에 나가서 노예 한 명을 사왔는데, 이 노예는 바뀐 주인에 대하여, 종전에 자기가 섬기던 주인과 별반 다를게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주인이 시키는 대로 완벽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항상 수고를 하지만, 그 마음에는 항상 무거운 부담감으로 말미암아 자유가 없었다. (그것은 주종관계에서 나오는 어쩔 수없는 마음의 짐이기도 했다)
그런데 하루는 이 종이 자신을 부르는 주인의 음성을 듣고,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나에게 또 무슨 일을 시킬려고 부르는 구나 왜 저 주인은 죽지도 않고 나만 보면 일만 시킬려고 할까 정말 종 노릇하기 힘들구나’라고 푸념하면서 주인을 찾아갔다. 그런데 주인은 그 종에게 말하기를 ‘오늘부터 너는 노예가 아니다, 내가 너를 나의 양아들로 삼고, 나의 모든 재산을 너에게 맡길 뿐만아니라 장차 나의 상속자로서 나의 재산을 잘 관리해다오’
이 말을 들은 그 종은 너무 감사해서, 그 후부터는 그의 삶이 당당한 주인의 아들로서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에 자발적으로 기쁨으로 순종하며 살아갔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이러한 칼빈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죄의 종으로 율법을 지키는 일과 하나님의 자녀로서 말씀을 순종해 나가는 삶은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의 종으로서 율법을 아무리 잘 지켰다고 해도 그것은 사망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당당한 아들로서 아버지의 말씀을 지켜나가는 일은, 어느 정도 실수가 있고 일을 잘못 처리를 했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는 분리될 수 없는 영원한 것이라는 겁니다. 만약 종이 일을 잘못 했으면 쫓겨 나갈 수도 있고, 주인의 여하에 따라서는 다른 곳에 팔려 나갈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자녀의 구원은 확실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혹시 김홍배님께서 슬하에 아들이 한분 있다고 한다면, 아들이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해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아들이 자기의 말에 100% 순종하길 원하지만 아들은 그렇질 못한다고 해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아들이 점점 더 성숙하면서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아보면, 아버지의 심정을 그 때에 이해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앙에 있어서도 이러한 성숙단계는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화론에 있어서 이근호 목사님과 저의 견해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은 얻었다고는 입술로는 말하지만 아직까지도 죄의 종으로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여서, 사단이 죄를 가지고 공격하면 여전히 자신은 죽일 놈입니다. 나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주님이 살려주면 좋고 살려 주지 않아도 저는 어쩔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할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삶은 자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주장하는 성화적인 삶은,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주님께서 자신의 핏 값(속죄)으로 나를 사신 사실을, 성령의 주도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말씀을 통하여 깨닫고, 주님의 자녀가 된 것에 감사하여 천국을 상속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감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아버지 앞에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 행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과정에 있어서 실수가 있고 범죄행위가 있을지라도, 성령은 아버지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며 다시 돌이키는 삶을 살아가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아들이 회개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가 끊어질 까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 자녀로서의 마땅한 회개인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에 확신을 가진 회개와 그렇지 못한 회개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성도들의 성화적인 삶인 것입니다.
계시의 방편으로 주신 구약 성경을 보면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었던 사람입니다(창세기 12장과 15장에 나오는 아브라함 언약). 때문에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호수아는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질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자기들의 생명을 담보로 해서 싸워 이겨야만 얻어지는 거룩한 싸움이던 것입니다. 물론 그 싸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을 위한 싸움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성도는 이미 구원이 확보된 영적싸움이 있는데, 이는 성령께서 함께 역사하시는, 승리가 보장된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적 싸움이 성도의 성화적인 삶으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1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바울이 배를 타고 압송되어가는 도중에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배에 함께 탄 모든 승객들은 물에 빠져 죽는 줄 알고 우왕좌왕합니다.
그 때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나의 속한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들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노라(행27:22~25)”
이 말씀 속에서도 바울이 탄 배에 속해 있는 모든 승객들의 안전에 대해서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서 염려하지 말라고 예언적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마침내 이루어져서 모두가 구원을 얻게 됩니다(행27:44).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시고 예정하신 일들에 대하여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위한 인간의 싸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만 믿고 배에 탄 승객들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예언의 약속만 믿고,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가만히 눌러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배가 파선하지 않도록 하기위한 자기들의 노력들이 동시에 진행되어 지면서, 그들은 배의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 밀을 바다에 버리기도 하고 닻을 끊어 킷줄을 늦추고 돛을 달고 바람을 맞추어 진행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에 대해서는 의심할 필요가 없지만,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까지는 영적인 전투가 남아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영적인 싸움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이며,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싸움이 곧 성도의 성화적인 삶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슬라엘에게 붙이신 싸움은 모두가 승리로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붙이셨다고 해서 그들은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나갔음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오직 십자가만을 붙드는 삶을 자기부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자기부인이라는 것은 자기포기이며, 이 세상에 기대를 걸지 않는 삶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부인은 말로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의지한 영적싸움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성도의 성화적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은 구원을 깨닫기 전과 구원을 깨달은 후의 삶의 내용을 구분하지 않는 데에서 나오는 오류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아무런 의식을 느끼지 않고 하늘을 보면 미세한 먼지는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늘진 곳에 빛이 들어오면 그 빛에 반사되어 미세한 먼지까지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영이 우리의 어두운 심령에 비추이면, 말씀을 통한 우리의 죄악이 들어나며,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미암아 죄악과 더불어 싸워나가는 성화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싸움에서 우리는 실패하고 낙담하며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지속적으로 우리를 일으키시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온전한 삶을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우리는 죄악과 싸워야할 영적 군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김홍배님! 그리고 이규호님 오늘도 영적싸움에 승리하여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지는 성화적인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김홍배님!
쉽게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하셨는데, 제가 너무나 장황하게 설명한 것들이 오히려 이해를 돕는데 실패했을지도 모릅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본인의 생각을 100% 납득시키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성령의 유기적인 역사’ 관해서 논해야 되는데 시간의 제약 때문에 말씀드리지 못함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원하시면 제게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관련된 파일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울러 참고삼아 개혁주의 자들의 성화에 대한 의견들을 간략하게 적어놓았습니다.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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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안토니 후크마(Antony A. Hoekema) 교수는 ‘성화’를 정의하기를 ‘성화’는 ‘인간의 책임 있는 참여가 수반되는 성령의 은혜로운 활동’이라고 정의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어서 ‘성화’는 또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성화시키는 가운데서 우리로 ‘선한일’을 할 수 있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선한 일을 공로로 자랑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그 일을 온전히, 즉 흠이나 결점이 없이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성화적인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만드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엡2:10)”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서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3~11)”
칼빈신학자 헤르만 바빙크는 그의 저서에서 ‘믿음은 성화의 두드러진 수단이다’라고 했습니다.(Gereformeerde Dogmatiek)
베드로 사도도 같은 주장을 합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벌카우어(G. C. Berkouwer)는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그의 저서 바울신학에서 ‘새로운 순종’을 논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명령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은 믿음으로 단번에, 그리고 계속적으로 새롭게 받아들여야할 직설법 위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것으로 알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몸과 지체들을 의의 봉사를 위해 드려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은 성도가 원수(죄)와 싸워야하는 전일생의 과업이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이델 베르그 요리 문답서 64번에서는
“그리스도에게 접 붙여진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감사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안토니후크마는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 성화를 말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요한은 믿음의 중요성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입니다(요일 5:4)”
대충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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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귀하의 소신에 대한 저의 견해
이근호 2005-01-10 08:49:04, 조회 : 726, 추천 : 32
기본적으로
신학적으로 제가 하는 말을 못알아 듣는데 문제점이 있습니다.
1. 성도에게 주어진 성령의 세례가 십자가 사건가 터진 그 이후의 취지에서 봐야 한다는 논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2. 인간의 가능성(인간 행함의 동기성)이 십자가 사건 연계해서 어떤 식으로 유효한가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3. '신의 주권론'과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적 예정론'과 일치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언약적 예정론이 인간들의 신적 이미지에서 나오는 신적 주권론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4. 사회 전반적인 인간들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신학을 하고, 무엇을 노리면서 학문 탐구에 나서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귀하께서 그렇게 길게 하신 그 '성화론'은 이미 다양한 모습으로 그 시류에 따라 유니폼을 입고서 계속해서 등장되고 사항입니다.
즉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5. 귀하께서는 제가 책을 많이 섰다는 소식만 접했지, 그 중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읽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이 책이라는 통일성 있는 사상집을 내지 않았다면 단편적인 글들을 통해서 짐작한 바를 가지고 토론하면 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의 책을 안읽고서 반박하려는 사람들을 다소 도와드리기 위해
이미 질문/답변 란이라든지, 아니면,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저에게 반박했던 많은 글들을 삭제하지 않고 그대로 둔 것입니다.
즉
나중에 저의 글에 반박하고 싶은 분들은 자신들의 반박이 이미 수 백차례 먼저 이루어진 다양한 글들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제가 뭐라고 반박했는지를 미리 파악하고 질문하라는 겁니다.
여기 십자가 마음에 자주 오시는 분들은 이미 오랜 기간 동안 온갖 종류의 반박들을 벌써 읽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생략하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 소리냐. 그 논조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귀하께서는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그런 최소한의 수고 조차도 아니하고 자신의 일상 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이런 발언으로 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과 같은 뜻의 글을 남긴 것입니다.
소위 신학을 공부하고 사람들이 의식 속에는 "과연 내가 주의 종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을 위하여 기존의 신학에 천착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지요. 그런 의식조차도 십자가 앞에서 기껏 죄에 해당된다고 말입니다.
이 정도로 인간들은 본능상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김홍배 선생님께서 지적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이근호'씨의 성화론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즉 그의 전체 신학이 어떠하기에 그런 '거룩'에 대한 개념을 수립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을 말하려면 제 책을 직접 읽으시고
왜 기존의 '개혁주의 신학의 대가들이 비성경적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저의 견해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면 질문을 해야 하는 겁니다.
칼빈이니, 로이드 존스니, 리델보스니, 바빙크니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성화론은,
인간의 타고난 품성의 발로로서, 하나님을 규탄하기 위한 악마의 조종력에서 나온 산물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 인간 말 듣고 이러이러해야 좋은 하나님이 될 수 있다"는 악마적 발상에서 나온 겁니다.
왜냐하면 귀하의 이론은 모든 종교가 일률적으로 주장하는 공통된 인간의 지혜입니다.
기존 한국 정통 교단 뿐만 아니라 여호와 증인, 지방교회, 안디오크 파, 박옥수 파, 안식교 모두가 이것을 주장합니다.
심지어 종교를 갖지 않는 일반인들도 이런 의식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점을 알려면 철학도 병행해서 공부를 하셔야 합니다.
칸트가 어떤 성화론을 주장하는지, 헤겔이 어떤 성화론을 주장하는지를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귀하는 너무 성급합니다.
안타깝게 말하면
너무 속아왔습니다.
교회 장사꾼들에게!
그리고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 참된 신학'이라고 외치는 신학교 이단들에게 말입니다.
끝으로 귀하의 형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예화로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경로당에 노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노인네가 어두운 실내에 앉아서 다음과 같이 절규합니다.
"인간에게는 따뜻한 햇빛이 필요한단 말이야! 이 어두운 실내에서 더이상 살 수 없단 말이야! 사람의 참된 삶은 따뜻한 햇빛과 더불어 이루어진단 말이야. 왜 이 이론을 모르고 있단 말이야!"라고 발악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미 따스한 바깥에 햇빛 쪼는 노인네들이 한 마디 건넵니다.
"그 실내에 틀어박혀 있는 양반, 좀 조용히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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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삭제
김홍배 2005-01-10 19:59:50, 조회 : 369, 추천 : 34
관리자님 삭제해 주세요
하나님 말씀만이 진리이지 칼빈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요,
신학논쟁은 자칫 신앙의 본질을 훼손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로 작용될 가능성이 있기에
별로 바람직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하지만 깨우침의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답변주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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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답변
이근호 2005-01-10 21:44:37, 조회 : 754, 추천 : 36
이세돌 9단은 얼마전에 일본에서 열린 세게 바둑 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바둑 두는 사람에게 참으로 '위대한 바둑 기사'입니다.
바둑에 흥미가 있는 사람은 이 청년의 재주를 신적인 것으로 여길 정도입니다.
비제이 싱은 작년에 최우수 골퍼 선수가 되었습니다. 골퍼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초인적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각분야에서 나름대로 최고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에서 신학하는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칼빈입니다.
목회하는 사람들에게는 조용기라는 자가 참으로 성공적인 목회를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모든 것이 배설물에 해당됩니다.
참으로 증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악마가 무엇을 노리고 주목하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악마가 이세돌 9단을 시기할까요?
악마가 비제이 싱을 시기할까요?
악마가 칼빈을 시기할까요?
악마가 조용기 씨를 시기할까요?
사람에게 높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미움받습니다.(눅 16:15)
참으로 악마가 노리고 주목하는 자는 바로 오직 그리스도의 의(義)과 공로만 자랑하는 자입니다.
김홍배 선생님,
이 점을 잊으면 아니됩니다.
이 세상은 취미나 흥미거리로 사는 보람을 가질 만한 세상이 아닙니다.
신학도 얼마든지 흥미거리에 해당됩니다.
신앙을 대체할 만한 흥미거리로 말입니다.
악마가 있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들린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지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5-16)
지금도 이 세상은 악마가 이런 차원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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