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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 갈 3장 24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2001,6,27 - 2001,7,4묻고답하기갈라디아서

[ 갈 3장 24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2001,6,27 정성진
안녕하세요. 목사님.게시판에 실려있는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그래요...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했는데, 그런 영적인 움직임은 분별치 못하고 엉뚱한데 생각을 두고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목사님께서 어디를 가시든지 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박사교회를 통하여 변치 않고 증거될 줄 믿어요...
갈라디아서를 읽어가다가 3장 24절 말씀 앞에서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1. 왜!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나 어떻게 설명은 못하겠습니다.
2. 그리고 복음을 바르게 깨달은 자의 모습은 정말로 바울처럼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되나요?(갈 6:14).
전.. 십자가를 생각해도 가슴이 뜨겁지가 않은데.. 어떻게 하죠..고민이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는 은혜를 주십니다. 저도 사도처럼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자이길 소망합니다.목사님.. 한 번도 뵙지 않았지만.. 목사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제 마음속엔 간절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성진 올림.
[ Re: 갈 3장 24절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 2001,6,27 이근호
갈라디아서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염두는 두는 쟁점은 '어떻게 의롭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율법'과 '그리스도'를 상호 대비되는 선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 행함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동반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둘 중에 어느 한 쪽은 우리를 의롭게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24절 앞에 있는 22절과 23절에서 확연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여기에 보면 율법이 오므로 인해 인간에게는 의는커녕 '죄 아래 가두어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질문하는 24절에서는 '몽학 선생' 역할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몽학선생'이란 선생이 어리석다는 말이 아니라 배우는 학생이 얼마나 어리석고 제대로 된 존재가 못됨을 밝혀주는 선생 노릇을 뜻합니다. 인간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행함이나 율법 준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이미 물 건넌 갔음을 명확히 하게 됩니다. 이제부터는 행함의 차원은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행함의 대상이 되는 율법이 몽학선생으로서 인간들의 무지와 무가치성과 쓸모 없음과 의롭지 못함과 구원받지 못함을 지적하는 구실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 복음의 내용으로 다가옵니다. 의롭지 못할 자들이 의롭게 되는 것은 선행이나 율법 준수에 근거할 차원은 떠나 있습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홀로 의로우신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러한 믿음의 역사는 갈라디아서 3장에 인간의 행함에서 비롯되지 않고 성령의 일로 보고 이 성령의 일 또한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연속으로 보고 있습니다. (갈 3:1-3) 그래서 갈라디아서 3:24를 해석하면서 주의해야 될 점은, 율법을 통해서 자기 무지를 안다고해서 모두 다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으로 그들만이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즉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를 믿는 행함을 동원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의 일로 믿게 된 이 믿음에 대해서 율법 가지고 설명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래야 죄인의 죄인됨을 확고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 ttm로의 능력으로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고 구원받을 능력조차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죄 아래에서 지배받고 있기에 그 지배에서 스스로의 종교적이나 양심의 힘으로 극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에게 있어 십자가 의식이란 그저 뜨거운 심적인 느낌이 아니라 삶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삶이냐 하면 바로 고린도전서 15:10의 말씀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은혜성입니다. 이 은혜는 고린도전서 15:3에서 나온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동안 질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일 아침에 제가 이사를 가기 때문에 앞으로의 질문은, www. woorich. net/ 게시판으로 해주세요. (초기 화면말고 실내용은 약간 시일이 지내야 완성될 것입니다.) - 아듀 박사교회 !![ 목사님 수고 많았습니다 ] 2001,6,28 bbs
수요예배로 박사교회를 사임하신 목사님. 그동안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서로 기쁨으로 보내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목사님의 젊은 여생을 이 곳 박사에서 보내셨는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칭찬 받을만 한데 - 다시 한번 인간의 완악함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끝이 없는 논쟁에 휩쓸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박사교회 홈 페지가 이렇게 서로의 잘잘못을 가리며 서로 비방하는 것으로 장식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다만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는 저희가 되었으면 합니다.우리교회에서도 언제나 변함 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하시길 바랍니다.
================================================================================== [ Re: 목사님 수고 많았습니다 ] 2001,6,28 이근호
격려와 충고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하는 자는 떠난 교회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내 몰라라"하고 내팽개쳐서는 아니 됩니다. 한국 교회의 제일 큰 문제점이 바로 '내 교회' 주의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거의 12년 간 이것과 싸웠습니다. 비단 박사 교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저의 사적인 감정 싸움이 아닙니다. 제 설교에 불만을 품고 제가 있을 때는 가만히 있다고 제가 가고 난 뒤에 복음을 빙자해서 또다시 '내 교회 주의'로 돌아설 공산이 큽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사전에 박사 교회 남아 있는 교인들에게 알려주려고 합니다. 즉 복음에는 관심이 없고, 재미나게 놀 수 있는 교회라는 이름의 친목단체로 사적인 용도로 박사 교회를 변모시키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교회 운영은 목사에게 전적 맡기고 자기네들은 무슨 짓을 하든 목사가 전혀 간섭 안받는 그런 개인적인 용도의 놀이터로서의 교회상을 이들은 머리 속에 그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소위 안다는 자들도 인간적인 정에 못이기고 정신적으로 편하면 최고라는 이유만으로 같이 휩쓸리기 일 수 있습니다. 복음은 안 듣고, 헌금도 거의 하지 않고, 물론 기도할 필요도 없이, 그저 와서 놀아주기만 해도 사랑 받는 그런 자유로운 교회로 뒤바뀌기 위해 대충 설교하는 목사를 구할 공산도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게으름과 이기주의는 뒤로 감추고서 "목사가 복음을 모른다 둥, 설교가 매끄럽지 못한다 둥" 목사 비판하는 재미로 교회 다닐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 모두 다 '내 교회주의'에서 나온 사고방식입니다. 나의 교회를 하나 소유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해도 양심에 찔리지 않고 용서받을 수 있는 '제멋대로 교회' 하나는 소유하며 남은 생애를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점들을 알고 있는 저로서는 결코 '나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고 복음과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으면서 무조건 "이 교회는 내 것이야 내가 키울 거야 내가 관리 할 거야"라고 하는 자들을 저들을 향해 양보 없는 전쟁을 계속 할 것입니다.
[ 하나님에 대해서도 좀 생각합시다 ] 2001,6,29 학생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이 자기를 불러주셨다는 사실만 감사하고 자기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에 충성할 생각만 하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충성과 봉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얘기를 빌어보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엡1:17-19)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기원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엡1:13)’ 사람들이다. 바울은 지금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시금 ‘지혜와 계시의 정신(pneu'ma, 영)’을 주시라는 것과, 그래서 그들의 마음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한다. 신앙 생활은 방언을 소리 높여 외치며, 앞날을 족집게 무당처럼 예언하거나, 불치의 병을 안수 한 번으로 고쳐내는 능력이 아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에게 원했던 신앙 생활은 이런 것들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이제 마음 눈을 열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망과 우리가 장차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누릴 그 영광이 어떤 것인지를 똑바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 싸구려 약장사나 만들려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하신 게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로 당신의 아들 삼기 위함이고, 궁극적으로는 당신과 우리가 온전한 하나로 살기 위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영광을 거부하며 “아니,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까?”고 항변한다. 이래서는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신앙 생활이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믿는’ 것으로는 신앙 생활이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야말로 초보며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신앙 생활은 예수를 ‘믿는’ 데서 출발하여 예수가 되고 예수로 살아 마침내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고백에서 끝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끝끝내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고 싶은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소망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께 충성하지 않는다. 그냥 아들의 삶을 살 뿐이다. 충성과 헌신은 그것이 자기 일이 아닐 경우에나 미덕이 된다. 그러나 아버지 일이 곧 나의 일이요, 아버지의 영광과 아버지의 고난이 곧 자기 것인 아들에겐 충성이니 헌신이니 하는 따위는 모두 우스운 말이다. 하나님의 일차적인 목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아들로 살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왔다. 우리가 그동안 힘든 것을 참고 견디며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었던 이유는 아버지를 사랑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조물주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인식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일 점 일 획도 ‘어길 수 없기에’ 열심히 노력하고, 자신의 모든 삶을 드려 헌신했던 것이다. 하긴 이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며,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기에 그것이 마치 신앙인 양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결코 아들의 삶이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어야 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명을 어길 수도 있고,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재산을 창기와 함께 말아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서려고 하는 모든 시도를 일러 성경은 ‘육신’이라고 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4:1-2) 개역 성경은 로마서 4장 1절을 난하 주에서 다음과 같이 번역하기도 한다. 그런즉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육으로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내 생각으로는 이 번역이 옳다고 본다. 로마서 4장 1절은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민족의 육신적인 조상이라는 사실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아브라함이 자기 노력이나 자기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입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야 2절이 자연스럽다. 1절의 육신이라는 말이 2절에 오면 행위로 발전한다. 사도 바울의 지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된 것은 절대 그의 노력이나 그의 행위 즉 그의 육신에 기인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 것이란 얘기다. 아브라함의 육신이 만들어내는 아들은 이스마엘이다. 그러나 이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이 아니며, 오직 이삭으로 말미암는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것이다. 이스마엘과 이삭. 이들의 삶이 누가복음 15장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 양들에 대해서는 한 번도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안전한 곳에, 그리고 또다른 목자의 보호 아래 잘 있는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있는 곳은 메마른 땅 광야며, 그리고 그곳엔 목자가 없다. 목자는 오직 길을 잃은 양 한 마리에만 관심이 집중된다. ‘회개할 필요가 없는’ ─ 왜냐하면 아버지의 명을 지켜 어김이 없었으니까 ─ 양들에겐 목자가 필요 없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도 그들끼리 무리를 지어 있음으로 안전하다고 믿는다. 교회에 나오기 때문에 구원받았다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심이기 때문에 안전하다 생각한다. 길을 잃었다는 말의 의미는 자신의 육신적인 능력, 자신의 노력과 행위의 열심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자각에 있다. 그러니 이제 어디로 가야 좋을지,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모르기에 방황이며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예루살렘이나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의미를 잃고, 그동안 드려왔던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자기 욕심 나부랭이나 지껄여왔던 기도는 도대체 무엇이며, 금식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성경 말씀이라는 하나님의 재산을 받아 그저 창기와 더불어 먹고 마신 삶 끝에 찾아온 이 기근. 사람들은 이 궁핍을 만나야만 아버지의 의미를 알고, 또 아들이 자신의 노력으로 아버지 앞에 의롭게 될 수 없음도 안다. 그러나 맏아들처럼 성실한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궁핍을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인간적인 성실의 경연이 아니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은 인간들의 눈에 언제나 이삭(비웃음)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쉽게 납득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셔서 구십구 세 된 사람에게 아들을 얘기하면 웃을 수밖에 없고,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값없이 우리 죄를 사하겠다고 말씀하면 웃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은 이삭보다는 이스마엘이 좋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17:18)’ 했던 것이다. 이스마엘이라면 우리가 한 번 해볼 만하다. 그러나 이삭은 우리의 능력으로 이루는 게 아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의 탄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이래서 ‘믿음으로’라는 말이 나오며, 이래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더 이상 우리에게 묻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도 스스로의 죄를 더 이상 문제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자존심 하나로 버텨가는 인생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그냥 받기엔 뭔가 쑥스럽고, 뭔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래서 지어내는 얘기 ─ “그래요, 하나님이 이처럼 많은 죄를 사해 주셨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죄 짓지 말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된 일꾼이 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율법 아래 살지 않게 하시겠다는 의미다. 율법과 상관없이 온전히 은혜의 원리 아래 사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오늘의 기독교는 믿음으로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을 다시금 율법의 수렁으로 몰고 간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이제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며, 이런 삶을 일러 성화의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의 얘기를 들어보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갈3:1-3) 어리석은 사람들은 갈라디아 사람들만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 역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오늘도 예배당 꼭대기에, 저처럼 높이 걸려 있지만, 그래서 주일마다 자기 두 눈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분명히 보지만, 그러나 이들의 삶은 여전히 율법 아래 머물며, 오히려 율법을 벗어난 사람들을 이단시하고 백안시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는 탄식은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다. 이는 실제로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나오는 탄식이다. 한 번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절대 그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정말 성경도 하나님의 의도도 모르고 크게 미혹된 것이다. 성령으로 시작하여도 얼마든지 육체로 마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무리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죄를 사하셨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여전히 율법적인 행위 아래 있으면 우리를 거듭나게 한 그 성령은 더 이상 우리를 어떻게 하실 수 없다. 그저 안타까움으로 탄식하며 눈물 흘릴 뿐. 율법을 벗어나는 삶은 단회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며, 땅에 속해 있던 사람이 하늘로 그 주소를 옮기는 것이다. 이 일은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이루어 가야 하는 성질이 아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같은 말씀이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같은 말씀을 이런 데 적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나 율법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살아가는 것은 단 한 번의 눈 뜸, 그것이다. 그 후에는 절대 율법적인 싸움을 하지 않는다. 이건 그런 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다. 그저‘눈을 뜨고 있기만 하면’ 싸울 필요가 없는 일이다. 물론 눈을 뜨고 나면 그동안 자기가 집착했던 것과 좋아했던 것, 그리고 자기가 살아왔던 삶의 터전 등이 제대로 보일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은 자신을 괴롭힐 것이다. 아름다울 거라 생각했던 것들의 추함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무언가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들의 무의미함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차라리 못 보고 몰랐더라면 편했을 것들이 이제는 보기 때문에 괴롭고 알기 때문에 고통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그래도 초보적인 괴로움이다. 정작 어려운 것은 눈을 뜨기 전에는 좋아할 수 있었던 대상들을 더 이상 좋아하지 못함으로 오는 괴로움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돈도 나를 좋아하는 것이지 내가 돈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돈도 나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눈을 떠 율법 아래 사는 삶의 실상을 보고, 그 비참함을 버리게 되면, 문제는 그 율법도 나를 외면하고 나를 버린다는 사실이다. ‘율법이 나를 외면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 어디 고민할 문젠가’고 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나를 외면하고 나를 버리는 것이 율법만이 아니고 ‘율법적인’ 사람들까지도 포함되며, 그리고 그들은 바로 내 부모며 내 남편이며 내 처자식들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내가 율법에 대한 눈을 떠 그 참혹한 모습을 알게 되더라도 ─ 이 비참함을 제대로 보기만 하면 절대로 그 아래서 살지 않는다. 모르고는 몰라도 알고는 살 수 없다. ─ 내 가족들에게 그 비참한 실상을 보게 할 수 없다는 점이 골치 아픈 문제다. 물론 말이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눈을 뜨고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걸 어떻게 말로 설명한단 말인가. 그렇겠구나 라고 동의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그의 깨달음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하면서도 엉거주춤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런 데 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율법 아래서 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는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다는 것. 또한 계속 그들을 좋아할 수 있으려면 자신도 계속 율법 아래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4-36) 율법에 매여 사는 사람들이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저 그들을 외면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러나 그 대상이 아비요 어미며 형제며 자매일 때엔 외면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가족은 그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가족으로부터의 이탈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곁에 묶어두려 하고,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집착한다. 사람들이 율법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끝내 그 율법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율법적인 체제의 견고함 때문이다. 이 체제에 덤벼드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치기며, 풍차에 돌진하는 동키호테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항상 이런 위험 앞으로 내몰리는 일이며, 삶과 죽음을 건 대모험이다. 절대 신앙 생활을 우습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신앙은 우리 생활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며 오히려 그 이상이다. 이런 각오와 이런 결단이 있는 사람만 하나님을 찾아 나설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율법을 온전히 벗어난 사람들 앞에 하나님은 다시금 ‘육신이냐 영이냐’ 라는 것을 물으신다. 여기 나오는 육신은 앞에서(롬4:1) 말한 육신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앞에서 말한 육신이 인간의 능력과 행위, 노력 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기 나오는 육신은 이 물질 세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전자의 육신에 대한 반대말이 은혜나 선물이라면, 후자에 대한 반대말은 영이며 감추어진 세계다. 신앙생활은 육신을 두 번 벗는 것이다. 한 번은 단회적인 사건이고(이스마엘과 이삭의 문제), 또 다른 한 번은 점진적인 사건(에서와 야곱의 문제)이다. 전자가 영의 구속(롬8:10)이라면 후자는 몸의 구속(롬8:23)이다. 영의 구속이 이루어진 사람이 몸의 구속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 이것이 신앙 생활의 참 모습이다. 하나님을 믿음이란 결국 이 세상에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세상의 힘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가 육신에 거하는 동안만, 그것도 우리의 육신적인 부분에 대하여만 발언권을 행사할 뿐이다. 우리가 만일 육신적인 풍요가 없이는 살기 힘든 ‘부자’ 같은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한들 그것은 모두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나사로처럼 살 수 있어야 한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그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그리스도가 도움이 되는 그런 삶을 살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빌딩일 뿐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5-17) 요한의 말대로 이 세상과 그 정욕들은 정말 지나가는 것인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가. 어디서는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기’를 소망하던 요한이 왜 여기서는 이처럼 이 세상에 대하여 적대적인가. 예수를 믿으면서 이 세상을 같이 가질 수는 없는가. 요사이 기독교는 세상에서도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어, 재산을 공개하자는 일부의 주장도 외면하고 있는 판인데……. 육신의 정욕.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쾌락을 꼭 남녀 간의 일로만 볼 일이 아니다. 멋진 옷, 편한 집, 좋은 차. 이들이 제공하는 안락함도 모두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색(色)의 쾌락이다. 그런데 이런걸 좇으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니 어떡할 것인가. 안목의 정욕. 우리 눈이라는 것은 참으로 묘한 데가 있어 약간의 차이도 기가 막히게 분별해 낸다. 그리고 그 욕심은 끝이 없으니…, 이래저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생의 자랑. 명예와 권세, 아들자랑 딸 자랑.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나사로 같은 사람에게도 이생의 자랑이란 게 있었을까. 부자의 동정으로 얻어먹으며 산 일생에 무슨 자랑거리가 있었으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처럼 이 세상에서의 영광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라면, 도대체 하나님을 믿어 얻는 게 뭔가. 사람들을 무얼 하자고 하나님을 믿는가. 이문열의 소설 「詩人」에 보면 흔히들 김삿갓으로 알고 있는 김병연이 금강산에 들어가 취옹(醉翁)을 만나, 시의 효용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이 나온다. 취옹은 여기서 시의 효용은 그것으로 밥을 먹자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자는 것도 아니며 또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기 위함도 아니라는 말을 하는데, 당시의 병연으로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럼 대체 시라는 걸 왜 쓰느냐는 질문을 하게 된다. 취옹의 대답 ─ “단지 시를 얻는다.” 시를 써 단지 시를 얻는 사람이 시인이다.
* 이호식님 "누가복음 강해를 마치며" 중에서 *

[ 위험스러운 사상의 시작 ] 2001,6,30 이근호 이호식 씨의 사상이 참으로 위험하다는 것이 위의 설교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 번 믿음 사람(초보)부터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어 버리고 이제는 하나님과 자기 자신만의 관계로 남아 버리는데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이 될 수 있느냐만 남아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한 번 믿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회개가 필요치 않는 상황이라는 것을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있어 예수님은 뭐냐? 시범 조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기 부인이나 자기 미움 같은 것은 이미 믿었다고 여긴 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 합니다. 공개 강좌에 나가서 주장하기를 사도 바울 조차 오늘날 자신들보다 신앙 수준이 낮다고 했습니다. 낮은 단계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사도의 위상이라든지, 이러한 인간 구원 완성을 목표로 한 이와 같은 신론과 기독교론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이호식씨는 전혀 감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인 신학 수업을 제대로 받지 않았기에 그 열매가 여과없이 튀어나옵니다. (건성으로 신학 공부를 한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이호식씨는 율법을 구원론과 관련 있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에 필요 없다는 주장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율법은 인간의 구원론과 관련해서 언급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폐기론자를 공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율법주의자들도 이호식씨와 마찬가지로 율법을 구원론과 관련시킨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고유의 의와 관련시켜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몽학선생 노릇을 여전히 하고 있습니다. (갈 3:24) 오늘날 박철수니 혹은 새생명 운동이니 성화 운동이니 해서 이호식씨와 유사한 운동들이 많이 등장해서 자신이 이미 구원받았다는 심리적, 종교적 안도감속에서 편히 살고 싶어하는 사람과 더 나아가서 자신의 완전함을 기대하고 어리석은 자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호식씨처럼 자신의 신격화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자는 좀 드물지만 이들도 나중 사상적 권태를 느끼면 무슨 아이디어를 추진할련지 모른다) 성경의 뜻은 분명합니다. 오직 아들에게 영광돌림으로서 아버지께서 영광돌리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것만을 최종 증거의 내용이 되어야 믿는 자입니다. (요 17장) 빌립보서 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이근호님께 ] 2001,7,1 박인호 이호식씨에 대하여 알고 싶은데요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특히 그의 부정적인 부분에 대하여(말씀하신 자신의 신격화를 노골적으로 주장하는 부분 등등)알고 싶습니다. 그분에 대하여 알고 싶은데요 그분의 긍정적인 부분은 그분의 글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요(제가 보기에는 복음적) 님께서 말씀하시는 부정적인 부분에 대하여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알고 계시는 부분들에 대하여 저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 이근호님께 ] 2001,7,1 학생 님은 봉사는 아니군요. 진리를 눈앞에 두어도 그것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진리를 보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그분의 사랑을 입은 연고입니다. 그분의 뜻은 우리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신(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신(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고 신(하나님)과 하나되는 것입니다. 신이 되는 것이 악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말씀 십자가 성령을 통한 것이어야만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인생이 가장 불쌍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원히 신이 되지 못할테니까요.
==================================================================================[ Re: 이근호님께 ] 2001,7,1 이근호 이호식씨에 대해서는, 신앙과 신학에 경솔하고 경망스러운 사람이라는 평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모든 최종 지향점이 오로지 "신처럼 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호식씨의 신학 뿐 아니라 세상 모든 학문, 철학과 물리학과 생물학 등 모든 것들이 바로 이 '신처럼 되는 것'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을 보게 되면 이 경향성을 감추지 않게 되고 그곳으로 달려가는데 주저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이호식씨에 경솔하다는 표현은 그만큼 다른 종교의 질주나 모든 학문의 질주에서 결국 이호식씨가 같이 합류하게 된다는 점을 본인이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대한 대책도 없이 마구 성질대로 경솔하게 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14:10의 말씀을 가지고 " 인간이 신이 된다"고 경솔하게 해석하게 된 연유에는 '예수님 안' 이라는 위상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감을 못 잡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으로서 은혜 안에 있는 것을 마치 존재와 존재의 결합으로 간주하는 것은 동양 사상의 여파이지 결코 성령의 생각하고는 상관없습니다. 학생님, 제발 당신 만큼은 경솔하지 마세요. 당신같이 이호식씨에 빠져 있는 학생들을 한 두 명 본 게 아닙니다. 이들에게 있어 이호식씨는 거의 교주 위치에 있습니다. 정말 성경 전체가 그런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Re: Re: 이근호님께 ] 2001,7,1 박인호
저는 이호식씨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의 글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제 보기에는(긍정적)입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부분에 대하여(부정적)자료가 있으시면 도움을 구합니다. 오직 확실히 알기를 원하는 것이니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 Re: Re: Re: 이근호님께 ] 2001,7,2 이근호 학생한테 요청하면 많이 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본 것만 약 10권의 설교집이 있습니다. 그것 외에 이호식씨가 저하고 논쟁한 녹음 테이프가 아마 누구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이호식씨는 자신이 강의한 것을 녹음하지 말라고 건방지고 청중들에게 명령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말을 듣는 청중들이 말하는 자 자체를 판단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감히 모독했습니다.) 다시금 언급합니다마는 창세기 3장에서 뱀이 언급한 말이 "너도 신처럼 되리라"를 성경 가지고 시도하는 무리들입니다. 긍정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해둡니다.[ 율법 폐기론이란? ] 2001,7,1 이근호================================================================================== * 질문 - 이근호 목사님 안녕하세요. 율법 폐기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답변을 부탁드립니다.(임제민) ================================================================================== 율법폐기론이란, '성도에게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율법 옹호론자들이 비꼬며 비난하는 차원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즉 율법은 결코 성도에게 폐기될 것이 아니라 수호해야 되고 반드시 그 뜻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 율법 옹호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래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란 인간들의 한계와 죄성을 확연히 노출시키기 위함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인해 하나님의 법을 지켜보겠다는 의지력은 증강되나 그것으로 인해 인간의 탐욕은 그 속에서 예전에 미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악의 수단으로 자신이 사용될 뿐입니다. 예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자아의 악만 드러날 뿐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유용하든 아니하든 여전히 하나님의 구원의 수단으로 멈추지 않고 작렬하고 있습니다.
[ 악의 기준과 범위? ] 2001,7,2 이근호==================================================================================* 질문 - 목사님, 살전5:16~22중 22절에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라는 말씀에서 악의 기준과 범위를 알고 싶고 '버리라'라는 명령형은 우리의 의지에 호소한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까? 질문에 알맞은 정확한 성경적인 해석을 바랍니다. (어떤 나그네)================================================================================== 성경에서 악이란 언약 내용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모두 입니다. 즉 악이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그 기준에 부합되지 못한 것은 전부가 악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성향을 여러 면에서 언급했는데, 특히 '교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십니다. 교만해서 주님을 사랑할 수 없는 상태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모두 악입니다. 성경에서는 '명령형'이란 그 자체로 활동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능력을 갖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인간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그 말씀 따라 움직이겠끔 만드는 능력이지요. 예를 들면, 고넬료와 베드로 양쪽에서 동시에 성령께서 작용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즉 명령을 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영으로 그 명령을 성취하겠끔 하도록 그 인간을 인도한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 대해 믿는 자가 신자입니다.
[ 아직 모자라는군요 ! ] 2001,7,3 언뜻 "인간 의지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전체를 그 말씀 따라 움직이겠끔 만드는 능력이지요. 예를 들면, 고넬료와 베드로 양쪽에서 동시에 성령께서 작용하시는 것과 "
악에 대하여 설명이 아직 많이 모자라다고 생각되네요. 이 세상에 선과 악이 있다는 생각에는 이견이 없겠죠. 님이 위에서 언급한 말은 하나님이 인간전체를 그 말씀 따라 움직이게끔....(생략) 이것은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고, 선이던 악이던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악을 구분해보려는 님의 시도는 틀린 것이지요. 하나님은 아무도 심판하시지 않아요. 즉 악이란 님처럼 선과 악을 구분 지으려는 모든 시도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세요. "네가 선한들 악한들 나하고 무슨 상관이냐 너희의 선은 너희에게만 유익할 뿐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이사야서에는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했다" 라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 힘써 여호와를 찾으라

==================================================================================[ Re: 아직 모자라는군요 ! ] 2001,7,3 이근호 모자라니 남느니 하고 남을 공격할 때는 자신의 본체부터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이 예의입니다. 예의에 모자람이 없어야 합니다.
[ Re: Re: 아직 모자라는군요 ! ] 2001,7,3 언뜻
본체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이 말씀을 모르시지는 않겠지요다시 말하면 예의를 모르는 놈이라 하야 대 제사장의 하속이 예수를 치니까예수의 대답이 이러합니다. 말씀인즉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는 겁니다.여기에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말씀일까요 예의일까요천국에는 말씀일까요 예의범절 윤리도덕일까요 하늘은 하늘이고 세상은 세상일뿐이지요.
예수의 본체가 무었일까요. 그 육신일까요 말씀일까요.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물론 말씀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요.그러면 님이나 저는 무엇일까요. 말씀이 아닐까요.그러면 말이 틀렸다면 그것을 증거하면 됐지 예의가 없다고 치면 될까요.그렇다고 제가 님을 공격했다고 생각되어지다니 그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요.말씀은 그냥 살아있는 생명일 뿐인데 무슨 공격과 방어가 거기 있을까요.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생명은 지 나름대로 살아간답니다. 살롬 살롬
==================================================================================[ Re: Re: Re: 아직 모자라는군요 ! ] 2001,7,4 이근호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런 자세라야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겸허하게 지적 받을 자세가 되어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론 나 자신도 은폐되어 있다면 둘 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무책임하게 성질대로 내뱉으면 그만이지만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 된 것이라고 자신 있다면 창녀처럼 가명 쓰지 말고 솔직히 자신을 먼저 공개하는 것이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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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