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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 교회를 넘어서를 읽고 ] - 2003/3/5 손성식묻고답하기-

본 저서는 진짜 교회인가? 아니면 가짜 교회인가?를 칼질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장하다. 저자는 마지막 싸움을 하려는 듯이 비장한 각오로 칼(언약)을 들었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가 저자에게 교회론을 왜 이런 방식과 내용으로 전개해야 하냐고 묻는다면 저자에게 실례일까? 저자는 현실 속에서 교회 아닌 것들이 교회인체 하는 것이 꼴보기 싫어서 칼을 들었을까? 어쨋든 본 저서는 비장함이 감돈다.
도대체 무엇이 저자로 하여금 교회에 대해서 이러한 시각을 갖게 했을까? 아마 본 책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언약"이라는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저자에게 있어서 "언약"은 뭔가 아주 특별한의미를 주는 것 같다. 아마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저자는 바로 이 "언약"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저자가 말하는 "언약"을 제대로 모른다면 사실상 신앙생활이란 불가능한것 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면 도대체 저자는 "언약"속에서 무얼 발견했길래 이다지도 흥분하는 것일까? 그것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이다. 저자에게 있어서 십자가 사건은 단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발판이 아니라 십자가 지셨던 주님에 의한 새로운 창조활동이며 또한 분리작업이다. 또한 십자가 사건은 이천년전에 일어났던역사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묵시적 현상이다.
인간의 죄(욕망)가 분출되는 현장속에서 주님의 은혜성으로 인한 회개가 일어날 때 마다 교회는 묵시적 존재로서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에게 있어서 교회의 역사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저자가 말하는 교회란 날마다 밀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성으로 인하여 회개하는 묵시적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가 제목을 붙인 "교회를 넘어서"라는 것은 부조리한 현실교회를 넘어서서 뭔가 괜찮은 교회 해보자라는 교회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간섭하시는 주님의 은혜성 안에 놓여 있는 묵시적 공동체로서 교회임을 잊지 말자는 외침인 것이다.

@ 평가 @
본 저서를 통해서 저자가 비장한 각오로 예수 그리스도를 편들고 있다는 것은 훌륭하다. 하지만 교회를 다룸에 있어서 기다림과 용납 그리고 인내하는 성품적이며 인격적인 모습들을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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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를 넘어서를 읽고
이근호 2003-03-05 15:21:59, 조회 : 273, 추천 : 13

>회개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회개없는 기다림, 회개없는 인내는 오기나 자기 아집에 불과합니다.
회개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방해받지 않고 나오게 되면, 그것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증거'로 작용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린도전서 15:10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손성식 목사님은 놓치면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증거'를 ' 교인들의 기다림과 인내'로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자기에게나 타인에게나)'교회 있음'이나 혹은 '교회의 기다림이나 인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약적으로 봐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가능한 고유의 능력이고 고유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 증거로 사도행전 3:16에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로 난 믿음'이 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이방인에게 성령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팔레스틴 초대 교회나 안디옥의 그 어떤 교회에 인내나 기다림이 토대가 되어 제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인내와 기다림이 하나님의 구원에 있는 기초 요소로 집어넣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때 교회의 인내와 기다림이 교회 요소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즉 교회란 과연 일반 사회가 어떤 점에서 차이날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의를 왜 하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눈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분명히 존재하기는 존재함'으로 확인받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러합니다.

손성식 목사님께서 로빙크의 저서 '그리스도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을 책을 논평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서 손성식 목사님께서 그 저자의 치명적인 헛점에 대해 그냥 넘어갔습니다. .
그것은 다름아닌, '대조사회'로서의 교회관입니다.
교회는 사회가 아닙니다. 자꾸 사회로보려고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그 사회성 중심으로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거절 할 수가 없어요. 즉 관심사가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분리되는 겁니다.
만약 손성식 목사님께서 교회의 인내와 기다림을 사회적인 면에서 접근해서 교회답게 확인하고 싶다면 그 증거는 더 이상 성경에서 찾을 길이 막연하고 교회사에서 아마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교가 그런 면에서 모든 정보와 주도권을 다 쥐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를 들면, A라는 교회와 B라는 교회가 있다고 합시다.
A가 B보다 더 인내성 있고 자라남에 있어 더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어디서 찾습니까. A가 제시하는 기준에서 찾을 겁니까 아니면 B에서 제시하는 기준으로 할 것입니까? 이 경우에 성경에서 찾는다는 말은 성립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A,B 두 교회다 성경에서 기준을 두었다고 자부하고 나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또 더나아가서, 인내와 기다림이란,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요건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유동 변수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공산치하의 교회와 나치 치하의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가 더 인내성이 강하고 기준으로 내세울 만합니까? 또한 그저 평화롭게 조용한 교회가 과연 인내성이 아예 없는지 아니면 잠복되어 있는 경우인지를 제 3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교회를 사회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관점을 섞여넣는 것은 논리적으로 따져서 '범주 오류'에 해당됩니다. 마치 "최씨 집안 사람도 여군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는 식으로 여군을 보는 관점말입니다.
왜 성경에서 교회를 이런 사회적 관점을 허용할 수 없는가 하면, 교회론이 단독으로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론에서 그리스도론으로, 그리스도론에서 성령론으로, 성령론에서 교회론이 드러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맨처음 언약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맹세(히브리서 6:13)로만 이루어지는 일방적 프로젝트이기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 에베소서3:9) 여기서 인간들의 사회적 인식(달리 말해서 理性)을 분석의 잣대로서 써먹을 기회를 전혀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지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믿고 난 뒤에도 과연 교회답냐 아니냐 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은 자칫하면 믿음이 너무나 어설프서 행함(인간의 지식과 이성)에게 믿음 자체를 다지고 또 다져달라고 애닳게 사정하는 식이 됩니다.
진정한 교회론은, 교회의 존재성에서 출발하면 안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성령의 일관된 원칙에서 근거를 찾아야 하며 그 성령론은 예수님이 하신 그 업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미 창세전에 맹세하시고 약조하신 그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영원한 원칙이 바로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와 살로서 그 언약을 완성하므로서 더이상의 구원의 바탕을 남기지 않습니다.
손성식 목사님 ,
교회론를 탐구하면서 결국 이것만이 증거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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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를 넘어서를 읽고
손성식 2003-03-15 10:34:10, 조회 : 143, 추천 : 12

>>회개 안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화개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와 은사를 방해받지 않고 나오게 되면, 그것이 또 다른 이에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증거'로 작용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고린도전서 15:10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손성식 목사님은 놓치면 안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증거'를 ' 교인들의 기다림과 인내'로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자기에게나 타인에게나)'교회 있음'이나 혹은 '교회의 기다림이나 인내'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약적으로 봐서 '하나님의 이름'만이 가능한 고유의 능력이고 고유의 권한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 증거로 사도행전 3:16에서 베드로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로 난 믿음'이 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보게 되면, 이방인에게 성령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팔레스틴 초대 교회나 안디옥의 그 어떤 교회에 인내나 기다림이 토대가 되어 제공되지 않고 있습니다. 즉 교회의 인내와 기다림이 하나님의 구원에 있는 기초 요소로 집어넣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때 교회의 인내와 기다림이 교회 요소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즉 교회란 과연 일반 사회가 어떤 점에서 차이날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의를 왜 하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눈으로도, 역사적으로도 '교회가 분명히 존재하기는 존재함'으로 확인받고 싶은 충동 때문에 그러합니다.
>
>손성식 목사님께서 로빙크의 저서 '그리스도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을 책을 논평했습니다. 그런데 그 글에서 손성식 목사님께서 그 저자의 치명적인 헛점에 대해 그냥 넘어갔습니다. .
>그것은 다름아닌, '대조사회'로서의 교회관입니다.
>교회는 사회가 아닙니다. 자꾸 사회로보려고 하면, 하나님의 계시가 그 사회성 중심으로 확인하고 싶은 유혹을 거절 할 수가 없어요. 즉 관심사가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분리되는 겁니다.
>만약 손성식 목사님께서 교회의 인내와 기다림을 사회적인 면에서 접근해서 교회답게 확인하고 싶다면 그 증거는 더 이상 성경에서 찾을 길이 막연하고 교회사에서 아마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주교가 그런 면에서 모든 정보와 주도권을 다 쥐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를 들면, A라는 교회와 B라는 교회가 있다고 합시다.
>A가 B보다 더 인내성 있고 자라남에 있어 더 진보되었다고 할 수 있는 기준을 어디서 찾습니까. A가 제시하는 기준에서 찾을 겁니까 아니면 B에서 제시하는 기준으로 할 것입니까? 이 경우에 성경에서 찾는다는 말은 성립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A,B 두 교회다 성경에서 기준을 두었다고 자부하고 나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또 더나아가서, 인내와 기다림이란,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요건에 적응하고 대처하는 유동 변수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공산치하의 교회와 나치 치하의 교회 중에서 어느 교회가 더 인내성이 강하고 기준으로 내세울 만합니까? 또한 그저 평화롭게 조용한 교회가 과연 인내성이 아예 없는지 아니면 잠복되어 있는 경우인지를 제 3가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교회를 사회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그 관점을 섞여넣는 것은 논리적으로 따져서 '범주 오류'에 해당됩니다. 마치 "최씨 집안 사람도 여군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는 식으로 여군을 보는 관점말입니다.
>왜 성경에서 교회를 이런 사회적 관점을 허용할 수 없는가 하면, 교회론이 단독으로 수립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론에서 그리스도론으로, 그리스도론에서 성령론으로, 성령론에서 교회론이 드러나는 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맨처음 언약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맹세(히브리서 6:13)로만 이루어지는 일방적 프로젝트이기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 에베소서3:9) 여기서 인간들의 사회적 인식(달리 말해서 理性)을 분석의 잣대로서 써먹을 기회를 전혀 주지 않으시는 겁니다. 따라서 구원은 단지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 믿음으로만 가능합니다.
>따라서 믿고 난 뒤에도 과연 교회답냐 아니냐 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은 자칫하면 믿음이 너무나 어설프서 행함(인간의 지식과 이성)에게 믿음 자체를 다지고 또 다져달라고 애닳게 사정하는 식이 됩니다.
>진정한 교회론은, 교회의 존재성에서 출발하면 안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성령의 일관된 원칙에서 근거를 찾아야 하며 그 성령론은 예수님이 하신 그 업적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이루어지며,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이미 창세전에 맹세하시고 약조하신 그 뜻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그 영원한 원칙이 바로 '언약'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와 살로서 그 언약을 완성하므로서 더이상의 구원의 바탕을 남기지 않습니다.
>손성식 목사님 ,
>교회론를 탐구하면서 결국 이것만이 증거되어야 되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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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를 넘어서를 읽고
손성식 2003-03-15 10:51:07, 조회 : 157, 추천 : 14

교회를 다룰 때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왜 교회로 부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무엇을 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이 부각되어야 합니다. 즉, 우리를 신자답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이 배어있다는 것이 밝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개인적으로 하시지 않고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이유는 신자답게 되어 가는 것이 관계성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자다움의 자질과 본질로써 요구하시는 것이 사랑인데 이것은 혼자서 혈서 쓰는 문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됨은 관계성속에서 빚어지는 성품적인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다룸에 있어서 기다림, 인내, 용납이 필요하다는 것은 신자됨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실패속에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하여 기다림, 인내, 용납함과 같은 주님의 성품을 배우지 않을까요! 과연 이 부분이 비장함만 가지고 되는 것일까요! 목사님이 주장하시는 증인의 삶속에도 이런 내용들이 들어있지 않나요. 우리는 매일 매일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신것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배우며 삽니다. 누구를 통해서지요. 내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아닙니까!. 얼마나 우리 자신이 못났는지를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교회를 다룸에 있어서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럼 평안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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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교회를 넘어서를 읽고
이근호 2003-03-15 12:42:11, 조회 : 165, 추천 : 13

>하나님께서 성도를 그리스도 몸(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은 머리되시는 그 아들을 이 세상에서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즉 교회의 교회됨을 증거하기 위함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곤 하는 숱한 조연들이 있고 또한 시청자들은 그 조연급 역할이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지 쓸데없이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언제 중생했고 나중에는 어디서 살았을까? 또는 사도 바울과 천막장사에 동업했는 그 동업자는 신자일까 아닐까? 하는 것이 궁금한 것처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내가 나이 80살이 되어도 계속 예수 믿고 있을까 아니면 배도할까? 내가 만약에 도중에 믿음에 파선하면 나로 믿는 사람들도 같이 지옥갈까? 하는 궁금증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궁금증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겨냥해서 교회론이나 성경이 해석되어서는 아니됩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 버리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 자신의 신자됨이라든지, 교회의 교회다움을 증거하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근본 취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 대우주의 항상 영원한 주연이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만이 그리스도의 몸이 지향할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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