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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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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법이 정확합니까? ] 2004-01-03묻고답하기히브리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법이 정확합니까? ] 2004-01-03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법이 정확합니까? 그리고....
권정희 2004-01-03 20:16:50, 조회 : 245, 추천 : 37

손목사님,

드디어 이곳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군요. 감사를 드리구요. 제가 서둘러 다시 보냈던 메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앞서 보냈던 메일을 통해서 드렸던 질문을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래에 복사해서 올립니다.

* * * * * *

안녕하세요.

저는, 친구에게 '십자가마을'홈페이지에 대한 소문을 듣고는 가입해서 허락을 받은 권정희라고 합니다. 이곳 저곳 살펴보는 중에, 과연 소문대로, 한국교회의 개혁문제에 관심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관심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정보들을 얻고 싶은 생각 때문에, 저도 질문을 할 수 있는 지 해서 아무리 저의 아뒤와 비밀번호를 입력해도 반복해서 나오는 말인 즉, '사용권한이 없다'는 말만 나오는군요.

가입허락을 해놓으시고는, 가입한 사람에게, 전혀 질문조차 할 수 없도록 프로그램해 놓았다고는 여겨지지가 않아서, 웹마스터담당자에게 억세스하려고 하니, 쉽게 작성할 수 있는 것이 영문프로그램이어서, 영문으로 질문을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조차도 아무 답변이 없어서, 고심하다가, 웹페이지주소를 복사해서 한글프로그램에서 편지를 쓰면 되겠구나 생각하고는 이렇게 다시 글을 올립니다.

귀 십자가마을 홈피에 회원으로 가입허락된 저로서도 전혀 질문할 수가 없습니까?

질문들이 참 많습니다만, 우선 최근의 자유게시판에 보면, 어느 분이 이근호목사님의 글을 인용하면서, "믿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하셔서 그 말을 좀 더 이해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목사님의 글을 너무 짧게 인용해서, 그 인용된 글로서도 분명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힘들군요. 저의 의문의 핵심은, "믿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도대체 국어문법상, 혹은 의미론적으로 가능한 표현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 혹은 믿음의 본질적인 대상, 믿음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동사(혹은 명사?)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이 어떻게 서로 대응될 수 있단 말인 지....문법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그 분의 글에 다른 분이 리플을 붙이기를 또한 공감한다고 서로의 공감을 나누고 있느니, 저로서는 그분들 간에 오고가는 언어의 '문법'을 이해할 수 없군요. 그래서 질문을 드립니다.

그 분은, "믿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면서 바로 이어서 말씀하시길, "그 분이 믿음이라고 믿습니다!"고 강조했습니다. 앞의 전제가 옳다면, 이 글을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습니다"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고, 그 분이 믿음이라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라는 말로도 이해됩니다. 저의 뜻은, 말이 이상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논리를 인정한다면 말이지요. 국어문법을 의도적으로 파괴하실려는 것이 아니실 터이라면...최소한 상식적인 어문법에 먼저 충실해야 할 텐데...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물론 이런 의문은 공감을 서로간에 나누시는 그 분들에 대해서 드리는 질문이라기 보다는, 이근호목사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의 인용된 글에 의하며, 분명하게 "히브리서에서 믿음이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의 내용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이다고 하시는 뜻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하니, 그 문장의 의미가 애매모호해집니다. 물론, "믿음이란 믿는 것이 아니고"라는 문장의 의미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믿음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마땅히 대조되어야 할 것이 대조되지 않은 채로, 국어문법을 파괴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여겨지는군요.

저의 의도는 이런 것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이근호목사님의 그 표현을 전체 맥락을 통해서 더 자세하게 알았으면 싶어서입니다. 다른 질문들도 많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먼저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타진한 뒤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여겨지면 또 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답변을 기다립니다.

멋진 새해출발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권정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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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법이 정확합니까? 그리고....
이근호 2004-01-03 21:06:45, 조회 : 283, 추천 : 37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에서

믿음은 곧 실상이며, 실상은 곧 예수님이기에, 믿음은 곧 예수님이 되는 겁니다.

즉 "믿음은 실상이 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이란, 실제하는 예수님의 세계가 이 세상에 접촉될 때는 '믿음'이라는 형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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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법이 정확합니까? 그리고....
정승연 2004-01-08 16:21:44, 조회 : 227, 추천 : 29

두 분의 대화에 행여 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러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국어의 어느 문법에 대비해도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 지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기에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러한 논쟁이 곧 잠잠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믿음을 논하건데,히브리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이해의 차원이 아니라 앎의 차원이라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식으로써 깨닫는 것이 아닌 성령의 계시로 알아지는 그런 것이지요.

그러므로 믿음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말미암는 선물이라고 봐야겠지요.

우리의 관계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0 - 14

목사님의 사역에 강한 성령의 능력이 함께하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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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정확하게 보셨군요. 바로 그것입니다....
권정희 2004-01-11 03:16:21, 조회 : 221, 추천 : 38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격려성 글 주시지 않아도, "국어의 어느 문법에 대비해도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가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큰 격려입니다. 이것을 이근호목사님이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주일간 무척 바빠서 이곳에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논쟁"이 생산적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일치되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귀하의 "성경은 세상 지식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 것에 대해서 저도 절대 공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국어문법이 무시되어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지요? 그런 말을 이근호목사님이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때로는 성령님께서 논쟁을 잠재우시기도 하지만, 때로는 논쟁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지요. 국어문법이 혼란이 되면 하나님의 그 질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요? 고린도전서2장을 영지주의식으로 이해하면 곤란하지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국어문법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그 문법을 통해서 당신의 진리를 증거하실 수가 있으신 분 아니시던가요?

하지만, 오늘은 여기서 그만...합니다.

다음 주일 월요일(한국에서는 화요일겠군요)이면 조금 저의 시간에 여유가 있어집니다. 대화를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논쟁"이 아니고, 저는 "대화"이고 싶고, "질의응답"이고 싶습니다. 제가 이 난을 이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럼...다시 뵙지요.

권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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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라는 어법이 정확합니까? 그리고....이근호 2004/01/03 37 284
[re] [re] 예수님으론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구요? 권정희 2004/01/04 22 278

예수님으론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구요?
권정희 2004-01-04 00:15:10, 조회 : 278, 추천 : 22

이목사님께 다시 드립니다.

시간을 내셔서 저의 우문에 간단하나마 답을 해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를 드리면서도, 솔직히 목사님의 답변에 만족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저 자신을 봅니다.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계속 질문할 수 밖에 없겠노라 생각했습니다. 혹시라도 저의 질문을 오해하지나 않으셨나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은, “믿음은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다”는 그 표현의 어법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의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선은 ‘문법’이 일치가 되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십자가마을’의 글들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개혁에 대한 관심들을 살피는 중, 그 관심들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고, 또한 그 관심들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여러 가지 질문들을 올리기 전에, 이 질문을 먼저 택한 것은, 목사님과 ‘십자가마을’의 ‘문법’을 이해해야만 저의 질문하는 시간과 관심이 허공을 치는 것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목사님께서는 “믿음은 실상이 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뜻으로 “믿음은 예수님”이라고 히브리서11:1을 인용하셔서 설명하셨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언뜻 보면 성경적인 것 같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듯 합니다만, 목사님의 논리에 뭔가 마음에 흡족치 않게 하는 석연챦음이 있음이 솔직한 저의 심정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고 성경해석에 있어서, 예수님이 차지하셔야 할 위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해석하시는 경향처럼, 모든 해석은 그리스도중심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리스도중심적 해석을 인정한다고 해서, 히브리서11장1절의 “실상”이라는 말을 곧장 “예수님”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억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군요. 오히려 이 구절에서의 “실상”이란, “바라는 것들을 확실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라고 여기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해석이 아니고 일종의 어법이고 문법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이냐고 질문하면서, 그 무엇이 “예수님”이라고 하면, 그것은 일종의 해석이겠지요. 문제는, 그리스도중심적인 해석은 “예수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삼위일체중심적인 해석은 “(삼위일체로서의)하나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믿음은 하나님이다”는 것을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조차 어법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이 “해석”에 관한 것이 아니고, “어법”에 관한 것임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만일 목사님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히브리서11장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말에 “예수님”이라는 말을 대입시켜 보면, 그 논리의 허구가 금방 지적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3절을 “예수님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라고 대입시켜 보았을 때 언뜻보면 그럴 듯 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이하의 모든 “믿음”들에도 마찬가지 인상을 받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39절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는 구절 말입니다. 대입시켜 볼까요? “이 사람들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가 됩니다. 만일, “믿음은 예수님이다”는 논리에 기초해서, 예수님이란 말을 믿음이란 말에 대응시켜 이런 구절을 용납하게 된다면, 이것은 히브리서11장의 논지를 크게 왜곡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으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는 셈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목사님께서 그렇게 보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법에 관해서 질문을 드리는 것입니다. 어법에 있어서 상호간 일치가 되는 바가 없으면, 마이동풍입니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는 것은, 한국교회의 보다 나은 개혁을 위해서, 우선은 어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일치되는 바를 형성해 가는 것이야말로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을 다시 한 번 더 재고해 보시길 부탁드려봅니다. 목사님께서도 저의 글에 답변해 주시면서 마지막에 말씀하시길, “히브리서에서의 믿음이란, 실제하는 예수님의 세계가 이 세상에 접촉될 때는 '믿음'이라는 형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하셔서, 목사님의 논리 자체에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시고 있으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저의 질문을 이젠 충분히 이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이다”는 논리를 목사님의 말에 대입시키면, 다음과 같은 억지글이 나와질 수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에서의 예수님이란, 실제하는 믿음의 세계가 이 세상에 접촉될 때는 ‘예수님’이라는 형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저의 질문에 좀 더 진지하게 대답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혹시 저의 표현이 지나친 바가 있다면, 곧 목사님의 사용하시는 언어들의 “문법”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그러하였다고 이해해 주시면 참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럼,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권정희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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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예수님으론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구요?
이근호 2004-01-04 09:18:58, 조회 : 274, 추천 : 34

히브리서11장 39절에 대입시켜 보세요.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라는 구절에다 말입니다.

“이 사람들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제가 주장하는 바입니다.

즉 구약 사람들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증거는 받았으나, 그 증거를 주신 예수님의 전부에 대해서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전혀 이상한 면이 없는데요?

의사소통보다 더 시급한 것은 성경을 이해하는 선입견 수정이라고 봅니다.

한국 교회 내에서 통하는 상식이 한국 교회의 이단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덧붙여서,

한국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냥 이단들입니다.

개혁되어서 바른 교회가 된 예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아예 개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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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우문현답?
권정희 2004-01-05 19:14:06, 조회 : 254, 추천 : 32

이목사님께,

저로선 목사님의 말씀들을 이해하고 싶어서 최선을 다해서 진지하게 질문을 드리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저의 질문을 너무 간단하게 취급하시는 것 같아서 섭섭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군요. 호호호…물론 답변의 길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깊이에 대해서 말이지요. 하지만, 답변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아직 완전히 실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다시 질문을 드려봅니다. 저도 우회적인 표현들은 되도록 제거하고 직접적이고 간단하게 질문드리겠습니다. 목사님께 그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첫째, 히브리서11:39의 나오는 ‘믿음”이란 말에 “예수님”을 대입해서 나오게 된 표현인, “구약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약속을 못받았다”는 말을, “그 증거를 주신 예수님의 전부에 대해서 아직 만나보지 못했던 것”을 뜻하노라고 부언하셨는데, 그렇다면, “구약사람들이 예수님으로 증거를 받았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 제가 질문하는 것은 신약성경을 통해서 계시되어진 “예수님”을 말합니다. 구약사람들이 가졌을 “메시야”라는 개념이나 “앞으로 오실 메시야”와 같은 개념과 “예수님”이란 말의 개념은 우선 구분해 보아야 할 것을 전제합니다. 비록 분리할 수 없는 개념이고, 우리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인 구약의 예언된 메시야는 신약의 “예수님”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두 개념이 일치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질문의 의미를 좀더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다음의 어법을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으)로”라는 “명사 아래에 붙여 사용하는 부사격 조사”의 용법에는, 1)방향,2)원인,이유, 3)재료,연장, 방편, 4)신분,자격,5)작용한 결과, 그리고 6)한정된 시간(때)를 나타내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라는 표현 속의 “...으로”는 위의 여섯 개 용법 중에 무엇을 나타냅니까? 위의 여섯 개 외의 다른 용법이 또 있습니까? 목사님께서는 어떤 용법을 염두에 두시고, “믿음”라는 말 대신에 '예수님'이란 말을 넣어서, “구약사람들은 예수님으로 증거를 받았지만, 예수님으로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보시는 지요? 위의 여섯 가지 용법을 고려할 때, '으로'라는 말을 "대해서"로 해석할 근거가 무엇입니까? 과연, 이 "예수님으로"라는말로, 구약사람들이 예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 해석이 타당한가요? 이 구절의 “으로”를 “대해서”로 해석한다면, “믿음으로”라는 말도 “믿음에 대해서”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구약사람들은 “믿음에 대해서” 증거는 받았는데, “ 믿음에 대해서” 약속은 받지 못하였다는 해석도 가능합니까? 이상하지 않다고 하시는 것이 참 이상하군요.]

둘째, “한국교회내에서 통하는 상식이 한국교회의 이단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고 하셨는데,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귀를 닦고 듣겠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상식을 초월하는 것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상식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질문합니다. 이런 전제에 문제가 있습니까? “한국교회 내에서 통하는 상식”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저는 한국을 떠난 지 7년이 되어갑니다. 7년 동안 많이 변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보지만, 목사님의 말을 못알아 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서 감히 질문을 드립니다.

셋째, “한국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고 그냥 이단들”이라고 하셨는데, 이 표현에 나타나는 “한국교회”는 어떤 교회를 말합니까? 특정한 어떤 한국교회입니까?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한국의 모든 교회”를 의미합니까? “특정한 어떤 한국교회”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교회를 말합니까? “한국의 모든 교회”라면, 목사님께서 섬기시는 “우리교회”나 이 홈페이지를 담당하시는 손목사님의 “주안교회”는 “한국교회” 속에 포함되지 않습니까? “우리교회”나 “주안교회”는 “한국교회”가 아닙니까? “우리교회”나 “주안교회”도 “이단”이란 뜻입니까? “우리교회”나 “주안교회”는 “개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교회”입니까?

넷째, “개혁되어서 바른 교회가 된 예가 없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개혁을 위한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뜻입니까? 역사상 있었던 “종교개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이 주장하는 “개혁되었으므로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구호는 불필요한 헛구호입니까? 칼빈의 “유형교회”(visible Church)와 “무형교회”(invisible Church)의 구분을 염두에 두시면서도 “교회는 아예 개혁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다”고 하시는 것입니까?

다시 한 번 강조해서 말씀드립니다만, 저의 질문이 “어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에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본질”들에 대한 질문들은 아직 많이 남겨두었습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할 때를 위해서 말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선입견의 수정을 위해서” 의사소통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는군요. 저의 선입견을 수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혹시라도 목사님께서 가지고 계실 지 모르는 선입견도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모든 인생은 죄인인 지라, 선입견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하나님의 의사소통인 계시로서의 “성경” 앞에 이목사님만은 예외라고 생각하지 않을 줄로 생각합니다.

저가 이런 질문들을 드리는 이유는, 저의 선입견을 발견하고 수정해 갔으면 하는 노력이라고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답변을 기다립니다.

권 정희

ps. 간단히 드릴려고 했던 질문이 다시 길어졌군요. 호호호. 제가 질문이 많은 사람이어서 Dr.Q라고들 다른 사람들이 놀려대곤 합니다.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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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우문현답?
이근호 2004-01-05 20:14:32, 조회 : 266, 추천 : 28

1. 예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0-11 내용과 유사한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권정희 씨에게 회신을 받았지만 직접 만나보지는 못한 경우와 같습니다.

2. 한국 교회 내에 통하는 모든 상식은 교회 유지와 존립과 최종 연줄이 닿아져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회 부흥에 대한 세미나를 열고, 같은 시간에 그 근처에서 삼위일체의 성립 경위에 대해서 세미나가 열린다면 말할 것도 없이 교회 부흥 세미나에 사람들이 몰리는 실정입니다.

또한 설령 삼위일체 세미나라고 할지라도 교회 운영과 관련두고서 이해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들이 제가 보기에는 진리 자체를 모독하는 이단적 행위로 보이는 겁니다.

3. 모든 교회는 이단일 수 있으며 이단이 아닐 가능성을 갖고 있는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점을 명확히 해주어야,

참된 교회란 주님의 손에서 결정난다는 것을 제대로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몇 % 교회가 이단 아니라든지, 특정 교회는 덜 이단적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주님이 생각하는 교회상에서 먼 이단적 사고방식입니다.

4. 인간은 불필요하냐 필요하냐를 따지면서 행위에 나서는 존재가 아니라 욕망대로 터져 나오는 존재입니다. 답답하면 그것이 행위로 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긍정한다는 거지요.

교회 개혁 노력도 그런 행위의 일종이라고 간주됩니다.

남들이 "당신은 한국 교회 개혁을 위하여 열심히 애쓰고 있네요"라고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상관없이지만 만약에 본인이 교회 개혁에 노림수를 갖고 있다면 교회관에서 대해서 새롭게 정립해야만 합니다.

성경에서의 교회란 개혁해서 개선되어가는 미완성적 관계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주창하는 자들은, 역사관에 대해서 공부를 새로해야 될 사람입니다.

역사란 현재 자신이 몸이 재구성해 내는 해석된 작품이요 환상의 일종입니다.

교회사는 사실 전체가 범죄사입니다. 교회사 뿐만 아니라 일반 역사가 다 그러합니다.

은혜의 우발성으로 인해 교회는 여전히 오늘날에도 존재할 뿐입니다.

인간이 한 것이 죄짓는 뿐이었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루터와 칼빈이 어떤 죄를 지었기에 하나님께서 은혜가 개입되었는가를 조사하는 것 분입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칼빈의 교회관입니다.

세상에 무슨 교회가 무형교회, 유형교회로 구분됩니까? 성경에서는 그냥 교회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언약적으로 교회를 볼 줄 모르고 그 당시 민중들이 이해할 만한 교회관과 철학관을 염두에 둔 아이디어에 불과합니다.

(보다 상세한 것은 '대장간에서 나온 '교회를 넘어서'라는 책에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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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늘어나는 의문들
권정희 2004-01-05 22:30:14, 조회 : 250, 추천 : 38

목사님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외국에 나와 있는 지 오래여서 대장간의 “교회를 넘어서"라는 책을 구해 볼 수 없어서,차츰 기회가 되는 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서 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쏟아나는 질문들을 주체할 수 없어,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가지게 되는 의문들을 바로 적어 올립니다. 혹시, 표현상 미진한 바가 있다면, 저도 목사님처럼, 되도록 짧은 말로 글을 적으면서, 신속하게 대화를 하려다 보니, 예의상 결례가 되는 표현들이 있을까 염려가 됩니다.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벌써, 글이 길어져 버렸군요.

1. “예수님”과 “그리스도”를 개념적인 차원에서는 구분하는 것을 전제한다고 말씀드렸는데, 그것을 목사님께는 무시하시는군요. 베드로전서1:10-11에는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개념이 나올 뿐 “예수님”이란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생각했을 “그리스도”(메시야”란 개념과 신약성경의 “예수님”이라는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지요.

어째튼, “예수님으로”가 어떻게 “예수님으로부터”라는 뜻으로 전이될 수 있습니까? “으로”의 용법에 합당한가요? 구약사람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서신”(증거?)은 받았는데, 직접 만나지는못했다(약속은 못받았다?)는 말은 그럴 듯 해 보이는 비유지만, 그 비유가 지금의 논의에 적절하게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로부터 서신을 받았지만,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다는 말이 구약사람들에게 비유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예수님으로 약속을 받지 못했다는 말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라는 말이 어떻게 국어문법상 “예수님으로부터”라는 뜻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까? “으로”의 용법에 있어서 몇번째입니까? “으로”라는 말의 부사적 용법에 출처, 기원을 의미를 가진, “으로부터”라는 뜻을 담았다고 보는 것이 과연 국어문법에 저촉이 되지 않습니까?

2. 한국교회의 모든 상식은 교회유지와 존립과 최종 연줄이 닿아있다고 하시는데, 절대적 표현인 “모든 상식”이란 말을 쓰시는 것이 피조물인 우리 인생으로서 가능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판단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목사님께서 그렇게 “모든”이라는 말을 주저없이 사용하고 계시는지요? 하나님 대신해서 그런 판단을 하시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3. 교회부흥에 대한 “모든” 동기가 “진리자체를 모독하는 이단적 행위”입니까? 삼위일체에 대한 세미나에 모이는 사람들의 동기조차 교회부흥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시는 목사님의 그 판단이 과연 정당하십니까? 참된 동기, 주의 교회와 나라가 “부흥”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이 때로는 자신의 성공과 물질적 탐욕에 의한 것일 수 있다 하더라도, 교회부흥의 “모든 동기”를 그렇게 매도하는 것이 성경적입니까? 어떻게 성경적이라고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있습니까? 한국의 “부흥과 개혁”사라는 출판사도 “이단”입니까?

3. 모든 한국교회는 이단이다는 선언과 이단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는 표현상의 큰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지상교회는 이단으로 전락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목사님께서 “이단이 아닐 가능성이 없는 교회는 이 세상이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앞에서 주신 글에, “교회란 개혁할 필요가 없이 완전하다”고 하신 말씀과는 서로간에 모순이 되지 않습니까? 한 입으로 두 말씀을 하시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주안교회”, “우리교회”도 이단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말씀입니까?

4. 이단이냐 아니냐는 것을 구분하려고 하는 것이 어떻게 “이단적” 사고입니까?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려고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관심은 이단적 사고였습니까?

5.교회개혁의 노력이 욕망대로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그렇다면, 욕망대로 터져나오는 인간의 행위와 필요/불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행위가 어떻게 대립만된다고 여기십니까? 인간의 행위는 둘 다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개혁을 논하면서 어떤 노림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의 필요와 하나님의 나라의 필요나 하나님의 필요를 생각하는 중에 터져나오는 함성일 수 있다면, 그것이 욕망대로 터져나오는 행위라고만 볼 수 있습니까? 구약선지자들의 말들이 구약교회에 대한 개선을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 아니었던가요? 성령의 감동과 인간의 의식이 상호대립되어서만 존재합니까? 성령님이 인간의 의식/무의식(나아가서 전인격)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면, 목사님의 말씀과 신비주의의 주장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란 개혁하고 개선되어 완성되어가는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요? 그것도 일종의 교회개혁과 성화를 위한 노력이 아닌가요? 고린도 “교회”와 그 “성도”들은 개혁될 필요도, 성화될 필요도 없었었나요?

6. 역사관을 새롭게 공부해야 할 사람들로서의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주창하는 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합니까? 칼빈을 예로 들었는데, 칼빈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들, 루터, 쯔빙글리,부처 등등 그 이후의 모든 청교도들,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드 등 모든 사람들을 포함합니까?

7. 역사란 해석이다란 목사님의 말씀을 그래도 인정합니다. 이목사의 역사관도 일종의 해석이라는 말씀이지요. 목사님이 언약적으로 교회를 보는 그 역사관조차도말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언약적으로 교회를 보지 못했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칼빈만큼 언약을 중요하게 생각한 신학자가 누구입니까? 칼빈의 언약과 다른 이목사님의 언약관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답글 기다립니다.

권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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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늘어나는 의문들
이근호 2004-01-06 07:12:49, 조회 : 228, 추천 : 31

1. 신약적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과 그리스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다른 그리스도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개념을 소개해서 그것으로 출발해서 예수님과 매취시켜 복음을 증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애초부터 실패로 끝납니다.

'예수님으로'란 말만해도 문맥상 행위의 주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으로부터”라는 표현으로 등장해 버리면 히브리서에서 '믿음'이 갖는 본래의 쓰임새가 혼란을 야기합니다.
히브리서에서 로마서에서 믿음이란, 기존의 믿음이라는 의미를 사용하면서도 도리어 그 믿음의 한계를 드러내는데 그 드러내는 방식이 기존의 용법으로 다 담아낼 수 없는 식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2. 하나님만 사용하는 특정 용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이라는 용어를 비롯해서 모든 용어가 다 복음 증거를 위하여 마음껏 사용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복음 증거자나 성도는 이 세상에 대해서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편에 서서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과 복음에 대한 정확한 본질도 모르는채 증거하겠다고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얼마든지, '모든'이라는 말을 자신 만만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
>3. 제 답변을 건성으로 들으셨습니다.

특정 집단이나 교회만은 옳다는 뜻에서 이단과 이단 아님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하면, 성도란 성경 말씀을 의지해서 살아야지 눈에 보이는 특정 조직에 의미를 두는 것은 마치 쉴새없이 변화하는데 신앙의 근거는 두는 셈이 되기 때문이죠.
우리교회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항시 이단일 가능성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성령의 인도함이 없이는 곧장 이단으로 추락합니다.
그리고 반대의 경우도 해당됩니다. 즉 아무리 이단으로 살다가도 성령의 인도함이 있다면 참된 성도로서 언제든지 변화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인간도 관여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 소관입니다. 이것을 증거하는 것이 성도의 할 일입니다.

>4. 종교개혁자들은 그 시대의 사람일 뿐입니다. 마치 현대과학자와 고대 과학자들의 수학 실력을 대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기정 선수의 마라톤 기록과 이봉주 선수의 마라톤 기록을 비교해보세요. 손기정 선수가 한창 뒤띨어집니다.

칼빈과 루터는 그 나름대로 그 시대 사람에게만 의의가 있었지요. 칼빈의 언약론이라는 것이 사실 성경에서 나온 언약론이 아니라 유대교적 선택론 입장에서 서 있는 언약론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대 사람들이 집착해 있었던 세계관관 사상관 자체를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에부터 내려오는 어거스틴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고, 어거스틴은 어쩔 수 없이 플라톤과 플로티노스 사상을 답습했습니다. 그리고 플로티노스는 파르메르데스의 존재론에서 영향을 입었습니다.
그리나 지금은 메스메디어 시대입니다. 인간론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달라진다는 것은 곧 죄의 한 속성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상이 변해도 십자가의 복음은 그대로 임을 성령받은 사람만이 인정할 수 있습니다.

참된 교회와 거짓된 교회를 구분하고자 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 모든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긍정할 하등의 근거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구분이 복음적이 아니라 교회를 지탱하려는 종교적 집념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
>5. 인간이 행위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나오는 겁니다.
십자가 복음에 준해서 볼 때, 인간의 모든 가능성은 예수님이 홀로 이루어내신 의로움에 대해서 도전하는 경향을 띠게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형적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구약 교회를 개선하려고 한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직 일관되게 자신의 맹세대로만 성취할 뿐임"을 증거했던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은 철저하게 십자가 영으로만 작용합니다. 즉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만 하십니다. 이러한 책망은 세상에 대한 심판 개시를 뜻합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행함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의는 도출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는 영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참된 교회는 오직 복음에 근거해서 출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2:2에 보면, "나는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화'라는 것은 성경적 견해가 아니라 헬라적 견해에 불과합니다.

'성화'는 없습니다. 오직 '거룩됨' 뿐입니다.

>6. 종교개혁의 후예라는 표현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귀하께서 하셨습니다.

그런 패가름에 해당되는 용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
>7. 저의 언약관은 십자가만을 목표로 하여 십자가만을 하나님의 최종 새언약으로 계시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언약관입니다. 따라서 그 언약관 속에는 이미 십자가의 의의, 즉 죄과 은혜의 작용이 이미 구약 때부터 계속 작용했음을 드러내는 식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질문을 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이 질문은 이 싸이트에 있는 저의 여러가지 글들을 일단 읽어 보시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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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조금만 더 인내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권정희 2004-01-06 10:00:50, 조회 : 222, 추천 : 31

목사님께,

질문하시기가 번거로우시면 사이트의 어느 부분에 있다고만 지적해 주셔도 됩니다. 이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모든 자료를 다 읽어보고서야 질문할 수 있겠노라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그리고 이 사이트에서 읽을 자료가 없는 저의 질문에만 답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추천해주시는 자료들을 읽어볼 것을 약속합니다. 하여, 다음과 같이 다시 질문을 드립니다.

1-1.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심”을 인정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리스도이신 분이 없음도 고백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그리스도”라는 개념 자체가 일치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의미론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전제를 인정해 주지 않으시니깐 영 대화가 안되는 느낌이군요. 애당초의 질문에 전혀 답변을 얻은 느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는 고백을 같이 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개념상의 이해에 차이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안타깝군요.

1-2. “믿음으로”라는 말과 “예수님으로”라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까? 문맥상의 주체는 예수님이 아니고, 구약사람들입니다. 기본적인 구문론에 해당되지요. 기본어법에서 일치가 되지 않으니, 영어를 처음 배울 때의 소감이 느껴집니다. “만약 ‘예수님으로부터’라는 표현으로 등장해 버리면 히브리서에서 '믿음'이 갖는 본래의 쓰임새가 혼란을 야기”한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믿음은 예수님”이라는 등식이 국어문법상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느껴지는군요. 히브리서와 로마서 등에서, 믿음이란 말이 기존의 용법으로 담아낼 수 없는 방식으로 사용되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을, 국어문법에서 “으로”라는 말을 “으로부터”라는 뜻이 있는 것으로 사용하는데 적용하는 것은, 너무 지나친 적용이 아닐까요?

2. “모든” 용어가 다 복음증거를 위하여 마음껏 사용해야만 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모든”이라는 말이 한국교회의 “모든” 상식을 단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언어의 남용이요, 오용이 되지요. 저는 “하나님께서만 쓰는 용어가 있다 혹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질문을 건성으로 들으셨군요. 저는 한국교회의 모든 상식이 이단적이라는 하는 표현의 “모든”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판단”이지 않겠느냐고 여쭸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어떤 용어라도 복음증거를 위하여 마음껏 사용할 수 있으므로, “모든”이라는 말도 자신만만하게 사용될 수 있고, 그래서, 한국교회의 “모든 상식”은 결국 이단적이라고 하시는군요. 논리에 날개를 달으셨군요. 호호호…. 하나님 입장에서 하나님 편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은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이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그것도, “당당하게” 사용해도 되는 것인 지 의문이 드는군요. “모든”이라는 말로 한국교회의 “모든” 상식을 이단이라고 몰아부쳐야만, 진리에 대한 확신과 복음의 정확한 본질을 아는 것입니까? 참으로 진리에 대하여 확신을 하는 사람,복음의 정확한 본질을 아는 사람은, 오히려 겸손한 사람 아닐까요? 자신이 오히려 이단이 아닐까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필 줄 아는 자, 그렇게 조나단 에드워드는 살았다고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조나단 에드워드가 복음에 확신을 목사님 보다 덜 가졌다고 보십니까?

3-1. 오히려 목사님께서 저의 질문을 건성으로 보시는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저의 질문의 요지는 특정집단의 교회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특정이름을 거론한 것은 예를 든 것 뿐입니다. 그 예를 통해서, 목사님의 단정적인 표현 속에 담겨져 있는 문제점을 보고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 싶어서 질문을 드린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단이라고 하니, 그 한국교회 속에 있는 어떤 교회도 이단이라고 보느냐는 것이 저의 질문이었습니다. 구체적인 어떤 교회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 구체적인 교회들로 모여진 집합체로서의 한국교회를 이단이라고 단정적으로 말 할 수 있는지요? 목사님의 논리는, 꼭 모든 인류는 사랑하노라고 하면서, 바로 옆집에 있는 이웃은 사랑할 수 없노라고 하는 논리와도 비슷하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도 결국 어법에 관한 질문임을 고려해 주십시오. 제가 목사님의 답변을 건성으로 읽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세번째 질문을 다시 읽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3-2. “성도란 성경말씀에 의지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과 구체적인 교회조직의 성경말씀에 일치되는 지의 여부에 대한 관심이 상호대립되는 것일까요? 어느 구체적인 교회의 이단성유무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쉴 새 없이 변화하는데 신앙의 근거를 두는 것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그 이단성유무에 대한 관심이 성경말씀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이단성유무에 대한 관심 또한 “성경말씀에 의지해서 살게 되는” 패턴 중의 하나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그런 관심만 가지고 있다면 문제지만, 그런 관심 자체가 왜 항상 부정적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나 이단일 가능성이 있고, 어떤 이단이라도 교회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니, 결국은 “우리교회”도 이단일 가능성이 있고, 이단인 “한국교회”도 이단이 아니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시는가요? 물론, 예수님 소관이지요. 이것이 저리되고, 저것이 이리되고….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4. 결국 참교회와 거짓교회를 구분하려고 했던 종교개혁자들(칼빈과 루터 등)의 노력은, 인간의 보편적 욕구에 불과하다는 말씀이군요. 칼빈과 루터 등이 종교적 집념을 가지고 그랬다구요? 그 종교개혁자들이 참교회 거짓교회를 구분하려고 하면서, 그 근거 중의 하나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의 그런 노력이 종교적 집념, 인간의 타락한 보편적 욕구일 뿐이라면, 이 바울사도의 말씀도 타락한 인간의 보편적 욕구요, 종교적 집념입니까? “그 구분이 복음적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보아서, 복음적인 구분이 있고, 종교적 집념에 가까운 구분이 있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럼, 종교개혁자들의 구분은 종교적 집념에 가까운 것이고, 이목사님의 구분은 복음적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을 드린다고 해서, 칼빈이나 루터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나 루터가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이목사님의 언약관 조차도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지요. 개혁자들도 자신들의 신앙과 신학이 성경말씀에 근거했노라고 확신했습니다. 목사님께서도 “아무리 사상이 변하여도 십자가의 복음은 그대로 임을 성령받은 사람만이 인정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확신을 가지셔도, 개혁자들의 사상이 그 시대의 철학의 사조에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목사님의 그 확신도 이 시대의 사조에 영향을 받았음에 분명할 것입니다. 목사님의 “십자가의 복음”만이 성경적이라고 보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한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쟎습니까? 이것을 목사님만은 예외라면서 부인하십니까? 목사님은 어떤 사조에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몇 번의 질의응답과정을 통해서 감이 오는 바가 있습니다만, 몇 번만 더 주고 받으면 그 윤곽이 파악될 것 같군요. 스스로가 영향받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용이한 법이쟎습니까?

5-1.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통해서 참된 교회는 오직 복음에 근거해서 출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면, 고린도교회의 어떤 사람들이 ‘참된 교회는 오직 복음에 근거해서 출현된다는 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들이 “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그들도 “개혁”을 필요로 했던 것이 아닐까요?
5-2.“성화”와 “거룩됨”을 구분하시는 근거가 무엇인지요? 결국 정의하기 나름이쟎는가요? “어법”의 통일이 우선되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쟎습니까? “성화”는 없고, “거룩됨”만 있다고 하는 것도 일종의 “성화론”이지요. 교회사에 여러가지 성화론들이 등장했는데, 이목사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실 지 모르지만, 이목사님의 성화론도 그것들 중의 하나이지요. 교회사에 대해서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의 영향을 받았느냐 파악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해아래 새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5-3. 인간의 행함과 하나님의 의를 대립시키실려고 하는 목사님의 의도는 이해할 만합니다. 율법주의적 사고를 경계하시기 위해서이시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무능한 인간에게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주입하시고, 그 의가 발현될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그 의가 표현될 때에,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행동을 사용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다면,인간은 마치 이성없는 짐승이나, 기계와 같아져 버리지 않습니까?

6. “종교개혁의 후예”라는 표현에 대해서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칼빈이 언약이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보지 못했다는 말씀을 목사님께서 하셨기 때문에, 그 종교개혁자 칼빈의 정신을 이어갈려고 하는 사람들 모두가 역사관을 새롭게 공부해야 할 사람이냐는 뜻으로 질문했더랬습니다. 특별히 칼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중에 스코틀란드의 “covenanters”들은 “언약”개념을 아주 소중하게 여겨서, 사실은,신학적인 문제를 야기시켜버리기도 했었지요. 이들은 “언약”이라는 개념으로 인류역사를 조명했었습니다. 이들조차도 목사님 말씀대로 역사관을 새롭게 공부해야 될 사람들입니까?

저도 솔직히 일종의 “패가름”은 참 싫어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름대로 질문을 하면서 목사님의 신학을, 혹은 신앙을 이해하려고 힘을 들이고 있습니다. 인내해 주시길 부탁드려봅니다. 목사님을 제명해버려서 "패가름"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먼저 목사님을 이해하고자 이렇게 애쓰고 있습니다.

7. “십자가만을 목표로 하여 십자가만을 하나님의 최종 새언약으로 계시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보는 것을 목사님의 언약관으로 삼으신다면, 칼빈의 언약관은 그렇지 않습니까? 칼빈은 십자가의 의, 즉 죄와 은혜의 작용이 이미 구약때부터 계속 작용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까? 스코틀란드의 “언약자들”, 네델란드의 “언약신학자들”, 미대륙의 청교도들중의 “연방주의자들”이 언약을 나름대로 그렇게 이해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신학이 그 시대의 철학의 영향을 입었었지요. 그것처럼 목사님의 언약관도 이 시대의 언약관에 영향을 입지 않았습니까? 매스미디어시대인 것을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이 인상적이군요. 이 시대는 포스터모던시대지요. 이전에는 “실체”를 강조했지만, 요즘엔 어디에서나 “관계성”을 강조합니다. 목사님의 언약개념도 결국은 이렇게 관계성을 강조하는 이 시대의 사조의 흐름에 영향을 입은 것이 아닐까요? 언제나 지나치면 오히려 부족한 법이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더 말씀드리지만, 저의 질문에 일일이 답해주시지 말고, 이 사이트의 어느 부분에 어느 글을 참고하라는 식으로 저의 붙여둔 번호에 따라서 표기해 주시는 식으로 대답해 주셔도 좋습니다. 일일이 제가 찾아 참고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실 수 없는 것에만 대답해 주십시오.

번거롭게 해드리는 것에 대해서 죄송한 마음입니다만, 답변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 없이 이 글을 제가 쓰고 있겠습니까?

기대하면서 기다리겠습니다.

권정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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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조금만 더 인내해 주시길 부탁드리면서...
이근호 2004-01-06 10:55:46, 조회 : 262, 추천 : 41

우선 [신학과 철학]이라는 코너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선택'을 읽고 라는 글이 있습니다. 손성식 목사님께서 저의 신학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시고 쓴 글입니다.
첫 화면에 보면 그 글이 나와있습니다.

1, 초대 교회 사도들은 이런 의미론적 차이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복음을 전했던 분들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라는 실존 인물과 메시야관을 전혀 인간의 지혜로 연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지요.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의견을 전부 추종해야 비로소 가능한 논리입니다.

>
>2. 구문론의 그 밑바탕에는 기호론적 원리가 작동합니다.
즉 그 어떤 언어이든 그 안에는 고정적 의미가 장착되지 않고 실리지도 않고, 그 서로 대치되는 가운데 그 문맥 현장에서 새로운 의미로 독자적으로 창출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건'으로서의 기호작용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 작용도 독자의 삶의 성향에 따라 개별적으로 가치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리고 독자의 '삶의 정황'이란 과거의 기억들이 욕구의 저장소에 담겨 무의식 속에서 형식와 내용을 세트로해서 내뱉아냅니다.

의미란, 자신의 욕구와 더불어 그 욕구를 방해하는 반대 성향의 가상 의미과 병행해서 배치하므로서 결정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에게 얻고자 하는 독자의 욕구는,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는 변명용으로 구문론으로 재구성해서 매미채 역할을 하면서 대기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향은 그 근본에 있어 자기 존재의 가치를 긍정하고 그 존재에서 행하는 행위를 인정하겠다는 쪼로 발산되기 때문에, 십자가 바탕위에 전개되는 성경 말씀은, 이러한 독자들의 존재 긍정을 고발하고 정죄하는 식으로 전개되기 마련입니다.

예를 들면, '믿음'에 대한 화용론에서 이상스럽게 성경에서는 일정하게 적용될 수가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 저자들이나 예수님께서 너무나도 황당하게 제멋대로 발언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그 최종적 의미를 실어서 증거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2. 제가 한국교회만을 단죄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즐기 전체를 단죄하고 정죄하는 겁니다.
복음 증거자는, 그 어느 현장에서도 예수님이 그 현장에 계시다는 입장에서 외쳐야 합니다.

사람들을 설득하는 식으로 복음을 증거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겸손'이라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자기 의'에 불과합니다.

"건방지게도 아직도 살아있구나. 고로 나는 죄인이다"라는 의식이 요구됩니다.

사람이 일단 살아있으니, 그 다음부터는 조심스럽게 바르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겸하여 나오게 마련입니다.

선악과 따먹어서 얻은 윤리 실력이 어디가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뜻은, 누구든지 살고자 하는 자는 곧 죄를 짓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인간치고 안 살아있는 인간 누가 있겠으며 일단 살아있는한 계속 안살고 싶어하는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말은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존재 자체를 죄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그의 사회윤리관에 큰 문제점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신대륙에서 새 국가 건설에 동원된 정치 제도에 대해서 호응하는 쪽으로 선회한 사람입니다. 그 시대의 인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고 그 외의 신학 수준이 오늘날에 뒤떨어집니다. 특히 예정론에 정리에 있어.

>3. 십자가를 증거하는 그 이상의 이웃 사랑은 없습니다.
>
4.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1:8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나' 라는 말을 해서 심지어 사도 바울 자신도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은 그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지금도 주님으로 살아계신 예수님의 고유의 영역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감히 어느 인간이나, 어느 교회가 자신의 존재성을 증거하려 합니까?

오직 성도가 증거할 것은 복음이지, 자신의 위치나 위상의 긍정적 태도가 아닙니다.

5. 성경 전체가 새언약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저의 확신입니다.

예를 들면, "저 여인은 저의 어머니이십니다"하고 소개하니,

어떤 분이 시비걸기를, "당신이 정신병자가 되어도 방금 그 발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하고 나옵니다.

이렇게 시비걸 것이 아니라, 과연 성경 전체가 새언약 중심으로 움직이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경영하시는지 파악해 보시고 혹시 다른 중심점을 찾아내었으면 그것을 남들에게 증거하면 될 문제입니다.

6. 교회라는 것을 고정적 개념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촛대를 옮기시는 주님의 취지에 어긋납니다.

그리고 고정적인 것을 십자가에 두게 되면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사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들 꾀더냐") 다른 개념은 상대적 개념으로 머물게 되고, 과연 교회 다움이냐 아니냐는 절대적 기준인 십자가 복음 정신으로 정정할 수도 있고 평가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로 두 주인을 섬기는 사고구조가 되지 못합니다. 최우선이고 절대적인 것으 그 누구나 오직 하나만 최종 달랑 남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귀하는, "자신의 존재함'에 두는 것 같습니다.

7. 성화란, "계속해서 조금씩 더 거룩해질 필요가 있음"입니다. 왜냐하면 화(化)라는 용어가 변화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죠.
하지만 '거룩됨'이란. 이미 요지부동 더 발전하거나 더 전진할 필요조차 없는 상태를 말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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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57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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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