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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진주는 무엇인가요? ] 2004-08-28묻고답하기마태복음

[진주는 무엇인가요? ] 2004-08-28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진주는 무엇인가요?
김재국 2004-08-28 12:10:49, 조회 : 237, 추천 : 37

마 13:45-46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이근호목사님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를 예수님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주는 무엇입니까?
만약 < 좋은 진주=예수믿는 인간 >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면
무가치한 인간을 예수님이 찾는 진주로 비유하면서 인간의 가치를 인정한
성경은 잘못된 것인지요?

또한 이목사님의 해석에 의하면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하한 후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13:44) 이
"천국은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도 갈 수 없는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만 주어지는 것이니
이를 발견한 예수님이 자기가 죽음으로 그 예정하심을 샀다"라고 되는데요
사람=예수님 이라는 해석은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아무래도 보화를 발견한 농부는 인간 중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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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주는 무엇인가요?
이근호 2004-08-28 14:13:19, 조회 : 238, 추천 : 32

비유 해석에서

하나 하나 뜯어서 해석하면

본 비유에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취지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딴 해석이 나와버립니다.

마치

고속철도 기관사가 열차를 몰고 자기 고향집으로 세워놓고 개인적인 볼일을 보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대부분이 천국에 관한 비유입니다.

천국의 성립은, 예수님이 어떻게 행위하시느냐의 여부에 달렸지, 인간이 어떤 식으로 따내느냐 하고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원을 요구할 입장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은 마치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과 같다"는 이 핵심으로만 국한해서 천국을 이해해야지 거기서 '진주'가 무엇이냐 하는 것으로 하면 옆길로 새는 해석입니다.

즉 '천국=장사꾼의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지 거기에 '진주'의 의미를 따로 챙겨 엮을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진주를 알아볼만한 안목이 처음부터 악마로 인해 차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옥은 선호하고

천국은 배척하는 방향으로 인간들은 지금도 움직이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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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주는 무엇인가요?
김재국 2004-08-29 07:50:34, 조회 : 206, 추천 : 39

이목사님은 인간은 진주의 의미를 아는 길을 악마로부터 차단당했으므로
진주의 의미는 천국과는 관계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천국은 보석상인의 행위만이 중요할까요?
보석상인 무엇을 사는가는 중요하지 않은가요?
보석상인이 진주대신 돌멩이를 모든 재산을 털어 살까요?

그러니까 진주의 의미를 외면하는 것은 성도의 길이 아닙니다.
성도는 진주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가 진주의 의미를 확인하지 않는 것은
제주도로 가야할 비행기의 목적지를 확인하지 않고
평양으로 비행한 조종사와 같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진주의 의미를 알지 못하도록 차단당했다는 것도
어폐가 있는 단정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만한 분별력을
부요했다고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는 있지만 굳이 외면하거나 악마와 타협하는 것이 문제이지
인간자체가 진주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진주의 의미를 알면서도 그 의미를 폐기처분하면
그물비유에서의
못된 것의 범주에 분류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진주의 의미를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보석상인이 찾는 것은 좋은 진주이지
가치없는 돌멩이가 아닙니다.

보화의 의미는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진주의 의미는 고의적으로 누락시키는 이목사님의 깊은 의중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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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주는 무엇인가요?
이근호 2004-08-29 08:15:12, 조회 : 228, 추천 : 32

천국이란

진주가 뭔가를 우리 자신이 알아야 하는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 하신 모든 일에 감사로 받아드리면 그 주시는 바가 그것이 무엇이 되었던 예수님으로부터 통치 받는 것 자체를 감사하는 것이 천국의 원칙입니다.

만약 진주가 무엇인지를 따로 골라내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 중에서,

진주인 것과

아닌 것을 따로

구분해서

선별적으로 감사하는 경향이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범시에 감사해야 하는

천국 자녀의 바른 모습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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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주는 무엇인가요?-범사에 대한 감사.
김재국 2004-08-30 12:01:18, 조회 : 188, 추천 : 40

예수님으로 부터 우리가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진주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진주를 그리스도나 복음,또는 천국이라고
잘못 해석하게 되면
보석상인은 인간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나 복음 ,천국을 발견한 인간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서
진주를 사야한다.>라고 해석하고 급기야는 성도는 재산을 헌금하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식으로 교회에 돈을 갖다바치라는 비유로 곡해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진주비유 위에 있는 보화비유에서 보화는 천국,예수,복음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그런데
이목사님은 보화는 <인간의 어떤 행함으로도 구원될 수 없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만 구원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그렇다면 진주는 <인간의 어떤 행함으로도 구원될 수 없고 하나님의
예정하심으로만 구원됨을 인정하는 성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천국은 그런 진주를 찾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이러한 진주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성도의 모습이
범사에 대한 감사를 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면에서 진주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겠지요.
진주란 '자체에서 십자가의 활동성이 생산되는 인격체'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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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진주는 무엇인가요?-범사에 대한 감사.
이근호 2004-08-31 11:44:06, 조회 : 212, 추천 : 38

> 그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진주 자체에 의미를 두신 것이 아니라

보석 장수의 활동에 의미를 두고 천국과 연결시켰습니다.

흔히들

천국에는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틀이 잡혀 있는데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인식에 호응할 의사는 없으시고

단지 천국이란, 인간의 활약을 배제하고 오직 메시야의 활동성으로만 이 세상에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에 비유의 초점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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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신학
송태준 2004-08-31 12:38:52, 조회 : 207, 추천 : 44

이근호 목사님!

몸과 우주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동양과 서양은 어떤 차이가 있죠?

생명신학과 연관해서 몸에 대해서 ```
부탁드립니다.

저는 머리가 나빠서 복잡한 거 싫어합니다.
간단히 요약하셔서

감사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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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생명신학
이근호 2004-08-31 15:07:38, 조회 : 229, 추천 : 37

'우주'라는 개념은 '몸'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따라서 자연적으로 몸과 괴리된 '우주' 개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즉

'우리의 몸'을 위하여 '우주'는 무엇을 베풀어줄 것인가? 차원에서 우주를 논하게 됩니다.

너무나도 일방적이죠.

성경에 보면,

우주란

인간의 몸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만들어졌습니다.(골로새서 1:15-17)

여기서

인간 중심의 사고와 성경의 뜻과는 벌써 충돌되어 버립니다.

인간들은 세상이 자기 유리한 쪽으로 돌아오기를 고대합니다.

왜요?

내 몸이 여기 있으니 이 몸을 위하여 우주와 하나님은 봉사해야 된다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우주와 하나님께서는 오직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에베소서 1:10)

인간의 몸은 그의 잘못된 견해 때문에

우주의 질서인 언약 원칙으로 인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류의 철학과 종교는 여기에 대항하는 내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우주든 몸이든 모두 한 원칙으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동양철학에서는 기(氣)입니다., 과학적 용어로 말하면, '힘' 또는 '에너지', 종교적 용어로 말하면 영(靈), 혹은 성령, 서양철학적 용어로 말하면 의식, 동양 윤리로 말하면, 이(理)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의 몸이 죽어 분해되면 우주의 재료인 기, 또는 영으로 합일대로 대우주가 돌아가는 스스로의 이치대로 맡겨지면서 순환되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기'가 우연히 매듭 지어지면 그것이 어떤 물질 덩어리나 뭉쳐지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 거기서 생명이 탄생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생명신학의 요체는 자연 그 자체가 생명이며, 인간이란 그 생명의 한 우연적 '덩어리'로 등장된 것이라는 겁니다.

여기서의 신이란 곧 대자연의 원천성에 대한 또다른 표현을 말합니다.

다만 신을 어떤 인격자로 표현하는 것은, 인간 자체가 인격자이기에 그러한 대자연과의 관계를 그런 자기를 표현방식에 준해서 그려낸 것입니다.

그래서 신은 인격보다(죽 인간이 알고 있는 인간성보다)이라는 요소보다 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사실은 자기 몸의 절대성 확립을 위하여 이런 아이디들은 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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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ll Being
송태준 2004-09-01 09:59:36, 조회 : 209, 추천 : 46

이근호 목사님!

웰빙이 뭐지요? 기독교 서적에서도 웰빙(영적 웰빙)에 관한 책들이 나오던데```

자세히 가르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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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Well Being
이근호 2004-09-01 11:52:13, 조회 : 228, 추천 : 32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되어 있군요

>" 사전을 찾아보면 "행복"이나 "안녕"을 뜻하는 단어 "웰빙".최근에는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이나문화 코드로 새롭게 해석되고 있습니다.삶의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정신적인 가치가 우선시되는 행복감.생활 속에 배어나는 진정한 웰빙을 만나 봅니다.웰빙(Well Being)이란 무엇일까? keyword : 자연, 건강, 안정, 여유, 행복미국에서 건너온 새로운 생활 방식으로자연, 건강, 안정 등 정신적인 가치까지 추구하는라이프 스타일입니다.세계보건기구(WHO)는 "육체적인 질병뿐 아니라정신적 사회적 질병도 없는 상태가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WHO가 규정한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바로 웰빙이며,최근에는 여기에 영적인 건강(spiritual health)을 추가해심리적 건강을 중시하는 추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소비층을 창출하기 위한 상업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칭 '한가하고 여유있는 신분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현실화해 주고자 억지로 소통시키고 싶어 환장하는 가상 개념입니다.

마치

패션 산업을 진전시키기 위해 스타일리스트들이 나서서 '새로운 유행'에 관심갖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억지로 조작하는 짓과 같습니다.

이런 사회적 현상이 정신적 건강을 도리어 해치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이런 것들이 등장하는 걸까요?

그것은 사기(斯欺)란 시효가 빠르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계 내에서 '월빙'을 퍼뜨리는 현상을 보고 기존의 목사들은 이렇게들 탄식들을 합니다.

"왜 목회는 전에 써먹든 사기가 오래 지속할 수 없는가! 그동안 '제자 훈련'이라는 사기, '다락방 모임'이라는 사기, '평신도를 깨우야 된다는 사기', '여리고성 함락 작전'이라는 사기, '셀 목회'라는 사기로 한동안 버텼는데 이제 여기에도 '월빙'이라는 사기술까지 또 도입해야 하는가!"

목사로서 행세하기 힘들게 만드는 이 빠르게 변하는 세태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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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송태준 2004-09-02 09:27:00, 조회 : 217, 추천 : 44

이근호 목사님!
질문에 답변하시기 귀찮지 않으세요?
친절하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음악에 대해서 설명 좀 해 주세요.
작곡을 전공하는 자매에게 음악의 키워드가 뭐냐고 물었더니 '마음'이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음악이 뭐죠?
마음과 연관해서 음악이 추구하는 것이 뭔지 부탁드립니다. 철학에서는 뭐라고 하지요?
오늘날의 음악의 관심사는?
교회 음악, 찬양 목사, 경배와 찬양, CCM, 악기, 복음송, 성가대, New Age 음악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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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음악
이근호 2004-09-02 09:36:34, 조회 : 214, 추천 : 34

마음이란 몸이 만들어 낸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음악이란 몸의 생동력이 발산한 겁니다.

우리의 몸은 죽은 시체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리듬을 살리면, 몸은 수월함을 느낍니다.

"기분이 좋다!" 이겁니다.

몸의 컨디션에 따라

몸에게 리듬을 주기 위해

음악을 듣기도 하고 연주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음악은 우리 몸의 연장 활동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 어떤 종류의 음악이 되었든지 말입니다.

그것을 정당화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음악은 결국 '나를 위한 음악'으로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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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미지?
송태준 2004-09-03 09:24:00, 조회 : 209, 추천 : 39

이근호 목사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창조된, 지으진, 만들어진) 천지가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닌가요?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 모두가 말이죠.

굳이 인간을 하나님의 이미지로 창조했다는 말이 필요 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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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하나님의 이미지?
이근호 2004-09-03 09:31:01, 조회 : 213, 추천 : 32

맞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보이지 않는 것까지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을 하나님의 이미지라고 누가 이야기 했나요?

아마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다면 '형상'을 '이미지'로 이해한 것 같군요.

제가 보기에 성경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과 연관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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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하나님의 이미지?
송태준 2004-09-03 10:17:58, 조회 : 199, 추천 : 39

이근호 목사님!

하나님의 형상이 뭐죠?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는 말은 무슨 뜻이죠?

예수님과 연관되어 있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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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하나님의 이미지?
이근호 2004-09-03 12:41:54, 조회 : 274, 추천 : 35

제가 전에 어떤 분에게 답변한 것을 그대로 다시 실어봅니다.

>구약은 신약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을 위한 모형입니다.

구약에서 정보를 축적해서 그것으로 예수님과 연결시킬 수는 없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은 이미 예수님의 예수님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상 만물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구약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받은 성도들도 이런 사도의 견해에 따라야 마땅합니다.

귀하의 견해쳐럼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이 지음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처럼, 그리고 귀하와의 질문답변에서 제가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 형상'이 있는 모든 존재, 즉 가롯 유다나 악한 천사나 모두 하나님께서 필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시켜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인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자신의 형상이 훼손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만인 구원과 악마 구원까지 보장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믿으면 저주받는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위한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위한 '하나님의 형상'이 될 경우에만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복음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있단 말입니까!

베드로전서 1:10-11의 내용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아브라함 같은 이도, 오직 그 전부터 일하신 '예수님의 영'이 아니라 그 누구도 복음을 믿을 수가 없는 겁니다. 즉 결코 아브라함의 자신의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이 아니라는 그것이 구약 본문만 가지고나 나타나지 않고 신약의 사도의 증언을 통해야 비로소 밝혀지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아무도 이해 못할 복음(에베서도 3장에서 이것을 '예정하신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합니다.)을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은 창세기 5장부터는 '아담의 형상'으로 전환됩니다.

아담을 위한 아담의 형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담을 구원하고 아담의 회복을 위한 아담의 형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회복을 위해서라면 구태어 에덴 동산에서 추방하고 심지어 다시 돌아가는 길을 차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선악과를 심지 말아야 하고 심더라도 먹기에 거부감을 나타나는 과실이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형상'으로 전환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귀하께서 주장하시는 것처럼, 인간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본래의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인간으로 동원되기 위한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증거로서 요한복음 17:1-11에 확실하게 나옵니다. (오직 '아들'을 '아들답게'하기 위해 아드님에게 영광돌리기 위한 일군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등장하게 했는데 바로 예수님을 그들만의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하나님의 형상'을 일체 인정치 않고 (왜냐하면 이미 '아담의 형상'은 창세기 5장에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해서, -죽었더라, -죽었더라'을 연속적으로 보이므로서 죽음의 이유와 저주의 타당성을 보이는 재료로 활용될 뿐입니다.)

당연히 죽어야 되는게 '아담의 형상'입니다. 따라서 죽어야 될 '아담의 형상'이 구원해 달라는 것은 도저히 자기 주제 파악이 안되는데서 나오는 악마적 분풀이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택한 자에 한해서는 그 '아담의 형상'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의 모형으로 사용하시는데(로마서 5장) 그 방식은 새언약을 통해서 완성된 그 취지에 따라 시간을 초월하여 복음으로 그 '아담의 형상'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담의 형상' 속에는 로마서 7장의 경우처럼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는 , "자신은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죄가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아담의 형상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구원받겠다고 설치는 그런 양상의 죄를 짓는 다는 겁니다.(유대교처럼, 자신이 특별히 선택된 자로 간주하고 하나님과 자비가 넘치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의 상활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귀하는 말씀을 주었다는 의식)

하지만 사도가 언급했듯이, 자신을 구원하면 할수록 구원될 수 있는 입장이 못됨을 더욱더 분명해 집니다.

둘째는 바로, 그런 자를 일방적으로 예수님께서, 예수님만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하나님의 형상(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했기에)을 성령을 통해서 제공받는 자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다름박질이나 애씀이나 행함과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직 태어나지도 전에 이미 예수님 안에서 선택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 '예수님 안에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예수님 안'이라는 말로 인해 이 세상에 모든 '하나님 형상 회복론은 인간들의 구원욕구에 의해서 조작해낸 것임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아직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이기에 인간의 요구가 개입할 여지도 처음부터 차단됩니다. "저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달라는 요구"조차 성립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영원한 계약에 의해 이미 확정되어 버린 일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이나 가롯 유다나 악한 천사에 들어 있는 존재론적 '하나님의 형상론'은 '예수 밖'에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생각하지도 않는 비복음적 '형상론'이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그 안에서 '마지막 아담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는 자입니다.

그것도 은혜로 말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날마다 우리가 생각하는 '자기 회복성'을 죽이면서 제공됩니다.(그래야지만 예수님의 공로로만 초점이 모아지는 제대로 된 은혜성을 증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나 5장에 나오는 새사람이란 바로 진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의 솜씨 자랑으로 작업이 진행됩니다. (물론 쉴새없이 개인적인 구원욕구를 정죄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왜 이사야 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적극적으로 막으시는 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주체'나 '자유의지'라는 개념이 얼마나 임의적으로 변동이 심한 개념인지 제 글 '50여명의 신학자들'을 통해서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도대체 무엇을 '주체'로 잡을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주체의식을 설명하는데 있어, 이미 자신을 어떤 식으로도 주체자라고 감잡고 있는 입장에서 주체를 설명할 토대를 다른데서 가지고 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새로 도입되는 그 주체 의식을 파악케 하는 주체자의 정체가 모호해져 버리는 겁니다.

예를 들면, 칸트의 경우, 오성까지를 주체에다 포함시킨 것에 비해 피히테의 경우, 그 오성을 갖는 자아성까지를 포함해서 주체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틸타이나 헤겔에 가게 되면, 주체의식은 개인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성에 의해서 그 규정성 계속 지연됩니다. 라캉 같은 경우는 타자의 욕망에서 비로소 자아의 주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현대 과학에서의 주체는 메트릭스적인 정보의 교차로에서 파악됩니다. (이를테면 DNA 정보를 통해 자신의 당뇨병은 결코 자신의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우리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난치병이라는 새로운 자아의식이 첨가됩니다.)

하지만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주체 의식'을 긍정하는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진작 죽어야 될 자들이 새삼 자신을 긍정하기 위한 사유화 의식을 구축하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죽여 지옥에 보내도 할 말이 없는 주제에 어디서 '구원론'을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자율성이라는 것도 어떤 장(場) 안에 갇혀 있는 꼴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무슨 가치보다는 우선 배를 채워야 한다는 것이 급선무인 것처럼 인간의 자율성이라든지 의지라는 것도 그렇게 자발성을 발휘할 처지가 되지 못합니다.

눈 먼 장님에게는 그림 그리기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제한받는 신세인 것처럼, 인간의 자율성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거리로 인하여 어떤 식으로도 조종받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장, 즉 예수님의 자율성에 내맡겨지지 않는다면 구원 못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전 우주의 통일하신 예수님과의 관련성에서만 그 면모가 증거됩니다.

즉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을 제대로 소유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의 그 형상됨을 위하여 우리가 뽑히게 되었다"라는 인식이 바른 형상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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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송태준 2004-09-03 09:28:22, 조회 : 222, 추천 : 64

이근호 목사님!

인간들이 창조한 교육이란 무엇이죠?

성경에서 말하는 가르침, 배움이란 무엇이죠?

기독교 교육이란 것이 있나요?

기독교 학교, 주일 학교, 신학교, 신학교 교수, 목사, 선생, Mission School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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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육
이근호 2004-09-03 10:09:49, 조회 : 214, 추천 : 36

>하나님께서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 뜻을 전달 할 때는, 이미 인간들이 알고 있는 개념들이 죄로 인하여 왜곡되어 있음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간들이 말하는 '교육'의 목적이나 성향이 다릅니다.

인간의 교육은 인간의 가능성을 재료로 삼아 유(有)에서 유를 창출하는 목적이나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칭 '믿음이 있노라'고 여기는 교인들이 있으면 목사들이 그들을 상대로 소위 '기독교 교육'이나 '제자 훈련'을 실시하여 그들로부터 '예수를 닮은 자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를 닮은 사람'이란 바로 이런 정신머리를 포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뜰려는 분입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이런 정신을 가져야만 참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의 소위 '기독교 교육'이란 이런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자신이 실시하므로서

'교육자' 라이센스(자격증)을 가진 본인을 이 세상에 더 오래 밥 먹고 살아야 될 정당성이 있음을 대외적으로 알려서 그것을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 삼고자 소위 '기독교 교육'을 운운합니다.

이런 자들은, 주님께서 세우신 적이 없는 '삯꾼 목자'입니다.

"성령께서 저희들 가운데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사도행전 20:28-29)

이들은 죽고자 하는 자가 아니라 살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교육 받고자 하는 자도

실은

예수님에게는 전혀 관심없고

오직 자신이 보다 풍족하고 여유있는 삶을 위해

윤리적 삶을 총동원해서

하나님께 아부해 보려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그 나물의 그 밥이지요.

둘 다 지옥갈 자들이 모여서 '기독교 교육'을 운운해 봤자

나오는 것은

자기 자랑 뿐입니다.

참된 주님의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사신 바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증언하므로서 그들의 운명을 성령님께 맡기는 겁니다.

이것이 참된 '거룩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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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론과 성령론의 통일성과 상이성(옮긴 글)
박태진 2004-09-05 08:21:19, 조회 : 230, 추천 : 33

아래의 글은 양무리마을에서 십자가마을 신학에 대한 비판 글 중 박창진님의 글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평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에 대한 비판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의 상관 관계.

이러한 토론 주제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위해 한 다른 접근법을 제시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하시는 방식을 언약이라고 합니다.
그 언약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시대적 진전을 이루어 왔습니다.
아담언약, 모세언약, 시내산언약, 포로회복 후 새언약,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언약.
각 언약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내용(통일성)과 다른 내용(상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경륜에 있어서도 시대적 흐름이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와 성령님을 보내셔서 행하시는 구원 역사, 곧 기독론과 성령론입니다.

구원과 관련하여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대하시는 방식인 언약과 관련하여 기독론과 성령론에 있어서 차이는 없을까요?
통일성에 대하여서는 이미 잘 알고 있기에 따로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론에 있어서는 인간이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부인은 단순히 한 인간이, 예수님에 의해 그토록 사랑받던 한 인간이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안타까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예수님의 길에 대하여 그 어떤 인간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그 어떤 인간도 동참할 수 없으며, 오직 그분만이 이루실 수 있고 이루신 사역입니다.
100% 그분만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역의 결과에 어떤 인간이든지 들어오는 것은 오직 그분의 은혜입니다.
100% 그분의 은혜입니다.
이를 신학적으로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그렇게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부름을 받은 이들은 성령님을 선물로 받습니다.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속 역사를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적용시키시고 하나님의 뜻을 실현시키시는 사역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교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현재화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고후 3:18)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첫 부르심이 영광의 자리로 부름받은 것인데, 부름받은 이의 삶에서 십자가를 현재화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이 그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통한 삼위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기독론에서와 같이 동일하게 은혜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이루어가시는 구원 역사의 방식은 어떠합니까?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방식은 어떠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구속 역사와 같이 인간은 전혀 참여할 수 없이 완전히 배재된 것일까요?

성경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으로 충만되라는 것으로 성령님의 다스림을 받으라(엡 5:18)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은 거스립니다(갈 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십자가에 못박힌 자아인데(갈 2:20), 그 정과 욕심을 못 박은 자아인데도(갈 5:24) 여전히 육신의 소욕이 있어서 성령님의 소욕과 거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론에서 그분의 구원 역사는 100% 그분만의 사역이 아닙니다.
인간의 반응과 함께 결정지어지는 구원 역사입니다.
가항력적 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하여 기독론의 완전성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완전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생각하셔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령론적으로 은혜 100%, 그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 100% 라는 생각이 십자가의 완전성을 약화시키는 것이라는 생각이 성경의 교훈에 대한 오해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기독론적으로 십자가의 완전성과
성령론적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은혜를 은혜로 바르게 받을 수 있고, 헛되이 받을 수도 있는-를 동시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모순되지 않게 하시며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분의 지혜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이것을 구약 성경에서도 동일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홍해를 앞두고 뒤쫓아오는 애굽군들을 대면합니다.
그때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고 말씀하시고 그대로 실행하십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때에 모세를 통하여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출 17:9)입니다.
홍해에서와 같은 방식이라면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씀하시고 아말렉을 처리하시는 것이어야 할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홍해에서와는 달리 칼을 가지고 나가서 아말렉과 직접 대면하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습니다.
물론 그 전쟁에서 승리의 관건은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제대로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그들이 그 현장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홍해의 사건은 열가지 재앙을 통한 출애굽과 함께 기독론적이며, 아말렉과의 대면은 구원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의 여정으로 성령론적입니다.
물론 그 삶의 여정은 철저하게 성령님의 은혜로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기독론적으로 은혜 100%, 인간의 반응 0% 그리하여 100%이고
성령론적으로 은혜 100%, 인간의 반응 100% 그리하여 100%인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반응이 50%이면 합이 50%입니다.
즉 성령님의 은혜의 역사는 언제나 100%인데,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의 정도가 그의 현재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반응이 작용하였음에도 인간이 발하게 되는 말은 오직 은혜에 대한 감사뿐입니다.
성령님의 은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성령님의 소욕-가 없었다면 인간은 육체의 소욕만으로 가득하여 그것의 지배를 받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상, 상급이란 최종적 구원에 더하여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최종적 구원을 다른 관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에 글을 적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만...

구원과 생활을 구분하는 하소미님의 주장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구원과 생활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생활은 그 자체로 구원의 문제입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이고 그것이 현재화되는 장이 바로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의 논쟁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글을 적었는데...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모든 분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풍성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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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기독론과 성령론의 통일성과 상이성(옮긴 글)
이근호 2004-09-05 09:28:33, 조회 : 209, 추천 : 33

죄와 악마의 사역에 대해서는 빠져 있군요

인간은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구속사에 동원됩니다.

은혜란 죄가 없는 상태에서 성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도 인간은 죄인으로 관여하게 됩니다.

마치 욥의 의미는 욥의 친구가 관여하지 않고서는 성립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은혜의 100%'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일이란, 몇 %의 영역을 차자하느냐는 양(量)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 상대하느냐 하는 것이지 각자 몇 %의 지분을 가질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옳지 못합니다.

제대로 공부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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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복음
박태진 2004-09-05 08:24:35, 조회 : 308, 추천 : 39

아래의 글은 양무리마을에서 십자가마을 신학에 대한 비판 글 중 박창진님의 글입니다.
이근호 목사님의 평가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대로 옮겼습니다.

바울 사도는 천사라도 전하면 저주를 받는 '다른 복음'에 대하여 말씀하였습니다(갈 1:8-9).
'사도적 복음'과 대조되는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약의 시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울 사도 당대에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은 두 부류였습니다.
한 부류는 옛 언약의 백성으로서 유대인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옛 언약의 백성으로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유대인과 언약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가 새 언약의 백성이 된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옛 언약과의 완전한 단절을 행하지 않았기에 옛 언약과 새 언약이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이를 언약의 중첩기라고 합니다.
언약의 중첩기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시고 돌성전을 파괴하심으로 옛 언약과의 완전한 단절을 행하시는 때인 주후 70년까지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중첩기가 신약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적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언약의 중첩기의 독특성은 옛 언약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식적으로 폐하시기 전까지 옛 언약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유효합니다.
그리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도 유효합니다.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죄악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안식일을 지켰음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 사도를 만난 야고보는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심 있는 자라"(행 21:20)고 말하였습니다.
야고보는 바울 사도에게 나실인의 결례를 지원할 것을 요청하는데, 바울 사도는 꺼리낌 없이 그 요구를 받아들입니다(행 21:24-26).
특히 26절에는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만기 된 것을 고하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행할 수 있다는 바울 사도의 자유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애초에 옛 언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 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였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옛 언약을 거쳐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옛 언약 준수가 요구되지 않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교회 내부의 문제의 핵심은 어떤 유대인 교사들이 자신들에게 허용되어진 율법 준수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의 내용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준수를 요구하는 것에 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 준수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유대인 교사들의 가르침이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시계추를 그들 임의로 되돌리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율법 준수는 하나님께서 일시적으로 허용하신 것입니다.
언약의 시계추는 새 언약으로 이동하였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충격을 완화시키는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이제 그 언약의 시계추는 새 언약 만으로의 시대로 진전하고 있는 중입니다.
새 언약 만으로의 시대를 성경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진전시키신 언약의 시계추를 임의로 되돌리려는 것이 바로 다른 복음입니다.
천사에 의해서든지, 사람에 의해서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하나님보다 더 높이려는 참람함의 극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이 원리를 확장해 보겠습니다.

새 언약의 시대에 있어서도 역시 진전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님을 부어주심입니다.
성령님을 부어주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을 기초로 하여 이루어진 구속역사입니다.
성령님을 부어주심은 십자가와 부활, 승천을 사람들에게 적용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언약의 시계추가 진행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은 그 내용에 있어서 통일성과 상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바대로 각각의 내용을 받으면 통일성과 상이성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상이성에 대하여 앞의 글에서 언급하였습니다.

혹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하여 부연 설명을 하겠습니다.
성령님의 부은 바 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바울 사도의 선언과 같이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고후 5:17).
새로운 피조물은 이전 것 곧 죄 아래 있던 모든 것은 지나간 새 것입니다. 새로운 존재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됨은 단지 인식에 있어서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고 전인격적인 변화로서 새로운 아담, 범죄하기 이전의 아담과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새로운 피조물됨은 독립적인 것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사함이 이루어진 존재, 죄의 지배 아래 있던 모든 것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존재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존재로서 동정녀 탄생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이룰 수 없는, 도달할 수 없는 역사로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미 주어진 구원 역사가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적으로 현재화되어야 한다는 책임도 뒤따르고 있습니다.
그 책임도 여전히 의존적임을 앞의 글에서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인간의 가능성,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음으로 인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가능성이 은혜 안에서 제대로 발휘되어지는 것과 관련한 하나님의 보상이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상, 상급입니다.
물론 이 상, 상급은 최종적인 구원에 더하여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최종적인 구원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을 평가해 보겠습시다.

제가 보기에 이근호 목사님의 신학은 십자가에 머물러 있습니다.
물론 그분이 성령님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언약의 진전으로서의 성령님을 보내심을 제대로 나타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성과 함께 상이성을 함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일성에 대한 강조로 성령님을 십자가에 종속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십자가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의 십자가가 반쪽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온전합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더 진전된 하나님의 구속역사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비록 이근호 목사님의 의도를 십분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제가 보기에 그의 신학은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진행시키신 언약의 시계추를 임의로 되돌리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일반적인 다르게는 대중적인 가르침에 대하여서도 평가해 봅시다.
이방인이었던 우리에게 언약의 시계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령님을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세상에 속하여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를 받으며 자기 욕심을 따라 살던 이들을 하나님 나라로 옮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대중적인 가르침은 십자가에 의해 포장되어져 있으면서 여전히 이 땅에서의 물질적인 부유함을 좇게 하고 있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 순종하면 복(물질적이고 현세적임)받는다는 구약적인 인과율 등등.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시계추를 그것에 머물러 있게 하지 않으시고 더 진전시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그렇다면 현 교회의 대중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다른 복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른 복음입니다.
여기에서 현 교회의 모습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비판에 대하여 교회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사도적 복음입니다.
우리가 좇아야 할 복음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사도적 복음입니다.

이미 교회의 터로 온전하게 주어진 사도적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교회가 그 복음 위에 굳건하게 세워져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힘있게 동참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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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른 복음
이근호 2004-09-05 09:50:14, 조회 : 309, 추천 : 43

>"통일성에 대한 강조로 성령님을 십자가에 종속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십자가에 종속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역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
>그의 십자가가 반쪽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온전합니다.
>다만 십자가에서 더 진전된 하나님의 구속역사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라고 저를 공격하셨는데,

복음이란 '하나님의 의'로서

오직 예수님의 화목제물로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인정하는 겁니다.

결코 성령님의 수고나 인간의 수고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첨가되지 못합니다.

언약의 완성자는 예수 그리스도 뿐이지

성령님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이 분은 알 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본인의 영이 와야지만 고백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께서 결코 자신을 '언약 완성자로 간주하시는 분'이 아님을 이 분은 전혀 모르는채 성령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이 분이

복음에 대한 연장책을 시도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온전한 십자가로서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복음'을 따로 만들고 싶어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즉 이 '온전함'에서 결코 제대로 온전함의 구실을 못하고 있다고 이 사람은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뭘가요?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의 담보를 설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 사역을 총동원해서

자신의 구원의 근거로 이용해 먹겠다는 겁니다.

즉

자신을 살리고 싶어서 그러합니다.

관심이 이 쪽에 있습니다.

온전한 십자가를 믿는 것 가지고는

구원이 가능치 않다고 보는 겁니다.

삼위일체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자들에게는

결국 신학이라는 것이

자신의 구원용으로 전락해 버리는 좋은 실상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던 유대신학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근거하여

성령이 온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증거하고 적용시키는

성령인지를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한 성령인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의 작태는 오늘날도 변함없이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이것이 성령께서 지적하는 죄인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의 객관적 사역이란

요한복음 16:8-11의 말씀처럼

그것은

"예수님의 홀로 언약의 다 이루심"을 근거로

인간들의 소위

죄와 의와 심판 개념에 대해서 책망하는 겁니다.

이처럼

성도는 날마다 성령님을 통해서 책망받음을 통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 놓여 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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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송태준 2004-09-07 10:51:14, 조회 : 238, 추천 : 32

이근호 목사님!

십자가 마을의 글들을 읽다가 보면,

이근호 목사님이 주장하시는 것과 다른 이들이 주장하는 것들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는데,

이근호 목사님이 동쪽을 말하고 있다면 다른 이들은 서쪽을 말하고 있다는 느낌!

예를 들면,

거룩 - 오직예수(이근호) / 거룩 - 오직예수 + 주안에 있는 자의 차별된 거룩한 행위(다른이)

제가 이해 한 것이 맞는지?

거룩이 뭐지요?

성경에서 성도에게 말하는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하라'(벧전1:16)는 무슨 의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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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거룩
이근호 2004-09-07 16:47:00, 조회 : 313, 추천 : 27

우선

'조직신학의 고속도로'라는 책을 우선 읽어보시고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보면 아마 궁금한 것이 다 풀릴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거룩이란

'언약 완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옛언약 안에서의 관계를 뜻하며

신약에 있는 '예수님 안'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을 다시 풀이하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에 의해서 성립된 관계가 거룩이고

신약에서는

예수님에 의해서 성사된 관계가 거룩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이나 신약이나

인간의 행위하고는 상관없고

오직 '언약의 활동'과 상관있습니다.

언약의 주체자는 인간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이름(주님)이 주체자가 되십니다.

그 분만이 이 지상에 등장한 유일무미한 거룩한 분입니다.

따라서

그 분에 의해서 용서받은 관계를 거룩이라고 합니다.

성도가 거룩함을 입었다는 말은,

언약의 혜택 속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도 거룩하라'라는 명령이

성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활동 내용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성령님은 성도 안에서

성도에게 있는 비언약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죄라고 규정짓고 들추어주게 되며

그것이 바로 언약 안에 있기에 비로소 발생되는 거룩한 현상임을 외부에 드러나게 합니다.

즉 '회개를 통한 주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이로서 세상은

성도가

주님과의 거룩한 관계 안에 놓인 자임을 접하는 계기가 됩니다.

인간의 힘으로 더욱 더 완전해 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면

언약 안에서는

처음나 끝이나 항상 완전한 거룩한 관게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말하는 '거룩'이란

인간의 최선의 노력을 두고 말합니다.

예수든, 하나님이든, 성화든, 조직신학이든, 삼위일체든 그동안 배웠던 모든 신학과 교양을 종교 기능을 총동원해서라도
스스로 완전이라는 기준에 도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도 하나님도 속이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썩어질 육체와 더불어 정신도 날로 썩어가고 쭉 쳐지게 마련입니다.

남는 것은 '썩어질 재료' 뿐입니다.

"그래도 거룩해지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아서...."라고 꼬리를 답니다.

처음부터 성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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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송태준 2004-09-08 15:24:33, 조회 : 216, 추천 : 36

이근호 목사님!
말들이 왜 이렇게 어렵죠?
제가 무식해서 그렇죠?
조금 더 쉬운 말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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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말
이근호 2004-09-08 15:55:13, 조회 : 264, 추천 : 43

자기가 자주 쓰는 말을 고수하게 되면 남의 말이 어렵게 됩니다.

공부란

남들이 쓰는 말을

두루 두루 알게 되어

남의 말을 쉽게 알아 듣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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