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짓과 참에 대해서 ] 2001.04.15 - 2001.06.01
[ 거짓과 참에 대해서 ] 2001.04.15 - 2001.06.01
이름 : 관리자(IP:122.47.55.30)
[ 거짓과 참에 대해서 ]
2001,4,15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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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차이나는 예언과 구분되는 점이 무엇이며, 또 거짓 사도와 참 사도의 서로 다른 복음과 또 오늘날 거짓목회자와 참 목회자, 거짓 성도와 참 성도의 구별을 어떻게 해야하며 그 분별의 기준이 무엇인지 알고싶습니다.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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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내용에 대해서 인간적인 종교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전부 신자도 아니요 성도도 아니요 거짓 선지자들이 그 속에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언약은 창세 전에 예정된 메시야만이 달성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 모든 아담 속의 인간들은 언약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악마 속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마 12:28-29). 참된 성도는 오직 이점을 믿고 의지할 뿐입니다. 즉 모든 언약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했다는 사실을 믿고 그것만이 증거합니다.
그러나 거짓 성도들은 자기 자신들의 종교성에서 나오는 '천국대용'과 '그리스도 몸(교회)의 대용'과 '하나님의 형상 대용'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을 회유하여 자기 세력화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바탕에서는 '인간의 의'가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악마가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기 때문에 생긴 열매입니다. 악마가 무엇을 제일 싫어할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갉아먹을 수 있는 모든 종교적 노력을 다 경주하고 있는 실정에 있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제발 성경에 나오는 언약 완성이 누구의 능력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는지 거기에만 관심을 가져야지 눈에 보이는 자기 구원과 자기 행복과 지가 미래책과 자기 교회 발전책을 마치 언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에다 목숨을 걸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위에 대기하고 있는 많은 거짓 선지자들의 악마의 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에 대해서 ]
2001,4,15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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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안녕하세요. 양낙홍 교수님의 저서 "목사의 시대적 사명과 한국 신학교육의 개혁"에 보면 외적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를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될 수는 없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려신학대학원의 양낙흥 교수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왜 외적으로 크게 성장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 될 수 없는지에 대한 성경적인 답변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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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을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만 성취하여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룩해 버렸기에 양적 문제가 아니라 '관계'문제로만 천국이 성립됩니다. 그런데 교회란 인간들의 종교 집단으로서 존재가 인간의 숫자나 양의 팽창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언약도 아닐 뿐더러 언약 성취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면, 예배당 지어놓고 사람들을 데려다가 거기에 수용했다고 해서 그것이 태초부터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 완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언약은 오로지 '여자의 후손'은 메시야만이 성취될 고유 권한이고 그 분에게만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천국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교회 성장이나 부흥을 인간들이 하는 것은 '천국 대용'로 벌리는 종교적 욕구의 발로 때문입니다.
천국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1:28-29의 말씀이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성도는 눈에 보이는 교회나 그 움직임이나 활동을 믿는 자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 활동하시는 예수님을 어느 장소나 어느 공간에서는 믿는 자입니다. 노아처럼 말입니다(노아의 식구만 방주에 들어갔음. 그러나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그를 믿음의 증인으로 보고 있음).
[ 자유의지에 대해서 ]
2001,4,16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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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자유의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것인가요? 자유의지를 이야기할 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그리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의지 속에서 아담은 죄를 선택했다는 근거를 들며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이 사실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로봇밖에 되지 않으며, 인격이신 하나님을 부정하게 된다는 말을 합니다. 구원에 측면에서가 아닌 우리의 의지의 측면에서 자유의지는 있는 것인가요? 우리의 열심으로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기를 결단하는 것이 맞나요? 아님 복음을 잘 알면 그렇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수 밖에 없게 되는 신자의 삶이 주어지게 되는 것인가요?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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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의지가 있다는 말 자체가 어폐가 있으며, 더군다나 '자유 의지'가 있다는 주장은 '의지'가 있다는 사실과 차이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강조하는 것을 봐서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오해를 바탕에 두고 나온 곡해의 말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으로서 내 주장을 포기 못하겠다는 반항의 뜻으로 '자유의지'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됩니다.(의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인간의 독립성을 강변하기에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늘 껄끄럽고 귀찮은 존재이고 나의 자유성을 훼방꾼이라는 부담을 지울 길이 없기에 "나는 나 나름대로 마냥 하나님에게 끌려 다니는 존재가 아니 되렵니다" 라는 반발의 목소리를 가지고 '자유 의지'라는 표현으로 대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내가 남편을 사랑할 때는, "나는 당신의 종이 될래요"하다가 남편이 싫어지면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애완동물이 아니란 말이예요. 나도 인격체란 말이예요. 나에게도 내 자유를 펼칠 자유가 있단 말이예요, 이걸 인정해 달라는 말이예요"라는 고함치는 의식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대신, 내가 양식껏 발휘할 수 있는 이성에 근거해서 마음먹은 대로 잘 조절해서 하나님 영광에 합당하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자기 행위에 대한 정당함과 자기 긍정을 확인하는데서 사는 가치와 존재의 의미와 보람을 찾고자 자유의지를 거론하게 되는데 바로 이 정신이 모든 이방종교 생활의 근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5:10를 한 번 보세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그 어떤 사도의 자신의 '자유의지'를 전혀 부각시킬 의도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아니요'라는 고백을 분명히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서 나오는 그 현장에는 필히 '내가 아니요'라는 것이 동반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갈 2:20)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저 인간의 자유의지에 근거한 이방 종교생활에 불과합니다. 자유의지나 혹은 의지라는 것을 거론할 필요조차 하지 않는 마음이 곧 은혜와 함께 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신앙인의 마음가짐입니다. 이것을 디모데후서 2:26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바 되었다"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철학자 칸트는, 인간이 최고선을 달성하는 기본 틀을 구성하는데 있어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이뿐만 아니라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를 같이 잡고 있습니다. 영혼의 불명성이 요청되는 이유는, 도덕적 완전성을 무한히 진보하기 위하 위해서는 진보의 주체인 영혼이 죽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요 신의 존재가 필요한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수행한 그 행위가 보여준 선과 악에 비례해서 누군가 보상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연 종교'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영혼의 불멸성과 신의 존재가 필히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입니다. (불교에서의 돈오점수 이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이 후에는 무한한 도덕적 성숙이 남아 있다는 이론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달리 이야기합니다. 성경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제시한 언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완성되고 그분의 선물로 인해 천국이 이루어질 따름입니다. 따라서 진정 복음을 안다고 한다면 무엇이 비복음이며 자연 종교적인 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게 되어야 마땅합니다. 인간의 자연 종교성에 입각한 종교생활에 있어 '자유의지'의 역할과 철학적 활용도에 대해서는 강영안 교수가 지은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소나무 출판사) 라는 책을 참조하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영원히 갈라서기 전에 ]
2001,4,16 박기삼
* 신간 소개 - "영원히 갈라서기 전에" 240페지 7500원 이근호 지음
하나님의 심판의 기준은 무엇을 어떻게 행했느냐가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어떻게 대했느냐는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해서 사람과 사람은 영원히 갈라서게 된다. 이 책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오손도손 머리를 맞대고 보시면 좋습니다.
[ 차 례 ]
구하라 주실 것이요___11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___15
복 있는 사람은___19
응답 없는 제사___23
신비주의의 한계___27
약한 자의 승리___31
여호와와 마주 서서___35
선지자의 아픔___39
어디를 가든지___43
진정한 사랑___47
창조에 담긴 뜻___51
추한 인간상___55
확고한 구원 의지___59
사이비___63
제사 같지 않는 참된 제사___67
불가능한 사랑___71
복으로 인도 받는 파멸___75
다가옴의 공포___79
잘라 내는 즐거움___83
무가치하다는 이유로 주는 상___87
영원히 갈라서기 전에___91
돌아보는 자의 후회___95
멀어진 세상 더욱 멀게 보면서___99
죽음 뒤까지 따라오는 주님___103
황금으로 시작해서 흙으로 끝나는 인류사___107
작은 것 속에 담긴 무서움___111
땅에서 버려진 하늘의 마음씨___115
부질없는 게임___119
하나님이 차려 주신 음식___123
기적을 피해 가는 기적___127
죄인으로 살아가는 의인___131
만드는 부활과 주시는 부활___135
참새의 최종 만족___139
사망 생산자___143
쏟아지는 감사거리___147
주제 파악이 급선무___151
근심하는 자는 못 들어갈 넓은 처소___155
하나님을 뭘로 알고 바치려 하는가___159
가정 그 자체로부터의 해방___163
거듭난 자가 즐기는 것___167
종말 체제의 통수권자___171
숫자 같은 인간들___175
홀로 남게 하시는 축복___179
실체가 주는 충격___183
심판을 위한 함께 하심___187
축복 속으로 사라진 야곱___191
구원을 안 해 주시는 능력___195
복수 혈전___199
회개로의 초대___203
심판의 기준 정하기___207
공격당하는 사도___211
걷히지 않는 안개___215
십일조라는 이름의 도적질___219
인간으로부터 지배받지 않는 단체___222
그 때를 아십니까___226
자기를 아는 사람___230
권세 중의 권세___234
[ 본문 중에서 ]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것은 인간들의 사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정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상속할 나라에 합당한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십니다. 하늘 나라의 속성을 알고 있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정신에 부합되는 사람,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맞는 사람들을 분류해서 그들에게만 자신의 나라를 상속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참으로 궁금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이기에 아무나 다 넣어 주는 데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흔히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살기에 편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신나는 나라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라든지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삶의 환경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성경에 봐도 요한계시록에는“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되어 있고 또 다른 데서는“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는 눈물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 없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다시는 어두움조차 없는 세계가 하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환경 안에 살려고 한다면 이러한 환경에 준하는 인간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욕심 내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비웠다는 정도로는 새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천국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닦아 성불하는 수양의 나라가 아닙니다. 누구를 의지하는 나라입니다. 깨끗하고 생명수가 흐르는 삶의 환경이라는 것은 인간의 노고와 수고와 노력의 대가로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 혼자만의 공로로 만들어진 세계입니다.
그러니 천국은 예수님의 사적인 자기 나라라고 보면 됩니다. 골로새서 1:13에서 하늘 나라를 아들의 나라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다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니 천국 안에는 반드시 천국을 이루어 내신 분을 모시는 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과 4를 보면,“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에 의해서 천국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 백성의 이마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 구원받았음을 나타냅니다.
이곳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심판이란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구분하는 작업인데, 그 기준은 평소에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을 어떻게 대우했는지에 관한 일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에게 잘 대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잘 대해 준 것이 되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에게 잘 대해 준 것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자만이 하나님께서 상속하기 위하여 마련하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옥불에 들어가는 사람은 단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경찰서에 자주 들락거렸다든가 교통 범칙금을 더 많이 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련된 사람을 대우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종교의 차이를 떠나서 성격이 맞고 이웃에 붙어살고 취미가 맞아서 서로 친하고 잘 대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이나 예수님의 나라와는 전혀 무관하게 의리나 자신의 윤리 도덕성 때문에 제공되는 혜택이기에 천국의 기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님의 형제를 잘 대해 주는 자가 곧 천국의 시민입니다. 이런 자만이 천국 가서도 여전히 예수님에게 끝없는 칭송과 평화로운 마음을 바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교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천국을 가져 올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화려한 메시아였고 그들이 알아볼 만한 메시아였습니다. 초라하고 인간의 죄를 지적하는 거추장스러운 메시아는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참된 구세주를 거절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지금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분류 작업은 이 지상에 있는 예수님의 형제들을 통해서도 똑같이 전달됩니다. 그들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사람들의 구미에 맞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복이나 내려 주고 그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는 그런 메시아를 전하지를 않습니다. 세상만을 좋아하는 자에 대한 가차없는 정죄와 고발을 서슴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도 차가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상속받는 기준입니다.
<공개질문> 부산 일부 목사님들의 악행에 대하여 질문 드림
2001,4,22 정대길
* 한국교회 장래를 위하여 - <공개질문> 부산 목사님들의 악행을 목사님들께 공개 질문합니다.
1) 피땀으로 교회를 개척한 대다수의 기존성도들을 목사님이 [물갈이하겠다]며 쫓아낼 수 있는지요? 있다면 성경어디에 근거한 것 인지요?
2) 교회를 개척한 유일한 장립 장로님을 쫓아내기 위해 목사님이 '소환장'도 '죄증 설명서'도 '재판기록'도 '판결문'도 주지 않은 불법재판으로 [면직.출교]를 했는데 (삼척동자라도 불법재판)이란 사실을 알 것인데도 노회 재판국도 유사한 재판을 했다면 이 행위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는 악행이 아닐까요?
3)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수년간 두 번씩 성전건축작정헌금을 시켜 내도록 독려하면서, "앞장서겠다"던 자신은 완납하기도 전에 몰래 부동산을 사두었던 것이 알려져, 성도들이 해 명을 요구하자 목사님부부가 "거짓말이다.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며 강력히 부인 했으나 사실로 밝혀졌다면, 그 목사님의 도덕성에 관한 노회의 입장은 무엇이며, 목사님이 위와 같은 불법재판을 두 번이나 하였다면 노회의 조치는 어떠해야 마땅한지요?
4) [가]-신학하기 위해 떠나는 가난한 전도사에게 전도회에서 결정하고 도와준 100만원을 목사님이 "되받아내라"고 끈질기게 압력하는 것은 정당하며- [나]-떠나간 전도사님을 해하려고 서류를 만들어 장로님에게 서명을 강요하여 거부했다 고 당회 거역이 되는지요?- 또 거부할 수는 없는지요?
5) [가]- [소환장]도 [죄증설명서]도 없고, 요구한 [재판기록]과 [판결문]도 없는 엉터리 재판을 불복하고, 상소한 장로님이 '재정부장'의 일을 계속하려하자 목사님이 완력으로 빼앗는 행위는 정당한지요? [나]- 이로 인해 성도들이 눈감고 기도하는 예배도중에 목사님이 강단 밑에 몰래 숨어, 쪼그리고 앉아서 헌금봉투를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어가던 행위를 하다가 결국 카메라에 찍히고 발각되었다면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이렇게 한 목사님의 행위는 정당한지요?
6) "장로는 목사가 필요해서 세운다 필요 없으면 내보낸다""대통령이 국무총리를 세웠다, 내 보냈다 하지 않느냐?"-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사모님은 예배 후에 이렇게 주장하니 장로님이 "(목사를 통해서 받아도)장로는 하나님이 주신 직분이니 하나님의 종이다. 목사님 이 장로 직분을 주고 말고 한다면 목사의 종이지 하나님의 종이 아니니 그 목사 나갈 땐 따라 나가야한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말이 옳습니까?
7) 장로님이 노회에 상소하시자 노회재판국이 장로님에게 "상소 취하하라""잘해보라니까 그러네"하고 상소취하 압력을 한 것은 정당합니까?
8) 노회재판국이 단 한번도 교회에 와 주지도 않으면서 재판을 미루기만 하여 끝내 큰 사고를 유발하였다면 노회재판국의 책임은 없는지요?
9) 재판 상소 중에도 목사님은 성도들 몰래 구청에 어린이집 운영을 신청하고 진행하다가 우연히 발각되고, 성도들은 "재발 재판 좀 진행해주세요 견딜 수 없습니다"며 노회재판국에 여러 번 문서로도 호소하고 노회장님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해도 재판을 미루고-- 목사님은 새해 집사 임명에 반대편 기존 집사님들은 탈락시키고,-- 목사님이 예배시간 강단 밑에 숨어 헌금봉투를 자신의 안주머니에 넣어가던 행위가 발각되고,-- 목사님이 작정한 성전건축헌금도 미룬 체 몰래 부동산을 사 둔 것이 발각되고-- <<교회부지에 도로가 개설되면서 받은 보상금 2억여원의 행방을 밝히지 않아 성도들이 요청한 내용도 끝내 침묵하여 알 수 없고>>--"재판 끝날 때까지 우선 다른 목사님 보내 예배드려달라"고 호소해도 노회재판국은 침묵 일관하여 성도들이 격분하게 되었고 "이런 목사와는 예배를 드릴 수 없다. 우리끼리 예배 드린다"며 목사님을 강단에서 끌어내리는 사태로 발전하자--그때서야 노회재판국은 재판을 진행하며 먼저 올린 상소는 그대로 둔 체- 노회재판국이 미루어서 일어난 사건만 취급하여 [예배방해]라면서 장로님을 [제명. 출교]하였으며--"먼저 올린 상소는 취급 안하고 재판국이 미루기만 해서 일어난 일만 처벌할 수 있느냐"고 항의하니 마지못해 노회재판국은 나중에 목사님에게 [3개월 예배인도정지]하였는데---
(질문1)- 노회재판국은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는 불의한 재판을 했다는 비난에 대한 입장은?
(질문2)- 노회재판국이 "잘 해 봐라"며 상소취하 압력은 정당한지요?
(질문3)- 교회가 받은 보상금 2억여원의 행방을 밝혀주지 않은 목사님과 노회의 책임은 없는지요?
10) 장로님이 "상소하겠다"며 노회재판국에 [재판기록]과 [판결문]을 수차 요구했으나 노회 판결문은 없다"며 거짓말을 하며 주지 않아 총회상소에 큰 지장을 주었다면 노회재판국의 책임은 없는지요?
11) 노회재판국이 처벌한 당사자에게는 "판결문은 없다"는 거짓말로 주지 않고, 오히려 불법재판을 한 목사님에게 비밀리에 주어 그 판결문으로 사회법정에 [교회출입금지]신청을 하여 앞장서 교회를 개척한 유일한 장립 장로님을 쫓아낸 노회는 정당하며? 책임은 없는지요?
12) 목사님은 [이단][간음][도적질]외에는 처벌 할 수 없다 는, 성경적 근거와 이유는 무엇입니까?
13) 어렵게 대법원격인 총회(서울) 상소하니 1년에 1회 있는 총회에서도 이상한 일이 발생했는데, 총회직전 누가 상소장을 도적질하고, 총회서기도 몰래 서기의 도장도 도용하여 서류를 만들어 총회도중 부산으로 반송시켜왔습니다.
[가]- 그렇다면, 상소장을 분실한 책임을 누가 져야하며, [나]- 도적질을 한 자를 찾거나 조사할 의무도 없는지요?
14) 다시 상소하여 1년이 지나 총회가 열렸는데 상소장을 분실한 책임 있는 총회가 "처리시한이 지났다"며 상소처리를 거부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지요?
15) 다시 제출한 상소장이 접수되어 서울총회에서 처리중이였는데 상소장을 또 누가 도적질하여 총회도중 부산으로 반송시켰습니다. 또 1년의 세월을 고통 속에 보냈는데 상소장을 도적 맞은 총회의 책임여부는 어떠하며, 다시 도적질한 자도 밝혀야 할 책임이 총회는 없는지요?
16) 두 번째 반송되어 온 상소장을 받아든 장로님이 급히 상경하여 폐회직전인 총회에서 그 악행을 소리 질렀고, 긴급동의로 상정되었으나 찬반격론이 일어나고 진통 끝에 통과되어 [노회장님] [재판국장 목사님] [재판국 서기 목사님] [목사님] [장로님] 등이 재판을 받는 한국기독교 역사상 유래 없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이번에는 또 재판 진행 중에 총회재판국이 상소인 장로님에게 "인사해라"는 요구와 돈 액수 등 대화가 오고간 증거가 있다면 {한국의 목사님들이여} 부디 말씀해 주십시오.
[가]-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공의로 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지?
[나]- 이런 재판들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지?
[다]- 이런 재판을 승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게 되는지요?
17) "우리끼리 예배를 드리겠다"며 물리적 충돌이 일어날 때-- 목사님 부부가 본 교회 청년을 경찰서에 고소했는데 조사 경관이 "뼈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상처 하나 없는데 이걸로 교회에서 고소를 다 하느냐?"며 목사님 부부에게 심히 질책했다면 목사님 부부의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18) 목사님 자신이 장로님의 멱살부분을 잡고 흔들다 잠바 쟈크에 실켜서 손가락 사이에 난 경미한 상처를 1주 진단을 받아와 장로님이 폭행하여 낸 상처라고 허위 고소하여 재판 도중 밝혀져 오히려 벌금형의 전과가 된 목사님의 악행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지요?
19) 예배 후 나오면서 항의한 장로님에게 [예배방해]를 했다며 여러 번 사회고소를 한 목사님의 행위는 총회법에 [사회고소를 자주 하는 자에 대한 징계]에 해당되지 않는지요? 묵인되는 이유는?
20) 교회에서 발생한 일을 여러 번 겹친 목사님의 사회고소가 겹치고 끝내 장로님이 교도소에서 지내셨고,(1개월) 당시 장로님은 사모님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는데 목사님이 [장로님 고소 취하 조건으로 1억을 요구한 충격적인 사실(장로님 나와서 알게됨)에 대해 이 행위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지요?
21) IMF를 당해 어려운 이때 장로님이 교도소를 가게되면서 사업이 부도가 나서 엄청난 고통을 온 가족이 당하고, 지금도 목사님이 받아간 돈에 대한 이자를 물고있는 고통중 이라면 목사님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은 악행으로 당하는 고통이라면 이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지요?
23) 장로님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 목사님과 장로님 부인과의 거래로 목사님이 이자 돈을 내서 일부 받아가고, 나머지 돈도 받기 위해 <공증>을 한 목사님은, 극심한 경제난으로 고통 중인 장로님이 매달 주기로 한 돈을 내지 않는다고 장로님 댁 가구에 차압을 부쳐서 장로님 가족이 당한 고통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고, [목사님의 행위가 치가 떨리도록 악랄하다]는 당시 여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24) (사모님에게 일임했다지만)장로님도 알지 못한 체 받아간 그 돈의 행방은 어디인지? 그 교회의 형편에 비해 좋지 못한 소문이 들려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알고 싶은데요?
25) 교회는 영리 목적으로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성전건축예정]이던 부지에 빌라를 지어 분양했다면>- 이것이 정당한지요?
26) 종교지도자들이 사실과 다른 사과문을 신문에 게재하도록 했다면 그 행위는 어떠합니까?
27) 이런 분이 노회장도 될 수 있다면 타 노회도 역시 그러한지 항목별 답해주십시오.
-- (한국교회정화를 바라는) 사건 당시 탄원서에 서명한자 드림 --
[ '부산 일부 목사님들의 악행에 대하여'에 대해서 ]
2001,4,22 이근호
-- 말썽 난 교회 교인들에게 질의함 --
1. 사기꾼의 말만 듣고 계속 그 교회에 헌금한 이유가 무엇인지요?
2. 복음이 아닌 설교를 듣고도 그 교회 계속 출석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3. 그렇게 목사에게 당하면서 노회를 탈퇴 안하고 장로직을 초개같이 못 버리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4. 노회 목사들이 그 목사와 다같이 한 통속으로 사기꾼이라는 것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 구원을 위해서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연구할 생각 안하고 그저 교회 평안하기만 요구하니, 그 약점을 잡고 계속해서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온 동네 사기꾼 목사들이 다 들끓는다는 사실을 왜 아직도 감 잡지 못하는지 답답합니다.
6. 해결책 - 하루 빨리 노회를 탈퇴하고, 장로직을 모두 버리고, 오직 복음만 전하는 설교자를 찾아 주님이 원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 한 푼의 돈이라도 돈으로 목사 마음을 달래려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세요. 목사는 그 교회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다 긁어내고 심지어 빚까지 짊어지게 만들 위인들입니다.
[ '성경에서는 "생명복제"를 어떻게'에 대해서 ]
2001,4,22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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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안녕하세요.. 몸은 건강하신지요. 기독교 윤리학을 공부하다가 "생명복제"에 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ek. 타임지를 비롯해서 생명복제기사를 다룬 월간지를 읽는 중 여러가지 많은 문제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1. 과연 인간이 복제가 된다면 원래 거했던 "영혼"이 동일하게 복제인간에게도 거할 수 있는가?
2. 성경에서는 생명복제를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
3. 생명의 주권은 분명 하나님께 있는데, 인간이 "생명을 복제"한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여기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를 꼭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관해서 성경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책이 있다면 추천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다소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으나 목사님의 견해를 꼭 듣고 싶기에 이렇게 글을 올리게 됩니다. (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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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복제는 성경과 관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개념이 목숨이나 살게 하는 기(氣) 같은 개념이 성경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이란 언약과 끊어진 상태를 의미하고 성경에서 삶이란 언약 안에 놓여있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죽은 인간 또다시 만드나, 목숨을 연장해 봤자 여전히 죽은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는 자입니다.
영혼이란 것이 복제된 몸에도 담겨 있느냐고 질의하셨는데, 성경에서 몸과 대립되면서 몸 안에 잠기는 개념의 '영혼'이라는 개념이 없고 아예 용납조차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의 영이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영이라고 합니다. 육체 안에 담기는 관점은 비언약적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질(육체)이 복제가 되든 아니 되든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영혼이라고(혹은 영)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생명 복제란 과학에 속하는 문제이고 인간의 과학이란 세계를 보면 왜곡된 관점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과학의 문제를 다룰 때는 인간의 철학적 관점부터 문제삼아야 합니다. 철학적 관점에서 현대 생명 공학의 문제점을 잘 다룬 책을 소개합니다. [바이오테크 시대]라는 책인데 민음사에서 나온 것이고 유명한 제레미 리프킨이 지은 책입니다. 좋은 참고가 되시기 바랍니다.
덧붙어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성도는 복음을 전하면 되지 '생명 복제 반대 운동'하는 것이 할 일이 아님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곳의 생각은 너무 어려워요'에 대해서 ]
2001,4,25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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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이곳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나 안에 들어 왔을 때(믿었을 때 혹은 성도가 되어서도)도 성경의 말씀들을 지킬 수 없고 또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죄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이 논리는 자체가 모순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큰 오해와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자들을 날 때부터 인도하시어 그 구원을 이루어 가시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를 죄악시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로 죄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생각되게 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도 표면적으로는 선을 행치 못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이나 계명을 지키는 것이나 복음에 복종하는 것과 같은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리심을 받고서도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광야 길을 걸어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양문으로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며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면 바깥 어두운데 내어 쫓기게 될 것입니다. -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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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새삼스럽게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죄인가를 평생을 통해 알게 하시지요. 그래서 죄 가운데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가운데 인도합니다. 즉 언약의 완성은 죄인인 인간이 아니라 따로 계시다는 것(예수님)을 증거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함의 열매'라고 하셨는데 '인간 행함의 열매'라고 왜 자꾸 우기십니까? 제가 성경에서 알기에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즉 성령의 하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증거자는 성령이십니다. (요일 5:6-7) 성령님만이 진리의 증거자입니다. 그리고 죄라는 개념은 인간이 자기 행함을 스스로 분석해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서도 기어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반대로 모든 것을 자기화 시키는 그 모습이 죄입니다.
자기 행함을 검토하려는 자는 결국 '자기 증거자'에 머물고 맙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자라면 왜 성령님만이 유일한 증거자가 되고 자기 자신은 밀려나야 하는 지를 아는 자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니고서야 '자기 부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물과 피로서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이유는 그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정과 욕심을 못박으라고 늘 들이대는 것입니다.(갈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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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과 행함 ]
2001,4,25 이기원
자기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신앙은 믿음의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행함에 가치와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가치와 의미를 두어야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인식한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사람이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끝까지 인간이 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보다 내가 한 일에 대한 것에 의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어려운 곳이 아니라 이런 정신과 믿음이 일하게 한 결과물을 함께 나누는 장일 뿐입니다.
[ 바른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 ]
2001,4,27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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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올바른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은 어떻게 신학을 정립한다는 것인지요. 그리고 올바른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과 마땅히 소유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요. 목사님, 죄송합니다. 요즘 들어 이것 또한 많은 혼란이 옵니다. 솔직히 고민이 생깁니다. 건강하십시오. (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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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구약부터 찬찬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라는 이름 자체가 이를 말해줍니다(출 3장, 6장). 교회에서 남이 하는 종교 활동이나 나의 종교적 지식이나 소양이나 고도의 윤리성에서 신학을 시작하지 마시고 (그 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이라고 여긴 것이라든지 아니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목사나 모든 교인들의 활동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의하여 제시된 언약이 어떻게 하나님에 의해서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지를 가지고 신학을 전개하시기 바랍니다.
[ 융과 니체에 대해서 ]
2001,5,1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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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목사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융',"니체"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융의 사상과 그의 생애, 업적, 그의 사상에 있어서 어떠한 부분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아서요. 목사님! 건강하세요. (정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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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문제점이 있다니 없다니 하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논의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경적으로 비복음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문제성이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그 사람은 자기 논리가 앞뒤가 상호 맞지 않고 일관성이 없을 때 문제성이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융과 니체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 것은 후자가 아니라 전자입니다. 즉 성경적으로 봐서 비복음적이기 때문에 문제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철학적으로 좀 더 깊이 따져 들어가면 두 번째에 관한 것도 엄청난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하고는 별로 상관없는 논쟁일 수밖에 없습니다.
칼 구스파프 융과 니체의 가치는 사람들의 위선과 허위를 과감하게 폭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성령을 통해서 받았다고 자부하는 그 신앙성은 사실은 모든 종족들이 보여주는 있는 일반적인 종교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밝혀내었습니다. 그리고 니체 같은 경우에는, 흔히 이성의 올바른 사용으로 인해 도덕이나 윤리는 달성될 수 있다고 낙관론을 펴는 것에 대해서 과감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런 윤리나 도덕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의 의지, 권력 추구 의지의 일종인 것을 여지없이 드러내어 주었습니다.
융은 인간의 보편적 본능을 연구한 사람입니다.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그 본능 속에는 무한과 초월을 향해 끊임없이 열망하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프로이드는 친구가 인간의 본능을 성적인 쾌락에 둔 반면에, 그러나 융은 초월적 의지에다 두었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말하기를, 인간은 이성이나 감정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충동적인 의지에 의해서 늘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이 의지는 초인을 향한 순발력입니다. 늘 자신을 권력자로서 행세하려는 의지이지요. 이것이 나쁘다 좋다는 것을 따져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는 이런 윤리성까지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융과 니체 둘 다 도덕이라는 법을 앞장세우면서 이성을 동원해서 마치 무척 도덕적인 노력을 하고 사는 양 행세하는 인간들의 얄팍한 허위성을 낱낱이 고발했다는 점에서 높이 칭송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건전하게 보이는 사회를 부르짖는 그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해서 개개인이 그러한 건전함을 유지한다고 있지는 않다는 진실을 밝혀준 자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으로 봤을 때, 이 두 사람은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숨어있는 그 본심은 그 자체로서 죄도 아니요 의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거기서부터 출발점을 삼은 것이 바로 인간을 이유 없이 긍정한다는 점에서 죄악이 됩니다. 복음은, 예수님 십자가 앞에서 인간이 죄인 되었음을 기초로 해서 시작이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인간의 죽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안다 할지라도 그렇게 알게 됨 그 자체를 정당하고 의로운 것으로 간주해서 자신을 대견하게 여기기 일 수입니다. 이것조차 죄악이 된다는 점을 이들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복음을 증거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성을 증거하는 비복음적인 자들입니다.
[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
2001,4,28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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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세기 기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지요?
2. 골로새서 1:15절에는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에 의미는 무엇인지요?
3.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은 취소되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러한지요?
4.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인간이 타락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는지 궁금합니다. (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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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1:7)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고전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위의 11:7에서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은 15:49에 보면 어디까지나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해당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호칭되는 것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으로서 지니는 기간 내에서입니다. 하지만 15:49에 의할 것 같으면 '하늘의 속한 형상'이 입을 때까지 어디까지나 잠정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창세기 5:1-3에 나오는 두 개의 형상의 연결과 역순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아담이 일 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아담의 형상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 뒤에 나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그 뒤에 나오듯이 '∼죽었더라, ∼죽었더라'의 연속이지요. 그래서 성경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의 형상(흙에 속한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죽어 마땅한 운명이고- 하늘의 형상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에 모아져 있습니다. 성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품은 어디까지나 아담의 선악 체계를 물려받은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것도 없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1:15-16이나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명확하게 나옵니다.
(골 1:15-16)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고후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이 본문들에 의해서 반박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면 이렇게 됩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즉, 인간이란 인간을 위하여 창조된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 말해 왔듯이,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구원된 것이지 자기 구원론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론을 거론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형상론 거론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의 핵심으로서 천주교가 채용하고 있는 구원론임. 그런데 오늘날에는 교회 존재를 하나님의 계시로 보는 계시론의 변이와 더불어 이 하나님의 형상론을 기초로 해서 구원론을 삼는 개신 교회가 거의 전부라고 보면 됩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3에 나오는 형상론과 야고보서 3:9에 나오는 형상론을 상호 연결해 봅시다.
(히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약 3:9)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야고보서 3:9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으로 의해서 지음 받았다는 뜻이지 결코 성도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것도 흙에 속한 형상이기 때문에 그것도 없어져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의 성품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체를 내다보고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에 같은 인간이 함부로 저주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3에 보면, 분명히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본문을 상호 연결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10)
즉, 하늘의 속한 형상을 위하여 새롭게 지음 받은 자가 성도라는 것입니다. 흙은 속은 것은 무엇이든지 흙에 속한 것이기에 다 소멸되어야 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늘의 장막을 덧입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어떤 표현을 사용하던 상관없이 ('취소'라는 표현은 너무 제멋대로 입니다. 여기 얽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을 본받게 됩니다. 끝으로 빌립보서 3:20-21을 소개합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하나님에 대해서 감히 '아십니까?'라는 묘사는 언어도단입니다. 욥기를 한 번 읽어보시면, 하나님이 도리어 인간보고 '아느냐?'라고 다그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에 시험하기 위한 문제를 출제할 자격이나 권리조차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인간이 죄짓는 줄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 라는 물음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죄에 대한 모든 책임은 다 인간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라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할 아이디어가 죄 짓기 전까지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질의였는데 악마에게 예속되고 난 뒤에나 터져 나온 질의가 됩니다. (질문자를 지목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질의 그 자체를 두고서도 죄악의 경향을 살피시는 분입니다.
"네가 안들 그것이 너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느냐? 자기 쪽에서 자기 구원론을 달성해 나가겠다는 사고방식자체가 바로 죄의 결과이니라"라는 하나님 쪽의 답변을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은 긍휼히 여겨줄 자에게만 긍휼을 주고 은혜를 베풀 자에게만 돌아갑니다.(주님의 일방적 사죄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예정된 사실을 논리적으로 알고 있는 자가 구원된 자가 아니라 아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구원된 자입니다. 그래서 구원된 자는 귀하의 질문을 이렇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도무지 모르는 것이 없지요 그지요?" (로마서 8:29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부르시고"를 믿읍시다!)
[ 반론합니다 ]
2001,5,2 무명
고린도전서 11:7절을 15:49절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근거를, 11:7절의 전후 문맥이 허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창세기 5장의 아담의 형상을 '죽었더라'라는 말씀과 연결짓는 것이 성경본문의 해석입니까? 이 목사님 본인의 삽입니까? 그리고 이 목사님은 고후3:18절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요? 여기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한다'는 말은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모하여 가고 있다는 말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골3;10절에도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라고 했는데 이것은 지금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요?
[ 요한계시록에 있어 '인', '바다', '나팔', '시온산', '새 예루살렘']
2001,5,3 이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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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 요한계시록에서, 바다는 무엇이며, 인은 무엇이며, 나팔은 무엇이며, 시온산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새 예루살렘이란? (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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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나오는 표현들은 구약에서 언약과 관련된 용어들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때에 와서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언약 완성의 다양한 면들을 구약 용어로서 표현했다고 보시면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용어 해석은 반드시 언약적 내용을 표출해 내어야 합니다.
1. 인(印)
'인'이란 도장 찍었다는 표현으로서 선택에 대한 강렬한 하나님의 의사 표현입니다. 그런데 누가 선택되었는지를 아무도 알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단지 택함 받은(인 맞은) 자를 공개할 자격자는 언약 완성자(어린 양) 에게만 주어지게 됩니다. '인'을 뗐다는 것은 이제는 선택된 자를 공개할 단계이지 더 이상 추가적으로 포함시킬 때는 지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선택된 자를 공개하는데 있어 해당 성도의 운명과 위상과 당하는 고난과 그들을 공격하는 악의 활동을 합쳐서 인류 역사의 실체로 간주하여 공개하는 식으로 나타납니다. 즉 누구를 꼭 찝어 "너 택함 받았다"가 아니라 "이러 이러한 운명에 놓인 자이면 인 맞은 자이다"라는 뜻입니다.
2. 바다
요한계시록에서의 바다란,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신약적 재현한 묘사로 보면 옳습니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땅과 바다를 갈라놓으시고 바다가 그 경계선을 넘어 땅을 넘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노아 홍수 이후 무지개 언약이 그 좋은 예입니다) 만약 넘어오는 세력으로 바다가 이용된다면 이는 땅에 있는 어떤 특정 무리(여자의 남은 자손 계 12:7)를 노리는 악마의 의도적 활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악마란 본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자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종말 때 (예수님 오심 이 후 ) 하나님께서 악이 그 정체를 드러내도록 허용하시는데 그 악마가 노리는 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다는 점을 요한계시록은 밝히고 싶은 것입니다. 즉, 요한계시록에서의 바다란, 하나님이 정해놓은 선마저 도전해서 무너뜨리는 악마의 악한 세력성을, 언제까지고 안전치 못하는 종말적 인간 세계의 혼란스러운 땅의 실상과 대비시켜서 표현한 용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시온산
시온산은 구약 선지서를 통해서 보면 다윗 언약이 완전히 회복되는 정점에 나타나는 천국의 표현입니다. 시온산이란 원래 다윗 왕이 하나님의 은혜로(하나님이 친히 '붙여준 전쟁'을 통해서 승리함) 얻어진 장소로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영구히 기릴 증거의 장소로 본 곳입니다. 그런데 종말 때는 진정한 다윗의 후손이시고 왕이신 어린 양 예수님에 의해서 시온산은 이미 완성