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13:47-48의 비유본문에 대해서 2001.05.03 - 2001.06.09
[ 마태복음 13:47-48의 비유본문에 대해서 2001.05.03 - 2001.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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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13:47-48의 비유본문에 대해서 ]
2001,5,3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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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마태복음 13:47-48 비유를 풀이 좀 해주세요.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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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마 13:47-48)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천국은 그 당시 유대교에서 생각하는 천국과 달리 소위 선택되었다고 자부하는 유다나라에 대한 심판의 모습으로 이루어집니다. 유대교의 천국관은 인간이 율법을 따라 수행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됩니다마는 예수님이 소개하는 천국은 예수님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달리 말씀 드리자면, 유대인들의 천국관은, 인간이 능히 들어갈 만한 천국은 늘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들어가고 그렇지 않는 자는 못 들어간다는 천국관이고, 예수님의 천국관은, 예수님에 의해서 주도되는 선택 행위에 따라 천국이 새삼스럽게 만들어지는 천국입니다. 즉 모든 인간은 아예 천국에 해당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말씀 성취 (예를 들면, 이사야 6:9 같은 말씀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참조: 마태복음 13:14-16 )에 준해서 예수님이 자의로 (요 5:21) 선택해 주는 천국 백성이 생겨납니다.(마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의 주제)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서 이루어놓으신 자신의 의를 근거로 하시는 거지요.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마태복음 13: 47-48을 보면 쉽게 이해되실 것입니다. 즉 천국은,
① 예수님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지상의 인간들의 말씀 순종에 의해서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
② 따라서 천국은 심판 과정이 필수적으로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칭 천국 사람이라는 자들이 한 두 명이 아니니까
③ 심판의 목적은 '허락된 자'와 그렇지 않고 도리어 예수님에 의해서 빼앗긴 자를 구분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13장 11절-12절)
④ 심판의 기준은 앞으로 진행될 예수님 자신의 공생애와 관련 있다는 것입니다. (보다 점차 이 기준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어부는 일단 고기를 잡아놓고 해변가에서 새삼스럽게 심판 행위 감행하는데 여기에 동원되는 기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최종 형태에서 마감됩니다. 그것은 '십자가 시건'입니다.
* 결론 : 천국은 오직 예수님 자신의 말씀 성취에 준한 그 공로성에 은혜로 참여된 자에게만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 참고로, 대표적인 잘못된 해석 - 교회는 일단 누구든지 전도하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최종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에 우리들의 할 일은 무조건 사람들을 교회 등록 시켜놓고 볼 것이다. - 이 해석이 잘못된 이유는, 전도란 '도'를 전하는 것이지 교회를 전하는 것이 아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도' 속에는 교회가 결코 전도의 주체가 아니라 예수님이 전도의 주체자라는 사실도 내용으로 필히 포함되어 있어야 마땅합니다. (마 13장의 씨뿌리는 비유에 의해서)
[ 김주영님에게 - 정신없는 소리를 하지 마십시오 ! ]
2001,5,2 촌장(손무성)
김주영님께서 - "장차 모든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의 기준은 다름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행하였는가, 어떻게 행하였는가, 얼마나 행하였는가가 될 것이다" 라고 했는데, 제정신으로 한 말입니까? 이게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이단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10장25절부터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이렇게 질문을 한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 이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하고 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했다. 이때 예수님은 율법사의 대답을 옳다고 했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유대인이) 내려가다 강도를 만났다. 얼반 죽게되어 누워있는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보고 피하여 갔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이 여행하다 보고 불쌍히 여겨 그를 도왔다. 이 예를 드시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물었다. "네 의견에는 이 세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하자 율법사는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는 말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했다.
이 말씀의 분위기를 모르면 예수님께서 율법을 잘 행할 수 있으면(순종 잘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기 십상이다.(너희 이렇게 네 이웃을 사랑해라. 그러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식으로)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눅10:20-21절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율법사와 당시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지도자들)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네가 무엇을 잘 행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이름을 입적시켜 주어서 올라가게 된 것이니(영생의 길이 생겼으니) 이것을 기뻐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당시 지혜롭고 슬기 있다는 자들(율법사들 같은 이들-무엇을 행하면 영생이 있다는 이들)에게 숨겨졌다고 하니 분위기가 험악해진 것이다.
그러자 26절에서 어떤 율법사가 (벌떡!!!)일어나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한 내용이 "선생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이다. 율법사는 무엇을 행하는(순종하는 문제)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이 100%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했더냐?"라고 물었고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옳다고 했다.' 이 말은 진정으로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다 순종하면 영생이 주어 질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를 행하라'고 한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인간이 율법을 다 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그래 네가 그렇게 읽었던 율법대로 해봐! 그래 해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봐!' 이런 뜻이다. 율법사는 자신이 정말 율법의 100% 아니 10000% 지켰고 지킬 자신이 있었다. 행해서 천당 갈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는 충격적인 이야기다.' 왜냐하면 율법사가 생각한 이웃은 자신이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만 정한 이웃을 사랑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유대인끼리 사랑했다. 하나님 안다는 이들과 이웃이 되었고 그들을 이웃 삼아 사랑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이 정한 이웃이나, 사회가 정한 이웃개념이나, 정치적으로 정한 이웃을 사랑하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이 이웃을 완벽히 사랑할 수 있는가? 내 옆집에 가난한 사람을 도왔다고 이웃을 다 도왔고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한국에 있는 노숙자에세 걸인에게 밥을 퍼주었다고 이웃을 다 사랑했다고 할 수 있는가? 아프리카 인도...에 있는 걸인과 가난한 사람을 다 못 도와주었다면 그는 이웃을 완벽히 사랑하지 못한 자가된다. 그래놓고도 이웃을 사랑했다고 하면 착각이다. 사람들은 신장 하나 때어 주고 이웃을 사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또 신장병 앓고 있는 이웃이 있다면 그 이웃에게 내 신장 한 쪽을 더 때 내어 주지 못해놓고 어찌 이웃 사랑을 다 했다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이웃은 도와주고 어떤 이웃을 못 도와주게 된다면 진정으로 이웃을 다 사랑했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은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다 행할 수 없다. 영생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다.
지금 율법사는 자기가 정한 이웃을 사랑하고는 이웃을 사랑했다고 떵떵거리고 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본래 사마리아인들은 아브라함 혈통을 가지고 있다가 주변나라의 점령을 당하고 정책적으로 혼혈정책에 의해서 혼혈아들이 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그들을 개로 취급했다)로 취급했다. 그렇다면 이들이 그렇게 더럽게 여기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 율법사에게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을 불쌍히 여겨 사랑을 베푼 것 같이 너도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으로 삼고 사랑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라는 예수님의 의도는 이렇게 사마리아 사람을 사랑하면 전에 좀 미비했던 영생을 이제라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율법사야!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했다' '무엇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라고 묻는데 이놈아 웃기는 소리하지 말라' 이런 말씀이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갈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고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
우리는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이다. 곧 이 말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라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울서신에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에서 마게도냐 교회가 연보한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고 한다. 이것을 칭찬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행한 행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연보한 것을 왜 칭찬하는가 그것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드러내며 그리스도만으로 의롭다 함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9: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마게도냐 교회가 연보한 것은 자기들이 가진 물질이 점점 줄어들게 되고 받는 쪽이 더 부요로워지는 모습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성도를)저쪽을 위해 가난하게 되심으로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부요케 되는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마게도냐 교회가 연보한 행동은 곧 주만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바울은 칭찬하고 있다. 정신없는 소리를 하지 말자 누가 행위로 마지막 때에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인가? 마지막 때의 심판의 기준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가난해진 결과로 내가 부요케(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름이 기록된 것) 되었나를 모르는 자다.
[ 믿음과 행함 ]
2001,5,4 김주영
모든 종교에는 인간이 무엇을 해야 절대자가 역사할 것이라고 믿는 요소가 있습니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고 기독교 안을 보면 인간의 행함은 모두 율법적인 것으로 몰아가는 분위기도 보입니다. 물론 이것은 둘 다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역사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음받은 자로서 아들로서 혹은 종으로서 마땅히 행해야할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 되십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일하셨으며 우리가 죽은 후에도 일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 혹은 함께 일하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하나님의 법을 두셨습니다. 아담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죠. 그것은 법의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복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혹은 복에 이를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두시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복에 이를 수 있는 길입니다. 또 그 법으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운 법만 두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길도 함께 주시는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성경을 좀 안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행할 수 없는 법을 주셔서 올무를 놓으신 분처럼 생각합니다. 또 그 길은 인정하지만 길로 걸을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걷는 것은 없다고 합니다. 또 걸을 수 없다고 합니다. 길 즉 그 은혜에 머물러 버리거나 그것을 자랑하는 것으로 더 이상의 우리의 행할 것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칭찬이나 삯 혹은 상급까지 부정합니다. 또 심판에 대해서도 무시하려 합니다. 하나님을 그러한 분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이 주인을 오해하고 자기의 마땅히 행할 바를 행치 않았다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쳐지는 것과 일반일 것입니다.
죄인이 무엇을 행해야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대신 이루어 놓으셨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의인이 되고 아들이 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행함까지 부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의 준수를 통해 복에 이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새 계명이 있습니다. 또 우리는 복음에 순종해야 하며 바울을 통해 주셨던 새 생활의 교훈들도 따라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를 살리게 하심도 있지만, 우리도 주님을 따라 순종케 하시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그 자취를 본받게 하신다거나 '나를 따라 오려거던 그리고 영광을 얻기 위해 고난도'와 같은 말씀들이 있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나 영생과 영벌에 처할 때 새 계명을 그 판단기준으로 삼으신다는 말씀 등은 바로 이러한 것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능력이신 성령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순종치 않는 자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논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이나 노아와 같은 분들이 은혜를 입어 순종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순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을 통해 영생과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영생에 들어가는 것과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라는 말씀이 있죠. 주님께서도 자신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소개하신 바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복에 이르기 전에 길을 걷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는 것에 대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 믿음과 행함 관계에 관한 간단한 논리 ]
2001,5,5 이근호
인간의 행함을 문장으로 나타내면 반드시 '주어+동사'로만 표현된다. 예외가 없다. 그리고 동사는 필히 주어, 곧 행함의 주체를 놓치지 않고 우리들에게 알려준다. 행함은 그 주체자를 찾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누가 봐도 행함의 주체자로 알고 있는 자가 다음과 같은 낯선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하자. 이점을 먼저 고려해 보자.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누구를 믿고 있습니다"라고 나선다면 그 사람은 자기 행함으로 증거할 것 속에 더 이상 자기 자신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기껏 명령받은 입장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는 자신에게 명령하신 분이 따로 있다는 고백을 늘어놓는 셈이다. 따라서 어떤 행함에 대해서 더 이상 자신을 주체자로 고집하지 못하고 명령자의 명령 능력으로 인한 결과인 것만이 증거하겠끔 된다. 이는 결국 행함의 주체자에서 자신이 빠져 버리는 것이 된다. 이래야 자신이 진정 증거해야 될 자를 증거하고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는 명령받은 것만 행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저를 쳐다보지 마시고 제가 소개하는 그 명령자에 관심 갖기 바랍니다"라는 차원이다. 이점을 달리 말하자면 명령 당한 주체는 스스로 더 이상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면 자신은 증거할 대상에서 빠져 버린다.
그렇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주어+동사'에서 만약 이 행함의 주체자가 따로 믿는 자는 없다고 한다면 필히 그 행함에 대해 전적으로 자신에게만 속한 능력 행사로 유지하려고 한다. 어떤 힘을 빌려 왔든지 어쨋던 최종 행함의 주체자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다들 보세요. 성령으로 제가 이런 일을 해내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대견합니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행동의 주제자는 본인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공개한다. 그것은 본인 이외에 달리 믿고 증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리를 다시 정리하면, 신앙이 없는 자는 필히 자기 행함에다 비중을 두게 되어 있다. 달리 증거하거나 소개할 다른 분이 자기 속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앙이 없는 자는 전혀 자기 행함에다 비중을 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저 자기가 현재 믿고 있는 분을 소개하고 증거하기 위해 자신이 존재할 따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모든 행위보다 앞서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신 분이 따로 존재하는데 그 분이 자신이 증거할 '최종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 결론 ] - 사도 바울이 증거하려는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은 구세주가 아니라 자신의 구세주는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떤 이가 사도 바울에게 시비 걸기를 "그게 당신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의 전부요?"라고 시비 건다면 사도 바울은 "O. K"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 사람이 또 시비 걸기를 "당신은 기도하고 구제도 하고 전도도 하고 사랑도 하고 다른 일도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저에게 명령한 구주 예수님의 능력에 속하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에 내가 행했다고 나 사도 바울을 증거할 수는 없는 겁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왜 매사에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사도 바울은 말한다. "그것은 나는 예수님을 증거하려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존재와 그 행동할 수 있음을 증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당신이 말하는 믿음이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으로서 예수 믿음을 확인하고 그것을 소유하려고 전형적인 불신앙인입니다"라고 답변할 것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마치 들깨 잎사귀에 돼지 불고기를 쌈 싸서 먹듯이 필히 '자기 부인'을 가지고 둘러싼 채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은혜를 담는 마음 상태를 보여준다. 이럴 때만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고 다른 것이 그냥 종교적 심술에 불과하다. 철학적으로 표현하기를 이런 것을 '자기 존재 증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 적절한 표현은 '이것이 이단이다!"라는 표현뿐이다.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3:11-13)
위의 본문에 의하면 베드로와 요한은 신앙인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어떤 행함에 대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자기가 믿는 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 상태 이외의 모든 것은 신앙이 아니다.
[ 목회 상담학에 대해서 ]
2001,5,11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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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회 상담학이 성경적인가요? 왜 교인들은 목회자의 상담에 매달리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알고싶고, 아닌 성경적 근거를 어떻게 찾아야 할지 좀 알려주세요.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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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상담학은 그야말로 상담학입니다. 상담학는 상담자의 지식이나 경험이 계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즉 "나처럼, 혹은 제가 경험한대로 하시면 그것이 진리입니다"라는 것은 은연중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 상담하는 자의 자기 계시를 증거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인간의 체험이 계시역할을 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모든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으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그 한 예로서 사도행전 28:23-27를 들 수 있는데 여기에 보면, 분명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고민거리나 상담거리를 상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거기에 반해 목회 상담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능으로서 교회를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현 교회를 마치 당연히 존재해야만 하는 진리처럼 규정해놓고, 그것을 증거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부인'을 거부한 채 인간들의 고민거리를 위로하는 방향으로 성경 구절들을 거론하니까,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본래의 계시 역할에 도전하는 셈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사도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식으로 권면하니 듣는 많은 사람이 듣기 싫어 흩어져 버립니다. 이것이 성경 증거의 효과입니다. 망하는 자에게 필히 망하도록 하고 지옥으로 갈 자에게는 반드시 지옥으로 가도록,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만을 증거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목회입니다. 따라서 목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만 하면 되지 결코 목회 상담학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왜 유행하는가? 그것은 그 목사가 신자가 아니라 교회를 통해 종교 사업에 목숨을 걸고 살기 때문입니다.
[ 전병욱 목사에 대해서 ]
2001,6,1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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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서울에 오니 전병욱 목사에 청년들이 거의 미쳐서 날 뛰는 듯합니다. 찬반 양론이 있던데 이근호 목사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물론 비판적일 줄 아는데,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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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씨 같은 사람들을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것하고 흔히 이단으로 분류된 박옥수씨나 안식교나 지방교회에 사람들이 추종하는 것하고는 많은 점에 다릅니다. 우선 흔히 이단시되고 또는 이단으로 분류된 사람들에게 목숨걸고 명백하게 주장하는 게 있습니다. 즉 "이것 아니면 지옥 갑니다!"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태도 자체에 대해서 젊은이들이나 지식인들은 매우 역겨워하면서 거부반응을 일으킵니다.
거기에 비해 전병욱씨나 소위 인기 있는 기성 목사들에게 이런 과격함이 없다는 점이 우선 젊은이에게 호응을 얻게 됩니다. 이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마음껏, 그리고 마음대로 세상을 사십시오. 어떤 교리나 어떤 교회에도 얽매이지 마세요. 여러분은 어쨋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기본 선한 양심과 하나님에 대해서 손톱만큼의 우호적인 인상만 갖고 있다면 말입니다. "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로부터 도움은 받되 절대 불변의 교리 같은 것은 구태여 알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것 없어도 천당 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자기 인생에서 보내는 시기가 어떤 시기입니까? 매사가 불안하고 미확정적 시절이 아닙니까? 이럴 경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모두 다 끌어 모으고 쑤셔보는 시기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며 앞으로 뭘 하며 내 인생을 보내야 하는지 막연한 시기입니다.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매달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에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 매달리는 시기이지 하나님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 불변의 교리나 신학이 아니라 "하나님은 너의 편이다. 무슨 고민거리나 아쉬운 것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곧장 달려나와 하나님의 능력을 너의 것으로 만들어라. 네가 만일 손톱만큼의 호의적인 태도만이라도 보인다면 너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은 제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단다. 조금도 어려워하지 말고 부담 없이 이 하나님을 능력을 수시로 차용해 가거라. 단 이런 차이는 있을 수 있다. 많은 성의를 표하면 그만큼 복이 너에게 많이 돌아가고 적게 성의를 표하면 아마 작은 행운 밖에는 너에게 돌아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기는 마찬가지고 이미 구원해 주었다는 점에서는 안심해 주기 바란다."
흔히 이단들의 문제점은 자신이 내세운 교리 자체를 자기 교단의 운명처럼 순교적 각오로서 죽기 살기로 사수한다는 점에 있다고 한다면 소위 유명 목사들의 문제점은 아예 진리나, 교리나 복음이나 기독교나 모든 것은 포기하고 종교적 서비스에 열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단 수준에도 못 미치고 이단만큼도 말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사랑의 하나님의 마련했다는 행운이나 팔아먹는 장사꾼이라고 보면 옳습니다. "너나 나 할 것 없이 다 오세요. 당신들의 영혼에 행복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열심 내기 나름입니다." 라는 상품을 가지고 종교 사업을 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당신들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듯이 나는 당신들로 인하여 나도 한번 사는 것처럼 살아보랍니다" 주의입니다. 그러니 이점에 대해 재치가 남다른 인기 있는 목사를 기성 교단의 목사들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겁니다. "똑같은 장사꾼인데 어떻게 저렇게 사람 장사를 잘하지? 뭘 어떻게 했길래!"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최낙재씨나 김홍전 씨는 이들과 많이 다르지요. 이들은 뭔가 기성 교회를 비판하고 나름대로 내세우는 게 있습니다.
[ 이단에 대해서 ]
2001,6,1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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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께서 분별하시는 이단에 대한 정의를 간단 명료하게 부탁을 드립니다. 또 박옥수, 케톨릭, 지방교회에 대한 분별도 부탁을 드립니다. 특히 지방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시고요. 기타 또 자료가 있으시면 부탁을 드립니다. (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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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중에서 나름대로의 체계를 가진 이단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와 증인이라든지, 통일교라든지 안식교, 몰몬교라든지, 새대주의를 주장하는 교단 같은 것은 여러 세월 동안에 숱한 사람들을 끌어 모았기에 그 나름대로 자기 교리에 체계를 잡으려고 애를 쓴 흔적들이 있습니다. 이런 집단에 대해서 그들의 주장을 반박할 거리를 제공하는데 박옥수와 같은 구원파 집단이나 다락방 운동이나 하는 자들은 체계적 교리보다 교주의 말에 맹신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전혀 논리성 자체가 성립될 수 없을 정도이기에 반박도 무가치할 뿐입니다.
지방 교회 같은 것은, 워치니 만 제자라고 자칭( 이점이 중요합니다) 말하는 위트니스 리의 기초로 하여 나온 공동체입니다. (위트니스 리는 몇 년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방 교회가 다른 이단들과 다른 점은 워치니 만이나 위트니스 책을 대단히 존중하고 성경의 표준적 해석책으로 사용은 합니다마는 그들을 맹종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이단 일 수도 아닐 수도 있기에 지방 교회 자체를 통째로 이단시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면, 그들 가운데 위트니스 리도 하나의 죄인으로 보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믿는 자가 있을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이는 위트니스 리를 하나의 계시로서 신봉하면 이단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런 잣대를 지방교회에게만 적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박사 교회에서도 적용되어야 하고 기타 교회라고 간판 걸은 모든 교회와 신학교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공평하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이근호의 말을 계시수준으로 본다면 그런 분도 또한 제가 보기에는 이단성이 농후한 사람입니다. 방금 드린 제 말을 직접 지방교회 다니는 분에게 이야기 하니까 같이 앉은 분들 중에 어떤 여자 분은 동의하는데 반면에 거기에 있는 지방교회 지도자쯤 되는 남자 분은 대단히 격분하고 있더란 말입니다.
방금 이 이단의 잣대를 당신과 당신의 교회 교인들과 목사에게 적용해보면, 과연 화를 낼까요, 아니면 동의할까요? (워치니 만의 성경 해석은 문제점이 많고 위트리스 리의 성경 해석은 엉터리라도 너무 엉터리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신학생이 기성 교회 목사는 그런 정도에 이르기까지라도 말씀 자체에 관심이 아예 없으니 어떻게 그들에게만 편파적으로 욕 할 수 있을까요? "이단이냐 아니냐는 교회가 아니라 복음이 기준입니다"라는 말씀 밖에 더 못 드립니다. 이렇게 되면 그러면 "당신이 생각하기에 이단적이 아닌 복음 이해는 어떤 것이라고 봅니까?"라는 물음이 나오게 되면 이 물음 자체가 이미 "어떤 단체가 이단이고 이단 아닙니까?"라는 해석에서 벗어나니 정말 바람직 한 사람이 되지요)
카톨릭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체제 위에 있는데 이는 '생명의 존엄성'을 신봉하는 신학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패자 부할전'(연옥)을 거쳐서라도 만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이미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창조하셔놓고 그 형상을 저주에 버린다는 것이 하나님 속성상 모순된다는 거죠. 따라서 약간의 벌은 있겠지만 지옥이 그렇게 심각한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꼭 기독교 신자들만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양심과 본성을 착한 자들은 양심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실천했다고 봐서 결국 천국 백성이 된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즉, 교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세상 모든 이론을 다 수용하자는 것이 카톨릭의 기본 방침입니다.
[ 믿음과 행함에 대해서 ]
2001,5,25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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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이근호 목사님... 질문이 있는 데요? 목사님! 건강하시죠? 이 밤에 여러 가지 혼돈의 마음이 교차되어 홈페이지의 글을 읽다가 이렇게 질문을 드리게 됩니다. 목사님은 인간의 행함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계시죠? 이 사실이 맞다고 생각하는 전제 하에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인간의 행함을 전적으로 부정한다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지 않는 다는 말씀으로 받아 들여 집니다. 그렇다면 이 말 앞에 몇 가지 의문점이 듭니다. 우선 성경에서 말씀하는 행함에 대해서 어떻게 규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자로서 성도의 삶은 마땅히 그리스도안에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함이 어떤 것임을 구체적으로 증거해야 한다는 것까지도 부정하시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오로지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삶이 오직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삶으로 보고, 이러한 삶이 성도의 육체임을 증거임을 강조하시는 것인가요... 믿음과 행함 ... 인간의 행함의 가능성을 부정하시는 목사님의 견해를 쉽게 설명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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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서 출발하지 마시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어느 한 순간도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나 힘이 중단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기동할 수는 힘을 주시고 성도에게는 특별히 마음 속에 그리스도 영이 있어 용서하시는 은총 속에 살게 합니다. 이로 인하여 성도는 자신의 행함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함을 더욱 부각하고 자랑하게 됩니다. 로마서에서 보게 되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되어 있습니다. (14:8) 또 빌립보서에 보면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하여 살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게서 출발하면 행함이 되지만 성경에서는 이것을 행함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처럼 뭐든지 인간 쪽에서 출발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쪽에서 출발하고 생각하는 자들이 신자라는 말이지요. 성경은 이런 자를 찾아내고 골라내는 작업을 위한 책입니다. 같은 성경을 봐도 불신자는 자신의 존재와 행함을 부각하는 쪽으로 해석할 것이고 성도는 같은 성경과 세상의 현상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공로를 부각하는 쪽으로 해석할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 행함에 비중을 의미를 두고 있다는 그 순간이 잠시 예수님보다 자기를 더 신경 쓴 결과가 아닐까요? 뭐를해도 은혜인데 말입니다. 그것을 자꾸만 자기 행함으로 돌리려고 애쓴다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불신자들의 한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참새도 많은 행위와 행동을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해야 비로소 죽고 잡힌다는 점을 심각하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행위란, 산 사람이나 생명체의 움직임과 생각, 전부를 다 포함합니다.
[ 오순절 사건에 대해서 ]
2001,5,29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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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번번이 궁금한 것을 질문할 때마다 질문에 대해서 답변을 너무나 성심 성의껏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너무나 궁금한 것이 많지만 두 가지를 여쭈어 보기 위해 이렇게 홈페이지를 찾았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오순절 사건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고 싶고, 또 다른 한가지는 시각적인 만족만을 위해 강대상을 꾸미고 채우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지는 강단...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강단은 어떠한 메세지의 내용이 선포가 되어야 하는지가 궁금합니다.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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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이 이미 승천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사건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사도행전 2:32-33에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시지 아니하면 성령이 오시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이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다는 겁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이렇게 되면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전부 예수님이 다 하시고 마무리하게 됩니다. 특히 그 중의 하나가 천국 가야 될 자에게 그 어떤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성령을 주시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선물을 주시는 일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자기 공로가 없음을 알고 모든 공로가 예수님의 공로임을 증거하게 됩니다. 강단에서 울려 나오는 복음은 심판의 기준에 대해서 알려져야 합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천사가 알려준 바와 같이 "이 땅을 떠나라"라는 복음만이 울러 퍼져야 합니다. 참고로 사도 바울은 어떻게 설교 했는지 데살로니가후서 1:7-9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 또 믿음과 행위에 대해서 ]
2001,5,29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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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께 또 질문이 있어요. 자꾸 믿음과 행함의 대한 부분이 너무나도 어렵게 다가옵니다. 저는 요즘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성경교리 시리즈 2권인 "성령 하나님"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 데 특별히 성화의 대한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말씀대로라면 즉, 인간의 행함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의 문제가 있던지... 표현 자체요. 더 쉽게 이야기를 한다면 기존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요,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기에 그 분의 인도대로 살아가게 될 것인데,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함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우리가 힘써 우리의 삶 속에서 이젠 죄의 대하여 죽은 자임을 날마다 인정하며 의에 대하여 산 자로서 주님께 우리의 의지를 복종시키는 삶...즉, 자녀다운 삶을 통해 향기를 발해야 함을 전하는 것이고...
목사님께서는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을 자꾸 주장하기에 근본을 전제로 한 기존의 교회의 가르침을 자꾸 전제를 무시한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것으로 생각하셔서 교회를 비판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자꾸 기존의 분들과 마찰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 너무나 혼란 속에 있습니다. 믿음과 행함... 복음만을 선포해야 하는 지 아니면 복음과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 이러한 삶임을 성경을 통해 이렇다고 함께 전해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저의 삶 속에서는 '이 지식이 너무 어렵도다.' 라는 고백밖에 나오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성도의 공동 사역이 성화이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권면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해야 하지 않나요? 우리의 기도는 어떠한 기도여야 하나요?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여야 하나요? 아님 주님께 나의 연약함을 고하고,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아가는 기도여야 하나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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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고민이 되고 걱정이 될 경우에는 반드시 본인 속에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우선 본인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즉 "내가 이러 이러한 경우가 되면 …. 아, 안돼! 안돼!"라는 상상이 내부에 자리잡아서 계속 심령을 두려움과 불안에 머물게 합니다. 따라서 이 두려움의 정체는 생각하지 않고서 막무가내 윤리와 착함으로 일관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욱 악마의 깊은 시험에 빠져들게 됩니다.
도대체 뭐가 두렵습니까? 자신이 어떻게 될까봐 두렵습니까? 자, 제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연인 앞에서 왠지 두렵고 떨고 있으면 그 연인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당신은 나를 신뢰하지 않고 있군요. 정말 화가 납니다. 제발 제 앞에서만큼은 떨지 마세요. 제가 당신을 이렇게 사랑하고 있잖아요. 왜 저의 사랑을 무시합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로마서 13:8-10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또한 요한일서 4:18에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8:33에는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예수님은 신랑이 됩니다. 신부가 신랑의 사랑을 받아드리지 않고 나름대로 최선의 도덕과 경건을 만들려고 애쓴다면 신랑이 얼마나 한심스럽게 여기겠습니까. 누가복음 7:47에는 "많은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제발 그저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을 주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받아드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지막 심판도 역시 사랑뿐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기도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셨는데, 기도는 자기 이름(자기의 영광과 명예보다 ) 하나님의 이름과 주님의 이름이 명예롭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면 됩니다. (주기도문이 대표격입니다) 즉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세요. 또 사도 바울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궁금하지요. 에베소서 3:14-19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서도 오직 하나 역시 '사랑'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지요. 이처럼 성도란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이 사랑 잊지 마세요.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해야... ]
2001,5,30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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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안녕하세요.. 한 번도 뵙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에 관련된 말들을 많이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어떤 힘이 있으며, 전하는 자가 어떤 자세로전해야 하는지요? 혹, 전하는 자가 어떻든 간에 전하는 자와는 상관없이 말씀은 역사하는지요?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나는 설교는 어떤 말씀인지요? 누군가 그러드군요.. 말씀 안에 하나님을 담아 전하라구요.. 건강하십시오.. 말씀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성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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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4:12-13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여기에 보면 '벌거벗은 것 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 내부에 자리잡은 욕심과 죄악에 대해서 고발하는 식으로 활동합니다. 어떤 것까지 욕심이 되느냐 하면, 멋진 설교로서 상대방을 감화 감동시켜 신자 만들겠다는 사고방식까지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을 밝혀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2:4-5에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와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들이 성령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자기 설교의 능력으로 어떤 성령의 효과를 가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요 불신앙에 불과합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으신 것처럼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현상에 매료되지 마시고 늘 주님의 도구로서 예수님의 의만 증거하면 그것으로 설교자 임무는 끝입니다. 얼마나 효과를 내었느냐가 아니라 정말 바른 복음만 전파했느냐가 설교자가 책임져야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서야 합니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로마서 10:15)
[ 신접한 술법과 사울의 예언 ]
2000,5,12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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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 사무엘상 28장에서 신접한 여인에 의해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질문2 : 사무엘상 19:18-24에서의 사울 왕도 여타의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신에 의해 예언도하고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그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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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가지 질문을 묶어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그 어떤 극박한 환경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사울 왕은 신앙의 흉내만 내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적 신앙은 모든 인간들의 본성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선 사무엘과 사울 왕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사무엘에 있어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겸손하게 움직이는데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원칙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호와 하나님만이 진정 이스라엘의 왕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자신이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왕의 자리를 소지해야 한다는 정신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 자세는 사무엘이 보기에 하나님의 구원 정신에 합당치 못한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나를 자신의 사적 통솔력이나 정치력으로 부지하는 나라인 줄 여기고 있습니다. 사울 왕도 예언도 하고 선지자처럼 행동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에 가능했지 결코 사울 왕 개인의 자질이나 신앙심에 근거한 결과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임한 자는 자신이 갖게 된 신앙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당사자의 신앙의 능력의 토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예들 들면, 다윗이 골리앗을 죽여놓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승리'라고 언급하는 차원을 두고 말합니다. 다윗은 그 이후의 전쟁에서 또다시 물 맷돌을 활용한 적이 없다는 점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사태를 진두 지휘하시는 분은 신앙 좋은 다윗도 아니오 사무엘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런 점에서 사울이 성신 받아 예언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본인이 신앙심이 좋아서 하늘로부터 보너스 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이 사울 같은 인간도 쓰겠다면 얼마든지 쓰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울 본인에게 악신이 임하니까 이제부터 그는 지난 날 자신의 행했던 신앙적 노하우나 종교적 형식을 동원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와내고 백성들이 폐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사울왕 본인은 전혀 모릅니다. 바로 사무엘 선지자는 이런 엉터리 같은 사울 왕의 태도에 대해서 단호하게 말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이스라엘 왕이 아니오!"
그러나 이러한 선고를 순순히 그냥 받아드릴 사울 왕이 아닙니다. 여전히 자신이 왕인 양 여기면서 사무엘 선지자를 찾습니다. 사무엘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것을 확인하므로 아직도 자신이 하나님의 종임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사무엘은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울의 왕국은 반드시 다윗의 왕국으로 바뀌기 위해 말씀에 의해 필히 망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울왕의 근원적인 속성을 사울왕의 멸망과 연결짓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블레셋 군대로 하여금 사울왕 군대와 맞서게 했습니다. 사울왕은 남들 보기에 대단한 신앙가의 면모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쫓아냅니다.
자 그러면 기적 같은 블레셋 군대가 갑자기 물러가서 이스라엘이 공격받지 않게 될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제사와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하나님과 선지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면서 신접한 여인을 어쩔 수 없이 찾게 되었다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쉬운 예로, 해태 프로 야구팀 감독 김응룡씨가 지금은 자신이 감독 맡은 인물이 못된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서는 변명하기를 "으∼응, 종범이도 없고, 동열이도 없고" 하는 것으로 핑계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왕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습니다. 사울왕을 통해서 계속해서 이스라엘왕 역할을 다 수행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왜 사울왕은 하나님에 의해서 왕 자리에서 제거될 수밖에 없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사울왕 자신이 생각하기를, 가장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고 참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고 여긴 신접한 여인이 어쩌면 사울 왕 자신의 깊은 내심의 심정을 어떻게 그토록 제대로 현실화 해내는 것에 대해서 사울왕 본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접한 여인보다는 차라리 사무엘 선지자를 아쉬워하고 다시 찾고 싶었던 그 사울왕의 본심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곧 신접한 여인의 무가치성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무가치성 행위였고 이것이 바로 사울왕의 진정한 본질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하나님은 사울왕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