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황당하게 제멋대로의 예수님 말씀? ] 2004-01-13
[너무나도 황당하게 제멋대로의 예수님 말씀? ] 2004-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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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너무나도 황당하게 제멋대로의 예수님 말씀?
권정희 2004-01-13 08:18:29, 조회 : 209, 추천 : 29
이근호목사님께,
며칠 바빴습니다. 평안하셨는지요? 약속드렸던 대로 오늘 들어와서 다시 질문을 드리게 됩니다. 이목사님말씀대로 “ ‘하나님의 선택’을 읽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고 나니, 이목사님의 답변의 표현들이 무슨 뜻인가 좀 더 이해가 되는 것 같더군요. 특별히 “기존의 신학과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한 것에 기초해서 나름대로의 이목사님의 신학을 성립해가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다른 말로 하자면, 지금까지의 신학계의 흐름을 단도직입적으로 이근호목사님”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시는군요. 맞습니까? 기존의 신학을 모두 “인간의 존재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고 이목사님의 신학만은 그것을 벗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이니, 참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보아도 유치찬란합니다. 이제 좀 시간적 여유가 나니깐 목사님께서 주신 답변글에 다시 질문글을 올리겠습니다. 괘씸타 하지 마시고, 저를 설득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초대교회사도들이 ‘이런’ 의미론적 차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복음을 전했다고 하는데, 요한이 ‘로고스’의 의미를 전혀 염두에 두지도 않은 채로, 그것을 예수님께 적용했었을까요? “예수라는 실존인물과 메시야관을 전혀 인간의 지혜로 연결이 불가능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문법파괴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제자들이 그렇게 헬라어문법을 파괴했던가요? 목사님도 지금 저에게 글을 쓰고 있는 그 글의 문법을 따라서 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괴이한 문법을 주장하시는 것인지요? “믿음은….예수님이라”는 논리는, “예수님의 의견을 전부 추종해야 비로소 가능한 논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논리가 초논리적인 것은 이해하지만, 목사님의 논리처럼, 비논리적이라면 이것 참….
2.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황당하게 제멋대로 발언”하신다구요? 결국 목사님의 황당한 논리를 역설하기 위해서 예수님까지도 황당한 분이 되고 마는군요. 독자의 욕구가 ‘매미채’기능을 한다는 것은 이해됩니다. 누구나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말씀쯤 되지요. 그리고 그것이 자기 존재의 가치를 긍정하려는 욕구와 동일시된다는 것 또한 인정됩니다. 저도 그렇고….목사님도 그렇지요. 제가 ‘십자가 바탕 위에 전개되는 성경말씀”의 고발 앞에 겸비해야 하는 것처럼, 목사님도 그러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은 예외가 된다고 여기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믿음에 대한 ‘화용론’에서 이상스럽게 성경에서 일정하게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어떻게 도대체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찬란유치한 논리가 나오는 지…
2.(목사님이 번호를 2번으로 붙여서 따라서 붙입니다)….여기서는 문법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왜곡시키시고 계시는군요. 분명히 앞에서 말씀하시길, “한국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이단들입니다”고 해놓으시고는 이제는 “한국교회만을 단죄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줄기 전체를 단죄하고 정죄”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둘러부치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하는 것과 바로 당신은 사기꾼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론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있고, 일치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고, 앞에 당신은 사기꾼이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당신만을 사기꾼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다 죄인입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희롱이고, 대화하는 사람의 인격과 정신수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제가 쬐끔 목사님께 거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화가 나기 때문이 아니라, 질문의 문맥에 좀 더 신경써 주십사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질문한 것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으시고 영 엉뚱한 문제를 붙잡고 답변하시는군요. 동문서답인지, 서문동답인질 모르겠습니다만….저는, 한국교회의 “모든” 상식은 이단적이라고 하신 당당하신 목사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하나님같이 한국교회를 판단하실 수 있느냐고 질문했더랬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도 인간의 언어에 당신을 수준을 낮추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하나님 핑계대시면서 하나님같아 지시려고 하시는 것은 아닌 지…이전에 알던 목사님의 모습이 아니어서 정말 실망하게 됩니다. 이전엔 많이 순수하셨었습니다. 참된 것이 무엇인 지 진지하게 알고 고뇌하셨더랬습니다. 그런데, 최근엔 그런 모습이 정말 가슴 아프도록 안보이네요. 목사님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목사님을 이단으로 정죄한 한국교회도 문제가 있겠지만, 목사님께서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여겨지지 않군요. 젊으셨을 때의 그 순수함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고대하겠습니다. 그때에 정말 멀찌감치서 “존경”했더랬는데요….조나단 에드워드가 전혀 문제가 없었던 사람이라고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의 그 확신보다도 이목사님께서 하나님을 아는 믿음과 체험에 있어서 더 확신을 하시느냐는 질문을 제가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엉뚱하게 에드워드의 사회윤리관에 큰 문제점이 있느니 하시는 말씀을 하는 것인 지….에드워드의 신학도 기존의 신학으로서 “인간의 존재기반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신다고 솔직히 말씀하시는 것이 좀 더 쉽게 이해가 되겠는데요? 그렇습니까?
3. 이것도 저의 질문에 영 엉뚱한 답변이지만, 다른 질문이 많아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4. 문맥을 통해서 목사님의 말씀을 해석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성을 증거하려고” 복음을 이용하고, 목사님께서만 복음을 증거하신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저의 질문은, 칼빈이나 루터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불과”한 “종교적 집념”으로 애쓴 것이기 때문에 결국 헛수고했다고 보시는 그 의견에 대해서 질문을 드렸더랬습니다. 저의 질문에 답변을 해주시길 원합니다. 제가 귀(물론 마음도요!)를 닦고 경청하지요. 아무 말씀이라도 하시면 아멘하고 넘어가 버릴 것으로 생각하시면, 조금 싱거워지네요.
5. 목사님의 확신이 “성경전체가 새언약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은 잘 이해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목사님께서 시비를 건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질문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해주시되, 심사숙고해서 질문을 해주시지 않는 것 같으니까 괜히 화가 납니다. 내가 지금 헛수고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몇번 더 시도해 보다가, 영 말이 안되면, 그만 퇴출하도록 하죠(이 말씀 꼭 기억해 두십시오). 최소한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에, “혹시 다른 중심점을 찾아내었으면 그것을 남들에게 증거하면 될 문제”라고 하신 것에서 다른 사람이 목사님과는 다른 “중심점”을 찾아내어서 그것을 “증거”해도 목사님의 그 발견과 대등하게 여기실 의향이 있으신 듯 해서, 목사님의 “이단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면도 있구나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 저로선 큰 위안입니다.
6. 저의 어느 말이 “교회를 고정적 개념”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까? 하나교회도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그것으로 위로를 삼습니다. 그러면, 이목사님을 “이단”으로 본 사람들이 목사님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니깐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모든 개념은 상대적 개념으로 머물고, 그것들을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십자가를 강조하는 것에는 저도 절대 아멘입니다. 그런데, 저를 “자신의 존재함”에 두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에는 아멘할 수가 없군요. 목사님께서는 목사님의 “기존 신학과의 인식론적 단절을 경험”한 그 경험과 철학적 전제로 너무 쉽게 다른 사람들을 단정하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군요. 목사님의 철학에선 관계를 강조하시는데, 모든 것을 그렇게 관계론적으로 이해하신다면서, 어떻게 저의 표현과 저의 이곳에서의 생각의 표현들조차도 관계론적으로 이해하시지 못하시는 지 모르겠군요. 관계론적으로 세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경향은 이해의 폭이 넓고 단정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쉽게 판단을 내리지 않지요. 그런데, 겨우 몇번의 글을 주고 받으면서, 그리고 저로선 저의 견해를 제시하기 보다는 거의 질문들을 했을 뿐인데, 그 글들을 통해서 저를 “자신의 존재함”에 둔다는 식으로 단정해 버리고 마시는군요. 제가 목사님을 너무 쉽게 단정해 버린 것입니까? 관계론적 인식론이 너무 설익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실체론적 인식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언급해 둡니다.
7. “성화”와 “거룩됨”의 차이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그 차이를 설명하시는군요. “거룩됨”을 “이미 요지부동 더 발전하거나 더 전진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라고 하셨는데, 성도에게 “거룩됨”만 있고, “성화”가 없다는 말은, 성도들에게 “이미 요지부동 더 발전하거나 더 전진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라는 뜻입니까? 저를 두고 9번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입론”을 따르고 있다고 하셨는데, 목사님의 이런 “거룩됨”론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입론” 아닐까요? 목사님께서 그렇게 성도의 “성화”를 보시는 것 같아서, 슬쩍 저도 질문하는 중에 “주입”이라는 단어를 끼워넣었는데, 그 단어 하나로 저의 질문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연결시키시는 군요. 이것도 너무 단정적인 모습이 아닐까요? 오히려 목사님의 지식이 오히려 저의 질문의 요지를 이해하는데, 목사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베드로가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1:2)에게 “거룩한 자가 되라”(1:15)고 권면한 것은, “성화”의 권면이 아닙니까? 아시아의 흩어진 “성도”들이 “더 이상 요지부동 더 발전하거나 더 전진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에 돌입해 버렸습니까?
8. 성경에서는 “해 아래의 해로운 것이 없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목사님의 이론도, 신학도, 경험도, “기존 신학과의 인식론적 단절의 경험”도 새로운 것이 아니지요. 반복되고 반복되는 허무한 장난들일 뿐입니다. 새 것인 양 주장해도, 그 허위가 해 아래서 드러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의 이단성과 허위를 지적하신 것에 비해서 제가 이런 말쯤 한다고 해서 화를 내신다면 결국 목사님만 예외라는 허위의식을 스스로 드러내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9. ‘주입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좀 더 조심스럽게 상대방을 이해해 주십사고 부탁드리고 싶군요.
물론, 저도 자신이 “개나 기계보다 더 못한 존재인 것을 자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질문은 우리 모두가 “개나 기계보다 더 못한 존재냐 아니냐”를 가리기 위해서 드린 질문이 아닙니다. 다시 보십시오. “의”라는 문제에 있어서 성령님의 역사하심과 인간의 의식과 행동간에 있을 법한 관계에 대한 질문입니다. 거의 모든 질문들을 왜곡해서 보셔서 대답을 하시기 때문에, 마치 국민학교학생을 위한 질문지에 대학생이 답을 하면서 그 질문을 자기의 지식으로 확대해석하거나 왜곡시켜서 답변만을 늘어놓는 느낌이 듭니다. 질문과는 관계없는 질문 말이죠. 호호호호….이거 참…자꾸 이런 식의 질의응답이 반복이 되는 듯해서, 저도 표현이 조금 거칠어져 가는 것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10. 이 답변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대체 저의 질문은 어디로 가버렸는 지요….제가 무엇을 질문했는 지 확인하셨습니까? 저는 “언약자들”, “언약신학자들”, “연방주의자들”의 언약개념에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는 것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신학이 그들의 시대에 영향을 입은 것처럼, 목사님의 신학도 이 시대에 영향을 입은 것이 아니냐? 특별히 관계론적 철학에 영향을 입은 것이 아니냐 그것을 확인하고자 질문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질문은 오데로 가고 영 엉뚱한 답변만 하시는군요.
11. 저도 “십자가의 복음”은 변하지 않고 절대로 변하지 않음을 믿습니다. 목사님이 변하고, 모든 사람들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십자가의 복음”이지요. 문제는, 그 “십자가의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은 시대마다 변해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십자가의 복음”을 외친다고 해도,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그 용어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제가 이렇게 질문을 하는 것은, 그 “십자가의 복음”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고, 그래서, 목사님이 “한국교회”에 의해서 오해받고 있는 것인 지, 아니면 “한국교회”의 목사님에 대한 판정이 사실인 지 아닌 지를 확인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에 좀 더 성의 있게, 그리고 심사숙고해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해주십사 신신당부를 올립니다. 실망해서, 이런 질문을 드릴 상대가 아니라고 “단정”해 버릴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런던에서
권 정희 드립니다.
*다른 글 또 읽을 것 있으면 또 소개해 주실 줄 믿고 답변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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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너무나도 황당하게 제멋대로의 예수님 말씀?
이근호 2004-01-13 11:38:17, 조회 : 203, 추천 : 31
어떤 분이 귀하에 대한 질책에 대해서 제가 이렇게 답변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길이다"라고 했을 때, 유대인들이 대단히 당황했으며
그들은 예수님의 그 건방진 어법 파괴에 대해서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이 떡은 내 몸이다'라고 했을 때,
천주교에서는 그 떡 조각조각이 곧 예수님의 몸의 분산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의 의사소통으로 신앙을 챙기려는 자들에게는 어법 파괴로 대응했습니다.
성도끼리는 의사소통이 우선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같이 증거하는 것이 관권임을 비신앙인들은 모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문법이나 어법은 무엇입니까?
인간이 만든 장난감입니다. 그 자체로 이미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가(可)하다니, 참이 된다니 하는 것은 진리되시는 분이 웃을 일입니다.
학문조차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부정할 수 있어야 신앙입니다."
라고 답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요약한 글을 보면서도
제가 이근호 후, 이근호 전을 증거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싶어하는 그 심정은 도대체 배후에 누가 심어다 준 겁니까?
그 글을 보면서 이근호만이 죄인아니고 나머지는 다 죄인이다고 제가 그렇게 증거했던가요?
그래서 귀하가 그 점을 그대로 따와서 지금 저에게 항의하는 겁니까?
제가 증거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만이 구원의 능력을 쥐고 있지, 인간의 그 어떤 이름에는 없다는 점을 증거한 겁니다.
이것이 귀하에게는 그렇게 유치찬란하게 보였던가요?
사람은 모두 죄인이며, 그들이 행하는 그 모든 것도 죄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그토록 유치찬란하게 보이는 발언입니까?
그래서 어떤 인간도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하고 오직 예수님의 피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그토록 귀하에게는 유치찬란하게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행함과 신학의 웅장함을 과장하고 그것이 과시하는 길만이 유치하지 않는 고상함입니까?
모든 인간은 죄인이지만, 몇 몇 신학자만큼은 죄인의 항목에서 빼주는 식의 신학을 전개해야 극히 고상한 신학을 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왜 그 당시 격식을 따지고 고상함을 따지고 거룩함을 따지는 유대학자들이 당황해하며 이단으로 몰았는지 앞으로 귀하께서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믿음은 곧 예수님이다."라는 발언 안에는(물론 히브리서에서 특히 강조된 믿음 개념이지 다른 것에도 마구잡이로 통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수많은 논리가 깔려 있습니다. 그것이 생략된 겁니다. 그 생략된 것은 이 크로스빌리지 싸이트에 가득 도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귀하께서 초등학생의 질문은 대학생 식으로 답변했다고 불평하셨습니다.
답변이란, 질의의 분위기를 환기시킬 책무도 갖고 있습니다.
단순한 의사소통용이 아닙니다. 복음 증거용입니다.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는 복음을 증거할 이유 이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1. 요한복음의 '로고스'가 기존의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 발상 자체가 곧 언약적으로 볼 때 이방민족에서나 나올 발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오직 언약만 성취하는데 관심을 쏟을 뿐입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에는 언약적 내용만 담겨야 정답입니다. 이 외는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플라톤은, 고정 불변의 이데아 세계를 염두에 두면서, 그 이데아가 인간 개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고려해서 '조명설'을 주창했습니다. 하지만 이점을 체계적으로 다듬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내재하는 로고스 기능 체제'를 구축하려고 했습니다. '로고스'의 '기능', 혹은 '씨앗'이 모든 인간에게 부어졌다는 것은 스토아 철학에 불과합니다. 조명을 통해 인간은 이데아에 대한 인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조명설은 어거스틴에 있어 '은총론'으로 발전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물론이요 종교개혁자들도 섭리론에서 스토아 정신을 수용하게 됩니다. 루터는 스토아 철학의 결정론과 예정론을 결합하려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들이 이토록 복음에 대해서 모른단 말입니까?
그것은, 이미 복음에 대해서는 아는 자는 복음만을 증거하지만 복음을 알아서 그것을 증거하는데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에게는 복음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증거 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제가 귀하에게
십자가 앞에서 "죽어라!"고 한 것이 이런 차원입니다.
정말 복음을 아는 자라면, 이 말로 인해 의사소통에 하등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즉 "맞습니다. 이미 우리는 십자가 안에서 죽어 있는 자입니다. 우리의 자랑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갈 2:20. 6:14)
그런데 복음을 모르는 자는 동물의 근성상 가만 있을 위인이 없습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의 신학만이 이단이 아니고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라고 주장하는데, 내가 당신이 신학이 얼마나 유치찬란한지 조목 조목 손 좀 봐줄까?"하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신학자들이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지금 눈에 보이고 인간이 행하는 이 모든 것이 왜 당신(예수님)으로 인해 다 부정당할 거리에 불과한가?"하고 역정을 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얼마든지 좋은 말로 좋게 설명하면 충분히 복음에 대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의 주동 하에 십자가 죽음을 당하신 사실을 아시지요?
사도 바울이 사도 되기전에도 그러했다는 것을 아시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십자가가 뭡니까? 인간의 인식이나 이해나 도움이나 협력이나 활동이나 신학의 발전하고도 전혀 무관하게 터져버린 사건입니다.
인간은 당연히 이단이요, 마땅히 이단이요, 항상 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로 십자가의 피의 위력을 알았다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그리고 십자기 피의 위력이 신앙 초창기에만 유효하고 그 다음에서 유용성이 떨어진단 말입니까?
늘 이딘이요, 당연히 이단이요, 마땅히 이단이어야 하는 우리를 늘 간섭하지 아니하면, 자신이 '이단 아님'이 예수님의 십지가의 피를 대신해서 증거된다는 사실을 귀하는 왜 모른단 말입니까.
거룩이라는 의미는 이 십자가에서 구현된 그 언약이 담겨 있어야만 거룩입니다. 즉 언약적인 예정론이 담겨 있지 않는 거룩은 진정한 거룩이 아니라 유대교적이고 스토아 철학적인 거룩에 불과합니다.
칼빈이 스토아 철학의 윤리에 정통한 사람인 것을 아시지요?
개혁주의자들은 그 시대의 신학을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애써도 오늘날 시대 상황을 상상도 못한 자들입니다. 오늘날에는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인간의 죄가 소위 기독교, 종교, 신학을 통해서 어떤 것을 노리고 변형되고, 어떤 것을 얻기 위함으로 그들의 신학이 수정되는지를 그들은 알지를 못했습니다.
후배 학자들은 그들의(종교개혁자의) 신학 논점을 보완이나 수정해서 이 자본주의 시대에서 교회의 자본을 인정하고, 신학교의 자본을 인정하고 그 와중에서 자신의 생계 수단으로서의 신학 지식이 활용되는 것을 스스로 수긍하고 싶어하는 그런 시대가 올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주님은 결코 속아넘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어떤 장난감으로 살려는지 말입니다. 교회라는 장난감, 신학이라는 장난감, 심지어 복음이라는 장난감 가지고 살려고 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자는 자신의 존재의 추진력과 외침에 준해서 모든 것을 증거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슨 주장을 하고, 무슨 논리를 펼쳐도 그 밑바탕에는 자본시장과 자본의 축적 정신이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청도교 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그 시대의 생존의 양식과 무관하지 않는 그런 식의 신학을 전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언약대로 일하시고 언약대로 심판하실 뿐입니다.
왜냐하면 저(이근호)나 그 누구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미 십자가 안에서 죽은 자는 이것만을 증거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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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호호호...이제사 쬐끔 대화가 되어져 갈 것 같군요
권정희 2004-01-13 20:14:01, 조회 : 214, 추천 : 30
이목사님께,
호호호…이제사 쬐끔 대화가 되어져 갈 것도 같군요. 제가 좀 거친 표현을 써서야 겨우 목사님께서 저의 대화에 “진실되게” 응해주시는 것 같아서, 약간 섭섭하고 실망한 감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앞으로 대화의 전개여부에 의해서, 지금의 감정의 응어리는 충분히 해소될 것으로 믿습니다.
다시 한 번 더…호호호… 저의 “배후”에 “사탄”이 있을 것처럼 보입니까? 그렇게 보시고 싶으시다면 어쩔 수가 없지요. 스스로 그런 유의 사고방식을 가지신 분으로 드러나실 뿐이니깐요? “기존신학과의 인식론적 단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기존신학과 이근호신학이 다르다는 이야기고, 그 다른 바가 곧 기존신학은 인간의 존재기반을 유지하고자 하는 반면에 이근호신학은 그것이 아니다고 한 그 글의 내용이 바로 이근호신학”이전”과 “이후”로 구분한 것이 아닌가요?
목사님의 젊으셨을 때의 순수함이 아쉬운 것은, 그 당시에는, 다른 사람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실 줄 아셨다는 것입니다. 지금에는 저의 글에 대해서 “질책”하는 사람들 뿐이어서, 목사님에 대한 비판성의 글이나 말은 전혀 듣지 못하시는 것은 아닌 지…벽 중에서 가장 두터운 벽은 “사람의 벽”이라고들 합디다. 예, 그래요. 인간의 문법이나 어법은 “장난감”인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그 “장난감”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당신의 “진리”를 담으셨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장난감”으로 “장난”하시고 계신 것입니까? 히브리어문법과 헬라어문법, 그리고 심지어는 국어문법을 통해서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지 않으셨던가요? 이런 “장난감”과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리”를 “계시”하시나요? 천상의 진리라서, 지상의 요소들은 전혀 무시하시나요?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신 것은 이 지상의 것들을 이용하셔서 천상의 진리를 나타내시고, 또한 구속의 대드라마를 연출하시기 위한 것이 아니던가요? 하나님께서 이 땅의 것들을 창조하시고, “좋다”하시지 않으셨던가요? 그리고 그것들이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더럽혀 지고, 왜곡되어졌다고 해도, 그것들을 모두 다 심판 아래 놓으셨다고 하더라도, 당신께서 만드셨던 것이기에, 그것들을 원래 “좋다”하셨던 그 상태로, 아니, 그 상태보다 더 좋은 모습으로 회복시키시고 완성시키시기 위하여서, 구속의 ‘언약’을 베푸셨던 것이 아니신가요? 어떻게 인간의 문법이 일종의 “장난감”으로만 치부되고 매도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자체로 이미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 “한계”를 이용하시고, 극복하셔서, 그 “한계”속에 하나님 당신의 “진리”를 담으셨는데, 어떻게 “장난감”이라고 비아양거리실 수 있는 것인지요? “진리되시는 분”이 화내지 않으시겠습니까?
물론 “학문조차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부정할 수 있어야 신앙”이지요. 하지만, 진짜 신앙은, 자신의 “십자가신앙”이 참인 지 아닌 지조차도 질문할 줄 알아야 한다고 보이는군요.
흥분하지 마십시오. 제가 언제 “ ‘하나님의 선택’을 읽고”라는 글 속에 “이근호만이 죄인 아니고 나머지는 다 죄인이다고 증거한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까? 다시 저의 글을 음미해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께선 흥분하신 것 같군요. 흥분하면 다른 사람의 글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하게 되기가 쉽거든요. 지금 제가 목사님께 항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목사님께서, 애당초 “한국교회”의 문제점(이단성?)을 발견하셔서는 그것을 발표하시고 주장하셨던 초창기 시절을 돌아보십시오. 그때에 목사님께서는 “항의”하지 않으셨습니까? 만일 제가 “한국교회”를 이단이라고 주장하시는 목사님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를 향해서 동시에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고는 그 문제점을 확인하기 위해서 질의응답과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항의”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항의”라고 해 주십시오. 루터가 처음에 95개조문을 내어걸 던 때의 그 “질의”의 심정이 결국 “항의”로 이해되고, 결국 교회가 분열되어버리는 결과를 빚게 되었을 때 루터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이름만이 구원을 능력을 쥐고 있고 인간의 그 어떤 이름에는 없다는 점을 증거”하는 것이 유치찬란한 것이 아니지요. 제가 그렇게 글을 썼습니까? 어느 부분에 그렇게 제가 썼습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흥분을 가라 앉히십시오(세번째 이것을 말씀드립니다). 제가 “유치찬란”하다고 한 것은, 그 증거의 방식입니다. 상식적인 어문법을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증거하시는 방식 말입니다. 이런 들 저런 들 어떠하리….하시겠습니까? “방식”이야 뭐 그리 중요하냐 하시겠습니까? 본질만이 중요하지, 그 본질을 증거하는 형식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여기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형식을 중요시하지 않게 여기셨습니까? 형식을 존중하시면서도, 그 형식이 본질을 담아내지 못할 때에만 그 형식을 파괴하지 않으셨던가요? “믿음의 본질과 핵심은 예수님”이라는 형식이 “기존신학”의 “형식”이라면 그 형식이 “믿음은 예수님”이라는 “본질”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 “형 식”을 파괴시켜서 그 “본질”을 담아내시겠다고 마음먹으신 것입니까? 기존신학의 형식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께서 보시듯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자기중심적인 아집과 자기존재의 기반을 유지하려고 하는 종교적 열정이 문제일 뿐입니다. 그 형식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제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기존신학의 모든 ‘형식’에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이 어법문제에 있어서는 형식상 문제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몇몇 신학자를 옹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시는 모양이군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행함과 신학의 웅장함을 과장하고 과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의 질문을 유대학자들이 예수님을 이단으로 몰아부치듯이 목사님을 몰아부치고 있다고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목사님을 예수님과 비슷하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유대학자들과도 비슷하게 보지 마시기를 부탁드려봅니다.
“믿음은 곧 예수님”이라는 말 속에는 수 많은 논리가 깔려 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음미해 봅니다. 히브리서에서 특히 강조된 개념이지 다른 것에도 마구잡이로 통용하라는 말이 아니라고 하시는군요. 지금까지 “마구잡이”로 통용하실 수 있듯이 말씀해 놓으시고는 이제는 아니라고 하시니, 어째튼 감사합니다. 자신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만큼 겸손하고 겸허하며 아름다운 모습이 없지요.
결국, 목사님께서는, 저의 질의에 답변하신 것이 아니고, “복음증거용”으로 답변하셨다고 하시는 것 같군요. 단순히 의사소통하신 것이 아니고 말이지요. 성도가 존재하는 것은 복음을 증거할 이유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으시다고 하시니깐요. 말은 맞는 말인 듯 합니다만, 목사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긍하려면 “복음을 증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질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굉장히 단정적으로 표현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다”고 단서를 달으셨으니깐요.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가 복음전도하는 것 뿐일까요? 다른 이유가 없이요?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면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한 웨스트민스터소교리문답 1문1답도 “복음전도”의 각도에서만 해석해야 하나요? 성도의 삶을 너무 제한시키는 것이 아닐까요? 소교리문답도 “인간의 존재이유를 유지하려고” 하는 기존신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까?
저의 11가지 질문에 번호 1만을 붙여서 답해주셨군요. 저의 다른 질문들에 대해서 답변해주실 가치도 없다고 여기신 것입니까?
1. 제가 ‘로고스’를 언급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할 때에 그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개념과 어떤 전제들을 무시하였다고 하시는 목사님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로고스’가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연관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의 단정적인 경향을 여기에서도 읽을 수 있군요. 최소한 사도요한이 자기의 글을 읽을 사람들이 ‘로고스’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 알 것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이 단어를 선택한 것이 아니냐고 질문드린 것이지요. 목사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으시는 것 같고, 그래서 그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전했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시거든요.
여전히 어거스틴, 종교개혁자들이 여전히 기존신학, 곧 인간존재의 이유를 주장한 것일 뿐이라고 한 말씀, 그리고 그 신학과 달리 궤를 긋고 있는 것이 목사님의 신학이라고 하시니, 앞으로의 대화에 제가 새겨듣겠습니다. 물론 동의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수고와 노고를 통해서 지금 목사님께서 그렇게 감격하시고, 그렇게 인식의 단절을 느끼셨다고 하는 그 깨달음을 가지시게 된 것일테니깐요. “단절”을 너무 지나치게 느끼시는 것 아닙니까? 시대마다 단절의 요소를 가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단절”을 강조하느냐 “연속”을 강조하느냐 하는 것에는 균형을 잡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저로서는 목사님의 답변글을 읽으면서, “노장철학”과 “불교철학”을 뒤섞어 놓은 분위기를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십자가복음의 옷을 입은 노장철학 말입니다. 비록, 목사님께서 노장철학을 비판할 수 있을 런지 모르지만, 목사님의 사유방식과 그 논리전개가 바로 그런 것을 많이 느끼게 합니다. 마치,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한 두 마디 툭 답변하는 것으로 끝내시는 것 자체가, 선불교의 “봉”철학입니다. 도사 흉내내시는 것 같이 말입니다. 저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누군가가 자유게시판에 김용옥씨의 특강에 대한 안내기사를 올렸더군. “십자가마을”에 올리는 기사인데, 전혀 비판적 언표도 없는 채로 그 방송일정에 대해서 안내하는 글이었습니다. 무언가 맥이 닿는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물론, 제가 그 기사 하나 만을 보고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주장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꾸준하게 하는 중에,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그런 묘한 연관성을 자꾸만 느껴간다는 것입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추천해 주지 않으셔도 몇몇 글들을 읽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 “도배”해 놓으신 그 숨겨진 논리를 발견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이 홈페이지 어디에 목사님께서 노장철학에 대해서 비판해 놓으신 글이 있다는 것쯤 귀띰해 주시겠지요?
저야 물론, 십자가 앞에서 “죽어라!”는 말을 들을 대상입니다. 사도바울과 더불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선언을 할 수 있는 자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사도바울과 더불어 “날마다 죽노라”고 해야 하겠지요. 이것은 저에게만 아니라, 목사님께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이지요. 아, 복음을 들어 상대방을 공격하려고 하는 그 교만이여, 저에게나 목사님에게서 없이하여 주소서. 주님, 이 대화가 보다 생산적인 대화가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소서. 아멘.
목사님께서, 저의 의도를 “당신의 신학만이 이단이 아니고 나머지는 모두 이단이라고 주장하는데, 내가 당신이 신학이 얼마나 유치찬란한 지 조목조목 손 좀 봐줄까?”하는 식이라고 보신다면, 다시 한 번 냉정해지시길 부탁드려봅니다. 저의 의도를 그렇게 파악하시는 목사님의 인식이야말로, 아직도 “십자가의 복음”에 의해서 처리되지 않은 부분 아닙니까? 최소한 이 부분에 있어서 만이라도 목사님께서는, “이미 요지부동 더 발전하거나 더 전진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로서의 “거룩됨”을 가지시거나(받으시거나?) 한 것이 아니고 아직도 “성화”가 필요하신 부분으로 여겨지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주장을 하고 무슨 논리를 펼쳐도 그 밑바탕에는 자본시장과 자본의 축적 정신이 깔려있”다고 한 그 지적 정말로 인정합니다. 제가 왜 이 글을 쓰고 있느냐? 인터넷에 이 글을 올리고 있는가? 질문하고 있는가? 그 질문의 깊은 동기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근호목사는 이 이런 사이트를 만들어 놓고, 질의응답을 할 수 있도록 하면서, 그 기회를 통해서, 질문에 대한 답변보다는 오히려 자기주장을 펼치는 기회로 삼고 있는가? 모두 다 “자본시장과 자본의 축적 정신이 깔려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심판하시고, 또한 저를 심판하시길 원합니다. 그 심판을 통해서 드러날 것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 뿐입니다. 이근호도 사라지고, 권정희도 사라지고,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기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첫사랑이 사라지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런던에서 권정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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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호호호...이제사 쬐끔 대화가 되어져 갈 것 같군요
이근호 2004-01-13 20:50:28, 조회 : 208, 추천 : 43
십자가 앞에서도, 호호호.....
나 죽을 죄인입니다. 호호호....
제 생각에는 영국에서 영어만 쓰시다가
마음껏 한글을 쓰실 기회가 이렇게 주어진 것이 너무 좋아서 호호호.... 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낯선 외지에서 웃고 사는 것을 좋은 모습처럼 보입니다.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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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호호호 평
권정희 2004-01-13 23:49:04, 조회 : 206, 추천 : 28
이목사님,
결국,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실 생각은 없으시고, 괜한 호호호...에 트집을 잡으시는군요.
제가 트집만을 잡고 있는 것인 지 곰곰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십자가 앞에서, 호호호..."했습니까? "나 죽을 죄인입니다.호호호..."했습니까?
평범한 가정주부 하나 상대하지 못하시고 나가 떨어지시나요? 호호호...
너무 실망이 되는군요. 호호호...
저의 올해 우리집 표어가 "하루에 한번씩 웃자"입니다. 호호호...
저를 웃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호호호....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을 "인간존재의 이유를 유지하려는" 기존신학이 말하는 "십자가의 복음"을 평가절하하고, 이단시 하는 그런 모습이 그런 자세가, 그런 태도가, 그런 형식이, 호호호....입니다.
답글 올리시면 언제나 제가 또 질문드리겠습니다.
그 동안 감사하군요. 호호호...
런던"시골"에서 권정희
ps. 호호호호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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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관전평
이준 2004-01-13 23:22:09, 조회 : 227, 추천 : 43
영화 "글레디에이터"를 처음부터 끝가지 제대로 보지 않아서 검투사들의 위용이나 용력이 어느 정도인 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상을 해봅니
다...아주 단단한 갑주로 무장한 태산과 같은 전사에게 제 딴에는 니퍼, 드라이버, 망치, 그러다 안 되면 손톱깎이, 송곳 등 갖가지 구질구질한
공구들을 가지고 달려들어 무장 해제시켜보려다가 다음과 같은 한 방에 저만치 나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꼭 다윗이 한 방에 날려버
린 물매돌처럼 말이죠. 딴에는 머리가 아니라 오기와 투지로 달려들어 보지만, 처음부터 싸움이 안되는 거죠.
더구나, 그동안의 옥신각신 주고받은 내용을 쭉 훑어본 관찰자의 입장에서 볼 땐 각자가 품은 싸움의 상대가 다르다고 비춰졌기 때문에 자동
적으로 싸움의 목적도 서로 달라 보였습니다(물론 제 주관적 견해겠지만). 상대방을 꺾어야 겠다는 오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바와 거대한 세상
을 상대로 싸우는 전사의 사명감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요. 이런 상대를 만났을 경우, 결국...전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며 우리 관람자들에
게 허허...웃을 기회를 주고서 진짜 상대와의 다음 싸움을 준비하러 퇴장하고 말겁니다.
십자가 앞에서도, 호호호.....
나 죽을 죄인입니다. 호호호....
제 생각에는 영국에서 영어만 쓰시다가
마음껏 한글을 쓰실 기회가 이렇게 주어진 것이 너무 좋아서 호호호.... 하는 것 같습니다.
집채만한 전사가 검대신 기껏 물매돌을 써서 유머스럽게 마감처리했다고 표현하는 것도 격에 안맞다고 해서 어법 파괴로 오인되진 않을 지...
설마 그건 지나친 노파심이겠지요...
런던 "따위"와 같은 곳이 아닌 경상도 어느 "시골"에서 이준...
P.S.혹여 이 글의 제목 때문인데...뉴스앤조이에 글을 올리는 "관전평"이라는 인물과 저는 다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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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호호호....
권정희 2004-01-13 23:31:36, 조회 : 192, 추천 : 37
호호호....
런던"따위"에서 경상도"시골"로 보내는 웃음....호호호
ps. 영화 "글라디에이터"를 끝까지 다 보시고나 관전평을 하시는 것이....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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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시간이 없어서요.
이준 2004-01-13 23:47:24, 조회 : 190, 추천 : 44
>호호호....
>런던"따위"에서 경상도"시골"로 보내는 웃음....호호호
>ps. 영화 "글라디에이터"를 끝까지 다 보시고나 관전평을 하시는 것이....호호호
->런던에선 "글래디에이터"를 "글라디에이터"로 발음하는군요. 저로선, 남은 제 박사학위 논문 작업을 마저 마치려면 그런 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원작은 중간 쯤부터 밖에 못봤습니다. 줄거리는 전체적으로 대충 알고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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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애플이 아니고, 아플이라고도 하죠.
권정희 2004-01-14 00:07:34, 조회 : 189, 추천 : 41
예,
영국에서는 "애플"이 아니고 "아플"이라고도 한답니다. 영어본산인데, 미국에서는 오히려 영국발음을 하면 대접받는다는데...호호호...
박사논문 잘 마치기를 바랍니다. 실망스럽게도, 이 목사님께서 저와의 대화를 포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질문할 것들이 정말로 많은데, 첫번째 질문(믿음은 예수님이라는 말의 어법이 옳은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답변을 얻어낸 것 같지 않군요.
좋은 글 쓰시기를 바랍니다. 어법에 충실하지 않으면, 박사논문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는 무엇이 가장 의미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있는 논문이 되시길....기원합니다.(여기에는 호호호 안붙입니다).
런던"따위"의 시골에서 갱상도"시골"의 어느 분에게(멋진 분일 것 같군요)
ps. 저를 골리앗으로 비유하시는 것 같아서....감사? 호호호호호호....아님....진정한 검투사는 멋지게 퇴장한다구요....이목사님이 멋지게 퇴장하시니....멋진 검투사 없는 검투장에서 "글라이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을 음미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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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애플이 아니고, 아플이라고도 하죠.
이종분 (Homepage) 2004-01-14 10:11:50, 조회 : 210, 추천 : 33
참!
역시 실체가 드러나는군요
보세요 아줌마!
여기가 무슨 춤추는 무대인줄 아세요?
처음엔 좀 진지 하게 님의 글을 읽고 시간까지 투자해서 참 괜찮은 춤추는 여인이라 추측했죠
허나 점점 님의 비아냥거리는 글에 이렇게 나도 모르게 흥분되어지는거 ...
부디 그 박사 논문 주님앞에 내려 놓길 바래요
이곳에 회원이면 회원다운 최소한 예의는 있어야지 마치 춤추고 박수 못받아서 환장들린 사람 같아요
아울러 두아이 엄마(나도 그러한데) 로서 아이들 잘 길러요 박사논문땜시 너무 시간 뺏기지 말고 설라무네...
게시판에 호호호 로 답글 하게 되어 나도 기분은 안 좋아요 떨리기도 하고...
난 님보다 더못한 덜 평범한 주부지만 이곳 십자가 마을에서 감동과 은혜를 받는 죄인이라 그래요
만족하지 못한 답변 받는다고 이렇게 까지 요사스러울건 없잔우
우리 아줌마답게 그저 평범합시다
먼 고국에서 이질감 느끼는 아줌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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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아줌마끼리의 설전?
권정희 2004-01-14 15:21:24, 조회 : 219, 추천 : 53
고국의 아줌마에게,
사실, 제가 무용전공했걸랑요. 하지만, 박수 안쳐줘도 괜챦아요? 아줌마 보시라고 추는 춤 아니고, 사실, 제가 춤춘 것도 아니지요. 제가 '점점 비아냥"거리게 되는 연유를 아시려면 처음부터 글을 읽어보시고, 그 읽는 글의 행간 속에 감춰져 있을 저의 감정을 헤아려 보십시오. 제가 처음부터 비아냥거렸는지...그리고 이목사님이 과연 저에게 성의있게 답변을 해주셨는 지....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셨는 지...아니면 당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자꾸 하고 있는 것인 지...제가 질문하고 있는 그것에는 대답을 해주시지 않고, 자꾸 딴지만 거시는 것 같으니, 호호호....가 안나오겠어요?
우리 아이들 잘 키웁시다. 아이들이 지켜봅니다.
평범한 아줌마가 평범한 도시 런던 한구석에서
(런던은 미국에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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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아줌마끼리의 설전?
이종분 (Homepage) 2004-01-14 19:25:21, 조회 : 196, 추천 : 34
역쉬 춤추시는분이라 동작만큼 반응도 빠르시군요
님과 설전할만큼 주제도 못되고 특히 주변머리가 읍써요
다만 제3자 입장에서 질문과 답변을 읽었을 뿐 이며 이목사께서 충분한 답변을 한것으로 느꼈으므로
님의 답답한 마음만큼 나도 님이 답답 할 뿐이지요
두 아주매 글들을 주님이 보시고 지금이라도 토해버리싶으시겠지만
이 죄인은 수로보니게아의 여인처럼 주인상에서 버려진 부수라기라도 먹고싶은 심정이오
너무 이곳에다 시간 뺏기지 말아요 아이들이 보고 있다면서요....
외국생활만큼 힘든것이 없어요. 그래서 예민한걸 거예요 그치요?
몸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좋은 결과 있길 바래요
미국에 있는 런던에 계신 아줌마를 상상하는 아줌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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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떡부스러기라도 건질 수 있는 길
권정희 2004-01-15 01:21:19, 조회 : 206, 추천 : 27
아줌마,
주님께서 토쳐내 버리고 싶은 것은,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한 것이라우.
주변머리가 "읍써"면 약이라도 사 드시구랴.
이곳에선 질문한 사람이 만족할 때까지 질문을 받은 사람이 해주는 것이 답변이라우. 나에게 답답하면 시원한 활명수나 켜들이시구랴.
남정네들 보는 데서, 머리 끄잡고 싸우는 꼴, 우습구랴. 아예, 설전에 올라오실라 하면, 준비 단단히 하구, 주변머리도 좀 키우시구랴.
난 이 글 쓰고나서 얘들 한글교육도 시킬 겸, 논리 훈련도 시킬 겸, 얘들에게 보여주는구랴. 아줌마도 그래 보시구랴.
외국생활때문에 예민해 졌다고 하는 아줌마의 주변머리 참 속알머리도 없수다.
다시 한 번 더 이목사님께 올린 질문글 처음 부터 읽어보시구랴. 그리고 이목사님 답변해 준 것과 나의 질문을 대조해 보시구랴. 나의 질문에 제대로 답변이 되었는 지...
아줌마 한 번 만나서 남정네들 하는 "쐬주" 한 잔 한 번 나누면, 아마도 많이 통할 것 같수다.호호호...여기서 말하는 "쐬주"가 무언지, 그 상징적 의미를 상상 좀 해주시구랴.
내가 언제 내가 "미국에 있는 런던"이라구 했수? "미국에도 런던이 있다"고 했을 뿐인데....
런던에 있다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 지, 그걸 두고 시비를 붙이는 지...어찌 그리 이목사님 닮아가우?
호호호....가 뭐가 그리 중요한 지...그걸 두고 시비하는 지....호호호
문제의 핵심을 보기 바라우. 그래야, 떡부스러기라도 먹을 수 있을 터라우.
내가 언제 박사공부하고 있다고 했수? 보실려면 문맥을 잘 보시구랴. 그래야...주변머리도 좀 생길 거라우.
호호호
권정희
걱정해 줘서 너무 고맙구먼유. 이곳에 들어와서 잠시 잠시 들리는 것은, 머리 식힐 겸이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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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떡부스러기라도 건질 수 있는 길
이종분 (Homepage) 2004-01-15 12:03:08, 조회 : 205, 추천 : 55
ㅋㅋㅋ
이크~~ 잘몬건드린거 같네
이젠 막가는구먼
마치 가면을 벗고 드러내는 본체....
님은 꼭 쐬주마시고나서 쓰는가벼
역쉬 춤꾼은 화끈혀 (다는 아니것지만)
덥거나 찬거하고는 틀린거 아쉬것쥐? 화끈한것이
여기가 무슨 태권도 띠 따는 도장인줄 아슈?
우리 그만 합시다 , 이곳 에 예의가 아녀 내가 님의글에 답글한건 미안하게 생각해요
소자한테 뭘그리 앙심을 품노?
근디 이곳에 후원은좀 하는겨?
당신질문받다 목사님 쉬지도 몬하것어, 님은 이곳에서 머리를 식힌다며?
더 사용하려면 우리 사용료 냅시다 왜냐면 내가 사실 한국에온지 두달됐는데 후원을 몬했어요
이제부터 할려구해
답장혀요
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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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이종분 대 권정희...호호호
권정희 2004-01-15 16:15:06, 조회 : 224, 추천 : 57
아줌마,
내가 막 가는 것 같이 보는구먼요. 아직 설전이 뭔가도 모르는 모양이구먼유.호호호...내가 막 갈려면 아직 많이 남았다우. 드러낼 본체도 없구요. "쐬주"의 상징적 의미도 모르는 것을 보니, 주변머리든 속알머리든 뭐든 필요한 모양이우. 빨강구두 신고 내 춤추는 모습 좀 볼라우? 브루스로 원하우...탱고로 원하우? 뜨거워 질려면, 열을 좀 더 내야겠수다. '앙심'같은 것 없수다.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호호호. 같은 물에서 놀다 보니, 닮아가는 꼴이 귀여워서...답글 성의있게 달아주면 후원할 생각도 쬐끔 있었는디...영...아줌마같은 사람의 후원으로 운영된다니....영 마음이 사라지고 있수다. 어차피 "자본시장과 자본의 축적정신이 깔려있"는 채로 운영되는 곳이 이곳 "십자가마을"임을 이목사님 당신께서 밝히셨으니...그렇게 "자본의 논리"를 따라서 이곳도 운영이 될 것이외다. 후원한다 했으니, 빨리 후원금 보내요. 호호호...나는 질문 올리는 것으로 이곳 들락 거리는 사람들...무관심한 부분에다 관심쓰게 할라우....답장 해 주든 지 말든지...편견갖지 말고 내 질문글들 잘 읽어보시라우. 답글 달든 지 말든지...
아줌마들 만세. 호호호....
권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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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제목을 보니 이해가 갑니다.
이준 2004-01-14 09:03:39, 조회 : 210, 추천 : 41
[re]애플이 아니고, 아플이라고도 하죠.
->제목을 보니 님께서도 "어법"을 좋아하시긴 하지만, 어법의 "달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제가 알기로는 "~라고도 하죠"라는 말 앞에는 "~라기도 하고"라는 표현이 오는 걸로 아는데요. 부정이 아니고 긍정 내지는 열거의 표현이 와야 하지요.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라고도 하죠"에서 "-도"를 빼야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 >영국에서는 "애플"이 아니고 "아플"이라고도 한답니다. 영어본산인데, 미국에서는 오히려 영국발음을 하면 대접받는다는데...호호호...
->본업은 학생들을 대하는 일이라 까다로운 phonics의 기초도 공부해야만 했던 저로선 나라별 발음 차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압니다. 따라서, 실은 글래디에이터의 런던식 발음을 몰라서 새삼스레 질문한 건 아니었지요.
님과 제가 서로 주고받고 있는 이 공간은 "질문답변" 게시판인데요. 새삼스럽게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뭔가를 두고서 이해하기 어려운 것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판이한 것처럼, 제가 불쑥 관전평을 통해 끼어든(?) 것도 님께서는 자신의 질문을 두고서 "질문하기"로 여기시겠지만, 제가 보기엔 "따지고 들기"로 밖에 보이질 않았거든요.
>박사논문 잘 마치기를 바랍니다. 실망스럽게도, 이 목사님께서 저와의 대화를 포기하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정말 실망스럽습니다. 질문할 것들이 정말로 많은데, 첫번째 질문(믿음은 예수님이라는 말의 어법이 옳은가?)에 대해서조차 제대로 답변을 얻어낸 것 같지 않군요.
->저는 개인적으로도 평소에 성경을 읽을 때 가졌던 의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국내에서 출간된 모든 국역본 성경들 가운데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역본들은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역본들을 아무리 보아도 어법 표현이 거기서부터 거기까지 더군요. 그 구절들에 대해선 어법 문제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언어학적으로가 아니라 신학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지요.
따라서, 어법 파괴와 관련하여 그동안 이 목사님으로선 님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여지의 답변을 제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드리면 제가 무슨 편가르기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여겨질 소지도 있겠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이 님의 주관에 맞겨야겠지요.
>좋은 글 쓰시기를 바랍니다. 어법에 충실하지 않으면, 박사논문은 무의미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는 무엇이 가장 의미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있는 논문이 되시길....기원합니다.(여기에는 호호호 안붙입니다).
->논문 작성에 있어서 어법의 문제는 과거 석사논문을 쓸 당시(아련한 기억으로 떠오르는데) 누구나 겪었겠지만, 기나긴 전쟁을 거쳐온 바 있기 때문에, 이미 각오하고 있는 부분이고...
어법에 충실함으로써 좋은(?) 논문이 나올 수 있을 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는 그것이 십자가의 복음 앞에서 무슨 의미 있는 일로 여기진 않습니다. 어차피 무엇을 해도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로는 학문이든, 기술공학이든, 신학이든, 생업에 충실하든, 그 무엇을 하든 불거져 나오는 것은 죄 밖에 더 있겠습니까. 표면적으로는 어법에 충실하여 세련된 작품이 나올지언정, 그 내막은 그저 학문 영역마저도 십자가 앞에서 그 죄성이 낱낱이 드러나게 됨을 확인하는 과정일 뿐이지요.
>런던"따위"의 시골에서 갱상도"시골"의 어느 분에게(멋진 분일 것 같군요)
->이 말씀을 드리는 지금에도 여전히 런던이라는 도시는 제게는 "그 따위"의 장소일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요. 런던이라...꼭 거기가 아니라도, 국외에 체류하고 있는 동포들로선 선교 아니면, 유학, 공무, 사업, 이민...뭐 이유가 거기서 거기까지 아니겠습니까.
제가 사는 시골도 대도시 생활권 안에 있어서 예전에 비해 갈수록 타락의 흔적이 역력해져 가지만(지구 곳곳에 안 그런 곳이 어디있겠습니까만), 지금 서울이 정치인들의 비리 사건으로 혼란스럽다면, 런던은 찰스 왕자의 다이애너 왕자비 살인 계획 의혹으로 시끄러운 걸로 알고 있고요. 요즘엔 그 명문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출신들이 번역한 제임스왕 성경 대신에 호그와트 출신들이 활약하는 마법사 시리즈가 빗자루를 타고 이 시골 구석의 코흘리개들에게도 날아와 읽혀지고 있는데요. 거기다 어제 이곳 자유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다룬 것처럼 반지원정대가 지구 곳곳을 누비면서 톨킨의 망령까지 설치고 다니고 있는 걸로 아는데...뭐 런던...별 볼 일 있는 곳입니까.
그 옛날 종교적 이해관계로 수없이 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흘린 곳(제가 소장하고 있는 존 폭스의 순교사라는 책에 그 적나라한 기록들이 소상이 나와 있더군요), 선조들의 피흘린 정신은 사라지고 그 대신 회교도들이 갈수록 득세하면서 국왕은 그 이교도들의 세금까지 챙겨 호령하는 곳, 오늘날 한 번 잘 살아보겠다고 "거기에 초중등교육의 질도 높고 명문대학들도 많다지..."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수없는 인생들이 부푼 꿈과 희망을 가지고 몰려드는 곳...사람 사는 곳은 여기나 거기나 별 차이 있겠습니까. 제가 사는 이 곳에서는 그런 걸 두고 나이드신 어른들께서는 이렇게들 표현하시지요. "통시(화장실을 가리키는 경상남도 사투리) 다른 데 없다카이..." 제 딴에는 뭐 이런 생각에서 런던을 " " 안에 묶어 두었던 것 같습니다.
>ps. 저를 골리앗으로 비유하시는 것 같아서....감사? 호호호호호호....아님....진정한 검투사는 멋지게 퇴장한다구요....이목사님이 멋지게 퇴장하시니....멋진 검투사 없는 검투장에서 "글라이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