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자도 죄를 지은 후 회개치 않으면... ] 2003/07/26
선택받은 자[믿음이 있는 자]도 죄를 지은 후 회개치 않으면... 김상우 2003/07/26 34 224 [re] 선택받은 자[믿음이 있는 자]도 죄를 지은 후 회개치 않으면... 문지원 2003-07-26 21:44:01, 조회 : 249, 추천 : 42
목사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평신도로서 논리정연하게 답변 못드리지만 같은 평신도의 선상에서 편안하게 말을 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영원전의 약속안에 있는 택자인지 아닌지는 타인은 절대 모릅니다다만 사람들은 그의 행동과 신앙관의 외적인 모습으로만 판별할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너희들은 남을 판단하지말라고 말씀하시거든요, 택자인지 아닌지는 하나님과 그 본인만이 알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께서 아버지임으로 그 자녀에게 반드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다고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약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신앙적으로 완전하게 살았다고 자부할수 있겠습니까?하루에도 오만 잡다한 생각과 잡념이 하나님께 반역하는것들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는 성도라면 다들 아실겁니다. 그 죄책감에 맘이 아프고 또는 아예 감각없이 무뎌져 에라 모르겠다 할지도 모릅니다.
영원전에 택자라면 반드시 돌이키십니다. 왜? 영원전에 자신의 이름을 위해 예정하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 완벽하게 회개를 할수 있을지 궁금하네요... 다만 하나님께서 그 굳건한 강력의 힘으로 택자를 붙드실줄 말씀을 통해 깨닫고 있습니다. 그의 정하신 뜻대로 그를 경외토록 하기위해서 우린 그를 기동하면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앙인이라면 확신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아니 확신하시리라 믿어 마지 않습니다.
회개를 했다 안했다의 문제 이전에 택자라면 주님은 보존하십니다.베드로와 유다를 보면 알겠죠
베드로는 저주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만 다시 회복하여 주님께 돌아옵니다유다는 예수를 팔고 자살을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베드로를 보존하도록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유다는 네 할일을 행하라 하시면서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이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멸망이 베드로의 의지와 유다의 의지에 달려있습니까? 아님 하나님이 예수께 주신 자들을 보존하시고자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입니까? 우린 예수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영원전 불멸한 하나님이 죽으실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망권세를 다스리는 분이지 사망권세가 하나님을 다스리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영원전 먼저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고 자기의 영원한 성도들에게 사랑의 확증을 보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죄의 모양인 육신을 입고서 사망권세에 죽어 돌아가심으로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엎드려져 있을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구원하심이 여호와께 있다고 합니다.의인을 죄인으로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시는 분입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멜기세덱에 대해 김대식 2003-08-04 20:42:53, 조회 : 205, 추천 : 35
유대인의 신앙에서 멜기세덱에 대한 해석은 어떤 내용인지요? 왜 그들은 예수님과 연관이 되지 못하는지요?
즉 바울이 바울 되기전 사울때에 가지고있던 멜기세덱에 대한 해석과 바울이 된 이후의 멜기세덱에 대한 해석의 비교를 부탁드립니다.
또 한가지요 ^^ 멜기세덱을 언급하면서 단단한 식물이라고 표현하는뎅 성경에는 어려운 부분이 참으로 많은데요
왜 멜기세덱에 대해 언급하면서 강조하는 듯한 그러면서 연단이라는 표현을 왜 쓰는지 알고프네요
즉 어린아이 때의 젖 먹는 초보를 버리고 장성함으로 나아가라는 건뎅 왜 멜기세덱이라는 의미에서 더욱 부각하는지 설명 부탁 드립니다. ===================================================================[re] 멜기세덱에 대해 이근호 2003-08-05 07:39:01, 조회 : 245, 추천 : 38
마태복음 11:11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예수님이 살던 시대는 유대시대였습니다. 유대신학에서 선지자의 소리는 거의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참된 계시는 오로지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서 전달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구약 '말라기'라는 선지자 이후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그들은 초조감을 나타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과연 유대나라는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까요? 만약 그렇다면 2000년 가량 내려오는 모든 하나님의 언약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는 멜기세덱에 대한 예언도 들어있고요. 시편 110:4에 보면,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유대나라의 위기에 대해서 각가지 해석과 실천적 신앙관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쿰란공동체이고 그리고 그외 여러 가지 신학적 운동들이 나타났습니다. 이 모든 운동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반드시 엘리야 선지자가 먼저 등장해야 된다는 말라기 4:5의 원칙과 그리고 시편 110편에 나오는 메시야의 출신 성분과 이사야에 나오는 메시야의 활동와 그 외 선지서에 나오는 모든 정황을 종합해서 자기 집단에다 나름대로 적용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사도되기 전의 사울도 같은 생각을 가졌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5-6)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분은 선지자로 인정했습니다. 물론 기존의 신학에서도 나름대로 세례요한에 대한 구약적으로 분석을 했지만 선지자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들 눈에는, 세례요한과 연계된 예수님도 메시야가 아닌 셈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30에 보면,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세례 요한 그 한 인물의 가치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이 주장하는 그 계시에 비추어서 구약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예언을 해석해 주어야 진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메시야도 아니요 제사장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기존의 신학도 부정합니다. 이것은 선지자란 대중들의 호응도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에 오실 메시야와의 연관성으로 결정됨을 뜻합니다. 그 메시야로 인해 기존의 모든 종파의 유대 신학을 완전히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차라리 돌멩이가 아브라함 자손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은 백성들에게 전혀 다른 관점의 메시야의 출현을 알리고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동의하십니다.
이 새로운 시대의 해석은 그동안 유대신학으로 대변되는 인간 지혜로 구원되는 시절은 지나가고 세례요한으로부터 인도받아 등장하시는 그 메시야의 행함에 의해서 구원이 결정되는 시기라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 보시기에 모든 인간은 세례 요한까지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이제는 거기서 벗어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이 알고 있는 것을 이미 알게 될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특히 그 당시 유대신학에서 난해하다고 지목된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도 예수님과 연결시키면 이해가 됩니다. 그 연결시킨 것이 히브리서 6장-7장입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맹세 앞에서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종교적, 도덕적 행위에 대해서 그 어떤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입니다. 그것은 멜기세덱의 존재성과 관련있는 예수님의 메시야성 취지 때문에 그러합니다.시편 110편의 말씀대로 멜기세덱에 관한 예언은 어디까지나 메시야가 담당할 몫입니다.
따라서 이런 주님의 능력을 모르고 여전히 자기 신앙생활에 가치를 두고 있는 자가 있다면 과연, '능히 돌멩이도 아브라함 자손이 된다는 사실'이 과연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졸지는 죽게 된 자가 도리어 복된 자라는 말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드릴 수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자신의 종교적 감정이나 이성이나 의지를 중요시 하는 자가 있다면 아직 옛시대에 머물러 있는 어린 아이같은 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신을 지키려고 하기 때문이죠.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많이 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연단'입니다.
######################################################################################출20:8-11절에 대한 질문 - 안식일 신직수 2003-08-05 11:59:22, 조회 : 213, 추천 : 50
제 안에 있는 안식일에 대한 지식이 신학적으로 괜찮은 것(객관성을 띤)인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음이라. 출20:8-11절까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이런 취지로 주신 것 같습니다. " 너희들이 6일동안 일을 하고 7일째 안식은 온전한 안식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너희는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안식일의 모순됨을 통해 온전히 그리스도만 의지하며 그리스도만 바라봐야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안식만이 참된 안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지키는 안식에는 얼마나 많은 모순과 헛점이 있는가를 보라. 그 곳에는 온갖 모순 덩어리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이 목사님의 글 중 이런 말씀이 있었는데, 그 글을 그냥 써 보겠습니다. 그것은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방이었던 우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 율법은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라는 글입니다. 이러한 취지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적어보면, 안식일은 십자가를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개인적인 안식이며 이 안식은 이 세상에서도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과 함께 있을 천국에서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안식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목사님 말씀대로 더 이상 안식일이나 주일 개념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자와 주님 사이에는 목사나 율법 등 그 어떤 것도 필요치 않고 오직 신자와 주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안식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에 대한 말씀만 증거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내용들을 이 말씀에 적용해석해 내려간 것이 이 글입니다.
제 생각이 혹시나 틀린 부분이 있다면 고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더 보완할 부분이 있다면 답글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 출20:8-11절에 대한 질문 - 안식일 이근호 2003-08-05 14:59:27, 조회 : 230, 추천 : 39
>보완 할 것이 있습니다.
십계명은 십계명을 주신 분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출애굽기 20:2에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이름으로 불리는 분의 속성과 활동의 본질이 이 십계 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즉 어떻게 안식일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신이 애굽의 신(애굽의 세력)을 이길 수 있더란 말입니까? 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안식일 준수'가 현 세상 권력을 충분히 능가하는 힘이 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그것은 인간 노동의 가치를 일체 인정하는 않는 것부터 출발을 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슨 능력입니까? '안식의 능력'입니다. 안식의 능력은 창세기 1장에서 보면 '창조 완성'의 능력입니다. 이 창조 때에는 인간은 그저 피조되었을 뿐이지 일체 창조에 가담하거나 협조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없음'에서 '있음'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는 이 현상을, 말씀되시는 분의 생명주시는 능력이라고 합니다.그렇다면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분이 십계명 주신 당시의 하나님으로 관여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안식의 능력이 발휘되는 예가 바로 마태복음 12:10-12에 보면,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어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요한복음 5장 참조)즉 주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나 오늘날 주 되시는 예수님이나 한결같이 안식일을 남시기게 된 그 창조의 능력을 발휘하시면서 생명을 주십니다. 그저 생명을 주시는 것이지요. 나중에는 안식일이 그저 쉬는 날이 아니라 제사지내는 날로 변천되고, 신명기 5:15에서는 애굽에서의 구속 차원으로 대변됩니다. 따라서 안식일이란, 모든 창조에 주어지는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신약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안식일의 취지를 적용하시는 겁니다.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살리게 하시는 일을 말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을 인간들이 쉬는 날로 여기시면 안됩니다. 히브리서의 안식의 참여를 '일 안하게 되었음'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제대로 지킬 수 없었을까요? 그것은 일을 하나 아니하나 상관없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의의 열매가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약 때 와서 율법을 지켜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라는 질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든지 아니면 율법을 제멋대로 폐기처분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의 열매는 안나오기 마찬가지입니다. 의의 열매는 오로지 예수님의 행함만 의지하는 사람에게는 맺히게 되어 있습니다.(요 15: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re] 출20:8-11절에 대한 질문 - 안식일 신직수 2003-08-05 23:45:09, 조회 : 156, 추천 : 43
" " 따라서 안식일이란, 모든 창조에 주어지는 모든 일이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서 나옴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신약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안식일의 취지를 적용하시는 겁니다.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살리게 하시는 일을 말입니다 " "
오직 그리스도만 증거하기 위해 학문의 증진에 대한 욕구가 아주 많이 있었는데 목사님을 뵈면서 참 목사님은 학문에 대해 깊으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또 느낍니다.
또한 안식일에 이러한 주님의 의지가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구요? 하나님은 참으로 이해(설명할 수 없는 깊이와 체계)할 수 없는 분 같습니다. 우리들이 더욱 하나님을 알아야겠다는 생각(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이 납니다.
암튼 답변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선악과와 율법의 기능 김대식 2003-08-08 22:00:00, 조회 : 238, 추천 : 31
저번에 했던 질문인데 다시한번 정리하고파서 질문 드립니다
선악과에서 말하는 죄와 율법이 말하는 죄는 서로 연관성이 없이 그 기능적으로 별개의 것이라고 하셨는데, (아직 이해 안됩니다)
성경이 말하고픈 선악과를 통한 죄에 대한 의미와 율법에서 말하고자 하는 죄를 정리 좀 해주시고요,
선악과는 죄가 들어오는 개념에서 다루고, 율법은 '율법 외의 한 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롬3:21) 이라면
선악과 사고방식과 은혜의 사고방식을 두고 말할때, 죄라는 것이 율법과 선악과와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닌지요?
여전히 정리가 안됩니다 ^^ 질문도 맞는지 모르겠네요. 도와주십시요.
===================================================================[re] 선악과와 율법의 기능 이근호 2003-08-09 09:24:32, 조회 : 250, 추천 : 15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했을 때 없던 죄가 선악과의 존재를 통해서 인간 세계 안에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아담의 행위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을 들어온 것은,(롬 5:12) 인간들이 그토록 원했던 의가 처음부터 인간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알리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행위로 말미암아 의가 왕노릇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율법이 세상에 들어오기 전에도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성립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믿음으로 의가 되는 조상으로 등장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갈 3:8)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조차 오늘날 신약 성도들의 의인됨을 미리 보여주는 표상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을 인간이 결코 구원을 위하여 자기쪽에서 시작해야 될 일이 전혀 없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해서 인간들이 자기 구원을 위한 노력을 미리 포기할 위인이 아님을 하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왜냐하면 이미 죄의 세력 아래에 놓여 있기 때문에, 선악적 사고방식 이외에는 그 어떤 것은 진리로 간주하는 않는 채 죄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형편입니다. 따라서 430년 후에 주어지는 모세 율법은, 인간의 현 체제 안에서 과연 인간이 구원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기 위함입니다. 즉 선악과 따먹는 아담의 행위는 여전히 후손들 속에서 버젓이 살아있음을 확실히 해주려는 조치입니다. '∼하라', '∼하지 말라'라는 식이 아니면 인간과는 의사소통 자체가 되지 않는 정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믿으라"라고 해도 그것을 "∼을 행하라"하는 명령으로 바꾸어서 받아들이려 하게 됩니다. 예를들어 "예수를 믿으라"라고 하면, 인간들은 이것을 " '예수 믿기'라는 행위를 해야지만 구원이 된다"라는 식으로 이해버리는 겁니다. 이렇듯 뭐든지 율법화 시키고 난 다음 그것을 실천적 행위로 옮기는 식으로 살아가려는 인간의 실정을 하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거기에 맞추어서 율법을 넣어주신 것입니다.그런데 과연 의가 이런 식으로 인간 세계에 주어질까요?로마서 3:21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작전을 벌리십니다. 그것은 바로 '율법 외의 한 의'를 소개해 버립니다. '율법 외'입니다. 그러니까 의의 통로가 두 개 되어 버린 겁니다. 만약에 '율법 외의 한 의' 아니라 '율법 따라 한 의'라면 이것마저 인간들은 실천해 내려고 도전하게 될 것입니다. 선악과에 의해서 이미 죄에 점령당한 인간 세계는 율법에 의한 의에 대해서 마구 도전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막상 '율법 외의 한 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그것을 따낼 방도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단하는 식으로 해서 '율법 외의 한 의'를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되돌리려 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하는 일들이 바로 이 일입니다. '율법에 따른 의'만 남기고 '율법 외의 한 의'는 희석하는 작업을 이들은 하고 있습니다. 대중들 모두에게 납득이 되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을 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정론로 무참하게 짓밟는 조치도 모두 '율법 외의 한 의'를 불필요한 것으로 전제했기에 나온 행동입니다. '율법 외의 한 의'는 인간의 행함의 범주를 떠나 있습니다. '율법 외의 한 의'가 어디서, 어떻게 생기느냐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해 달라는 것이 사도 바울의 주문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는 가짜 예수 그리스도는, 도리어 인간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율법에 억매이게 하는 그런 구세주로 남을 것입니다.
선악과 나무는 처음부터 인간이란 선과 악과 무관하게 창조된 존재임을 알리기 위해서 나무입니다. 의도 인간에게 없었고, 악도 인간에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역을 아담이 악마의 유혹을 받아 침범하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아는 영역에 인간이 침입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창 3:22) 이로서 인간은 악을 알고 의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 결과는, 자기 자신은 결코 죄에서 못벗어나는 신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선이 뭔지를 아는 인간이 호락호락 물러설 위인들이 아닙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자신을 선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은 다 잡으려고 합니다. 이방인에게는 양심을 통해 이 작업을 하게 되고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통해서 이 작업을 하게 됩니다. 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 속에 있는 선악과 의식에서 벗어날 자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깡패 세계에도 의리 하나로 질서잡는다) 하지만 결과는?"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3-24)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육에 의한 율법적 행위를 포기하게 됩니다. 마치 배우자가 사별함으로서 더 이상 그 사람과 어떠한 관계도 남아있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롬 7:1-4)그러면 이제는 뭐가 되는 겁니까? 아무하고도 관계없는 자가 되는 겁니까? '율법 외의 한 의'가 자리잡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 나올 고백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나의 나됨은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의요 은혜로다"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의(義)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의'의 열매이다 고 합니다. 율법에 의한( 선악과적 사고방식에 기초한) 의가 아니라 '율법 외의 한 의'를 고백하고 증거하는 그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정리하면, 선악과는 우리의 과거의 기초에 대한 언급함이요, 율법이란 그것이 얼마나 오늘날 실제적인 삶의 원리로 자라잡고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하 하늘에서 내려준 측정 기구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자기 선악에 준해서 살아가는 피조물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율법 외의 한 의'로 제공된 그 사랑의 사슬로 인하여 살아가는 피조물입니다.이처럼 성도는 치말하고도 절묘한 하나님의 작전에 휘말려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義)의 왕노릇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으로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무리들, 즉 아담의 죄의 왕노릇을 증거하는 자들로부터 비난과 핍박을 받아가면서 벌리는 영적 전쟁터 안에서 살아갑니다.
===================================================================[re] 김대식님.이근호 목사님 강의중에.. 피옷입은자 2003-08-09 18:12:23, 조회 : 204, 추천 : 36
이근호 목사님 강의녹음 된것 중에 '선악과의 숨은뜻'이라는 강의가 있습니다. 창세기 설교 (03)선악과의숨은뜻(창3,1-5).MP3그것을 한번 들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 사이트에서 구할수 있을겁니다. ######################################################################################질문! 김규범 2003-08-20 08:21:31, 조회 : 212, 추천 : 37
에베소서4장 가운데 "분노하지말라 해지기전에 용서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re] 질문! 이근호 2003-08-20 16:41:21, 조회 : 211, 추천 : 38
>낮이나 밤이나 늘 용서할 마음을 갖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라는 겁니다.
######################################################################################목사님 삼위일체론과 양태론... 문지원 2003-08-21 07:39:48, 조회 : 215, 추천 : 39
뉴죠에서 양태론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이단이다 삼단이다 하면서 말입니다.삼위일체론을 목사님은 어떻게 보시며 또한 어떻게 알아가야 바른 신앙인지 설명 좀 해주시기 바랍니다.물론 설명으로서는 담아낼수 없는 것이겠지만 일단 말씀을 가르치시는 분이시니 가장 건전한 신앙관의 삼위일체론이 무엇인가? 에 대한 글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 목사님 삼위일체론과 양태론... 이근호 2003-08-21 10:54:03, 조회 : 323, 추천 : 39
삼위일체 뿐만아니라 모든사고(思考)가 다 그러하듯이, 성령을 받은 성도가 표현하는 하나님과 비성도가 표현하는 하나님이 다릅니다. 또 달라야 마땅합니다.
이점을 감안하지 않고 불신자까지 논리상 설득을 하기 위해 각종 용어들을 동원하면 안됩니다.
우선 불신자의 논리 전개의 경우, 자신의 논리적 한계성을 유감없이 노출시키면서 신론을 전개시킵니다.
즉 인간의 논리 구조에서는 1에서는 1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2에서는 출발하는 논리는 충실하고 합리적으로 합당한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2로 결론 짓게 되어 있습니다. 동양 철학이 그러합니다. 3에서는 3만 최종적으로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1→2가 되는 논리라든지, 1→3이 되는 논리라든지, 3→1이 되는 논리를 전개시켰다면 그 와중에서 반드시 논리적인 트릭과 불연속적인 비약과 위반이 있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찾아보면 반드시 찾아집니다.
그러면 1에서 1되는 논리 따로, 3에서 3되는 논리 따로 만들어 이 둘을 나란히 놓고 "신이다!"라고 외치는 방식은 어떨까요?
그것은 두 신에 대한 표현방식이 결합 불가능한 것으로 판정받아 두종류의 '삼위일체론을 신봉하는 것이 되며, 이런 식의 논리는 남들에게는 안들키겠지만 각 개인의 마음 속에서는 반드시 둘 중의 하나가 우위에 서겠다고 경쟁을 벌이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논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불신자의 신론은 사실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동어반복(同語反覆)'이라는 추가적인 내용이 없이 그냥 다른 개념으로 대체한 것에 불과한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너네집 어디있어?" "미장원 왼쪽에 있어" "미장원은 어디 있는데?" "우리집 오른쪽에 있지"와 같은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경우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합니까? 신자는 그리스도 이미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논리를 하나, 밥을 먹으나 잠을 자나 일을 하나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움직이게끔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본인이 그렇게 노력치 않더라도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을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따라서 방금 언급한 이런 마음 자세 안에서 하나님을 설명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와의 관련성 속에서 신(神)을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적인 표상 처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엘리야 선지자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부르면서 언약 속에서 하나님과 관련맺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본인이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예수님으로 말마암아 영으로 보냄을 입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예수님을 중심으로해서 신론이 전개됩니다. "존재론적으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역사 안에서 인간의 죄를 고려하고 고백된 사항을 다시 존재론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즉 성경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은, 인간의 근본적 죄성과 거기에 대한 부정성을 그 안에 탐고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달라 말씀드려서 예수님을 중심으로한 이러한 정리는 구속사적인 전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밝혀진 것이기에 이것은 다시 존재적으로 재정리 해서 새삼스럽게 우리 인간의 언어로 이해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인간을 자칭 신으로 군림하겠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존재론적인 신은 우리 인간의 언어가 감당을 못합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전에 소개했던 삼일위체의 관한 내용을 다시 실어드리갰습니다.
"수박, 바나나, 딸기가 한 개입니까?"라고 작물학자에게 물으면, 그 사람이 이렇게 답변할 것입니다. " '같은 한 종류가 맞습니까' 라는 식으로 물으시는 겁니까?"라고 말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물음은, 질의에 따라 답변이 달라지는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도 참 하나님이시기고 성령님도 참 하나님이십니까?" 물으신다면, 성경은 그렇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하나님은 세 분입니까?"라고 물으면 성경은, "한 분이다"고 답변합니다.(요 8:41/약 2:19)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접근하고 물음을 던지 인간 자체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사고구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헤아림을 하나님 나라 세계까지 확대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비로소 밝혀진 것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밖의 대상을 파악하는데 있어 實體論的(실체론적)으로 파악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自充的(자충적인-스스로 충족된 독립된) 실체로 간주하고 시작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도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세요. 우리가 얼마든지 파악해 낼테니까요"하고 덤빕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자충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으로 파악하십니다. 즉 우리 인간 배후에 누가 있다는 겁니다. 즉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과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네 배후에 세력에 의한 관계에 의해서 나온 것인줄을 네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활동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은 성령의 관계에 속한 사람과 악령과의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 이 두 종류 밖에 없습니다. 결코 자충적인 실체자가 아닙니다.
만약 성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행위와 활동만이 자충적인 것으로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0-31에 보면,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지혜와 예수님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죄사함에 있어 더 이상 미흡함이 있을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을 자랑하는 겁니다. 그러나 악령과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러한 자충적인 행위와는 별도로 추가적으로 독자적이라고 믿는 인간의 행위를 가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다소나마 인간의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랑'입니다. 고린도전서 1:29에 보면,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악령이 노리는 바는, 예수님의 공로에 흠집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자신을 계시하는 이유는, 인간이 사고하고 사유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 그 배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적하는 세력과 연계되어 있음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하나님 자신의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위일체론을 가지고 번지는 그 논쟁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불신(不信)성(그리스도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기 존재에 입각해서 신을 포착해 내려는 자아 중심성)의 실체를 새삼 구경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해야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신론에 대한 이해를 증거하면서 성도라고 자처하고 싶어하고 싶어하는 그 불신성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결국 이단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삼위일체론 가지고 측정해서는 아니됩니다. 삼위일체론 주장하는 이단들이 이단의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이것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계시에 대해서 최명규 2003-08-25 18:17:40, 조회 : 246, 추천 : 42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나뉘어지는 것입니까?만약 나뉘어진다면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차원이라면꼭 사람들이 말하는 일반계시는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일반계시라고 말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특별계시속에들어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re] 계시에 대해서 이근호 2003-08-26 07:18:36, 조회 : 286, 추천 : 32
>맞습니다.제가 주장하고 싶은 바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복음의 회복]이라는 책에 잘 나와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골 1:14-17) 피조 세계는 오직 예수님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그런데 방금 제가 언급한 이 사실은, 성령으로 지어진 성경 외에는 없습니다. 성경 말씀은 그냥 문자의 나열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사용하심에 따라 살아있고 권능이 발휘되는 산 말씀도 됩니다. 성경이 일반 간증집이나 일반 신앙서적과 차이나는 점이 바로 이런데 있습니다. 성경이 일반적인 신앙서적에 불과하다면,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라는 권위는 독자를 모독하는 말에 불과할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고 또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따로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말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겁니다. 계란 노른자는 계란 안에 들어 있는 것이지, 계란 따로 존재하고 계란 노른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 세계 안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은, 이미 유일한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즉 시편 19:1-6에 알려주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우선입니다. 성경은, 자연에 담긴 하나님의 뜻마저 그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에 있음을 제대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직신학자들은 '자연계시'를 주장할까요?그것은 '설득용'입니다. 즉 예수님만 증거하면 사람들이 안 믿을 것 같아서, 피조세계에 담겨 있다고 여기는, 의로움이나 은혜로움이나, 정의로움이나 양심이나 종교성이나 과학적 인식 같은 것을 발판으로 삼아 거기서 서서히 출발시켜 예수님의 구원의 효용성과 결부시켜 사람들을 보다 많이 천국에 보내겠다는 인간적인 계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소위 "신학이라는 것도 교회를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는 철칙에 따른 사고방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방식은 전혀 예수님이 원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의 사람이 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자신의 영을 준 자만이 예수의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 나오는 것은 장사하기 나름으로 얼마든지 끌어모을 수 있습니다. '좋은 아버지 되기 운동' 같은 것으로 유인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사회학적으로 보면, 종교적 이념이란 항상 같은 가족공동체 중심으로 전수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교회 다니면 아무래도 자손들도 교회 다니기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사람'이 된 자만이 진정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소위 '일반계시'를 철저하게 부정해 버려야 합니다. '없다'가 아니라 '소용없다'를 외쳐야 합니다.
############################################################################################인자 거역과 성령의 거역에 관한 질문 예병환 2003-09-08 12:34:55, 조회 : 202, 추천 : 41
마 12:31-32의 의미에 대하여 목사님의 강의 내용을 보면'
"육체의 표적은 병고침이고 성령의 표적은 귀신 추방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를 부인하는 사하심을 받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함을 못 받는다고 하신 것이다. ... 이 인자는 병고치는 표적인데 여기엠ㅏㄴ 매달리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병고치는 수준 밖에 안된다는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좀 자세히 해석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re]인자 거역과 성령의 거역에 관한 질문 이근호 2003-09-08 14:13:04, 조회 : 248, 추천 : 39
>사람들은 병고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에 접촉되려고 합니다. > '병고침'→악령이 추방된 것으로 간주함→성령(하나님)의 일 > >그러나 예수님은 죄사함의 차원에서 병고침을 감행하십니다. >즉 '죄에서 못 벗어나는 죄인들'→악령 추방→죄사함(병 고침으로 보여짐) > >상호 관심사가 다르지요. > >인간들의 '병고침=귀신 추방' 이라고 보는 인식은, '병없음=정상인'의 사고방식과 통합니다. 할렐루야 기도원이나 순복음 교단이나 이초석 교단이나 김기동 교단이나 다락방 운동, 부흥사류들이 이런 운동을 벌리는데죠. >즉 병을 실제로 고쳤으니 이는 곧 악령이 추방된 것으로 해석되고, 따라서 이것을 성령의 운동으로 봐달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표적관 밖에 안됩니다.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니"(고린도전서 1:23-24) > >그런데 예수님의 표적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표적관을 도리어 공격하고 엎어버리는 식으로 실시하십니다. 즉 분명 병고침을 행사하심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곧바로 죄없음과 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병고침의 주체를 둘로 분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인자(사람)가 한 것이 아니라고 나서시는 겁니다. >분명 예수님(인자)께서 기적을 베푸시므로서, 진짜 하나님의 표적인 사람이 못한다고 해버리니까 자동적으로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실시한 병고침은 하나님의 표적과 무관한 것이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가 했다고 보는가? >바로 성령님께서 인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표적을 남겼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또한 참된 하나님의 표적은 오직 인자되시는 예수님만이 남길 수 있는 자격자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습니다. > >하나의 '병고치는 일'을 두고서 예수님은, '인자'와 '성령'으로 주체를 분리시키는 방식은 다른 이들은 상상도 못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아 병을 고쳐내었다면, 그 병고친 자도 성령님과 함께 영광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들을 하기 때문이죠. > >그러나 예수님은, '인자'와 '성령'을 분명히 구분지어놓으시고,(이로 인해 하나님의 표적의 실내용은 인자 속으로 감취어진 비밀로 자리잡게 됩니다.)이 그 둘로 분류시켜 놓은 바른 이유에 대해서 합당한 이해가 부족한 자들에게는 죄사함 조차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실려는 참입니다. > >그것은 진정한 병고침은, 병고침이 아니라 죄사함에 있다는 사실을, 십자가(세상으로부터 그 내용성이 감취어진 비밀)를 통해서 밝혀 놓으시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 >즉 '병고침을 행사하시는자=죄사함을 행사하시는 자'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자의 병고침을 통해서 도리어 병고쳤다고 좋아들 할 입장이 아니라, "아 내가 진정 죄인이구나!"라는 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가 고기를 많이 확보받고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는 식으로 말입니다. >과연 이런 고백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불가능하지요. > >따라서 성령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인자를 믿지 못하는 자는 용서가 되되,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용서함을 받지 못하는 결과로 모든 것이 귀착되는 겁니다. >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병고치심은, 우리 인간이 죄인임을 확고히 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표적으로서 병고침입니다. > >'죄사함을 받아야 마땅할 죄인→병고침' 인식이지요.
############################################################################################엡5:22- 33 질문 김규범 2003-09-10 06:45:15, 조회 : 188, 추천 : 57
이같은 구절을 이미 이혼한 남편되었던 자, 아내되었던 자에게는 어떻게 설명을 해야합니까?교회 다니기전, 예수믿기전 이혼을 했고 그 이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현시대 이혼이 증가하는 입장에서 교회에서 어떻게 이혼을 마음먹고 준비하는 부부에게 설교를 하고 이해를 도와야합니까?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도 될까요? 이 부분은 제가알고 있는 부분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성령에 관한 부분입니다. 제가 알고 배운 것은 성령세례는 예수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때 성령세례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은 무엇입니까?이 기름부음은 단회적입니까? 영구적입니까? 매번 매번 회개하고 구할 때마다 성령께서 설교자에게 신자에게 역사하시는 것입니까? 또한 성령충만은 예수님(말씀)으로 충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행4:8, 31)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는지요? 이해가 아직 정확히 안되는 것은 사도행전 8:14-17 부분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성령세례와 관련하여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을 뿐 성령을 받은 적은 없다고 합니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받을 때 성령을 받는 것 아닙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re] 엡5:22- 33 질문 이근호 2003-09-10 13:20:04, 조회 : 199, 추천 : 40
1. 에베소서 5:22-33에 나오는 말씀은, 기왕에 이혼한 분이나, 이혼하려고 결심했던 분에도 상관없이 적용됩니다. 왜냐하면 아내 사랑하기를,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목숨바치듯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자는 아에 남편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죠,즉 이혼하지 않고 같이 부부로 살아도 복음 안에서 하나 되지 못하면 영적으로 어디까지나 남남입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남남이기에 이혼이 아에 성립되지 않겠지요. 왜냐하면 진정한 영적인 부부관계는 부부이전에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엡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믿지 않는 배우자가 헤어지기를 요구하거든 헤어지세요. (고전 7;15) 안헤어지려고 하거든 데리고 사세요. 어쨌든 영적 부부와 가정은 그 자체가 교회이기에 머리가 주님에게 있어 결코 헤어질 수 없는 입장입니다.
2. 인간들이 임의로 성령님을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에 의해서 움직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에 대해서도 성령님보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현재 예수님의 주도하에 벌리시는 주님의 일에 참여케 하십니다. 바로 이 참여가 그 인간의 자질에 일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움직이게 됩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사역이 일회성이나 되풀이되는 반복성이냐고 물으시면 잘못된 질의입니다. 물으려면 예수님께서 현재 일을 어떻게 하시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자신의 일에 참여시키시기 때문에 주님의 일이 일회성입니까 아니면 반복성입니까 라고 물을 처지가 안됩니다. 마치 이삭이 자신을 제물을 바치려는 아버지 아브라함보고 묻기를, "아버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있습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제 3의 입장에 있는 자기 백성을 예수님을 자신의 일의 헌신자로 소모시켜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의 행위도 생각은 예수님의 행위에 덮쳐져서 남는 것은, 그리스도 의의 증인 노릇만 될 뿐입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이란 '성령의 임재함'의 구체화된 상태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말씀)이 성령에 권능에 의해서 성도에게 주어질 때, 성도는 성령에 의해 '성령 충만'을위한 기도가 실시됩니다. 이 기도를 통해 성도는 자신의 감추었던 죄가 드러날 것이고 (왜냐하면 성령 충만은 원래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었음이 분명해 질 것이니까요) 그 죄를 극복해주는 은혜의 왕노릇을 다시금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령 충만은 계속해서 성도에게 벌어지게 되는 현상입니다.
3. 성령이 임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인간은 종교적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입니다. 형식은 결코 인류 역사상 없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형식으로도 취하게 마련입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 세례임을 그 본문은 도리어 강조하고 있지요.
############################################################################################구약에서 안식일날 나무를 한 나뭇꾼은 왜 큰죄가 되는 것인가요? 정지원 (Homepage) http://crosslife.or.kr/ 2003-09-10 20:16:21, 조회 : 163, 추천 : 41
구약에서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였습니다.그래서 안식일날 나무를 한 나무꾼이 죽임을 당한 구절이 성경에 나옵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로 볼때 그 나뭇꾼이 정말 죽어야만 하는 죄를 지은 것인가요?
========================================================================[re] 구약에서 안식일날 나무를 한 나뭇꾼은 왜 큰죄가 되는 것인가요? 이근호 2003-09-10 21:29:28, 조회 : 215, 추천 : 35
>진작 죽어야 될 자가 그동안 안식일의 의미를 아는 조건(모세 언약에서 나온 은혜성) 덕분으로 그나마도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나뭇꾼 자진해서 더이상 은혜가 필요치 않다고 언약 파기해 버렸으니, 하나님도 "좋다, 정 그렇게 나온다면 원래의 너 모습대로 돌아가게 할 수 밖에 없지"해서 죽여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있다고들 하나 사실은 대부분 죽은 자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자, 곧 예수 그리스도 중심관으로 살지 않는 자는 다 죽은 자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상황은 이러한 현실성을 계시용으로 구체화한 상황입니다.
############################################################################################복음안에 있는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가지면 안되는지? 정지원 (Homepage) 2003-09-10 20:17:13, 조회 : 152, 추천 : 35
요즘 북핵문제다,북한의 남침땅굴이다 한총련 합법화를 하느냐마느냐등등 정말 여러가지 정치문제가 혼란스럽고 한국이 풍전등화같은 상황에 처한것 같습니다. 혹자는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좌익과 우익중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말도 말습니다. 그런때에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언행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무리 세상나라가 복음과는 동떨어진 곳이라지만 그래도 나라가 있으므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는것 아닌가합니다. 만약 나라가 공산화된다면 신앙의 자유도 억압을 받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복음안에 잇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에 대한 합당한 행동이 무엇인가 글도 쓰고 운동도 참여하고 그러는 것이 합당한지 궁금합니다.
========================================================================[re] 복음안에 있는 사람이 정치에 관심을가지면 안되는지? 이근호 2003-09-10 23:07:40, 조회 : 238, 추천 : 40
>복음 안에 있는 사람도 상황상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개인적인 견해를 지닐 수 밖에 없습니다. 가정 환경이나 성장 과정, 교육 환경을 통해서 은연 중에 자기 견해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그런 땅의 일이 얼마나 헛점이 많으며, 각자의 욕망과 욕망들을 정당화 하면서 살아가는지, 그 죄성을 날마다 더 깊게 알아가도록 성령께서 인도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만이 구원의 능력이 된다는 그 사랑을 크게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안식일날 치료하는 것은 일이 아닌가요? 그리고 구약의 이혼과 율법을 명령한 것에 대한 의문 정지원 (Homepage) 2003-09-10 20:24:04, 조회 : 200, 추천 : 37
저는 예수님의 언행이 모두 동감이 됩니다. 그러데 유독 딱 한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그것은 왜 예수님은 안식일날 하지 말아야 하는 병자를 치유했는가입니다.
병자를 치유하는 것은 노동이 아닌가요? 만약 그것이 노동이 아니라면 구약에서도 안식일날 사람을 구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말인가요? 그러면 구약에서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일이 아니라 괜찮고 나무를 하는 것은 죄가 되어서 죽어야 하나요? 왜 치료는 괜찮고 나무하는 것은 죄가 되나요?
그리고 왜 구약에서는 이혼증서를 주고 이혼하라고 했나요?너희의 완악함으로 그랬다고 하지만 구약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으니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리고 지키지도 못할 구약의 그 어려운 율법은 하나님은 왜 구약사람들에게 명령을 했는지요.그리고 못지키면 벌주고 한 것이 좀 하나님이 심한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뭔지요?
========================================================================[re] 안식일날 치료하는 것은 일이 아닌가요? 그리고 구약의 이혼과 율법을 명령한 것에 대한 의문 이근호 2003-09-10 23:03:54, 조회 : 230, 추천 : 31
>인간은 처음부터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행하면서 전 인류에게 계시로 알리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율법으로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3: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