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 칼빈에 대한 펌글 평가 요구] 2005/01/02
[신학자 칼빈에 대한 펌글 평가 요구] 2005/01/02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글삭제 김홍배 2005/01/02 42 283
[re] 신학자 칼빈에 대한 펌글 평가 요구
이근호 2005-01-02 08:33:56, 조회 : 751, 추천 : 36
우선 세르베투스가 무엇을 주장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삼위일체를 가리켜 삼분신(三分神), 삼두견(三頭犬) 운운하여 칼빈을 제네바로부터 제거코자 했으나 도리어 화를 자초하고 말았던 인물입니다.
세르베투스는 삼위가 한 본질 안에 거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셋으로 나뉘어져 신의 유일성에 어긋나기 때문에 셋은 단순히 환상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격위(格位)란 신의 본질 안에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외부적 어떤 관념이라는 것" 곧 신이 우리를 위하여 혹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나타나는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타초에는 말씀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에 신 안에 아무런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 신에게서 나온 신으로 나타난 후로는 성령도 그에게서 '다른 신'으로 유출하였고, 이렇게 유출된 성령은 신성의 그림자(유령)이다 고 보았습니다.
경륜(배분)의 방법에 따르면 마치 인간이나 나무들 혹은 돌들 중에 있는 본질상 동일한 영이 신의 일부분인 것처럼, 성자나 성령도 신의 일부분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세르베투스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삼위의 위격은 신의 영광이 밖으로 나타나는 가견적 모양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칼빈은 제네바 시민 정부를 자신의 신정정치론에 따르도록 요구한 입장에서 이러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곧 제네바 시민 정부에 대한 정치적 이데오르기를 전면에 내세운 반발세력에 해당됩니다.
그러니까 요즈음 말하면 김일성 주체의식에 물들어 반공세력을 도리어 몰아내려는 인물이 세르베투스인 것입니다. 칼빈이 시민정부에 대해서 세르베투스를 위험인물로 보고 사형집행 하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이미 완벽한 신정정치를 꿈꾸는 제네바 시민정부가 칼빈에게 넘겨준 권한의 일부라고 칼빈이 생각하듯 합니다.
그러니
칼빈이나 제네바 시민정부의 문제점은 완벽한 신정정치가 이 세상에서 실시 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정치성향에 문제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나 말로 안될 때는 신성한 권세(?)를 행사할 수 밖에 없지 아니한가 하는 강자(强者)를 지향하는 의식 말입니다.
칼빈의 이러한 잘못된 의식은, 그의 예정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칼빈의 신론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 삼위일체 하나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즉 일반적인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하나님 의식이 그의 신학의 전편에 깔려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인간의 세상에 '적응'(Accommodation)하시는 형식으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쪽에서 먼저 자신을 낮추시어 자신을 알리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그는 루터와는 달리, 십자가를 비켜가서도 알 수 있는 예수님과 신론을 주창하고 있는 겁니다. 그 신론을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를 다듬어서 그 삼위일체 중심으로 구원론을 뽑아내느데 그 삼위일체 신론의 내재적 관계에서 소위 그의 '예정론'이 펼쳐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의 예정론은 성경적인 예정론이 아니라 그야말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최고 신', 즉 '신의 주권의식'의 논리적인 확장에서 비롯된 의식입니다.
이것은 확정된 지식은 곧 신이 내린 합법적 권세를 동반된다는 의식도 아울러 갖게 합니다. 즉"옳은 일 하겠다는데 감히 누가 나에게 덤벼..."하는 식이죠.
이러한 정치의식은 20초 히틀러에게 충성한 법철학자이며 카톨릭 옹호자인 칼 슈미트 의식으로 만개하고 있습니다. 즉 신의 사명을 부여받은 자는 이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권한을 행세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교황처럼.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그 인간이 가진 신성한 권력적 은사 행사를 무시해서는 아니된다는 주장을 칼빈이 길을 터놓은 겁니다.
교회 내에서 실시하는 '당회적 차원의 치리(治理)'라는 것도 이런 발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사람 하나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칼빈의 후예로 자처하면서 마치 교회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처럼 복음 대신 완전한 이상적인 교회을 가견적으로 만들고자 해서 사람들을 영적으로 사형시키는 오늘날 한국 교회를 사람들이 여전히 참된 교회인 양 간주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참된 신자는 여전히 십자가의 운명을 밖으로 보여주기에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여전히 약자(弱者)인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롯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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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삭제 김홍배 2005/01/02 42 284
[re] 칼빈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이효종 2005-01-04 00:02:18, 조회 : 332, 추천 : 38
칼빈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언급에 대해서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답변인 것 같아서 제가 몇 말씀드립니다. 저는 자주 십자가마을에 둘러보지는 못하지만, 이근호 목사님께서 자신의 신학사상과 조금 다를 성 싶으면, 악마라는 섬뜩한 단어를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보고 조심성 있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님께서 질문하신 칼빈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이근호 목사님의 주저 없는 비판에 대하여, 사실을 바로 잡아야 되었기에 몇 자 올립니다.
과연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을까? 그리고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면 거기에는 어떠한 상황적 근거가 작용했을까? 그리고 종교개혁이 일어 난지 수백년이 지난 지금, 과연 누가 그 시대의 정확한 사정을 근거로 해서 명쾌하게 답변을 할 수 있을까? 이는 그리 쉽게 대답할 성질의 것은 아니라 생각되어집니다.
저 자신도 한 때는 칼빈을 존경하면서도, 그가 세르베투스를 화형 시키는 일에 주도적인 일을 감당했다는 이유만을 근거로 그를 배척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저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느끼는 감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에 소개된 칼빈에 관한 글들이 너무 편협한데 따른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본인이 네달란드 자유대학 도서관에서 접한 칼빈의 글들을 보면서 우리가 바라보는 칼빈에 대한 오해에 대하여 다른 시각을 갖게 된 것은 퍽이나 다행스러운 것이었음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읽은 책들은 오래되어서 기억은 안나지만, 폐의 혈액 순환기능을 발견한 과학자이자 ‘삼위일체의 오류(1531년)’의 저자였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1553년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화형에 처해졌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를 죽인 것은 칼빈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칼빈은 그의 방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흠집처럼 따라다는 것이 세르베투스의 화형사건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개의 교회사를 기록한 책들은 당시에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한 세르베투스의 주장을 칼빈이 참지 못해서 죽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단 몇 권의 책을 일고 명확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역사적 사실들을 검토해 보면, 그러한 사실들이 허구라는 것으로 즉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읽은 글들 속에는 당시 세르베투스의 화형 집행은 칼빈 개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25명으로 구성된 제네바 소위원회에서 결정한 것이었는데, 이 소위원회의 결정은 칼빈이 아닌, 당시 다른 개혁파 목사들의 자문을 통하여 이미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결정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칼빈은 재판정에서 세르베투스의 행위에 대하여 증인 역할을 하였으나, 재판이 진행되어지는 과정에서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막기 위해서 노심초사하였고, 재판이 끝난 뒤에도 칼빈은 세르베투스를 살리기 위해서, 세르베투스의 소신을 바꾸기 위한 노력들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 소위원회가 화형을 결정하자 칼빈은 이미 자신의 한계를 떠난 결정에 대하여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세르베투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 참수형을 요구했지만, 재판의 결정권을 쥐고 있는 제네바 소위원회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였다는 일부 교회사의 기록들은 어떻게 봐야할까? 그것은 훗날 제나바에서의 칼빈의 종교개혁이 반대파들에 의해서 과격하게 보여 졌고, 그들에 의해서 칼빈은 더욱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람처럼 묘사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이미 수백년 지나간 역사를 한국에 알려진 몇 권의 책들만 가지고 과거의 일들을 쉽게 판단하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적 개혁파 교회들은 칼빈의 신학사상을 따르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개혁파 교회임을 표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칼빈의 심오한 신학사상의 뒷받침 없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개혁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 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성경으로만 이야기 하자고 말합니다. 근데 칼빈만큼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 그것은 의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도 대장간을 통하여 많은 글들을 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만큼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많은 책을 써낸 사람이 무조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행7:58). 혹자는 바울이 스데반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설령 직접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를 추종하는 자들이 죽어가는 스데반을 사울이라고하는 바울의 발 앞에 둔 것은 바울이 죽인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스데반을 죽인 바울에 대하여 비판을 합니까? 절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심히 특심하여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자들을 죽이고 핍박하였던 자신의 죄를, 나중에서야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고 회개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설령 칼빈이 세르베투스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다고 단정할지라도 그의 모든 업적을 우리는 한 가지 사건으로 뒤집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기독교 강요를 통해서 진실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한 그였기에 그는 죽기 전에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때 엄청난 죄를 지은 고재봉이나 김대두 같은 인물들도 후에는 회개하고 죽었다는 사실 속에서 한 때 실수한 죄를 가지고 그들의 모든 삶까지도 부정해 버리는 것은 인간의 속 좁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죄를 짓는 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모든 인류가 다 똑 같습니다. 단 인간들이 판단하는 경우에 따라서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예정론에 대해서도 문제가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정이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떠나서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정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진행되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나라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기 이전의 상태)가 사단의 미혹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죄를 범하므로서, 원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가 깨어짐으로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 곧 죄가 침범하지 못하는 나라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당신의 의지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시기 위해서, 때를 따라 당신의 종들에게 약속하신 일들을 역사를 따라 성취해가는 여정들이, 곧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하나님의 예정인 것입니다. 이를 언약적 구속사에 담긴 하나님의 절대주권의 실현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인류의 구원은 처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회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 어떠한 사람도 성경을 완벽하게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한 다면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약간의 차이는 서로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극단적인 내용이 아니고서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한국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기복주의를 부추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오순절계통의 신학들 말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마을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신자의 ‘성화적 삶’ 과연 가능한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근호 목사님의 주관적 해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예수를 영접했다고 해서 점진적인 성화를 이루어 간다는 것은 한번 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말씀대로 살고, 착하게, 선하게, 도덕적으로 사랑을 베풀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죄성을 가진 인간은 순식간에 사단의 꾀임에 빠져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거룩한 목사일지라도 자기 심령 속에 감추인 죄의 속성은 여전하다고 할 것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지적하신대로 다 옳은 이야기 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을 누리는 성도의 삶은, 그들 심령 속에 성령께서 좌정하시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을 쫓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선택하신 언약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살아야 된다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들이 모두 명령어로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명령들은 너희로써는 어쩔 수 없는 존재니까 그 명령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좋다는 식으로 우리에게 권면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괜찮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허공에만 메아리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율법을 다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말미암아 구원 얻은 성도들로서의 당연한 삶의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 얻은 신자의 심령 속에 성령께서 거처를 삼고, 우리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도록 역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가기까지는 이 세상은 여전히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의 역사가 집요하기 때문에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실패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성도가 죄에 대하여 패배할 때 마다, 죄를 깨닫게 하시고 성도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성령의 소욕을 쫓아 살아가도록 붙들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들은 성도가 도저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명령하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스럽질 못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주님께서 직접 알기 쉽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면 간단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너희에게 명령한 것들은, 너희들은 도저히 지킬 수가 없다. 그것은 내가 한번 해본 소리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면, 우리는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터인데.... 왜? 주님은 자기 자신을 복종시키고,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살면서 따라오라고 하셨을까?
“내가 너를 위해서 내가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았다.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기만 하면 돼 알았지”이렇게 말씀하지지 않고 왜 주님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을까?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하는 삶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마 십자가마을을 대표하는 모든 분들도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한 삶의 내용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삶이다”라고 너무 단편적인 말씀만 하시지 마시고,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는 삶의 내용을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분명 여러분의 의지와 행함이 포함되어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 여러분들이 기도를 할 때에도,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하기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 기도를 할 터인데 그 삶 자체는 행함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행함이 없는 삶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마을에서 인간의 노력이나 행함을 거부한다고 해도 여전히 여러분은 그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소중하게 여기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오늘도 성령님께 우리의 연약함을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말씀 앞에 순종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셨을 때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했습니다. 그 순종은 하나님의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져왔으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파괴되어져 왔고 그들은 에덴에서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자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구원을 값없이 주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회복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위한 삶을 살아가라고 오늘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방해하는 사단의 권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어서 주님은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시고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격려하시며, 때로는 질책도 하시고, 때리기도 하시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을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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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칼빈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이근호 2005-01-04 08:26:51, 조회 : 376, 추천 : 36
칼빈의 대한 의견은 저도 동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역사란, 기껏 '후차적 진술'이라는 표현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사형을 중차대한 오판이라 여겨 극렬히 반대했다면 그는 그 후 자진해서 그 제네바 시민정부 측과 손을 끊었어서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칼빈이 역사를 보는 '후차적 입장'이었습니다.
본인이 시민정부 측에 같이 묻혀 들어가는 것을 칼빈 본인이 용납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스데반 죽음에 대해서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으로 서슴없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다윗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후대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판단을 내리면서 개별적인 개인으로 고립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변의 정치적 상황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그 사람의 성향을 알아보겠다고 덤비는데서 흔히 나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소위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에게 이러한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기원전 368년경 플라톤은 시칠리아의 독재자 디어니시오스 2세의 야심에 말려들어 시라쿠스로 정치에 참여하려 갑니다. 중간에 친구 디온의 농간에 말려들어서 말입니다. 이런 유혹으로 인해 나중에 플라톤은 자신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됩니다.
유명인사 흔들기는 일종의 재미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상황은 선과 악으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이 적과 동지를 무슨 기준에 의해서 구분지었느냐로 가판가름됩니다.
제가 지적하는 것은 칼빈에게는 정치적 결정이 복음적 결정보다 앞서 있다는 점입니다. 즉 정치를 통한 이상 신정정치를 구현할 수 있다는 의사가 칼빈에게 있었는데 이는 칼빈의 모든 신학 사상의 근간이 됨을 부인할 수 없는 기정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칼빈의 성화론은 이런 점에서 복음적으로 비난받아야 합니다.
성화론의 성립 자체가 정치색을 띱니다.
즉 "내가 타인의 신앙을 관찰하고 판단내릴 기준을 나는 수립해야만 한다"는 의식이 곧 성화론을 낳게 하는데 이것은 사고방식이 성경의 뜻과는 무관하고 오로지 '교회정치'와 관련되어져서 나오는 발상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칼빈의 주장대로 "교회 내에서 목사 말에 순종해서 구원받는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나오는 것이 예수님의 의(義)에 대한 일방적 찬양이 나오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윤리적, 도덕적 기준이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윤리적, 도덕적 기준과 맞지 않는다고해서 거룩의 질(質)에 우열을 논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마치 자처해서 '주님 노릇'하겠다고 나서는 행위와 같습니다.
도덕이나 윤리는 시시각각으로, 그리고 형편따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본인이 하나님을 우습게 보고 행한 짓이든 아니면, 본인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나오는 감격의 표현이든간에 결코 겉행동으로서 판정을 내리는 기준은 인간의 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조차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인식은 그 자체로도 역시 순환논리적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주체는 인간이 됩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판정을 내리는 것이 됩니다. 성령을 받지 못했놓고서도 성령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인간으로 인해 성령을 받은 자가 정죄된 정치적 처형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전부 일률적으로 정리하면 '십자가 복음에 의해 정죄받고 지배받는 묵시적 기간(에이온)'으로 접어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언약적 관점'입니다.
새언약적 관점에서 보면, 성화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기초한 '거룩론' 밖에 없습니다.
이 거룩론은 교회 정치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의(義)인 복음에서 나옵니다.
즉 인간의 행위에서 나온 거룩론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의 행위에 기초를 공격하는 예수님의 행위에서 나온 거룩론이죠.
이러한 거룩론을 이 어두운 묵시적 세계에 전파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증인의 바른 사명입니다
결론적으로 칼빈의 성화론은, 신앙이 없어 기껏 보이는 교회의 존재와 그 안의 행정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측정하고 손에 잡으려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구실과 핑계 노릇을 할 뿐입니다.
예수님을 상품으로 삼아 종교 사업 하기 딱 좋은 논조를 칼빈이 후대들에게 전수해 준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 신앙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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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칼빈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이효종 2005-01-05 03:28:23, 조회 : 280, 추천 : 30
외람되게 다시 한 번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혹시 저의 글을 통해서 감정이 상하셨을 수도 있는데 부드러운 글로써 답변을 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근데 이근호 목사님께서 칼빈에 대한 의견에 동감하신다고 서두에서 말씀하셨는데, 어떠한 의견에 동감하신다는 것인지 확실하질 않습니다. 단지 시대적 상황만 동감하시는지 말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만약 칼빈이 세르베투스의 사형을 중차대한 오판이라 여겨 극렬히 반대했다면 그는 그 후 자진해서 그 제네바 시민정부 측과 손을 끊었어야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쉽게 판단해야할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의 실제적 상황이 어떠한 지를 수백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우리들의 단편적인 사고를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시대적 상황이 만든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날 한국의 정치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일들을 보게 되는데, 과거에 어떤 사람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에 순응한 것에 대하여,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으로 명확하지 않은 사건들을 자기들의 시각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현대 한국교회의 상황은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다시 회복되어질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한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왜냐하면 제도권이 너무 물량주의, 기복주의, 정치권력의 도구화로 치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도권을 보면 토해내고 싶을 정도로 안타까울 뿐만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 가고자하는 노력들이 전혀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기복주의를 배격한다고 외치면서도 기복주의 설교를 해대는 어처구니없는 한국교회의 실상을 보노라면, 때로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도권 속에는 여전히 한국교회를 염려하면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하는 남은 자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소수는 어떻게 하면, 바른 교회를 이루어 나갈까 하는 명제를 가지고 노심초사 하며 바른 진리를 선포하고자 힘쓰는 부류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소수는 제도권의 잘못된 점들을 비판하면서도 제도권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들이 진리 임에도 불구하고 제도권을 박차고 나오지 못하는 피치 못할 사정말입니다. 이러한 피치 못할 사정들을 삼자가 나서서 함부로 논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소수는 제도권 속에 있으면서, 제도권의 변화를 기대하며 그 속에서 작은 불씨를 태우며 개혁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이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들을 제도권 속에서 나오지 않느냐고 함부로 비판을 가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십자가 마을’을 방문하여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동조하는 많은 목회자들 중에는 심한 갈등을 느끼는 분들이 상당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매료되어, 여기 저기 기웃 거리면서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이 참된 진리라고 외치면서,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고 큰소리치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저들은, 저들이 몸담고 있는 제도권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그냥 제도권 교단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퍽이나 아이러니컬한 일이 되는 것이라 보아집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입장이시라면, 저들을 어떻게 생각하실지 궁금합니다.
‘십자가 마을’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글 보다는 이근호 목사님의 글들을 엄청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조회건수를 보아서도 잘 알 수 있는데, 모두는 아닐지라도 상당수는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동조하고 있는 분들이라 여겨집니다. 정작 저들은 자기들이 소속된 교단을 탈퇴하여 ‘십자가 깃발’에 모여든 ‘개혁노회’에 가입하지 않고, 이 ‘십자가 마을’에 올라와 있는 자료들만 취사선택하여 뽑아 가는 저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들은 내가 알바 아닙니다. 저들은 저들대로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는 그저 내 갈 길을 가면 그만입니다.”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이근호 목사님께서 칼빈의 잘못된 이중성을 꾸짖을 자격이 있으시다면,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 동조하면서도, 즉각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교단들을 탈퇴하여 ‘개혁노회’의 깃발아래 모이지 않는 이들에 대하여 엄중한 꾸짖음과 경고가 있어야 할 줄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마을’의 홈페이지를 폐쇄하는 결정까지도 고려해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사상에는 적극 동조하면서도 자신들이 비판하는 제도권 속에 머물러 있다면, 저들은 말로는 동조하면서도 행위로는 거부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성화론의 성립자체가 정치색’을 띠고 있고, 이는 교회정치와 맞물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회 내에서 목사의 말에 순종해야 구원 받는다’고 하는 이치와 똑 같다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저로서는 도저히 납들이 가질 않습니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칼빈주의)에 몸담고 있는 교회들 속에 목사의 말에 순종해야 구원 받는다고 설파하는 목사들이 과연 있다는 말씀입니까? 제정신이 아닌 목사가 아니고서야, 역사적 개혁파 교회 내에는 이런 목사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역사적 개혁파교회를 모독하는 일입니다.
오직 말씀주의를 가지고,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유월절 어린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이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 개혁파 교회의 본연의 의무이며 책무입니다. 근데 목사 개인의 말에 순종해야 구원 얻는 다는 소리는 이근호 목사님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말씀입니다. 만약 그러한 목사님이 계시다면, 저는 동조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교회의 정치적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신도들에게 성화를 촉구하는 교회가 있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칼빈의 신학사상을 존중하는 역사적 개혁파 교회는 그런 교회를 지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칼빈의 성화론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던지 아니면 무지하다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칼빈이 주장하는 성화는 정치적인 입장을 강화하고자 생긴 것이 전혀 아닙니다. 칼빈이 주장하는 성화론은 일부 신학자들이 오해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는 점점 더 성화되어져서 성화의 도가 장차 극대화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 개인의 입장으로는 이 사상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마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성도의 성화를 적극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아님을 말씀드립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칼빈이 구원을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정치적인 성화를 조장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 이는 대단히 잘못 본 것입니다. 이는 오히려 캐톨릭 입장에서 보는 주장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원의 조건으로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목사들은 개혁파교회에는 없는 것입니다. 있다면 그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교회일 것입니다.
성화는 이미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은 저들이 주님을 영접한 순간부터 성령께서는 저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셔서 저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보게 하셔서,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오직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한 삶을 살아가도록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저들이 구원을 얻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악 가운에 머물러 있을 때에는 책망하시기도 하시고 채찍을 가하기도 하시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임을 스스로 자각 하도록 하는 역사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의 마음 판에 새긴 새 언약의 증거(렘:31:31~33)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도의 성화는 구원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업적을 쌓는 것도 아니며,혹은 보상을 바라보고 수고하는 노력의 결과물도 아닙니다. 다만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그 가치에 합당한 삶을 만들어 나가도록 하시는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마을’에서의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공짜로 구원을 받았는데, 거기에 어떠한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를 첨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행위 없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섭리에 따라 구원 얻은 성도의 삶은, 반드시 성령의 역사를 따라 세상과 구별된 성화적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영원히 보장하겠다는 증거이며, 그것은 성도의 구원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증표인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주장처럼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고, 훗날 회심하여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이후 그는 아무런 수고와 노력 없이 살았다는 말입니까? 바울은 구원 얻은 걸로만 만족하고 그냥 멍청하게 살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방인의 사도로서 가난함과 부요함에 굴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복음을 담대히 증거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도의 성화적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이 이렇게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이유가 구원을 받기 위한 몸부림 이라고 생각되어지십니까? 물론 아니지요 이미 구원 얻은 백성으로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자하는 성화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이근호 목사님은 도덕이나 윤리는 시시각각 변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의 기준에 의하여 성화적 삶을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물론 타당성 있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도덕이나 윤리의 기준은 시대 상황과 문화의 차이에서 어떠한 것은 죄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만고불변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를 들면 10계명 같은 경우입니다 (4계명만 제외하고). 그러한 계명은 어떠한 시대, 어떠한 문화 속에서도 불변하는 만고의 진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은 새언약의 관점에서 성화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기초한 거룩론만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성화론과 거룩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거룩’이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성화론적 의미가 더욱 더 풍부하게 드러난 말씀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성경에서는 ‘거룩’이라는 말의 의미가 세상과는 구별되었다는 말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기 때문에, 더 더욱 이미 구원 얻은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어진 성화적 삶을 살아야 되지 않을 까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 1:15)
마지막으로 이근호 목사님은 칼빈이 예수님을 상품으로 삼아 종교 사업을 하도록 후대에게 전수해 준 것으로 말씀하셨는데, 이는 가당치 않는 말씀입니다. 칼빈이 종교 사업을 벌려 자신의 부를 축적했다는 말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출판사를 등에 업고 복음을 팔고나 있지나 않은지 의심이 갈 뿐입니다. 설교 자료들을 cd에 담아 주문을 받는 것이 또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죄악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소한의 운영자금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노라고 자부하시겠습니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신앙을 구축하려고 할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했는데, 진정 복음의 의미를 깨닫고 말씀에 이끌리어 성화적 삶을 살아가고자, 수고하는 사람은 절대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 혹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치장하여 구원을 확증하고자 않습니다. 다만 구원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말씀 앞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심만이 있을 뿐입니다. 비록 자주 실패하고 넘어질지언정 속히 일으켜 주시는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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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칼빈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이근호 2005-01-05 08:19:37, 조회 : 300, 추천 : 39
귀하께서는 제가 언급한 것 중에 제일 핵심되는 대목을 누락 시켰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나 자신과 혹은 타인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기준을 가져야되겠다"는 의식의 문제점에 관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에게 직접 마이크 대고 인터뷰를 해보세요.
"당신은 우리들이 볼 때는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대단한 성화인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사도가 무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입니다.(고전 15:10)
하지만 사람들은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고백만으로 뭔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왜냐하면 은혜란 혜택을 입느냐 아니면 제외되느냐 하는 것은 인간들의 애타는 몸부림과 요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시혜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목회가 곧장 거들나기 십상이라는 뻔한 미래가 보입니다.
은혜만 생각하다가 안오는 손님을 언제까지 기다릴 것입니까?
따라서 사람들 자체를 재평가하고 분류할 수 있도록 모든 인간들에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식으로 신학을 재조립하게 되는게 그것이 바로 도덕과 윤리 생활에 의한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분류 방식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화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도덕이나 윤리라는 것은 교양과 관련되어 있고 교양이란 그 집단 내에서의 숙련성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즉 분위기 파악을 잘하면 성화요, 분위기 파악을 못하면 성화가 덜된 작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1. 복음만 알아듣지만 전혀 교회 관행과 관습에 대해 익숙해져 있지 못하는 쪼자 시기
2. 슬슬 목사가 요구하는 것이 다 교회가 재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요구에 의해서 나온 소리라는 것을 알아 먹는 시기
3. 그래서 일단 목사가 시키는대로 따라는 가 주지만 적극적으로 호응하지는 않고, 자신을 왕따시키면 얼른 다른 교회로 튈 준비가 되어 있는 시기
4. 교회 분위기에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어주어야 이 바닥에서 사람 구실한다는 것을 알아채는 시기
5.. 교회에서 뒤 처지기 싫어 목사가 시키는대로 선동적으로 움직여서 그 교회에서는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다져보겠다고 나서는 시기
5. 슬 슬 교회를 자기 앞 마당 산책하듯이 놀러다니면서도 그동안 투자해 놓은 헌금과 자기가 박아놓은 자기줄 사람으로 인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서 목사에게도 부담없이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시기
이것이 자본주의적 사회 내에서의 교회내 성화론 활용도입니다.
칼빈의 시대는 자본주의가 활성화 되지를 않는 시대이며 그 시대에는 신이나 교회나 그리고 성직자를 거부하는 것은 오늘날 이 한국 땅에서 노골적으로 "공산당이 좋아요"라고 외치고 다니는 경우에 같은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회는 신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돈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따라서 '성화론=축복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돈이 많은 자는 곧 신의 축복을 남보다 더 받은 자이고
신의 축복을 더 받은 자는 곧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남보다 많이 성화된 착한 신앙인임'이라는 확증물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평소에 성화되었다고 목사한데 칭찬을 많이 받았던 자라도 회사 부도 난다든지 이혼하면 교회 안나오는 법입니다.
만약 교회 얼굴 비치다가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으로 성화된 자라고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성화가 안되었기에 된통으로 저주받아 집안 꼴이 엉망이 되었나보다"라는 비난 받는 것이 뻔합니다.
귀하께서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교회란, 돈이라는 자본 위에 설립된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관'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신앙적으로 사는 자라면 집에서 혼자 성경보고 천당가면 그만입니다.
그럼에도 자꾸 목사들이 교인들을 집에서 교회라는 건물 안으로 집어넣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전히 목사들이 목회라든지, 교회라든지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을 그리워하는 것은 칼빈이 어려운 시기에 이상적인 (하나님보시기에 바람직한) 교회를 시도했다는 점이 자신의 목회 비젼과 야심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 때는 신이 지배해는 사회이지 돈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비록 돈이 없어도 신앙적인 폼만 유지한다면 훌률한 양반소리듣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번듯한 직장이나 직업이 없으면 사회의 불순물로 취급당하는 시대에 가족으로부터도 무능력자로 냉대받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신학교를 나온 자들이 '목사'라는 직업의식과 '교회'라는 직장 갖지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즉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명예유지가 더 다급하고 시급한 당면과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시민으로서 자신의 정체성 정립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아, 과연 나는 주의 종일까?'라고 말입니다.
이런 사실은 이미 교회라는 것이 자본을 바탕으로 한 조직체로서 이 사회 내에서는 인정받는 한 요소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사회적 구조틀 속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말해주는 겁니다.
기존 유력 교단에 속하면서 아무리 십자가 복음에 기웃거려봤자, 사회가 인정해주는 자신의 '주의 종'으로서의 정체성을 쉽게 포기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만약 쉽게 포기했다면 신학교 다닐 때 그 교수라는 '이단들'에 대해서 수업시간에 그들의 이단성을 공격하고 제적당했을 것입니다.
교회가 있어서 목사들의 자기 정체성이 살아납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을려면 자금이 모아져야 하는 겁니다.
교단이든, 작은 교회든, 어느 정도 대규모 교회가 되었던 막론하고 말이지요.
공짜로 일당주고 점심 제공해 보세요. 왜 가난한 이웃들이 교회로 안몰려 오겠습니까! 따라서 목회업에는 자금 동원이 필수적입니다.
십자가 복음 듣기 위해 사람들이 교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사업에 단골 모집하려고 얼굴 익히기 위해 교회 나오는 겁니다.
구원이란 '교회 등록'하고 성례식 참석하는 것으로 행정 절차상 마감된 일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되었다고 목사들은 이미 공개적이고 사무적으로 많은 증인들 앞에서 선포하고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인들을 계속 '성화론'으로 뒤에서 후려치는 이유는 단지 교회를 재정적으로 유지하겠다는 목적 외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이판사판의 목회 전문가들의 눈물겨운 사투입니다.
칼빈 시대와 다르지만 칼빈의 성화론은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효하게 써먹을 꺼리가 됩니다. .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본인들의 가능성을 제촉하면 그것이 곧장 그 사람의 질적인 등급을 매길 수 있는 빌미를 신학적으로 뒷바침 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한 참된 '거룩관'은 바로 이 모든 것이 다 '사기다'는 것을 공격하는 것이 진정한 축복받은 자들의 사명으로서 전할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성이라는 말입니다.
그 근거는 오직 십자가에만 있습니다.
참으로 복음을 아는 목사라면 죽기 위해 목회하지 살기 위해 목회하지 않습니다.
죽기 위해 목회 한다는 말은, 억지로 목회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목회로부터 자유로운 목회자를 말합니다.
교회로부터 자유로운 목회자를 말합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목회자를 말합니다.
이 자체가 십자가에서 나오는 거룩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관찰해서 그런 관찰된 쪼가리를 줏어 모아 신학을 건설하겠다는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불가능성'을 모토로 하는 신학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모토로 하여
'교회 유지가 가능한 신학'을 수립하려는 야심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귀하는 다음의 점을 다시금 정립해야 합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무엇이 담겨 있기에 그 안에서 나오는 능력으로만 구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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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칼빈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이효종 2005-01-06 02:25:08, 조회 : 276, 추천 : 37
또다시 글을 올릴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번 글이 마지막 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마을의 치명적인 결함은 성화론의 오해인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의견을 나누면서 풀어버리면 그만인데, 그 골이 너무 깊어 도저히 오고 갈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는 것이 마음 아프기도 합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저에게 제일 핵심되는 대목을 누락시켰다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나 자신과 혹은 타인의 신앙 상태를 점검할 기준을 가져야 되겠다”고 말씀하시면서
한,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이나 스데반 집사님께 직접 마이크를 대고 인터뷰를 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 15:10)”라고 말씀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과 스데반 집사님께 마이크를 대고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그 어려운 고난과 고통을 참고 인내하며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삶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원동력이 도대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답변 하시기를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제가 제시한 바울의 답변이나, 먼저 이근호 목사님의 질문에 응하신 바울이 답변이나 결론적 의미는 같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주장하는 결론 부분에 자기가 원하는 답변인 것처럼 둘러 붙이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삶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역사임을 알았기에 그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는 바울이 자신의 심령 속에 자리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던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이근호 목사님께서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역시 바울이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 즉 춥고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핍박당했던 모든 삶들은 주님이 주시는 능력, 곧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주심으로 말미암아 가능했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고백은 ‘구원을 얻기 위한 실천적 삶’이 아니라, 이미 말씀 안에서 구원을 깨달은 성도에게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나타난 실천적 삶인 것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 성도의 성화적 삶을 부정하는 것은 구원 얻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이 오류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새 언약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새 언약은 성도들의 마음 판에 새겨둔 것으로 성령님의 임재를 표현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제가 말씀드리는 성화론이라는 것이, 윤리생활에 의한 ‘신앙인’과 ‘비신앙인’을 구별하는 것이 성화론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저를 잘못 보아도 한참 잘못 본 처사입니다. 저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저 뿐만 아니라 이러한 말씀을 전하는 목사라면 저들은 분명 가짜 목사일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윤리나 도덕을 내세우며 구원을 외치고, 복 받기 위해서는 목사의 말에 순종하고, 교회의 일에 열심을 내라고 강요하는 목사들을 가장 싫어하고 경멸합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아니 다른 우상을 섬기는 자들도 얼마든지 선행과 사랑(인간의 기준에 의한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으나, 그들도 복음을 떠나서는 아무런 구원이 없다는 것쯤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가짜 목사, 가짜 성도가 아니라, 진짜 성도들에 관한 이야기 를 나누어 보고자 하는 것인데, 앞서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가짜 성도들의 유형을 대여섯 가지 정도를 열거하면서 그것이 성화론의 활용도라고 하셨는데, 참으로 제 가슴이 답답합니다. 겨우 가짜들의 모습만을 열거하시면서 성화론을 비판하시니 말입니다. 그리고 성화론은 축복론과 동일하게 표현하셨는데, 이러한 표현은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성화론’으로 뒤에서 후려쳐서 교회 재정을 유지하지 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지요, 그런 목사가 있다면 그들은 당연히 지옥감입니다. 진짜 교회는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가짜 교회들을 내세워서 토론을 하시면 진정한 의미는 사라집니다.
마지막으로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내재하신 성령께서는 구원을 누리는 성도들의 삶 속에 전혀 개입하지 않으시고, 아무런 하는 일도 없이 너는 그저 ‘죄인이다’ ‘죄인이다’라고만 하시면서, 너는 별수 없는 놈이다 그러니 십자가만 붙들고 있어야 한다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십자가 마을의 주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과연 십자가를 통한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진정 기쁨으로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영혼들에게 한줄기 기쁨의 복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복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질 못하고 단지 십자가 깃발아래 모인 패잔병들처럼, 그저 우는 모습으로 좌절하고 만 있다고 하면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될까 싶어 하나의 비유로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흔히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도의 기도를 가리켜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밥을 먹고 호흡을 한다고 해도, 살아가는 삶의 내용이 없으면, 그는 식물인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병원에 누워있는 식물인간은 밥도 먹고 호흡도 하지만 살아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의 삶 자체가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통하여 구원을 깨달은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어있고 그러한 기도를 하는 성도들은 그러한 기도에 합당한 삶의 내용이 자발적으로 나오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을 성령께서 친히 역사하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 얻은 성도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성화적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께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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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칼빈에 대하여 말씀드립니다.
이근호 2005-01-06 07:57:10, 조회 : 323, 추천 : 34
성령님이 십자가를 가지고만 이 세상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귀하께서는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십자가 사건 이후에 성령세례가 주어진다는 것이 이것을 말해줍니다.
즉 정말로 성령을 받은 자라면,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사랑에만 강권되어 있기에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 의만 자랑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귀하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라 인간의 가치성에 대해서 방어하고 나섭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훌륭한 사람이 실제로 있을 수 있는데 왜 자꾸 죄인이라고 몰아넣느냐 하는 것잖아요.
그런데 그런 고백이 과연 구워의 능력이 되는 복음의 핵심입니까?
정신을 도대체 어디다 팔고 다닙니까?
택한 자를 건지는데 있어 하나님은 복음의 능력으로만 사용하지, "성도, 너도 잘났다"라는 사항을 첨가시킨 그런 복음을 사용하지를 않습니다.
복음을 증거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교회'라고 우기는 그 고집은 또 뭡니까?
사도 바울이 세상도 제대로 모르고 상황판단이 안되서,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다'는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십자가의 앞에서 인간의 기본 태도는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아닙니다. 성화론이 아닙니다.
그 딴 것은 이 세상의 인간들의 아이디어에서 얼마든지 조립해 내고 있습니다.
모든 이단들이 다 그런 것을 가지고 인간들을 유인하고 있습니다.
상화론이 돈과 무관하지 않다고요?
인간의 윤리성과 도덕성이 인간의 생존 의지와 상관없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까?
인간은 살기 위해서 신으로부터 의롭다는 판정을 받고 싶어하고 그것으로 자기를 휘어감아 축복된 인물로 거듭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자기 방어책인데 이래도 인간의 윤리, 도덕과 성화론과 구원의지가 돈과 상관없단 말입니까?
장바구니에 신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가득 담아봐야 그것은 모두
주님 십자가 팔아먹어가면서 목사짓해서 밥벌이하겠다는 용도로 사용하는 겁니다.
칼빈이든 누구든 그렇지 않는 인간이 없어요.
왜냐하면 모두다 '아담 안'에 속한 그 자식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스데반 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주님깨서 그런 인간을 사용하셔서, 귀하가 거론한 성경 귀절처럼 오로지 성령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자신을 주님의 죽으심에 넘겨지게 해서 거기서 나오는 것이
귀하께서 그토록 신봉하는 교리 '자기 잘남의 성화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이 나오도록 사용하시는 겁니다.
"우리 산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