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2003-09-15
[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 2003-09-15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
박장수 (Homepage) 2003-09-15 14:44:38, 조회 : 227, 추천 : 39
십자가마을의 목사님들께 주님의 사랑을 전합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28 :20)
-----------------------------------------------------------
눅22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막14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담대히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기도에서는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다고 아버지께 고백하고 계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목사님의 해석을 부탁합니다.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
손무성 2003-09-15 22:39:20, 조회 : 219, 추천 : 28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길 원할 만큼 저주의 크기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 저주가 본래 우리가 받아야 할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버림 받음의 크기가 안받고 싶을 정도로 묵중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고통과 견줄 수 없는 그런 크기의 저주'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의 입장은 '감사합니다. 라고만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마저도 치를 떨며 피하고 싶은 하나님의 저주를 내가 본래 받아야 하는 죄인이라는 말이었구나'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피하고 싶으신 것-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십자가를 안 지고 싶으신 것이 -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자신이 온 것은 이 일(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위해)을 위해 왔다고 했습니다.
" 마가복음9장 31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죽은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연고더라."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
로즈마리 2003-09-16 11:41:57, 조회 : 198, 추천 : 34
>분명 예수님께서는 이 잔을 피하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다.
----------> 그러나 아래 구절을 자세히 보면, '이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이것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아래의 구절을 보건데, 예수님의 원함은 분명히 '이잔을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잔을 피하고 싶으셨던 원함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눅22 :42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막14 :36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26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로즈마리님께)
이상규 2003-09-16 12:31:12, 조회 : 202, 추천 : 43
>로즈마리님 글에
"분명히 이잔을 피하고 싶으셨던 원함이 있으셨던것으로보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로즈마리님께)
로즈마리 2003-09-16 14:57:10, 조회 : 202, 추천 : 45
>"분명히 이잔을 피하고 싶으셨던 원함이 있으셨던것으로보입니다.'
--------->제가 이와 같이 말한 이유는 성경을 읽어보면 분명히 그렇게 기록되어있기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나의 원대로 하지마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지 않습니까?
이때 '나의 원대로'라는 말의 의미는 분명히 '분명히 잔을 피하고 싶었던 원함'이었습니다.
이게 아니면 뭐겠습니까?
>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피하고 싶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예수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 당연히 십자가를 지는 것을 피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가나 다 똑같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의 아들로 오셨지 않습니까?
어쨌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싫어하는 육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것 아닐까요?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
손무성 2003-09-16 17:37:32, 조회 : 209, 추천 : 44
로즈마리 님의 말씀하신 이 말 - "분명히 이잔을 피하고 싶으셨던 원함이 있으셨던것으로보입니다(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은 맞습니다. 저가 앞에서 말한 어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이 잔을 지나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 잔(십자가를 지시는 일) 자체를 포기하고 싶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자신이 죽으시는 일'이란 진작 인간이 당해야하는 일이요, 피하고 싶을 만큼 엄청난 충격적인 저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 잔)을 피하고 싶을 만큼 그 저주의 크기가 이 세상의 그 어떤 저주 라고 내놓을 만한 것에 비교 되지 못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는 것입니다. 이 저주는 인간이 받아야 할 저주였습니다.
정작 저주를 당하는 당사자들의 외치는 소리가 계시록에 이렇게 미리 계시로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 15-16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예수님 마저도 피하고 싶을 만큼 엄청난 저주- '세상이 어두움으로 변하며 외면하기까지 하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버리시는 그 현장'-이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길 원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본래 하나님 아버지의 약속과 계획이 아니었기에... '아버지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본래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은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위해 오신 것입니다. 곧 온 인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요한복음 17장 2절-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과 같이 하시려 오신 것입니다.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로즈마리님께)
로즈마리 2003-09-16 18:12:47, 조회 : 173, 추천 : 29
십자가의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가에 초점을 둔 목사님의 의도와 어감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이 있기에 제가 답글을 달았습니다.
그것은 즉 예수님은 결코 우리와 다른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는 없으시되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셨고,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받은 자로서 예수그리스도를 간과하지 말아야했기에 제가 글을 올렸습니다.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리고 저의 생각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분명히 있으셨다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십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위대성이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글올린 모든 분과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요한 2003-09-16 23:26:14, 조회 : 214, 추천 : 33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 26장 39절-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장 36절-
인간의 몸 그대로가 성화(자신을 채워가거나, 비워가
성성(聖性)에 이르거나 참여함)입니다.
인간은 자기 부정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 부정이 나올 수 없음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모든 것을 이루어 가는 것을
믿은 분은 오직 주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오신 주님까지도
인간의 몸에서는 인간의 부정이 나올 수 없음을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믿는 자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정은 오직 십자가 예수에게서만 나옵니다.
어떤 인간이라도 성화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인간이 성화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동일합니다.
성화를 인정한다는 자도 자기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고백이며,
성화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도 자기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성화의 부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외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요한계시록 22장 13절-
예수가 처음으로 성화를 부정하신 분이며
예수가 마지막까지 성화를 부정하신 분이십니다.
그 결과로 믿는 자에게 보여 주신 것이 십자가 피의 능력입니다.
저의 옛날친구가 자기는
성화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수시로 고백을 하더군요.
이 말은 다른 말로 ‘나는 나를 부인 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기독교에서는 성화를 인정하기도 합니다.
이것 역시 ‘나를 부인 할 수 없다’는 말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자기가 인정을 하고 부인을 해도
인간 자체의 삶이 성화의 과정인 것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성화의 부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성령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성화를 부정하는 그리스도인은 설교와 책이나
칼럼이나 고백을 통해서 자기 부정외엔 나올 것이 없음을 믿는 자임에도
자기 부정이 발견이 안 되는 것은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정과 십자가는 한 몸입니다.
자기 부정과 십자가는 동시에 터지는 성령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허무와 십자가의 피가
순간적으로 동시에 일어남으로 허무주의로 흐를 수 없습니다.
동시에 폭발이 되지만 피의 능력은 능치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허무를 순식간에 녹여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피의 능력이요 그리스도인의 기쁨입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성화를 인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더 무서운 거짓말은
자기들은 성화를 부정한다고 하는 자들 이라는 것입니다.
성화의 부정은 예수 외에는 할 수 없음을 성경이 증거 함에도
예수 자리에 자기가 있음을 발견하지 못하는 자가 곧 선생이며,
큰 자며 자기를 부정하지 않겠다는 자입니다.
성화를 부정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상을 거꾸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도 세상을 거꾸로 살 수 없습니다.
거꾸로 사는 믿음을 보여 주신 예수 보다
더 큰 믿음이 있으신 분은 살아 보십시오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인간의 실체는 항상 딜레마 안에 있으며
또한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싸움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하고 싶은데 내일 가니 하기가 싫은 게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한 방향을(언약) 지향하시지만
인간은 항상 하다가도 하기 싫고
하기 싫다가도 하고 싶은 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믿는 자가 아닙니다.
오직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마태복음 15장 14절-
옛 친구가 항상 딜레마에서 있었던 것은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딜레마였으며,
하면 된다는 자들에게 하지 말라고 선포하여
딜레마에 있는 자들에게 딜레마만 덧 입히는 결과만을 준 것입니다.
소경인 자가 소경을 인도한 꼴이지요.
그럴 지라도 자기 백성은 사단의 딜레마 속에서 구하시는 분이 있음을
믿고 찬양할 뿐이지요.
무엇을 해서 구원을 받아 보겠다는 것과
무엇을 하지 않고 구원을 받아 보겠다는 것 모두가
인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루만 주일이라고 생각하는 자나
매일 매일을 주일이라고 생각하는 자도
동일하게 인간이 무엇을 해서 구원의 욕구를 채워 보겠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인간의 일을 전부 부정하는 것은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최대의 선물이며 사랑입니다.
>이글은 다음 칼럼에서 퍼왔습니다.
>칼럼주소는
>http://column.daum.net/jcyou21c/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글올린 모든 분과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장병엽 2003-09-18 15:12:37, 조회 : 188, 추천 : 38
요한님!
물은 물인데 물은 아니고 H2O다,H2O는 H2O인데H2O가 아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성화가 뭡니까?
요한님의 의견을 쓰십시요.
모두가 바르게 알아 듣도록 말입니다>
아니면 요한님을 미혹하는자로 여기겠습니다.
제가 잘못 알아 들었다면 정중히 사과 드리며 요한님의 화두와 같은말을 풀어 주십시요.
성화가 뭡니까?(질문입니다.)
========================================================================
요한님 헷갈립니다.
이상규 2003-09-18 14:33:29, 조회 : 177, 추천 : 49
;.
님이 퍼온글내용이
>
여러번 읽고도 헷갈립니다.
중간글에 '인간자체의 삶이 성화의 과정인것을 지울수가 없습니다"
" 더 무서운 거짓말은 자기들은 성화를 부정한다는 자들입니다".
성화를 부정하는 자들에대한 비판은 어째 좀 이상합니다.
짧은 소견으로.
우리가 할수없는 거룩(의)을예수님께서 십자가 통하여 온전히 이루심을 깨닫게해주신성령님께서
또한 우리삶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수없음을 (성화)늘 고백하며 살게해주십니다.
(자기부인, 성화부정. 행함으로 의롭게 안됨.인생이죄뿐이고 은혜로 살아감)
라고 쉽게 이해하면 안됩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아니하겠느뇨"(롬:8.32)
========================================================================
[re] 요한님 헷갈립니다.(장병엽, 이상규님보십시요)
요한 2003-09-18 18:50:11, 조회 : 182, 추천 : 41
성화란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교회들마다의 외치는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듣고 있노라면
교인된 입장에서 기독교의 교리가 매우 단순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더 깊은 내용이 산더미처럼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불안감도 떨쳐 버릴 수도 없다.
더 많은 내용을 고대하는 교인들에게 추가해서
더 진도 나가게 하기 위해 마련하는 교육 커리큐럼은
주로 사회 윤리나 혹은 교회 운영과 발전책에 관한 사항들이다.
그러나 사회 윤리나 교회 성장에 관한 내용은
성경에 없는 부분이기에 교인들은 상황적 윤리를 가르침 받는다.
성경에 도출된 사항이 아니기에 절대적 귄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가르치는 자나
교회 생활을 오래했다든지 특별한 간증거리가 있는 자의 체험이
권위를 대신해서 들어가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소위 성화라는 교리를 들고 나와서
사회에 대한 선한 봉사와 교회 봉사에 관심을 갖도록 독려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점차 닮아가는 과정 안에서
필수적으로 이수해야 될 덕목을 나열,
조정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골라잡기를 요구한다.
내용은 주로 사회 윤리와 교회 조직에 대한 헌신성을 가지고 채워놓고 있다.
즉 예수 믿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다 되지 않으며
이런 저런 항목에 해당되는 윤리로서 구색을 갖추어야 한다고 독려한다.
선한 행함이 추가됨으로서 신앙이 온전해 진다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는 -이 된다는 식의 직설법도 있지만,
-하라 라고 하는 명령법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직설법+명령법을 충분이 이수될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데 주장하는 사람들은,
직설법이 교인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전달되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당신은 이미 성도가 되었습니다"라는 직설법 표현에는 반드시
그 어떤 추가 명령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저 기분상 구원을 일단 자격증 정도는 확보해 놓은 의미로 전달한다.
"이미 성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에 이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명령들을 지키지 아니하면
당신의 신분은 계속 미완성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라는 식으로 교인들을 욱박지른다.
이러한 이론의 결정적인 결점은,
결국 직설법을 명령법의 일종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믿으세요!
그러면 구원받습니다"라는 것을 명령의 1차분이며
"자 믿었습니까? 그러면 이러 이러한 덕목을 보고 그대로 행하세요
주님의 지상 명령들입니다"라고 2차분의 명령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렇게해서 얻어진 결과가 무엇인가?
구원에 계단이 형성된다.
믿는 단계가 있으며 성화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성화 단계에도 덕목 성취도에 따라
또 세세한 단계로 얼마든지 구분될 수 있다.
그래서 믿음 단계라는 달리기 출발선에 시작한 성화는
각가지 자신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취도 그래프가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그래프의 작대기가 길다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이들은 1인치로 채우지 못해서 흔적만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놓고 길게 선을 축적해 놓은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에
"내가 이만큼 성화된 것은 나의 공로가 아니라
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라고 한결 같이 말한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작대기가 적다고 여길 때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을 것이다.
"성화 분량이 이 정도밖에 안 올라간 것이
다 저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많이 회개해야 되지요" 라고 겸허의 티를 낸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양적 수치로 측정될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래서 적을 때는 자기의 죄 탓이고
평균치보다 좀 많다 싶으면 하나님의 은혜 덕으로 돌린다.
이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원칙도 모르는 것을 둘째 치고라도
계속해서 소위 성화 분량에 매달려 있는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이
이방 종교의 구습에서 온 것임을 모르고 있다.
자동차의 엔진 오일을 점검하듯이 성화 분량을 수시로 점검하고
현 수준이라도 간수되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종교 기능을 정기적으로 행하게 된다.
영락없이 비기독교이다.
========================================================================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글올린 모든 분과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요한 2003/09/16 33 214
[re][re] 무슨 소리입니까? 구득영 2003/09/18 53 213
[re] 무슨 소리입니까?
구득영 2003-09-18 09:34:33, 조회 : 214, 추천 : 53
어떤 특정한 단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말이 전혀 달라집니다.
성화의 경우에도 그렇게 사용하면서, 성화를 부정하느니 안 하느니 하면 그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습니다.
퍼온 글을 한번 잘 읽어보세요.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좀 튈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성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나아가서 구원을 이루어가자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
[re] 무슨 소리입니까?(구득영 젊은이에게....)
요한 2003-09-18 19:07:52, 조회 : 196, 추천 : 42
구득영 젊은이에게
믿음의 분량 만큼만 믿고 증거하십시요.
젊은이의 분량이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루어가시는 언약은 일점 일획도 차질이 없습니다.
이근호선생의 외침에 동의하는 사람중에 저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이근호복음을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이근호를 뺀 복음에 동의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이근호를 뺀 복음을 믿는 자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근호선생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실컷 떠들어대지만
실상 젊은이 구득영은 복음하고는 상관없이 증거하고 있음을
옆에서 보고 듣고 읽었으니 말입니다.
이말은 이근호 복음에 동의 한다고 해서
그자가 복음을 믿는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말해서 복음은 배우고, 공부하고,연구해서 믿어 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실상이 젊은이가 그중에 하나입니다 그려
젊은이는 이근호 선생에게서 배우고, 공부하고, 세미나에 참여한바로 복음을 말하지만
젊은이가 말하고 증거하는 복음은
이근호 선생이 증거하고자 하는 십자가 복음하고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젊은이 다시한번 자신을 돌아 보기를 원합니다.
복음에는 구득영이는 없는것을 말입니다.
미국에서 한국에 잠시 들려서 가던차에 http://crossvillage.pe.kr 홈을 알게 되어
유익했습니다.
저는 토요일 6시 비행기로 떠납니다.
미국에서 시간나는대로 다시 둘러보겠습니다.
모든분들 안녕히계십시요.
노인이......,
========================================================================
[re] 성도에게는 성화가 없습니다.
손무성 2003-09-18 21:37:16, 조회 : 212, 추천 : 44
아래 요한님의 말씀에 동의 합니다.-ㅡ 성도의 관심은 성경이 뭐하고 하고 있는가에 관심보다, 교회 현상에 관심이 성화를 발생시켰음을 잘지적하고 있다.
성도에게는 성화라는 것이 없습니다. 성화를 유도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성도라는 것은 처음부터 성령과 함께 예수님의 심정을 품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는 것은 분명 삶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에 마음대로 사는 삶만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성도가 아닙니다.
점점 성화되어져 가야한다는 부담감을 가진 삶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기에 시키시는 것을 좋아 하는 삶이 있습니다.(지속적이지 않을 때가 많지만) 이것은 성화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분명 율법은 순종치 않는 인간을 죄아래 가두어 두어 긍휼을 베풀 수 밖에 없음을 확증짓게 했습니다. 법 아래 있었던 자들은 더욱더 긍휼의 가치를 압니다. 자신이 죄 아래 갖힐 수 밖에 없는 자신임을 바울과 같이 알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음'의 가치를 크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로마서11:32)
긍휼의 주님을 믿는 자는 긍휼의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로 살도록 성령은 그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긍휼의 주님을 무시하거나 긍휼베푸시는 분의 심정을 무시하는 자는 성도되기 위해 훈련하면-점점 성화 되기 위해 훈련하면 -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아닙니다.
성도에게는 성화가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요, 예수님의 아픔을 아는자요, 하늘나라의 삶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물론 늘 그렇지는 않지만...바로 이 부분을 날마다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회개하며 살아가야 할 부분인 줄압니다.
========================================================================
[re] 무슨 소리입니까?(구득영 젊은이에게....) 요한 2003/09/18 42 197
[re][re] 무슨 소리입니까?(노인에게....)
구득영 2003-09-18 19:31:16, 조회 : 204, 추천 : 44
고대 소크라테스 시절인가 신전에 이런 글귀가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참 버릇이 없어' 라고 말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 노인들은 횡설수설밖에 몰라' 라고 말입니다.
성화에 대해서 이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군요.
그럼 앞에 퍼온 글은 뭡니까? 테스트용입니까?
그리고 저는 모임에서 안티이근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더군요. ㅉㅉ
아무튼 그 충고 감사합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이더군요.
사실 뜨끔했습니다. 재주는 없지만 제 자신을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
[re] 무슨 소리입니까?(젊은이에게....)
요한 2003-09-18 19:49:18, 조회 : 204, 추천 : 49
젊은이
내가 처음에 퍼온글은
오래 전부터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는 칼럼에서 퍼온 글입니다.
그 칼럼지기는 신학을 하지않은 평범한 평신도(?)입니다.
신학을 모르는 자의 글이 공감이 가서 퍼온것입니다.
젊은이는 전부터 지켜와서 알고있던바입니다.
신학을 한 목사라고 알고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을 한자의 한계입니다.
신학 안에서 만 이해 하려고 하지
신학을 벗어 난것은 복음 축에도 들지 안을 뿐 아니라
증거가 횡설 수설 하다고 묻어 버리는 일을 자신이 하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그것을 눈치 조차도 채질 못하니 안타까울 뿐이요.
========================================================================
[re] 감사합니다!!
구득영 2003-09-18 20:45:01, 조회 : 186, 추천 : 31
제가 신학을 했다기보다는 신학교를 졸업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정말 학교만 다녔죠.
신학한 자들의 한계, 그것은 우리 모임에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 사용하던 말인데...
하지만 언어는 서로의 약속에 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아픔과 고민한 흔적을 그런 약속에 실어서 표현해야 하겠죠.
아무튼 충고를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제 이름 석자, 항상 지우는 목회자가 되겠습니다.
========================================================================
[re] 무슨 소리입니까?(젊은이에게....)
이종분 (Homepage) 2003-09-19 22:12:13, 조회 : 675, 추천 : 40
>죄 아래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신학과 철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한계에 부딪히고 몸부림 치나 봅니다. 요한님도 예외 일수는 없습니다. 감히 끼어드는것 같아 죄송함 부터 듭니다. 퍼온글을 얼마나 공감하시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요한님의 글이 아닙니다. 십자가마을이나 퍼온글이나 똑같이 주님을 드러내는 정체성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것 같습니다. 글이나 대화에서 복음을 느끼고 발견할수만 있다면 그 자체로 도구 역할하는 이들이 귀한 주의종이 아닌지요, 공동게시판에 구득영님에게 꾸지람으로 일축시키시는 과민반응으로 어떻게퍼온글을 대변하시겠습니까? 그저 요한님의 입장만 고수하시는건 아니신지요!.....주님을 드러내기 위해 몸부림 치는 이들에게 최소한 격려는 해주시지 못할망정 아쉽습니다. 복음 또한 경험이나 나이순서로 받아지는건 아니잖습니까? 저는 메마른 독일땅에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이시대에 한국땅에 이런 십자가 마을이 있다는건 그저 주님의 은혜요 기적 같습니다. 부디 미국에 돌아 가시면 십자가마을을 더욱더 사랑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며 아낌없는 후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례한 참견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
독일에서 재원엄마 올림
========================================================================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 박장수 2003/09/15 39 227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 김지영 2003/09/20 30 558
[re]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질문입니다.
김지영 2003-09-20 12:10:55, 조회 : 558, 추천 : 30
늘 이 곳에 들어와서 님들의 글을 읽기만 하다가, 부족하지만 용기내어서 한 번 올려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잔을 피하고자 하신 말이 아닙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이 세 공관복음서에 공히 실려있는 겟세마네의 기도내용이
요한복음에는 빠져있습니다. 물론 세 복음서와는 많은 부분이 다른 요한복음이지만
유독 그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부분에는 다른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이지요.
이 요한복음 17장에서 저자는 세 공관복음과는 달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러한 기도를 드리셨는지를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8장부터는 타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유다에게 팔려가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그 '겟세마네의 기도'를 다르게 기술했던 요한은 무엇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17장 본문전체에서 느껴지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겟세마네의 기도'에 나오는 내용과 맥을 같이합니다.
17장은 유일한 중보자로서의 예수님의 간절한 중보기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곧 십자가의 잔을 받아야 할 사건이 다가옴을 아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간구하십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그리고 본문에 수차례에 걸쳐서 '내게 주신 자'라는 말이 나옵니다(17:2, 6, 9, 24).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려고 오신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내게 주신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곧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이었던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그렇게 되면 구약시대와 예수님 시대까지, 이전에는 없었던 '구원받을 자'와
영원히 '구원받지 못할 자'로 확연히 구분되게 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음이 선포됨에도 구원받을 자와 들었음에도 아니면
듣지못해서 구원받지 못할 자의 엄청나고도 분명한 골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12)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는 부분에서 하나님의 성품인 '공의'를 드러냅니다.
그 '공의'로 오게될 심판과 영원히 하나님과 떨어짐을 그리스도께서는 너무도 아파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해 구원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애통해하십니다.
바로 이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25 - 26)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라고 말씀했는가? 라는 의문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증거하는
성경을 통해서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 잔이 너무 가혹해서 피하고 싶습니다'라고 생각됩니다.
과연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도 감당못하실 고난이 있는가? 하고 감히 고민해보게 됩니다.
'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눅22 :42)'
그리고 위의 말씀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원'이 과연 다를 수 있는가?
하는 고민도 해보게 됩니다. 한 하나님인데 말이지요.
앞서 말씀했듯이 아버지의 뜻은 '공의'를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뜻은
그리스도로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과 그 분의 마음을 자세히 증거하고 있는 요한복음 17장의
내용에서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너무도 애절한
'사랑의 외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는 자'를 너무도 애통해 하시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
하나님에 대한 이름.
김규범 2003-09-16 15:37:18, 조회 : 165, 추천 : 35
우리는 하나님이란 명칭을 사용합니다.그리고 천주교는 하느님이란 용어를 사용하는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유일신이기에 하나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하나님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차이가 없는데 단지 천주교와 구분하고 유일신 사상을 강조하기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개신교에서도 하느님을 사용해도 괜챦은데 그냥 그렇게 고정화된 것입니까?
또한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하느님을 말하는 것입니까?
========================================================================
[re] 하나님에 대한 이름.
손무성 2003-09-17 12:19:41, 조회 : 183, 추천 : 43
천주교의 신개념은 토마스아퀴나스에 의할 것 같으면 인간은 타락했지만 그러나 '이성으로 신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천주교의 교리의 밑바탕입니다. 아마 이런 교리의 밑바탕에서 신개념인 '하느님'(유일신)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종교적 신앙의 대상, 인간을 초원한 절대자로서 우주를 창조한 주재
일반인도 놀라면 '오 하느님' 할 때 이성으로 느끼는 그 하느님으로 받아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그런 이성으로 감을 잡거나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하나님입니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시는 하나님-예수님을 통하여 본 하나님 아버지'이지 인간이 '오 하나님' 이라고 놀랄 때 외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성으로 알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보지 못한 하나님은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믿을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날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방식(요한복음9장)과 같이 눈을 뜨게해 주어서 '예수님이 가르쳐 보여 줄때 비로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 이전글
다음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