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 목적인가?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목적인가?] 2004-06-05
[구원이 목적인가? 예수님이 누구신가가 목적인가?] 2004-06-05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처음 질문을 드립니다.
최희철 2004-06-05 05:22:25, 조회 : 352, 추천 : 39
안녕하십니까 ?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이 웹사이트가 운영되고 사용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근호 목사님의 답변글 중에서 다음의 문장을 따왔읍니다.
"....성경은, 구원을 목적으로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기 위해 쓰여집니다....."
그렇다면,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은, (역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예수님 스스로 밝히신 고백입니까 ?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그리고, (저의 경우에는) 때로는 바울 사도의 말씀으로 영혼의 쉼을 얻을 떄가 있답니다.
"...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1)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3-2)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3) ..."
저는 제 두 딸에게, 제가 '누구인가'를 알리는것보다, 제가 두 딸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리기를 더 기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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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처음 질문을 드립니다.
이근호 2004-06-05 07:41:41, 조회 : 300, 추천 : 35
요한복음 3:16은 그 뒤에 나오는 19절의 말씀과 연결시켜 보면, 예수님은 '빛'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조치로서 '구원을 언급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있느 그 자체로서 '어두움'이라는 겁니다.
이 사실은 '빛' 되신 예수님의 등장이 없이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자신의 세계를 '어두움'이라고 판정할 수 없으며, 따라서 어두움을 빛에 의해서 판단되지 않으면, 그저 힘든 삶의 조건을 변모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불교라는 종교가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따님께서는 외부에서 오는 사랑(아버지의 사랑)보다 우선 자신이 자신을 더 긍정해서 스스로 사수하려는 의식을 커가면서 다지게 됩니다.
즉 아무리 아버지의 사랑이라 할지라도 외부에서 날라오는 관심은 자기에 대한 집착과 자신 사랑이라는 심사성향에 의해서 아버지 사랑의 유용성을 철저하게 점검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도에 넘치는 자신을 향한 간섭인지 아니면 일시적으로 자기에게 유용한 아버지의 희생정신인지를 말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고맙고 감동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따님으로 하여금 '자기 부인'에 이르는 사랑으로 전달되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도 나라는 딸이 없으면 어디가서 자신의 사랑의 본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라고 가지겠어! 내가 귀엽고 이쁘니까 나를 사랑하는 즐거움을 가져보는 것이야" 라는 생각)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선물(은사)로 주어지는 예수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성령께서 십자가 사랑을 전달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께서는 먼저 자기 부정의 모습을 갖추시고 두 따님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나 (아버지)나 사랑받는 너희들 (두 따님)이나 모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 인 것을 명심토록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사랑마저 지독한 자기애와 자기 의를 쌓는 능력으로 활용하기 때문이죠.
구원받기 보다는 스스로 자신의 값어치는 높이는 장기로 삼고자 하는 '어두움'의 속성을 발휘하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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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갈렙의 지독한 자기애
김재국 2004-06-05 22:15:45, 조회 : 231, 추천 : 21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 (민수기14:9)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가나안 입성을 명령하십니다.
이에 정탐꾼 중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10명의 정탐꾼은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민13:33)라고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합니다.
죄인신앙에 머물러 꿈적도 하지 않고 가나안 입성을 거부하던 자들은 광야에서 죽습니다.
그들에게는 갈렙과 여호수아의 순종이 자기의를 성취하려는 공로주의였겠지요.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성도는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죄인,종 →하나님의 자녀, 예수님의 친구
로의 신분전환의 확인이 십자가마을에서는 절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십자가마을외의 교회다니는 사람들을 싸잡아서 죄인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식하는 우는 범하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보기에는 십자가마을의 죄인 인식보다 더 자기자신의 죄인임을 통회하는 성도들이
굉장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제일 자기 죄를 모르고 의인임을 내세우는 바리새인입지요.
십자가마을에서는 하나님이
지옥을 채우려고 노력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고 있는데
혹시 이목사님 자신이 지옥의 사자.지옥의 일꾼이라는 의심은 안해보셨는지요?
지옥의 일꾼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런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음에
질문을 드려봅니다.
부디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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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갈렙의 지독한 자기애
이근호 2004-06-05 23:47:07, 조회 : 245, 추천 : 36
지옥을 누가 만듭니까? -예수님
유황불은 누가 퍼붓습니까? -예수님
심판은 누가 하십니까?-예수님
진정 예수님의 친구라고 여기는 자는 예수님의 이런 면이 너무 반가워서 펄쩍 펄쩍 뛰면서 동네 방네 선전합니다.
"참으로 고마우신 주님께서는 저주의 불이 영원히 이글거리는 세상을 따로 만드시고 사람들로 꽉꽉 채우신데요. 지금도 그 일을 빈틈없이 하신데요!"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갈렙의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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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모세와 이목사님의 대조적 반응
김재국 2004-06-06 00:42:03, 조회 : 293, 추천 : 38
"이제 주께서 이 백성을 한 사람같이 죽이시면
주의 명성을 들은 열국이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이 백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에 인도할 능이 없는 고로 광야에서 죽였다 하리이다.
이제 구하옵나니 이미 말씀하신 대로 주의 큰 권능을 나타내옵소서 이르시기를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과실을 사하나
형벌받을 자는 결단코 사하지 아니하고 아비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를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같이 사하옵소서"(민수기14:15-19)
여호와의 진노에 대한 모세의 슬픔에 찬 간곡한호소와 이목사님의 반가움과 펄쩍펄쩍 뛰며 기뻐함과는
상당한 대조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 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0-24)
메뚜기를 자처하던 사람들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사람들이고
갈렙은 그들의 마음과 달랐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적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되며
여호와가 인간의 마음에는 개입하지 않으며 여호와의 징계와 인도는 인간의 태도
어떤 기준점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이목사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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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모세와 이목사님의 대조적 반응
이근호 2004-06-06 01:11:10, 조회 : 251, 추천 : 36
모세는 예수님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세 안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 당시에 멸망당할 자들이나 다른 사랍들이 이런 기도한다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을 자신을 향한, 그리고 모세를 향한 원망의 함성으로 해석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당시 언약 중심처 자리잡은 모세의 기도만 순전히 하나님이 응답하겠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를 통해서는 언약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점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누구를 위하여 구원 기도한다고 해서 그 기도에 응답해서 그 사람이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이 땅에 소위 '교회'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서 등장하는 숱한 이단들이 '중보기도'라는 것을 운운하며 유포시키고 있는데
성경적으로 봐서 구원될 자는 오직 예수님의 기도만 응답되어 구원됩니다.(히브리서 7:25)
왜냐하면 누구를 죄 사하느냐 아니하느냐는 순전히 예수님에게만 있지 사람에게는 고유적으로 지니지 못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택한 성도에게 성령 안에서 기도케 하십니다.
참으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기도 공로로 응답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기도에 의해서 모든 일이 진행됨을 기도 속에서 응답받게 됩니다.
김재국씨는
앞으로 이 사이트에 실린 짧은 문장의 글만 매달리지 마시고 길게 쓴 글들을 몇 년간에 걸쳐 읽으시고
그런 다음에 그 긴 글들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흐름을 파악하셔서 자기 의견을 길게 소개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약이 어떤 식으로 유유히 흘러가고 있는지 말입니다.)
질문을 하셔도 전체적인 흐름 안에서 질문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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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김재국 2004-06-07 00:36:46, 조회 : 228, 추천 : 33
제가 이목사님에게서 문제 삼는 것은
기도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인해 징계의 순간에 처해있는 백성들을 향한
모세의 마음과 이목사님의 마음이 상반되고 있음을 문제시 한 것입니다.
모세는 백성을 사랑하는 지도자로서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사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이목사님은 죄를 지은 백성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노력에 감탄하고 감사하며
동네방네 선전하러 다닙니다. 저주의 하나님이 죄인을 지옥에 채우시고 자신은 구원하셨으니
그 은혜와 공로에 영광을 돌리면서 말이지요.
모세는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자기를 벌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속했습니다.
이목사님은 지도자로서 백성과 목회자를 정죄하고심판하며
지옥의 사자,지옥의 일꾼으로 매도하면서 그들의 지옥행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목사님의 마음이 모세와 예수님의 마음을 추종하기를 바랍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목사님의 신학은 갈렙과 여호수아의 가나안 입성을 정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목사님의 신학은 인간의 가나인 입성을 십자가에 대한 반역으로 보고있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이목사님의 신학은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로 집대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가나안에 입성하는 행위는 은혜의 법칙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죠.
'너희는 가만히 있고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고만 있어라'는 출애굽(대속의 구원)에
적용되는 시점이고 가나안에 다다랐을 시점은 순종의 전투를 감행해야 할 시점인 것입니다.
가나안은 현대인에게도 입성해야 할 나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주어진 과정이 가나안이고 그 곳에서 영적전투를 거치고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겠지요.
성도는 갈렙과 여호수아를 추종해야합니다.
죄인신앙에 머무르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보고 업혀서 들어가게 해달라는
행위는 십자가를 모독한다면서 드러누워 있으면서 메뚜기를 자처하는 정탐꾼들을 따르는
길입니다.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도 이해가 안되는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특히 예수님을 믿는 성도의 기도를 애틋하게 기다리고
장려하시고, 기도하시기 전에 충분히 응답하시는 걸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목사님은 인간의 기도는 아예 쳐주지도 않고 예수님의 기도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하시는군요.
그렇다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권면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기도를 구원의 기도로 한정해서 예수님과 모세의 기도만이 인정된다는 주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교제를 차단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됩니다.
그리고 기도의 응답이 예수님의 공로라는 점을 강조하시는데
기도에서는 누구의 공로냐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 보다는 어떤 인간이 무슨 대상에게
어떤 내용을 기도하는냐도 중요한 것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교통을 차단하는 것은 언약에 대한 견해도 마찬가지로
언약은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인데도 인간을 제외시키고 모세와만 언약했다고 하시는 군요.
모세와의 언약이 곧 모든 인간과의 언약 아닌가요?
언약의 흐름은 인간의 죄성의 증가와,행위의 불가능성에 비례해서 속죄제물의 가치가 증가하는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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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이근호 2004-06-07 07:22:03, 조회 : 274, 추천 : 38
>모세에서 이사야를 거치지 않고 바로 지금 자기 자신에게 끌어당기면 그런 식으로 복음에 대해 오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전파했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하고 배척하고 결국 십자가에 죽게 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구원 의지와 종교성과 소망을 정죄했습니다.
도리어 자신이 전적으로 구원될 수 없는 자임을 아는 세리와 칭기들이나 이방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이해했습니다.
자신에 대한 정죄를 도리어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만이 지옥을 만드신 예수님의 참된 사랑을 알아 듣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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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질문을 드립니다. 최희철 2004/06/05 39 353
[re] 처음 질문을 드립니다.
구득영 2004-06-05 20:47:57, 조회 : 274, 추천 : 40
성경은 이 세상이 인간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골1:16). 그리고 사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의 사랑이냐가 중요합니다. 사랑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인 것입니다(요일4:8). 그런데 그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고 하니, 바로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를 만난 자들은 자기가 구원받을 자격도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전혀 새롭게 다가옵니다. 십자가의 우발성이 자기 택한 백성을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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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김재국 2004/06/07 33 229
[re] [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김대식 2004/06/07 42 262
[re] 갈렙을 정죄하는 신학
김대식 (Homepage) 2004-06-07 02:23:00, 조회 : 262, 추천 : 42
이보세요 재국씨 도대체 당신은 관심사는 주님입니까? 아니면 주님을 믿는 자기 자신(인간)입니까? 양쪽으로 양다리 걸치는 겁니까?
님같이 말하는 사랑에 어디 한 두 번 속아봅니까? 그래서 제발 오해 하지 마시고 여기글들을 차근히 읽어보라고 하는 겁니다. 아예 읽을 가치로 여기지 않고 님의 주장만 일방적으로 하니 늘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겁니다. 님이 말하는 그 사랑이 죽음을 이겨냅니까? 죽음도 못이겨 내면서 지도자의 사랑의 자질을 운운한다면 여기에서는 안먹혀 들껍니다. 왜냐하면 다들 속아봤거든요? 자신에게서 또는 최고의 사랑이 넘쳐나는 목사들에게서 다 속아 본 분들입니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 율법사가 영생(구원.사랑.가나안.천국)을 따낼려고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냐고? 예수님이 당신이 율법사니 그 율법에 뭐라고 나와 있는 지 되묻습니다. 그 율법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던데요? 예수님은 그러면 너도 그렇게 하거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끝나면 아주 좋은데 율법사는 거기서 안 끝냅니다. 그의 본색이 지금부터 나타납니다. 자신의 앎을 확장시키고파 합니다. 지식을 자랑하고파 합니다.
예수님 그렇다면 누가 이웃입니까? 적어도 율법사는 자기장단에 놀아주는 주님에게 뭔가 통하나 싶어서 더 자기의 의를 펼칩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오로지 자기 의만 관심 뿐입니다. 그래놓고 영생과 사랑을 운운하지요. 님이 여기서 수십번 답을 듣고도 못들은채 하며 님의 열심으로 일관합니다. 주님의열심엔 관심조차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누가 이웃이냐 라는 질문에 사랑이 넘치는 지도자에 대해 님처럼 운운해야 할텐데 느닷없이 이웃이라는 의미와 사랑이라는 의미에 전혀 상관 없는 강도의 의미를 집어 넣으십니다. 이웃과 강도가 어찌 어울리는 개념입니까? 율법사는 좋은 이웃이 되어야지 라고 본인의 미리 아는 의미를 예수님으로부터 재확인하여 바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일의 봉사자로써 이웃임을 밝히고픈 겁니다. 얍삽하게도 누구입을 통해서요? 예수님 입을 통해서 말이죠 방금 첫 번째 한 질문에 그렇게만 예수님이 대답하면 율법사는 자기 의가 예수님으로 인해 정당화 될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은 전혀 대화 속에서 상관 없는 강도의 의미를 돌출 시키면서 이웃의 의미를 끄집어 냅니다. 강도 없이는 강도 만난 자도 없을뿐더러, 그 강도 만난 자가 없다면 이웃의 의미도 없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사의 믿음이 맞겠지요 재국님의 주장이 맞겠지요. 그러나 이걸 어쩝니까? 예수님은 강도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 강도 만난 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말씀 하십니다. 님이 바로 이것을 빠뜨리고 있는 겁니다. 대부분 성경 해석자들이 이걸 빠뜨립니다. 그래야 율법사처럼 자기를 옳게 여길 것 아닙니까? 그래야 그들 말대로 선한 사마리아처럼 좋은 이웃이 되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다 이웃을 사랑하자 다 성경에 있는 말이니 이것이 진리이다 라고 말하겠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예수님이 거기에 대해 태클을 겁니다. 그리고 강도 만난 자였으나 이웃을 만난 본 자는 비로소 예수님이 이웃임을 증거하면서 님과 같은 사고방식에 빠진 자들에게 이웃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님의 불만이 이겁니다. 왜 우리는 이웃이 될 수 없느냐 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강도 개념을 엉뚱하게도 누가 이웃이라는 질문 속에 강도를 통해 이웃이 나타난다고 하는 겁니다. 님은 강도가 누군지도 모르며, 강도 만난 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저 이웃이 누구냐만 알면 된다는 생각에 예수님은 집요하게 강도가 누구며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밝혀 버립니다. 폭로합니다.
안타깝게도 이근호 목사도 아주 어리석게도 강도가 누구며, 강도 만난 자가 누구냐 라는 해석으로 일관 합니다. 이웃이 누구냐는요? 그것은 강도가 누군지, 강도 만난 자가 누군지만 알면 저절로 압니다. 율법사도 다 알거든요 그것은. 다 아는데 구지 예수님이 오실 필요 없잖습니까? 선지자만 보내면 될테고 님말대로 사랑이 넘쳐나는 모세 같은 지도자만 오면 되는데 왜 구지 하늘 영광 버리고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 왔냐는 겁니다.
강도는 우리 손으로 해결 못합니다. 강도 만난 자도 마찬가지 우리가 도울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밝혀 줍니다 우리 또한 강도 만났기 때문이지요. 님 같은 강도 말이죠. 님의 생각에 깔린 그런 지도자 사랑이 넘치는 그런 지도자가 예수님이 말하는 강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래놓고 사랑이 넘치는 지도자가 왜 못되냐고 따지신다면 님은 종교라는 마약에 빠져 있는 겁니다. 우리들도 다 속아본 지라 압니다만 님은 아직도 거기에 자기의 믿음을 걸고 있기에 포기 못하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예수님이 님의 이웃이 되어주지 못하는 이상 님은 자력적으로 훌훌 털고 일어나는 강도 만난 흔적을 다 없앨 수 있는, 고침도 회복도 필요 없는 대단한 수퍼맨이겠죠.
님 같은 강도가 있으므로 인해 예수님이 진정한 이웃으로 보입니다. 강도가 없다면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은 전혀 알 길이 없지요. 구지 내려와서 이 땅에서 이웃이 누구임을 밝힐 필요 없이 율법사가 알고 있는 간단한 상식 선에서만 알면 되는데 말이죠.
또 님이 말하는 가나안 땅은 천국이 아닙니다. 그러니 님이 지금 완전 곁길로 빠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빠글 빠글한 함 땅입니다. 원수의 성문을 열어야 겠죠. 님이 얼마나 천국을 오해했으면 마귀가 제시한 그런 천국으로 꿈꾸며 환각에 빠져있는 가를 님의 입으로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원수의 땅에 약속이 있는 겁니다. 죽음의 원수를 해결하지 못하면 님에게서 영생의 약속은 의미 없습니다. 강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이웃의 의미는 소용없지요. 저주와 심판의 문제 해결 못하면 구원과 영생은 모든 종교가 일관되게 외치는 마약입니다. 어서 정신 차리고 환상 속에서 빠져 나오세요. 님처럼 환각에 빠져있는 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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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강도'에 대한 감사.
김재국 2004-06-07 13:06:14, 조회 : 269, 추천 : 44
먼저 제가 강도라는 사실을 환기시켜 주신 김대식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관심사는 자기자신임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제가 관심을 기울일 수조차 없는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문제는 예수님의 속죄제물되게 한 저의 강도행각인 것입니다.
지금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는 강도짓과 에고이즘이 저를 하나님과 예수님의 권위에 순종하도록
변화되기를 간구합니다. 그것은 저와는 상관 없는 예수님의 소관입니다.그래도 간구는 해야되겠지요.
질문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근호 목사님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이웃은 자기가 나서서 고르는 것이 아니라 강도만난 자의 입장에서 결정된다는 유니크한 해석입니다.
이웃은 고통당하는 자의 입장에서 결정되므로 고통당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하는 자라는 논리입니다.그런데 저의 질문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증거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즉, 강도만난 자를 보살피는 선한사마리아인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지
강도만난 자를 피해서 가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마음 속에 있는 예수님사랑(말로만 하는,실천하지 않는)을 통해서는 복음이 증거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십자가마을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보살핌의 행위를 정죄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사랑인데 거꾸로 강도만난 자를 보살피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기의를 자랑한다면서요.
성도는 선한사마리아인을 본받지 못하고 강도만난 자를 외면하는 불의를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허울 좋은
변명으로 위장하는 자신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을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것은 현재의 삶(세상)과 천국의 이중 상징으로 보고있습니다.
십자가마을의 복음의 증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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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강도'에 대한 감사.
김대식 (Homepage) 2004-06-07 21:17:15, 조회 : 371, 추천 : 85
재국님 바로 그 율법사의 관심이 오로지 이웃사랑입니다. 그 속에 자신의 실천을 배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해 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율법사의 사고방식에서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자 이겁니다. 하면 된다 나도 참이웃되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증거하면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있다.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들에겐 능치 못할이 없다 이렇게 일관합니다.
(요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그래서 십자가마을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자 라고 주장하지 않고 선한 사마리아인 되신 예수님을 믿자 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염려가 되어 반복적으로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님이 그냥 흘러버린 것은 또 강도와 강도 만난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 여전히 님은 간과하고 있습니다. 자꾸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넘어오고 있기에 님의 해결책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이 목적이겠죠.
뭐 할수 없지요 다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율법사의 질문이 던져 집니다. 그는 자기를 옳게 여길려고 예수님의 답변을 이용합니다.
(눅 10: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이웃이 누구냐 라고 묻던, 이웃이 될려고 노력을 하던 정작 우리 깊은 본심을 자기를 옳게 보일려는 것 뿐임을 예수님이 지적하기 위해 강도를 돌출 시킵니다. 바로 자기를 옳게 보일려는 의도가 강도를 당했다고 보시는 겁니다.
여전히 율법사는 감을 못잡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전종사자를 언급하시는 이유는 율법사는 그들이 또 자신과 같은 율법사들이 이웃 사랑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라고 철두철미하게 믿었던 겁니다. 그것은 그 당시 모든 유대인이 의심할 바 없는 이웃 사랑의 위한 하나님의 조치이고, 하나님이 부여한 직분이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평상시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면서 사랑을 전파 하면서 절대로 이웃이 될 수 없는 자들을 언급했는데 그것이 사마리아 인 아닙니까? 상종도 못할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교육 된 것 아닙니까? 사마리아 인이 왜 그럴지경으로 유대인에게서는 이웃이 될 수 없었던 겁니까? 유대인이 하나님의 뜻을 파악해서 내린 결정은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이 보기엔 강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멋대로 해석하여 자기들만의 신학을 구축하였기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강도로 취급하는 겁니다. 왜? 주의 성전의 사모하는 열심 때문에 말이죠. 이 상극인 족속을 대립시키며 동시에 강도와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해 언급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인 예수님이 유대인의 시각에서 사마리아인을 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사마리아 인에게 선함을 붙여 버리고(유대인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유다지파(남은자 나머지 지파 소멸된 오로지 남은자) 거룩을 다루는 최고 성직인 제사장 레위인 율법사 성전종사자 모두를 강도로 몰아 붙입니다. 이 비유 뿐만 아니죠.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하실 정도입니다. 일관된 지적입니다.(마 21:13)(막 11:17)(눅 19:46)
그러니 강도로 몰린 유대인이 예수님을 곱게 볼 이유가 없습니다. 님이 십자가 마을을 무조건 남을 정죄하는 단체로 보듯이 말이죠.
심지어 그런 지적을 하신 예수님을 강도와 함께 로마법이든 유대인의 법이든 강도 취급해버려(눅 22:52) 강도가 받는 형벌인 십자가형으로 몰아갑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들이 계속 강도로 남아버리니 대중에게서 멀어지면 안되기에 진정한 이웃으로 남을려면 예수님 단 한명만 처리하면 되는 겁니다. 강도가 받는 형벌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밖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실제상황으로 적용되는 묘한 사건이 터져버립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강도로 취급해 버렸는데, 두 강도 중에서 한 쪽 강도가 예수님을 강도로 보고있지 않고, 강도 만난 자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누구도 그렇게 보는 자 없었습니다. 누구를요? 한 쪽 강도가 예수님을요. 예수님을 강도만난 자로 보는 겁니다. 강도로 몰아버리는 저 유대인과 빌라도 로마인 유대인 다른 강도 모두를 강도로 보고있고, 그들에게 강도 당한 예수님으로 보고 있는 거지요. 예수님도 그런 한 쪽 강도를 강도로 보는 것이 아니라(분명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던 순 악질 1급 사형수 강도입니다) 강도 만난 자로 봅니다.
예수님만 그렇게 봅니다.
(눅 23: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눅 23: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눅 23:41)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그 한 쪽 강도가 강도로 몰려 십자가형을 받는 예수님을 선한 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선한 자에게 요청합니다.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아니 이게 이해 되나요? 납득이 되나요? 한국교인들이야 너무너무 믿음들이 다 좋아서 믿겨진다고 자부들 하시던데 ! 자기도 죽어가고 있고 예수님도 죽어가고 있고, 강도로 몰리든 선한 자이든 이미 죽는 마당에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요청입니까?
이 요청에 희한한 대답도 너무너무 기가막히지 않습니까? 둘 다 강도 신분인데도 지금 둘만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웃됨을 누리고 있습니다. 둘 다 깊은 물에 잠겨 꼬로록 죽어가고 있는데 말이죠. 서로가 강도 만난 자로 보면서 말이죠. 아니 더 정확하게 한 쪽 강도는 예수님을 선한 자로 더 깊게 봅니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과 한 쪽 강도와의 이웃됨을 누리는 그 낙원에, 그 함께 함에, 재국님과 저와 십자가 마을이 끼일 틈이 있겠습니까?
그래도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강도 만난 자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 아니냐 라고 또 물으시겠죠?
제발 재국님! 님은 지금 강도 만난 자입니다. 강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나지도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데 선함을 베풀겠다고요? 제발 그러지 마시고요, 한 쪽 강도처럼 십자가에 못밖여 꼼짝 달싹도 못하는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세요. 그런 전혀 움직이질 못하는 사랑도 이웃됨도 전혀 하질 못함을 인정 못하고, 지금 잘 움직이고 있다고 보고있기에 이웃 사랑 실천에 달려드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님을 강도 만난 자로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님을 보는 시각처럼 자신도 십자가에 꽁꽁 매달려 있는 자로 보시길 바랍니다. 강도처럼.
(이 때 터저나오는 말씀이 너희는 가만히 서서입니다. 아무데나 붙이는게 아닙니다. 자신이 꽁꽁 묵여있다는 것을 볼때만 출 14:13-14의 의미가 제대로 보입니다 양사방으로 애굽 군사, 홍해가 가로막고 어디 나갈 틈이 없는 꽁꽁 묶인 상태입니다. 그저 죽는 길 뿐입니다. 여기서 비로소 나는 마땅히 죽여야 할 자임을 통감하는 그 자백 속에서만 요나의 표적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려 있는 선함 분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외쳐 보세요. 예수님도 죽어가고 있네요? 그런데 선한 분이 왜 죽으셔야 하지요 우린 강도이지만 예수님은 강도 아니잖아요? 선하신 분이 왜 강도로 몰려 죽으시나요. 우리야 당연한 형벌이지만 주님은 옳으신 분입니다. 선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행하신 모든 것은 생명의 길입니다. 예수님 당신의 그 나라가 임하는 그 때에 저를 기억해 주세요 제발. 이라고 외쳐 보십시오.
재국씨! 님이 분명 자신을 강도라고 표현 했습니다. 그 강도라는 표현은 여기 지금 벌어지는 논쟁에서 처세술적인 노림수로 이겨보고자 하는 그런 이유로 강도다 그래 나 강도다 우짤래 이런 의미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 고백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준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서 나온 고백, 다름아닌 예수님 때문에 나온 강도라는 고백이다면 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사랑 베푸는데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그걸 정죄하는 십자가마을의 모순을 끝까지 밝히겠다는 그런 취지가 아니라, 정작 선한 사마리아인인 예수님이 이웃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을 강도로 몰아버려 죽여버린, 이젠 강도 없는 세상, 선한 사마리아인만 남아 있는 세상을 꿈꾸는 그런 우리 자신의 모순을 먼저 십자가 앞에서 날마다 폭로 당해서 나오는 고백이길 바랍니다.
십자가 마을은 구원받은 한 쪽 강도의 심정으로 일관성 있게 외쳐 왔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인은 예수님 뿐이라고요. 그것만 바라보자고요. 그분이 지금도 저 장대 높이 달려 있음을 말이죠.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또 자기 신앙 관리로 넘어와서 이제 더 이상 쳐다보는자 없이, 서로 선한 사마리아인 되기 경쟁을 펼치는 겁니다. 어쩌면 님도 지금 선한사마리아인 되기를 절대로 포기 못하면서 여기서 펼치는지도 모르지요. 지금 이런 현실이 펼쳐지기에 예수님은 여전히 그 당시나 지금이나 강도로 몰리고 있습니다.
못 박아라 못 박아라
(눅 23: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눅 23:21)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눅 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눅 23: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눅 23: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며 관원들도 비웃어 가로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의 택하신 자 그리스도여든 자기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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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놀랍네요 !!
구득영 2004-06-09 10:26:31, 조회 : 537, 추천 : 38
설교를 들을 사람이 이 정도 마음가짐으로 앉아있다면 아마 저는 떨려서 설교를 못하지 싶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나 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나도 저 강도만난 자를 도와야하겠다' 라고 생각하지, 누가 자기가 강도라고 여기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감각(?)이 없어서 그렇지, 사마리아인이 그렇게 했다는 것은 사실 '너희 아니야' 라는 것을 내포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서 평소에는 복음을 전하다가 갑자가 이 순간에는 부처라도 되어서 인간들이 상상하는 그런 '이웃사랑'을 말씀했을까요?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얼마나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있는지 모릅니다. '아, 드디어 아는 것 하나 나왔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건을 모든 것을 다 부수고 '새로 다시' 입니다. 이것을 이근호 목사님은 '십자가의 우발성' 이라고 그렇게 강조했고 말입니다. 아직도 믿음과 행함의 균형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가능성을 붙잡는,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의 그 탐욕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마리아인의 비유목적은 바로 우리의 이웃으로 다가오신 '예수를 믿어라' 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웃사랑이고 말입니다. 하지만 누가 감히 예수님을 그런 이웃으로 여길까요? 우리는 항상 그런 이웃을 해치는 강도인데 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사랑은 그런 강도마저도 무릎꿇게 하는 ...
(눅 23:42)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비유가 아닌 현실로 나타난 강도들과 그 이웃되신 분*
(눅 23:20)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눅 23:21)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눅 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눅 23:23)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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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6:18
유정현 2004-06-12 01:56:37, 조회 : 794, 추천 : 60
유치한 질문하나 드립니다.
바쁘실텐데 죄송합니다.
마16:18에 보면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고 했는데..
천국의 열쇠가 무엇입니까?
천국 열쇠는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것입니까?
아니면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어진 것입니까?
그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했는데
매고 푸는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매고 푼다는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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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마16:18
이근호 2004-06-12 06:31:31, 조회 : 583, 추천 : 33
유치한 질문이 아니라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당시에
하나님 나라의 통행권은 유대 성직자들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칭 '거룩한 제사장 나라'라고 우기면서
온 민족에 대해서 천국 출입에 관해 독점권을 보유하고 있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이들은이 바로 천국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천국은 인간 쪽에서 시도해서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시편에 나오는 말씀처럼
"문들이 들리려면' 왕이 친히 앞장 서서 나서야만 합니다.
천국이란 예수님이 만드는 것이지 기존의 이스라엘 성직자들이 점령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 가를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습니다.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의 대비입니다.
유대 성직자로 말미암아 꽁꽁 닫혔던 그 천국은
이제 예수님의 권세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만 허락이 됩니다.
그 '허락되심'을 예수님은 '열쇠'라는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하신 겁니다.
교회 안에서, 즉 예수님 안에서만 예수님의 천국 입장에 가능해지는 놀라운 현상이
제자들의 활동 속에서 일어난다는 겁니다.
이 작업의 현장은 사도행전에 잘 나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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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마16:18
유정현 2004-06-13 01:27:20, 조회 : 348, 추천 : 38
매고 푼다는 내용이 사도행전에 나와 있다는 뜻인가요?
그럼 죄에 대해서 매고 푼다는 뜻인가요?
제자들의 활동 속에 나타난 어떤 모습이 매고 푸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요?
사도행전을 읽고 스스로 알아보라는 뜻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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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마16:18
이근호 2004-06-13 07:41:13, 조회 : 371, 추천 : 37
사도들과 예수님과의 관련성을 밧줄에 비유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도의 개인적인 능력 행사를 허용하겠다는 취지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사도는 인도하는대로, 시키는대로만 살아야 될 사람입니다.
죄사함의 권세는 오직 주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여주는 기능(증언 기능)은 사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알게 되지요. (사도가 예수님의 죄사함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독자적으로 사도가 어떤 일을 했기에 사도행전에서 말하는 각가지 그런 결과가 나왔느냐를 따져 볼 이유가 없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활동과 달리 사도들만의 독자적인 행위를 따로 뽑아 내어 '주님의 일'이라고 간주해 줄 일은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것 뿐입니다.
그들의 병고침, 기적, 세례 줌, 설교, 기도, 수난, 이 모든 것은 다 배후에 사도를 철저하게 지배하는 예수님의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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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마16:18
유정현 2004-06-15 15:21:27, 조회 : 291, 추천 : 39
오늘날도 예수님은
병고침, 기적, 세례 줌, 설교, 기도, 수난,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성도를 다스리시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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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마16:18
이근호 2004-06-15 18:27:52, 조회 : 425, 추천 : 42
>물론입니다.
그런데 다음과 같이 한꺼번에 정리하는 것이 옳응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예상치도 못한 일로서 우리의 죄를 밝혀내신다"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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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義士가 아니라구요?
김재국 2004-06-26 22:14:36, 조회 : 291, 추천 : 43
안중근 의사가 한국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을 응징한 쾌거는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살신성인의 모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의사의 의거는
자기부인을 한채 자기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전형적인 순종의 모습을 보여준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이목사님은 안중근이 의사가 아니라는 지론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아는 데
그렇다면 이완용이나 일제 앞잡이가 옳다고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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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중근이 義士가 아니라구요?
이근호 2004-06-27 08:48:50, 조회 : 314, 추천 : 36
>혹시 목회자라면
초기 신약 시대의 배경사 공부를 다시 하세요.
사두개인과
바리새인과
쿰란 공동체와
열심당원들의
각각의 사상과 세상관과 삶에 대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나와있습니다.
그렇게해서
악마로 사로잡혀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이
왜 이런 부류의 사람을 좋아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안중근 씨와 가롯 유다는 씨가 똑같은 사람입니다.
다들 열심당원들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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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중근과 가롯유다
김재국 2004-06-28 11:24:33, 조회 : 337, 추천 : 27
목사님의 답변 잘 읽었습니다.
우선 매우 충격적입니다.
저는 안중근 의사가 가롯 유다와는 정반대의 삶을 실천했다고 생각합니다.
안중근의사가 가롯유다의 시대에 존재했다면
그는 아마도 스데반 집사나 바울과 같은 궤적을 밟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가롯유다가 일제 시대에 있었다면
그는 매국노나 친일 앞잡이의 노선을 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중근 의사의 가치관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이타적입니다.
자기 보다도 타인,즉 다른 국민의 생명을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자기 전부를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투신한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반대로 가롯유다의 가치관은 진리나 공동체의 정의, 선을 추구하지 않고
자기 이익과 물질 추구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면에서 안중근 의사와 가롯유다는 노선이 정반대임을 확신합니다.
두번 째로
안중근 의사는 결코 예수님 또는 하나님과 맞짱 뜰 생각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가 자기 명예를 위해서 독립투쟁을 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안목과 이생의 자랑을 위해서라면 친일적 행태를 했었겠지요.
이목사님은 인간의 행위를 예수님의 완전성에 비추어서
완전히 말살하는 입장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행위를 말살하기 위해 화목 제물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다윗이라도 그 추악함은 표현이 불가할 정도입니다.
예수님 앞에 어느 인간이 자기 義를 내세운다는 말입니까?
인간 사이에 통용되는 義라는 것을 예수님 수준에서
논하는 것은 넌센스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추악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義를 추종했던 안중근의사의
그 추구성을 배워야지 가롯유다의 세상추구성을 본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 성도는
불의의 병기에 종이 되느냐
의의 병기로서 예수님의 義를 추종하느냐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지금 인간이 의롭고 거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에게 종이 되고 거룩한 길을 선택하라는 뜻입니다.
이목사님이 부디
십자가의 시작을 통과하여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전권대사가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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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중근과 가롯유다
이근호 2004-06-29 13:43:47, 조회 : 267, 추천 : 38
십자가는 빠져나와야 될 곳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영원토록 '십자가 안'에 놓이게 됩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이 비록 아담 시대의 후대를 살더라도 여전히 아담 안에 놓여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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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이 義士가 아니라구요? 김재국 2004/06/26 43 292
[re] 안중근이 義士가 아니라구요? 문준 2004-06-27 07:02:40, 조회 : 260, 추천 : 44
義라는 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닌가요.
안중근씨가 머리되신 예수님께 접붙힘 받은바 성도라면,
자신에게 義라는 단어를 붙여 義士라고 불리우길 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가 한 행동이 자신의 義로움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 의인되신 분을 증거하기 위한 죽음이였는지는 그분만이 아실겁니다.
제 생각으론, 성도로써의 의거를 굳이 말하자면,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차원에서의 의거요,
세상에서 통용되는 '살신성인'과는 다르다고 봅니다.
참 義의 義되심을 증거하는 것이 의거가 아닌가요? 물론 예수님의 義와 차별되는 자신의 보잘것없음까지 덧붙여서 말입니다.
살신성인은 '아버지의 이름'증거하기 보다는 '나의 이름'이 증거되는 차원이라고 봅니다. 철학이지요.
스데반집사님의 죽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전 안중근 의사가 예수님을 사랑했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하지만,
안중근 의사를 통해서 우리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의 대신죽으심'에 대해 묵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안중근 의사가 성경이 말하는 의인이였다면,
자신은 죽기전에 '이 보잘 것 없는 죄인을 대신에 오직 한 義人께서 죽으셨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물론 언약외의 백성들은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통해 자신이 보고싶은 것(인간의 義)만을 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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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안중근과 가롯유다 김재국 2004/06/28 27 338
[re] [re] 김재국님. 문준 2004-06-29 06:42:08, 조회 : 321, 추천 : 42
김재국님.
김재국님은 성경의 의(義)의 개념을 세상의 윤리,도덕으로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의(義)란, 윤리적 성(聖)됨,속(俗)됨의 의미가 아닙니다.
윗글에도 말씀드렸지만 '거룩,의로움'이라는 개념 모두 하나님 자신에게만 통용가능한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참 의(義)로우신 분입니다.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1장 30절)"
김재국님. 안중근이 예수님 시대에 태어났다면, 의를 행할 수 있습니까?
가롯유다가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일본 압잡이가 되었을까요?
안중근이 택한자가 아니라면, 그는 죽었다깨어나도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스데반과 바울이 의인인 것은 왜 인가요?
가롯유다가 악인인 것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기초합니다.
스데반과 바울은 거룩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이고,
가롯유다는 애초부터 예수님 '밖'에 있기로 예비된 자입니다.
그래서 스데반과 바울은 아버지만을 증거하다 간 사람들이고,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갔습니다.
김재국님.
예수님은 거룩한 자를 만들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 만이 의(義)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될때, 성도가 온전케 됨의 의미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요15:5)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구하기 위해 오신분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한복음 6장 39절)"
누가 의인이고, 악인입니까?
예수님만이 의인이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의를 덧입고 사는자일 뿐 입니다.
참된 의(義)개념을 알때만이, 참된 의(義)를 가장한 거짓 의(義)를 구별해 낼 수 있게됩니다.
거짓 의(義)란, 예수그리스도 '밖'에서 행해지는 모든 열심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의 판단과 선택을 벗어난, 인간의 독단적 '선악판단' 그 자체가 모두 죄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안'에 있지 아니한 인간은 '신(神)'이지 '자녀'가 아닙니다.
신(神)이 된 인간은 '자신이 선택'하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선택'을 기뻐합니다.
그러한 '인간-神'과 '자녀'를 구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의미에서 이근호 목사님께서 열거하신
'열심당원','바리새인','서기관'들 모두 자신 나름의 선악기준을 가진 神들입니다.
그들은 자녀가 아니기때문에 아버지를 증거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義만을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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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국씨
김관성 2004-06-29 11:17:50, 조회 : 275, 추천 : 38
글 잘못 올렸다고 사과하십시오.
너무 나가셨습니다.
이타적인 삶을 살면 다 주를 위해 수고하는 것입니까?
우리동네 점쟁이 아주머니도 엄청 이타적이신데....
이런것은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솔직히 은혜롭게 토론 할 내용을 올리시던지
반박을 하시던지 해야지요.
이번 글은 뭐라고 할까요? 완전 난센스 입니다.
솔직히 신자인지 의심스러운 내용입니다.
차분히 자신의 글을 한 번 읽어보시고 다시 수정된 글을 올리세요.
실수 크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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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김재국씨
김정규 2004-07-01 14:50:49, 조회 : 238, 추천 : 51
다원주의나 인본주의 신앙을 가지신 분이가봐요. 김재국 님....
김용옥 교수님 같은 분과 같은 분이군요. 성경을 그져 윤리책 정도로 이해하는 그런 분들....
저는 참고로 십자가마을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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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문준 2004-06-30 09:16:57, 조회 : 453, 추천 : 55
'잘못된' 성화(聖化)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성(聖)의 의미를
예수그리스도를 떠난채, 독단적으로 자기생산 해 내려는데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도덕'과 '윤리적'이라는 말들을,
성경이 말하는 '열매'와 동일시 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근호 목사님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이 지점입니다.
요한복음15장 5절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근호 목사님께서 그저 아버지와 포도나무를 강조하고 계시는 모습에
적극적인 동의를 합니다.
바른 설교란 그저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라'
이 한마디가 결론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룩과 의(義)의 개념을, 주(主)되신 분과 따로 떨어져 챙기려고 하는 자들의
도덕의식과 선악관념을 겨냥해 공박하시는 것때문에,
이근호 목사님께서 많은 비판과 오해를 받고 계시지만,
더욱 분투 해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성화(聖化)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사용하는 '성화(聖化)'라는 언어자체에 대해서 공격이 가능합니다.
성(聖)에 대한 인식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그것에 대해서 입니다.
그러나 聖스러우시고, 義로우신 예수님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의 참된 성화(聖化)를 굳이 말하자면,
'예수그리스도의 聖스러우심과, 의(義)로우심을 날마다 알아가고, 거룩하신 빛에 의해 자신의 보잘 것없음이 폭로되어 날마다 소스라치는 것. 따라서 머리되신 분만을 자랑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 이외에 아름다운 것이 어디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이외에 죄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길이 어디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열매'를 어찌 인간의 '도덕성'으로 흉내낼 수 있단 말입니까?
자녀는 그저 아버지를 바라보고 살뿐인데요.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는 대상만으로 만족하며 살 뿐인데요.
우리 한눈 팔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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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감사합니다. 분투노력하겠습니다.
이근호 2004-06-30 12:10:02, 조회 : 406, 추천 : 43
>거룩(=聖)이란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걸고 벌리시는 전쟁을 통해서 외부로 방출됩니다.
그 이름이 '주의 이름'입니다.
따라서 그
'주의 이름'에 의해서 수행되는 전쟁을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고
그 '거룩한 전쟁'에 의해서 얻어진 전리품이 바로 '거룩한 성도'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는 창세기 3:15에 나오듯이 악마의 후손들이며,
이들의 전쟁 무기는 선악체계이며, 이들이 하는 일이 곧 '사람의 일'입니다.(마 16:23)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치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정리: '사람의 일=악마의 일'
하나님의 무기는, '율법 외의 한 의'이며(로마서 3:21)
이 의(義)는 예수님의 십자가로서만 완료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안 됨! 선지자나 사도도 안됨!)
정리: 십자가=화목제물
따라서
오늘날의 거룩 싸움이란,
예수님의 의를 증거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의를 증거하는가 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