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에게 자위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야 될까요? ] 2003-11-26
[젊은이들에게 자위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야 될까요? ] 2003-11-26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목사님, 젊은이들에게
이석규 2003-11-26 15:58:18, 조회 : 351, 추천 : 39
자위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쳐야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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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자위 행위는 습관입니다.
이근호 2003-11-27 08:22:13, 조회 : 435, 추천 : 48
>젊은이나 늙은이나 다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는 다른 중요한 사명이나 할 일이 별로 없기에 그런 감각적인 것에 치중하고 몰두하는 경향이 있고,
늙은이들은 많이 해봤어 시들해져 있다는 차이 뿐입니다.
따라서 자위행위는 끊을 도리는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가져갑니다. (단 한 번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애초부터 그것이 뭔지 모르기에 예외입니다.)
젊은이들은 보다 더 치중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기 일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위행위로 얻을 수 있는 쾌감은 딴 곳으로 차츰 돌리는 요령이 필요합니다.
자위행위가 한 것이 죄가 아니라
그 행위에다 온갖 즐거움을 기대하는 것이 죄이며, 더 큰 위험성은
자위행위를 끊는 것을 성령의 능력인양 여겨서 그것이 가끔 절제하는 것을 자기 의로움으로 축적하는데 있습니다.
자위행위 뿐만 아니라 다른 습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니, 아예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 마귀의 시험에 들지 않는 방법입니다.
거리에 침 뱉지 마세요. 벌금 뭅니다.
그러나 정말 다급하게 입속에 가래를 있을 때는 요령껏 뱉으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다른 죄와 다른 특수한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마시요.
복음의 능력을 작게 생각하는 것이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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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있습니다.
김지예 2003-12-02 12:02:35, 조회 : 308, 추천 : 44
이곳에 가입해서 많은 분들의 글을 보면서 도움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말씀을 사모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너무 부족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여기저기 뒤적거려 보지만 시원치 않은 해석들만 보게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가인이 만난 사람에 대해서인데 얼마전 하나님의 교회라고하는 사람들도 와서 하는 말이 당연히 아담은 최초의 인간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가인이 만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예를 들면서 말이죠.
물론 그 사람들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부했지만 왜 아닌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했습니다.
결국 떠밀다 시피해서 보내긴 했지만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지금까지 가인이 만난 사람들에 대한 해석에 대해서는 몇 가지 본 적이 있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자세히 해석해 줄 수는 없나해서 이렇게 창피를 무릅쓰고 질문합니다.
여기에는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은데 가능하시면 각자가 깨달은 바를, 또는 남들이 물어 볼 때 어떻게 대답해 주시는지에 대해서 올려주시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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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질문있습니다.
이근호 2003-12-02 17:14:37, 조회 : 343, 추천 : 38
긴 긴 세월이 흘려 갔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의 연세가 930세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경 시대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그러니까 기원전 약 1만년 전의 인구를 약 400만 명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매 1000년 마다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납니다.
기원전 1,000년에는 전 세계 인구가 약 5000만 명입니다.
인구는 그 후 약 500년 만에 두 배로 불어납니다.
기원전 500년 경에는 약 1억 명이 됩니다.
중국 한나라와 로마제국이 전성기를 이루던 서기 200년 경에는 인구가 2억 명으로 늘어납니다.
따라서 처음 농경 시대를 시작했던 시절에는 농경지가 제한되어 있기에 가인이 얼마든지 타지역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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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감사합니다.
김지예 2003-12-04 07:18:06, 조회 : 807, 추천 : 42
어리석은 질문에 답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목사님 글을 제가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인류의 역사를 1만년 전 쯤으로 계산했을 때 그때의 인구가 약 400만 명 쯤 되었을 것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인류의 역사를 1만년으로 잡는 다는 얘기를 처음 들어봐서 그런가봐여.
아담과 가인의 때가 1만년 전이라고 하신 근거를 어디에 두고 계신지를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바쁘시면 안 해주셔도 되구요. ^^*
진짜 몰라서 그런거니까 오해는 하지 말아주세요.
목사님 힘내세요. 건강하시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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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감사합니다.
이근호 2003-12-04 13:59:07, 조회 : 491, 추천 : 43
성경에 나와있는 연대를 쭉 이으면 대략 기원전 6000년에서 7000년 가량됩니다.
거기에다 생략된 부분을 약 3000년 정도 보태면 약 기원전 1만년 정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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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있습니다. 김지예 2003/12/02 44 309
[re] 가인이 만날 사람 이름은 몰라도...
이희진 (Homepage) 2003-12-03 11:43:49, 조회 : 321, 추천 : 39
성경을 읽다 보면 모순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들이 해결되어지므로 인해 은혜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인이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저도 고민을 많이 했던 부분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인이 만날 사람에 대해서 기록할 만큼 한가한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깨닫게 됩니다. 성경의 그 역동적인 순간 순간들은 오직 예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 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성경을 이해한다면 아담이 최초의 인간이 아니니 하는 이중아담설이라든가 고등비평가들의 짜깁기설 같은 어설프고도 어리석은 주장은 감히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인이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사실 어려운 부분은 아닙니다. 그 부분에 대한 의문을 푸는데 촛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부분을 통해 어떠한 것을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우선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중에 하나는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되 뱃속의 태아를 만드신 것도 아니요, 젖먹이 아이로 창조하신 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동물과 새와 고기들에게 이름을 지어주며 하늘의 별들에게도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성인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죠. 이것은 다른 의미로 아담은 지음 받자마자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상태로 지음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가인이 몇 살 때 아벨을 죽였는지는 나와 있지 않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담이 가인과 아벨만을 낳은 상태가 아니며 가인과 아벨은 각자 농사와 양치는 일을 할 수 있는 정도의 나이였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최소한 몇 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그 몇 십 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 지를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창세기 5장을 보겠습니다.
1: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지으시되
2: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의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3: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4: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5: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6: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8:그가 구백십이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아담이 130세에 셋을 낳았다고 했는데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아담은 셋처럼 갓난아기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한 살은 우리의 한 살과 다르겠지요. 아담이 셋을 낳기 전까지 그러니까 130살 전까지 단지 가인과 아벨만 낳았을까요? 당연히 아니겠죠? ^^ 아담의 족보에서 130세에 셋을 낳았다고 하는 것은 동물적인 번성 즉, 자식을 많이 낳았지만 자기 모양 곧 자기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은 자는 셋 뿐이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은 아담이 30살쯤이었는지 아니면 129살쯤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번성하라는 명령을 잘 알고 있는 아담에게 있어 몇 십 년 동안이면 얼마나 많은 수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지를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싶습니다.
좋은 예로 아브라함으로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가 죽은 나이는 175세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성인이 된 후에도 그두라를 얻어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중에 미디안이라는 사람인데 그 미디안 후손은 나중에 이삭의 아들인 야곱의 막내아들 요셉을 애굽에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
아브라함->미디안->미디안상고
아브라함->이스마엘->이스마엘상고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商賈)들이 지나가는 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 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창37:28절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창37장36절
요셉을 팔고 팔았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손자뻘들이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가까운 친척인데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늦게 자식을 얻은 사람도 짧은 기간 내에 수많은 후손들이 생겨 서로가 가까운 친척인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많이 번성했다는 것입니다.
번성하라는 명령을 가장 먼저 받은 아담은 오죽했겠습니까? ^^ 그러니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을 자기 형제 또는 친척들이 알게 되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공포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도둑이 제발 저리듯이...
그럼 이제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의미로 가인이 만날 사람에 대해서 알아 봤으니 번성의 의미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겠죠? ^^ 오해를 하게 되면 진짜로 자식 많이 낳는 것이 복 인줄을 착각하게 되니까요. 성경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말씀을 잘 보시면 하나님의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였습니다. 여기서 쓰인 번성이란 단어는 창1:22절에서 동물에게 쓰여진 번성과 동일한 뜻을 지녔습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동물적인 번성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많이 낳는 것이 축복이었죠. 이것은 결국 하나님 나라의 충만과 관계 있는 의미로써의 번성인 것입니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창28:14)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22:17)
그리고 그 번성한 후손중 유다 지파를 통해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니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며 열왕이 네게로 좇아 나리라 (창17:6)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창49:10)
성경은 족보책이 아닙니다. 족보를 기록할 때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관계 있을 때 기록한 것이 대부분이죠. 족보를 잘 보시면 셋이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자녀들이 다 기록되어 진 것이 아니라 에노스만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가인의 혈통을 보십시요. 가인의 후손들도 많이 번성하였지만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노아의 홍수 때 하나도 살아나지 못 합니다.
성경의 초점은 오직 예수님께만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기록하는 원칙이며 족보를 기록하는 원칙입니다. 아마 성경을 기록할 때 가인이 처음 만날 사람을 설명해 주기 위해 아담의 자식들이 놋 땅에 거하기까지의 기록을 다 기록하는데 허비할 만큼 한가한 책이 아닙니다. 하늘을 두루마기 삼과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을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인이 만나는 사람이 누구일까에 대한 관심을 두겠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번성이 우리의 기도이자 소망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충만은 악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기도 합니다. 그 일에 쓰임 받는 우리의 할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크고 놀라우신 일들을 증거하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우린 그것만 잘 감당하면 족하지 않을까요?
*안증회 사람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네... 초보 집사한테 죽을라꼬... 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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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감사합니다.
김지예 2003-12-04 07:33:58, 조회 : 910, 추천 : 44
이해력이 부족한 저 같은 사람한테는 정말 이해하기 편하게 글을 써 주셨네요.
아브라함의 예를 보니까 정말 많이 낳기는 많이 나았더라구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세하게 써 주실 줄은 몰랐었거든여. 써 먹을 말이 참 많네여.
제가 좀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하네요. 직장 다니시다보면 바쁘실테데 이렇게 길고 자세하게 써 주신 성의에 놀랍기도 하구요.
혹시 다른 분들도 다른 시각으로 보시는 분 계시면 좀 올려 주셨으면 더 감사할텐데 다들 토론하시느라 바쁘셔서...
어쨋든 이근호 목사님과 이희진 집사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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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예병환 2003-12-03 10:37:31, 조회 : 255, 추천 : 37
늘 감사드리며...
목사님의 십자가를 아십니까 강의 중에
- 아브라함 언약은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서 벌어진 것을 이 지상에 펼쳐 놓은 것인데,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 모리아 산에 있는 수양은 여호와 이레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주체가 된다. 이것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심판과축복이 진행된다.
는 내용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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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제 3의 실체가 등장합니다.
이근호 2003-12-03 13:54:00, 조회 : 751, 추천 : 37
>숲속에 있었던 수양은,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해 놓으셨던 제물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숨기시고,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 그 지시에 순종했는데,
여기에 참여한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이 둘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 자신에게 내려준 하나님의 언약을 구현할 인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쩐 일인지 그 언약 구현자 당사자를 '죽음'이 기다리는 벼랑 끝으로 밀어넣고 맙니다.
하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이레, 즉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신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죽음의 길은 생명의 길로 전환됩니다.
곧 하나님의 이레의 개입 없이는 결코 아브라함의 언약을 달성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은 하나님의 몫이지 아브라함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 그저 거기에 죽음으로서 참여된 자일 뿐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말씀드리자면,
언약의 수여자인 아브라함과 이삭은,
장차 나타나실,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성을 언약이라는 형태로 미리 알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리시는 그 약속의 성취로 인해 이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상이 영글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로마서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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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의 죽음
김재국 2003-12-08 12:46:02, 조회 : 374, 추천 : 39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4)
는 성경말씀을 성도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받아들이면
골리앗에 물매를 던진 다윗의 행동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요.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과 다윗의 행동은 서로 배치되는 것 같은데
성도는 배치되는 이 내용을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 지 가르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도 진리의 복음을 전파하시느라 애쓰시는 십자가마을 분들에 감사드립니다.
샬롬.
그리고 바벨론왕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은
다니엘의 3 친구의 행동과
헤롯에게 '동생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한 세례요한의 행동은
성도들에게 믿음=가만히 있음 보다는
믿음= 행동 을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이런 갈등을 해소할 진리는
무엇인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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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승리
이근호 2003-12-08 13:44:02, 조회 : 415, 추천 : 39
사무엘상 17:45에 보면,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자세히 보면, 상대방이 칼과 창과 단창이라는 무기 종류를 들고 나오는 반면에 소년 다윗은 거기에 대비해서 결코 '물매와 돌'이라는 무기로 거론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혀 인간들의 무기와 상관없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을 상대방의 무기 앞에 배치합니다.
이와같은 경우는. 시편 8:1-2에도 나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여기에 봐도 주의 대적과 싸우는 마당에 이스라엘에서 내세울 수 있는 무기는 오직 '여호와의 이름' 뿐입니다. 그 이름의 실제적 등장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느냐 하면, 사무엘상 17:47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처럼,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명기 식으로 이야기하면, 이스라엘이 벌리는 모든 전쟁은 '붙이시매' 전쟁입니다.
'붙이시매 전쟁'이란, 그 어떤 인간의 전쟁술이나 무기와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붙여주는 전쟁이라는 겁니다.
그 예 중의 하나가, 출애굽기 17장에 나오는, 모세가 지팡이를 높이 들어서 승리하는 아말렉과의 전쟁입니다. 또 언약궤를 앞장 세우고 성을 도는 여리고성 전쟁입니다. 뿐만아니라 사시기에 나오는 기드온 전쟁이나 모든 전쟁도 이 '붙이시는 전쟁'의 양상입니다.
사람들의 전쟁이란 인간들의 힘과 지략의 전쟁이라면, 하나님의 전쟁은, 세속에 대한 거룩한 분의 전쟁인데 그 방식은, 인간의 모든 힘을 의존하는 쪽이, 인간의 힘을 의지하는 쪽을 이기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언약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일관돤 맹세성 때문에 그러합니다.(신 9:5)
이런 식의 전쟁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사도행전 4:12에 보면,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그저 젖먹이에 불과합니다.
자력적인 행위나 행함으로 구원되지 못하지만 오직 '주의 이름'을 의지하므로서 구원되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십자가 믿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자기 부인하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심령이 가난한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복음을 알고, 십자가를 아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기도하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삼위일체를 알고 믿는 행위로 구원되지 못하며 예배나 찬양으로 구원되지 못하며, 은혜를 안다고해서 구원되지 못하며, 예정론을 안다고해서 구원되지 못하며
오직 주의 이름 되시는 예수님의 자체적인 긍휼로 구원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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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다윗의 승리
김재국 2003-12-10 12:45:04, 조회 : 277, 추천 : 36
>(의견) 1. 예수님의 긍휼에 대해서
문제는 예수님의 긍휼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긍휼을 거부하는 자들과의 줄다리기입니다.
긍휼을 거부하는 자들은 인간의 힘을 믿는 자로서 목이 곧은 자,
또는 교만한 자라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긍휼을 믿고 적극저 행위로 구체화 시켜
골리앗의 목을 벱니다.
모든 승리의 원천은 하나님이고 그것을 행위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입니다.
2.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승리함을 다시한번 일깨워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다윗은 가만히 있지 않고 동작을 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골리앗을 보고 이스라엘 군대는 두려워하여 응징을 하지 않습니다.
엘리압이나 이스라엘 군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알면서도
행위화 하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 반해 다윗은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함을 보자마자
그를 무찌를 준비를 철저히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매돌을 던져 죽이고 칼로 찌르고 목을 벤 것입니다.
3.다윗의 승리는 예수승리의 예표
골리앗의 마귀권세를 상징합니다.
결국 인간은 현세에서 마귀와의 필연적인 전투를 감당할 해야 하는데
성도의 행위는 엘리압이나 이스라엘군대의 두려움이 아니라
다윗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마귀에게 나아가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결코 바라보기만 한것이 아닙니다.
다윗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도구로서 몸소 전투를 실행했습니다.
바라보기만 한 사람은 엘리압과 이스라엘 군대였습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전에서는 바라보기만 한 것입니다.
4. 다윗의 승리는 성도의 승리
다윗의 전투행위로 마귀가 졌습니다.
다윗의 승리는 예수승리이고 곧 성도의 승리입니다.
성도는 현실상황에서 마귀와 부딪치고 있습니다.
성도의 자력으로는 이길 수 없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도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고
성도의 승리가 곧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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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 당시 다윗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이근호 2003-12-10 14:09:38, 조회 : 219, 추천 : 39
다른 사람을 하나님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다윗에 대해서 그 전에나 그 후로도 많은 핍박을 가한 겁니다.
알면 반드시 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바라 보는 것도 행위입니다.
그러나 몰랐기에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섭니다.
예수님 죽이기에 나서는 것처럼 "다윗 죽이기' 적극 행위로 나서는 겁니다.
행위란 이처럼 목적하는 바로 그 질이 결정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그는 적극 행위에 나선 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가만히 있는 것도 행위의 일종이라는 것을 꼭 잊지 마세요.
투표에서 기권하는 것도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표시인 것과 같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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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 당시 다윗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김재국 2003-12-10 14:27:29, 조회 : 210, 추천 : 38
(질문) 그렇다면 엘리압이 옳은 행동이고 다윗은 예수죽이기에 나섰다는 견해인데
잘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다윗이 죽인 것은 골리앗이지 예수가 아닙니다.
가만히 있은 것은 엘리압과 이스라엘 군사인데
그들도 하나님은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은 엘리압과 이스라엘 군대가 잘못이고
하나님을 알고 의지하여 하나님이름으로 골리앗 죽이기에 나선
다윗의 행위가 옳은 행위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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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 당시 다윗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이근호 2003-12-10 17:13:02, 조회 : 213, 추천 : 45
제 말을 반대로 이해하셨군요.
사울왕과 백성들은 다윗을 도리어 죽이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동안 자기네들이 알았던 여호와는 가짜라는 뜻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자들이 곧 여호와를 누구보다도 잘 안다는 자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도 마찬가지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정말 제대로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반드시 신앙의 열매가 행위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가만히 있든지 어찌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말입니다. (로마서 14:8)
그 신앙적 행위란 곧 자기 행위를 부정하고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만이 은혜로 주어짐을 증거하는 식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주위 사람들은, 인간의 가능성을 부정한다고 미워하고 죽이려 하겠지만)
다윗이 물매와 돌을 자랑하고 돌아다니지 않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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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그 당시 다윗만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김재국 2003-12-10 18:03:44, 조회 : 216, 추천 : 42
(의견)그랬었나요? 착각을 잡아주시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이글에 의문점은 없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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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의 죽음 김재국 2003/12/08 39 374
[re] 이 근호 목사님의 답글을 적극 추천하면서...
이희진 (Homepage) 2003-12-09 11:28:58, 조회 : 414, 추천 : 47
이 근호 목사님께서 잘 말씀해 주셨듯이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도구는 물매와 돌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의 영적인 전투 역시 어떠한 도구를 가지고 하는 전쟁이 아니라 오직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전쟁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에 우리는 서서 그가 하신 일을 바라만 보면 됩니다. 그런 다음 우리의 할 일은 그가 하신 일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행함을 말하고 있을 때에는 행함으로 인해 그 믿음이 드러난 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있는 자라면 그 믿음의 모습을 적극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입니다.
이 이웃 사랑은 바로 믿음이 있는 자의 적극적 선행인 것입니다.
단순히 밥이나 퍼주고 무슨 마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을 가리켜 적극적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생명을 주고 있느냐입니다. 빵이 생명을 줄 수는 없는 것이죠.
진정한 의미의 적극적 선행이란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은 적극적 선행을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밥이나 퍼주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무슨 마을 만들고 그러지는 더욱 더 하지 않았구요.
바울은 오직 복음만 전했을 뿐이죠.
가난한 자들에게 빵을 주는 것은 좋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적극적 선행으로 주는 빵이 먹고 시간이 지나 버리면 꺼져 버리는 절에서 주는 빵과 다른 이유는 그 안에는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행함은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하며 믿음에는 반드시 행함이 동반되어지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써 적극적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크고 놀라우신 일들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적극적 선행으로써의 행함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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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1:4질문
김규범 2003-12-10 08:12:49, 조회 : 324, 추천 : 34
목사님, 안녕하세요, 건강하시지요?
오늘 질문은 행21:4의 "성령의 감동으로"라는 문구입니다.
두로의 제자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사도바울이 가야할 길이 고난의 길임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셨다는 것 까지 성령의 감동이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것은 헌신자가 아닌 인간편의 감정이 개입된 말이라고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한 목사님으 해석을 듣고 싶습니다.
여기서 말하는"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가 무슨 의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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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행21:4질문
이근호 2003-12-10 14:01:14, 조회 : 251, 추천 : 40
'성령님의 감동'이라는 대목을 '형님께서 충고하시기를'라고 느끼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마치 사람이 충고하는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확실히 성령님께서 살아계셔서 언급을 해 주신 것입니다.
동질의 체험을 하려고 해서는 아니되겠지요.
우리들은 우리 나름대로 옆에서 충고해주는 형님이나 식구나 따로 있기에(성령님이 계시기에) 먼데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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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21:4질문 김규범 2003/12/10 34 325
[re] 그의 인생의 주도권을 누가 잡고 있는 지를 상기시켜 주는 모습입니다.
이희진 (Homepage) 2003-12-11 03:35:57, 조회 : 263, 추천 : 47
바울의 전도 여행은 이제 이스라엘의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향하려고 하고 있는데 성령께서는 바울과 제자들에게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일러주신 것을 바울과 제자들 어느 한 쪽이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간다고 하고 있고, 두로의 제자들은 성령께서 가지 말라고 하셨으니 가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말렸고, 가이사랴의 선지자 아가보는 바울을 결박하면서까지 말리고 있습니다. 마치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지셔야 하심을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충심(?)에서 나오는 마음으로 막으려고 했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더라(행21:4)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행21:11)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정말로 성령께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면 바울이 제 아무리 전도를 하러 가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가지 말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을 향한 고집(?)을 꺽지 않습니다. 바울이 정말 잘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는 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행20:22) 말씀하셨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인생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이란 "그것을 상기시켜 주시는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의 감동하심을 제자들은 자기 입장으로 해석하였지만 바울은 성령의 감동하심의 의미와 그 범위를 알았기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하신 말씀을 복음으로 해석하였던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희생의 필요성과 죽음보다 더 큰 생명이 있음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기에 다가 올 결박과 환난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알면서도 우리를 위해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 묵묵히 걸어 가셨던 예수님처럼 바울은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택했던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성령 받은 자의 역할을 너무 잘 알고 있는 바울이 참 멋있지 않나요?
천국에 가면 바울을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물어 볼 말이 좀 있거든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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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두로의 제자들이 자기 입장에서 성령님의 말씀을 해석했다?
이근호 2003-12-11 08:30:22, 조회 : 245, 추천 : 36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에는 인간의 자기 입장의 삽입을 허용치 않습니다.
두로의 제자들은 자신이 받은 성령님의 지시대로 사도에게 잘 전달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어떤 오해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을 가미하지도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지시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아마 자칫하면 두로의 제자들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대하기 십상인데 오히려 이 점을 주의해야 합니다.
즉
"사도님, 저희들이 성령님을 통해서 받은 지시는 사도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않아야겠지만 사도님은 평소의 지론이 그 어떤 환란이 온다 할지라도 복음 전파을 하시다가 죽어야 될 분이니 우리가 전하는 지시에 신경쓰시지 마시고 소신껏 하세요"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도행전은 소설입니다.
도리어 이것이 인간적인 생각이 가미되는 겁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은 사도 바울대로 따로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지시와 명령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두 개의 명령이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충돌되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각각 받았다는 점입니다.
즉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모순대는 지시를 두 번 연거퍼 받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
각각 받은 은혜의 분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4-6)
왜 은혜의 분량이 다릅니까?
여기에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복음 전파만이 주님의 일이 아니라 복음 전파가 되는 과정, 그 또한 복음 전파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성도되었다고해서 하나님의 복음 전파가 그 사람에게 중지되고 다른 사람에게 방향이 돌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복음 전파 과정,그 자체가 자기를 지속적으로 구원시키는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감히 인간들이 성령님이 하시는 일에 동업자라는 이름으로 혐동해서 일을 한다는 의식을 배제하고 귀하의 말씀대로 끝까지 생의 주도권을 주님이 쥐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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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성령은 한 성령이시지만 인간의 생각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희진 (Homepage) 2003-12-11 10:41:54, 조회 : 242, 추천 : 27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성령께서는 바울에게나 두로에 있는 제자들에게나 그리고 가이사랴의 선지자 아가보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같은데요?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이 있다는 것까지만 성령의 예언이고 그 말씀을 누가 어떻게 적용했느냐의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보여집니다.
*바울의 적용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
*제자들과 선지자 아가보의 적용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행21:11~12)
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바울의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누가를 비롯한 제자들은 포기를 하게 되죠.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행21:13~14)
성령께서 바울에게는 핍박이 있다고만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가지 못하게 말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뜻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으시는 것이었다고 한다면 바울에게도 당연히 가지 말라고 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관성에 대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만약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정말로 바울을 말릴 것을 말씀하신 것이라면 포기한 제자들이 잘 못한 것이 되고, 또한 바울은 성령의 뜻보다 자기의 계획이 더 옳다고 우기는 큰 죄를 범하게 되는 꼴밖에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끔 자신의 사도권에 대해서 열변을 토하곤 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있어 진짜 사도임의 증거는 바로 고난이었습니다. 그에게 있어 고난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해주는 도구였으며,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확신하게 되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이 있을 것이라는 성령의 예언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올바른 적용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롬16:25~26)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어지는 그 중심에 자신 쓰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목사님께서도 고난이 올 지라도 늘 변함없이 바울처럼 복음으로 시대에 비젼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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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사도는 사도대로, 두로의 제자들은 제자대로 하나님께서 다루십니다.
이근호 2003-12-11 11:38:18, 조회 : 262, 추천 : 35
하나님이 일관성이란, 지상의 특정 인간(사도 바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는 일관성이어야 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나 어느 특정 인간의 활동 중심으로 일관성으로 진행해버리면, 사도가 광주리에 타고 도망하는 것은 비겁자의 한 단면이라고 왜곡 해석할 가능성도 있는 겁니다.(행 9:25/고후 11:33)
차라리 그 때에 사도는 용감하게 순교하는 것이 사도의 걸맞는 일관성에 부합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주님의 일관성은 항상 역사 안에서 '우발성'을 띠고 나타나 성도를 비롯한 인간들이 그러한 변화무쌍을 정례화하고 교리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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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9;27의 그가....
이석규 2003-12-14 02:06:35, 조회 : 165, 추천 : 31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저는 그가를 적그리스도라 배웠는데 의외로 예수님이라고 해석한 분들도 많더군요.
목사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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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문맥상 헬라왕이죠.
이근호 2003-12-14 07:51:15, 조회 : 182, 추천 : 43
에피파네스(신의 나타남)이라고 자처하는 안티오쿠스 4세라는 헬라왕이 B.C 167년 경에 유대지방을 통치했습니다.
그 사람은 강력한 헬라정책을 썼습니다.
원래 헬라 나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웠는데 그가 B.C 323년 열병으로 죽고 맙니다.
이후 헬라 제국은 마케도니라, 시리아(아시아), 이집트로 3분되어 각각 그의 계승자들이 통치했는데,
그후 후계자들이 한결같이 할렉산더의 뜻을 따라 헬라적인 세계 구축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중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가 B.C. 320년, 312년, 302년 세 번에 걸쳐 팔레스타인을 점령 통치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집트와 시리아간의 오랜 대치 끝에 시리아의 셀프키드 왕조에 의해 팔레스타인이 점령당합니다.
이 왕조에 속한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 경전과 에루살렘 성전이 제사 의식, 음식과 관한 율법을 폐지 시켰습니다.
더욱이 번제 상단을 제우스 제단으로 만들어 종교적 중심지로 삼았습니다. 이방 신들에 대한 예배를 강요하고 율법과 교육을 금지했으며. 할례와 안식일, 그밖의 절기를 금지하였습니다.
이러한 헬라제국의 등장과 통치에 대해서는 이미 다니엘 선지자가 '표범같은 짐승'이라고 예언한바 있습니다.(단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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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17편 답글입니다.
이희진 (Homepage) 2003-12-18 06:47:31, 조회 : 188, 추천 : 35
좀 시간이 지난 것 같군요. 페이지가 넘어가 있어서 님의 글을 읽어보지 못했었는데, 어제 우연히 이 글을 보고 마침 이 근호 목사님께서 리플을 달지 않았기에 그냥 제가 답변을 해 보겠습니다. 내용이 부족하면 말씀해 주세요. ^^
1. 시 17편에서 다윗이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고 있다고 하셨는데, 어느 구절이 그러한 것인지요?
>15절 말씀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15절 말씀이 왜 그러한 것인지요?
>아니면, 1-15절 전체의 말씀 하나하나가 그렇다는 것인지요? 목사님의 앞 전 글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같은데, 예수님에 대한 자의식이라구요. 이 말씀과 상관이 있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본문인 시 17편 어느 구절에서 이를 엿볼수가 있는 것인지요?
===>>> 시편 17편은 오실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시는 아닙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게 하는 그런 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직접적인 예언은 시편 2편에 있는 "너는 내 아들이라" 같은 경우가 신약(막1:11, 눅3:22, 행13:33. 히1:5)에서도 인용했을 만큼 직접적인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이라는 것 자체가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게 하는 그림자의 역할이기 때문에 당연히 시편 17편을 포함한 구약 전체가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구약을 그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게 된다면 요셉이 총리 된 사건은 그저 매 년 연초에 성도들 복(?) 받으라고 하는 복(福) 설교의 꺼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2. 7절에 "주의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 (6절에 분명 '나'라는 단어, 즉 다윗 자신을 가르키고 있습니다) 와
13절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를 보면 분명 "나 곧 다윗" 자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 자신의 구원과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이희진님도 그러셨는데 연결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요?
===>>> 다윗이 구원받은 자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구원받은 근거는 그의 삶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드러났을까요? 율법을 잘 지켜서? 물론 아닙니다. 다윗이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살았다는 근거는 다윗은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구원받은 자들은 100% 다윗과 같은 근거로 구원받았습니다. 즉, 구약에서 구원받은 백성은 그림자가 주는 의미를 바로 알고 실체를 바라보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에녹도 오실 메시아를 전하며 살았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사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주의 기이한 인자가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모습과 영혼의 구원을 소망하는 모습은 일차적인 육신의 구원을 갈망하는 모습으로만 끝나는 그런 기도의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성되어지는 영원한 구원을 갈망하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3. 5절을 보면 다윗이 말하기를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지 아니하였나이다" 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데요, 다윗이 고난받는 가운데 실족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한 예를들면, 아비가일의 남편을 죽일려고 했던 일도 그렇구요.
그렇다면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 실족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멀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아비가일의 남편을 죽이려고 했던 사건은 실족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고 또한 이 시의 내용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사건입니다.
4. 17편의 시 가운데 제일 이해가 안되는 구절이 있다면 14절입니다. 14절은 마치 불쑥 툭 튀어 나온다는 느낌을 받는데요,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 우선 이 구절을 이해하시려면 제가 자유 게시판에 올린 시편 73편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는 자라면 이 땅의 것에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 땅의 약속을 받지 않은 자들은 이 땅에서의 삶에 만족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죠. 그들이 바로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불쑥 튀어나온 구절이 아니라 악인의 모습을 정의하면서 15절에서 의인인 다윗 자신은 악인과 같지 않고 저 땅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을 결론적으로 말하기 위한 구절로써 문맥상 또는 문법상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는 구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끝으로 이희진님의 글 가운데 보면
5.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만 베푸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은혜를 고대하고 있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면 이게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은혜가 아닌지요?
그렇다면, 이희진님이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고대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은혜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다윗의 생명 보호, 악으로부터의 구원인지요?
===>>> 2번의 질문과 같은 내용이군요.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기이한 인자를 나타내소서"의 직접적인 의미는 악인으로부터의 구원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다윗은 지금 당장 코앞에 닥쳐 있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진짜 기이한 인자의 나타내심은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또한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은혜를 입음으로 인한 구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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