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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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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 2002-09-14 - 17묻고답하기로마서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 2002-09-14 - 17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엄기욱 (Homepage) 2002-09-14 00:43:39, 조회 : 316, 추천 : 26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바울은
롬 8:21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라고 쓰고 있습니다.
이 말대로
인간의 죄로 인하여 파괴된 심령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 주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 작업이고
이것이 바로 영원한 복음의 주된 내용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성경 말씀의 문자적 의미 그대로만을 받아들이는 유대의 빛을 훌쩍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로운 빛으로 파헤쳐 이해했다는 이 한 가지 일만으로도
그는 자연적 계도를 넘은 빛의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을 위하여 고난 속에 자기 목숨을 불태우면서까지 생명을 키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생명을 키우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하는 일인 때문이지요.

바울은
이 생명으로 율법주의와 싸워 믿음으로 승리했고
단독으로 복음을 위하여 세계를 정복했으며
이방인의 사도로
그 소명을 불태웠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육체에 채웠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율법주의와의 전쟁을 승리함으로 믿음으로 얻는 의를 세운 일입니다.
처음에는
바울 자신도
율법주의의 감옥에 갇힌 유대교회와 같은 길을 걸었으나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율법주의의 철옹성을 깨뜨릴 수 있는 새 의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진 반항세력과
율법을 옹호하여 복음(그리스도)에게 돌을 던지던 악,
그런 암흑의 힘이
이제는 뒤집혀 복음을 안고 목숨 걸어 율법주의와 싸웁니다.
그의 옛 의식이 혁신되어 생명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기적에 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그 후 바울은 단독으로 복음을 안고 문자그대로의 박해(고후 11:23-27)와 피를 무릅쓴 고독의 걸음으로 세계를 정복합니다. 그에게 일어난 산 힘! 이는 인간의 예사로운 감격이나 감정, 결의, 인간의 주체의식 등을 가지고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끓는 피로 뜨거워진 인간 가슴의 온도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기에 인간 혈육의 힘은 분명 아닙니다. 바울의 복음에 의한 세계정복의 능력은 분명 인간의 피를 능가한 산 피의 능력이었습니다. 곧 사울이라는 옛사람의 피 속에 수혈된 십자가 새 생명에서 나온 산 피의 능력이었지요. 그 피야말로 바울이라는 새 이름으로 거듭난 사람에게 주어진 산 능력이 되었으니 그리스도의 피는 이런 의미에서 귀하기 이를 데 없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내면에 일어나는 이 같은 변화야말로 죄 사함을 주는 그리스도의 피의 참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듯 그저 은혜로 지은 죄나 없이 하여 주는 그런 싸구려 피에 의한 죄 사함의 의미는 적어도 아닌 것이지요.

바울로 하여금 복음만을 지닌 채 가난과 고독의 발걸음으로 사망의 골짜기를 건너고 산을 넘어 세계를 주름잡게 한 '십자가 도'의 능력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가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알고 율법에서 얻을 수 없었던 생명의 능력을 그는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 찾아 자기 생명으로 충당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의 생명의 기쁨이었고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진리의 힘을 체득한 믿음이었으며 온갖 죄를 덮는 사랑에서 우러난 믿음에서 주어진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이 이전 인간 지식으로 쌓아올린 율법의 권위와 옛날 조상 때부터 전통으로 연마된 율법의 지대한 영향력들 아래 있을 때 그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을 만큼 큰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을 향하여 전도의 발걸음을 내딛게 한 것은 율법에 대한 그 열정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이었지요. 왜냐하면 율법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은 율법주의가 만들어낸 '자기 의'를 인하여 이미 흐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흐려진 빛으로 세계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요.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로 바울은 율법주의의 어두운 시야를 걷고 복음으로 밝아오는 내일의 공명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눈이 열렸습니다. 오늘 흘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음이 율법에 갇혀 있는 죄인의 눈물이라면 복음으로 웃을 승리의 내일은 은혜에 넘쳐 춤추는 이방인들의 기쁨인 바 율법을 안은 유대인 슬픔과 복음을 안은 이방인들의 기쁨을 그는 대조하여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인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바울로 하여금 복음을 들고 기쁨으로 산을 넘고 골짝을 건너도록 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그 일은 도리어 반가운 수고였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율법과 복음의 현저한 차이입니다. 율법(율법주의)은 말씀의 본질적 의미로부터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자연적 의미 그대로의 글자 안에서만 생명을 찾기에 실제 생명을 얻게 하지 못하고 다만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뿐이며 동시에 오히려 외식, 위선과 형식주의에 갇히게 만들지만 율법을 능가하는 복음은 말씀의 겉 의미보다는 그 본질적 의미에 대한 이해의 회복으로 인하여(주님께서 구약 성경을 재해석 해주신 것들 참조) 참되고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죄인은 이제 악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기쁨으로 준수하는 새 생명의 삶을 살게되는데 이것이 곧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인정을 받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새 생명을 이 땅에 심고자 주님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 위에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이러한 이해, 그리고 신적 진리로 오신 말씀에 대한 이러한 이해야말로 바울의 발걸음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요. 사울이 바울로 변하는 동기로부터 그의 대사도로서의 소명의 근거도 이 빛에 기인합니다.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이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려..."(행 9:3)

사실 이면에 숨은 뜻을 캐지 않고 쓰여진 말 그대로만 보자면 바울의 힘은 은혜를 따라 입혀진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그리고 서신 서두에 이런 고백도 곁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나 바울은..."(롬 1:1) 이 고백만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 일했지 아버지의 아들로서 일하지는 않은 듯 보입니다. 종은 은혜로 살고 일하며 아들은 사랑으로 살며 사랑의 기쁨에서 일합니다. 은혜는 종과 주인의 주종 관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일하는 목적이 다르고 충성이 또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종은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자기 살기 위한 목적으로 일을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서 나온 기쁨으로 일합니다.

그러면 이런 반문을 던져봅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인한 감사 때문인가 아니면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인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봉사하였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수일같이 여겼더라."(창 29:20)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본질에 있어서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는 성격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또 사랑(좋아)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일합니다. 돈을 사랑(좋아)하면 돈벌려고 또 권력이나 명예를 사랑하면 권력이나 명예를 얻으려고 애씁니다. 얻으면 기뻐하고 못 얻거나 잃어버리면 슬퍼함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좋아하는 것) 때문이지요. 이처럼 사랑은 그 사람의 소중한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에 만일 어떤 피할 수 없는 외부의 사정만 없다면 사람은 은혜를 위하여 일하지 않고 그의 내면에 형성된 사랑 따라 행하도록 허용된 것이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은혜의 성격을 보자면 그것은 거저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닌 생명이나 목숨도 인간의 공로 없이 거저 주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먹고 입고 쓰며 사는 일체의 만물도 하나님께로부터 거저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 은혜를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에 은혜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을 만큼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마음만큼은 오직 사랑 때문에 일을 합니다. 바울도 사실은 사랑으로 일한 것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위하여 열심을 낼 때조차 조상들의 율법을 사랑했기 때문에 열심이었지요. 율법에서 은혜를 입으려고 율법에 열심을 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조상의 전통과 조상들에 약속된 축복의 유산을 얼마나 소중히 사랑했던가요. 조상의 규례, 율법은 바울이 생명으로 여기면서까지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정성껏 따랐던 것이지요.

바울은 또한 자기동족과 율법적 혈육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는 골육친척들의 구원 얻는 일이라"(롬9:3)고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이 동족사랑에 열심을 낸 만큼 율법 없는 이방인 곧 율법을 어기는 자를 율법에 따라서 무척이나 미워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율법과 율법의 동족에 대한 '사랑' 때문이고 율법과 동족에 대한 '은혜'의 감정에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사랑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일한다고 계속 주장합니다. 어떤 것이 바울의 진실한 마음이었을까요? 참으로 하나님께서 바울 같은 사람에게 일을 맡기시고 시킴은 은혜로 맡기고 은혜로 일을 시키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은 강제노동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기쁨으로 일할 수 있고 억지로 일하는 것은 그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억지 일은 그의 참 마음에서 우러난 진실함이 없어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들 수 없어요.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심으로 일을 맡기셨기 때문에 사람은 사랑에서 나온 기쁨으로 일해야 합니다. 기쁨은 사랑에서 오고 은혜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요. 은혜는 주인이 종에게 베풀므로 종은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고 사랑은 주는 기쁨 때문에 주고 더 주며 도리어 주지 못해 애탑니다. 실제 하나님 나라는 이런 곳입니다. 종은 은혜를 받음으로 살지만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여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기쁨으로 살지요. 그러므로 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그 사건을 주님이 사람에게 은혜를 입히는 수단으로 바라보기 보다 사람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 죄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한 사랑의 역사로 바라봅니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 고난처럼 크고 큰일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이 큰 희생의 고난이 은혜를 위한 일일까요 아니면 사랑을 위한 희생의 일일까요? 바울은 고전 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라고 말했는데 이 능력이 십자가 사랑에서 우러난 능력인가요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인가요? 바울이나 우리가 받는 바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 사랑으로 말미암은 구원인가요 아니면 은혜에 의한 구원인가요? 은혜의 구원에 그친다면 주님의 십자가 사랑은 아주 헛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바울은 '내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함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 15:10) 라고 모순된 생각을 펼치는 듯 보입니다. 차라리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은 나의 수고는 더 크고 더 많은 기쁨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라고 했으면 얼마나 어울리는 말이었을까요. 어찌 바울의 생각이 이런 착각 속에 있을 수 있는지...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은 조상으로부터 물려진 약속이 있는 율법을 귀중히 알았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것을 아끼고 따르며 자랐습니다. 그 율법을 사랑하려고 무진 애를 썼지요. 그러나 율법은 결단코 사울을 사랑하지는 아니했고 도리어 엄중히 명령하고 율법을 철저히 지켜줄 것만을 강요하였습니다. 만일 요구에 불응할 때 율법은 계약 불이행으로 가차없는 처단만이 있을 뿐이었어요. 용서도 자비도 없습니다. 이를 성경은 '율법에는 두려움이 있고 두려움에는 형벌이 따른다'(요일 4:18) 고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라는 위협적인 인식을 자신의 체험으로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법보다 은혜를 사모하게된 동기이지요.

그러나 그 은혜는 바울 신앙의 끝맺음이 아니고 새로운 것, 곧 사랑을 찾는 과정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롬 6:15절에서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이는 은혜의 불완전함을 암시해줍니다. 무엇인가 보다 더 완전한 것이 있음을 그는 느낀 것이지요. '종은 은혜로 일하지만 아들은 사랑으로 일한다'는 것을 바울이 과연 몰랐을까요? 바울의 가슴에 일어나는 산 열정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기 자신에게 당연한 만족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무치는 부족감에 휘몰렸습니다. 이 부족감은 사랑은 없이 그저 냉정하기만 한 계약을 저 스스로 사랑한 것에서부터 생긴 것임을 이제 자각하게 된 것이지요.

바울은 가슴 깊은 곳을 더듬었습니다. 가슴은 따뜻했어요. 그는 자기 가슴의 따뜻함과 맞닿는 따뜻함을 그리워했습니다. 그것은 사울을 바울로 변하게 한 주님의 사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사랑만이 오직 '자기 의'에 갇혀있던 사울의 눈을 뜨게 만든 것이지요. 그럼에도 바울은 이 사랑을 자신의 서신에 적지 못하고 대신 은혜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사람들은 율법으로 인하여 '인간에게서 비롯된 의'에 익숙해있었기에 이를 먼저 수정해주는 일이 시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랑을 내세우기에는 사람들은 율법에 발목이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는 묵묵히 사랑을 은혜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13:10) 라고 밝히면서도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엡 2:5) 라고 말하며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은 믿음이요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갈 5:14) 라고 말로는 밝히면서도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때문인가 아니면 사랑 그 자체에서 선함을 발견하기 때문인가?

주인에게 은혜를 받으면 더 받기 원하는 것이 종의 속성입니다. 은혜의 성격은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며 이는 세리도 할 수 있는 일이지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종의 한계요 그는 아들과는 달리 참된 그 가업의 계승자는 아닙니다. 사망의 몸에서 구원함을 받음이 하나님 사랑 때문인가요 아니면 은혜 때문인가요?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아픈 그 희생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세상을 이만치 사랑하신 하나님 자비와 사랑을 본받기 위함인가요 아니면 단순히 죄인에게 피 공로를 인한 죄 사함의 은혜를 입히기 위한 수단적 고난인가요? 바울은 사람들이 은혜를 힘입어 사랑에 이르도록 하려 했던 것이지 은혜를 받음으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고 기뻐 감격하라는 의도로 그의 서신을 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서신은 겉으로는 은혜를 앞세우면서도 사실은 삶 속에 나타나는 사랑만이 참 생명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요.

구원은 은혜를 받음으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사랑의 열매를 산출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없는데 그리스도 피의 은혜로써 구원을 얻었다고 기뻐한들 그 구원이 참이 되겠습니까? 구원은 사람이 속에 있는 사랑의 따뜻함을 외부에 나타냄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은혜로서는 감히 따라올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생명입니다. 본래 율법 안에 갇혀있을 때는 은혜를 거치지 않고서는 사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생명의 성장질서인 것이지요. 이는 마치 사람은 처음 믿음을 거쳐야 비로소 십자가 사랑으로 자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런 까닭에 바울은 율법주의에서부터 출발한 사도이므로 은혜의 사도이고 요한 사도는 처음부터 예수님 사랑을 직접 받아 그것을 기록에 남긴 사랑의 사도인 것이지요. 이러함이 바로 생명의 성장과정의 진실상을 밝히는 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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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이근호 2002-09-14 13:48:53, 조회 : 399, 추천 : 34

귀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참되고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되는 것로 알고 있습니다.

또 귀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사랑의 따뜻함을 외부에 나타냄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귀하께서는 또 귀하께서는 다음과 같은 용어를 들고 나옵니다.
"이러함이 바로 생명의 성장과정의 진실상을 밝히는 일들입니다."

'생명의 성장과정',
생명도 성장합니까? 즉 예수님의 피와 살이 성장해야 생명다운 효력을 낸다는 말입니까? 성도 안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천천히 스며들어온다는 말입니까? 주유소에서 휘발류 넣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영혼에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 때사 그 성도에게 합격 도장 찍고 천당으로 보내줍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생명이 이런 정량적으로 커가는 생물성을 지녔습니까?

참으로 무서운 주장입니다.
제가 알기에는 그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이상 커질 것도 없고 오무라들 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인간이 잘 간수해야 하는 물컹물컹한 영체가 아니라 그저 믿음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믿는 자라면 이런 식으로 인간 내부에서 생명을 요리하고 조리하고 관리하려고 덤벼들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기에 뭔가 고상한 것을 제조해 간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도 고상하지만 '나'라는 놈도 하나님 못지 않지"라는 오기가 발동한 겁니다. 즉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따로 챙기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따라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그냥 "나는 평생 살아도 나는 강도려니... ..." 하고 예수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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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비와 구름 2002-09-14 19:34:30, 조회 : 347, 추천 : 41

> 귀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참되고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합니다."
> 제가 알기로는 예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되는 것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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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능력과 참되고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믿음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은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오직 예수께서 사신다고 하는 사람 속에서 참되고 순수한 사랑이 나오게하는 믿음'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냥 자기는 은혜로만 산다하면서 그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모독하는 것이 아닌가요?

> 또 귀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구원은 사랑의 따뜻함을 외부에 나타냄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 제가 알기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니 우리 속에 사랑이 흘러 넘쳐 외부에 나타나는 곳이 아닙니까?

> 귀하께서는 또 귀하께서는 다음과 같은 용어를 들고 나옵니다.
> "이러함이 바로 생명의 성장과정의 진실상을 밝히는 일들입니다."
> '생명의 성장과정',
> 생명도 성장합니까? 즉 예수님의 피와 살이 성장해야 생명다운 효력을 낸다는 말입니까? 성도 안으로 예수님의 생명이 천천히 스며들어온다는 말입니까? 주유소에서 휘발류 넣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영혼에 생명으로 가득 차게 되면 그 때사 그 성도에게 합격 도장 찍고 천당으로 보내줍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생명이 이런 정량적으로 커가는 생물성을 지녔습니까?
----------------->
그러면 생명이 성장하지 않고 멈추는 것입니까? 멈춤은 죽음입니다. 생명의 특성은 흐름이요, 성장입니다. 어린 생명이 태어나서 성장하지 않고, 영원히 어린 아이로 산다면 이처럼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흐르지 않고 멈춰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며 그런 물은 죽은 물입니다. 생명이 있는 물은 흐르는 물입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자람은 기쁨이요 축복입니다.
땅에 씨를 심었는데, 싹이 나고 자라 열매 맺지 못한다면, 차라리 씨를 땅에 심지 않는 것이 낫지요.
씨를 땅에 심기만 하고, 자라 열매 맺지 않는다면, 그 씨는 이미 죽은 씨입니다.
이근호님은 죽은 씨만 붙들고 사는 것 같습니다.

> 참으로 무서운 주장입니다.
> 제가 알기에는 그 아들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더이상 커질 것도 없고 오무라들 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란 인간이 잘 간수해야 하는 물컹물컹한 영체가 아니라 그저 믿음의 대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
그렇지요 생명이란 인간이 잘 간수해야할 뭉컹물컹한 영체가 아니지요. 그렇다고 단순히 믿음의 대상도 아닙니다. 대상이라하면 나와 별개의 것이라는 의미인데, 생명이 내 속에서 주체로 살지 않고, 단지 믿음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모독입니다.
주어진 사랑과 하나되길 끝내 거부하며, 단지 대상으로만 바라보니, 율법의 문자에만 매달려 산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 정말 믿는 자라면 이런 식으로 인간 내부에서 생명을 요리하고 조리하고 관리하려고 덤벼들지 않습니다.
-------------> 이미 '나'가 죽은 자가 어떻게 자기 생명을 요리하고 조리하고 관리합니까?

믿음이 없기에 뭔가 고상한 것을 제조해 간진하려고 합니다. 그렇게해서 "하나님도 고상하지만 '나'라는 놈도 하나님 못지 않지"라는 오기가 발동한 겁니다. 즉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따로 챙기려는 의도인 것입니다.
----------------->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 따라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 그냥 "나는 평생 살아도 나는 강도려니... ..." 하고 예수님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강도를 예수님은 한몸으로 부르셨습니다. 믿기만 하지 마시고, 한몸이 되게 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체험하시길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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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성희 2002-09-14 22:04:41, 조회 : 271, 추천 : 37

비와 구름님..
엄기욱씨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이근호 목사님의 답변에 대해 한 줄씩 토를 달아서 신랄하게 비평을 하셨는데..
어떤 글에 대해 평을 하실 때는
그 글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글이든 한 줄씩 잡고 시비를 건다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겁니다.
저 또한 님의 글을 한 줄씩 잡고 비판을 한다면 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한다면 정말 무익한 말장난이 될 공산이 크겠죠.
기분도 나빠지고 말입니다.

처음에 엄기욱님의 글도 저는 꽤나 방만한 설교와 같아서
어느부분의 문제점 보다는 전체 글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파악하는데 신경을 썼습니다.
그분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알아 내려고 말입니다.
그분은 은혜와 사랑을 나름대로 예리하게 구분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혜만으로 사는 것은 종의 자세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은 아들이 자세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하였습니다만... 은혜와 사랑을 그런 식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회의가 저는 듭니다.
그렇게 구분함으로써 무엇이 달라지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은혜를 거의 구분 못합니다. 사랑은 거래나 일에 대한 삯으로나 조건에 따라 제공 되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은혜가 바탕이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또한 누가복음의 말씀처럼 언제나 말씀을 행하고도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라는 자세를 가져야할 것입니다. 탕자가 방탕에서 돌아와 종의 마음으로 다시 아들이 되었을 때 그는 큰 아들보다 아버지에게 더 큰 기쁨이 되지 않았습니까? 은혜와 사랑, 그 둘을 구분하여 떼내려 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논리가 아닌 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결국 구원을 위해 계명을 지켜야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켜야 구원이 있다라고 하는 바탕에서 전개된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물론 단순한 율법주의다 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법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사랑이라든지 하는 등의 말로 포장이 되어 있지만 결국은 인간의 어떤 행위(계명지킴이나 마음을 다해 하나님 사랑하기 등)에 의해 구원이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근호 목사님의 말씀의 뜻은 전적으로 인간은 무능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선택된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개혁주의 신앙을 표현한 글인 것으로 이해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 분담을 몇 대 몇으로 할까... 뭐 쉽게 말해서 이런 식의 논쟁이지 않습니까? 전적으로 인간은 타락해서 역할은 0 , 오직 하나님 100% 로 구원하신다는 것과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잡는 정도의 반응(믿음)은 해야한다는 주장의 대결이 아니겠습니까?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 논쟁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어 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근호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은혜가 은혜되기 위해서 인간의 행함은 결코 0%도 추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조금이라도 인간의 사랑이나, 인간의 계명지킴이나, 인간의 행위를 더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과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것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적인 사고 방식이라 봅니다.

십자가가 은혜냐 사랑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저는 십자가가 인간 구원의 관점에서 보는 사랑이냐 은혜냐를 따지기 전에, 십자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해석을 하지만, 물론 인간 쪽에서 보면 십자가가 은혜로 다가오고 사랑으로 다가 오겠지만(물론 택한자에게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일을 하셨다고 봅니다. 천지와 인간을 창조하신 것도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더 구체적으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일방적 은혜로 택한 자기 백성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이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고,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이암음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 아닙니까?(롬9:16-19) 누가 감히 하나님께 힐문하겠습니까?

제 글에 대해서도 전체가 의도하는 바를 잘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한 구절 끄집어 내어 시비 걸지 마~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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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비와 구름 2002/09/14 41 348
[re][re]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이근호 2002-09-14 21:36:55, 조회 : 348, 추천 : 38

예수님의 생명이란 흔히 생물학적 말하는 생명과 같지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을 생명이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성장'이라든지 '자라난다든지' 하는 것을 붙이는 것은 인간들이 흔히 자연물에서 파악되는 생물들의 변화를 '생명의 활동'인처럼 그대로 차용한 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언급하려면 반드시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부인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사랑의 강권'이 아니라 '사랑의 질적 변이' 혹은 '인간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만남'이 되고 맙니다.
즉 자신의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대체하고 싶을 때는 이런 식의 설명들이 가미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면, "왜 인간의 사랑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되는가?"하는 점을 동반하게 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의 사랑만이 성도에게 임하면 그 사랑이 강권하기 때문에 이 때부터 그 인간 내부에서 자랑할만한 모든 것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작업이 작동을 하게 됩니다. 그 작업 중의 하나가 자아의 구원됨을 설명해 보려는 그 의도까지 뭉개는 작업입니다. 남는 것은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 뿐입니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결코 '생명의 성장'이니 '생명의 자라남"이라는 사고방식은 도저히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런 사고방식이 일어나는가? 그리스도로 기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관심과 정신이 딴데 쏠려 있어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정말 십자가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숱한 글들이 이 계시판에 올려와 있습니다.
한 번 비교해 보세요. 귀하의 글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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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비와 구름 2002-09-15 08:08:25, 조회 : 310, 추천 : 37

이 게시판에 올려와 있는 글들에서 '정말 십자가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들이' 있다고 하셨는데, 과연 그렇다고 보십니까?
또한 여기서 말하는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고백들을 아무리 한들 그것이 진실되다고 보십니까?
사람의 마음이 제일 더럽고 부패했다고하는데, 어찌 부패한 인간들의 마음에서 이러한 고백들이 진실되게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내안에 성령이 있어서 가능하다고요?
그렇다면 내안에 성령이 있다는 증거를 대어 보십시오.
그 증거가 '오직 십자가만 감사하고 기뻐하며,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을 진실되이 한다'라고요?
성령님이 그렇게 하셨다고요? 그렇다면 성령님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고백하게 하셨다는 증거는 있습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성령께서 나의 입술을 통해서 그런 진실된 고백을 하게 하시는지 스스로 절대적인 확신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 과정과 차이를 말로 표현할 수 있으십니까?
내안에서 그러한 증거와 믿음과 확신을 찾는 행위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자의 특징이 아니라고요?
내 안에서 그러한 것들을 찾는 작업을 포기하고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는 자가 바로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요?
옳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오직 십자가만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는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겠군요.
그러면, 님께서는 어떻게 남들에게 그러한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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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십자가는 은혜인가 사랑인가?
이근호 2002-09-15 18:39:57, 조회 : 322, 추천 : 34

성령으로 인한 고백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증거하는 모습으로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십자가만 증거하는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하고 나선다면 그 사람은 성령을 빙자해서 자기의 존재의 의미나 챙기려는 사람입니다.
이 두가지의 차이점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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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와 전적 타락, 자유 의지
엄기욱 (Homepage) 2002-09-15 23:23:17, 조회 : 269, 추천 : 14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는 자칫 극단으로 치달을 수 있습니다. 조화가 필요해요.

* 원죄와 전적 타락, 자유 의지

인간은 그 스스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속에서 선을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모든 선과 진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만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인간은 그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인데 어떤 사상은 이것을 잘못 적용하여 <원죄와 전적 부패, 타락으로 인해 인간은 선을 향하여 어떠한 몸짓거리도 할 수 없는 아주 비참한 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보고, 그리하여 아예 인간의 자유 의지까지 부정>하고 있다. 전자와 후자는 인간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인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분명히 구별이 되는 점도 있는데 그것은 전자는 인간 속에서 선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정작 인간은 자기 스스로 선을 행하는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 두어져 있기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지 않고 있으나 후자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한 채 그 모든 선을 하나님께만 돌리려 하여 인간을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없는 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전자와 후자는 별개의 것인데도 불구하고 저 사상은 이들을 같은 맥락으로 연결시키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양쪽 모두 인간을 저 밑으로 낮추어 그의 공로를 박탈하고 반대로 하나님은 까마득히 높여 영광을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돌리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은 자신을 낮추고 불쌍히 보이면 보일수록 하나님의 자비와 거저 얻는 은혜는 더욱 영광스럽게 빛나고 동시에 거기 내재한 인간의 겸손한 자세는 너무나 아름다운 신앙으로 비쳐지기 마련일 것이다.

신앙관을 이런 식으로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을 아주 잘 섬기는 표본인양 좋게 생각되겠지만 그것이 인간이라는 형태를 아예 강제로 한 줌의 흙으로 만들고 또 하나님을 인위적으로 높이 받들려는 거짓 예배에 빠지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왜냐하면 진실로 인간을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려는 예배는 인간이 그의 의지와 이해성이 지닌 자유 안에서 하나님의 계명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전적 타락과 예정, 그리고 자유 의지에 대한 부정으로 드려지는 예배는 시종일관 인간의 역할은 빼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형태의 예배 속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드높아진 지성으로만 섬김과 찬양, 감사와 영광을 받을 수 있을 뿐 그가 적극적으로 행하는 사랑의 삶을 통하여서는 저들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원죄와 전적 타락의 경우에 있어서 인간의 의지는 분명 악을 보유한 상태로 출생을 하기에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 악에 끌려가기 쉬운 경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선악간의 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힘을 여전히 부여받고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주님은 사람을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되 겉으로는 누가 보아도 그 스스로 하는 듯 보이게 하신다> 라는 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한 섭리 때문이다. 하나님은 악을 사랑하는 인간 안에서 그를 위해 홀로 악과 싸우심으로 악으로부터 끊임없이 인간을 이끌어 내어 선으로 인도하시는데 이 깊은 내용을 인간이 자각할 수는 없지만 이 결과로 인간은 마치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악과 싸우는 것처럼 악에서 반동할 의지의 자유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비가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양상은 사람의 외성에서는 일어나나 내성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주께서 어떻게 사람을 그의 내성 안에서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가는 아무도 모른다. 이것은 아무도 인간에게 있는 어떠한 내적 요소가 그의 눈으로 하여금 보게 하고 귀로 듣게 하며, 혀와 입으로 말하게 하고 심장으로 피를 움직이게 하며, 폐로 호흡하게 하고 위로 소화하게 하며.. 등등 그 밖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을 하게 하시는가를 모르는 것과 같다. 이것들은 사람의 지각과 감각에 잡히지 아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무한히 더 많은 마음에 속한 내적 실체와 형체 안에 주께서 무엇을 하시는 가도 이와 같아서 이것들 안에서의 주님의 역사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누가 보아도 사람이 그 스스로 하는 듯 생각하고 뜻하고 말하며 행하는 줄 안다. 또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사람이 스스로 하는 듯 느껴지지 아니하면 어떠한 의지나 이해성도 가지려 하지 않을 것이요 또 주께로부터 나온 어떠한 선과 진리에 대한 지각과 사상도 가지려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상이 없으면 하나님께 대한 어떠한 지식이나 인애, 신앙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어떠한 개혁이나 중생, 그리고 구원도 있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이 가상은 주께서 사람에게 모든 씀씀이를 위하여 주셨고 또 무엇보다도 사람은 받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며 그것으로 사람은 주님과 결합하고 주님은 사람과 결합할 수 있으며 이 결합을 거쳐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렇게 되어지는 섭리의 과정은 사람이 자각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어떠한 역사도 지각하고 느끼도록 되어있지 아니하나 그러면서도 그러한 것을 알고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법칙인 것이다. 신의 섭리를 인간으로 분명히 보지 못하게 하시는 이유는 이러하다. 만일 사람이 신의 섭리의 하시는 일을 분명히 지각하고 느끼도록 되면 그는 이성 따라 자유로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이요 또 그의 어떠한 것도 그에게는 자기 것 같이 여겨지지 않는다. 또 그가 어떤 사건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아도 그와 같이 된다. 그러므로 그는 주체성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나' 라는 생각도 들지 아니하며 어떠한 것도 그에게 돌릴 수 없을 것이고 그리하면 그가 악을 행하든지 선을 행하든지 아무런 차이도 없게 되고 하나님을 믿든지 지옥에 처하게 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어 사람일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섭리하시는 신의 역사를 사람이 분명히 지각하고 보게되면 그는 이성 따라 행동하는 자유성을 가지지 않을 것이요 또 어떠한 것도 그에게는 그 스스로 하는 듯 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만일 그러한 것이 분명히 지각되면 사람은 스스로의 자유가 없는 듯 그것에만 의존하고 두 손을 놓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그에게는 이성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모두 자유로부터 그리고 자유 안에서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의 삶은 자신이 아닌 남으로부터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악에서 물러나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도 이와 같다. 만일 이런 섭리를 사람이 분명하게 지각하고 느낀다면 그는 늘 주님의 섭리에 항거하고 하나님과 겨루며 스스로 그 섭리의 굴레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부정할 것이고 또는 자신을 신의 섭리 안에 밀어 넣기 꺼려하여 스스로를 하나님으로 만들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이유는 사람에게 있는 악 때문인데 악은 늘 주님께로부터 오는 선에 항거하여 주님의 섭리에 내재한 선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배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람이 만일 위가 어떻게 음식물을 소화시키며 그 두루에 있는 내장들이 각기 그 몫을 흡수하고 피를 공들여 만들며 그것을 분배하여 생명의 활동을 하는가 등을 안다면 또 먹고 마시는 등의 외적인 일을 대하듯 그 내적인 것들에 명령을 자유로이 내릴 수 있다면 그는 이 모든 것을 방해하고 깨뜨리려 할 것이다. 사람이 인체의 덮개에 지나지 않는 근육의 움직임을 제외하고 그 속에 있는 것들을 그의 의지에 좌우되지 않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미래사에 대한 지식 역시 이성 따라 자유로 행하는 능력을 사람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허락되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소유하려 하며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 이성 또한 그리로 나아가려 하는데 만일 그가 하나님의 미리 알려주심으로 사건을 미리 알게 되면 그의 이성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의지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것에 열심을 내야할 그의 의지는 이성과 더불어 미리 알게된 결과에 의해 쇠약해지고 그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누구나 이성으로 미래사에 대하여 스스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허락되어 있다. 즉 사람은 사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가 천국에 들어갈지 아니면 지옥에 들어갈지를 하나님에 의해 미리 알지는 못하지만 스스로 말씀에 비추어 결론을 내릴 수는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것을 신에 의해 미리 알지는 못한다. 만일 그가 천국에 들어갈 것을 미리 알면 그의 내적 자아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어떠한 움직임도 그치고 다만 외적 자아로부터 그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을 생각할 것이다." (스베덴보리의 '하나님의 섭리' 중에서)

사실 우리 속에서 선을 행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럼에도 우리 각자는 자신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선을 행하며 자신을 이끌어나가는 듯 여기도록 하는 것이 주님의 비밀한 섭리이다. 위에서 간단히 밝힌 것처럼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지 그 과정을 모르도록 하시는 것조차 인간을 위하는 주님의 선하심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이 범하는 악은 그 자신 본래의 것이고, 선은 비록 그 자신이 행할지라도 그 자신의 것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고 고백함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상들처럼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데 인간이 전적으로 무능력하다는 교리는 올바르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빛나는 자유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자신이 이러저러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없어서인가 아니면 어렵고 힘들기에 하지 않는 것인가.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을 뿐이다. 즉 인간에게는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는 힘이 있으나(이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인데 주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힘인 양 느끼도록 섭리하신다) 인간에게 부여된 그 힘은 사람에 따라 출생 시에 지니고 있던 악에 점차 기울어질수록 약화되어 이제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힘에 겨운 일이 되어버렸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악이 좋아 악을 사랑하다보니 악을 버리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 마음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문제이다. 우리 스스로 힘을 내어 악을 조금씩이나마 버릴 때 우리의 애정은 주님의 은혜로 선 안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힘이 인간에게 어디 있느냐라는 의심이 든다면 우리를 끊임없이 악으로부터 구원해내고 계신 주님의 선하신 역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를 묵상해보아야 한다. 홀로 악과 싸우시고 저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선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의 은혜는 신비롭게도 인간이 스스로의 힘인 양 느끼며 악과 싸우는 그의 의지에 실려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전적 부패와 전적 무능력의 교리는 얼마나 우리 의지의 도약을 꺾고 있는가. 전적 무능력의 교리는 자칫 죄의 책임을 주님께 돌리게 되고 또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려는 열망을 주저앉혀 버리기 쉽다.

출생부터 의지가 악에 매인 처지에 있는 인간을 위하여 주님께서는 한 방편을 마련하신 바 이는 곧 인간의 이해성만큼은 진리의 말씀을 통하여 의지 이상으로 높이 날아올라 저 멀리 천국의 빛까지 감지할 수 있도록 배려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앞서는 이해성으로 진리의 빛을 보고 악으로 향하는 의지의 발걸음을 돌리게 하여 선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인 것이다. 비록 우리의 의지는 악을 사랑하는 상태에 있을지라도 자아는 우리를 선으로 끊임없이 이끌어내시는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이해성이 취득한 진리의 밝은 빛을 수단 삼아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할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에게 계명을 준수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지키기 어려운 주님의 계명일지라도 그 앞에서 갈등하는 자신의 마음을 가만 살펴보면 올바른 판단이 무엇인지가 보다 뚜렷이 드러나는데 이에 대한 결론은 한 마디로 '우리가 그러한 명령을 해낼 수 있기에 주님께서 행하라고 하신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매사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할 때마다 "나는 원죄로 인해 타락해 있어서 주님이 내게 힘을 주시기 전에는 이 같은 일을 스스로로는 할 수 없다." 라는 논리가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는다면 성경에 있는 수많은 주님의 계명 앞에 서 있는 인간은 그야말로 양심의 깨달음이나 말씀으로 가르침 받은 교훈을 보면서도 주님의 특별한 은혜가 먼저 임하기 전에는 자신은 꼼짝도 할 수 없노라 라는 의식에 은연중 영향을 받아 삶에 적극성을 띠지 못할 것이다.

인본주의를 배격하고 신본주의를 내세우는 어떤 사상은 믿음에 대하여 이렇게 외치고 있다. "믿음은 존재요, 오는 것이다. 믿음이 와서 마침내 나는 믿는 자가 된다. 즉 믿는 신앙이 아니라 믿어지는 신앙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선물이라 한다. 믿는 신앙은 언제나 바뀔 수 있지만 믿어지는 신앙생활은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불가능하다. 헌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 믿으려고 한다. 이는 주권자를 앞지르려는 것에 불과하다. 이처럼 우리 대부분은 땅에 있는 유한한 것에 온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에 신을 바라보는 시각도 유한한 것에 대한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어느덧 전락해 있다. 신 그 자신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는 이는 지극히 드문 것 같다. 때문인지 종교인은 많아도 신앙인은 적어 보인다." 이 지적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상이 인본주의의 좋은 점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이것 역시 인간의 역할을 배제하고 신 중심에만 치우친 극단이 되어 신앙을 해칠 수 있다는 점 또한 함께 경계되어야 한다.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는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잘 그려준 말씀이지만 이를 잘못 이해하면 오직 신의 역사에만 모든 운명을 걸게되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주님은 포도나무요 우리는 그 가지이다.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가지는 절로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의 의미는 결코 인간의 역할을 배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분명 포도나무로부터 가지에 전달되지만 각 가지의 상태에 따라 탐스러운 열매를 맺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에 붙어있기만 하면' 이라는 말씀은 우리 스스로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교훈하지만 이것을 인간의 전적 타락에 의한 무능력에 그 원인을 돌려서는 안 된다. 즉 인간은 본래 죄악 중에 출생하기에 그 스스로로는 자신의 구원을 위한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지각하고, 이제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자신의 행위로 구원을 얻겠다는 생각을 접은 채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주님 안에 거할 수 있다고 성경 많은 부분에 많은 말씀으로 강조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그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빛나는 자유 의지가 있기에 그렇게 말씀하시고 또 이를 따르지 않을 때 책망하시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너무나 흔하게 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의 살길은 주님의 계명을 지키려 노력하는 일 이 한 가지 뿐이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새 계명이 성경에 분명히 있건만 원죄와 전적 타락을 되새기며 '할 수 없는 죄인을 위해 돌아가신 십자가 위 주님만 애타게 찾아 높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물론 잎과 꽃과 열매를 내는 것은 주님이시기에 가지의 모든 수고는 그분께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생명을 받을 수 있고 이것이 바로 인간의 위치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성경에 있는 수많은 말씀을 통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인 것이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나 있는 교리를 연구 분석하여 그것으로 구원의 빛을 발견하려 애쓰지 말고 도대체 주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우리는 사복음서를 다시 보며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야 하겠다. 구원은 진리를 논리하여 거기서 어떤 빛을 발견했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활에 선한 삶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가지 첨가할 말은 이상 윗글에서 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는 전적 타락 등으로 인해 훼손된 의지의 자유를 대변하는 것에 무게를 두었으나 원죄와 전적 타락과 예정과 자유 의지의 관계를 이런 식으로만 정립하면 인간의 역할이 너무 강조되어 이번에는 인간이 하나님보다 앞서가 매사 인간에게서 비롯된 능력과 인간 고유의 총명에 의해 하나님이 무시되는 또 하나의 극단으로 치우칠 가능성도 경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 사이에 적당한 긴장을 유지시키며 지속적으로 서로를 견제, 조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의지의 자유가 있지만 이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에게 종속된 가운데 행하여지는 자유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이치는 믿음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인간은 저 스스로 믿음을 키워야 하지만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여기 인간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믿음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힘은 인간이 믿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어지는 믿음에 있다. 이 믿음은 인간이 스스로 믿으려 노력하는 것을 통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그릇의 역할에 불과하다. 이 하나님의 생명은 위로부터 주어져 인간의 의지와 이해성의 자유 안에서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울 수 있다. 인간이 믿는 것 그 자체에는 능력이 없다. 왜냐하면 생명은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주어지는 믿음 그 자체는 생명은 있으나 이를 받아들이는 인간이 자유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 자체로는 나타날 수단이 없어 역시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참 생명은 강압이 아닌 자유 안에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하고 이것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긴장 관계가 지속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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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원죄와 전적 타락, 자유 의지
이근호 2002-09-16 06:50:57, 조회 : 412, 추천 : 54

1.
귀하께서는 '자유의지'와 '의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자유롭게 행사하려면 그 지유에 절대성이 부가되어야만 합니다. 즉 자유에 대해서 차후에 그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아야 진정한 자유로운 행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논리 전개에 있어 뭔가 부족하다고 느낀 모양입니다. 즉 의지를 가진, 혹은 의지로서 행동하는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선악의 분별과 실천을 요구하는 것은 모순된다고 보는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귀하의 글 자체가 모순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자유의지라면 아예 차후에 그 어떤 간섭이나 심판조차 받지 않아야 하고 , 아니면 이런 절대적 자유성이 빠진 의지라면 그것은 '자유의지'라는 명칭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지 결코 신과 인간의 관계 설명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논하는 내용들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몰라서도 아니고 신을 어떤 식으로 섬기고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신께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그 문제 해결하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용해서 제대로 하나님 섬기라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이 영생이요 그 아들의 이름의 능력으로 생명이 주어질 뿐입니다.(요 20:31) 예수님의 생명이 없어 문제이지, 신에 대해 관심이 부족해서 지옥가는 것이 아닙니다.

3. 신본주의는 유대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한계였습니다. 그 신본주의가 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동시에 인본주의는 불교의 특징입니다. 그 인본주의가 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조화있게 가져가도 지옥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4. 귀하의 문제점은 하나 뿐입니다. 예수님이 신본주의 신학에서 어떤 점을 메꾸눈데 유용하느냐 하는 점에 치중하되 결코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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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신학의 비유 중에....
진선미 2002-09-17 20:57:13, 조회 : 304, 추천 : 44

그들은 시편의 말씀을 빌어서 창세기가 비유라고 합니다..

더군다나

그비유란것을...정말 영해하는 수준이 보통이 아니라서 웬만한 성도라면
그냥 그게 옳다고 생각하고 나중에는 돌이키지 못할정도로 넘어가게 됩니다

예로 창세기의 선악과를 .....설명하는데
" 여러분 선악과를 먹었는데 육이 죽었습니까? 영이 죽었습니까?
영이요! 그렇죠... 먹지말라는 금과를 먹어서 영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실제 보이는 선악과실을 먹었는데 육은 안죽고 영이 죽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실제 보이는 과실이라면 육이 죽어야지 왜 영이 죽죠?
자.....우리가 비유를 배웠듯이. 이 선악과라는것은 나무를 사람으로 비유하셨듯(-비유성구중에 사람을 나무로 비유한게 많음-설명) 그 나무의 열매 즉 열매라는 것은 사람의 말! 그러니까
비진리 라는 사람에서 나오는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비진리를 먹은 아담은 당연히 죽은겁니다...
"
비유구절을 그것도 성경을 통해서 찾아주는데.....안넘어갈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영해 수준이 장난이 아니어서 혹해버릴수가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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