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란 무엇입니까? ] 2001년 09월 07일 - 09월 11일
작성자 [ 구득영 ] - 2001년 09월 07일 오후 1시 15분에 남기신 글 ⓝ 이근호 목사님께 - 영지주의란 무엇입니까? 영자주의가 요즘 부쩍 많이 오르내리고 있고, 사실 초대교회부터 끊임없이 계속해서 지금까지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지주의를 어떻게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07일 오후 9시 20분에 남기신 글 영지주의란 특정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기독교를 표방하면서도 안에서 각종 사상들이 혼재되어 있는 종교 현상을 말합니다. 그것도 오늘날 시대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 사회적으로 유행이 되든 시절이 AD 1-2세기 경이었습니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지혜가 유입되어 들어오자 그 새로운 복음이라는 것이 뭔가해서 신앙심없이 수용하는 자들이 우후죽순같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자신들이 마음 속에 깔아 낮아있는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그 사상을 좀 더 세련되게 품위 있고 새로운 기독교 분위기에 편승하기 위해 자기들의 구미에 맞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든지 사도의 사상을 첨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유,불,선 을 합해서 신흥 종교를 짜깁기해서 만드는 식과 같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주로 두 가지 형태로 나왔습니다. 그 하나는 유대교 신비주의입니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구약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들이 오로지 안식일이라는 체제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믿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난 뒤에 각 피조물 안에서 원래 창조의 법칙이 그대로 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라는 겁니다. 잠언 8장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지혜자라고 불리우는 어떤 분도 그 현장에 있어 창조에 개입했다는 것이 나오지요. 그 지혜는 애초의 창조의 원리를 그대로 고수하기 마련인데 그것이 바로 안식일로 만든 시간적 성전(물질로 만든 건물이 아니라 거룩한 시간으로 만든 신비로운 성전)이라는 겁니다. 기독교가 첨가가 되니 예수님의 부활은 오직 안식일의 완성을 위함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또 다른 사상은 플로티누스라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도출된 것입니다. 이 사상은, 인간의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에 구원이란 이 육신을 죽이고 그 대신 영혼을 고양시키고 승화시켜서 신적 경우까지, 더 나아가서 신과 합일하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는 겁니다. 여기에 기독교가 결합되니,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됩니다. 즉 '구원의 첫걸음은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구원은 종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 즉 신과 합일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진정한 구원이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온전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겁니다.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요한 1서에 내용은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반박하기 위해서 섰다고 합니다마는 제가 보기에 별로 신빙성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한 1서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때 남긴 말씀들을 십자가 화목제물로 완전히 다 이루었음을 말해주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후에 등장한 신비주의의 일종인 몬타누스파도 영지주의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은 교회의 세속화를 보다 못해 철저한 금욕생활로 교회의 불만이 있는 자들을 규합한 한 종파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영지주의란, 인간의 성경 해석에는 항상 기존의 철학이나 개인적으로 추구하는 종교적 열정과 기대치와 결합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을 경각시켜 준 사상적 현상이었습니다. 성경을 성경으로만 봐야 하는데 대중들은 교회를 모집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은 오늘날의 영지주의적 경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작성자 [ 김정훈 ] - 2001년 09월 14일 오후 2시 36분에 남기신 글 ⓝ 율법에 대하여하나님이 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중에 심판하시는 일련의 사건들이 동일선상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사건들도 하나의 흐름에서 벗어나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그런데 한가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에 관한 문제입니다. 로마서에서 보면 율법외에 다른 의가 나타남으로써 율법은 거기에서 종결되고 그리스도의 의만이 남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이 부분을 그렇게 해석했을 때, 생기는 의문이 다음의 두 가지 입니다.첫째, 하나님은 언젠가는 폐기해야 할 율법을 왜 만들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끝났다는 관점에서 로마서를 이해하면 이것이 하나의 흐름에서 이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둘째, 로마서에서는 율법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구약에서는 율법을 지킴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받았다는 것과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요?즉,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전체를 어긴다는 신약에서의 율법에 관한 개념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구약에서의 율법에 관한 개념과 다른 것이 아닌가요?이것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제가 논리적으로 표현을 제대로 못한 부분을 양해하시고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5일 오전 06시 27분에 남기신 글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폐기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폐기될 것 같으면 아예 안 주어져야 한다는 선입감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이 인간 세계에 나타남으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확연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깨닫는지 아니 깨닫는지 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구약 사람들 중에 복을 받는 것은 율법을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이런 점에서 구약이나 신약이나 한결 같습니다.
작성자 [ 최명규 ] - 2001년 09월 14일 오후 5시 27분에 남기신 글 ⓝ 칭의와 구원에 대한 궁금점 저는 대구 주님의 교회에 다니는 최 명규 전도사입니다.게시판의 글 중에 칭의와 구원에 대해서 나온 글들을 읽어보았습니다.그런 중에 칭의와 구원을 구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칭의라는 것은 구원을 받았다는 다른 형태의 말이 아닌지요. 칭의 : 의롭지 않고. 결코 의에 도달할 수가 없는 존재가 한 의(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고, 그 의만을 진정 구원에 합당한 의라고 믿는 것, 이 믿음조차도 하늘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그런 죄인에게 새로운 하늘의 한 의를 진정한 의로 여기는 자에게 이 의가 그에게 왕노릇하는 것이 칭의가 아닌지요. 구원 : 위의 것에서 동시에 이러한 의가 왕노릇한다는 것은 이 의만을 구원으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인간에게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온 예수님이 하신 일이 의가 되고,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에서 칭의와 구원이 같은 차원에서 해석이 되어져야 하지 않을까요. 모두가 한 분에게서 나왔으니까요.칭의와 구원이 다른 것이라면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5일 오전 06시 37분에 남기신 글
귀하께서 생각하시는 칭의 개념이 바로 ,칭의 그 자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기 위한 활용에 관한 칭의 개념입니다. 칭의부터 생각한다면, 칭의라는 것이 인간의 구원시켜 주심에 주안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속성으로서 그대로 드러난 결과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의가 인간 구원에 치중한다면 이 세상 모든 인간을 다 구원해주어야 진정한 의 다운 태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옥이 있고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엄연히 있는 현실에서 하나님의 의란, 인간의 구원 위주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완성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가 됩니다. 즉 어떤 인간은 기어이 구원되지 못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의라는 말입니다.
---------------------------------작성자 [ 최명규 ] - 2001년 09월 15일 오후 11시 21분에 남기신 글 아직도 이해가 다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적습니다.하나님의 의가 어떤 인간에게는 구원되지 못하는 것, 구원되는 것 둘 다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하지요. 인간은 망할백성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사야도 망할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이나 이사야가 자신이 바로 죄인이고 망할 자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 그들이 다른 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죄인이면서 주님을 보고 감사와 기쁨이 있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칭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차원에서 그 의를 보고 기뻐하는 자에게 있는 표가 아닐까요?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6일 오전 07시 26분에 남기신 글 방금 말씀하신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구원과 연괸시키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의가 하나님의 전체 약속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하는 것이 더 근본적입니다. 만약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자기 구원에 이용한 셈이 됩니다. 쉽게 예를 들면, 학교 다니는 아들이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더 타낼 수 있는가? 옳지,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공부 잘해서 용돈을 준 것이 아니라 공부하고 상관없이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우선이었구나"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구원 위주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원천적입니다.
작성자 [ 이기원 ] - 2001년 09월 17일 오전 00시 42분에 남기신 글 ⓝ 성약교회 김홍전과 장신대 이종성 귀신학에 대한 질문목사님, 늘 수고하시군요. 이렇게 궁금한 것이 있어 멀리서 질문을 드립니다.제목과 같이 김홍전 목사에 대하여 또는 이종성 박사에 대하여 어떤 단체에서 이단적인 요소가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들의 구체적인 사상에 대하여 알고싶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목사님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7일 오후 7시 57분에 남기신 글 우선 김홍전 목사님에 대해 이단성이 있다는 그 단체의 주장을 먼저 듣고 싶군요. 왜냐하면 그 비판 기준 자체에 문제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김홍전 목사님의 문제점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겁니다. 그러나 기존의 한국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반발의 결과 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종성 목사님은 그냥 기존의 보수적 조직 신학을 이것 저것 많이 수집해서 나열하는 식으로 보입니다. 이 분은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데 혹시나 제가 모르는 사상을 최근에 주장했을 수도 있으니 그 단체에서 무엇 때문에 이 두 사람에게 시비거는지 그것을 알고 싶네요.
작성자 [ 김정훈 ] - 2001년 09월 21일 오후 2시 39분에 남기신 글 ⓝ 성경지식 VS 복음 목사님! 성경공부는 왜 해야하는 겁니까?성경공부를 통해서는 성경지식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지식이 복음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성경공부와 복음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가르쳐 주세요.----------------------------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21일 오후 8시 42분에 남기신 글 성도에게는 복음을 알도록 하나님께서 말씀과 가까이 하도록 해주십니다. 성도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을 써먹기 위한 의도라면 성도라 할 수 없겠지요.-----------------------작성자 [ 김정훈 ] - 2001년 09월 21일 오후 9시 55분에 남기신 글 성령께서 알게 해주시는 복음을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성경공부를 통해 알게된 지식은 계속해서 되새기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나지 않던데요?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22일 오전 06시 30분에 남기신 글 지식이야 시간이 지나가면 잊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사랑하는 것은 식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빠서 늘 성경 공부를 못해서 지식적으로 많이 잊어버려도 주님을 사랑하게 되면 또다시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작성자 [ 나그네 ] - 2001년 09월 11일 오후 5시 59분에 남기신 글 ⓝ 이근호 목사님, 방언 질문이 있는데요 이 목사님, 지금도 방언이 있는지요? 답변 부탁드립니다. 방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2일 오전 07시 15분에 남기신 글 지금도 방언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즉 복음적인 내용을 담은 계시 전달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방언이란 복음적 계시를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기적이 없이는 이런 종말적 현상이 안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베드로의 설교가 곧 방언입니다. 따라서 "방언한다"는 말을 곧이 믿지 마시고 그 내용이 복음적인 계시를 전달하느냐 아니하느냐로 결정하시면 됩니다.
--------------------------------작성자 [ 나그네 ] - 2001년 09월 12일 오전 10시 26분에 남기신 글 제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요즘 교인들 가운데, 남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각 사람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이상한 말을 하는 그런 것이 과연 성경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2일 오후 5시 00분에 남기신 글 어느 종교에나 다 있는 현상입니다.
-------------------------- 작성자 [ 친절 ] - 2001년 09월 13일 오전 11시 00분에 남기신 글 어떻게 이해해야 되죠?기독교도 여러 종교중의 하나로 이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입니까?아니면 그런 방언을 추구하는 기독교는 이미 종교화가 되어있다는 말입니까?좀 정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세요.사실 저도 자연스럽게 그런 방언을 경험했으며주위에 정말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선 분들이 기도중에 간혹 방언을 하십니다.이것을 어떻게 이해야야 하나요.목사님의 이해틀로 설명하지 마시고 일반 성도들도 알아 들을 수 있는 이해틀로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선선한 가을의 문턱에서 감기 조심하세요. 그리고 콜레라도 조심하세요.
--------------------------작성자 [ 구득영 ] - 2001년 09월 13일 오전 11시 41분에 남기신 글 이근호 목사님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요즘 이야기하는 소위 그런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은 성경에 있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종교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방언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고 말입니다. 절에 있는 중들도 그런 방언을 한다고들 합니다. 저는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살펴보면 그런 방언이 종결되었음이 분명한 것 같은데도, 문제는 지금 그런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겠지요.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하는 분들도 그런 일을 하고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눈에 보이는 이런 일들이 하나의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제대로 된 현실은 오직 말씀뿐입니다.저도 기도원 출신(?)이라서 이런 문제로 고민한 적이 있었던 터라, 외람되게 몇 자 적어보았습니다. 그럼...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3일 오후 7시 28분에 남기신 글 불교 신자도 밥을 해 먹고 기독교 신자도 밥을 해 먹습니다. 따라서 모든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밥을 해 먹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와 상관없이 허황된 소음을 내는 것은 인간이라면 흔히 있는 현상입니다. 참고로 밥 먹는 것이 나쁜 짓이 아니듯이 허황된 소리하는 것이 죄라는 말은 아닙니다. 방귀 뀌는 것은 생리인데 어떻게 그것을 죄악된 것으로 보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방귀 뀌는 것을 신의 계시로 본다면 그것은 죄악된 겁니다.이것 참, 어떻게 이 보다 더 친절히 설명해야 할 지....------------------------------- 작성자 [ 어리둥절 ] - 2001년 09월 15일 오후 12시 36분에 남기신 글 역시 인간은 경험적 존재군요.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틀렸다 하네요.성경 어느 부분에서 방언이 종결되었다고 합니까?성경에서 방언을 조심스럽게 취급하는 것은인간의 악함 때문이지 방언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방언도 은사요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목욕물 버릴려다 아이까지 버리는 어리석음을범치 마시길 당부 드립니다.성경을 자신의 굳어진 이해 틀로만 보지 마시고 정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가능할런지...) 보시기 바랍니다.가을입니다. 정신차리세요.--------------------작성자 [ 나그네 중 ] - 2001년 09월 15일 오후 1시 37분에 남기신 글 방언에 관하여 소위 성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가? 먼저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사람들은 방언을 말할 때 사도행전 2장에서의 방언을 의도적으로 제외시키고, 나머지 방언이 나오는 것을 자신이 임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 전서12장과 14장에 언급되는 방언도 사도행전 2장의 본문과 비교해 보면 결코 달리 해석되어질 수 없는 복음(방언)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본문을 곡해하려고 애쓴다. 칼빈의 주석을 보더라도 방언은 외국말임을 선언한다. 물론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외국말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먼저 사도행전 2장을 보자. 4절을 보면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우리는 이 구절에서 먼저 생각해야 하는 바가 있다. 사람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요16:13-15)그렇다. 성령께서 제자들(가롯유다제외)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이 곧 이 일이시다. 그렇다면 방언이 약속되었던가? 마가복음16:17절을 보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참으로 놀랍다. 새 방언. 그런데 지금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방언은 새 방언이 아니다. 원래 있던 말이다. 그러면 사도행전2장은 마가복음과 상관없는가? 억지로 주장(중얼거리는 말을 새 방언이다)하려면 방법이 없다. 그러나 분명 사도행전2장은 새 방언이다. 즉 새노래로 표현되는 바와 같다. 바로 복음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열한 사도의 설교에서도 방언에 대한 내용은 없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행2:17-21)사도들이 이렇게 말해놓고 정작 증거하는 내용은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해지는 예언, 환상, 꿈이란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 되심에 관한 말씀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말씀을 보면서 이미 딴 마음이 있는 자는 예언과 환상, 꿈을 이 본문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의 품은 것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방언도 이와 동일하다.그러면 방언에 대한 언급은 왜 없는가? 그 이유를 6-13절을 보면 알 수 있다."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술이 취하였다 하더라"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한 종류는 방언으로 하는 말을 알아듣고 하나님의 큰일이라 말하며, 다른 한 부류는 새 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자들이다. 이들이 방언을 알아들었는지 알아듣지 못했는지는 성경에선 관심이 없다. 오직 이들이 조롱했다는 데 그 중심이 있다. 베드로의 설교는 11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한 설교였다. 그러니 방언의 역할은 갈라내는 역할(심판)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말하면, 외국말을 하지 않고 설교했어도 역시 듣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행3-4장). 새 방언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러니 못 알아 들을 수밖에.그러면 이제 고린도전서12장으로 가보자. 10절 하반절을 보면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여기에서 우리들은 비약을 하려고 한다. 방언이 외국말(사실은 말이 중요한 것은 전혀 아니다, 그 내용이 중요하다)이 아니라 무언가 특수한 말이라고 여기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 나오는 방언을 무엇인가 오늘날 사람들이 지껄어 대는 방언과 일치성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면 사도행전 다른 부분에 나오는 방언을 살펴보자.먼저 2장 끝 부분에서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후 믿은 자들에겐 방언이 나타났다는 기록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이 무엇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지를 볼수 있다. 사도행전6장에서는 방언이란 것이 언급되지도 않는다. 9장에서 보면 바울이 부름을 받지만 방언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러다가 10장46절에서 방언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왜 이곳에서 방언을 언급하는가? 물론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 곧 복음이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시다. 그것은 47절에서 대답한다.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우리와 같다"라는 것이 강조된다. 행11:17절을 보라"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참조15:8)18장은 고린도 교회에서의 1년 6개월간의 사역이 나온다. 그런데 방언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19장1-7절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 성령이 임할 때 방언하며 예언을 했다. 방언과 예언은 하나님의 큰일, 곧 복음임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왜 방언이 언급되고 있는가?그것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데 있다. 4,5절을 보자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세례요한의 제자들도 동일한 성령을 받았음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방언의 전부이다. 사도행전 어느 본문에서 외국말이 아닌 말을 언급하고 있는가? 뿐만 아니라 외국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복음과 상관없이 방언을 말하는가?그렇다면 고린도전서에서도 동일할 것이 아닌가?다시 12장으로 가보자. 10절에서는 외국말, 그리고 복음과 상관없는 방언에 대해서는 찾아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11). 28절과 30절도 그러하다. 그러면 문제는 14장이다. 2절을 사람들은 지 마음대로 해석한다. 하나님께 한다는 말은 하나님만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씀이요, 아무도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오직 그 영, 즉 성령으로 비밀(복음:골1:26)을 말할 뿐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방언하는 자는 통역하여 비밀(복음)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게 하라는 것이다. 3-4절을 보자.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성경에서 우리는 자기의 덕을 세우라고 말씀하는 바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자기의 덕을 세운다는 말은 바울의 비판적 표현임을 알 수 있다. 5절을 보라. 방언은 분명 통역함으로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 말하지 않는가? 예언도 교회의 덕을 세운다고(4). 그러면서 6-12절을 보면 통역없는 방언이 뜻 없는 소리와 같다라고 말하지 않는가?(10). 그러면 14-19절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가?"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꼬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너는 감사를 잘하였으나 그러나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통역없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한마디로 통역없는 방언은 아무 소용없다는 것이다. 마치 통역없어도 방언하면 자신에겐 유익된다고 생각된다면 착각이다. 이곳에서 바울은 방언을 인정한다. 그 방언의 내용도 복음이며,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이 다른 나라말로 되어질 때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 흘리심은 자기 백성의 죄를 위함입니다. 이 말을 미국사람이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러면 자신이 미국사람이라고 가정하고, 이런 한국말을 했을 때 자신이 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혀 열매를 맺을 수 없지 않는가? 자신에게도 열매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울 수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바울이 19절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20절을 말한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무엇이 지혜에 장성한 사람인가?21절 말씀을 알아듣는 자이다.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이 말씀은 이사야28:11절 말씀의 인용이다. 28장을 읽어 보라. 심판의 기능으로 방언을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22절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무식한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이것이 사도행전 2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여기에서 방언과 예언을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 2장은 어떤가? 똑 같지 않은가? 물론 이것은 이 방언, 예언으로 인해 열 받는 자들이 발생하는 것을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방언은 복음이다. 지금도 방언은 계속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그런 방언은 사기이다. 그러면 왜 목사들이 적극적으로 말하지 못하는가? 말했다가는 교인수가 절대적으로 감소. 자신이 쫓겨날 것이 뻔한데. 물론 자신이 알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회개해야 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내용을 안다고 하더라도 이 앎을 자랑거리로 삼는 자들. 그들도 회개하라. 기존 목사들이 방언을 부정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이 살아남고자 하는 자들이라면, 이 방언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이 비빌 곳을 찾는 자들은 과연 그들과 다른가?기존 방언을 부정하고 이렇게 말씀대로 해석한다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아니다. 예수님께 목숨을 걸어야 한다. 상한 심령이 없는 자들은 얼마나 강퍅한 자들인가?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신데, 다시 일생에 매여 살아가는 인생들이라면. 모든 것이 주로 인하고 주로 말미암고 주님께로 돌아가야 함을 아는 자가 성도가 아닐까요?주님을 위해 죽으려고 하는 자들은 없고, 자신의 헛된 것을 위해 과감히 목숨을 버리는 자를 보면서, 또한 체면 살리기 위해서 다시 피의 복수를 하려는 인간들을 보면서, 자신들이 하는 일은 다 잘한 것이고. 그렇다고 내가 테러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올시다. 참으로 슬퍼오. 주님을 위해 자기의 가진 것들을 잃어버리려고 하는 자들을 찾아보기 힘드니. 자기 배가 신인 세대여. 어찌할꼬.그러나 주님은 말씀대로 행하시니 감사할 따름이요. 말씀대로 이루어 주옵소서.
*익명으로 써 죄송합니다. 이 글을 읽고 방언(한국교회가 말하는)이 있다는 말하는 사람들은 반론을 제기해 주시고, 그리고 부족한 면이 있으면 보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5일 오후 10시 48분에 남기신 글 저는 방언은 계속되어야 된다고 했지 언제 종결되었다고 했습니까?------------------------작성자 [ 나그네 ] - 2001년 09월 19일 오전 11시 34분에 남기신 글 방언은 종결되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신학의 부재가 이론 혼란스런 대화를 하게 하는군요. 이근호 목사님도 여기에 한 몫 하시고자 하는지요?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22일 오후 8시 23분에 남기신 글 방언이 종결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질문한 분으로 인해 방언이라는 개념 안에 담긴 계시 개념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언의 완성, 혹은 계시의 완성이 계속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방언은 계속 된다고 했습니다. 작성자 [ 구득영 ] - 2001년 09월 04일 오후 12시 52분에 남기신 글 ⓝ 북유럽을 안 가본 분들을 위해서 -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 - 한겨레 21
http://www.hani.co.kr/section-021070000/home01.html
[ 목차 ] - 거꾸로
사냥, 인간이 할 짓인가 ... 2001/08/29 374호허름한 차림의 ‘국왕 전하’ ... 2001/08/14 372호지킬 박사와 하이드? ... 2001/08/01 370호공산당 기관지에 보조금까지… ... 2001/07/11 367호쉘의 피비린내나는 기름 ... 2001/06/27 365호스카우트, 그 악의 씨앗 ... 2001/06/13 363호다른 문화로 가는 가시밭길 ... 2001/05/29 361호‘탐험 낭만주의’의 허와 실 ... 2001/05/15 359호한국인으로서의 자각, 그러나… ... 2001/05/02 357호자본주의의 야만성을 꿰뚫다 ... 2001/04/17 355호‘밤의 나비’ 골치는 아파도… ... 2001/04/03 353호노르웨이, 이건 아니다 ... 2001/03/20 351호양심의 권리가 더 신성하다 ... 2001/03/07 349호한푼한푼을 아끼는 쾌감! ... 2001/02/21 347호노르웨이, 인종차별 정말 없나? ... 2001/02/07 345호‘체통’이 없는 사람들? ... 2001/01/17 343호온건한 민족주의, 파시즘을 낳다 ... 2001/01/03 341호‘영어 실력’은 평등의 산물 ... 2000/12/20 339호민족은 ‘핏줄’만이 아니다 ... 2000/12/06 337호“유럽은 약탈적인 오랑캐였다” ... 2000/11/08 333호좌우는 있어도 위아래가 없다 ... 2000/10/25 331호‘김정일 제외’놓고 열띤 토론 ... 2000/10/18 330호일상적으로 ‘진보적’인 사람들 ... 2000/10/04 328호왜 “아니오”라고 못하는가 ... 2000/09/21 326호
------------------------ 작성자 [ 우려 ] - 2001년 09월 04일 오후 2시 26분에 남기신 글
ⓝ ☞ 목회자의 열등의식
가끔 기장측 목사들의 홈을 방문해 보면 뛰어난? 철학 이야기들이 올라오곤 한다.그러나 그래봤자 그것이 전문철학인과 같을까?그러나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그것은 그들의 열등감의 표현이다. 세상사람을 선도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십자가의 도는 좀 무식한 것 같고.....세상 철학과 심리학 등의 지식으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의 표출이다.가끔 이근호 목사의 홈을 방문해 볼 때에도 역시 십자가 마을 어쩌구하지만 그의 글들을 읽어볼 때 웬지 가슴을 무겁게 하는 것들이 항상 있다.이곳이 십자가를 전한다고 하지만 기장측의 목사들의 하는 것들과 실상은 다르지 않다.모든 비평하는 글들과 헛된 자존심 속에서 왜 나는 이들의 열등의식만을 발견하고 돌아가는 걸까?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04일 오후 7시 08분에 남기신 글 방금 언급한 것도 일종의 심리론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처럼 철학을 말하나 안하나 모든 인간은 철학적이며 과학을 조리 있게 말할 줄 아는가 모르는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과학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는 인간의 각 방면과 상관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의 내부에 뭐가 들어 있는 지는 알지도 못한 채 그냥 십자가 복음만 채택하고자 합니다. 진정 십자가를 아는 자라면 인간들마다 보편적으로 잠겨있는 각방면의 죄악성과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과 상호 연관시키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기장측 목회자들은 인간, 그 자체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즉 십자가 사건에서 인간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내놓은 각가지 업적과 사상을 가지고 역으로 인간 자체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고자 합니다. 거기에 비해서 자유주의자들을 욕하면서도 무식한 것을 믿음이 돈독한 것으로 자부하는 보수주의자들은 자신의 죄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내가 무엇을 해야 내 교회가 존립하고 잘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사람 장사'에 매진합니다. "남은 남대로 자기 전공분야가 있듯이 나는 이게 전문분야니 그러니 남에게 열등의식 가질 하등 이유가 없지. 나는 종교 기능인으로 한평생 이 사회에서 버티며 살거야"라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도는 한마디로 모든 인간은 쓸모짝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 홀로 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정말 이 십자가의 복음을 아는 자라면 "왜 신학(철학의 일종)도 아니고 교회(종교학의 일종)도 아니고 왜 예수님만인가?"를 날마다 생각하며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작성자 [ .. ] - 2001년 09월 07일 오후 12시 11분에 남기신 글
목회자가 심리학과 철학에 대하여 몰라야 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죠.그러나 교회나 홈페이지에서 그런 것을 다룬다면 본질에 어긋난 것이 아닐까요?이러한 생각들이 교회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영어 예배를 드리고....건강세미나를 열고....
------------------작성자 [ 나도 우려 ] - 2001년 09월 09일 오후 5시 12분에 남기신 글
ⓝ ☞ ☞ 목회자의 열등의식? 목회자들의 생명 과 계시 결핍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기 위하여, 친히 택하시고, 생명으로 풍성케 하시고, 계시를 주시어 자기 백성을 돌보시게 하심을 받은 분들이 극소수 있을 것입니다.그렇지만 거의 대부분의 목회라는 것을 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원하심과는 관계가 없이 자신들의 엉뚱한 생각으로(목사라는 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것이라고) 학문을 배우듯이,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워 가지고, 하나님의 원하심과, 그 분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목사라는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대해서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설교를 이런 저런 세상 지식 같은 것들을 석어서 하고들 있는 것입니다. 제가 염려가 되는 것은 목사들은 또 그 일을 하기 위하여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순수하게 복음을 듣고자 하는 분들에게도 이런 복음과는 거리가 먼 글들이 그분들의 마음이나 시간을 빼앗을 것이 염려가 됩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아 가는 것이 아닌 그런 글들은 이곳에서는 보지 않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 이근호 ] - 2001년 09월 11일 오전 06시 25분에 남기신 글
세상 지식이 과연 남의 이야기일까요? 목회자 자신이 그 세상 속에 살고 시달리면서 인식한 바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느낌도 더욱 새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겪고 행동하고 간직하고 있는 죄악을 목회자 자신도 공유하고 있다는 의식이 없어 어찌 십자가의 피가 그 목회자와 관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복음이 없는 세상 지식 자랑으로 목회를 끌어가고자 하는 목회자가 있다면, 비록 이 사람이 세상 지식을 포기하고 성경 말씀만 전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가증스러운 사람입니다. 즉 이제 그 사람은 말씀 지식 자랑으로 목회를 끌어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서 "나는 타인과는 다른 성숙되고 대단히 바른 사람일 것이다"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지만 제대로 복음의 진수를 바른 전달할 수 있는 목회자입니다.
---------------------------작성자 [ 구득영 ] - 2001년 09월 07일 오후 1시 07분에 남기신 글 ⓝ ☞ 이런 글에 무슨 리플이... '아,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도 있구나' 라고 한번 보면 되는 가벼운(?) 글들인데, 그리고 특별히 코멘트를 하거나 논쟁을 위한 글도 아닌데, 민감한 반응을 하니 마음이 무겁군요. 그리고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것 같아 더욱 안타깝습니다. 차라리 게시판에 글의 내용이 너무 많아서 읽기에 피곤하다고 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말입니다. 제가 앞으로 글을 올린다면 짧게 그리고 사이트 주소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전화로 인터넷 하는 분들을 위해서 시간절약을 위해서 그냥 복사해서 보시라고 길게 올렸던 것입니다. 저도 최근에 코넷을 깔아서 그 심정을 잘아니 말입니다. 그렇지 않게 보였다면 양해를 바랍니다. 그리고 서로 비아냥거리고 헐뜯는 일은 없도록 합시다. 가벼울 땐 가볍게, 진지할 땐 진지하게, 웃을 땐 웃고, 싸울 땐 싸웁시다. 코피가 나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는 하지 맙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