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 2001,6,10 - 2001,6,19
[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 2001,6,10 - 200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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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
2001,6,10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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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성경에서 부모의 역할은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자식에게 알려주는 것이라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는 부모를 공경하라 라고 말하고 있고,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지 않는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목사님! 좀더 구체적으로 성경말씀을 들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 부모의 역할에 대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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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이스라엘에서는 부모, 특히 아버지가 그 가정의 목회자 역할을 했습니다. 목회자란 하나님의 약속의 대대로 전달하고 소개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계명에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 부모에게는 선대로부터 들어온 하나님의 계시가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23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 왜 이래야 할까요? 하나님의 성전(성막)에는 하나님께 계시를 받은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모든 가정의 남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의 중심은 바로 '어린양의 희생의 뜻과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5-28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따라서 신약 성경 에베소서 6:1의 말씀인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라는 말씀은 부모가 지닌 계시적 위치에 대해 합당한 권위를 드리고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부모가 하나님의 계시를 모르거나 거부한다면 어떻게되는가? 그 때는 복음을 아는 아들이 부모 노릇을 해야 합니다. 복음 전파만이 진정한 효도요 이웃 사랑입니다. 이런 이웃 사랑의 정신이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음의 구절들은 부모와 자식간의 법입니다. 모두 '어린양의 희생에 관한 계시와 복음중심'인 것을 반드시 염두에 두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혈육적 가문과 전통과 위신을 위해 가족들이 희생물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가문이나 가정이 결코 우상화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자식은 부모의 행복이나 영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1)(시127:3)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2)(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3)(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4)(딤전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5)(눅11: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눅11: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눅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6)(딛1: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7)(신4:10) 네가 호렙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섰던 날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백성을 모으라 내가 그들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세상에 사는 날 동안 나 경외함을 배우게 하며 그 자녀에게 가르치게 하려 하노라 하시매
(8)(신32:46)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9)(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10)(시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11)(잠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12)(딤전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 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 발코니에 앉은 사람들 ]
2001,6,6 통치
교회가 복음의 실재를 고수하도록 하는 신학의 기본 임무라는 면에서는 신학은 오래 전부터 아주 약하고 서툴게 되어 버렸다. 진정한 영적 삶이 성경적인 가르침과 상반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행위와 삶에 대하여 논하는 것을 알미니안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마치 고등학교학생이 참고서 뒤에 있는 핵심요약을 갖고 전체를 평가하려는 모습과 동일하다.
조직신학은 신학의 핵심이기에 매우 중요하고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신학의 다양성과 적용으로 들어갈 때의 신학 방법의 차이를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면"행위를 이야기하면 이단이다"라는 무식을 탄로 낼 수밖에 없고, "당신 이렇게 주장하면 이단이야"라고 말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토론을 막아버리게 되고 다양한 칼빈주의 안의 여러 목소리들을 숨어버리게 만들어 신학의 발전을 저해하게 된다.
현대 성경 신학은 칼빈주의 안에서 믿음과 행위와의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조명하고 있다. 또한 더 나아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간의 대화마저를 가능하게 하여 기독교 고질의 문제인 교파간의 반목을 긍정적인 면에서 좁힐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부분은 반대할 수도 있지만)
청교도 신학과 하나님 나라의 현재를 이해해야 한다. 글쓴이가 통치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내가 395번의 사영리 수준의 구원관을 쓴 후 누군가가 통치라는 이름을 그 뒤로 쭉 쓰고 있지만....) 조나단 에드워드, 로이드 존스와 제임스 패커, 데이빗 왓슨, 때로는 존 맥케이까지 칼빈주의 목사들의 "청교도사상"과 "제자도"에 관한 가르침에 한국교회는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행함을 마구 비난하고 행함에 모순되는 신앙은 극구 칭찬하고 율법적인 사람들과는 반대되는 복음적인 사람들로 자기 자신을 치켜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과 거저 주시는 은혜의 방편을 전파하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거저 주시는 은혜의 복음적 방편에 대한 가장 큰 적들 중의 일부이며 순수하고 겸허한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위험스러운 반대자인 사람들이다" -죠나단 에드워즈-
김세윤 교수의 짧은 책인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도,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 얻음을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해 나간다. 그러나 기독교의 미신화를 걱정하는 부분도 놓치지 말고 함께 읽어야 할 부분이다. 나는 신학교에 다닐 때 김지찬 교수가 "내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말하면 알미니안이라고 주장하는 부분을 들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행위를 주장한다. 그러나 녹취록에서 보듯이 신학생과의 논쟁 속에서 치우친 모습과 극단적인 표현 속에 나타나는 드러난 부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숨겨져 있는 부분 그가 그렇게 말하여만 되는 상항 또 그의 신학 전반에서 그가 왜 행위를 말하는가? 라는 것을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그의 하나님 나라의 신학과 구원의 현재에 대한 이해를 바로 보지 않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와 구원만을 바라본다면 그를 곡해할 수밖에 없다. 마치 루터가 야고보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지푸라기 복음"이라 한 것과 같은 무식이다. 그의 구속사설교 비판도 "너무 빠르게 들어가는" 것 때문에 놓치는 "당시의 의미"를 걱정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논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이근호, 박길현 목사를 좋아하고 그 책들은 내 책꼬지이 앞에 꽂혀 있다. 그러나 너무 과격하게 주장을 한다. 아집과 독선이 강하다. 마치 김지찬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과격하게 하여 오해를 받듯이... 양측 모두가 한국교회의 기형적인 성장과 바로 세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는 분들이다. 이 두 부류가 서로의 신학적인 방법론의 차이를 극복하고 아집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함께 한국교회의 바로 세우기에 들어간다는 것은 꿈에서나 가능할 것인가?
[ RE : 발코니에 앉은 사람들 ]
2001,6,9 이근호
누가복음 17:9-10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과연 신자라고 하면서도 이런 태도가 보이는 발언을 하고 있는지 곰곰이 자신을 따져 봐야 합니다. 이런 '무익한 종'의 태도가 완전히 차이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례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 첫 번 사례 - 어떤 요리사가 해물을 넣은 맛있는 라면을 개발하여 손님들에게 끓어내어 주니까, 그것을 보고 있던 어떤 목사가 대노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지 새우 하나, 조개 하나를 예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의 기분이나 좋게 하는 맛있는 라면만 생각하면서 살았으니 당신이야말로 당신의 행함에 의지하여 사는 이단이야!" 라고 말하는 경우
2. 두 번째 사례 - 어떤 요리사가 해물을 넣은 맛있는 라면을 개발하여 손님들에게 끓어내어 주니 그것을 보고 있던 어떤 목사나 감격해서 하는 말이 "당신에게 이런 지혜와 손 솜씨를 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사용되고 있는 종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대단한 라면이 창조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은 앞으로 이 요리를 통해서 더욱 더 하나님께 영동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이런 식으로 이끌도록 성령의 은사를 내려 주시고 계십니다. 당신은 구원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경우 (이 두 사례에서 '라면 개발'에다가 설교나 전도 기술, 기도, 금식, 예배 참석하기, 착한 일하기, 신학 연구하기, 말씀 묵상하기. 사회 봉사 같은 것들을 대입해 보세요.)
위의 두 가지 사례 대해서 요리사가 참된 성도라면 위의 두 목사에게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나는 그저 무익한 종일 뿐입니다. 해물 라면 개발이 결코 의가 아닙니다. 의는 따로 주어질 뿐입니다."
해물 라면을 개발했기 때문에 죄가 아니요 해물 라면을 개발했다고 해서 의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개발하든 아니하든 관계없이 위의 두 가지 사례 밖에 달리 생각 못하고 있는 그 사고방식이 곧 죄입니다. 성도의 진정한 고백은 그저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뿐입니다. 앞으로 어떤 글을 쓰시더라도 이런 정신이 배어 나와야 합니다. 계속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는 자는 이래도 신자 아니요 저래도 신자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무익한 종일 뿐이고 모든 일은 주님이 다 하셨습니다. 이것만이 증거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시편 145편 6-7절 "사람들은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을 말할 것이요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 저희가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주의 의를 노래하리이다"
[ 주장하기 위한 삶이 아닌 믿음의 내용으로서의 삶 ]
2001,6,9 통치
이같이 행한 후에 이르기를..... (눅17장5-10) 마침 이번주 설교의 내용이군요. 성도라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를 주장하며 그것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죠.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하거나 또한 누군가의 말을 그렇게 듣는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해(의도적으로 왜곡하는...)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믿음의 내용에는 행위가 포함됩니다.
(눅3장7-14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세례요한은 그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으려 나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치죠. 오늘날 한국교회의 누가 자기교인들의 죄를 지적합니까? 누가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라고 말하면서 삶 곧 행위를 고쳐주려고 합니까?
그런데 오늘 많은 큰 교회의 목사들과 부흥강사들은 이따위 말을 아주 잘하죠."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얻어 단지 우리가 아무리 죄를 저질러도 면류관에서 보석이 하나 줄어드는 것뿐이고, 개털모자 쓸 뿐이지 구원은 변하지 않아."
소위 위로설교죠. 잘못된 구원의 확신을 주는 설교죠. 구원의 확신은 필요하지만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다 구원을 받지는 않죠. 선지서를 읽어보시길... 이것은 다 미친소리입니다.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이유가 있죠. 그래야지 교회 잘나오고 죄를 지적하면 교회 옮기니까요.
목사님에게 충고를 하나드립니다. 제가 쓴 글에 대답을 하시려면 정확한 파악을 하고 하시죠. 독선이 강하면 남의 주장은 귀에 들어오지 않죠. 목사님 로이드존스를 다시 읽으시죠. 요나단 에드워즈도요. 그들의 청교도 사상이 무엇인가 보시고 또 제임스 패커가 지적하듯이 발코니에 앉은 사람이 되지 않으시길...
[ RE : 주장하기 위한 삶이 아닌 믿음의 내용으로서의 삶 ]
2001,6,9 이근호
'믿음의 내용에 행위가 포함됩니다'라는 것을 증거함으로서 이 말을 듣고 있던 가짜 믿는 자가 행위를 포함시켜서 참 믿음으로 전의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1. 만약 전이가 가능하다면 믿음+행위로 구원받는 셈이 되고(왜냐하면 믿음 그 자체로 부족한 것임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 되기 때문)
2. 만약 전이가 불가능하다면 귀하는 쓸데없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증거한 것이 사도나 선지자들의 임무였는데 귀하는 사도나 선지자들의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았는가를 귀하의 현실에 속에서 재구상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제임스 패커나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들은 그들의 역사가 따로 있었습니다. 지금의 하나님이 허락한 지금의 역사가 따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느 시대라도 성도를 목사 책임 하에 하나님이 맡긴 일이 없고 오히려 목사 자체가 과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목회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자꾸만 '행함'을 믿음과 따로 분리해서 고집하려는 것은(따로 분리가 안 된다면 믿음이란 개념 안에서 삐져 나올 수 없음) 주장하려는 것은 귀하의 마음 속에 수상한 의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예를 들면, '이상적인 교회상'이라든지 '이상적인 목회'나 '이상적인 목사로서의 삶'같은 것들이지요. 그런 것은 대외적인 과시용 및 자기 존재 증명 혹은 자기 자신의 탐욕의 일종일 뿐입니다. 복음만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복음은 오직 '예수님의 하신 일'만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로이드 존스나 청교도나 제임스 패커나 김세윤을 거론하시려거든 그들의 생각과 저의 생각이 어떤 점이 다른가부터 대비시켜서 이 둘 중에 어느 것이 성경에 합당한 가를 논리적으로 제시되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독선 운운'은 편협한 선입견에 불과합니다. 저는 단지 제가 독선이 될까봐 귀하가 우려해서 걱정에서 하는 말씀이라고 좋게 받고 싶습니다마는.
[ 바울 공동체와 요한 공동체의 차이점 ]
2001,6,11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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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안녕하십니까? 주안에서 문안드립니다. 공부를 하다가 바울공동체와 요한공동체에 대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이렇게 여쭈어봅니다. 성경에서의 바울 공동체와 요한공동체의 차이점이 무엇이며, 이를 적용한 현대 바울공동체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또 요한공동체가 문제점이 무엇인지, 또 현대시점에서 무너지는 공동체 속에 그 대안점이 무엇인지 의견을 듣고싶습니다. (정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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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직을 제외하면 예수님에 의해서 교회에 부여한 직제란 없었다. 따라서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직제를 장만하기 위해 하나님의 특별지시를 찾으면 안 된다. 따라서 사도가 사라진 공동체는 우선적으로 사도들이 전해준 그 사도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가에 신경을 써야 했다. 사도성이 빠진 공동체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들과 가까운 시대에 있었던 신앙 공동체라고 해서 더 사도성 갖추기에 유리하지는 않다.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것은 시대적인 근접이 아니라 '예수 추종'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 충실한 교회란 곧 '예수 추종'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는 이 조건에만 국한 될 뿐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채 아무리 교회 역사와 전통을 2000년 동안 고스란히 유지해 왔다고 해도 그 직제는 공동체와 상관없다. 공동체들이 여기 저기 생겨나면서 사도성을 유지와 그 정신을 천명하는데 앞장 선 사람들은 '예수의 복음전도자들'이었다.
지역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사도 바울을 가리켜 '동료' 혹은 '주님의 일꾼'으로 불렀고 사도 바울 또한 그 당시의 12사도와 여타의 예언자들에 의해 창설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에 순종하라고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훈계자' 혹은 '일꾼'이라고 표현된다고 해서 교회 내에 어떤 직책으로 고정된 것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아직까지 가르치는 은사는 사도의 사도성 위에 그 기초가 있었기에 사도에 의한 최고감독권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사도 직책의 연속성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내용이 중요했다. 그러나 사도들도 일생을 마칠 때가 왔다. 사후대비책으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자기 계승자로서 빌립보 교회를 돌보도록 당부한다. 디모데가 받은 사명과 권위는 현지 지도자들의 권위보다 우월하다. 물론 장로라는 이름의 지도자들이 있지만 그들에게 사도 후의 교회 공동체를 정식으로 맡는 책임자로서 간주하지는 않았다.
아직 복음전도자들과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각 지역 공동체에 전달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고 소위 장로나 감독들은 이 전달된 복음을 공동체 안에서 잘 보전되도록 봉사하는데 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봉사적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사도 바울계에 속하는 교회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직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교인이 기존 장로들(지역지도자들)에 의해서 임직되며 장로단의 안수와 예언자의 말씀을 통해서 사도 직무의 잇기 위한 은사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래서 공동체에 있어 직제란 그 자체가 필히 있어야만 교회가 된다는 정해놓은 규범이 아니라 사도에게만 맡겨진 그 유산을 공동체가 대물림한다는 취지에서 생겨난 직제이다. 따라서 직제 그 자체가 유산의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사도들이 해석한 복음을 두고 말한다.
이 해석된 복음을 목회 서신에서는 '가르침'이라고 부른다. 이런 취지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교사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들어 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믿겠습니까?(롬 10:14). 즉 감독이나 장로가 없이 무슨 교회가 되겠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봉사자에게 안수하는 것은 직권을 전수하기 위한 원리가 아니라 사도적 복음을 생생하게 선포하기에 합당한 능력을 얻도록 성령의 은사를 전해준다는데 있다. 이 직능에는 보수를 받는 권리로 따랐는데 이것은 물론 신약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기본 원칙이다.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 보면, 교회가 심한 박해를 받을 것을 예상하여 엄격한 장로직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제 사도후의 교회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와 직제를 고수하는 자 사이에서 갈등의 소지가 일어나게 된다.
사도 바울계의 교회와는 달리 마태계의 교회에서는 공동체 안에서는 그 누구도 지도자나 아비로 자처해서는 안 된다. 비록 교역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 직제가 세속의 모델에 따라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의미에서 '영도자' 구조로 파악될 수 없다. 거짓 예언자와 거짓 스승들의 속성을 잘 드러내서 준엄하게 그들을 경고하고 반박하는 '작은 이들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는 늘 완전하거나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최후 심판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가라지는 있게 마련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들'이 병존하고 있는 교회상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공동체 내에서 유일한 스승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누가 그 예수님처럼 십자가 지고 가느냐가 관권일 뿐이다.
사도 요한계의 편지를 보면 이미 장로제가 확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권위의 주장도 없는 그런 직무이다. 다른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처음부터 요한계 사상은 목회자의 본격적인 직권인 교도권과 징계권까지도 부인한다. 각자가 직접 예수와 맺는 관계야말로 교회에 관한 가르침의 결정적 요소로 본다. 보혜사만이 유일한 스승으로 통한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오로지 이 보혜사에 의해 해석되는 전통의 증인일 따름이다. 각자의 마음속에 계시는 보혜사만이 친히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혜사 원리에서 이탈하여 신자 위에 군림하려는 자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적그리스도들이다. 자신의 해석을 최고권위로 삼아 '우두머리'를 자처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을 견지한다는 의미에서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목회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단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사랑의 유대를 기초하고 있다는 조건 아래서만 그러하다.
요한계시록 사상은 모든 지나친 법제화된 에대한 성서적 경고를 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한계 공동체들은 2세기 이후 자취를 감추었는데 사도적인 대(大)교회로 올라섰거나 아니면 영지주의 교파들로 내려가 버렸다. 이 '大교회'에서는 인간들의 교회직제 권위가 하나님 권위의 표식으로 변했다.
[ 성경적인 평가 ]
사람들이 교회를 필요로 해서 - 달리 말해, 구원을 위한 전문 기관 설립을 원해서 - 성경에 나오는 조직체의 형식을 따오는 것은 그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생각하신 교회란 사람들의 구원욕구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심판하기 위한 언약의 토대로서 말세에 등장된 것이다. 따라서 저자처럼 단순하게 '예수 추종'이라는 종교적 품성만을 공동체의 본질로 내세울 것이 아니다. '예수 추종'를 근거로 삼아 '자기 교회 추종'를 외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로든 자기 구원시켜 주는 기관을 필연적 요청하게끔 되어 있는 인간들의 보편적 죄악성을 고발하는 센타 구실로서의 교회의 속성을 거론해야만 옳다.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숫자적으로 여러 교회를 동시에 인정해주는 '교회들'이라는 개념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은 오직 십자가 사건이라는 단일 사건에 있을 따름이지 결코 교회 모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 성장이니 교회 부흥이라는 의식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
이상의 글은 '철학과 신학의 허상'이라는 글 속에 들어 있는 [교회직무론](분도출판사)에 대해 서평한 대목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메시야 왕국](한국신학연구소)을 서평한 글의 일부입니다.
《 기독교를 축으로 해서 영향을 주고받고 이어져 온 게 서구 역사이다. 이 서구 역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사는 인간들의 반항과 요구 사항과 굴복 같은 것들이 결집되어 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인간 자신들의 고통을 직접 연관시킬 때 신은 어떤 식으로 응답을 하는지 인간들은 늘 궁금해했다. 인간들은 현실의 불충분함을 메시야니즘 속으로 승화하려는 본능이 있다. 하나님 또한 메시야의 나라를 약속했었다. 이상세계를 향한 인간의 욕구와 하나님의 약속이 같은 맥락에서 서로 연결되리라 인간들은 기대했다. 그 기대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친 자칭 지도자들이 빈번하게 등장된다. 그들의 몸부림을 저자는 투명하게 나열한다. 모든 기독교 색채의 공동체 운동들, 그 공동체 운동의 생성과 소멸을 탐색하면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염원은 필히 사회 변화의 형태 속에서 포착됨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운동은 어떤 식으로도 비사회적이지 않다. 현실 도피적인 교리를 지닌 단체라 할지라도 그 과정은 엄연히 사회 운동적이다. 종교개혁 시기부터 본격화된 급진적 종교운동은, 기존의 시민 사회와 교회를 동일시하는 것을 거부했다.
교회란, 대립의 모습으로 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기존 교회는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변혁의 대상이다. 참된 교회는 늘 전투하는 혁명의 투사로서 사회에게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최후의 그리스도에 의한 변혁을 두고 자신들이 현재 벌리고 있는 혁명적 활동의 연장으로 해석한다. 종교개혁의 들뜬 분위기를 타고 급진적 선동가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빨리 불태우고 말았다. 계몽 사상으로 인해 모든 게 해체되던 시기에, 지성인들은 아예 종교 규범을 버렸다. 그 대신 과학과 경험을 신의 계시로 삼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마음속에 있는 메시야니즘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인류 진보론으로 이성적인 국가와 사회를 건설하려 했다. 성경이란, 무식한 인간들의 방탕에 위협 주기 위한 책일 따름이지 유식한 자기네들에게 해당되지 않는 내용이라고 여겼다. 구원이란, 역사로부터 이탈되는 게 아니라 인류 역사 자체를 멋지고 성스러운 환경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모두 대등한 권리와 자유를 확보할 수 있는 세상, 그 영광의 세상은 인간의 성실과 지혜에 달렸다고 보았다. 보다 완전한 이상적 국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반 의지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민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서 민중의 의지를 중요시하기 시작한다. 한 덩어리 된 민중의 의지는 욕심도 한 덩어리이다. 다른 국가와의 병합을 시도한다.
인류의 진보는 곧 하나님 의지의 실현으로 보았다. 이 무궁한 진보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는 내부의 모순점은 해소되어야만 했다. 국가 내부의 갈등을 원활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정밀한 사회 시스템이 요구된다. 이상적 모델들이 여기 저기서 실험적으로 선보인다. 어떤 이들은 농촌에다 목가적 공동체를 운영해 본다. 그러나 기술 산업화 시대에 들어선 입장에서 봐서는 시대 착오적이다. 보다 큰 문제 거리는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서 발생된다. 두 계층 사이의 대립을 어떻게 하면 원만하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이다. 고전적 신앙심은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보았다. 사회 구원은 인간이 기선을 잡는데서 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단정했다. 공산주의를 건설하면 어떠냐는 의견이 등장한다. 노동에 직접 참여 하는 자를 주체로 하여 서로의 노동을 가치 있게 인정해주는 공동체로 나아가자는 주장이다. 인간은 노동에서 보람과 영광을 획득하고자 한다. 따라서 자기가 한 노동에 대해 최대한도로 만족감을 얻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구성원간의 욕망의 충돌을 막을 대책은 서지 않았다. 서구 산업화는 그 자체가 국가간의 욕망이 폭발하여 그 팽창력에 의존해서 얻어진 결과이다 .이제 와서 거꾸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욕망의 경쟁을 저지할 수 있는 세력은 그 또한 황제가 되어 비평등사회가 된다. 이기적인 개인 경쟁이 인간을 지치게 한다. 그래서 후기산업사회에서의 구원의 의미는 형제애를 회복하는 일이다.
여기에 성령의 신학이 도입된다. 기존의 제도 교회가 독점해 온 은총을 교회 밖으로 확산시키는 것이 시급하다. 성과 속 사이에 칸막이를 차지 않는 일이다. 선교의 의미가 새롭게 추가된다. 신의 존재가 지정된 곳에 특수하게 있음으로 해서 사회는 늘 두 패로 나뉠 가능성이 있었다. 서로들 자기네 쪽이 성스럽다는 것이다. 이래서는 공동의 형제애가 구현되지 않는다. 초월적 신보다 이 인간 사회에 내재하는 신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신은 어두운 곳에 더욱 더 관심이 계시다. 억압을 당해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에 귀를 가져가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자기가 계시하는 장소에서만 존재한다. 인간의 겉치레 종교성은, 이런 하나님의 현존을 추방하기 십상이다. 인간화된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같이 전보다 더욱 더 인간다움에 집착해야 한다.하지만 현실에 대해 고민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소망을 또한 성취해 나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저자는, 인류가 역사 속에서 현재와 미래, 이 둘 중에 어느 한쪽에 극단으로 치우치는 것을 안타까와한다. 참된 투쟁은 바로 이런 극단을 역사에서 추방하는 시도이다. 이것만이 참된 변혁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 성경적인 평가 ]
그러나 저자는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 성경에서 확인해 보았어야 했다. 성경은 성령께서 저자가 된다. 그래서 성령이 역사에 대해서 고발하듯이 성경도 그 고발감을 가지고 인간에게 다가온다. 교회나 복음 운동을 역사라는 바구니 안에 담아 놓고 보면 현재, 미래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항상 미완성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그렇지 않다. 교회는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항상 완벽하다. 그 이유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늘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교회의 임무는 교회 자체의 무결점을 증언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전파하는데 있다. 교회 자체되는 인간들의 유동성을 근거로 해서 교회의 불 충분성을 들고 나와서는 안 된다. 교회 요건의 불충분성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함에 불신을 갖는 경우뿐이다. 바로 죄악된 인간 성품이 인간들로 하여금 항상 눈에 보이는 교회로 만족하고 싶어하는 성향을 심었다. 이런 비 복음적인 발상이 성경의 고발감이다. 교회를 인간적인 차원에서 사회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그 안목이 성령의 뜻에 부합되지 않는다. 교회 등록된 자들이 모두 다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다 구원받는 경우에만 완전이 아니다. 교회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늘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유동성이 있다고 해서 미완성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비 성경적이다. 무너질 교회는 무너지고 없어질 교회는 없애 버리는 그 예수님의 사역이 완전하기 때문에 교회는 항상 빈틈없이 완벽하다. 그리스도만 여전히 살아있다면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상관없이 교회는 늘 완성하다. 》
이제 공동체 운동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문제는 돈입니다. 돈을 선뜩 갹출할 수 있어야 공동체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가능합니다. 그러면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돈은 즐거움의 대가로 들어오게 되어있습니다. 공동체의 생활이 회원들이 기대치를 충족하는 조건 하에서 기부금과 유지비는 쏟아져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회원들이 다른 더 큰 즐거움을 발견하는 날에는 지금까지 끌고 왔던 공동체가 하루만에 와르르 무너집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대전제는, 이 공동체 자체의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음을 철저하게 차단하도록 반복적으로 교육해서 세뇌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공동체가 바로 북한 인민 공화국입니다. 이 폐쇄 집단의 이것입니다. "이 이상 부러울 것이 없어라!"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공동체 생리가 바로 공동체를 우상 노름으로 전락하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교회는 다음과 같은 절대적 공동체가 됩니다. "예수님만 있으면 더 이상 부러울 게 없어라!" 여기에 비해 가짜 교회, 이단적인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는 곳입니다. "이 교회(공동체)가 존재하고 성장, 부흥하는 한 부러울 게 없어라!" 예수님 의지하며 살 생각해야지 공동체 운동을 할 생각은 아예 먹지 않는 것이 주님 심판 날 신상에 좋을 겁니다.
[ 사명과 비젼... 이런 것들에 관하여 ]
2001,6,14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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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서울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는 자매입니다. 요즘 들어 저희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제 마음속에 너무 많은 혼란과 회의가 들어 이렇게 질문을 드립니다. 제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복음과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 이해하시는 복음의 내용은 같다고 생각되는데 그 행함을 보면 솔직히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목사님 너무나 기초적인 질문입니다만, 저는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이해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도대체 비젼이니 사명이니 하는 것은 무엇이고, 특별 새벽기도에 꼭 1000명 이상 나와야 하는 것은 무엇이며, 토요일마다 대학 캠퍼스에 나가서 전도지를 돌리며 영혼 구원에 앞장서야 하는 이런 것들은 다 무엇입니까? 만약, 목사님께서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쓸데없는 짓들이라고 말씀하신다면, 도대체 제가 어떻게 살아야 성도의 삶을 다하면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무명)
* p.s - 제가 너무 고민스러워서 아는 전도사님께 제 고민을 여쭈워 보았더니 목사님 이야기를 하시면서 저에게 많은 부분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더군요. 그렇지만 여전히 저는 혼란스러워 이렇게 염치 불구하고 질문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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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님의 대범한 질문에 우선 경의를 표합니다. 자매님은 타인을 통해 자신의 탐욕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본인의 신앙으로 본인 구원받습니다. 남이 대신 자매님의 신앙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매님의 신앙심을 위하여 주변에 비신앙적인 행태와 모습들을 쭉 깔아놓습니다. 그러한 환경에서 속에서 주변에 있는 비신앙적이고 불신앙적이 사람의 심정과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할까요?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직접 믿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진리로 받지를 못하고 인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기적을 새삼스럽게 확인(이점이 중요함!)해서 그러한 현상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겠다고 마음먹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신앙적인 태도에 불신앙적인 태도인데 이런 태도가 저와 자매님 마음 속에도 여전히 있다고 생각해 보시요. 바로 하나님께서 타인을 통해 우리 자신들의 신앙 흔들림의 원인을 알려 줍니다.
예를 들면, 성경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되어 있는데(마 18:19) 불신자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하고 수 천명씩 자기 교회에 몰려 와서 마치 하나님이 주님이 자기 교회에 함께 있는 줄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눈에 띄는 현상으로 성경 말씀을 확인하려는 불신앙의 표본입니다.
교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이런 현상이 있습니다. 올 해 안에 결혼하게 되면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가 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날 벌주고 미워한다는 증거로 삼겠다는 그런 의식이 바로 불신앙적입니다. 그러니 남 욕할 것 없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요한복음 3:16에 , 독생자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을 못 믿고 자신이 나쁜 짓을 했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벌받고 지옥 갈 거라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리는 것, 이런 것도 바로 불신앙입니다. 이런 불신앙이 있으니 이단들이 교인들의 양심의 노력에 호소해서 열심을 내게 하려고 그 영혼을 사기술로 유린하고 있고 교인들은 영생 얻는 것을 귀한 줄로 모르고 사기꾼 목사 말대로 자기 재산이 날아가는 것이 겁나서 그들의 말에 순복하게 됩니다. 이런 눈에 띄는 현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려는 것은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렇게 보니 지금 이 순간 너 나 할 것이 없이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와 적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욕심입니다. 이 욕심과 탐욕 때문에 인간의 욕심을 마치 하나님의 일인양 승화시키고 교회 사업하려고 이단들을 추종하기도 하고 혹은 그들의 성공이 부러워서 불같은 질투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매님, 순교자 스데반 집사님이 과연 부럽습니까? 그리고 사도바울이 과연 부러워집니까? 그렇다면 참 신앙인입니다.
[ 통일교 신학과 '행함 신학'의 공통점은? ]
2001,6,15 이근호
통일교 신학과 행함 신학의 공통점은 아무리 성경 귀절로 반증을 해도 예수님의 행하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반증하는데 전력을 다 기울이고 잇다는 점이다. "나 구원받았으니 주의 종으로 인정해 줘"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통일교 신학이 하루아침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외우고 또 외우고, 이리 끼워 맞추고 저리 끼워 맞추어도, 아무리 신비로운 철학을 깨내어 연결시켜도 계속해서 자기 위대성과 대단함을 확인하는 반복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행함 신학'의 종착점은 통일교와 유대교 신비주의에 도달한다. 통일교는 성경과 동양 철학과의 결합이라면 유대교 신비주의는 구약과 헬라 철학과의 결합이다. 어쨋던 신을 빙자해서 인간 자아의 최고성 추구만이 그들의 영원한 복음이요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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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치게 위험하고 극단적인 발상 ]
2001,6,17 통치
그리고 거기에다 의도적인 오해.(단순히 오해라고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위해 도매금으로 매도하면 안되죠.
철학자들의 문제점은 자신의 논리를 주장하다보면 필연적으로 가게 되는 길이 정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철학자들의 문제점이죠.(이근호 목사께서 뛰어난 철학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의 논리라는 것은 항상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으며 방향을 항상 수정하려 할때 왜곡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머리라는 것의 한계를 항상 인정하지 않으면 자신의 논리만 발전시키게 되고 결국 자신의 논리 안에 갇히게 되지요.
그것은 오히려 성경을 벗어나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신앙에 행위라는 말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 구조에 모순입니다.
행위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는 지난번에 목사님께서 무익한 종의 비유를 들었듯이 믿음에는 그 무익한 종이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다 행한 후에 그러나 그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왜? 그의 고백처럼 순종하는 행위는 할 일을 하여야 한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말을 묵상해 보십시오.
이 말속에서 목사님의 주장처럼 공로도 배격하는 동시에 또 한가지 다른 느낌을 받을 수는 없습니까?
[ RE: 지나치게 위험하고 극단적인 발상 조회수 ]
2001,6,17 이근호
통치님 다음의 성경 말씀을 한 번 풀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을 아니하실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로마서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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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RE: 지나치게 위험하고 극단적인 발상 조회수 ]
2001,6,17 통치
1. 야고보서 [James] 2장 22절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2. 야고보서 [James] 2장 18절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3. 야고보서 [James] 2장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4. 요한1서 [1 John] 3장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5. 베드로전서 [1 Peter] 3장 17절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6. 야고보서 [James] 2장 26절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7. 야고보서 [James] 2장 20절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8. 야고보서 [James] 2장 24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9. 야고보서 [James] 2장 21절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10. 야고보서 [James] 3장 13절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1. 야고보서 [James] 2장 25절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12. 야고보서 [James] 2장 14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너무 많아서 조금만 올립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써만 구원을 얻습니다.
기독교인이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러나 야곱이 이렇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야곱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이단 삼단입니까?
과연 얼빠진 부흥강사들처럼 믿기만 하면 돼, 간음을 하더라도 도적질을 하더라도 괜찮아, 상급만 달라져 단지 개털 모자일 뿐이야! 이렇게 외치는 것이 정당할까요?
실제로 얼마전의 부흥회에서 저는 들었죠.
또 만일 야고보서의 말씀을 성경으로 여기실찐대 야고보의 말씀은 이런 이런 뜻이야 하고 이해하실 수 있으시다면, 행함을 주장하는 총신의 교수님들과 또 많은 목사님들의 말씀은 왜 이해를 못하시죠? 아니 안 하시는 것이죠? 그들을 이단, 삼단이니 몰아야 또 통일교와 비교를 해야 직성이 풀리십니까?
한마디의 말로 성경의 풍성한 내용을 규정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까?
청교도들 그들의 역사는 우리와 다르다고 했는데 우리의 역사는 어떻다는 말입니까?
이 시대의 많은 목회자와 교인들이 성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사회의 빛이 되지 않고 있는 데 "멋대로 행해라"라고 말해야 합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곡해하지 마라고 하시겠죠?
마찬가지입니다.
또 니골라당이 무엇입니까? 율법 폐기론자가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이근호 목사님의 의도도(물론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겠지만)이해가 갑니다. 한국교회가 율법화되어지고 제도화되어지고 십자가를 잃어버리는 가운데 목사님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야고보 베드로 요한의 말씀도 필요하죠.
더 이상의 논쟁이 과연 유익할까 의문이 드는군요.
이단 삼단 겁주지 마시고 칼빈주의 안에서 올바른 논의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말입니다.
가끔 들어와 보겠지만, 슬픔을 안고 이제 이곳에서 글은 올리지 않습니다. 나가겠습니다.
이근호 목사님 당신이 승리하셨습니다.
[ 성경이 성가대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
2001,6,13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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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교회(예배당)에서 성가대가 존재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고 하는데... 학생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요즘 들어서 줄어든다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신학적으로 답하라고 하는데, 성경에서는 성가대와 찬양(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며 불려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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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가대하고 성경이나 신학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마치 교회 내의 아줌마들의 계모임과 성경과 무슨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노래에 취미 있는 자들이 예배 시간에 성가곡 발표회 순서를 하나 갖는 것에 불과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는 레위지파라는 특별한 지파가 있는데 이들은 땅을 가지지 못하고 그 대신 제사하는 제사장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 왕 체제로 들어서면서 이들의 역할도 성전을 지키다든지 아니면 성가대를 조직해서 예배에 참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성가대의 존재는 하늘의 천사들의 찬양을 지상에서 비쳐주는 모형과 그림자 역할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새언약(신약) 시대에 돌입하면서 옛언약은 사라져야만 합니다. 그런 것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즉 성가대를 조직함으로서 예배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성도는 늘 예배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제사장은 누구냐? 바로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입니다. 그러면 대제사장은 누구신가? 예수님만이 대제사장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성가대를 조직하고 예배의 주요한 요소처럼 여기는 것은 도리어 참된 예배를 혼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복음만 제대로 알고 정신차리면 이런 혼동이 아마 없을 것입니다만) 즉 모든 성도가 다 찬양을 해야할 것을 마치 어떤 구성된 집단만이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처럼 비치고 더 나아가서 그 역할이 마치 하나님이 특별한 은사나 사명처럼 간주되는 것은 명백하게 비성경적입니다.
다시금 이야기합니다마는 노래하는 것이 취미가 있어 예배시간에 발표하겠다는 것은 그 교인들의 자유입니다만, 거기에다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 좀 더 생각하자 ]
2001,6,13 나그네
이근호 목사께서는 "노래하는 것이 취미가 있어 예배시간에 발표하겠다는 것은 그 교인들의 자유입니다만 거기에다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고 했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노래 좋아하는 교인들이 자유로 취미처럼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면 뭘 모르는 교인들에게 자유를 주어 올바른 예배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방치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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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 좀 더 생각하자 ]
2001,6,14 이근호
누가 감히 성도의 자유로운 신앙 고백에 대해서 '방치해서는 아니된다'는 정치적 이유, 질서적 이류로서 초법권 특권을 가지고 타인을 함부로 지배할 수 있는 자격자가 있단 말입니까? 그런 적격자가 있다면 한 번 거론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누가 주관합니까? 목사가 주최합니까? 당회가 이벤트 주관자들입니까? 예배란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주관할 뿐입니다. 이런 원리 이외의 예배는 사이비한 집단의 일회성 축제에 불과합니다. 모두가 동등한 자격자로 예배에 임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밤무대 연예쇼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냥 구경 삼아 예배 참석하던 아니하던 그것은 각자의 자유재량에 맡겨야 합니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다른 인간의 정신을 강제로 막겠다고 나설 수 있습니까? 찬양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 봐서 할 수는 있는 문제이고 성가대가 본인들이 노래하기 싫다고 한다면 예배 시간에 그 순서는 그냥 누락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시시비비를 걸까요?
괜히 인간들의 눈 요기감, 귀 요기감밖에 안 되는 찬양대의 존재에 그 어떤 조그마한 가치조차 부여해서는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와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예배마저 인간들이 소유하고 장악하겠다는 음모밖에 안됩니다.
[ 찬양 선교단에 대하여 ]
2001,6,13 이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